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의 해석 vs 십자가로부터 해석 당하기

평강을 외치는 악마의 변증법에 대하여(합의 도출), vs 전쟁(피훌리기)를 통해서 화목을 이루시는 성령의 변증법


(인간의 성화냐? 성령의 성화냐?)


케 보이(Che Voui)
  니가 이거 원했잖아? 언제예?

2012년 3월 31일 토요일 오후 10:37:14  김대식


약속을 담는 그릇이다.
약속이 담겨 있는지! 아닌지! 
쪼개보면 안다.
깨뜨려 보면 안다.
그릇 속에 뭐가 들어있는지?
그것을 보고 맞군요 당신이 옳았습니다 라고 하는 것이다.

엘리 엘리 라마사바다니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니가 원했잖아

나의 원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앙띠 오이디푸스 (반대를 위한 반대)
쪼개어 보니 긍휼이 담겨있음
은혜가 담겨있음
법이 아닌 은혜
선악이 아닌 생명이 담겨있음

뭘 원하는지도 몰랐는데 쪼개어서 꺼내어보니
맞네 맞네 참말로 맞네 내가 이것을 원했어요
맞제? 맞제? 내말이 맞제? 야 ~~ 맞구만유

이것이 우물가의 여인에게 목마르지 않게 해달라 라는 말도 안되는 추상에
니 남편 데리고 오라 라는 말에?

와요? 목마르지 않게 다시는 물 길러 오지 않게 해주이소마 라는 말에 대한 답이다.

영원히 목마르지 않게 해주겠다는 추상에 덧때우는 더 추상을 뒤짚어 씌운다.

니 남편 데리고 온나.

없슴더

그래 맞다 지금 있는 남자도 니 남편 아니다.

으메 깜놀!! 당신 선지자 맞제?

동네 사람들 선지자가 떳어요 떳어
붉은 밧줄 걸어놓읍시다 퍼뜩 퍼뜩

바닥을 치니 최종적인 후사가 있다.
기업무를자가 있다.
최종적인 신랑이 있다.
섬기는 왕이 있을 줄이야? 깜놀 깜놀 깜놀  꼬끼오 꼬끼오 꼬끼오

그래서 자 이제부터 접시를 깨자
접시를 깬다고 세상이 달라지나 라고
바가지(생명의 물을 담는, 영생의 물을 마시고자 했던 그 바가지 그릇을 시원 시원하게 팍 팍 팍 깨뜨린다.) 냅다 던지고
뿌뿌뿌 나팔분다. 무시험합격 무시험합격 무시험합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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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의 해석 vs 십자가로부터 해석 당하기

평강을 외치는 악마의 변증법에 대하여(합의 도출), vs 화목 화평을 전쟁(피훌리기-십자가의 죽음, 피만 쳐다보기)를 통해서 이루시는 성령의 변증법

(인간의 성화냐? 성령의 성화냐?)

2012년 4월 2일 월요일 오전 10:57:40  김대식


쉐마 쉐마 들으라 이스라엘 네 듣겠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라 / 네! 하나님을 사랑하겠습니다.
온 마음과 정성으로 / 네! 온 마음과 정성으로 마음을 다하고 정성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겠습니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 네! 사랑하겠습니다.

유대인은 이 말씀을 특별히 유대인에게만 이스라엘에게만 들려주시는 주님의 음성에
응답하겠습니다. 듣겠습니다. 들은바를 실천하겠습니다 라는 뜻에서

합의를 도출할려고 했습니다. 합의도출.
(개혁주의에서 언약사상을 일방적인 언약이 아니라 쌍방언약이다 라고 주장하곤 했습니다. 물론 일방적인 언약도 있는데 상대방을 완전히 무시하는 언약이 아니다. 신실하시기에 일방적으로 하지 않는다 라고 그런 주장을 들은적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일치성을 추구하는 합의도출 변증법입니다. 대표적인 것이 삼위일체겠죠. 산상수훈 해석도 같은 해석의 사고방식으로 합니다. 이런 해석 곧 변증법은 인간으로서는 더 이상의 진리가 없을 정도로, 합한, 하나님과 마음이 합한, 도출입니다. 이 보다 더 나은 해석은 없다 입니다. 변증법이란 해석학이거든요. 결국 논리란 안해서 그렇지 하면 된다는 식입니다. 완벽한 논리추구, 저쪽이 합의하자고 화해하자고 나오는 사랑의 하나님인 모습인데, 인간쪽에서만 합의하자고 나아가면 된다는 겁니다. 안될 일이 어디있겠느냐 라는 식입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이 들으라 이스라엘 이라고 들려주신 신명기의 계명은 듣는 귀가 있어서 듣게 되는 것이 아니라. 들을수 없는 귀를 통해서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엥? 또 무슨 이상한 소리할려구? 들을 귀가 있어야 듣지? 들을귀 없는 자는 못듣고 !!)

