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이 미 ? Why Me?  왜 하필이면 접니까?

희년의 증상 ; 미래완료(은혜)의 증상


2012년 3월 31일 토요일 오전 9:10:53  김대식


(눅 1:5, 개역) 『유대 왕 헤롯 때에 아비야 반열에 제사장 하나가 있으니 이름은 사가랴요 그 아내는 아론의 자손이니 이름은 엘리사벳이라』
(눅 1:6, 개역) 『이 두 사람이 하나님 앞에 의인이니 주의 모든 계명과 규례대로 흠이 없이 행하더라』
(눅 1:7, 개역) 『엘리사벳이 수태를 못하므로 저희가 무자하고 두 사람의 나이 많더라』
(눅 1:8, 개역) 『마침 사가랴가 그 반열의 차례대로 제사장의 직무를 하나님 앞에 행할새』
(눅 1:9, 개역) 『제사장의 전례를 따라 제비를 뽑아 주의 성소에 들어가 분향하고』
(눅 1:10, 개역) 『모든 백성은 그 분향하는 시간에 밖에서 기도하더니』
(눅 1:11, 개역) 『주의 사자가 저에게 나타나 향단 우편에 선지라』
(눅 1:12, 개역) 『사가랴가 보고 놀라며 무서워하니』
(눅 1:13, 개역) 『천사가 일러 가로되 사가랴여 무서워 말라 너의 간구함이 들린지라 네 아내 엘리사벳이 네게 아들을 낳아 주리니 그 이름을 요한이라 하라』
(눅 1:14, 개역) 『너도 기뻐하고 즐거워할 것이요 많은 사람도 그의 남을 기뻐하리니』
(눅 1:15, 개역) 『이는 저가 주 앞에 큰 자가 되며 포도주나 소주를 마시지 아니하며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눅 1:16, 개역) 『이스라엘 자손을 주 곧 저희 하나님께로 많이 돌아오게 하겠음이니라』
(눅 1:17, 개역) 『저가 또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주 앞에 앞서 가서 아비의 마음을 자식에게, 거스리는 자를 의인의 슬기에 돌아오게 하고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을 예비하리라』
(눅 1:18, 개역) 『사가랴가 천사에게 이르되 내가 이것을 어떻게 알리요 내가 늙고 아내도 나이 많으니이다』
(눅 1:19, 개역) 『천사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하나님 앞에 섰는 가브리엘이라 이 좋은 소식을 전하여 네게 말하라고 보내심을 입었노라』
(눅 1:20, 개역) 『보라 이 일의 되는 날까지 네가 벙어리가 되어 능히 말을 못하리니 이는 내 말을 네가 믿지 아니함이어니와 때가 이르면 내 말이 이루리라 하더라』


희년은 역사적인 순서로써 50년이 되었을때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오순절 또한 그러합니다. 오히려 그런 가시적인 것은 역사속에서 증상이라고 합니다. 역사 속에서 배경을 까는 식입니다. 그림자죠 그래서 증상입니다. 그렇다면 그 증상을 통해서 실체가 뒤에 온다는 겁니다. 말이 뒤이지 증상 자체가 내 뒤에 오실분이라고 해서 뒤에 나중에 라는 개념이 아니라 먼저 있었다 라는 겁니다. 이것을 역사적 사고에서는 믄소리인지 모릅니다.

실제로 모릅니다. 먼저 태어난 자가 장자이고 나중 태어난 자가 동생이어야 하는데
성경은 일부러 팔을 어긋맞게 해 버립니다. 그렇다면 역사적존재들의 시선들이 반발을 합니다.
반발을 했다는 것 자체가 제대로 팔을 어긋맞게 했다는 증거입니다.

그렇다면 나중에 해당된자만이 이상하게도 몰라야 할 비밀을 술술 알게 됩니다.
잃어버렸다는 경험이 있는 자만이 실제로 그 나중의 의미를 알게 됩니다.
그렇다면 빼앗기는 자가 있다는 겁니다. 장자권을 빼앗기듯이(장자권을 무시했다고 일방적으로 뒤짚어 씌웁니다.)

이 장자권이 설마 빼앗는다고 빼앗겨질 것 같으면 장자권이 아니다고 했던 그 고정성이 실제로 날라가 버리는 상황이 벌어져야 비로소 장자권 조차도 고정화 되지 않았다는 것을 실감하게 됩니다. 빼앗김으로써 비로소 실감하게 되는 거죠. 그 이전 까지는 때려죽어도 고정된 겁니다.

진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진리를 고정화 되었다고 역사화 시켰습니다. 즉 정통화 작업입니다.
그런데 진리가 배신을 때리고 움직여 버립니다. 고정화 되지 않고 역동적으로 움직여 버렸을때에 비로소 역전의 상황이 됩니다. 왕이란 법궤라는 하나님의 약속이 발통이 달려 있지 않고 바퀴도 없는데도 불구하고 돌아왔을때에 그 왕에서 왕의 자리를 내어놓는 발가벗겨짐을 당하는 것이 바로 왕입니다. 일종의 거세요. 할례입니다.

