18-154 무서움과 큰 기쁨이 엇갈린 채로 기쁜소식을 전하는 무덤을 떠나는 자 (마 28, 7-15)

그의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마 28, 1- 6)
마태복음 2018 2021. 11. 20. 12:16
18-153 그의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의 누우셨던 곳을 보라 (마 28, 1- 6)

〈마태복음 28, 7-15 개역한글, 신약성경 52쪽, 찬송가 179장 이 기쁜 소식을〉

(7) 또 빨리 가서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고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거기서 너희가 뵈오리라 하라 보라 내가 너희에게 일렀느니라 하거늘
(8) 그 여자들이 무서움과 큰 기쁨으로 무덤을 빨리 떠나 제자들에게 알게 하려고 달음질할새
(9) 예수께서 저희를 만나 가라사대 평안하뇨 하시거늘 여자들이 나아가 그 발을 붙잡고 경배하니
(10)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무서워 말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 하라 거기서 나를 보리라 하시니라
(11) 여자들이 갈 제 파수꾼 중 몇이 성에 들어가 모든 된 일을 대제사장들에게 고하니
(12) 그들이 장로들과 함께 모여 의논하고 군병들에게 돈을 많이 주며
(13) 가로되 너희는 말하기를 그의 제자들이 밤에 와서 우리가 잘 때에 그를 도적질하여 갔다 하라
(14) 만일 이 말이 총독에게 들리면 우리가 권하여 너희로 근심되지 않게 하리라 하니
(15) 군병들이 돈을 받고 가르친 대로 하였으니 이 말이 오늘날까지 유대인 가운데 두루 퍼지니라

(마 28:7, 새번역) 그리고 빨리 가서 제자들에게 전하기를, 그는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 나셔서, 그들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니, 그들은 거기서 그를 뵙게 될 것이라고 하여라. 이것이 내가 너희에게 하는 말이다." / ㉡다른 고대 사본들에는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가 없음
(마 28:8, 새번역) 여자들은 무서움과 큰 기쁨이 엇갈려서, 급히 무덤을 떠나, 이 소식을 그의 제자들에게 전하려고 달려갔다.
(마 28:9, 새번역) 그런데 갑자기 예수께서 여자들과 마주쳐서 "평안하냐?" 하고 말씀하셨다. 여자들은 다가가서, 그의 발을 붙잡고, 그에게 절을 하였다.
(마 28:10, 새번역) 그 때에 예수께서 그 여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무서워하지 말아라. 가서, 나의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고 전하여라. 그러면, 거기에서 그들이 나를 만날 것이다."
(마 28:11, 새번역) 여자들이 가는데, 경비병 가운데 몇 사람이 성 안으로 들어가서, 일어난 일을 모두 대제사장들에게 보고하였다.
(마 28:12, 새번역) 대제사장들은 장로들과 함께 모여 의논한 끝에, 병사들에게 은돈을 많이 집어 주고
(마 28:13, 새번역) 말하였다. "'예수의 제자들이 밤중에 와서, 우리가 잠든 사이에 시체를 훔쳐갔다' 하고 말하여라.
(마 28:14, 새번역) 이 소문이 총독의 귀에 들어가게 되더라도, 우리가 잘 말해서, 너희에게 아무 해가 미치지 않게 해주겠다."
(마 28:15, 새번역) 그들은 돈을 받고서, 시키는 대로 하였다. 그리고 이 말이 오늘날까지 유대인들 사이에 널리 퍼져 있다.



8절의 큰 무서움과 큰 기쁨을 각 번역에서 어떻게 표현했는고 하니

(마 28:8, 개역) 그 여자들이 무서움과 큰 기쁨으로 무덤을 빨리 떠나 제자들에게 알게 하려고 달음질할새
(마 28:8, 새번역) 여자들은 무서움과 큰 기쁨이 엇갈려서, 급히 무덤을 떠나, 이 소식을 그의 제자들에게 전하려고 달려갔다.
(마 28:8, 공동) 여자들은 무서우면서도 기쁨에 넘쳐서 제자들에게 이 소식을 전하려고 무덤을 떠나 급히 달려갔다.
(마 28:8, 쉬운) 여자들은 재빨리 무덤을 떠났습니다. 그들은 두려우면서도 매우 기뻤습니다. 그들은 제자들에게 이 소식을 전해 주려고 달려갔습니다.
(마 28:8, 현대인) 그래서 그 여자들은 두려우면서도 기쁨에 넘쳐 무덤을 급히 떠나 제자들에게 알리려고 뛰어갔다.
(마 28:8, 현대어) 여자들은 겁에 질렸으나 한편 기쁨에 가득 차서 무덤에서 뛰어나와 천사가 말해 준 소식을 제자들에게 전하려고 단숨에 달려갔다.