귀를 짤라서 할례 거세한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귀를 비벼야 합니다.

혹시 제가 잘못들은거 아닙니까? 참말인겨?
다시한번 케보이소?

오냐 다시 카마 ! 네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네 하나님을 사랑하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

내가 잘못들었나? 내가 잘못들은 것 같은데 ~~~~~

네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네 하나님을 사랑하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칸거 맞지예?

그래 맞다. 제대로 들었네 !!

아니지예 제가 잘못 들었는거 맞네예?

저 그거 못합니다. 때려죽어도 못합니다. 아니 못하는 것을 하라 라고 하면 우짭니꺼?
전 안들을랍니다. 안듣기네 안듣기네 잘못들었네 잘못들었네 고개를 절래 절래 흔들어 버립니다.

쉐마 쉐마 웃기지 마이소 안티쉐마 안티쉐마 안들을랍니다. 안들을랍니다. 안듣깁니다, 안듣깁니다.

이것이 진짜 우리의 속내입니다.

그런데 들으라 이스라엘 쉐마 라는 말은 우리보고 듣고 들어서 실천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이 약속의 발언자 주체가 실시하겠다는 겁니다.

말씀이 말씀에게 외치는 겁니다. 약속이 약속에게 외치는 겁니다.
내가 원하지도 않았던 말씀이 내 마음판에 이미 새겨진 겁니다.
내가 원치도 않던 약속이 내 뱃속에 자리잡은 겁니다.
그래서 주께서 내 주께입니다.
주님이 주님 자신에게 외치는 겁니다. 다윗의 자손이 아닙니다.(또 잘못들었나?)
(즉 다윗의 자식이 아닙니다. 다윗이라는 죽은자에게 산자로써 살아계신 하나님의 약속이 후사가 되는 겁니다. 다윗의 육의 자식은 오히려 누락 됩니다. 백날 낳아봐야 죽은자식일 뿐인 한 아담입니다. 죽은자입니다. 그래서 의도적으로 우리야 아내 에게서 라고 마태복음은 1장의 예수님의 족보에서 다윗을 일부러 빼는 겁니다. 유대인에게는 있을수 없는 일이 벌어진 겁니다. 직통계보가 아니 접붙인 씨받이 자식들의 족보라니? 그것도 비거룩한 여자 5명 [삑사리 에게서]? 그래서 주께서 내 주께 입니다. 그것을 말한 다윗에게 성신이 정직한 영(정직한 영이 없었기에 : 삑사리 이기에)이 임해서 그 노선으로 온다는 겁니다. 다윗이 누락당함으로써 거세 할례 당함으로써 보게된(베드로는 물속에 빠짐으로서 보게된 누구십니까? 꼬끼오 울음으로서 보게된 니가 나를 사랑하느냐?라는 회개의 영-넘어오시는 영) 그 주님이 다윗이 보게된 방식으로써 오신다는 겁니다. 물론 다윗은 그림자입니다. 실체를 유물적인(기계) 다윗이라는 물질을 통해서 오시는 겁니다. 다윗은 물질인데 인간들은 다윗을 물질로 안봅니다. 도구 로봇으로, 기계로 안 봅니다. 오히려 에봇처럼 우상화 합니다. 인간을 우상화 할수 없다는 것을 유대인만큼 잘 아는자가 없습니다만 그렇다고 포기할 인간들이 아닙니다. 유대인들이 아닙니다. 또 일부러 그렇게 주님은 그런 인간의 내막을 들추어내시면서 오시는 겁니다. 인간들은 말려들 수 밖에 없습니다. 안말려들 것 같으면 주님이 언급할 이유가 없습니다. 말려드는 방식으로만(어리석은 십자가) 일하십니다. 악한세대의 기적이 아닌 요나의 표적만 보이시는 이유도 그러합니다. 유구무언입니다. 어찌 다윗이 다윗의 자손에게 주 라 하느냐? 정작 여기서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믿음이 자기를 위한 우상임이 드러납니다. 답은 무지 간단합니다. 주라 할수 있는 이유는 하늘에서 왔기 때문입니다. 즉 출처가 그 어떤 이유로도 땅의 것은 특히 육은 다 짤리는 겁니다. 하늘에서 왔으면 쉽게 주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유대인들이 답변을 못합니다. 어린아이도 다 아는 이 쉬운 답변을 못합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예수라는 유물적인 인물이 다윗의 자손이며 다윗이 말한 주 라는 것을 시인하는 다윗에 동의를 못하는 겁니다. 똑같은 방식 정직한 영이 없음이 분명해 졌고(내가 주께만 범죄) 없기에 정직한 영을 주시니, 그 방식으로써 즉 영의 소욕으로써 다윗의 자손이 주로써 오는 겁니다. 이게 인간들의 지혜가 최종적으로 답이라고 내놓은 변증법 곧 합의도출입니다. 설마 이것을 배신 때릴 리가 없다는 겁니다. 그러나 오히려 보기좋다라는 식으로 바로 배신때립니다. 합의도출은커녕 더 간격이 벌어지고 졸지에 쌍둥이로 갈라져 버리니 더욱더 헷갈리는 겁니다. 다윗의 자손이 졸지에 둘로 나누어졌다는 겁니다. 유대인이 문자를 소유하듯이 자신의 신체에 맞게 소유한 다윗의 자손과. 예수님 자신이 다윗의 자손과 직결 직접연결시키는 다윗의 자손과 둘로 나누어지는 겁니다. 그러니 답변을 못하는 겁니다. 세례요한을 보는 시각 또한 그러합니다. 합의도출이 안되기에)

