셔터 아일랜드와 에덴동산

2010/03/24 13:24 in 교회와 양립불가인 십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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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를 지어 봐야 한다? 그리고 셔터 아일랜드와 에덴동산


두 개의 글이 생각났는데 각가 따로 적어볼까 싶었는데 귀찮아서 하나로 묶어보고자 한다.

하나는 죄를 지어봐야 한다? 라는 의미와
또 하나는 셔터 아일랜드와 에덴동산 이라는 두 제목을 그냥 하나로 묶어 보았다.

사람들이 흔히 죄를 지어 봐야 자신의 자존감이 허망함을 안다고 그래야 타인이 눈에 보이고 그런 타인을 생각해 보게 되는 겸손을 배우게 된다고 한다.

그러나 성경은 다르다. 물론 성경은 저런 인간의 양심조차도 심어서 그것을 거쳐서 어디까지 가는고 하는 하나님의 죽음까지 간다.

쉽게 말해서 타인의 죽임 까지 가 봐야 자신의 죄를 보게 된다. 그런 자아를 허구라고 여기지 않는 이상 빠져나올길이 없다. 제2의 자아를 만들어 내어도 소용없다. 정신병에 걸려도 소용없다. 허구가 허구를 죽여본들 소용없듯이 좀비가 좀비를 죽여도 죄가 되지 않는다.

그것은 법관이 허물치 않는 것에 불과하다.

문제는 정신병과 미쳐서가 아니라. 지극히 누가봐도 정상적이고 자기자신 조차도 아무문제없는 존재로 여긴 상태에서의 예수님에 대한 살인이다.

예수님에 대한 구체적이고 생생한 그 살인이 아닌 이상은 죄라고 형성할 수 있는 것은 없다.

하나님을 죽여봐야 죄라고 말할 수 있다.

예수님이 십자가 라는 기준을 그렇게 새롭게 세운 이유도 그러하다.


여기서 영화 이야기로 들어가보자

폐쇄적인 갇혀진 공간에서 주인공이 못 빠져 나온다면 결론은 주인공의 잘못이다.
문제는 주인공에 대한 설정이다.

실컷 주인공을 시대의 법관인 보안관을 그렇게 설정해 놓고서는 문제도 못 푸는 자를 주인공이라고 여기고 싶어 한 것이다. 그렇다면 누가 주인공인가?

폐쇄적인 공간이 주인공이다.

그래서 제목이 셔터 아일랜드가 주인공이다. (물론 그 섬은 언젠가는 사라진다. 그렇다면 주인공이 또 달라진다는 것이다. 문제는 누가봐도 주인공을 처음부터 설정할 수밖에 없는 식으로 전개 된다는 것이다. 주인공은 제일 끝에 나온다. 창세기를 보면서 누가봐도 하나님이 주인공이다 라고 한다. 그러나 제일 끝의 주인공과 일치가 될려면 그 중간도 그 과정도 동일해야 한다. 그러나 한결같이 인간의 시선은 처음도 끝도 하나님이다. 예수님이 주인공이다 설정을 해 놓고서 성경을 읽어나가지만 정작 그 중간은 단 한번도 하나님은 주인공이 된 적이 없다. 전혀 새롭고 낯설고 숨겨진 인물이 등장한다.)

트라우마든 뭐든 그것이 펼쳐질려면 배경공간이 설정이 된다.(마음이라는 정신을 담은 구체적인 그릇인 몸이다.)

공간이 없다면 어떤 죄도 문제도 펼쳐지질 않는다.

성경에는 아주 특이한 공간이 하나 설정이 된다. 에덴동산이다.

처음에는 그 공간이 나열되어 있지 않다.

오히려 먼저 창조한 사물들로써 표현된다.

하늘과 바다 조차도 공간의 의미가 아니라
피조물로써 창조주의 창조물로써 나타날 뿐이다.
거기에는 순수함으로써 그 어떤 거부성들이 없다.

문제는 그 창조 자체가 창조 스스로를 치면서 새로운 설정이 개입이 된다.

죄의 가입 이다.

마치 율법이 가입이 되듯이 죄가 가입 됨으로써 창조는 공개적이기 보다는 폐쇄성을 띤다.