그러나 그 빈공간의 자리를 거세당하지 않고 떳떳하게 차지해야 한다는 것을 주장하던 미갈은 불임여성이 되어버립니다. 왕의 자리의 불변성을 주장한 것입니다. 자신의 남편을 생각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왕비된 자리를 염두한 것입니다. 이웃사랑을 하는 것은 이웃을 생각해서가 아닌 자기편 만들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진리는 나에게 고정되지 않고 끊임없이 나를 배반해야 합니다. 진리가 나를 돌파해야 합니다. 매일 매일 진리를 새롭게 믿어야 합니다. 진리가 주체가 되어 나를 대상 삼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고 내가 진리를 진리라고 대상으로 삼아버리면 내가 찾아헤매는 진리가 되는 겁니다. 내가 찾는 대상이니 진리가 아닙니다. 심심하면 진리를 고정화 시키겠다는 심뽀가 나를 고정화 시키겠다는 심뽀로써 발각당하기 위해서 거세당하듯이 할례당하듯이 진리는 늘 나를 배신때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 앞에서 매일 매일 가짜임을 발각당해야 합니다.

부활도 나를 위한 부활이어야 하는데 부활이 나를 배신 때립니다. 그것이 진짜 부활입니다.
이번주 부활설교를 듣고 어머니랑 우와 우와 그러면서 최고의 설교다 라고 감격에 감격을 외쳤습니다. 부활이 이웃환대법인 시형제결혼법에 시비를 걸면서 고정화된 인간의 족보 개념을, 처음자리, 원본의 근원자리를, 앞장세움으로써 가짜부활을 바닥 바닥 뜯어버립니다. 바닥을 뜯어보면 최종적인 부활이 나와야 하는데 어라? 인간이라는 우상이 숨어있었던 겁니다. 마귀 입니다. 그래서 바닥을 뜯어야 합니다. 바닥을 뜯어보니 부활이 고정화된, 또는 형수 문제가 아니라 후사 문제인 이삭 곧 육을 통하지 않고 낳은 자식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약속이란 후사를 제물로 바침으로써 거룩이 유지되는 방식입니다.

(롬 8:32, 개역)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않고 내어주사 입니다. 이것이 부활입니다. 처음부터 예수님을 말하기 위함입니다. 처음자리 또한 예수님을 말하기 위함 입니다. 이스라엘이 아닙니다. 처음자리 라는 예수님의 증상으로써의 이스라엘 입니다.
(여자를 남자의 갈비뼈를 취해서 만든 겁니다. 여자는 남자의 증상입니다. 미래입니다. 그래서 여자는 없다 라고 하는 겁니다. 빈자리 이다 라는 겁니다.)

그래서 십자가만 외치는 것입니다.
그것도 고정화된 십자가가 아니라, 움직이는 회오리처럼 돌고 도는 법궤처럼 인간의 도움이 전혀 필요치 않고 인간의 손으로 지은 우상의 얼굴 목 가지 , 팔 목 가지, 손 목 가지, 발 목 가지를 사지절단 시켜서 스스로 돌아오는 십자가 말입니다.

그런데 그런 십자가 마저도 고정화 시키겠다는 인간을 배신 때리지 않는다면 인간에게 놀아나는 십자가가 아니겠는가? 인간에게 놀아나는 부활이 아니겠는가? 말입니다.

결국 진짜 부활은 인간의 믿음의 대상이 되지 않습니다. 부활을 믿겠습니다. 믿겠다니깐요 라는 부활은 우상입니다.

그 반대입니다. 부활이 인간을 대상으로써 인간을 죽여버리는 것이 바로 다시 사는 부활인 것입니다. 이것이 실상입니다.

어머니랑 얼마전에 마태복음 족보 이야기 하고서 그 이어서 부활에 대해서 이야기 했습니다. 마태복음 족보와 연관이 되기 때문입니다. 후사가 최종적으로 예수님이어야 이 삑사리 족보가 의미있게 된다고 말입니다. [꼬끼오 에게서]. [삑사리 에게서] 족보 말입니다.

그때 마리아 마르다가 오빠 살려내라 동네사람들의 모든 비웃음을 끌어안고서 진짜 나사로를 사랑했다 카는게 그 꼬라지가? 라는 그 거짓된 부활을 안고서, (인간들의 소망-우상이 된 부활을 모조리 끌어내고 들추어내면서)

죽었다고 치부 당하던 나사로를 살려냄으로써 졸지에 마리아 마르다 동네 사람들이 도리어 죽은자가 된 것입니다. 이것이 부활입니다  팔을 어긋맞게 하는 겁니다. 새로운 부활앞에서 옛부활을 청산해야할 판국입니다. 낯설은 부활입니다. 생전 보도 듣도 못한 부활입니다. 처음 부활을 보게된 겁니다. 나사로 라는 부활의 증상을 통해서 살아있다고 여긴자들의 부활을 모조리 매가지 모가지 목가지를 짤라 버리는 그 단절성이 팔을 어긋맞음이 바로 부활입니다.

