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념과 복수심


인간의 믿음이란 복수심 이다

인간의 행함(하라 하지말라)이란 복수심 이다



2010년 9월 3일 금요일 오후 2:46:35   김대식





맨 프럼 어스(The Man from Earth).2007


참 특이한 영화를 봤다.

3일에 걸쳐서

밤에 잠들기 전에 찔끔 찔끔 보다가 드디어 어젯밤에 다 봤다. 이상하게 볼때마다 분명 이어서 보는데도 불구하고 새로운 전개가 펼쳐졌다. 반전은 아닌데 반전 같은 느낌?

이 영화는 각 학문 분야의 최고봉인 친구들을 모아 놓고 마지막으로 이별을 위해 떠나는 자리를 마련함으로써 나누는 대화 이다. 아마 하루 밤의 이야기 인 것 같다.

생물학자, 신학자, 정신분석가, 하버드 이야기 나오는 것 보니 최고봉들의 사람들만이 친구들인 것 같다. 각 분야의 전문학자들 ....

이 영화 포스터를 보고 별 느낌이 없어서 다운 자체를 하지 않았다.
포스터를 보자마자 케이-펙스 (2001) K-PAX 랑 비슷할꺼다 싶어서 아예 손도 안 댔다.

어 그런데 댓글을 보니 뭐 불교, 뭐 기독교, 뭐 최고의 영화라는 둥, 그 말에 확 땡겨서 봤다.

처음에는 지루하고 재미 없다. 그러나 내용이 뒤로 갈수록 황당하다보니 몰입이 된다.

참 기발한 상상력이라고나 할까?


그러나 주인공 보다 나는 조연들의 모습이 더 재미있었다.

믿음 곧 신념이 한순간에 몇시간 만에 무너져 버리니 웃겨서 이다.

학문의 최고봉인 사람들은 그 학문이 자신의 신념으로 똘똘똘 뭉쳐져 있다.
그 딱딱한 신념이 무너지면 인간은 죽는다.

그것을 이 영화의 주인공은 건드려 보는 것이다.

주인공의 말이 진짜냐 가짜냐 는 중요하지 않다.
확인할 길이 없는 신화성이다.

문제는 실제요 현실이다고 우기는 신념이 가득한 자신의 학문에 자부를 느끼는 자들이
웃끼지도 않게 다 무너진다는 것이다.


우와 나는 여기서 신념이란 결국 복수심 이구나 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번주 월요일 였던가?
[용서란 없다 2009 ] 라는 영화를 다운받아 놓고도 여지껏 미루다가 별로 땡긴것도 없이 그냥 볼게 없어서 봤다.

어 그런데 내용이 바로 정의를 앞장세운 복수였다.

그리고 오래전에 봤던 [올드보이] 라는 영화를 생각하게 되었다.


이 세 영화를 한번 역어 보면

신념이란 결국 복수심이다 라는 것을 알수 있다.

신념은 하라 하지말라로 똘똘똘 뭉쳐져 있는 허깨비 이다.
그 행함이 와르르 한 순간에 무너져 버리니까

선악이 화를 버럭 내 버린다.
행함이 버럭 화낸다.
믿음이 안색이 변하여 강퍅케 된다.

그리고 선악을 건드렸다 라는 이유로 인간은 복수를 펼친다.
그것도 정의의 이름으로 말이다.

정의란 곧 복수심이다.
신념도 곧 복수심이다.
신앙도 곧 복수심이다.
하라 하지말라 도 곧 복수심이다.
왜냐하면 선악을 건드렸기 때문이다.

너도 나도 자신의 선악을 건드리지 말자 라고 무언의 법칙이 있는데
왜 남의 선악을 건드리는가 하는 점이다.

(결국  무화고나뭇잎처럼 한순간에 와르르 무너질 되도않는 것으로 아무리 가려본들
그 연약하기 짝이 없는 신념은 다 가을 낙엽처럼 헛되고 헛되고 헛된
그야말로 허무하기 짝이 없는 것이다. 허구다 허구
인간의 신념 보다 더 허구적인게 어디있는가?
헛되고 헛되니 다 헛되다 )

(전 1:1, 개역) 『다윗의 아들 예루살렘 왕 전도자의 말씀이라』
(전 1:2, 개역) 『전도자가 가로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올드보이 라는 영화를 보면

정말 개같은 인간이 순수하기 짝이 없는 누나를 겁탈하고 (맞나? 기억이 가물한데?)
그 성추행의 수치심으로 자살한 끔찍한 사건의 흡집을
동생은 기필코 복수를 하고자 한다.

그리고 그 복수에 정당한 법적 요소를 끌어 당긴다.
그래서 자신의 복수는 참으로 정의롭다 라는 것이다.

예수님의 복수가 따로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자신의 신념으로 가득찬 복수를 펼친다.

예수님의 믿음이 따로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자신의 믿음으로 거룩을 가장한 복수를 펼친다.

그리고 가장 수치스러운 부끄러움을 건드린다.
평생 지워지지 않는 근친상간의 금지영역인
인간의 선악 뿌리를 건드려 버린다.

이것이 복수의 목적이 되어서 결국은 누나의 억울한 죽음에
정의의 법을 실행한다.

그러나 웃기는 것은 정작 올드보이 주인공은 외부의 도움으로 인해
과거의 기억을 지워 버린다.

결국 복수가 소용이 없다.

선악을 넘어서 버리면 의미 없는 것이다.


하라 하지말라를 넘어서 버리면 의미가 없다.
죄책감이고 뭐고 다 소용 없다.

그래서 하라 하지말라 로 선악에 다 가두고
그 선악이 의미 없음을

율법 외에 한 의가 와서
남을 사랑하는 상한심령이 율법을 완성해 버린다.

결국 마귀의 작전은 실패다.
진짜 복수심이 펼쳐진다.

상한심령에 대한 복수심이다.


이 세 영화를 떠올리면서 이런 생각을 해 봤다.

[올드보이 (2003) Old Boy]  [용서는 없다 (2009) No Mercy]
[맨 프럼 어스 (The Man from Earth) 2007]


인간의 믿음이란 복수심 이라는 것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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