창조가 창조 스스로를 폐쇄성으로 몰고간다.

에덴동산이 부랴 부랴 철거되는 현장도 그러하고
그런 철거 된 에덴동산을 누가 훔쳐갈가까봐 화염방사기를 들고 천사들이 철통수비를 한다.

마치 그곳이 인간의 뇌를 건드린다는 등대 수술실처럼?

그러나 참으로 재미있게도 철거되었는데
없는데
분명 없는데

있다고 한다면 미쳤다고 취급 받을 뿐이다.

그렇다고 주인공 아닌 주인공으로 설정된 인간이 포기를 할 것인가?

에덴동산의 잔상을 설정하면 된다. 마치 자신이 설정이 되었듯이 자아를 제2 제3으로 분열시켜서 족보라는 가문을 형성하듯이 설정하면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 여운은 늘 남겨놓고 숨겨놓는다.

꺼내놓으면 정신병자가 되는 것이고
꺼내놓지 않으면 주인공으로 남는다.

다만 선악이라는 문제를 해결을 해야하듯이
주인공이 주인공 다울려면 선악을 넘어야만 한다.
누가 심은 숙제인지는 모르나 한결같이 아담의 분신들은 그 일에 매진한다.
한치도 벗어남이 없이 여기에 평생을 몰두한다.

(창 4:7, 개역)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괴물로 평생을 살 것인가? 아니면 선한 사람으로 죽을 것인가?’

이 죄의 숙제를 풀어야 한다.
범죄를 해결하는 수사관이 이것을 풀지 못하면
정작 자신이 범인을 잡고자 풀어놓은 그 실마리들의 미끼들이 도리어 자신을 옭아매는 올무가 되는 것이다. 법적 살인 면허가 도리어 자신을 죽이듯이.

그러나 인간은 이미 불리하게 출발한다. (그 어떤 사건도 해결 할수 없는 단절로써 출발한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속고 있다. 문제를 해결하는 보안관으로 출발하고 있기 때문이다.(관객도 선택의 여지가 없다. 이미 감독의 의도대로 동질화 되어서 출발한다. 그래놓고 감독은 마치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준냥 관객의 선택으로 여운을 남긴다. 속임수다.) 선악을 아는 하나님(괴물)으로부터 출발이다. 그 괴물을 하나님으로 착각하면서 말이다. 결국 다른 보안관이 나타나야 한다. 다른 하나님이 등장해야만 한다. 인간을 삭제하는 쌍둥이처럼 인간의 모습으로 오는 인자처럼 오신 이가 등장해야 한다.)

그것은 상처다. (모든 과거는 상처가 된다. 아니 과거는 상처 뿐이다.)
여기서는 트라우마 로 표현되어 나온다.

그 상처를 숨기면 숨길수록 그 홈은 더욱더 움푹 패이게 된다.
그러나 상처를 공개하면 그 상처를 가지고 누가 또 사기를 칠 줄 누가 아는가?

발가벗음을 보게 된 눈이 밝아짐이 상처 아닌 상처로써 자리잡아 버렸다.
뭐든지 그 밝아진 눈은 상처로 해석으로 하고
상처로 기억 속에 저장하고 담아둔다. 꺼낼 때 마다 모조리 다 상처라고 해석할 뿐이다.
그러니 방어기제는 그 상처를 덮고자 하는 무화과나뭇잎으로만 일관한다.
자신이 유일하게 해석할 줄 아는 그 안개와 같은 허구를 과거와 현재와 미래로 담요 덮듯이 덮고자 한다.

상처가 있는 본인 당사자가 타인의 상처를 약점 잡고 그 자리에 그 공간에 서 있기 때문이다. 바로 그것이 특이하게 설정된 배경 공간인 폐쇄적인 공간이다.

발가벗음으로 보는 눈과 그 눈을 통해서 발가벗었다고 해석하는 그 뇌를 건드리고자 다가오는 해석불가인 그 어떤 것의 다가옴 앞에

주인공은 더욱더 난관에 빠지게 된다.