인간의 부활을 짤라내지 못하는 부활은 가짜입니다.
인간의 믿음을 짤라내지 못하는 믿음은 가짜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믿음만이 참이고 모조리 인간의 믿음은 허상이요, 우상입니다.

오히려 예수님의 믿음의 증상 으로써 0.012초 만에 나타나는 그 순간이라는 우발성, 우연성,
그 찰나가, 그 무시받는, 아무것도 없는, 그 틈이, 그 삑사리가, 그 꼬끼오가,
바로 역사라는 이유로 고정화된 그 완악성 강퍅성을 뒤짚어 엎어버리는 전복시키는 주체? 단절을 벌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먼저 깔아놓는 것이 증상입니다. 알리바이를 수집하기 위해서
왜? 그 알리바이 때문에가 아니라. 원래 처음부터 아니였기에 원인없는 결과로써 미끼를 덮석 무는 것임을 그 증거로써 활용하기 때문입니다.

그 미끼물이 그 증상물이 바로 오늘 살펴볼 희년의 증상입니다.

은혜의 해가 이미 덮쳤습니다. 인간들은 관심없습니다. 아마 희년 조차도 절기로 삼아서 부활절 지키듯이 절기 지키면 땡하고 넘겨버리는 것입니다. 매일 매일이 부활이요 매일 매일이 고난주간이요 매일 매일이 크리스마스요 매일 매일이 유월절이면 인간들은 스트레스 받아 못살겠지요. 신을 달래고 달래도 어느정도까지어야 말이죠?

그래서 성전 종사자는 성경을 법조항으로 삼아서 서로가 불편하지 않도록 하기 위한 조항을 찾아낸다. 소위 자기들 마음대로 말입니다. 자기 멋대로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 말입니다. 수위 조절, 수준별 학습, 눈높이 락습말입니다.

마침 어제 어머니가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바리새인 중에 이 일이 하늘에서 벌린 일이면 우리가 막을 수 없고
사람에게서 난 일이면 저절로 소멸 될 것이다 라는
가말리엘 문하의 대표자가 사도들의 복음 증거에 대해서 흥분한 대중들 곧 유대인들에게 전하는 충고에 대해서 어머니가 성경구절을 읽어주시면서 물으신 것입니다.

이런 바리새인 가말리엘 문하들이 사도들을 도와 주는 것 아니냐고?

아닙니다. 어머니

바로 그것이 마귀들입니다.

마귀들의 특징인 바리새인의 사상이 바로 중용입니다. 편리성입니다.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항상 중용의 자세가 바로 바리새인의 가장 큰 특징입니다. 대중을 화나게 하면 안됩니다. 기다리고 참고 인내하면서 살펴보자 라는 겁니다.

부활 설교를 통해서 사두개인은 아주 적극적으로 부활이 없다 라고 형수를 놓고 서로 자기 아내라고 하게 되면 천국이 개판이 된다고 단언하며 부활이 없다고 했지만

바리새인들은 거기에 반박은 못하지만 성경이 한군데만 있는 것이 아니다. 전체를 보면 부활이 있다 라는 식으로 너무 한쪽만 파지 말라고 합니다. 이거 이거 어디서 들어본 소리 아닙니까? 성화론자들(개혁주의)이 심심하면 하는 소리 아닙니까? 항상 두루뭉술하게 대중에게 너무 지나치게도 하지 않고 너무 모자라지도 않게 항상 중용식으로 한다리 한다리 걸쳐놓는 것이 바리새인 사상이라고 했습니다.

지혜문서에는 솔로몬글에 너무 가난하지도 말고 너무 부하지도 말고, 너무 가난해지면 도둑질 하게 될까봐 너무 부요해지만 하나님을 잊어버릴까봐 그래서 그 중용을 그대로 차용해 오는 중용 곧 쉐마 쉐마의 방식이 바리새인 방식입니다. 그 중심에는 대중의 편리성입니다. 성화론자들이 말하는 이웃사랑입니다. 서로가 죄짖지 않는 방식, 불편해지지 않는 방식입니다. 곧 변증법입니다. 정과 반의 대립에서 합을 도출해 내는 방식말입니다. 변증법을 내세우는 자들에게서는 답이 없습니다. 그래서 모호한 소리일 뿐입니다. 하나 마나한 소리 입니다. 답은 없고 절충안만 마련하면 됩니다. 그래서 법을 최종적으로 쥘수 밖에 없습니다. 사랑은 쥐게 되면 죽거든요? 얼굴 타 죽습니다.

그래서 바리새인이나. 오늘날 성화론이나. 개혁주의 모조리 인간의 편리성에 적당한 위치를 마련하는 합을 도출해 내는 것이 악마의 사상인 변증법입니다. 덥지도 않고 차지도 않는 성경마저 이용해서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인간이 발견한 최대의 발명품이 바로 합을 도출해 내는 것입니다. 평강이다 평강이다 그러나 사랑은 없습니다. 용서는 없습니다.