엇갈린 모순으로써 찢으셨으나 다시 싸매어주시는 하나님의 거룩이 덮친냥
분명히 마른 뼈인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군대인 이스라엘처럼

겁에 질렸으나 한편으로는 기쁨에 가득찬
절대저주이나 절대거룩처럼

두려움과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신
이것이 바로 앞의 에스겔 40장의 새성전이다 라는 겁니다

(빌 2:12, 개역)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집중하지 않는 주목
막살기를 포기하는 막살기처럼 말이죠

나는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생각한다 라는 종말의 기능이다는 겁니다

앞의 글 정답이 찾는 문제지 질문 말이죠
질문을 발견하는 겁니다 잃어버린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 찾기 라는 종말
부정적인 행함이 있는 믿음이다는 거죠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 한다 라는 데카르트의 원인에 따른 결과를 
전복시켜 뒤짚어버려서
나는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 나는 생각한다 라는 원인 없는 결과를 누리는 삶 뿐이다는 겁니다

이것이 주가 하신 것처럼 하라
즉 너는 빠져라 라는 겁니다
니가 했어도 니가 안 한 것처럼
주님만이 하셨음이라는 믿음을 증거해야지
믿음 있는 너를 증거하지 말고 뒤로 빠져라 라는 겁니다
이것이 교회 라는 피로 사신 교회이다는 겁니다
거꾸로 교회가 자꾸 피를 흘리는 희생을 강요하지 말라는 거죠

강요가 뭡니까 강요는 근처도 못가는 당위로써
아니하고는 못 배기는 존재 보다 앞선 당위 곧 기능이다는 겁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위한 기능이지
이스라엘 자신을위한 이스라엘 존재가 아닙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아닌 하나님과 재물을 썩은 우상을 섬기는 거지요
앞의 글 에스겔 새성전의 취지에서도 말했듯이
오늘날 교회도 구약 이스라엘이 한 짖을 그대로 따라가면서
오늘날 교회는 일만 악의 뿌리는 돈을 사랑하고 숭배하는데 미쳐 있습니다
인간은 절대로 안 변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기능은 그 말대로 존재의 사라짐으로써 
교회란 누락이 총화이듯이 교회존재의 사라집으로서 누락 잃어버림 삭제 배제로써
하나님의 일이 다 이루어졌음을 보게 되는 겁니다

인간의 죽음이 아니고서는 일하시지 않는다는 거죠

성도의 죽음으로써 일하십니다

그러니 이 찢겨지는 절대심판 절대저주임에도 불구하고
그 속에서 큰 기쁨 말도 다 할 수가 없는 기쁨

잉여의 극대치인 여성이 왜 여자가 아이를 낳음으로써 구원을 얻느냐

진짜로 아이 낳으면 구원 얻는다는 말이 아니라

창조주의 마음을 비로소 아는 겁니다

자기 밖에 모르는 철부지처녀가
임신을 해서 죽음이라는 절대저주의 고통을 격게 되는데

어라 말도 다 할 수가 없는 죽음이라는 고통임에도 불구하고
말도 다 형룡못할 기쁨으로써 아이가 태어난 그 생명을 품에 안은 그 기쁨이 바로
창조주의 기쁨을 맞보게 된다 라는 거죠

잠깐으로써 그 기능이 뭔가 아 이런것이구나를 안다 라는 거죠

이것 때문에
이 구원을 이루는 것 때문에
여자는 남자처럼 근육이 발달하는 딱딱한 몸이 아니라
아기 라는 생명이 자라는 부드러운 몸이어야 하기 때문에

부정의 부정의 몸으로써 생명을 살포시 껴안는 부드러운 몸이 되는 겁니다

이런 부정의 부정으로써의 몸인 여성의 몸이 율법을 지켜보세요 얼마나 딱딱한 몸이 되어서
생명을 품기는커녕 생명을 여럿 죽이게 될 것 아니겠냐 말이죠

여성 자체가 부드러운 천사와 같은 잉여인데

머슴아처럼 돈 돈 돈 나발 남편처럼 내 돈 내 돈 이라고 하면 얼마나 딱딱하냐 말이죠

여성의 기능은 돈이 필요가 없는 천사이거든요

남자가 율법을 어겨서라도 자기목숨을 던져서 사랑하고파 미치는
많이 탕감받으면 받을수록 사랑하고파 미치는 잉여 그 자체 잉여덩어리 인데

왜 자진해서 지옥의 모습을 못 보여줘서 안달이 났는지

남편 나발이 다윗에게 자기 재산 안 주고 자기 재산을 안 빼앗겼다 라고 좋아라 라고
잔치를 벌렸다 말이죠

그렇게 먹고 마시다가 딱딱한 돌이 되어서 그 이름처럼 나발 바보처럼

난 바로처럼 살았군요 강퍅한 바로왕처럼 살았군요

오타로 쓰다보니 잉여가 되어버렸넹 ㅋㅋㅋ

그래서 잔치 벌려서 술쳐먹고 10일 동안 딱딱한 돌이 되어서 10일 만에 죽었더라 말이죠

그의 아내 아비가일은 그런 부자인 돈 밖에 모르는 남편에
반대를 위한 반대로써

돈을 빼돌려서 가난한 자에게 주고 그렇게 다윗의 군대까지 대접을 얼른 함으로써
남편이 해야할 일을 대신 해서

남편 나발이 어리석은 모습의 반대의 모습으로써
지혜롭고 현명하게 종말의 행동을 함으로써
부정적인 행함이 있는 믿음을 증상물로써 나타냄으로써
지혜의 산물로써 남편 나발이 죽자마자 얼른 냅따 다윗의 둘째 부인으로써 시집을 가 버리는 겁니다

