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인 결박 (보호자 어른 싸움) - 기업 무를자의 자기숙제 완성, 완료된 숙제 누리기

2012년 4월 9일 월요일 오전 9:25:30  김대식


(행 2:12, 개역) 『다 놀라며 의혹하여 서로 가로되 이 어찐 일이냐 하며』
(행 2:13, 개역) 『또 어떤 이들은 조롱하여 가로되 저희가 새 술이 취하였다 하더라』

(마 12:29, 개역)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야 어떻게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그 세간을 늑탈하겠느냐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늑탈하리라』

지금 누가복음을 계속 연달아서 처음자리로부터 시작한다는 의미로 희년을 언급했습니다.
오늘은 사도행전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물론 누가복음과 연관해서 말입니다.

누가복음을
희년으로 출발한다는 것은
이래 이래 해서 그에 따른 결과로써 희년이 주어진다 라는 결과를 도출해내는 방식이 아니라
(이렇게 되면 인간 구원을 주겠다는 마귀사상인 성화론으로 빠지게 됩니다. 희년 자체가 주님만의 인간해석을 단절시킨 마귀보란 듯이 이루시는 이미 승리하고 들어가는 방식 뿐입니다. 오히려 인간 구원 개념을 다 구멍 뚫어버리는 방식 뿐입니다.)
(이미 승리했다는 것은 일단 시간에 갇혀진 인간의 입장에서는 벌써부터 시작 자체부터 배제의 형식을 띱니다. 그래서 니가 원했잖아 라고 제가 언제예? 라는 반발이 무시당합니다.  이미 완료 되었기에!! . 요즘 어머니께서 저에게 장난치듯이 제가 언제예 제가 언제예 라고 웃으시면서 생각만 하면 우스읍다고 하십니다. 베드로의 왕뻔뻔 꼬끼오 도, 제가 언제예로 연관 하시면서 우스읍다고 하십니다.)

미리 결과를 도출해 놓고서 그 결과를 통보(확인)하는 방식으로써 사건이 진행이 됩니다.
결국 사건이란 미래의 결과가 덮쳐져서 그냥 그냥 끄집어내어서 아 이래서 그랬구나 라는 목격의 방식입니다. 증거의 방식입니다. 통보방식이지 합의도출인 변증법이 아닙니다. 해석학이 아닙니다. 눈으로 보고 확인해서 깨달아라 가 아닙니다. 깨달을까봐 걱정하십니다. 깨달음의 대상이 될수 없습니다. 그냥 덮칩입니다.

형사가 이미 벌어진 사건을 어떻게 해결하는고 하니
사건이 벌어진 당일은 이미 지나가 버렸습니다.
그러나 그 사건이 벌어진 흔적 곧 증상들은 여전히 제거되지 않습니다.
물론 언젠가는 시간이 흐르면 제거가 됩니다.
그 제거가 되기 전에 형사는 그 사건을 이 증상으로써 역추적해 들어가야 하는 겁니다.
흔적으로써 즉 찌끄래기 짜가 가짜 사이버 시뮬레이션으로써 그것을 도구로 삼아서
실상을 역추적해 실체를 찾아내는 방식입니다.

범인은 항상 무조건 두 명으로 좁혀집니다. 한사람은 억울하지만 모든 증거들이 그 사람에게 몰려있습니다. 그러나 항상 진짜 범인은 모든 증거를 저 억울한 자에게 뒤짚어 씌워서 항상 여유롭고 자유롭고 전혀 범인같이 않게 생활합니다. 그러나 누가봐도 억울한 자는 형사가 봐도 범인의 굴레 모든 증거물의 증상 등등 벗어날길이 없습니다.

그래서 진짜 형사는 자신이 확보한 모든 증거물이 저 억울한 자에게 뒤짚어 씌임을 알면서도
법적으로 모든 알리바이들이 맞아 떨어짐으로 인해 도저히 벗어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형사는 자신의 모든 법적 증거물을 철회하고

오로지 옹고집으로 자신의 모든 이성적인 판단, 법적 증거물(남이 아닌 자신이 범인을 잡기 위해 찾아낸 증거물), 그리고 형사 자신의 모든 경력 업적 심지어 형사라는 직분(자리)를 걸고,

즉 버려서까지, 말도 안되는, 오로지 감각 겐또로 앞의 것 행함의 결과물을 전복시켜서
법 외에 다른 방식으로 일방적으로 찍어서 법이고 뭐고 필요없이,
남이 아닌 자신이 찾아낸 물증 증거물 그딴거 다 필요 없이,

저렇게 자유롭게(법을 잡았다는 거죠) 떵떵 거리며 살고 있는 두명으로 좁혀진 그 한 범인을 향해서
자기 직장(목숨)을 걸어서 (미래에 자기 가족 먹여살릴수 있는 근거마저도 다 날려버린채)
무모하기 짝이 없게
오로지 겐또로 다른 형사 다른 법관들 다른 검사들 등등 모두 다 반대하고 있는 판국에
자신의 편은 아무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 한 놈만 잡기 위해서 미쳐버리는 겁니다.
(여기서 자신의 해석학을 버렸다는 겁니다. 자신의 변증법 곧 범인잡는 기술, 경력을 모조리 버렸다는 겁니다.)

오히려 형사가 더 범인같습니다. 깡패잡는 형사를 보면 누가 봐도 형사라고 안합니다. 깡패라고 다들 슬슬 피해버리지요.
(형사란 범인이 없이는 이해불가 입니다. 형사의 기능을 범인만을 통해서 그 차이를 알수 있습니다. 의사도 마찬가지 입니다. 환자 없이는 의사가 무슨 기능을 하는지 알수 없습니다. )

제가 왜 이런 내용을 적는고 하니 희년을 인간의 믿음대상이나
희년을 신학연구대상으로 볼게 아니라
그 반대로 희년이 위에서 언급한대로
하나의 형사로 본다면
희년은 인격이 되고 희년은 살아 움직이는 형사처럼
그것도 놀랍게도 범인까지 찾아헤매는 빠릇 빠릇하게 카메라에 포착이 안될정도로 빨리 빨리 움직이는 생명체 라면

이 희년은 몇 년이냐 무엇이냐? 어떻게 어떻게 구성되어서 그 개념이 뭐고 그 의미가 뭐냐 하는 것이 아무짝에도 소용없고
오로지 희년을 아는 길은 희년으로부터 찍힘을 당해서 만남을 당해보니,

희년을 전에 머리 속의 지식으로 알던 그 희년이 아니라
누구세요 라고 갑자기 인격을 대하듯이 만나게 되는
아주 아주 낯설은 인물이 되는 겁니다.
(희년의 기능을 갇혀진 무능한 가구, 무능한 세간, 발묵인 고아 과부 나그네가 없이는 그 차이적인 기능을 알길이 없습니다. 아무도 뚫을수 없는 환경을, 희년은 뚫는겁니다. 결국 그 이전의 그림자들은 못 뚫는다는 확연한 차이를 희년의 등장으로써 그 간격이 명확하게 벌어지는 겁니다. 이미 뚫어버렸기 때문에 넉넉하게 사망의 그늘에 폭삭 주저앉은자, 흑암의 지옥백성들, 개같은 이방인을 배경으로 깔고, 이 희년은 너희들의 것이다, 내가 잃어버린 너를 찾으러 왔다. 죄인찾는 의사다 라고 일방적으로 선언하고 시작하시는 겁니다. 결국 인간의 모든 것은 배제됩니다.)