인간이 보는 그 눈으로 해석한 그 뇌는 어떤 학자의 말대로 선악과나무의 모양대로 되어 있다. (물론 그 학자의 표현이 좀 웃긴다. 어떤 누구도 선악과 나무를 본적이 없다. 그런데도 그는 뇌 모양이 우거진 나무 모양으로 보았고 또 그것을 선악과와 연관 시키는 그림으로 해설을 했다.)

분명 선악과 나무를 본적 있는 사람은 없다. 딱 하나 뿐인데 아담이다. 그런데 그 아담은 죽었다. 그리고 그가 죽은 이상 알길이 없다.

더더욱 웃기는 것은 아담 아닌 존재가 또 선악에 대해서 언급을 하게 되니

더더욱 더 웃기는 것은 아담은 없어도 선악에 대해서 인간은 평생 민감해져 버렸다. 갇혔다.

선악과를 본적이 없는데 선악에 처촉받지 않고 사는 자는 아무도 없다. 즉 자유한자는 없다.

감독 또한 또 다른 시선으로써 선악을 추궁한다.
인간이 하는 짖은 선악에 대한 추궁을 하나님처럼 하는 것이다.

하나님 자리에서 타인에게 선악을 추궁한다.

숙제 풀어 보라는 것이다.

죄에서 자유할 수 있느냐 라는 추궁이다.

죄라고 언급하면 관객이 싫어할테니 말을 돌릴뿐이다. 또 본인 조차도 죄가 뭔지 모른다.

이 글을 쓰는 나 조차도 죄가 뭔지 모른다. 그렇다면 믿음도 알 길이 없다.
죄도 모르면서 우찌 구원을 언급하랴? 사랑을 마귀가 운운하는 것과 같다.

죄 아래 갇혀 버렸기에 갇힌자가 어떻게 죄 밖에서 죄라고 규정할 수 있는가?

죄란 죄가 장성한 그 사망을 이긴 분만이 규정하는 것이다.

그래서 죄 라고 하지 않고 상처 또는 괴물 또는 트라우마 라고 표현한 것이다.

주인공 테디(디카프리오)가 잡고자 자원하여 들어가는 그 폐쇄적인 공간에서의 자신만의 범인은 곧 얼굴에 상처 깊게 페인 영원히 아물지 않는 자이다. (범죄자란 상처가 아물수 없는 자이다. 용서 자체가 불가능한 원수이다.)

또 하나의 자아인 (경찰로써의 자아로써 범죄자인 자아를 의무적으로 잡고자 하는) 레이디스 (아내를 방화로 죽여버린 살인마 괴물)를 죽여야 하는 개인적인 숙제를 감춘채 (사실은 이 부분이 이 숙제가 정신병원에서 주입시킨 약으로 인해 정신분열로써 나타난 조작된 숙제인지 실제 자신의 숙제인지 영화는 안 알려준다. 아니 자원했다는 것 조차 모든 것이 조작된 것일 수 있다.) 조사하러 간다.

영화의 시작은 이렇게 시작 된다. 데니스 루헤인 원작소설 살인자들의 섬은 정신병으로 살인을 저지른 환자들만 격리 수용한 셔터 섬에서 환자 한명이 도망치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 사건을 조사하기 위해 두명의 연방보안관이 파견되고 그들은 도망친 환자가 남겨둔 의문의 암호와 흔적들을 단서로 환자의 행방을 뒤쫒는다.

그러던 중에 연방 보안들은 셔터 섬의 관리조직이 수용된 환자를 대상으로 경안와 전두엽 절제술(눈을 통해 송곳을 넣어 뇌의 일부를 절단하는 수술)을 불법적으로 시술한다는 정보를 압수하게되고, 이 시술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를 얻기 위해 병동의 환자들과 병동 관련자들을 찾아 조사한다.

그리고 영화의 끝은 테디가 병원관계자들의 인도로 전두엽절제술을 받게 되는 것으로 끝난다.

결국 어떤 시점에서 주인공의 정상적인 시선이 멈추고 병원에서 주입된 시선이 시작되었는가 하는 점이다. 영화 처음부터 주입된 약물로 인한 망상인지? 아니면 언제인지?

마치 성경을 죄로부터 시작하는 것처럼 그 시점을 창세기 2-3장에서 출발해야 하는지? 아니면 창세기 1장부터 시작해야 하는 것처럼 말이다.