우와 여기서도 불의한 청지기 비유가 딱 맞더라 말이죠

사실 예수님의 비유가 다 반대를 위한 반대로써
어리석은 자와 슬기로운 자의 대립으로써

한 쪽 어리석은 자는 악한 무화과 나무로써
내 나라는 내가 지킨다 인 역사적인 사고방식으로 살 뿐이고

다른 한 쪽 지혜로운 좋은 무화과 나무는
어린아이 여고냐처럼 포로 잡혀가서
새언약 새성전의 기능을 맛보게 되는 초상집의 원리를 보여주는 겁니다

물론 포로잡혀가면 구원받냐 라는 질문이 또 나오겠지요
질문이 나오면 정답을 찾겠다 라는 자기 숙제로 보니까
은혜를 더할려고 죄를 짖는 식이겠지요

아니 정답이 덮쳐지니까 저절로 문제지가 질문이 그 증상물로 나타나요
은혜를 더할려고 죄를 짖는 또 자기 숙제라 또 의문의 반복이라
또 정답을 찾겠다 라는 식이고요

정답이 덮쳐졌으니까
은혜가 덮쳐졌으니까 종말적인 행동이 저절로 튀어나오는 겁니다

우쒸 누가 내 등떠밀었어 라고
주목하지 않는 집중이 튀어나오는
종말이라는 우연이 나오지

필연성을 구축하면 구축할수록 자기 꾀에 자기가 넘어가는 겁니다

우연인데 기능인데
자꾸 그 우연을 존재로 필연으로 바꿀려고 말이죠

그런 어리석음의 나발에게
현명한 지혜는 아비가일은 안 속아 넘어갑니다

십자가 라는 다 이루었다가 밝히 또렷히 보이는데 어딜 속이냐 말이죠

십자가가 이렇게 꽉찬 넘치도록 충만 만개 14만 4천 동서남북 333 333 333 333 충만한데
어딜 감히 근처도 못가는 남 7번 용서가 유대인 자기들 한 쪽 방향도 채우기는커녕
도리어 마이너스 통장이 될 판국에 믄놈의 12지파를 다 형성하냐 말이죠
인간 쪽에서 바치는 성전이 그래서 다 불태워져야 한다는 겁니다
새성전이 이미 떳기에 그 증상으로써 말이죠

바로 다윗이 누구관대 나 그 사람 모른다 라고 남편 나발의 어리석음처럼
잔칫집을 형성한 에덴동산 같았더라 라는 애굽왕 바로왕이
여호와가 누구관데 내가 보내주겠냐 라는 식이 되는 거죠

바로 이런 잔칫집 형성에 반대되는 주님의 새성전은 초상집에서 다 이루시는 겁니다
그것도 단번에 말이죠

오죽 후다닥 뭔가 휙 지나갔는냥
이 큰 무서움 큰 두려움 공포가 여전함에도 불구하고
큰 기쁨이 물밀 듯이 밀려오는 겁니다

우는 자가 복되도다 라는 말씀은 울면 복이 온다
웃으면 복이와요처럼 울면 복이 온다 라는 따로 따로 국밥이 아니라

아무리 봐도 울음 뿐이고 공포 절대저주 절대심판 뿐인
사막 한 가운데서 그것도 광야삼일길에서 다 다 다 탈탈탈 털린
요나의 큰 물고기 뱃속 어두운 깊은 바닷속 생명이라고는 눈꼽만치도 일체 없는
절망
스올
무저갱 지옥 속에서
하나님의 구원이 떠 버렸으니

공포 속임에도 불구하고 죽음 속임에도 불구하고 아니 기쁘고는 못배기는
큰 기쁨이 몰려와버려서 나를 압도 압사 시키는 겁니다

죽음이 나를 사로잡아 압사 시키는 것에 비해
족히 비교도 안 되는 압사 이다는 거죠

죽음은 나의 존재를 죽이고자 함인데
생명은 아무리 존재를 없애버려도 도저히 쪼개고 쪼개고 쪼개어도
절대로 쪼갤수 없는 나눌수 없는 잉여로써
넘치고도 넘치는 초과잉의 진리로써 태어나게 함이 바로
죽음 속에서 사막 광야 속에서 피어나는 생명이다는 거죠

그래서 주님은 공중의 나는 새를 보아라 심지도 거두지도 않는데
주님이 다 이루셨다 라는 종말의 기능을 보여주시는 겁니다

씨뿌리는 비유도 그러합니다
밭비유가 아닙니다
씨 뿌리는 주님에 의해서 다 결정나 버렸다 라는 겁니다

오로지 정답에 의해서 밝혀지는 땅들의 속성만이 질문지로써 등장하는 겁니다
하나는 길 가 하나는 돌짝밭 하나는 가시밭

그러나 좋은 밭은 30배 60배 100배 누굽니까?

안철수 아니 철수한 철수하지 않은 자 누 굽웁 니까를 씨가 드러내는 겁니다

바로 여고냐와 같은 어린아이 같은자가 좋은 무화과나무로써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맺는 거죠

웃끼게도 한국교회의 그 어떤 목사의 설교도 다들 거꾸로 반대로 이야기 하더라 말이죠
그 유명한 총신교수 정훈땡도 열매로 알리라 에서도 거꾸로 이야기 해요 글쎄
신학자가 이런 판국이니까
뭘 기대 하겠습니까

종말적인 기능 곧 새 마음 부드러운 마음 종말의 영인 성령이 부어지지 않으면
불교도 할줄 아는 말을 돈을 목적으로 하니까 다 할줄 안다고 우기는 겁니다

못합니다 라고 우는 것이 아니라 말이죠

못하는 것 뿐만 아니라 아예 거꾸로 행하고 있다 라는 것에 우는 자는 없으니까 말이죠

죄인을 부르러 왔는데 아무도 없어요

서로 의인이다 건강한 자이다 라는 자들 밖에 없어요
독사의 자식들인 거죠

오늘 본문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에 대한 천사들의 증거를 듣고서
인간들의 반응이 나오고 있습니다