결국 희년은 지금 형사처럼 범인을 잡으러 온 겁니다.
형사는 또는 의사는 자신의 기능만을 높이는데 관심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형사이고 그렇기 때문에 의사입니다.
그래서 형사는 형사에 관심없습니다.
의사는 의사에 관심없습니다.
그것은 통상적으로 동료하지 친구라고 하지 직장상하사 라고 하지
자기들 끼리는 형사 의사 라고 하지 않습니다. 타인의 눈을 의식해서만 그렇게 표현하니까
김형사 박형사 이닥터 최닥털 이라고 부를뿐입니다.
사도들끼리 자기들끼리 부를 때 김사도 박사도 라고 할까요?
안합니다.

사도라는 의미는 복음을 외칠 경우 뿐입니다. 복음을 외친다는 것은 죄인을 상대로할때만을 말하는 겁니다. 여기에 자신들도 염연히 죄인이다는 것이 깔려있는 겁니다.
그래서 70인을 세우듯이 또는 백부장 천부장을 세우듯이
그만큼 죄가 허다하게 많고
그만큼 죄에 대응하는 복음의 진행이 빠르다 라는 겁니다.
그래서 심부름꾼을 급히 급히 세우시는 겁니다.
형사도 의사도 그런 취지입니다.
(이 말들은 우리 쪽에서 십자가를 해석의 대상으로 놓거나 희년을 해석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희년으로부터 해석당해야 합니다. 희년으로부터 해석당하면 희년을 누구십니까 라고 안식을 누구십니까 라고 묻게 되도록 되어 있다는 겁니다. 희년으로부터 해석당하면 희년이 해석한 자들이 나타납니다. 고아 과부 나그네 곧 팔복의 사람들 또는 사망의 그늘에 주저앉은자 흑암의 백성 개같은 이방인이 새롭게 도출 됩니다. 희년의 증상으로써 말이죠. 누구를 말하기 위해서 등장해야만 합니다. 희년을 말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결국 안식으로부터 해석당하는 자가 안식이라는 율법에서 벗어난 안식이 창조한 자가 되는 겁니다. 십일조가 누구냐 라는 말은 십일조 해석 우리가 못합니다. 십일조 로부터 해석당하니까 십일조를 낼 필요없이 우리 자체가 십일조 라는 허리에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에 예속 되듯이 예속되는 겁니다. 해석당할 문제이지 해석할 입장이 못됩니다. 그래서 누구냐 라는 주체 문제로써 주인대 주인의 싸움입니다. 우리 싸움 아닙니다. 마귀와 주님의 싸움입니다.)

철저하게 기능 기계적인 차원에서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러니까 제발 목사들은 기능의 의미에서만 생각하면 되는데 자꾸 선을 넘어요 선을 넘어, 자기가 심부름꾼에 불과하다는 것을 자꾸 망각하고, 이상스럽게 자꾸 빈자리를 앉아버리니 정말 정말 말도 안되는 일들이 벌어지고 그것이 그만 허다하게 되어버리니까 당연한줄 알고 있습니다. 딴 목사들 다 그러던데요? 라는 말을 목사가 할 정도면 이미 장악당한 겁니다. 딴 형사들, 딴 의사들 다 그런데요?)

그런데 어쩔수 없습니다. 육을 이길 방법이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희년을 형사로 보고 의사로 보고 목사로 봐서
어떻게 그 기능을 수행하는지를 봐야 합니다.
물론 못따라 합니다. 따라할 생각 아예 하면 안됩니다.
다만 희년이 어떻게 일을 처리하는가를 보고
나 형사는 가짜구나
나 의사는 가짜구나
나 목사는 가짜구나 라고

날 잡으라고
날 고쳐달라고
날 씻어달라고
해야할 판국에 놓이는 겁니다.

그래서 모든 증거를 다 잡고서 너 범인이야 라고 잡고서는
그것을 다시 전복시켜서 너 범인이 아니래 라고 알려주는 겁니다.
아니 범인 맞다면서요? 이 증거물 때문에 법적으로 전 벗어날길이 없는데도 제가 범인아닙니까?
그래 글쎄 그렇긴한데 위에계신 진짜 형사가 너 범인아니래 라고 했으면 그걸로 땡이야
그럼 범인은 누구인데요? 그건 너가 알 필요가 없고
저분 숙제이니까 기다려보자

라고 아니 이런 어리석은 형사 봤습니까?
모든 물증 모든 것이 법대로 이성적으로 처리하면 누구하나 군소리 하지 않고 잡아넣을수 있고
그 범인 당사자도 자포자기로 벗어날 수 없음에 그냥 인정해 버리는 상황이니
모든 일이 제대로 잘 풀리고 승진도 하고
범인도 잡았고
범인도 체념했고 (문서상 빠져나올길이 없기에, 오히려 체념된 상태라 감옥살이가 더 배부르고 등따시고 사회부적응자로서는 평생 감옥이 차라리 편한겁니다.)
모든게 다 잘 된 겁니다.

문제는 심부름꾼 형사 말고 진짜 위에계시는 진짜 형사만은 그 깐깐함에 그냥 안넘어가는 겁니다.

이유는 딱 하나입니다.
심부름꾼 형사든 심부름꾼 의사든
누구만은 그 어떤 사건을 추적하고 그 어떤 병마를 추적해 간다고 해도
숨어있는 진짜 범인인 마귀는 상대못하는 겁니다.

주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는
인간들의 믿음이 다 떨어졌기에 밧데리 보충할려고 온게 아닙니다.
암흑기에 빛을 줄려고 형광등 갈아끼워줄려고 온게 아닙니다.
주님이 오신 이유는 비로소 마귀에게 모두 장악당했기 때문에 오신 겁니다.
그래서 자신의 영광을 위해 어두움을 깔고
그 어두움에 모두 장악 당한 뒤에
자신의 빛을 빛 스스로의 영광을 높이기 위해서 오신 겁니다.

자기 밖에 모른다고요?
네 맞습니다.
그 말이 곧 선악적으로 법적으로 표현해서 그렇지
사실상 은혜적인 표현으로 바꾸어서 말하면
자기 빡에 모르는데 아니라
마귀만을 상대로만 한다는 뜻입니다.