오히려 들을수 없다는 뜻입니다.(이것이 단절성입니다. 구조 즉 비역사적인 판대기를 본 겁니다.)

자 그럼 왜 이스라엘에게 들으라고 쿡 찝어서 대상을 삼았습니까? 못지킬줄 뻔히 알면서 말이죠.
이것이 바로 증상이라고 누누히 말했습니다. 자기 자신을 스스로 드러내는데 있어서 은밀히 감추었다가
아무도 못 풀도록 비밀화 하는데 있어서 멱살잡힌자들이 바로 껍데기로써, 그릇으로써, 기계 도구로써
약속이 담겨져야할 자가 이스라엘 입니다. 결국 이스라엘의 기능은 딱 하나 입니다.
주의 길을 예비했던 세례요한처럼 나보다 앞선 분을 증거하는 목격자 곧 실체를 외치는 증상 곧 그림자역할 입니다. 그것이 바로 무익한 종입니다. 종이란 주인 때문에 있는 의미이지 독자적인 의미로써 종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누구 누구를 말해야 하는 자가 종입니다. 종 자신을 위한 종은 없습니다. 그래서 어디까지나 증상입니다. 실체도 아닌것이 그림자요, 그림자라고 무시했더니 실체가 등장하는, 경계선에 놓여진 자 입니다. 피부 처럼 말입니다. 피부 벗겼다가는 죽음의 두껑이 열어재낀냥 밀려옵니다. 괜히 뚜껑열었어 괜히 괜히 ~~~~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에서 두 사람이 기도합니다. (성전도 졸지에 둘로 갈라집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를 통해서 누가 과연 들겠는가 라고 하십니다.

한 사람은 바리새인이요 또 다른 한 사람은 세리 매국노입니다.
바리새인은 저 세리와 같지 않음을 감사하면서
그 감사의 내용을 풍성하게 가지고 바칩니다.
십의 이조를 드리게 되어서 감사
이레에 두 번 금식하게 되어서 감사
너무 너무 감사할 것이 많아서 참 감사하다는 겁니다.

그러나 세리는 감히 고개도 들지 못하며 성전 저 구석에 쳐박혀 있습니다.
감사할 꺼리는 내 놓기는커녕 오히려 용서만을 바라는 모습뿐입니다.
무슨 그리도 큰 죄를 지었는지? 철저한 사형수 모습입니다.

마치 마귀들린 소녀의 어미가 맞습니다. 저 개 맞습니다. 그러나 그 개도
주인의 밥상에서 떨어진 부스래기를 먹지 않습니까 라고
주인의 긍휼이 없으면 저 죽습니다 제발 제발 고쳐주시옵소서 라고

다윗의 자손이여 고래 고래 고함지르며 민폐를 끼치는 겁니다.

이것이 듣는자의 모습입니까?
이것이 쉐마 쉐마 하는 자의 모습입니까?

오히려 성전 안에서 감사할 것이 많아서 감사기도 드리는 바리새인
그리고 민폐를 끼치지도 않고, 조용 조용하게 살아가는 보통사람(고함 지르는 두 소경에 상대적인)이 훨씬 낫지 않습니까? 사실 우리의 기도 내용이 다 이겁니다.

