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나무 : 트리 오브 라이프(The Tree Of Life.2011)

2011년 10월 15일 토요일 오후 4:08:35  김대식



지난 주에 이 영화를 봤다.

생명의 나무 라고 해서 또 성경과 연관되는가? 싶어서 봤다
처음부터 욥기 내용이 나오길래 오 ~~ 했지만
정작 내용은 딴 판이다.

가인의 이야기와 욥기의 내용을 썩어놓은 듯한 느낌이다.

오이디푸스 내용인데

부조리에 대해서 수긍하라 라는 뜻이다.

또 뭐였더라? 아 아마데우스 라는 영화 모차르트에 대한 이야기였는데
그 영화내용도 결국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 대한 이야기다.

(욥 38:4, 개역)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 네가 깨달아 알았거든 말할지니라』
(욥 38:7, 개역) 『그 때에 새벽 별들이 함께 노래하며 하나님의 아들들이 다 기쁘게 소리하였었느니라』

욥기 38장 4절 7절의 자막으로 시작하는 이 영화 생명의 나무 The Tree of Life 2011 는 어떤 가정의 아이의 죽음을 두고서 또 삼형제의 맏형으로써
둘째의 죽음을 트라우마로 격는 가족간의 갈등을 과거와 현재를 오락가락하면서 보여주고 있다.

장엄하게 펼쳐지는 대자연의 신비 그리고 더욱더 확장된 우주의 신비, 별들의 향연 앞에서
인간의 개인적인 상처는 과연 무슨 연관성이 있는가? 라는 식으로 접근한다.

(욥 38:1, 쉬운) 『<여호와께서 욥에게 물으시다> 그 때 여호와께서 폭풍 가운데서 욥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욥 38:2, 쉬운) 『"무식한 말로 나의 뜻을 어둡게 하는 자가 누구냐?』
(욥 38:3, 쉬운) 『너는 허리띠를 동여매고 대장부처럼 일어나서 묻는 말에 대답하라.』
(욥 38:4, 쉬운) 『내가 땅의 기초를 세울 때 너는 도대체 어디에 있었느냐? 네가 그렇게 많이 알거든 대답하라.』
(욥 38:5, 쉬운) 『누가 그 수치들을 재고 줄자를 대어 보았느냐?』
(욥 38:6, 쉬운) 『땅의 기초를 무엇으로 단단히 고정시켰는지, 그 모퉁잇돌을 누가 놓았는지 아느냐?』
(욥 38:7, 쉬운) 『그 때에 새벽 별들이 노래하였고, 모든 천사들 이 흥에 겨워 소리를 질렀다.』
(욥 38:8, 쉬운) 『바닷물이 태를 열고 나오는 아기처럼 넘쳐 흐를 때, 바다가 넘치지 못하도록 ` 한계를 정해 놓은 자가 누구냐?』
(욥 38:9, 쉬운) 『그 때 나는 구름으로 바다를 덮고 짙은 어둠으로 그것을 둘러쌌으며,』
(욥 38:10, 쉬운) 『바다에 경계를 지었고 그것에 문빗장과 문을 달았다.』
(욥 38:11, 쉬운) 『그 때 나는 바다를 향하여, '너는 여기까지만 오고, 더 이상 넘치지 마라 너 교만한 파도야, 멈추어라!' 하고 명령했다.』
(욥 38:12, 쉬운) 『네가 태어난 이후부터 한 번이라도 아침에게 명령하여, 동을 트게 한 적이 있었느냐?』
(욥 38:13, 쉬운) 『그래서 새벽이 땅의 끝까지 빛을 비추어 악을 행하는 자를 멈추게 한 적이 있느냐?』
(욥 38:14, 쉬운) 『해가 비춰진 땅이 도장 찍힌 진흙처럼 생겨나고, 그 모양이 주름진 옷과 같이 되었다.』
(욥 38:15, 쉬운) 『악인들에게 빛을 주지 않고, 그 치켜든 팔을 꺾을 수 있느냐?』
(욥 38:16, 쉬운) 『너는 바다의 샘에 가 본 적이 있느냐? 깊은 바다 계곡을 걸어다녀 본 적이 있느냐?』
(욥 38:17, 쉬운) 『죽음의 문이 네게 나타난 적이 있느냐? 죽음의 그림자가 있는 문들을 본 적이 있느냐?』
(욥 38:18, 쉬운) 『너는 지구의 구석구석을 다 알고 있느냐? 알거든 대답하여라.』
(욥 38:19, 쉬운) 『빛이 어디에서 오고, 어둠이 어디로 가는지 아느냐?』
(욥 38:20, 쉬운) 『그것들을 네 집으로 데리고 갈 수 있느냐? 그것들이 사는 곳을 아느냐?』
(욥 38:21, 쉬운) 『너는 그 때 태어나서 그것을 아는 사람인가? 나이가 많아서 그런 것들을 아느냐?』
(욥 38:22, 쉬운) 『너는 눈 창고에 들어가 본 적이 있느냐? 우박 창고에도 가 보았느냐?』
(욥 38:23, 쉬운) 『그것들을 어려운 때, 전쟁이나 싸움에 사용하기 위해 내가 보관하고 있다.』
(욥 38:24, 쉬운) 『너는 번개가 흩어지는 곳이나, 동풍이 땅에서 흩어지는 곳을 알고 있느냐?』
(욥 38:25, 쉬운) 『누가 폭우의 길들을 내었느냐? 천둥의 길을 누가 마련했는지 너는 아느냐?』
(욥 38:26, 쉬운) 『사람의 흔적이 없는 곳, 아무도 없는 사막에 비를 내리고,』
(욥 38:27, 쉬운) 『더없이 메마른 땅에 물을 대고, 그 곳에 싹을 돋게 하는 이가 누구인가?』
(욥 38:28, 쉬운) 『비를 낳은 아버지가 있느냐? 이슬 방울은 누가 낳았느냐?』
(욥 38:29, 쉬운) 『얼음은 누구에게서 나왔으며 하늘의 서리는 어디에서 태어났느냐?』
(욥 38:30, 쉬운) 『물을 돌처럼 단단하게 얼리고, 물의 표면을 꽁꽁 얼게 하는 이가 누구인지 아느냐?』
(욥 38:31, 쉬운) 『너는 묘성을 한데 묶고, 오리온 별자리의 고리를 풀 수 있느냐?』
(욥 38:32, 쉬운) 『네가 별 무리를 계절에 따라 이끌어 내고, 큰곰자리, 작은곰자리 별 무리를 인도할 수 있느냐?』
(욥 38:33, 쉬운) 『네가 천체의 운행 법칙을 아느냐? 네가 땅의 자연 법칙을 세웠느냐?』
(욥 38:34, 쉬운) 『구름에게 소리를 질러, 물이 네게 홍수처럼 덮이게 할 수 있느냐?』
(욥 38:35, 쉬운) 『네가 번개에게 '번쩍거리며 나가라!'고 명하면, 그것이 '예, 그대로 하겠습니다' 라고 답하느냐?』
(욥 38:36, 쉬운) 『누가 가슴에 지혜를 주고, 마음에 총명을 주었더냐?』
(욥 38:37, 쉬운) 『누가 지혜가 뛰어나 구름의 수를 헤아리겠느냐? 누가 하늘의 물병들을 기울여』
(욥 38:38, 쉬운) 『먼지를 덩어리가 되게 하고, 흙을 흙덩이가 되게 할 수 있느냐?』
(욥 38:39, 쉬운) 『네가 사자의 먹이를 잡을 수 있느냐? 사자들의 굶주림을 채울 수 있느냐?』
(욥 38:40, 쉬운) 『사자들이 굴 속에 웅크려 있고 은신처에 숨어서 기다릴 때,』
(욥 38:41, 쉬운) 『까마귀 새끼가 먹이가 없어 이리저리 날며 나를 향해 까악까악 울부짖을 때, 누가 까마귀들에게 먹이를 주는가?"』