치 피 흥 자기 밖에 모르네에서 마귀만을 상대로만 한다로 넘어올려면
(넘어갈 생각 맙시다. 왜냐? 같이 마귀를 봐야만 이 말이 의미가 있습니다. 그렇지 않는 이상 마귀만을 상대로한다는 의미를 알길이 없습니다. 또 자기가 자기 상상으로 마귀를 백날 만들어 봐야 소용없습니다. 마귀는 예수님만이 창조한 피조물입니다. 우리가 우리 상상으로 우리 선악으로 백날 마귀를 조작해 내어봐야 그 실력은 예수를 조작하고 십자가를 조작하고 하나님을 조작하는 그 버릇이 어딜 가지 않듯이 마귀도 조작해 내는 실력 밖에 안되는 겁니다.)

우리의 시선이 아닌 예수님의 시선에서 예수님이 본 마귀를 우리가 봐야 비로소 안다는 겁니다.

네 맞습니다. 성령을 그래서 약속한 성령을 받으라 라는 취지가 여기 있는 겁니다.
성령을 받으라고 라고 또 소유물로
또 행함의 실천으로 가능한 줄로 알고 있습니다.
진짜 성령을 받게 되면 언어를 보는 눈길이 달라집니다.
성경은 어디에도 명령어가 없습니다.

사실상 모든 성경은 다 명령어입니다.
그런데도 명령어가 없습니다.
명령어로 보이는 것은 마귀만이 그렇게 보이는 겁니다.
명령어로 안보이면 뭐로 보이는데요? 사랑의 언어로 보이니까 명령어가 단 하나도 없습니다.
하라 하지말라 라는 언어가 전혀 없습니다.
오히려 그것을 삑사리라고 합니다.
미끄러지는 언어다 라는 겁니다.

미끄러진다는 것은 꼿꼿하게 세울려다가 실제로 그렇게 세울려다가 자빠져서 굴욕을 당하듯이 미끄러지는 실제로 미끄러지는 것을 격음으로써 알게되는 겁니다.
그러니 언어 자체를 우리가 요리하듯이 다룰수가 없다는 겁니다.
그 반대로 언어가 우리를 철저하게 다루는 겁니다.
우리가 희년을 다룰수 없듯이 희년이 우리를 요리처럼 다루는 겁니다.
요리처럼 우리를 언어(말씀)가 다루게 되면
놀랍게도 우리의 자리는 처음자리(빈공간=십자가)입니다.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라는 의미가 그래서 처음자리입니다.
에이 정말 아무것도 한 것이 없다 라는 것이 말이 안되지 않습니까?
아무것도 한 것이 없다뇨?
아무것도 한 것이 없다 라고 말을 하면
이미 그 문장을 읽는 것이 이미 한게 되는 겁니다.
맞습니다 맞습니다 그래서 항상 법적이다 라는 겁니다.
그런데 아무것도 한 것이 없다 라는 것은 그 법적인 의미를 거세당하듯이 짤렸다는 겁니다.
그러니 아무것도 한 것이 없다 라는 말이 맞는 겁니다.

왜냐하면 행동의 주체가 주님 쪽에서 이미 실행을 해 버렸기 때문입니다.

주님 쪽에서 실행을 하지 않아버리면

그 사람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라는 처음자리 마저도 자신의 숙제로 보는
자신의 주체로 보는 겁니다.

어제 어머니랑 이런 대화를 했습니다.
십일조란 몇분의 몇이 아니라
누구냐 라고 의미가 달라진다고

사실상 십일조를 대상으로 봐 버리면
그 십일조를 상대로 하는 자신은 주체가 되어 버리는 겁니다.

할례도 고추 끝을 짤라버리는 행위가 아닙니다. 개념 의미도 아닙니다.
할례가 누구냐입니다.
할례를 할려면 칼이 있어야 하고 남자의 성기가 있어야 하고 피가 나와야 하고 끊어낸 살쩜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이 날라가 버리고 누구냐 라고 했을때에
졸지에 할례는 내가 손으로 할 수 있는 영역에서 떠나버리는 문제가 됩니다.
인간이 언어를 해석하는 차원의 그림자세계 곧 손할례에서, 실체인 할례는 누구냐로 처음자리와 일치하게 됩니다.
마음판의 할례카니까 그것마저도 손으로 우찌 해볼려고 하는 습관 버릇을 못버리는 겁니다.
그래서 마음판의 할례 카니까 성화를 외치는 마귀들이 등장하는 겁니다. 성화론자 개혁주의자들이지요.
하여튼 인간 쪽에서 다루어 보겠다는 식입니다. 손모가지 짤라야 정신차릴까요? 천만의 말씀 손모가지를 짤라도 마음판의 할례를 시도할려는 것이 악마의 사고방식입니다. 그것도 교회 속에서 말씀대로 행한 자일수록 더 심해집니다. 교회 아닙니다. 당장 산 위로 도망쳐야 합니다.

할례는 누구냐 라는 문제입니다.
얼마나 답이 간단합니까? 그 할례 되신 예수님이 오셔서 나에게 피 발라주시면 끝난 문제입니다.
(할례 곧 율법의 기능은 몽학선생입니다. 화살표 입니다. 예수님을 말하기 위한 화살표인데 그 화살표를 우상섬기듯이 섬기는 겁니다. 에봇이라는 제사장 옷을 우상화 하듯이 말입니다. 오늘날로 치면 에봇이라는 제사장 옷처럼, 목사 라는 직분을 우상화 하듯이, 또 그림자인 교회를 우상화 하듯이 말입니다. 몽학선생이란 일종의 탁란으로 생각하시면 됩니다. 애굽에 탁란해서 빠져나오는 겁니다. 뻐꾸기와 멧새의 관계처럼 말입니다. 우리 몸 곧 육체를, 약속의 탁란으로 보시면 됩니다. 빠져나와야 한다는 겁니다. 그림자(보통 강한게 아닙니다.) 이기에 실체가 있기에 비록 갇혀있지만 탁란으로써 실체가 있기 때문에 그 차이로 그림자 곧 껍데기가 벗겨질 날이 온다는 겁니다. 이스라엘도 결국 애굽화 됩니다. 그러면 또 탁란해야 됩니다. 아니 탁란 시키시는 겁니다. 교회도 탁란처럼 몽학선생처럼 예수님과의 차이성으로 보시면 됩니다. 탁란처럼 보면 되지 그것을 쳐다볼 필요가 없습니다. 그래서 불뱀을 보내시는 겁니다. 마귀에게 갇히게 하시는 겁니다. 부르짖게 하시는 겁니다. 애굽왕을 강퍅케 하시는 겁니다. 예수님 자기 영광을 위해서 말입니다. 율법 외에 한 의를 쳐다볼수 밖에 없도록 만들어 버리시는 겁니다. 실상을 보고 기뻐하는 겁니다. 그림자 속에서 말입니다. 그러니까 몽학선생입니다. 일점일획도 떨어지지 않습니다. 율법의 기능은 죄 아래 가두기 위함인데 죄에서 벗어나면 곤란합니다. 갇혀야 쳐다보는 겁니다. 누구 누구 누구를 ? 계보 문제 입니다. 처음자리를 쳐다보라는 겁니다. 광야에서 모세가 들었던 것처럼, 인자가 들림으로써 쳐다보라는 겁니다. 쳐다보는 행위가 아니라, 누구 라는 문제라는 겁니다. 누구, 인물입니다. 율법은 우리가 지킬 문제가 아닙니다. 누가 지킨다는 겁니다. 그 누구를 바라보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즉 그림자에게 에워쌓여 갇혀있음을, 단절성을, 자신의 믿음도 거짓임을 뼈저리게 알게 하신다는 겁니다.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 즉 보이는 것은 다 거짓이다는 겁니다. 그래서 아벨은 보이는 제사에 매이지 않고 보이지 않는 예수님의 제사 곧 십자가에서 죽으신 화목제물을 쳐다본 겁니다. 모세가 변화산상에서 주여 빨리 별세해 주세요 라고 하는 이유 입니다. 믿음을 실상을 나타내서, 모든 보이는 것들이 허상임을 십자가로써 뚫어달라는 겁니다. 그래서 자꾸 누구냐 라는 인자 라는 인물에 모아지는 겁니다.)