인간들은 예수님이 부활하든 말든 관심 자체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천사가 개입이 되어야 조작을 못하는 겁니다
아예 관심은 없고 오로지 다만 그 부활이라는 사건을 소유만 할 수 있다면 소유하고픈 탐심만을 인간이 가지고 있기에 천사들만 활동케 하시는 겁니다

즉 인간의 모든 활동의 목적이 자기구원이 목적이듯이
부활을 소유하고파서 바벨탑도 쌓고
선악도 추구해서 하나님과 같이 될려고 한다 말이죠

그것이 자기 존재에 맞는 부활교리입니다

마리아와 마르다가 예수님의 부활 이심을 말하기 위해서 기능으로 동원이 되어야 하는데
나는 그딴거 관심 없고 오빠나 살려내고
부활 교리 믿는 나 존재의 부활만 소유하겠다 라는 심뽀들이

새성전에 의해서 불타야 하는 가짜성전으로서 다 드러나야 하는 겁니다

그러니 그 무너지고 불타는 절대심판은 안 거치는 것이 아니라
다 거쳤음에도 불구하고 절대용서 절대거룩으로써 예수님의 부활을 보도록 되어 있다는 겁니다

아무도 장대 높이 달린 인자를 쳐다 볼수 없도록
지금 광야에서 불뱀에게 물려 죽게된 그 상황만 심각하지

밤새도록 박박 끍어대는 내 아토피 피부병만 심각하지

누가 저 화목제물 따위에 눈이 돌아가겠냐 말이죠

내 코가 석자인데

남의 형편 돌아볼 겨를이 없다 말이죠

바로 그런 내 심각성 속에 더더더 더나은 심각성으로 장대높이 달린 인자로써 와야

내 속에 들어있는 마귀가 심었던 것들 죄 세가지를 토해내는
새성전의 기능을 그리고 뚜껑 덮어서 다시는 허물치 않겠다 라고 뚜껑덮어 피까지 뿌리시는
이 새성전의 기능으로써  

각기 제 길로 가는
자기 코가 석자인 자들에게서
예수님 자신의 숙제를 너끈히 해 내시는 참성전의 기능을 나타내시는 겁니다

오늘 본문도 그러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내 쪽으로 끌어오는 것도 불가능하고 실패하고
천사가 단절 
차단
가로막아버려서
이 예수님의 부활에 참여 자체가 안되는 단절성을 격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 큰 무서움이 덮쳐지는

절대저주 절대심판만 격게 되는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도 안되게
이 천사들이 기쁜소식으로써
빈무덤이 되셨다 라고 하는 겁니다
와서 봐라 봐 봐 보라카이 
그가 누우셨던 곳은 비 어 있~~었네

이것이 얼마나 기쁘기 짝이 없냐 말이죠
내 쪽으로 끌어올 필요가 없이 주님 쪽에 그냥 머물러 있어도
내 쪽으로 안 오고 내가 굳이 끌어 당기지 않아도
저절로 기쁜소식이다는 겁니다

빈무덤이 된다 라는 것이 이 얼마나 기쁘냐 말이죠

물론 존재는 하나도 안 기뻐요
빈무덤이 뭐가 기쁘냐 라는 거죠
존재에게서는 전혀
일도 안 와닿습니다

상관이 없거든요
다윗이 누군데? 나와 무슨 상관인데
여호와가 누군데 나 애굽왕 바로왕은 내가 모르는 신에게 나의 노예를 보내지 않겠노라

꼭 전재산을 내어놓지 않겠다 라는 부자청년
잔칫집 아들과 같아요

나 여호와가 누군지 나와 상관이 없다 라는 겁니다
부자청년이 말이죠

그저 나는 내 쪽에서 율법 지켰고 지켰고 그것만 주장하겠다 라고
자 율법 어릴적부터 지켰으니 구원의 조건에 맞냐 라고 물었는데

정답에게 물어본들 정답과 나는 상관이 없다 라고 해서 지킨 어릴적부터 지킨 율법이
무슨 소용이 있냐 말이죠

도리어 정답이가 찾아내는 질문아 문제아를 찾는 거죠
인간 쪽에서 신을 찾는게 아니라
그래 봤자 어 나랑 안맞네 라고 자기가 선택한 신이면 언제든지 자기가 버릴수 있다는 것이거든요

그런데 주님이 찾아낸 문제아는 아무리 문제아 여도 주님을 버릴수가 없어요
이미 처음부터 권리가 주님 쪽에서 넘어간 상태에서 만난 관계이니까 말이죠