어떤 누구도 다윗의 자손이여 고래 고래 고함지르는 자 되기 싫어합니다. 째려봅니다.
고~~~~래 ? 안되겠다 야! 조용한 사람 불러야 겠다야 ~~~~

어떤 누구도 세리와 같이 나라와 민족을 배신때려가며 빼앗은 세금을 로마에게 바치는 매국노가 되는 것은 싫어할 겁니다. 그게 무슨 이웃사랑입니까?
(이웃사랑-쉐마 자체가 합의도출이라는 인간의 해석 곧 변증법을 들추어내는데 있어서 말려드는 식으로 나오는 겁니다. 그러니 오히려 이웃사랑의 대상이 되면 되는데 이웃사랑의 주체가 될려고 하니 악마입니다. 7번 용서의 대상이 되면 되는데, 7번 용서 할려는 자가 되고프니 그 변증법은 성령의 단절성에 지적을 받아야 하는 겁니다. 그 지적이 사랑이요 화해 곧 용서입니다. 곧 매입니다. 사랑하는 자에게 매가 있습니다. 사생아는 자신만의 변증법이 있기에 매가 없습니다.)

다 죽고 내만 남았나이다 내 열심히 특심인데 내만 겨우 남았으니 이게 무슨 제대로 일이 되어가는 짖입니까? 차라리 나도 쾍 하고 죽였뿌이소 마,
시키는대로 했잖습니까? 시키는대로 어 어 어 ~~~~    

말씀 곧 계명은 주님이 발언하시고 주님이 성취하십니다.
바리새인의 쉐마 정신은 인간쪽에서의 성화운동 곧 묵시운동과 같습니다. 하나님나라 운동입니다.

그러나 주님 쪽에서의 성취는 성령의 성화입니다. 성령의 묵시활동입니다. 예수님 나라 증거입니다.

이 둘이 서로 원수지간입니다.

그래서 성령 곧 십자가의 변증법 곧 화해 도출법은 서로 서로 싸움붙여서 서로가 예수님을 죽인 원수임을 죄인 중에 괴수임을 알게 하는 것이 바로 은사입니다. 이것이 성령의 성화입니다. 주님 쪽에서 실시하는 겁니다.

귀를 할례하는 것은 인간의 손으로 할례도 하는 판국에 귀 까짓거 못하겠습니까?
그만큼 귀 까지 짤라낼정도로 인간은 악하다는 겁니다.
눈을 뽑아내라 라고 하니까 진짜로 눈을 뽑아버리는 것이 인간의 쉐마 ! 말씀을 듣고 저 실천을 분명히 했습니다. 나중에 딴소리 하지 마이소, 분명 듣고 쉐마 실천했습니다 라는 것이 바로 인간의 악마성입니다. 살인의지입니다. 안했다면 죽이고픈 마음이 없습니다. 했기 때문에 죽이고픈 겁니다.

저도 저 자신이 깜짝 놀랄정도로 희한한 마음이 생긴적 이었습니다. 생전에 그런 마음이 듣적이 없었는데 이상하게 갑자기 어느 순간이 딱 되니까 벗아날 수 없을 정도로 덮쳐지는 겁니다. 정말 정말 죽이고플 정도로 그런 마음이 생기게 되니 깜짝놀랬습니다. 이상하다. 왜 이런 생각이 생기지? 그래서 밤 잠을 설쳐서 바로 그 다음날 바로 화해를 청하러 갔던 일이 있었습니다. 그것 조차도 그 사람을 디기 생각해서가 아니라 제 몸이 제 마음이 안아프게 하기 위한 방편으로 했기 때문에 퍼뜩 화해를 청했더니 몸도 안 아프고 마음도 불편해지지 않았던 겁니다. 이 얼마나 인간은 자기 밖에 모르는데 뭘 했다고 여기게 되니까 마치 공황장애처럼 갑자기 죄의 소원이 덮치게 되는 겁니다. 이 정도로 나는 악하구나 남 나무랠입장이 못됩니다. 실로암 망대 무너지니 하나님으로부터 저주 받아서 그렇다고 여겼는데 예수님이 옆에서 그 다음 니 차례다 라고 하니 얼마나 주의 목전에서 항상 범죄하고 있다는 것이 발각당하는 것 아닙니까?

아무도 장담을 못하는 겁니다.
(어느 책에 그 어떤 살인의 환경 동기 분위기가 전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10초 만에 남을 살해할수 있다 라는 심리학보고서가 책으로 나온적 있습니다. 오히려 이 사실을 적은 책을 보면 더 솔직하죠. 인간은 철저한 기계라는 것을, 자유의지는 10초만에 당장 발휘 못합니다. 그래서 붙들어 주셔야만 합니다. 간섭해주셔야만 합니다. 근육운동 소용없습니다. 합의도출 필요없습니다. 무조건 머리 쳐 박고 불쌍히 여겨달라는 소리 밖에 안나옵니다. 그렇게 일만달란트 용서 받아도 바로 코 앞에 백만원 빚진자 일부러 지나가게 만들면 우리는 시험듭니다. 용서를 그렇게 용서답게 높이시기 위함이지? 인간이 받은 용서로 그 인간을 높이기 위함이 아닙니다. 용서 자체를 가치있게 절대로 손해보지 않도록 용서를 높이기 위해서 인간은 도리어 용서의 기계로 천하디 천하게 취급하는 겁니다.)