십일조는 누구냐 랑 똑같습니다.
안식일이 며칠이냐가 아니라 안식일이 누구냐로 게임오바입니다.
십자가 카니까 또 십자가를 우상화 한다는 놈들이 있습니다.
십자가가 누구냐 라는 겁니다.

십일조는 허리 문제로 출처 곧 근원의 자리 처음자리를 추적해 들어갑니다. 즉 계보입니다.
십일조의 출처를 따지고 보니 멜기세덱과 연결이 됩니다.
그 멜기세덱이 십일조입니다. 예수님입니다.
결국 십일조는 멜기세덱이라는 실상을 말하기 위한 증상으로써 누구에게서 나왔느냐 라는 인물 누구 라는 출처를 드러내는데 있습니다.
그런데 왜 그딴 십일조를 왜 지키는지 모르겠습니다.
어떤 이상한 놈들은 가장 개혁주의라고 칭찬받은자들인데 성탄절은 자기네들은 안지킨답니다. 그런데 종교개혁주의날은 지킨답니다. 도대체 자기 교회가 정통이고 깨끗하다 라는 것을 왜 선전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자기편들이 적고 홍보하겠다는 광고죠. 소수자 운동입니다.
출처가 없기 때문에 벌어지는 현상입니다.

인물이 등장해 버리지 않으면.누구냐 라는 실상이 등장하지 않으면.
모호하고 의문의 것, 사라질 그림자들이 그 자리를 대신 차지하게 됩니다.
안식교는 금요일을 아니? 토요일인가? 안식일로 지킨다고 그것으로 너거들 보다 성경적이다 라고 우기는 식처럼 안식교 욕하면 뭐합니까? 종교개혁주일을 지키는데? 요즘은 부활절기 철이죠? 부활이 누구냐 라는 인물이 잡아주지 않으니까 모호한 의문의 것들이 그 자리를 대신차지하게 되니 그것을 절기로 지키는 행함문제로 나서는 겁니다.

대중들이 성탄절이든 지키겠다는 문제로 나서면 말릴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즐겁게 절기를 지키는 그 한참 중간에 성탄절을 보기좋게 시원하게 찢어버려야 합니다. 아작 아작 종이 찢어버리듯이 확 찢어버려야 합니다.
대충 찢으면 안됩니다. 충격이 오도록 확 찢어버려야 합니다. 난 다시는 성탄절 안지킬 거야 라고 성탄절기 안지키는 것을 또 지키도록 하면 안됩니다.
오히려 성탄절기가 올때마다 확 찢어버리는 계기로 우연찮게 말씀이 덮치면 감사하고
종교개혁주일 지키니까 뭔가 뿌듯해 져 버리면 말씀이 오시지 않았다고 여기면 됩니다.

결국 모든 것은 무엇이냐 가 아닙니다. 누구냐입니다.
결국 인자만을 쳐다봐야할 입장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상대적으로 손할례처럼 지킬려고 하는 의식에서 못빠져나오는 불뱀에게 물린 입장, 마귀에게 갇혀진 입장입니다. 그래서 주인 싸움입니다. 보호자 싸움입니다.
교회에서 이런 마귀들과의 충돌을 봐야할 입장입니다.

누구냐 라는 의미가 없어져 버리면 즉 계보 출처 처음자리(아무것도 한 것이 없음)
예수님을 볼때마다 당신 제자들은 왜 안식일 어기느냐? 왜 당신은 일부러 안식일날 병자를 고쳐 안식일을 범하느냐 라고 늘 따라다니면서 율법을 거스리는 요나의 표적에 말려들게 됩니다. 악한 세대가 기적(율법지키는 성화된자)을 요구하지, 표적이 누구냐 라고 보이는 자는 예수님이 보여줄 표적은 요나의 표적 뿐이다 라는 말이 믄 소리인지 모르게 됩니다. 요나의 표적 자체가 예수님이다 표적 이꼬르 예수님 표적 = 예수님 이라는 누구냐 라는 문제로 보이지 않게 되는 겁니다. 믿음은 예수님입니다. 내 숙제 아닙니다. 자 이렇게 되면 주님의 시선이 악한세대 라고 했듯이 믿음 = 나(인간) 이렇게 되니 자기 숙제 곧 올무에서 벗어날 길이 없는 겁니다. 마귀가 바보가 아니거든요. 평생 나에게 미쳐서 나에게 갇혀 사는 꼴입니다. 예수 믿는 나 에 갇혀서 말입니다. 예수님은 준적 없는데 지 혼자 김칫국 먼저 마시는 겁니다.

(마 15:12, 개역) 『이에 제자들이 나아와 가로되 바리새인들이 이 말씀을 듣고 걸림이 된 줄 아시나이까』
(마 15:13, 개역)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심은 것마다 내 천부께서 심으시지 않은 것은 뽑힐 것이니』
(마 15:14, 개역) 『그냥 두어라 저희는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 자로다 만일 소경이 되어 소경을 인도하면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리라 하신대』

(골 2:16, 개역)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하지 못하게 하라』
(골 2:17, 개역)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

그렇죠 그렇게 맞습니다. 주체 문제입니다.
진짜 주체를 만나버리면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주체 자리를 내어놓아야 할 판국입니다.
그러니까 누구십니까? 라고 비로소 묻게 되는 겁니다.

안그러면 걸리게 됩니다. 걸리적 거립니다. 주체가 끝까지 걸리적 거립니다.
걸림이 되니까 자꾸 안맞는 겁니다. 그 걸리적 거리는 주체를 맡겨버리면 됩니다.
걸리적 거리는 이 주체(마귀가 심은)를 항상 걸고 넘어지시니까 예수님으로 인하여 실족치 않는 자는 복이 있는 겁니다.