이것이 나와 상관 있게 하시는 주의 살과 피 라는 정답이다는 겁니다
정답이 찾아낸 잃어버렸다가 되찾은 보석이다 라는 거죠

그런데 문제지가 찾아낸 정답은 언제든지 버릴수가 있는 겁니다
자기라는 문제지가 늘 수시로 변하거든요

십자가에 못 박히지 않으니까 늘 수시로 변해요
슈퍼맨에서 베트멘에서 앤트멘 갑자기 줄어들었다가 또 갑자기 커졌다가 말이죠

어떻게 해서든 십자가에 못 안 박힐려고 줄어드는 버튼 눌렀다가 거대해지는 버튼 눌렀다가

지도 자기가 왜 그러는지 몰라요

그래서 모든 인간을 하나로 규정해 버리는 
십자가에서 모든 인간을 못 박아 버리시는 겁니다

예수님이 달려 죽으심으로써 말이죠
다 이루신 겁니다

이제 인간에게서는 사적인 일이 없는 거죠
공적인 일 하나님의 일이 이미 다 이루심만 누리도록 되어 있는 겁니다

한 쪽은 진노의 그릇 값을 해야 하고
아무리 가룟유다를 욕해도 가룟유다의 기능을 해야하는 자들이 99.999999999999 무한대이고
아무리 나는 가룟유다 보다 더한 배신자 이다고 우겨도 베드로의 절대용서받는 기능을 해야하는 자들로써 나타나도록 되어 있는 것이 바로

새성전의 기능으로써 다 이루셨다 이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 양쪽은 우리는 다 알아야 하는 것이죠

그야말로 큰 무서움과 큰 기쁨을 동시다발적으로 이 모순된 간극을 누리는 겁니다

물론 결과적으로는 부요케도 마옵시고 가난케도 마옵시는 이 공백 0층 이라는 불도져가 밀어버린 첩경이 평탄케 된 종말의 빈공간을 말이죠

이것이 비어있는 아무리 봐도 공백인데
공백이면서 동시에 꽉차있는
나는 없고 그 속에 예수만 가득차 있는 초과잉적인 진리로써 꽉차있는 겁니다

사기치는 속이는 자 같은데 참 말을 하고
죽은 자 같은데 산자요
무능한 자 같은데 유능한 자요
자식 없는 죽은태 같은데 하늘에 자식이 많은 생명의 복된 태 이다는 겁니다

아기를 밴 적이 없는데 자식이 많고
아기가 하루도 없었던 적이 없는 늘 배불러서 임신을 한 여자인데도 불구하고 아이가 하나도 없는

이 종말이 상황 팔을 어긋맞게 된 상황을 부활사건이 펼치시는 겁니다

네 맞아요 앞의 글 새성전의 취지와 똑같아요

우리는 탐심이라는 우상숭배 때문에 부활사건을 시샘으로 여겨서 내 쪽으로 끌어당겨서
내 부활을 꿈꾸고 있지만

바로 그것이 자기 꾀에 자기가 넘어가는 식으로 작용하는 기능
존재에게서는 반드시 기능은 미끼가 되니까 말이죠

괜히 미끼를 물었다 말이죠

예수님의 부활은 도리어 모든 인간의 부활
바벨탑 부활탑 
모든 인간의 성전을 불태우기 위해서
바벨론 포로 잡혀간 줄도 모르고

어라 포로민들이 어라 여기서도 친근한 우상이 있네
여기서도 번제와 제사 드리면 되겠구나

바보들 나발들
이스라엘 기능 때문에 우상을 불태울려고 포로 속에서 새성전 새부활을 펼치시는데
불타는 것을 왜 붙잡냐 말이죠

자기를 위해서 큰 가마솥 든든한 뚜거운 난공불락의 성 캐슬로써 가마로 삼고
나는 그 속에 귀한 어린 양고기처럼 푹 담겨있을 줄 알았는데

도리어 나를 삶아 죽이는 팔팔팔 끊는 지옥불로써 큰가마로 삼았고
지옥불에 불타는 저주받는 자로 삼은 줄로 모르고

그것을 그 우상숭배의 성전을 거꾸로 해석한다는 자체가
이미 우상임을 말이죠

이미 심판임을

그러니 부활도 또 내 쪽으로 끌어당길 것 아니겠냐 말이죠

그 심판이 내 심판임을 제대로 된 심판주 덕분에 알게 되는데
이것을 자기가 알아서 긍정적인 사고방식으로 바꾸어서 해석을 하게 되니
니체들의 후손 답다 말이죠

더 패밀리 라는 넷플릭스에 나온 다큐를 보니까

남들이 다 아는 마귀집단을 본인들만 몰라요

그럼 다 안다는 남들은 그럼 마귀집단에서 벗어날 수 있냐 말이죠
없음에도 아무도 안 우는 겁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구나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라고
화로다 화로다 나여 나는 망하게 되었구나 라고 우는 자가 아무도 없어요

고맙게도 천사가 울도록 만들고자
성령의 놀라운 탄식으로써 다가오는 겁니다

자기 죽음에는 다들 울지만
예수님의 죽음에는 아무도 울지 않기 때문에
천사가 개입하는 겁니다

내 부활도 아니기에 하나도 안 기쁘고
내 죽음도 아니기에 이 십자가로 아무도 안 웁니다

그러나 그런 우리에게 천사가 개입해서
큰 무서움과 큰 기쁨을 펼치시는
새 마음 새 신 부드러운 마음을 만드는 믿음을 만드는 겁니다
새성전을 짖고 새 마음을 짖고 
측량해서 완벽하고 철저한 치수로 재듯이 완벽한 거룩을 입히시는 겁니다

그러니 말도 안되게 분명 화로다 나여 라고 했는데
갑자기 언제 그랬는냥 뻔뻔하게 저를 보내달라고 하듯이

아니 죽을텐데?? 죽는거 하나도 두렵지 않습니다 라고 말이죠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구나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하고 했는데
언제 그랬는냥 바로 로마서 8장 넘어가자마자
예수 안에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 라고

