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미래완료로써 출발하는 누가복음 : 긍휼로 시작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원인 없는 결과로 미래에서 소급해서 더 이상 이룰 것이 없는 완료로써 시작함 - 그렇기에 할게 없다. 누리는 것 뿐이다. 불쌍히 여겨주심 뿐이다.)

지난 시간에 사도행전을 예수안과 예수 밖의 차이로써 출발이라고 했습니다.
이래 이래 행하면 예수안 저래 저래 행하지 않으면 예수 밖 이라고
어떤 인간들의 복음에 대한 반응과 그에 따른 행동유무로써 예수 안과 밖을 차이내는 것이 아니라

이미 이것이 예수안 이다 라고 이미 예수안 이라고 통보하는 식으로 전합니다.
동시에 이미 이것이 예수 밖입니다 라고 이미 예수밖이라고 통보하는 식으로 전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반응유무에 따른 것이 아니라. 이미 결과로써 나타남이
예수 안에 있는 자는(당신은 예수 안입니다 라는 통보에) 심판 받아 마땅해야함을 외치고 있고

예수 밖에 있는 자는(당신은 예수 밖입니다 라는 통보에) 난 죽이지 않았으니까 심판과 무관합니다 라는 반응을 결과적으로 외치고 있다는 겁니다.

결국 예수 안이라는 것은 처음자리입니다. 아무것도 한 것이 없는데 왠 긍휼입니까 말도 안됩니다 라는 심판성을 외치고(죄인 중에 괴수임을 외치고)

처음자리에 무관한 자는그게 무슨 긍휼 받을 꺼리가 되며 용서 랑 무슨 상관이 있느냐 라는 식의 반응이니 죄인이라는 심판받아야 마땅함을 외칠수가 없는 겁니다.

그래서 이 처음자리를 오늘 누가복음 출발에서
전혀 구원과 무관한 개같은 이방인, 흑암(지옥)의 백성들, 사망의 그늘에서 벗어날 수 없어 폭삭 주저앉은 앉은뱅이 비거룩한자를 대상으로써

이미 희년을 바로 저런자들을 대상으로 삼아서 희년 스스로의 영광을 취하는 방식으로써 외칩니다. 완료로써
다 이루심으로써 외칩니다.
(있는 자는 더 받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긴다 라는 방식은 성경 전체의 방식입니다. 원인 없는 결과로 완료를 통보하는 식입니다. 예로 가나안 땅을 쳐들어가지도 않았는데 미리 니 무라 여기는 너 무라 라는 식으로 지도를 펴놓고 갈라먹기를 하는 겁니다. 그런데 자기를 챙길려는 자는 가장 편안한 곳을 택합니다. 서로 안 먹을려고 하다 보니 제일 마지막에 지파가 제일 많은 땅을 차지하는 식입니다. 한 므나 비유가 그런식입니다. 중고등부 학생회를 예를 들면 빠스카 잔치를 벌립니다. 주의 살과 피라고 뜯어먹게 합니다. 미리 짤라놓지 말고 커다란 빵을 한 덩어리에서 뜯어먹는 식입니다. 이것이 주님의 살이다 라고 먹으라고 하니 12명 중에 처음학생이 찔끔 뜯어먹으면서 웁니다. 주님의 살이라고 하니 죄스럽게 생각한 모양입니다. 그래서 다들 찔끔 찔끔 먹다보니 제일 마지막 학생이 제일 많은 량의 빵을 먹게 되었습니다. 마침 배고팠는데 다들 안먹고 난리야 하고 막 먹었습니다. 막 살았습니다. 이것이 처음자리 처음사랑입니다. 아무것도 한 것이 없기에 긍휼이 덮친겁니다. 빈공간에서 긍휼이 나오는 겁니다. 다윗이 배고파 먹은 제사장들만이 먹는 빵을 먹으니 그때 부터 이상한 기의 없는 기표 현상이 벌어집니다. 정신분열증이 집단적으로 나타나는 겁니다. 다윗을 죽일려는 이스라엘의 정신분열이 시작됩니다. 예수님을 죽이고자한 유대인들 또한 동일합니다.)

그렇다면 누가복음의 진행방식은 그 완료됨을 누리는 방식입니다. 막 누리는 겁니다. 막살기
거기에 상대적으로 누리지 못하고 지킬려고 하는 자들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처음자리를 스스로 발로 차버리고 외면하고 억수로 거부하면서
내가 왜 그 처음자리를 추구해야 하는 그 반발을 들추어내는 식으로써 누가복음은 진행됩니다.

그러면 그럴수록 희년은 더더욱 또렷이 명료하게 부곽이 됩니다.

아 이래서 이미 완료로써 출발했구나 라고 말입니다. 누리는 자가 감사하게 되는 겁니다.
지키는 자는 전혀 감사가 나오지 않습니다. 나오기는커녕 더더욱 완고해 집니다.

이것을 구조라고 합니다.
구조라는 표현을 철학자들이 쓴다고해서 그 의미가 맞는 것이 아닙니다.
철학자들이 구조라는 표현을 쓰면서도 정작 그 의미가 왜 그렇게 되는지를 모릅니다.