(렘 6:14, 개역) 『그들이 내 백성의 상처를 심상히 고쳐 주며 말하기를 평강하다 평강하다 하나 평강이 없도다』
(렘 6:15, 개역) 『그들이 가증한 일을 행할 때에 부끄러워하였느냐 아니라 조금도 부끄러워 아니할뿐 아니라 얼굴도 붉어지지 않았느니라 그러므로 그들이 엎드러지는 자와 함께 엎드러질 것이라 내가 그들을 벌하리니 그 때에 그들이 거꾸러지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렘 6:16, 개역)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는 길에 서서 보며 옛적 길 곧 선한 길이 어디인지 알아보고 그리로 행하라 너희 심령이 평강을 얻으리라 하나 그들의 대답이 우리는 그리로 행치 않겠노라 하였으며』
(렘 6:17, 개역) 『내가 또 너희 위에 파수꾼을 세웠으니 나팔소리를 들으라 하나 그들의 대답이 우리는 듣지 않겠노라 하였도다』

마귀가 그래서 예수님에게 3가지 시험으로 내놓은 것이 합의 도출입니다.

서로 좋고 좋은게 좋은 것이다. 라고 둥글게 둥글게 라고 말입니다.

이것은 그만큼 묵시가 제대로 수시고 수셔댔다는 증거입니다.
그리고 인간의 방어막은, 바벨탑은 겨우 합의도출입니다. 역사를 반성해보니 이것이 가장 합이다는 증거다. 라고 말이죠.

그만큼 역사에 대한 묵시의 공격이 심했다는 증거고, 역사도 그 공격에 만만치 않게 반항을 했다는 증거입니다. 실제로 이스라엘은 참선지자를 죽이는데 있어서 거짓선지자(내가 누구에게 악한 영을 집어넣을꼬 ? 천상회의)의 대중을 장악하는 역사에, 다들 휩쓸렸다는 증거입니다. 그것을 반성해서 합을 도출하는데... 또 합을 도출할 수 밖에 없습니다.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구원받는 방식 은혜받는 방법 등등 오늘날도 예수님 당시도 마찬가지 입니다. 그래서 신앙을 포기하라는 겁니다. 누구세요 누가 저를 용서하는 겁니까 라고 물을수 있게 말입니다.
(어라! 예수님 당시에는 더 심합니다. 아예 모든 유대인이 마귀에게 장악당해버린 상태다 라는 것을 선언하고 들어가는 것이 바로 마귀의 3가지 시험입니다. 오늘날 현대인이라고 해서 다를까요? 그렇다면 예수님의 활동 곧 행함의 믿음은, 마귀라는 주인을 결박하고 도둑처럼 세간물을 도둑질하듯이 빼내는 방식으로써 마귀를 결박한 후에, 시험을 이긴 후에 복음을 비로소 비로소 ~~~ 증거하시는 겁니다. 그 행함이 바로 마귀보란듯이 입니다. 인간의 믿음은 항상 마귀를 빼는 방식입니다. 왜냐? 자신이 마귀의 종이요 가구이기 때문에 마귀를 빼는 겁니다. 예수님만이 마귀를 집어넣습니다.)

마침 얼마전에 다큐를 봤는데 이슬람교 즉 이스마엘교에서 코란이 너무 어렵고 사제들 저거들끼리만 보니까 대중은 아에 접근도 안하고 무관심해지는 손놓는 일이 벌어지게 되니

너무 어려운 코란을 대중이 쉽게, 하늘에 다가갈수 있는 촉매 영매 접촉점을 시도하는 것이 바로 춤으로써 긍정의 마인드 곧 예술 긍정 성화 가능성 능동성 실천성 창조 생명력으로써 접근한다는 의식이 바로 세마의식 라는 겁니다.
쉐마! 세마! 발음도 비슷하네요. 남자 사제들이 흰옷의 치마를 입고(치마 안에는 바지를 입었는데 흰색바지입니다. 모든 옷이 흰옷 흰모자 흰치마를 입고서 춤을 추는데, 춤이 딴게 아니라 그냥 빙빙빙 도는 것입니다. 그 대중화된 세마의식을 터키정부가 승낙을해서 매 공연장에서 펼쳐지는데 그게 무슨 의식이냐 라고 하겠지만, 빙빙 흰옷을 입고 돌고 돌고 돌면 그야말로 빙빙도는데. 곧 마약인데. 무아지경, 카타르시스에 빠져서 신과의 접촉을 그런식으로 대중이 쉽게 할수 있다는 편리성을 제공한 방법론인 겁니다. 우리나라로 치면 무당집처럼 대중화 된 그런 식입니다. 무속신앙 민간신앙

이것이 바리새인의 사상과 동일합니다. 대중을 어떻게 해서든 접촉을 시도시켜 주겠다는, 사람들의 편에서서 활동하는 이웃사랑실천, 두루두루 돌아다니면서 소경이 소경을 소경의 길로 인도하는 식입니다. 과연 이웃사랑인지? 자기편 만들기인지?

그래서 골치 아픈 일은 싫은 겁니다. 정과 반이 충돌 안할수 없겠지만은 합을 도출해 내면 그야말로 대중들에게 존경받습니다. 지나고 나면 아무것도 아닌것에 흥분하는 것이 다반사이니 말입니다.