차라리 아무것도 안하는게 제일 낫습니다. 근데 이것이 불가능하다는 거죠. 그냥 막사세요.

결국 귀를 스스로 짤라내고, 눈을 스스로 뽑아내고, 타짜들이 자기 스스로 손모가지. 팔모가지 백날 짤라내어도 쉐마를 이룰수 없습니다.

합의도출이 안됩니다. 괜히 짤랐어 괜히 짤랐어 괜히 짤랐어~~~~

차라리 짜르지 말고
그 타짜의 손모가지가 진짜 내모습이다 라고 불쌍히 여겨달라고 하세요.
(중독 되었기에 영원히 고칠수 없는 썩어빠진 손이기에 그것이 내 손이 아니다 라고 여기지 말고
그 손이 내 신체 전체를 대변해 주는 진짜 내 전 신체의 진찌 모습이다 라고
불쌍히 여겨달라고 그 썩은 손을 전 신체의 증상으로 보시면 되는 겁니다. 대표의 모습입니다. 대변자.)

물론 언젠가 다시 튀어나오는 날이 있겠죠.
못 벗어나는 겁니다.
이것이 사실상 모든 인간에게 해당됩니다.
육체에 가두어 버린 겁니다.

그것을 억지로 벗어날려고 하지 말고
왜 ? 누가 ? 이렇게 했는가를 보라는 겁니다.

알고보니 주여 누구십니까? 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그 분 뿐입니다.

왜 하필이면 접니까? 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그 분 뿐입니다.

답은 간단합니다.

팔 짜를까요?
눈 뽑아버릴까요?

전혀 전혀 네버 네버입니다.

내가 합의도출해서 더러운 눈을 뽑아서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니라
주님 쪽에서 합의도출하는 것이 바로 주님이 대신 죽는 십자가입니다.

이것이 주님 쪽에서 마련한 변증법 곧 여호와 이레입니다. 여호와께서 함께하심이요 곧 일치성 하나됨
여호와께서 준비하심입니다. 죄를 사하는 화해의 화목의 제물입니다.
(결국 두 소욕의 싸움터가 성도의 삶이요 신체입니다. 그러니 기계적인 기능으로 봐야지
그것을 내 숙제로 보면 안됩니다.주님께서 어떻게 나를 이기시는가를 보는 겁니다. 그럴 때 새로운 주님이 새롭게 보입니다. 전혀 낯선 어제까지 알던 주님이 아닙니다. 그래서 누구십니까 라고 하는 것이 진짜 해석이요 진짜 변증법입니다. 내 지식 속에 머물지 않고 전혀 새롭고 낯선 분으로써 십자가의 사건을 유발시켜 내 속에 있는 악마를 끄집어 내시고 또 다시 동시적으로 내 속에 있는 약속 곧 피 바름을 끄집어 내시는 겁니다. 이것이 성령의 변증법 곧 주님 쪽에서 합의도출하시는 십자가 뿐입니다. 오히려 시공간 역사 속에서는 철저한 단절이요 거리두기요 간격벌리기입니다. 그 사이에서 그 빈공간에서 태어날 수 없는 것이 태어나는 겁니다. 긍휼입니다. 처음자리입니다. 용서입니다. 그것이 십자가가 잉태한 피 자녀입니다.)

그것이 바로 빚갚기
[고아 에게서] 기업무라주기, 기업무를자
[과부 에게서] 지금 있는 남자도 니 남편이 아니구나, 영원히 마르지 않는 영생수를 주겠다. 새신랑이 나 다.(전 남편들과의 대비입니다.)
[나그네] 아무도 섬기는자 베푸는자 입혀주고 재워주고 이불덮어주고 목마르면 마실 것 주고 배고프면 주린 배 채워주는 먹을 것 주는 섬기는 자가 없는 나그네에게 든든한 임금이 되어주마. 너의 본향이 되어주마. 너가 타향에서 포로되었으면 내가 전쟁에서 승리해 빼앗아 주마 라는 것이 바로 구원의 뿔이 나의 왕이 되는 겁니다. 강도만난 너에게 선한 사마리아인이 되어주겠다는 겁니다.

이것이 주님 쪽에서의 합의 도출 화해인 십자가 뿐입니다.
자기 아들을 내어주사 피 값을 치르시는 어리석은 방식 외에는 [들으라]라는 쉐마에 응답할 수 있는 자는 없습니다. 그 어떤 접촉점은 없습니다.