오죽하면 예수님을 안다고 했고 어제까지 만났던 그 예수님인줄 알았는데
누구십니까 라고 묻는 것은 낯설기 때문인 겁니다.
어제까지 알던 주님이 아니다는 겁니다.
나를 뚫고 나를 돌파하고 나를 적으로 삼아서 쳐들어 오는
나를 원수 삼는 예수님이니 어찌 낯설지 않고 배기겠습니까?

인간의 위선이란 자기편만들기입니다.
예수 믿기를 하나의 대상으로 보니 주체는 여전히 나입니다.
예수 믿으면 안됩니다. 예수 믿지 마세요.
예수님이 믿음이십니다. 믿음이 나를 대상 삼아서 오시는 겁니다.
주님 쪽에서 넘어온다는 것을
비로소 내가 믿어야 한다 내가 열국의 아버지가 되어야 한다는
자기 숙제를 놓아버리니까 비로소 주님이 믿음이시다가 믿겨지는 겁니다.
그래서 자신의 믿음의 조상이 되는것에 관심없고 예수님의 때를 쳐다보는 겁니다.
말도 안되는 그 엄청난 미래를 천년을 하루 같이 쳐다본다는 겁니다.
그 믿음이 오시길 바라는 겁니다.

자기 믿음이 비로소 엉터리 라는 것이 발각당함으로써 비로소 보게된 믿음입니다.

그러니 믿음이 하신 숙제입니다. 곧 예수님입니다.

이 말이 성화론자들은 믿겨질수가 없습니다. 주님이 믿음을 준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그 빈공백을 뭘로 채우겠습니까?

고~~롷 습니다 그렇습니다. 자신의 믿음으로 채워넣는 겁니다.

마치 말라기 이후에 빈공백을 인간들은 답답해 합니다. 그 빈공백을 다니엘서를 보면서 묵시운동을 펼쳐가면서까지 채웠고 하나님나라 운동으로 채울정도로 신학은 풍부했고 믿음은 풍부했습니다. 구지 예수님이 오실 이유가 전혀 전혀 없었습니다. (모든 민족의 신화에서 위기상황에는 항상 묵시문학이, 환타지가 발전합니다. 장풍, 해리포터 등등)

그럼에도 왔다는 것을 성화론자들은 합의도출 즉 그래도 인간이 뭔가 잘못하는 것을 수정하고
그 빈공간을 제대로 채워서 예수님 이후에는 더욱더 철학사적으로든 신학사적으로든 예수님 때문에 하나의 도움닫기 발판이 되어서 인간의 사상들이 더욱더 활개칠수 있었다고

여전히 관심사는 인간이지

인간 눈에서 마귀를 보는 시각은 없습니다.

없기 때문에 예수님이 오신 겁니다.

인간의 잘못된 신앙 삐둘어진 것 바르게 잡을려고 온게 아닙니다.
하도 이 소리를 제가 직접 성화론자들에게 무지 많이 들었고 이 주장에서 한발짝도 벗어날려고 하지 않음을 늘 확인하고 있습니다.
백날해봐야 어차피 엉터리 신앙입니다.

예수님의 관심사는 오로지 마귀 뿐입니다.

주인 결박해야 쪼무래기를 다루지
주인을 결박하지도 않는데 전리품으로 삼아봐야
그것은 전리품도 아니요 구원도 아니요 아무것도 아닙니다.

아마 주님이 보시기에 얼마나 웃기는 일이벌어지는 것이
그 사람의 주인을 결박하지도 않았는데
구원은 운운하고
믿음과 행함 등 이웃사랑 실천 큰계명이 뭡니까 등등의 말을
풀어준적이 없고 주인을 결박도 않았는데 자유한냥 성경읽었다 성경연구한다 나 이거 믿는다 나 이 말씀 실천한다 라고 아주 자신만만하게
그것도 예수님 앞이라서 더더욱 당연하게 묻는 장면들이 너무 너무 많이 나옵니다.

그 사람들 보란 듯이 어떤 누구도 정상인이라고 인정안하는
오히려 누가 봐도 귀신들렸다고 보는
창녀 세리 강도 문둥병자 귀신들린자 고아 과부 그야말로 하나님으로부터 저주 받은
죄인들을

그들 보란 듯이 코 앞에서
예수님이 내가 너희가 주인을 결박하여서 내가 너희를 자유케 했다 라고
동문서답하듯 생뚱맞고 낯설은 표현에
어라 그들 또한 예수님 감사합니다 라고 나오니
무슨 귀신 시나락 까먹는 소리를 저거들끼리 주고 받으니

예수님 앞에서까지 자랑하던 자들이
그 자랑이 헛되게
예수님의 행함 앞에서 적게심을 품게 되는 겁니다.
예수님의 믿음이 더 나은 믿음이요
예수님의 이웃사랑 실천이 더 나은 제사로써
바로 코 앞에 닥쳐와 버리니까
이것을 어떻게 할줄 모르는 겁니다. 결국 합의도출이 예수님을 죽이고자 하는 모임으로 결성이 되는 겁니다.

거 보세요 예수님은 마귀만을 상대로 한다고 했잖아요 이상하게 없던(가시화 되지 않던) 마귀들이 그동안 숨어있었는냥 들키듯이 줄줄 세어나오는 겁니다. 앞으로도 나와야 하는 겁니다. 우리라고 해서 예외가 아닙니다. 그래서 미리 미리 들켜야 하는 겁니다.

주여 마귀에게 갇혀버린 저를 불쌍히 여기셔서 제발 건져내달라고
마귀만을 상대로 하시는 주님
전쟁을 벌리소서
브로큰애로우

그 부르짖음을 일부러 애굽왕을 세움으로써 부르짖게 만들어서
믿음이 오셔서 믿음을 세우시는 겁니다.
어딜 감히 인간의 믿음을 세웁니까?
오히려 인간에게서 나오는 것은 원망 원망 원망 뿐입니다.
그 원망을 담는 것이 믿음이라는 상자 곧 약속입니다. 언약박스입니다.
너희 죄가 붉을지라도 희게하신다는 믿음은 주님의 숙제입니다.

자 다시 사도행전으로 돌아와서
이미 주인을 결박했다 라고 선언하고 출발하는 것이 사도행전입니다.
지난시간에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이라는 원수의 터 위에서 성령의 전을 세운다고 했습니다.

(행 1:8, 개역)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이미 마귀라는 너희의 주인을 결박했다 라고 들어가는 출발입니다.

누가복음은 주인을 결박하지도 않았기에 자유인 곧 희년을 맞이한 자인냥 해방된자인냥 나서는 인물들에게 일부러 주인에게 결박당한 자들을 앞장세워 곧 배경을 깔고서 희년을 증거하십니다. 인간이 희년을 증거하는게 아니라 희년 자신이 희년을 증거하는 방식입니다.