그러나 복음은 장난이 아닙니다. 사랑은 장난이 아닙니다. 합의도출이 불가능합니다. 그냥 돌파하고 무턱대고 둟어버립니다. 여기에 방어기제로써의 인간의 합의 도출은 바로 그런 악마성을 적극적으로 들추어내는 성령의 일에 제대로 걸려든 겁니다.

부활을 믿는자들이(부활을 믿음의 대상으로 삼은) 그래서 부활(주체가 되어 인간을 돌파)을 싫어하는 것입니다. 진짜 부활이 오면 가짜 부활을 들통나도록 수셔대기 때문입니다. 꽁공꽁 감추어놓은 죄를 주체가 된, 실체가 된 부활 앞에서 발가벗겨지듯이 들통나는 겁니다. 그림자 부활은 백날 천날 만날 들통낼수가 없으니 인간이 부활을 가지고 노는 장난감이 되는 겁니다. 예수든 하나님이든 교회든 성전이든 다 장난감 우상입니다. 게임입니다. 시뮬레이션입니다.

그래서 움직이는 부활은 고정화된 부활을 수셔댐으로써 인간들로부터 미움받는 부활이 되어야 합니다. 거리끼는 부활이요 싫어버린바 된 부활인 것입니다. 우찌 형수의 남편이 누가 될지 모르는 그런 모호한 부활을 인간들은 믿을수 없어 라고 마치 부활을 디기 디기 생각하는 것 같아도 결국은 그 불편하게 만드는 부활을 싫어하는 것입니다. 개념이 된 역사가 된 부활은 어디까지나 인간 편이어야 한다는 것은

부활이 없다는 사두개인이나
부활이 있다는 바리새인이나
예수님을 죽이고자 한, 악마임은 분명한 것입니다. 바로 우리가 이런 악마가 심은 부활에서 벗어날수가 없습니다.
(백날 계산해도 천국에서 시집 장가 간다고 여기니 저런 쓸데없는 형수가 누구의 아내가 되느냐로 부활을 따지겠습니까? 이 땅의 악마의 원리를 그대로 천국에서 까지 가지고 가겠다는 겁니다. 즉 육체를 천국으로 들고가겠다는 겁니다. [나] 라는 자아를 그대로 말이죠. 그것이 부활신앙에 녹아있기에 헛소리를 하는 겁니다. 처음부터 부활은 예수님을 말하기 위함입니다. 족보도 이스라엘을 위한 족보 없습니다. 예수님을 말하기 위한 족보 입니다. 그래서 삑사리 에게서 입니다. 남자를 다 짤라내는 여자를 집어넣는 겁니다.)

예수님만이 이 땅에서 산 자로써, 인간 편을 단 한번도 들어준적이 없는 자이기 때문에 죽인 것입니다.

부활의 증상으로써 벌어지는 사건들이 이렇다면

희년 곧 은혜의 날의 증상으로써 벌어지는 사건들은 무엇일까요?
같은 맥락입니다.

지난 시간에 그 증상으로써 처녀가 아기를 낳는 것에서
그 당사자 처녀 조차도 안 믿는 아니 믿기 싫은 상황이다는 것입니다.
결국 은혜란 용서란 긍휼이란 자존심을 건드리기 때문에 싫은 것입니다.

자존심을 나쁘게 쓰는 표현으로써 말한게 아니라 자존심은 시스템의 증상입니다. 즉 육의 시스템입니다. 그러니 육을 제대로 건드렸기 때문에 자존심이 푹 하고 증상으로써 튀어나오는 겁니다. 오히려 감사해야죠. 사랑이 아니면 즉 십자가가 아니면 툭 하고 튀어나오질 않습니다.

부활이든 믿음이든 용서든 십자가든 사랑이든

사실상 싫어버린바 되었다는 것이

제대로된 증상인 겁니다.


왜 하필 접니까?


와이 미

why me

왜 저 이어야만 합니까


이 말은 육이 벌린 사건이 아니다는 뜻입니다.
영이 벌렸다는 것입니다.
영이 벌렸으면 영에게 수긍한다? 천만의 말씀
반발합니다.
육의 소욕과 영의 소욕은 서로 원수지간입니다.

그러니까 싫은 겁니다.
육은 참아서 지나고 나면 유익이 됩니다. 편리가 됩니다. 남는 것이 생깁니다. 도움이 됩니다.

그러나 영이 벌리는 것은 남는 것이 없습니다. 소멸입니다. 누락입니다. 싫어버린바 됩니다. 찌꺼기 찌기가 되는 겁니다. 미말에 웃싸꺼리 비웃음꺼리 무시꺼리가 됩니다.

육의 잉여와 영의 잉여와의 차이의 간격을 더욱더 벌립니다.

그래서 왜 하필 접니까 라는
주여 누구십니까 라는 질문과 동일하게 나오는 겁니다.