양자물리학자들의 다큐를 본적이 있다고 했듯이

빌어먹을 대체 우리가 아는 게 뭐란 말인가1 What The Bleep Do We Know!? (2005)
빌어먹을 대체 우리가 아는 게 뭐란 말인가2-1 What The Bleep? Down the Rabbit Hole (2006) 1
빌어먹을 대체 우리가 아는 게 뭐란 말인가2-2 What The Bleep? Down the Rabbit Hole (2006) 2

인간은 정말로 아무것도 모르면서 안다고 말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모순덩어리로 가득한 그 부조리 그 자체이면서 정작 자신에게 닥쳐진 부조리를 바라볼때는 본심의 내막이 터져나오는 것이다. 그 본심을 끄집어 내어 주시고 들통나게 해주시는 것 자체가 오히려 복이다.

욥이 그래서 자신의 상처 보다 그 애매한 고난 보다 더욱더 또렷한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을 보고서 재를 뒤짚어 쓰고 입을 함구한다.

쥐뿔도 모르면서 아는 척 했던 자신이 부끄럽고, 고쳐달라고 아프다고 한 자신이 도리어 화로다 망하게 되었구나 라고 자신의 목숨을 자신의 생일을 자신이 태어난 모태를 저주한다.

이것이 매일 매일 나는 가짜이다 라는 처음자리로 되돌려 놓는 십자가이다.

십자가는 대상이 아니다. 십자가로부터의 공격 대상이 도리어 나 이다.