그렇게 누가복음 졸지에 마귀라는 주인에게 결박당한 사망의 그늘에 앉은자 흑암의 백성 개같은 나그네가 고아 과부 나그네로, 없었던 자들이 새로 맹글어져서 희년이 삼은 대상자로써 없는데서 뿅하고 생겨나는데

사도행전은 그 반대로 십자가의 승리로 다 이루었다 라고 선언했음에도 불구하고 주인을 결박했으니 자유자가 나와야 함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다 기어들어가서 아무도 부활의 개시
생명의 개시
사랑의 개시를 외치는 자가 없는 겁니다. 자유를 줘도 말입니다.
결국 자신들이 원했던 자유가 아니다는 증거입니다.

실컷 예수님 뒤를 3년 동안 따라다녔으니 남는 것은 허무 뿐이구나
고기 잡으러 다시 과거로 되돌아 가는 것 뿐입니다.

그러니까 그러니까 이것 마저도 주님이 개시 해야 하는 겁니다. 인간 쪽에서는 그야말로 아무것도 없는 겁니다. 성화론이 그래서 거짓말입니다.

그럼 그 개시를 뭐로 출발합니까? 성령을 부으심으로써
내가 예수님을 죽인 원수입니다. 라고 죄인을 찾으로심으로 시작 됩니다.

죄 죄 죄 카지 마라 라고 짜증스럽게 성화론을 실컷 가르쳤는데 죄 죄 죄 카는 바람에 무너질까봐 신경쓰인다고 투덜거리는 놈들 삯꾼들이 한둘이가 아닙니다.

아니 무너질 것 같으면 그게 복음입니까?

자신이 자기 편 만들려고 했던 그 가르침이 허사가 된다고 자기 가르친 행위에 집착하는 겁니다.

성령이 죄인을 찾겠다는데 믄 군소리가 그렇게 많습니까?

그래서 기독교는 죄로 출발합니다.

이것을 기독교가 싫어합니다. 그래서 기독교로 부터 탈출해야합니다. 출기독교해야합니다.
고인 물은 썩어버립니다.

복음은 죄로 출발합니다.

성화론자들이 자꾸 죄 죄 죄 카지말라는 것은 복음을 말하지 말라는 소리와 같습니다.
복음이 아닌 성화 곧 합의도출 인간 쪽에서 다가감 이것으로 해결할수 있다는 소리입니다.
쪽팔리지만 한번 해 볼 때 까지 해보자 라는 겁니다.
(복음이 죄로 출발한다는 것은 나에게서는 더 이상 쳐다볼것이 없다는 뜻입니다.
예수님만을 쳐다본다는 겁니다. 그래서 죄인의 괴수 입니다.)

문제는 마귀를 볼줄 모른다는 겁니다.
아무리 순수하게 보이는 것 조차도 악마적입니다.

복음이 죄로 출발하는 것은 성화론자들이 말하는 죄가 그 죄가 아닙니다.
복음이 새롭게 만들어 내는 죄입니다.
복음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
의사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
형사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

죄를 만들어 내고
환자를 새롭게 만들고
범인을 뿅하고 새롭게 만들어 내는 겁니다.

그것을 새피조물이라고 하는 겁니다.

사도바울은 참으로 뻔뻔스럽게도 그 새피조물을 당당하게 죄인 중의 괴수 라고 합니다.
즉 예수님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 죄인 중의 괴수가 되어야 했어야만 했다는 겁니다.
실로암 소경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소경이 되었어야만 했다는 겁니다.
이것을 인간 쪽에서 즉 인간 쪽이 다가가는 믿음 쪽에서는 받아들여질수가 없습니다.
인간 쪽에서 다가가는 방식인 신학이라는 해석방식(변증법)이 바로
이 사람의 죄가 부모 죄 입니까? 자기 죄 입니까? 라는 심각하디 심각한
고민 중의 고민인 그야말로 자신들이 의사인냥 고민하는 정말 고민꺼리인 겁니다.
그러나 그것도 연기죠. 그들의 믿음은 오늘날 우리의 믿음처럼 연기입니다.
다른 문둥병자 혈루증환자 등등 그렇게 많이 산재해 있는 산더미 같은 심각한 문제를 내버려 두고 끝까지 의사자리를 고수하는냥 장난감처럼 소경을 예수님에게 까지 시비걸면서
자신들의 문제와 고민이기도한 그러면서도 너 까짓게 이런 문제를 풀수 있겠냐 라는 식으로 묻는 겁니다.

위선자(힘들어집니다 하낭에 훅 갑니다)가 되지 말고, 위악자(막살기)가 되면 됩니다.
위선자들이 보는 시선에서 위선자가 되면 됩니다. 반대를 위한 반대. 탕자. 앙띠 오이디푸스.
바리새인들이 보는 시각에서 바알세불 걸린 마귀들린자가 되면 됩니다.
성화론자들이 보는 시선에서 바리새인이 되면 됩니다.
광명한 천사들이 보는 시선에서 마귀가 되면 됩니다.
(무덤가에 귀신들린 두 청년을 예수님이 고치신 사건을 보면 도리어 정상적이다는 동네주민들이 예수님을 쫏아내는 겁니다.)

손 놓으라는 뜻입니다. 믄 말을 해도 시키는대로 했다고 자꾸 법 법 법을, 법 외에는 내세울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손 놓으라는 뜻입니다.

아이고 주님 오셨군요 야 야 야 진짜 의사가 왔어 우리 이제 까운 벗어도 된다. 수건벗자.
비로소 나를 놓아주시는 군요 라고 시므온 선지자처럼
우리 육체를 놓아버리면 됩니다.
실로암 소경이 소경이 아니라
우리가 소경이요
실로암 소경을 자기 죄 입니까? 부모 죄 입니까? 라고 묻는 우리 자신이 바로 소경이기에 의사 자리 내려놓고
진짜 의사가 왔다면 고쳐달라고 할 판국 뿐입니다.
사도바울 본인이 믿어야 할 판국이지
남을 믿게, 믿도록 만들기 위한 복음을 증거한 적이 사도바울은 없었습니다.