전에 알던 주님이 아니라 내가 친하게 지내고자 다가갔던 주님이 아니라
방금전까지 물 위에서 함께 기쁘게 만났던 주님이 아니라

물 속에서 빠져 죽게 되어서 만난 주님은 방금전의 주님이 아닌 전혀 낯선 분이다 라는 겁니다.

그래서 누구십니까 라고 묻는다고 했습니다.

지금 이 부분을 적고 있는 저도 마찬가지로 해당됩니다.
실컷 눈 비비면서 타자치고 있는데 빛이 다 날라가고
남아있던 눈도 조심 조심해서 잘 쓰고 있는데 갑자기 모든 것을 앗아가 버려서
눈을 빼앗고 모든 것을 빼앗아 버리면
그 상황에서 낯설음이 덮쳐서 새로운 흐름에 놓여져야 합니다.
눈으로 보던 익숙한 것들은 다 날라가 버리고
나를 인식할수 없는 내가 안보이는 세계에서 새로운 변모된 변형된 세계에서 주님의 얼굴을 봐야 하는 겁니다. 그 낯설음이 고정화된 예수님의 이미지 얼굴 마저도 차단하는 겁니다.
그러니 어 딴 얼굴이네요? 누구시죠.
나를 내가 익숙하게 습관처럼 행하던 세계를 날려버리고 딴 세계로 인도한 당신은 도대체 누구십니까? 내가 알던 봤던 예수님이 아닌 것 같은데요? 라고 차이나는 예수님을 보게 된다는 겁니다.

그게 바로 와이 미 왜 접니까? 라고 마리아는 낯설음의 덮침을 제대로 격고 있다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율법 외에  다른 한 의입니다.

고정화되고 갇혀버린 율법의 세계에서
율법 아닌 율법 외에 한 의의 세계가 자신에게 다가왔다는 겁니다.

세마의식이 아닙니다. 그것은 여전히 율법세계에서 강한자들끼리 간격을 벌리기 위해서 카스트제도처럼 자신들만이 어려운 수준을 취하고 있을 때 수준 낮은 어린아이같은 자들에게 더욱더 간격을 벌리기 위헤서 마약을 풀어버리듯이 푸는 것이 바로 세마의식 빙빙빙 돌면서 무아지경에 빠져서 신과의 접촉을 이루는 겁니다. 참재미있게도 그들 터키인들의 인사말이 샬롬입니다. 물론 같은 문화권이니까 같겠죠. 평안 평안 이다는 겁니다.

그러나 절대로 평안하지 않다는 그 증거가 바로 세마의식을 통해서 저는 보게 되었고
반대로 그들은 세마의식을 통해서 평안을 누리는 겁니다. 신과의 접촉을, 일치성을 추구하는 겁니다. 단절이 아니라 말이죠.

자 저런 익숙한 세계 갇혀버린 고정화된 율법의 세계
돌삐로 쳐 죽이는 세계
돌삐를 든 정신분열증의 세계에서 빼내는 방식은

딱 한 길 밖에 없습니다.

그런 법의 세계에서 죽는 길 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다시 사는 길입니다.
(그것이 후사 곧 자손 개념입니다. 그것을 주 라고 합니다. 자손만이 나를 원수 삼기 때문입니다. 어찌 자손 보고 주 라고 할까요? 제대로 끊어진 자임을, 끊어짐을 당한 자임을, 죽은 자 임을 아는 자 만이, 죽은 몸에서 후손이 나왔다는 것은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음에도 믿음이 왔다는 겁니다. 그 믿음을 주 라고 부르는 겁니다. 그 믿음만이 나의 죄악을 나의 원수성을 피로써 씻겨주기 때문입니다.)

그럼 진짜로 자살하라는 말이냐? 천만의 말씀!
남들에게 돌삐 맞아서 고통스럽게 죽느니 차라리 내 손으로 고통없이 죽는 것이 어차피 죽을빠에 그것이 편리하지 않겠는가? 천만의 말씀?

그러면 사건이 아니라 여전히 역사 속에서 장난질만 치는 자기가 자신을 돌삐로 처단하는 짖 밖에 안되는 겁니다. 이것이 인간의 한계입니다. 끝까지 법을 포기 못하겠다는 겁니다. 법은 약자들이 선해지고 싶어서 유일하게 쥐는 최종적인 구명쪼끼 입니다. 즉 사랑은 때려죽어도 힘이 안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법을 쥐겠다는 겁니다.

놀랍게도 이런 모습은 자살을 요청하는 선지자들에게서도 나타납니다.
엘리야 선지자 차라리 날 죽였뿌이소
요나 선지자 차라리 날 태양빛으로  말라 죽이소~~마
라는 모습처럼 말입니다.