그래서 그 단절속에서 주님의 변증법이 주님 쪽에서 넘어 옵니다.

7천명 남겨 놨다. 가오리에 쏘인것처럼 콱 쏘여서 마비되듯이

허 걱

아뿔사

내가 틀렸고 당신이 옳았습니다 라고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너 남편들에게 버림받았지? 백날해도 널 버리고 갈 뿐이지?
내가 너의 남편이 되어 주마. 나의 살과 피를 마셔라.
내가 주는 만나는 영원히 주리지도 목마르지도 않는다.

이것이 주님의 변증법입니다. 아무것도 심각한 것이 없습니다.
한참 심각했던 [나만 남았나이다]. [나는 고아입니다]. [나는 과부입니다]. 7명의 남자 다 날 버립니다. [나는 나그네입니다]. 거지입니다. 아무도 먹을 것 마실 것을 주는 자비를 베푸는자가 없습니다.

이런 심각함 곧 죽음의 권세에
그 죽음의 터 위에서
주님의 풍성함을 주십니다.
곧 자기 아들을 내어주사입니다.
(물속에 빠뜨려서 주여 도대제 당신 누구십니까? 전에 알던 분이 아닌 낯선분이네요. 누구세요? 어느정도로 몰라 봤던 것일까요? 자기목숨을 내어주면 모든 것을 내어준 겁니다. 그것도 후사를 내어준 겁니다. 자기아들을 내어주사 독생자입니다. 이것이 부활입니다. 독생자 자기 아들을 내어주지 않으면 그거 부활아닙니다. 후사만을 내어줘야 진짜 부활입니다. 죽었다가 살아는 것은 부활아닙니다. 하나님 자신이 직접 드리는 제사입니다. 아브라함처럼 이삭을 바치듯이 독생자 예수님을 바치는 겁니다. 이것만을 믿음이라고 합니다. 믿음을 자꾸 인간의 숙제인냥, 행함의 운동인냥 여기면 안됩니다. 백날 해도 부활 안됩니다. 주님의 믿음 곧 후사를 제물로 내어주는 것 만이 믿음입니다. 그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러 우리가 참으로 뻔뻔스럽게 십자가의 사랑을 의지해서 뻔뻔스럽게 외치는 겁니다. 이 뻔뻔을 제거해서 부끄러운 받지 말자라고 나오는 것이 또 합의도출 변증법입니다. 결국 인간의 변증법(소욕)은 성령의 변증법(소욕)을 수용못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성령이 십자가 외에는 자랑 하지 않거든요!!)

자기목숨 내어준것이면 모두다 내어준것이고 다 준겁니다.

에게 에게 에게 그게 무슨 풍성함이고? 그게 무슨 목마름에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마실것이고? 그게 무슨 주린 배고픔에 먹을것이고?

진짜 배고픈데? 진짜 배고픔에 진짜 빵을 줘야지? 바리새인은 쉐마 합의도출(변증법-어떤누구도 반박할수 없는 가장 완벽한 이론)해서 진짜 빵을 주는데?
마귀는 돌을 떡덩어리가 되게 해서 진짜 배고픔에, 진짜 죽음에, 진짜 빵을 주는데?
예수 당신은 말장난을 하고 있네?
당신의 살과 피를 먹으라고?
그래 실제로 당신의 살과 피를 먹었다 치자?
그럼 안 배고프나? 또 배고프겠지? 또 먹겠지?
그럼 예수라는 고깃덩어리를 10명의 식인종이 뜯어먹었다 치자?

한 끼만 넘겨도 다 없어져 버리는데? 뭐 !!! 영원히 주리지 않는다고?

안 돼 ~~~~~~~~~~~~~~~~~~~~~


정말 심각 합니다.
정말 정말 너무 너무 심각합니다.
나랏님도 해결 못하는 가난을
예수님이라고 해서 해결할수 있겠습니까?
정말 심각합니다.
야고보서에서 말로만 하지 말고
행함이 있는 믿음을 보여서
진짜로 먹을 것 마실 것을 주라고 했습니다.
정말 심각하니까 말이죠.

그런데 성경말씀은 그런 취지가 아닙니다.
7천명을 남겨놨다는 과잉은
자기 아들을 아낌없이 내어주사 라는 피 값 치르기 는

배고파서 뒤에 주는 것이 아닙니다.
빚져서 탕감해 주는 뒤에 주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앞에서 선행이 된 처음자리를 말하는 겁니다. 이미 넉넉하게 받은 것을 끄집어내어서 확인시켜줄 뿐입니다. 이미 받은 것을 말입니다.