나 라는 부정할수 없는 존재로부터 믿음의 대상이 된 십자가는 가짜다.
도리어 반대로 십자가로부터 나를 삭제시키러 온 날카롭게 찔러 쪼개는 운동력의 말씀에
대상이 된 것이 바로 부정당하는 나 라는 또렷한 가짜임을 들추어내는 것이 바로 진짜 십자가이다.

애매한 고난 속으로 집어 넣고서는
또 인간이 도저히 긍정할수 없는 눈으로도 확인되거나 믿지도 못하는 마귀와의 내기로 인한
그 고통속에서

여호와는 욥에게 몰아 붙인다.

가장 많이 인용되는 구절로

(욥 38:25, 개역) 『누가 폭우를 위하여 길을 내었으며 우뢰의 번개 길을 내었으며』
(욥 38:26, 개역) 『사람 없는 땅에, 사람 없는 광야에 비를 내리고』
(욥 38:27, 개역) 『황무하고 공허한 토지를 축축하게 하고 연한 풀이 나게 하였느냐』
(욥 38:28, 개역) 『비가 아비가 있느냐 이슬 방울은 누가 낳았느냐』
(욥 38:29, 개역) 『얼음은 뉘 태에서 났느냐 공중의 서리는 누가 낳았느냐』

누가 사람없는 광야 땅에 비를 내리고 축축축하게 하며 풀을 나게 하였느냐 라고 다구치는 질문에 그 어떤 누구도 답을 할 수 있는 자가 없다는 것이다.

답도 못하면서 물을 자격도 없고
물을 자격도 없으면서 나에게 이렇게 저렇게 해 달라고 할 자격이 아예 없다는 것이다.

오로지 십자가(예수님의 저주)를 보고 욥이 화들짝 놀라듯이
이 십자가 때문에 모든 것이 배치 되었다는 것임을 알 때 그저 감사할 뿐이다.

마귀 또한 배치물일 뿐이다.
깊숙이 가시 박아서 못 빼도록 하기 위한 배치물이다.

내가 벗어나고 내가 믿어대고 내가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아예 벗어날 생각조차 하지 말도록
아예 믿어댈 생각조차 하지 말도록
아예 사랑할 생각조차 하지 말도록

주님 쪽에서 넘어오시겠다는 취지로써의 배치다.

그것이 주님이 주님 스스로가 십자가라는 예수님의 죽음을 영광되게 하기 위한 조치인 것이다.

지혜는 딱 하나다. 십자가다.
도저히 믿을수 없기에 지혜는 인간에게서 어긋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지혜다. 인간의 믿음이 가능한 십자가는 가짜일 뿐이다.
그저 구원용일 뿐이다.

어리석은 지혜는 이렇게 인간의 죽음을 파고들어서
저주를 파고들어서
죄악을 파고들어서
원망을 파고들어서
십자가를 소개한다.

자력으로 믿을 수가 없고
또 믿게 되었다 할 지라도
계속 끊임없이 제공되는 날마다 새로운 십자가의 지혜를 간직할수 있는 길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십자가가 도리어 해야할 숙제이다.
그 저주의 십자가가 말이다.

욥을 대상으로 한 십자가라는 지혜는 예수님의 죽음을 요청한다.
마치 율법의 대표자 모세와 선지자의 대표자 엘리야가 변화산상에서 예수님의 죽음을
저주의 십자가를 져 주심을 요청하듯이 말이다.
이제 지혜의 대표자로써 욥이 그 대상이 되어 그 죽음을 바라보게 될 때

화로다 나는 망할자 이구나를 아는 것이다. 죄인 중의 괴수요
모친의 죄 중에 태어난 생일을 저주해야 마땅한 자임을 말이다.

그리고 이 모든 배치가 십자가를 위함이였고

이 영화에서처럼 아벨의 죽음도
그 트라우마로 남은 상처 곧 고난도 십자가의 은혜를 위한 배치로써 작용한 것이다.

그러나 이 영화는 정작 상당히 성화론적이다. 즉 불교적이고 들뢰즈적이다.
하나님의 커다란 용서가 있다면 그 작고 사소한 것들은 아무것도 아니다 라는 것이다.
그래서 살아남은자들이 오히려 그 상처로 인해서 서로를 상처주는 그 모습들을
그 소용돌이를 이제 그만 멈추고자 한다면 서로 서로가 용서하라 라는 것이다.
너가 욥기서에 나온 말씀처럼 이 우주의 신비를 아느냐? 지뿔도 모르면서 무슨 자격으로 상처받았다고 억울해 하면서 그 화풀이를 한다는 것은 결국 쳇바퀴 돌 듯이 서로 서로가 괴롭히는
결국 너 또한 억울하다고 호소하는 나쁜 하나님과 뭐 다를바가 뭐 있냐 라는 것이다.