법적으로 했기에 법에 호소 하는 겁니다.
법 체제인 법(선악) 체제 시스템(행함=유기체)에서 채널을 돌리는 방식은
7천명 남겨놨다는 사랑 세계 뿐입니다. 법으로는 도저히 다가갈수 없는, 행함으로는 도저히 다가갈수 없는, 성화로는 도저히 다가갈수 없는 단절의 세계입니다. 오히려 그 단절이 덮쳐오는 방식이 7천명 남겨놨지롱 이라는 웃음의 세계 입니다. 용서의 세계 입니다. 한두명만 있어도 의지가 되는데 나 홀로만 남았습니다. 내 열심이 특심인데 나만 남겨놓는 당신의 심뽀는 무슨 심뽀입니까? 라고 따지니까 7천명 남겨놨다는 말에 너무 많아서 반박할 여지가 없고 갑자기 자신의 심각했던 것들이 7천명 앞에서 우쓰깨 소리가 되어버리는 겁니다. 밤새도록 피부병으로 박박 끌어대는데 십자가의 죽음을 보니 기가막혀서 할말을 잃어버리는 겁니다. 그렇다고 반박하지 말자구요? 안됩니다. 그냥 이 두 모순적인 얼발란스를 그냥 그 모습 그대로 차이나게 밀고 나아가는 겁니다. 비록 비웃었지만 웃음을 주시는 분 때문에 주체를 바라보는 겁니다. 믿음의 주는 저분이라고 말입니다. 참으로 뻔뻔스럽게 우리는 주님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줄 주님 아십니다 라고 세번 부인했지만 뻔뻔스럽게 외치는 겁니다. 괜히 그 모순을 좁힐 필요가 없습니다.)

(히 12:2, 개역)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그만큼 제대로 낯설었다는 증거요. 이전에 알던 여호와가 아니다는 증거입니다.
결국 인간들은 여호와를 대상으로 삼았던 것입니다. 그것마저도 용납지 않고 제거 거세하는 식입니다. 할례요. 십자가요. 단절입니다.

성령의 소욕은 인간의 믿음에 포착되지 않습니다.

도리어 그 반대입니다. 인간이 대상이 됩니다. 그 대상이 되는 가장 좋은 방식이 바로
우발성이요 순간이요 찰나요 0.012초 요
가장 적나라한 표현으로는 미말의 찌기 곧 미끼라는 포획장치입니다.

성도는 곧 미끼요 포획장치인데
기능 곧 기계로써의 역할이 바로 포획장치이니까 포획이겠지?
바로 그것이 증상이라는 것입니다. 언발란스하지요.

세간을 놓고 서로가 싸우는 그 전쟁을 목격할 뿐입니다. 이긴자를 응원할수 밖에 없습니다.
마귀 씌인자는 마귀가 승리헸기에 예수님의 믿음을 볼 리가 없고 자기 믿음에 빠져 삽니다.
예수님이 세간을 늑탈하여 주인을 결박시킨것을 목격한 자는 이 예수님의 믿음에 흠뻑빠져 살 뿐입니다.

나올수 없던 것이 나왔다는 것입니다. 생겨날 수 없었던 것이 생겨났다는 것입니다.

사랑의 열병을 앓게 되니 그 증상이 상사병이 되는 것처럼.

우리가 사랑한 것이 아니요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한 것이 상사병인 십자가 입니다.

사랑의 증상이 십자가요. 십자가의 증상이, 선물이 성령이요. 성령의 증상이 종말이요. 심판입니다.

심판의 증상이 바로 성도요 종말인간입니다.

상사병을 고치는 법을 방금 검색해 보니 대충보니 그저그런 이야기 입니다. 오히려 답은 간단합니다. 그 대상 보다 더 강한 대상이 나타나면 고칩니다. 즉 그말은 더 심해지는 바닥을 치는 대상이 나타나야 합니다. 어떤 여자를 보고 상사병에 걸렸다면 그 여성 보다 더 강한 여성이 나타나야 한다는 겁니다. 그 여인도 안 받아주면 더 더 강한 여성이, 이래 되면 밑도끝도 없겠지요. 결국 죽음입니다. 죽음 뿐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해서 죽어버렸다는 것입니다. 그 만큼 음부의 권세가 강하기 때문에 죽음 외에는 다른 길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사랑의 증상으로 내세워지는 자들이 바로 처음자리인
고아 과부 나그네다 라는 것입니다.

희년의 증상을 앞장세워 희년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이미 완료 됐지롱 되어뿌렸지롱 라고
이것은 상대적인 고아 과부 나그네가 아니다 라는 반드시 선택받은자이다 라고 고정화 시킨 자들의 코앞에서 펼쳐지는 겁니다.
(마치 용서의 왕 비유 곧 일만달란트 탕감 비유에서 죽은자인 고아 과부 나그네를 희년의 대상으로 삼았다는 것은 이런 죽은자도 살리시는 주님인데 너희들쯤이야 라고 용서가 손쉽게 베풀어지는듯이 보이지만 오히려 그 반대로 진주를 개 돼지에게 던질수 없도록 철저한 단절로써 용서를 증거하시는 겁니다. 일부러 코 앞에 백데라니온 빚진자를 지나가게 하니 때려죽여 족쳐서 깜빵에 가두게 되니 임금의 용서가 무시받았다는 식으로 용서의 비유가 증거 되는 겁니다. 반대를 위한 반대죠)

마치 마귀 보란 듯이 펼쳐지는 십자가의 사랑 곧 죽음처럼 당당하고 뻔뻔합니다.
율법의 칼날을 시퍼렇게 갈고 있는 자들 바로 눈앞에서 제사장만 먹을수 있는 진설병을 보란 듯이 먹어버립니다. 비로소 율법쥔자들이 이웃사랑실천하는자들이 집단정신분열증을 발산하며 발악합니다. 멀쩡하던 인간들이 갑자기 마귀로 돌변하는 겁니다. 그래서 요나의 표적(십자가)이 아니고서는 다른 표적을 보여줄 이유가 없습니다.