고쳐달라는 소경으로써 외치는 것이 사도직분입니다. 없어져야할 직분입니다. 그림자입니다.
실체가 오면
그는 흥하고 나는 망해야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손놓았다는 의미에서 또렷하게 실상을 증거하기 위해
나만 사도다 라는 식으로 뻔뻔스럽게 눈치보지 않고 복음을 증거하는 겁니다.
얼마나 손을 제대로 놓았으면 제일 늦게 사도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딴 사도들의 눈치를 안보며 오히려 더 당당하게 사도됨을 매맞은 것 뺨 맞은 것 죽을뻔 한 것을
더욱더 당당하게 너는 있냐 라는 식으로 증거합니다.
이 말은 손 놓았기에 매맞을 수 밖에 없는 악마의 환경을 제대로 직시하는 판국에
사도들끼리 쓸데없이 논쟁할 까닭이 없다는 겁니다. 푯대가 앞에 있는데 말입니다.
(주체 문제입니다. 손 놓으라고 하니 또 손 놓았다고 행함의 지키는 문제로 끝까지 보는자는 결국 믄소리를 해도 누구냐에 관심없고 개념 관념 지킬것인가 말것인가만 신경쓰는겁니다. 그 따위를 신경쓴다는 자체가 남을 의식하는 것이고 항상 자신의 숙제로써 안떠나는 겁니다. 그러니 막살아라 라는 말이 믄말인지 모르는 겁니다. 막살아라 라고 하니 또 막살기를 지켜요 ㅋㅋㅋㅋ  막살기가 누구냐를 보여줄수 없다면 그것도 거짓이 되는 겁니다. 회개 눈물 금식 기도하던 다윗이 갑자기 막먹고 막마시고 막춤추고 막노래부를 때 그것이 예수님을 말하는것임을 보여주지 못한다면 소용없습니다. 그래서 내 회개 내 기도 내 금식이 아이를 살려낼수 없고, 예수님이 오셔야 한다고 누구냐 라는 문제로 바꿔지게 되는 겁니다. 결국 회개 기도 금식 눈물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을 말하기 위함입니다. 아니 내 입에서 나오는 회개요 내 눈에서 나오는 눈물이요 내 배고픔에서 나온 금식인데 왜 이것이 예수님을 말하는 겁니까? 내 꺼지? 그러니까 막살아도 소용없는 겁니다. 예수님을 드러내기 위해서 행함이 있는 믿음으로써 아브라함은 이삭을 바쳤습니다. 인신제사를 도리어 믿음으로 본 겁니다. 예수님을 말하기 위해서 기생라합은 거짓말을 했습니다. 그 거짓말이 예수님을 말하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행함이 있는 믿음입니다. 이것이 법이 되면 결국 믿음이 아닌겁니다. 믿음을 결국 예수님이다 라고 말할수 없게 됩니다. 바로 법의 돌삐가 날라오기 때문입니다. 목숨과 항상 직결이 된 문제입니다. 법이라는 날카롭고 냉정하고 에누리 없이 심판하는 그 심판의 칼날위에서 겁대가리 없이 거짓말하고 겁대가리 없이 막살고 겁대가리 없이 법이 눈 시퍼렇게 떠 있는 안식일날에 밭에서 먹을 것을 막 먹어버리면 이것은 예수님을 말하기 위함이지 그 행동 했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함이 아닙니다. 증상이다는 겁니다. 예수님이라는 몸에서 나온 증상으로써 말입니다. 해석학은 결국은 주체문제입니다. 해석하겠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됩니다. 도리어 해석당해야 할 판국입니다. 그래서 주인 문제입니다. 안식일이 누구냐 라는 말은 안식의 주인이 누구냐 라는 문제입니다. 주인이 떳으면 안식일에 대한 해석, 지킨 것, 그동안 안식을 지킬려고 준비했던 모든 도구들 할례 도구들처럼 모두 손 놓으라는 겁니다. 그림자 시대는 끝났고 실상의 시대가 왔다는 겁니다. 믿음은 실상의 시대입니다. 지킬것이 없습니다. 다 이루신 것을 어떻게 왜 무엇땜에 누가 다 이루었는지를 누리는 것 뿐입니다. 십자가의 용서만을 누리는 삶만 있을 뿐입니다.)

누가복음은 흥한 분이 왔기에 그 희년의 증상이 미리
결과를 앞당겨서 통보하는 식으로 없던 존재들인 고아 과부 나그네가 새롭게 형성 됩니다.
희년의 증상입니다.

사도행전은 그 흥한 분이 승리했기에 이제는 나는 망해야 함이 나타나야 합니다.
그 망하는 것이 예루살렘 온 유대 사마리아 땅끝이라는 죽음 이 모든 것이 망함을
원수됨을 그 분이 세워졌기에 망한자로써 나타나야 하는 겁니다.

그런데 쏴아 ~~~~~~~~~~~~~~~~~~~~~~~~~~~ 얼음땡처럼 고요하고 낙엽만 뒹굴고
야 야 안돼겠다 고기잡으러 가자 라고
이상하게 망한자가 안나타납니다.
죽은자가 안 나타납니다.
예수님이 죽었듯이 우리도 죽었다는
그런 죽은자들이 안나타납니다.

죽은자가 나타나지도 않는데 어찌 산자가 나타나겠습니까?

그래서 인간 쪽에서의 철저한 단절성으로 전제로 하고 분명히 하고

성령의 단독적인 활동이 펼쳐집니다.
피 혼자만의 활동입니다.
죽은자를 찾습니다.
너희가 죽인 예수가 살아나셨다 라는 성령만의 외침을 죽은자에게만 들리는
들을귀 있는 자에게만 해당되는 소리입니다.
살았다고 우기는 자에게는 전혀 듣기질 않습니다.
그래서 새롭게 죄인을 새로 만들어야 합니다. 죽은자를 새롭게 만들어야 합니다.
고기잡으러 가자 라는 제자들을 죽여서 다시 그 음성을 듣고 일으켜 세우는 겁니다.
죽은자 찾는다고 하니까 그 조건을 갖출려고 하면 안됩니다.
주님 숙제입니다. 죽였다가 살렸다가, 병주고 약주고 ㅋㅋㅋㅋ 치료의 하나님 여호와 라파?  
살았다 라는 것은 인간에게 해당되지 않습니다. 생명은 예수님입니다. 생명은 누구냐 라는 문제입니다.

그래서 약속하신 성령을 부으십니다.
여기서 약속하신 이라고 단서를 붙이는 이유는
좋은 의미라고 보시면 안됩니다.
(전제가 너희는 이미 다 죽었다 라는 전제입니다.
생명을 부었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부었다는 겁니다.
그 부음을 당한자는 당연히 예수 그리스도의 삶 외에는 없습니다.
그런데 성화론자는 거기서 따로국밥처럼 예수님의 삶도 있지만 예수 믿는 나의 삶도 또 있다고 보는 겁니다. 결국 믄말인지 아시겠지요? 주체문제라는 겁니다. 끝까지 주님은 안지십니다.
나와 싸워서 끝까지 이기시는 겁니다. 옹고집입니다.)
약속했다 라는 것은 그 약속을 고대하고 고대한 자들이 있었다 없었다?
있기? 없기?

이상하죠 우리는 장담할수 있습니다. 왜냐 약속을 기다리고 고대할것이라고 말이죠.
그런데 성경 어디에도 찾아봐도 없습니다. 약속을 기다린적 없습니다.
약속 자체가 각기 제갈길로 뿔뿔히 흩어버렸습니다. 양같아서 말입니다.

그렇게 신기한 것 봤고
누렸고
주님으로부터 도움받았고
그렇게 주님 자신의 목숨까지 내어주셨는데
정말 목숨 까지 받았다면 다 받았는데
그렇게 받아도

고대했다 안했다? 했기? 안했기? 있기 없기?
없습니다.