말도 못한 큰 기쁨이 몰려와서 압사당해 죽을 판국이다 라고

아까 로마서 7장 마지막 부분의 구절에서 말한 죽음은 족히 비교도 안된다 라고

아이를 낳는 고통이 죽음 속임에도 불구하고
막상 아이를 낳아 품에 안은 엄마의 기쁨은 언제 그랬는냥
싹 다 잊어버리고 기뻐서 기뻐서
그 아기의 울음소리가 기뻐서
물 밀 듯이 밀려오는 큰 기쁨에 압도 당해 버리는 겁니다
감당이 불 감당이다 말이죠

그러니 여자는 공주대접만 받고픈 잔칫집을 확 부수어 버리고
죽으면 죽으리라 라는 왕비의 아름다운 진리성을
남자를 바보 같은 저 나발 돈 밖에 모르는 남자로 만들지 말라 라는
여성의 기능을 말하는 거죠
여성성의 진리의 기능을 말하는 거죠

뭐 요즘은 아예 이런 기능에 관심 없고 존재만 우기는 세상이니까
아예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인데 라고 해 버리면 그만이니까 말이죠

뭐 여호와가 누구관데?
뭐 나와 무슨상관인데 라는 말을 듣고 나서는 것이 바로 희숙대리
바로 은혜요 긍휼이요 이랬다가 저랬다가 왔다갔다 라는 히스테리 이다는 겁니다

그래서 주님이 배신하시는 하나님으로써 성전도 불태워 버림으로 인해서
이 모욕적인 구원을 펼치시는 겁니다

안그러면 인간들은 자기들이 세운 공든 탑 성전을 우상숭배로 남근으로 숭배하니까
돈을 사랑할수 밖에요

오홀라 오홀리바 처럼 말이죠

부활도 남근사상으로 끌어올려고 하는데 어라 불태워 버렸넹

그건 중세 때에 과학이 발달하지 않았던 시대이지 요즘 같은 세상에 누가 그러냐~~~
아 그래서 샤머니즘과 같은 닭그네를 오늘날까지도 외치냐 말이죠
깜빵간지가 몇 년인데 아직도 말이죠

이 오홀리바 라는 음녀같은 예루살렘 딸을
여성의 진리성을이스라엘에게 피 바른 그 피의 기능을 비록 음녀가 되었지만긍휼 속의 긍휼로써의 하나님이 죽으심으로써 (참성전)이스라엘을 깨우시고 일으키시고 이 흑암의 백성에게 빛을 비추시는 겁니다

주님이 괜히 원뿌리인 애굽 1300년 전에 죽은 애굽왕 바로(파라오)왕을 지옥에서 소환하신게 아니다 말이죠

자신의 주 되심 왕되심을 말하기 위해서 한세트로써 모든 인간 행동의 원천 원뿌리를 소환하시는 겁니다

새 마음을 주시고자 말이죠
구하고 찾고 두드리면 성령을 주시겠다 라고 말이죠

다니엘서에 나오는 네 짐승 네 왕들은 오늘날 모든 국가의 임금 대통령 총리 왕의 사고방식의 원뿌리입니다 단 한발짝도 벗어난 적이 없어요

뜨인돌 되신 예수님에 의해서 무너지고 불타야 하는 모습으로써 등장하고 나타났다가 사라져야 할 자들로써 증상물로써 나타나는 겁니다

이재땡도 마찬가지고 윤도리도리도 마찬가지이다 말이죠

예외가 없다 라는 것은 그들은 모두다 이 다 이루심 앞에서 다 실패자로 이미 규정이 되어버렸으니까 말이죠

이것이 기쁜소식이다 말이죠

우리는 그 종말을 그 공백을 미리 앞당겨서 누리는 겁니다

분명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음에도 말이죠

다윗이 왕의 자리에 앉으니까 그거 뿌수어서 죄인의 자리에 낮추심으로써
부요케 되어 교만치 못하도록 공백을 보고
꺽으신 뼈로 기뻐하는 여디디야 여디디야 여디디야 선물이라는
아기 인자를 구함으로써 임마누엘을 구함으로써 사는 겁니다

안 그러면 정직한 영
새 마음이 없으면 다윗이든 나발이든 뭐든 다 지옥이라고
꺽으신 뼈로 기뻐하게 만드시는 겁니다 믿음을 맹글어요 글쎄

이것이 신앙이라는 외부에서 벌어지는 숙제입니다

인자가 죽지 않으면 아무도 나음을 입게 될 자가 없으니까 말이죠

그래서 모세가 율법의 대표자로써 변화산에 느닷없이 1300년 만에 나타나고
엘리야는 900년 만에 나타나서

어서 주님 죽어주세요 라고 변론 하는 겁니다
신원하는 겁니다
율법의 대표자 기능입니다

율법의 완성인 사랑의 기능을 해 주소서
율법은 죽이는 기능이고 율법의 완성은 다시 싸매어 주시는 기능이니까 말이죠
그 찌른 칼이 나를 낫게 하는 겁니다

안그러면 율법이 없는 이방민족처럼 마귀에 의해서 시체가 되어버리면
왜 죽어야 하는지
왜 심판 받아야 하는 지도 모르고 지옥에 갈 뿐이다 말이죠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예수님의 숙제로