아버지요 남편이요 왕임을
삑사리를 앞장세워 꼬끼오를 앞장세워서
고아 과부 나그네를 앞장세워서

고아 없다. 왜 ? 아버지가 새로 생겨버렸어요 우와 신난다. 은혜의 날이다. 다윗의 자손이여 다윗을 고쳤듯이 나를 고치소서

과부는 없다. 왜 ? 새신랑이 졸지에 생겨버렸기에 우와 신난다. 나는 이제 사랑받는 아내다 라고 나를 변론해 줄 자가 졸지에 생겨버린 것입니다. 과부란 재판관(변호사)이 없습니다. 도리어 모조리 법을, 돌삐를 들어서 던질 판국입니다. 심지어 약혼한 남자도 종용히 끊을 판국입니다. 이것이 증상입니다. 단절된 증상, 거룩의 증상, 딴남자가 생긴 증상인 겁니다. 이혼해서 결혼하게된 새남편의 증상이기 때문에 벌어진 사건입니다.

나그네는 없다. 왜 ? 버림받은 떠돌이에게는 고향이 없습니다. 안식처가 없습니다. 평안이 없고 쉼이 없습니다. 그런데 영원한 안식처의 문이 생겨버렸습니다. 본향을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불뱀에게 물림으로써 비로소 본향을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그분의 대신 저주 받으심 때문입니다. 그분이 나의 주인이다. 나의 임금이요. 나의 왕이다. 왕이란 백성을 위해 목숨을 버린자입니다.

아무도 그 목숨 버린 왕의 백성이 되기를 싫어합니다. 이미 죽어버린 왕인데 뭘? 그래서 그 빈자리를 차지하는 쉼없는 전쟁 뿐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빈자리가 마치 유령처럼 떠돌이처럼 돌아다니면서 자기백성 삼습니다. 그 빈자리 라는 왕이 거세된 왕 자리가 그 빈자리가 자기백성을 모으는 겁니다. 모이고픈 마음이 추호도 없었음에도 말이죠.

누가 그 빈자리를 앉게 되면 쭐꾸덕 미끄러지는 모습을 보면서(에스더서에 나오는 하만) 그 빈자리의 없음은 없음이 아니라 없음에도 불구하고 생생하게 있음이다. 라고 증거합니다. 죽으면 죽으리라

죽음이 죽었으면 끝나버려야 하고 잊혀져 버려야 하는데

그 (죽음)이 도리어 ([살아있다]라고 우기는) 것 보다 더 생생하게 활개치고 생동감있게 다이나막하게 돌아다닙니다. 이것이 나사로 사건입니다. 부활의 증상입니다.

희년(부활)이 우찌 산자에게 해당되지 않고, 철저하게 죽은자에게 더욱더 생동감있게 펼쳐지는 겁니다.

그래서 희년의 증상으로써 미리 카페트 깔아서
희년을 곧게 할려고 첩경을 몸으로써 쭈욱 쭈욱 다리미질로 펴는 희년의 증상이 바로
고아 과부 나그네 입니다.

세례요한이라는 선지자가 예수님의 증상이라고 했듯이 말입니다. 기꺼이 소모품이 되고 누락됩니다.

비록 율법 외의 한 의의 세계가 덮쳤지만
마리아는 그 율법세계의 껍떼기의 실상을 낯낯이 들추어내는 미끼로써 작용하고
율법 외의 한 의의 세계의 낯설음을 철두철미하게 격게 되는 것입니다.

이 두 세계를 싸움 붙이는 기도를 하고서는 얍삽하게 뒤로 물러갑니다.

고아 과부 나그네도 동일합니다. 선지자도 마찬가지 입니다.
이 두 세계의 충돌을 촉발 시켜놓고서는 자신들은 누락될 뿐입니다.

전쟁은 여호와께 속했듯이
예수님께만 속한 문제입니다.

우리는 사건의 촉발자로써만 등장되는 찌끄래기일 뿐입니다.

희년 사건

어떻게 주님께서 은혜로써 빚을 청산하시는지?

어떻게 기업을 무를지?

어떻게 죄 값을 치르시는지?

어떻게 율법의 돌 삐를 쥐고 있는 자들 앞에서
그 살벌한 위험스럽기 짝이 없는 위기촉발의 긴장 속에서
용서의 긍휼을 당당히 펼치시는지

주님의 희년을 우리는 실컷 볼수 있는 기쁨을 누리는 목격자 입니다.


마음껏 먹고 마시며 노래 부르자.

주님의 살과 피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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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발란스를 잘 보여주는 영화와 ost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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