인간의 무지와 같은 어두움 곧 무질서 카오스를 찢고서 흠집을 내어 삣어 들어온 창조처럼,
다시 그 창조를 깨뜨리고 들어온 죄처럼,

또 다시 그 죄를 찢고 그 홈페인 틈 사이에서 나온 죽음보다 강한 사랑 곧 폭력 보다 더 폭력적인 사랑처럼 말이다.
사랑보다 가장 폭력적인 것이 없듯이

먹고 먹히는 반전의 반전이 더더욱 깊을수록 선택이 관객에게 가는 것이 아니라
관객을 분노케 만드는 것이다.

관객을 괴물로 만들어야 함에 있어서 관객은 적극적인 거부를 하게 된다.
(감독은 관객에게 숙제를 던진다. 뛰어넘지 못하면 괴물이고 뛰어넘으면 생존케 된다.
이것 보다 더 폭력적인 것이 어디있는가? 감독과 오늘날 현대 자본주의의 사랑이다.)

그런 거부가 도리어 깊숙하게 영화에 도취 됨으로서 감독은 자신이 의도한 바인 성취감을 맞보게 될 것이다.

상대방에게 다짜고짜 주입식으로 넣은 그 숙제가 감독이 주는 독자에게 대한 사랑이요 배려요 섬김이다. 가장 폭력적인 것이 인간 속에 잠재해 있는 거부감인 괴물을 끄집어 내는 즉 진짜 폭력을 끄집어 내는데 안성맞춤이다.

저들의 폭력성을 저들의 방식의 폭력성으로 끄집어 내는 것이다. 십자가도 그런 방식이다.
그렇기에 십자가 보다 가장 폭력적인 것이 없고, 가장 율법적이다.
(불의한 청지기를 통해서 은사에 대해서 생각해 보면 딱 그런식이다. 너희들이 불의하다 하고 평가하는 그 기준으로 너희의 불의함을 들추어낸다는 식이다. 정작 그랬을때에 인간은 그 불의한자를 내세움에 있어서 미련하다 어리석다 라고 일관할 수 밖에 없는 완악함과 걍퍅함이 튀어나올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저런 불의한자가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자신이 쌓아온 행함이 주장 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 영화의 감독이 마치 그런 불의한 청지기의 은사를 받은 것처럼 느껴지는 듯 하다.

너희들의 감추어진 고립되고 갇혀진 그 섬을 그 폭력성 살인마적인 괴물을 툭툭 건드리는 것이다.

물론 그 형사 조차도 틀렸다. 갇힌 주제에 범인을 잡고 그 보편성에서 사적인 허구를 꿈꾼다는 것 자체가 망상이다. 주입이 된 망상이든 아니든 사실상 모든 인간은 이런 망상에 사로잡혀 있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와서 죄란 가장 정상적이고 비로서 가장 안정적이며 신앙적으로 흡족한 상태이며 감사와 이웃사랑에 넘쳐 흐르는 그런 만족스러운 입장에서

곧 소위 바리새인 입장에서

전혀 불평불만이나 전혀 부정적인 것이나 전혀 비정상적인 것이 없는 상태에서

벌어지는 예수님에 대한 직접적인 살인이다.

마치 지성소의 휘장을 찢듯이 예수님을 찢는 살인이다.

예수님을 죽여보지 않은 사람은 죄인이라 할 수 없다.

좀비들끼리의 시체이동일 뿐이다. 흙에서 다시 흙으로의 위치이동이다.


가장 정상적인 누가 봐도 그러한 입장에서의 자아가

또 누가 봐도 예수님은 예수님이다 라는 그 예수님을 죽이는 그 순간이

진정한 죄를 짖는 순간이다.

그 죄야 말로 제대로 갇혀있는 셔터 아일랜드인 셈이다.

그것 때문에 의도적으로 애굽에서 이스라엘을 뽑아낸다.

애굽에서의 구원은 구원이 아니다. 위치이동일 뿐이다.

정작 구원은 광야에서 조차도 남이 아닌 자기자신이 그 무너진 애굽임에도 불구하고
늘 애굽을 꿈 꿈과 동시에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가겠다는 그것이
욕심이요 욕심이 잉태하여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하여 사망을 낳는 것이다.