몇 년전에 티벳에 중국이 쳐들어와서 많은 자들이 죽었다. 독립운동인지 아니면 침략인지? 까먹었는데 최근 몇 년전에 말이다. 그러나 기억나는 것은 그런 억울한 죽음도 저런 악마같은 총칼을 쥔 자들도 다 부처님이 배치시킨 은총으로써 활동하는 것이니 너의 목숨을 앗아갈찌라도 용서하라. 원수를 사랑하라 라고 달라이 라마를 언급하면서 나온 기사를 봤다. 불교내용인지 아니면 달라이 라마 말인지 까먹었는데 아무튼 이것이 인간들의 지혜이다.

마치 십자가 지혜와 엇비슷하지 않는가? 다 용서 하자 라고? 원수를 사랑하라 라고?

그러나 막상 그 당사자가 당해보면 결국 피해자는 가해자로 돌변할 뿐이다.
이것을 들추어 내어야 십자가다.

남을 용서할 입장에 못 놓여졌다는 것이다.
원수를 사랑할 입장에 못 놓여졌다는 것이다.

이것이 욥기서의 취지다.

뭐 용서? 뭐 원수 사랑?

쥐뿔도 모르면서 모든 종교에서 다 외치는 그런 지혜를 언급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욥의 세친구와의 차이를 둔다.
욥은 그런 종교에서 입에 침도 바르지 않고 하는 거짓말에 간격이 벌어진다.

고통이 오기전에는, 마귀와의 내기가 오기 전까지는 그 세 친구들과 논쟁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졸지에 알수 없는 전혀 이전에 없었던 것을 받게 됨으로써
세 친구들과의 간격은 벌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욥은 그의 죽음을 향해
그 어리석은 십자가의 지혜가 당김으로써 당하게 되는 그 애매한 고통 때문에

전혀 새로운 양상의 판대기 구조를 알게 되는 것이다.

십자가 중심으로 벌어지는 판을 말이다.
십자가가 구원이 아니라
십자가가 저주로써 작용하는 그 심판성의 구조 때문에 말이다.

그리고 그 속에서 새로운 인물을 보게 된다.

그 인물 때문에 자신은 띠클보다 못한 자임을 아 저 분 때문에 이런 것을 격게 됨을 알게 되는 것이다. 참으라는 뜻이 아니다. 오해 마라. 못 참는다.

그저 일방적으로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십자가의 저주가 덮쳐졌으니 그 저주로 인해 간격을 좁힐수 없도록 벌어졌으니

다시 일방적으로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십자가의 용서가 덮쳐져서 그 인물이 누구십니까 라고

생전 듣도 보도 못한 한 인물에 집약하도록 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것 때문에 모든 피조물들이 배치되었다는 것이다.

원치도 않았던 알고 싶지도 않았던 이 지혜에 졸지에 동원되어서 욥은 보게 되는 것이다.

죽음이 그의 육체를 뻥뻥 뚫듯이 지나서 통과하고
다시 용서가 그의 육체를 뻥뻥 구멍 뚫듯이 통과한다.

그 틈사이에서 새로운 인물을 보기 위함이지

불교처럼 모든 종교처럼 성화론자들처럼 서로 용서하자 원수도 사랑하자 라는 구호는
이미 욥을 괴롭혔던 세친구들의 구호일 뿐이다.

이 영화를 통해서 인간은 알수 없는 그 공포를 가리우기 위한 가리개로
어차피 서로 상처줘 봐야 나만 손해다. 라는 내 탓이요 운동처럼
기가막힌 가리개들(무화과나뭇잎)을 발견하고 창조하고 조작하는데 있어서
탁월한 장사꾼임을 또 한번 발견하게 되었다.

이것이 지옥이다. 그 속에서 빼내임을 당하는 욥처럼
우리는 인간들의 용서의 세계에서 탈출해야 한다.

제발 주님 살려주세요 이 세계는 악마의 세계입니다.

예수님 보다 더 선하고 착한 인간들이 판을 치고 있는 악마의 세계입니다 라고

화로다 나는 망하게 되었구나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라는

믿음의 선진들의 외침을 귀 기울어야 할 것이다.

참 잘 드린 착한인간들의 제사 보다 더 심파게 간격두어 간격을 벌리는 더 나은 제사가 덮치지 않는 이상 소망은 없다.

그래서 마귀가 꼿아넣는 가시 보다 더 깊숙이 간격벌리시는 주님의 십자가가 아니면

그 저주(심판)가 아니면 사랑은 없다.

(아 8:6, 개역) 『너는 나를 인 같이 마음에 품고 도장 같이 팔에 두라 사랑은 죽음 같이 강하고 투기는 음부 같이 잔혹하며 불 같이 일어나니 그 기세가 여호와의 불과 같으니라』

생명의 나무는 예수님의 죽음으로 이룬 심판의 저주인 십자가 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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