지난주였던가요 지지난주에 어머니께 예배 도중에 아무리 아무리 천만번 억만번 이야기 해도
말도 안되고 신비롭고 소름이 돋는 말이

아니 저 예수님이 상함을 입었는데 왜 내가 낫느냐 라는 겁니다
이것이 기쁨이래요 글쎄

큰 기쁨
어떻게 그가 찔림을 받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게 되냐 말이죠

몸이 하나로 붙어있지도 않고 따로 따로 인데

예배 도중에 갑자기 소름이 쫘악 펼쳐져서 닭살이 막 돋을려고 해요
너무 너무 말도 안되는
아무리 내 쪽으로 끌어올려고 해도 안되요 안돼 ~~~~~~

이 정도로 아무것도 한 것이 없게 되었는데도 불구하고
믿음으로써 확 덮쳐져 버리니까

이 말도 안 되는 것이 저절로 믿겨진다 라는 것 조차도 말이 또 안되요

믿음을 종교꾼들은 말이 되게 만듬으로써 결국은 돈 잔치로 잔칫집으로 만들어버리지

초상집이라는 예수님의 피를 말하지를 못해요

바보들 나발들 돌삐 우상들

나누어 질수 없는 잉여를 기여이 나누어버려서 자기쪽으로 끌어당겨 버리니 돌이 되어버리고
우상이 되어버리는 겁니다

잉여는 아무리 나누어도 나누어지지 않는 잉여 그 자체로써의 초과잉적 진리인데 말이죠

인간 쪽에서 바치는 제물 번제 제사로 인해서 성전이 졸지에 두 조각나 버렸어요
주님 쪽에서 넘어오시는 성전기능을 막을려고 자기 쪽에서 바치니까 나누어져버려 돌이 되어서
불타 없어져 버리는 겁니다

그러나 불타지 않는 성전이 이미 완성이 되었다 라는 것을 그들은 모를 정도로
자기자신에 대해서도 몰라요

이미 확정 되어버렸기에 그 새성전의 정확한 치수를 재면서
7에 70번의 용서로 다가오는 또렷함이지

안그러면 희미하고 의문의 반복인 언제 완공될지도 모르는 아직도 46년 동안 짖고 있는
인간 쪽에서의 성전은 졸지에 잉여를 잉여되지 못하도록 기여이 두 조각으로 성전을 쪼개어 버리는 겁니다

하나님 니는 하나님의 일 해버리고
나는 내 대로 내 일을 하고

두 조각 기여이 내 버려요

다 이루었다 라는 한 몸 한 마음을 개무시하면서 말이죠

그러니까 부자청년처럼 거룩한 율법을 지킬려고 더러운 것을 피하다 피하다
아이구 이 예수라는 양반도 정신병자 이구만
어서 피해야지 등돌리고 근심하고 돌아서는 겁니다

안 피하면 전재산 날라갈 판국이다 말이죠
자기 몸이 날라가 버려요 
거룩한 성전이 불타요 교회 불타요 무너진다 말이죠

돌 위에 돌 하나도 남김 없이

전재산을 전 부  다 ~~~~~~~~~

예수님은 자기 목숨을 아끼지 않고 다 내어주셨잖아요
그러니 한 몸, 하나가 되지 못하는 마음은

이 완벽한 치수 앞에서 명함도 못 내미니까 피해 도망쳐 버리는 겁니다

어딜 감히 함량미달의 되도않는 가짜거룩을 들이내미냐 말이죠

주님은 창기 세리 강도와 하나가 되시고자
하늘 영광을 버렸고
죄인의 친구로써 하나가 되었는데

정작 그 옆에서 인간들은 자기 거룩을 쌓고자
금식하고 손씻고 먹고 사마리아인과 상종치 않더라 말이죠

정작 상종치 않음을 당해야 하는 놈들이 도리어 상종치 않아요 글쎄 ㅋㅋㅋ
자 이 정도로 우리는 가짜 중에 가짜임을
다 이루심 앞에서 규정이 되어버렸어요
뭐 그런데 너는 죄 지을줄 모르지 나는 죄 지을줄 안다 라는 것이
자기 꾀에 자기가 넘어가는 식이 되는 줄도 모르고 말이죠

내 쪽으로 끌어당길수 있는 것이 성경에 단 하나도 없어요

어딜 건방지게 ~~하라 ~~하지말라를 지킬려고 달려드냐 말이죠
그럼 소는 누가 키우고 말이죠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의롭다 여김을 받았음을 믿겨져야
믿음이 믿음으로 이룬 것이지
또 그것을 내 쪽으로 끌어당겨 본들 3초도 못 가요

아니 사도바울 그렇게 말한 사도바울이 스데반도 죽이고
예수님을 죽이는 무대설치 총감독이였는데
그런 자도 용서 받았는데

이것이 너끈한 미쁘~~~~~~~~~~~~~~~~~~~~~~~~~~~~~~~신 믿음이의 숙제인데

왜 나의 되도 않는 믿음으로 끌어오냐 말이죠

3초 짜리 기대하지 마시고
주님이 자신의 믿음으로 믿음 떨어지지 않도록
불을 통과하고 죽음도 통과한 그 믿음을 주셔서

뻔뻔스럽기 짝이 없도록
너가 나를 사랑하느냐 라는 질문을 발명하셔서

이 정답이 만들어 낸 질문에
주여 그 질문 저 아닙니까 라고 뻔뻔스럽게 대답하는 겁니다

나는 그런 말 할줄도 모르는 벙어리이고 소심하기 짝이 없는 겁쟁이 임에도 불구하고
누가 등 떠밀어서 물에 빠진 사람 건져내어서

우와 C ~~~~~~~~~~~~~~~~   언놈이 등 떠밀었어 라고

집중 하지 않은 주목으로써
심지도 거두지도 않았는데

(마 6:26, 개역)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 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처음부터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위한 하나님의 군대로써 자신의 약속을 발라서
피 발라서 이스라엘을 이스라엘 되게끔