이상하게 여기지 마시길 바랍니다.
없어야만 합니다.
그래야만 약속한 성령을 주님이 주셔야만 비로소 새롭게 모이는 겁니다.
죄인을 새롭게 만든다는 의미가 이런 의미입니다.
(당연히 율법에서 보는 죄인 이라는 시선이 중첩됩니다. 그러니까 사건 곧 창조가 또 벌어지는 겁니다. 무한반복으로 말입니다.)

아무리 뿔뿔히 흩어져 버려서 고기잡으러, 자기 먹고살길 찾아서 되돌아가버리고,
자기 직장까지 버리면서 따라갔던 그 길을 다시는 다시 안돌아가리라 그냥 고기만 잡고 살아야지, 내가 미쳤지 헛된 3년만을 버렸구나 라고, 다짐하고 다짐해도

그 단절성을 분명히 하고서 주님 쪽에서 새롭게 시작하는 겁니다. 다 뚫어버립니다. 주님 쪽에서 넘어오심, 찾아오심, 즉 성령을 주심 외에는 절대로 뚫을수 없습니다.

아무리 주인을 결박했어도
주님이 다 이루셨다고 승리를 외쳐도
세간인 가구품은 자력이 없습니다.
그것이 기쁜 겁니다. 사생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성령을 부으니까 비로소 죽은자들이 망한자들이 나타나는 겁니다.
누가복음의 시작과 반대처럼 보이죠? 사실상 같습니다. 누구냐를 드러내는데 있어서는 같습니다.)

그러나 자력이 있어버리면 사생아인데
이 사생아 들이 예수님을 믿겠다고 나서는 겁니다.
얼마나 믿음이 좋은지 원? 얼마나 예수님이 안 믿겨졌으면 예수님을 믿겠다고 달려들겠습니까?  그래서 사도행전에서 이런 광경을 보여주는 이유는 사생아들이 바로 이런 것을 무시하는 겁니다. 물론 저들은 절대로 그럴분들이 아닙니다. 가카는 절대로 그러실분이 아닙니다. 무시하기는커녕 철두철미하게 그대로 성경 그대로 행합니다. 바로 그것이 무시한다는 뜻입니다.

사랑은 여기있으니 너희가 날 사랑하는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사랑해서 화목제물로 자기아들을 아낌없이 준다고 했습니다.

너희가 날 사랑한 것이 아니요 라는 무시를 당해야 말씀을 무시안하게 됩니다.
그 무시를 당해본적이 없으니까 오히려 말씀을 무시하는 겁니다.
어떻게? 너희가 날 사랑한다는 방식 말입니다. 이것이 인간 쪽에서 준비한 제물입니다.
화목 되지도 않는 제물을 자꾸 바치겠다고 가지고 오는 겁니다.

제가 이렇게 말하니까 못알아먹겠다 어렵다 라고 갑자기 모른척 합니다.
정말 몰라서일까요? 그들이 저 보다 훨씬 똑똑하고 훨씬 수준 높다고 자신들 입으로 그렇게 외쳤거든요.

제가 그런 사람들을 이길려고 하는게 아닙니다.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어차피 우리는 예수님에게 져야만 하는 주님만 나를 이기시는 분이 되면 된겁니다.

그런데 자꾸 인간인 저에게 질까봐 두려워 하는 겁니다.
아니 제가 당신들 이겨서 뭐하게요? 당신들처럼 사람을 이겨서 자기편만들어 본들 소용없습니다.
각기 제 갈길로 가야만 하는 내버려 둬야할 양같은 자들인데
왜 쓰잘데 없이 자꾸 끌어들여서 꿈속에서 그리는 아름다운 조직을 만들려고 하는가 말입니다.

주님이 엠마오로 가는 고기잡으러 되돌아가 가는 자들을 돌이켜서 예수님 자신의 사조직을 만들었습니까? 사조직을 만들면 죽어나가도록 소모시키겠습니까? 더더욱 힘을 결집시켜야지?
바로 이런 합의도출식의 사고방식인 선악방식은 눈에 보이는 교회를 정당화 하는 겁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세우시는 교회는 바로 그런 교회와 정면 대치되면서 단절되는 교회입니다. 오로지 이 죄인을 용서하신 분은 예수님뿐이다 라고 다른 머리를 일체 허용하지 않는 자를 저런 눈에 보이는 시스템 교회에 목베인 영혼으로써 출몰하게끔 싸움붙이는 겁니다.

눈에 보이는 교회 마저도 머리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목사도 머리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진짜 죄인이란 죄인 중의 괴수란 예수님만 머리로 삼을 뿐입니다.
그 머리 되신 예수님이 자신이 십자가에 못 박은 예수님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손가락질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즉 사건화 됩니다.
그런데 그 손가락질이 도리어 남이야기가 되지 않도록
저마다의 사적 영역이 한데로 묶여지는 십자가 사건으로 동일화 시켜버립니다.
이것이 사건의 목적입니다. 모든 사건은 십자가가 벌리는 십자가가 십자가 스스로를 드러내는 사건입니다.

이 사건이 졸지에 증식이 되고 확대가 되어 온천하 만국을 피 바다로 만들어 버리는 겁니다.

조그마한 세숫대아에 담긴 제물을 씻은 핏물이 온천하 만국을 덮어버리는 피 바다로 만드는 방식으로써의 사건인 사건 자체가 인격이 되고 십자가 자체가 살아 꿈틀거리는 주체가 되어

죄인 중의 괴수는 한낱 심부름꾼 세간 가구가 되어 배치되어서 사건 속에서

예루살렘을 십자가의 피 바다로 온 유대를 십자가의 피 바다로
사마리아를 십자가의 피 바다로 땅 끝을 십자가의 피 바다로 물들여 버리는 겁니다.

이 사랑이 여기 있습니다. 인간의 사랑 보탤 생각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 피가 어떻게 발통이 달려서 어떻게 사건을 벌리고 어떻게 용서를 용서 답게 만들어가는지
그 몰입도에 빠져서 한 눈 팔수도 없을 정도로 긴박하게 다이나믹하게 촛대를 옮기듯이
생생하게 허걱 거리면서 우리의 모든 것을 압도적으로 눌러버리면서 펼치시는지를
목격하시는 저절로 안외치고는 못배기는 겁니다.

나 이래 이래 주님에게 당했다 라고
당한게 뭐 그리 자랑이라고 참으로 뻔뻔스럽게 외쳤건만
그 손가락질 하는 놈이 또 도로 당해서
나랑 똑같이 나 이래 이래 주님에게 당했다고 외치면서
우리 둘만 아는 것이여 우리 셋만 아는 것이여 라고
이것은 입에서 나는 소리가 아니여
말씀 스스로에게서 나는 소리여 라고
입에 침 발라가면서 외치는 겁니다.

마귀 보란 듯이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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