그것을 확인하고서는 그렇게 심각하게 심각하게 심각하게 밤새도록 박박 기왓장으로 긁어대던 그 괴로움이 그 고통이 주님의 십자가의 고통을 보니 아무것도 아니기에
쑥 들어갑니다. 감히 가시면류관 쓰신 주님 앞에
못 박히신 손과 발이 찔린 주님 앞에서
겨우 조그마한 상처였는데 감히 그 앞에서 고통을 끄집어 내다니?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어 입을 막고 머리를 땅에 쳐 박고 재를 뿌립니다.
정말 심각했었는데 주님의 십자가의 고통 앞에서는 입도 띨수 없을 정도로 미약했던 겁니다.
정말 배고팠는데 목말랐는데 헐벗어서 추웠는데 그 십자가의 버림 앞에서는 쥐뿔도 아니였습니다. 아무리 심각해도 진짜 심각한 것이 오니
주님의 십자가가 더 크게 보이니 나의 괴로움은 잊혀지는 겁니다.
그 정도로 경악스러울 정도로의 크나큰 주님의 찢겨짐입니다.
(영화 패션오브크라이스트? 맞나요 제목? 아무리 야메로 다운받아도 늘 화면이 너무 컴컴해서 아무리 밝게 해도 안되길래 늘 미루었는데 몇 달전 12월 쯤에 겨우 고화질에 제대로 볼수 있는 화면이 되는 것을 다운받아 봤습니다. 하염없이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추워서 빨리 죽여달라고 그렇게 외쳤는데 그 십자가의 고통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님에 입이 쑥 들어갔습니다. 밤새도록 울었습니다. 그 영화 보는 날만, 그러나 그 다음 날에 추워지니 또 육은 빨리 죽여달라고 또 어쩔수 없이 발악을 했습니다.)

그 처음자리인 근원의 자리-진짜 심각한 자리 곧 십자가의 버림받으신 자리, 처음자리 에서 이 배고픔이 어디서 왔는가를 보라는 겁니다.
네 맞습니다. 마귀에게서 왔던 겁니다.

자 그래서 세리는 성전에서 머리를 쳐 박고 주여 불쌍히 여겨달라는 겁니다.
마귀에게서 단 한 발짝도 벗어날수가 없다는 고백입니다.
저는 마귀에게 포로당한 자입니다 라고 말입니다.
그 부르짖임이 있어야 전쟁을 치르시는 겁니다. 출애굽전쟁의 방식입니다.
그런 판국에 뭐 ~~~ 쉐마 쉐마 할 겨를이 없습니다.

차라리 이 마귀의 집이요 마귀의 밥이요 마귀가 배고플 때 먹거리가 되는 나를 죽여달라고 없애달라고 마귀를 겨냥해서 마귀를 의식해서 주님에게 호소하는 겁니다.

그 차이를 처음자리인 근원의 자리를 봤기 때문입니다. 덮쳤기 떄문입니다.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란 역사적 시간적으로 죄를 지어서 그 뒤에온 빚갚고 기업무라주고 남편 되어줄려고
배고픈 뒤에 오는 목마름 뒤에 오는 마실꺼리 먹을꺼리가 아닙니다.

처음부터 있었던 겁니다. 이것이 이레입니다.

처음부터 있었던 몸(이레)입니다.
그 몸과의 비교를 통해서 볼 때 아무리 봐도
나는 짐승의 몸이라는 겁니다.
짐승에게 먹을 것 줘 봤자 짐승의 몸만 뿔리는 것 뿐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성화론과 성령 곧 예수님의 영이신 십자가의 영의 성화는
완전히 정반대입니다. 정반대의 소욕입니다.

십자가의 영의 활동은 우리를 후패케 합니다. 늘 얼음땡으로 만들 듯이 가오리의 독에 쏘여 마비 시켜 버립니다. 허걱 ! 화로다 화로다 나는 망하게 되었구나.

예수님 자신이 안티오이디푸스가 되어 곧 바닥의 바닥을 쳐서
인간의 육 곧 악마성의 내막을 모조리 들추어내버리는 것이 바로

목마르지 않게 주리지 않게 하시는 겁니다. 처음자리였던 겁니다.

이것을 마귀를 결박한 후에 비로소 제공하시는 겁니다.

역사라는 시공간 속에서는 뒤에 후차적으로 주어지는 것 같지만 처음부터 주신 것입니다.

(마 5:1, 개역)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마 5:2, 개역) 『입을 열어 가르쳐 가라사대』
(마 5:3, 개역)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마 5:4, 개역)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마 5:5, 개역)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마 5:6, 개역)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마 5:7, 개역)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마 5:8, 개역)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마 5:9, 개역)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마 5:10, 개역)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마 5:11, 개역)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마 5:12, 개역)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


그래서 마리아는 왜 하필 접니까? 라고 했을때에
너가 원했잖아 라고 답을 하는 겁니다.