이스라엘의 숙제가 아닌
오로지 자신의 숙제로써

이 예수님의 부활 속에 집어넣겠다 라고 하시는 겁니다

이 코스대로 우리는 빈무덤으로써 주님이 다 이루신 그 코스를

덜 이루어서 밟는게 아니라

어떻게 다 이루셨는가를 보기 위해서 다시 목격하는 증인으로써

우와 우와 닭살 돋우면서 우와 우와 라는 새찬양을 부르게 하시고자

처음부터 빈무덤이였다 라고 알려주시는 이 섬김만을 일괄되게 하셨음에

감사하면서 큰 무서움과 큰 기쁨으로써 새성전의 탄생 속에 놓이게 하시는 겁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통해서 5천명이나 먹고 12 광주리가 남았다 라고 했습니다
얼마나 기뻣을까요? 12지파가 그렇게 남겨지는 잉여로써 나타나는 겁니다

그러나 그 큰 기쁨이 다시 절망으로 큰 무서움으로 만드시는 기적 또한 펼치십니다
그렇게 오병이어의 기적을 맛보고 예수님의 뒤를 따라간 사람은 단 한사람도 없었다 말이죠

인간의 기적은 내 기쁨이요 내 부활이요 내 구원으로만 끌어당기는
내가 위대해야 한다는 기적으로만 끌어당길줄 알았지

아무도 예수님의 뒤를 따라 가지 않았다 라는 사실로써 이 기적마저도 들추임조차도 
당해야 하는 겁니다

그래 맞아 나는 늘 예수님을 이용해서 나를 위대하게 만들고자 하는 뭘해도 가짜 밖에 안된다 라는 것을 주님 쪽에서 들통나게 하셨어

이렇게 되어야 주님 홀로 다 이루심 앞에서 들통나는
의인이 아닌 죄인으로써 부르시는 겁니다

안그러면 또 주님과 무관한 자기의 일을 따로 할테니까 말이죠

다 이룬 것을 왜 자꾸 할려고 할까요?
그 정도로 우리는 우리 자신이 누구인줄 모르고 있고
자기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하나이다 라는 겁니다

자기의 영역을 따로 구축한다는 자체가
자아라는 우상이지만 정작 빈 말 뿐인 뭘 해도 거짖이니까
빈 말로써 들통나도록 하시는 기적으로써
각기 제 길로 가는 양 같음의 티를 팍팍 내시면 됩니다

그렇게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하지 않은 기쁨을 따로 마련하고자 했던
나를 위대하게 만드는 기쁨을 따로 구축하는 본능을 본능에 충살해 ㅋㅋㅋ
들통당함으로써

바로 그런 기적 주님의 숙제로 들통내심으로써
따로 챙길려는 기쁨을 불태우시고 주님의 큰 기쁨으로 주님의 절대저주 절대심판으로 큰 무서움을 펼치심 앞에서 홀라당

나의 성전이 불타 없어지는 기쁨
그런 기적
돌 위에 돌이 하나도 남지 않는 기적을

주님이 새성전으로 만드셨다 라는 것이 진짜 기쁨으로 다 이루었다 라고
지금 당장 죽이셔도 괜찮을 정도로 기쁘기 짝이 없습니다 로 만드시는 주님의 숙제가
내 속에서 펼쳐진다 라는 겁니다

이미 우리는 졌고 실패했고 쫄딱 망했다 라는 이 종말을 선물로 받았기에 말이죠

사도들을 죽이시기로 작정한 것이 복음이듯이
우리들 또한 죽이시기로 작정한 기쁜소식이라는 것을

분명 심각한 것인데
죽음 문제가 말이죠
그래서 내 열심히 특심이다 라고 심각했는데
오로지 나만 남았다 라고 실패했다 라고 했는데

이스라엘은 처음부터 주님의 성공작이였음을
7천명 남겨놨다 라고
죽어없어져 내 곁에 없다고 시위하던 데모하던 엘리야 앞에

큰 지진도 아니고 번개도 아닌

들낄랑 말랑 한 세미한 음성이 온 우주를 덮을 정도로 넘치는 음성으로써
이세벨에게 우상에게 절하지 않은 그 정도로 거룩한 7천명을 다시 살려서 내 옆에 있다 라고 했을때에

아뿔사 ~~~~~~~~~~~~~~~~~~ 이것이 주님의 숙제로 엘리야가 믿음을 선물 받은것처럼
우리 또한 매일 매일 들통당하는 기적을 매일 매일 누림으로써

이 다 이루심의 증상물로써 나타나는 주님의 믿음을 부활을 생명을 누리는 겁니다
아무리 죽음을 당해도 매맞아도 저주 속에 놓여져도 말이죠

우리는 무덤에 머물러 있을 수가 없습니다
처음부터 빈무덤인 운명으로써

이 예수님의 새성전 되심을 외치는

성전을 헐고 3일만에 짖는 성전을

사람들의 손으로 짖는 성전 앞에서
국가 
가정 
사회 
종교 
조직 
그 어떤 인간의 몸 신체 앞에서 외치도록 되어 있습니다

이 기쁜 소식을 온 세상에 전하시기를 ~~~~~~~~~~~~~~~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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