선악과를 따먹음과 동시에 생명나무를 먹고자 함인 것이다.

이스라엘의 왕으로써 율법을 지킴과 동시에 그 법으로 밧세바를 취하여 자기 죄를 자기 법으로 무화과나뭇잎으로 가리우는 것이다.

그렇다면 뭐가 죄인가?

누구나 다 가리우는데 어찌하란 말인가? 방어기제인데 뭘?
 
문제는 바로 그 뒤에 오는 무화과나뭇잎으로 가리운 것을 찢고 오는 가죽옷 그리스도의 옷에 대한 거부이다.

무화과나뭇잎이 소용이 없음을 아는 것은 가죽옷을 만났을때에 비로소 무화과나뭇잎을 버릴 것이다.

아니 누가? 새 옷을 헌 몸에 입히는가? 새 옷은 새 몸에만 해당 된다. 헌 옷을 새 몸에 입힐수 없다. 선악에 저촉받는 몸은 새옷 가죽옷이 무용지물이요 어리석고 미련할 뿐이다.

선악에 저촉 받지 않는 몸이라야 새 옷이 딱이다.
그래서 그 차이를 보여주는 이전 것은 지나갔고 새것이 된 것을 십자가에 못 밖힘으로 증명하셨다. 믿음의 문제이지 행함의 문제가 아니다. 죄도 그러하다.

성령의 소욕은 십자가에 달려야할 후패할 몸에서 잉여를 창출해 낸다. 퍼내도 퍼내도 끝이 없다. 늘 새 것이다. 은사가 이런 식이다.

그러나 육의 소욕은 자칭 새것처럼 보이는 것에서 잉여를 조작해 낸다. 심지어 예수님의 오병이어의 표적을 통해서 기적을 찾는다. 악한세대이기에 기적을 찾는 것이다. 자신의 당연한 수고했음에 대한 보상이요 노동의 댓가이다. (따라와 줬음, 믿워 줬음, 명령어 지켜줬음 - 그러나 그 속에서는 내가 예수님을 죽인 살인마임이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나 예수님은 요나의 표적 즉 죽음 속에서 부정 속에서 잉여를 창조하신다.

왜 죄로 출발해야 하는가?
자신이 말하는 죄가 아니라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죄로

곧 구체적이고 치밀하게 짜여진 나의 괴물성, 예수님에 대한 죽도록 미워서 죽이고픈 살인의지로 가득찬 죄로 출발하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모세를 1급 살인자로 만들고
다윗을 1급 살인자로 만들고
베드로를 1급 살인자로 만들고
바울을 1급 살인자로 만들어서

구지 구원하는 이유는

그 1급 살인 조차도 아무것도 아닌
살인 보다 더 강한 사랑 앞에서

살인이 살인되는
살인이 삭제 되는
죄가 지워지는
먹보다 더 검은 죄를 흰눈보다 더 희게 만드는

그 십자가의 사랑이

더 강렬하고 폭력적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남이 아닌 신부의 입으로 고백케 만드신다.

(아 8:6, 새번역) 『도장 새기듯, 임의 마음에 나를 새기세요. 도장 새기듯, 임의 팔에 나를 새기세요. 사랑은 죽음처럼 강한 것, 사랑의 시샘은 저승처럼 잔혹한 것, 사랑은 타오르는 불길, 아무도 못 끄는 ㉠거센 불길입니다. / ㉠또는 '주님의 불길 같습니다'』

(아 8:6, 개역) 『너는 나를 인 같이 마음에 품고 도장 같이 팔에 두라 사랑은 죽음 같이 강하고 투기는 음부 같이 잔혹하며 불 같이 일어나니 그 기세가 여호와의 불과 같으니라』


(아 8:1, 현대인) 『여자: 만일 당신이 우리 어머니의 젖을 먹고 자란 오빠라면 내가 길거리에서 당신을 만나 입을 맞추어도 나를 비웃는 자가 없을 것입니다.』
(아 8:2, 현대인) 『내가 당신을 우리 집으로 데려와서 당신의 가르침을 받고 싶어요. 나는 당신에게 석류즙으로 만든 향기로운 술을 갖다드리고』
(아 8:3, 현대인) 『당신은 나를 왼팔에 눕혀 오른손으로 껴안아 준다면 얼마나 좋겠어요.』
(아 8:4, 현대인) 『예루살렘 여자들아, 내가 너희에게 부탁한다. 너희는 제발 우리의 사랑을 방해하지 말아다오.』

(아 8:5, 현대인) 『예루살렘 여자들: 사랑하는 님의 팔을 끼고 사막에서 올라오는 여자가 누구인가?