무슨소리 하십니꺼? 제가 언제예?~~~~

이것은 선지자의 소명을 원치 않았던 선지자들에게도 해당됩니다.
예레미야도 선지자 안할려고 했고
모세도 딴 사람 시키이소 나는 말 말 말 ~~~ 더 더 더듬쟁이입니다. 뚜렛증후군 환자 아닌 사람 시키시이소 마
엘리야 나만 남았나이다 라고 갈멜산에서의 850대 1로 싸워 이겼음에도 불구하고 그 사건이 다른 방식으로 새로 배치가 되니까 같은 십자가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뭔지를 몰라서 나만남았다 차라리 날 죽이소 라고 했고
요나 선지자는 아이고 정남아 정남아 여호와여 여호와여 니느웨 백성 궁디를 조 차뿟까?
왜 안 찹니까? 이스라엘을 살려야지 돌이키게 만들어야지 이스라엘을 회개케 만들어도 시원찮을 판국에 왜 남의 나라 남의 민족 그것도 개같은 이방인 민족을 말라꼬 돌이키십니까?

이런 십자가 비웃기는 아브라함의 비웃음도 동일합니다.

그 원망을 그 비웃음을 담는 박스가 바로 십자가에 달려야 하는 몸 박스입니다.

이것이 주님이 직접 자신의 머리를 거세하는, 할례하는 십자가입니다.

그런 모든 사고방식이 마귀적이다는 겁니다. 그것을 짤라버리는 겁니다.
예수님의 몸(이레)가 못박힘으로써 모든 육체는 못 박힌 겁니다.
이제 한 이레만 완료되면 예수님의 주 되심의 몸만 완료되면 다 완성된 겁니다.

다 이루었다.

그렇기에 이 완료된 몸만 쳐다보면 되지
내 범죄한 눈을 진짜로 뽑아서 천국갈려는 바리새인과 같은 쉐마운동 실천운동은 쓸데없는 짖입니다.

내 몸이 아닌

그 분의 몸이 하신 일을
마귀만을 겨냥해서 하신 그 분의 몸의 활동 ? 화해만을 쳐다보는 것이
신랑의 신부로써 끊임없이 마르지 않는 생명수를 마시는 겁니다.

아 맞아 내가 바로 이것을 원했었어

동네 사람들 동네 사람들 나의 죄를 도말할 자가 나타났어요 ~~~~~~~~~~~~

신랑되신 예수님의 피 발린 신부는 처음부터 십자가의 사랑만을 원했던 것입니다.


아바 아버지여 하실수만 있다면 이 잔을 내게서 옮기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눅 22:42, 개역) 『가라사대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어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니』

(마 27:38, 개역) 『이 때에 예수와 함께 강도 둘이 십자가에 못 박히니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
(마 27:39, 개역) 『지나가는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하여』
(마 27:40, 개역) 『가로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며』
(마 27:41, 개역) 『그와 같이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과 함께 희롱하여 가로되』
(마 27:42, 개역) 『저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저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그러면 우리가 믿겠노라』
(마 27:43, 개역) 『저가 하나님을 신뢰하니 하나님이 저를 기뻐하시면 이제 구원하실지라 제 말이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였도다 하며』
(마 27:44, 개역)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들도 이와 같이 욕하더라』
(마 27:45, 개역) 『제 육 시로부터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하여 제 구 시까지 계속하더니』
(마 27:46, 개역) 『제 구 시 즈음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질러 가라사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마 27:47, 개역) 『거기 섰던 자 중 어떤 이들이 듣고 가로되 이 사람이 엘리야를 부른다 하고』
(마 27:48, 개역) 『그 중에 한 사람이 곧 달려가서 해융을 가지고 신 포도주를 머금게 하여 갈대에 꿰어 마시우거늘』
(마 27:49, 개역) 『그 남은 사람들이 가로되 가만 두어라 엘리야가 와서 저를 구원하나 보자 하더라』
(마 27:50, 개역) 『예수께서 다시 크게 소리 지르시고 영혼이 떠나시다』
(마 27:51, 개역)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
(마 27:52, 개역) 『무덤들이 열리며 자던 성도의 몸이 많이 일어나되』
(마 27:53, 개역) 『예수의 부활 후에 저희가 무덤에서 나와서 거룩한 성에 들어가 많은 사람에게 보이니라』
(마 27:54, 개역) 『백부장과 및 함께 예수를 지키던 자들이 지진과 그 되는 일들을 보고 심히 두려워하여 가로되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하더라』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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