남자: 그대의 어머니가 산통을 겪으며 그대를 해산한 그 사과나무 아래서 내가 그대를 깨웠노라.』

(아 8:6, 현대인) 『여자: 당신은 나를 인장 반지처럼 당신의 마음에 간직하고 도장처럼 당신의 팔에 새기세요. 사랑은 죽음처럼 강하며 질투는 무덤처럼 잔인하여 맹렬한 불처럼 타오릅니다.』
(아 8:7, 현대인) 『많은 물도 사랑의 불을 끌 수 없고 홍수라도 그것을 소멸할 수 없으니 사람이 자기 재산을 다 주고 사랑을 사려고 해도 오히려 비웃음만 살 것입니다.』

(아 8:8, 현대인) 『여자의 오빠들: 우리 어린 누이동생은 아직도 유방이 없구나. 동생이 청혼을 받으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아 8:9, 현대인) 『만일 동생이 성벽이라면 우리는 동생에게 은망대를 세워 줄 것이며 만일 동생이 문이라면 우리가 백향목 판자를 둘러 주리라.』

(아 8:10, 현대인) 『여자: 나는 성벽이요 내 유방은 망대와 같으므로 내가 님의 보기에 평안을 얻은 사람처럼 되었구나.』
(아 8:11, 현대인) 『바알-하몬이라는 곳에 포도원이 있어서 솔로몬이 그것을 소작인들에게 내어주고 한 사람 앞에 은화 1,000개씩 바치게 하였네.』
(아 8:12, 현대인) 『그러나 내 포도원은 내가 마음대로 할 수 있으니 솔로몬 당신은 은화 1,000개를 가질 것이며 포도원을 가꾸는 자들에게는 내가 은화 200개를 주리라.』

(아 8:13, 현대인) 『남자: 동산에 앉아 있는 사랑하는 님이여, 그대의 음성을 들려 주시오. 내 친구들이 그대의 목소리를 듣고 싶어 기다리고 있다오.』

(아 8:14, 현대인) 『여자: 나의 사랑하는 님이시여, 노루처럼 달려오세요. 향기로운 산의 어린 사슴처럼 속히 달려오세요.』

 

Posted by 둘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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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식 2010/03/24 13:53   

성령의 소욕은 십자가에 달려야할 후패할 몸에서 잉여를 창출해 낸다. 퍼내도 퍼내도 끝이 없다. 늘 새 것이다. 은사가 이런 식이다.

그러나 육의 소욕은 자칭 새것처럼 보이는 것에서 잉여를 조작해 낸다. 심지어 예수님의 오병이어의 표적을 통해서 기적을 찾는다. 악한세대이기에 기적을 찾는 것이다. 자신의 당연한 수고했음에 대한 보상이요 노동의 댓가이다. (따라와 줬음, 믿워 줬음, 명령어 지켜줬음 - 그러나 그 속에서는 내가 예수님을 죽인 살인마임이 드러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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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죽어버린 불임여성과 같은 몸을 치니 잉여가 무한대로 생명수 처럼 피어 난다. 늘 처음자리요 근본자리요 근원자리인 뿌리가 드러난다. 처음부터 십자가 였다고. 그것이 처음 사랑인 첫사랑이다.

그러나 이미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긍휼을 베푸는 사랑을 못보는 것은

그저 살아있음에 치중을 한다. 자신이 살아있고 죽어있지 않았다는 것에 변명만 늘어놓는다. 그래서 행한 것들을 끄집어 내니 완악함과 강퍅함과 위선으로 10가지 방어막을 쌓는다. 완벽한 체제가 되지 않으면 늘 불안하기 때문이다.

그 방어막을 하나 하나 허물고 침투하는 것이 사랑이다.

이 두 모습을 두 차이로 증거하는 몸이 성도의 몸이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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