구조란 비역사적인 것을 구조라고 합니다.
매트릭스 또는 자궁 이라고 합니다. 어떤 집이요 어떤 판대기다 라는 겁니다.

그러나 그들이 이런 것 까지 알아낼정도로 근접했다는 것 자체도 대단하지만
(마 5:20, 개역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그들이 알고 싶어서 알게 된게 아니라 누가 보여줘서 알게 된 겁니다.
짝을 이루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왜 알게 되었는지 모르지만 하여튼 보게 되었으니 거기에 몰입하게 됩니다. 의외에 맞는 경우가 무척이나 많기 때문에 더더욱 충성할 수 밖에 없는 겁니다. 그래서 그것조차도 우발적으로 그리고 유물론 적으로 심지어 자아가 없다는 무자아운동으로써까지
진리에 대한 탐구를 스스로를 불태워 가면서 몰입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한결같이 그 구조라는 비역사성이 십자가 다 라고 말했다가는 아마 미친놈 소리를 듣게 되고 심지어 죽임을 당하게 까지 될테니 또 믿음이라는 선물, 성령이라는 선물을 받은적이 없으니까 외칠수가 없는 겁니다. 바리새인들이 묵시운동을 펼치는 것과 동일한 겁니다.

박윤진 성도님의 예수안이라는 글을 읽고 깜짝놀랬습니다.
마침 최근의 이근호목사의 오전설교들이 처음자리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어서
그 처음자리에 대해서 어머니랑 계속 계속 은혜를 나누는데 기쁨이 넘쳤습니다.

한 므나 비유와 있는자는 더 받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는 방식
그리고 나귀 타심, 예루살렘을 보시고 우심, 그리고 권세

마침 얼마전에 왜 세례요한이 오실이가 당신입니까 라고 예수님께 물었냐고
정말 몰라서 묻냐고 저에게 물으셔서

세례요한 자신의 선지자 직 조차도 오실분이 아니면 아무 의미가 없다고
실컷 선자자 노릇을 해놓고서는 뻔뻔 스럽게 그렇게 물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답변 또한 희한합니다.
나로 인하여 실족하지 않는 자는 복이 있도다 라고 선지자 노선의 정점을 찍는 발언을 했습니다.

즉 선지자란 뒤에서 꽝하고 차를 박아버리는 자입니다.
분명히 교통법규 잘 지키고 바른 노선의 차선을 따라서 가고 있는데 뒤에서 느닷없이 박아버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래서 차에서 내려서 머리 뒤통수 잡으면서
당신이 뭔데 나를 박느냐? 운전 똑바로 못해? 라고 따지는 겁니다.

안 따지고는 못배기도록 만들어 버리는 것이 바로 선지자입니다.

그런데 이런 인자(선지자)를 훼방 곧 따지고 대드는 것은 용서가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왕이 뒤에서 아무 이유없이 박아버렸는데
이 사람이 내려서 운전 이따위 식으로 할 꺼 ~~~  헐 ~~ 갑자기 말문이 막혀서
왕을 보고서 무조건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전하

제가 운전이 초보라서 감히 전하의 옥체를 훼방했사오니 죽여주옵소서
라고 긍휼을 바라고 있습니다.
(수평적인 역사적 시각인 인간이, 수직적 묵시적 시각으로써 구조가 떳다 라고 역사를 강제퇴장 시켜 무조건 죽여달라고 외쳐버립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누가 나를 건져내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것이 샬롬입니다. 평화입니다.

임금이 와서 박든 말든 무조건 자기잘못임을 외쳐야 마땅한 것이 바로 샬롬입니다.

그런데 현대인의 의식에는 왕이 없습니다. 도리어 자신이 왕입니다. 그래서 평등이요 개인의 권리를 우선시 합니다. 이것이 마찰이 생겼을 때 법원에서 조정을 합니다. 법원 조차도 평등을 우선시 하기 때문입니다.

또 말이 길어질까봐 여기까지 하고
중요한 것은 꽝하고 뒤에서 박았을 때 사건이 발생하는데 그 두 개가 부딧히는 그 스파크 찌릿한 그 틈사이에서 이스라엘이라는 처음자리가 빈공간으로써 나타나는 겁니다.

거기서 태어난 자가 이스라엘입니다.

제가 지금 구조를 설명합니다. 그 매트릭스에서 자궁에서 긍휼에서 태어난 자가 이스라엘입니다.

세례요한 조차도 꽝하고 박음을 당하게 되니까 신들메 신발끈 풀기도 감당못할 분을 보고서는
바로 그때부터 누락되고자 본격적으로 죽음으로 달려가버리는 겁니다.

죽어도 상관 없는, 소모품이 되어 버려짐을 당해도 상관없는, 일회용 컵으로써
이미 완료가 떳네 라고 저는 이제 누락될랍니다 라고 무대뒤로 퇴장해버리는 겁니다.
(수평적인 역사적 시각인 인간이, 수직적 묵시적 시각으로써 구조가 떳다 라고 역사를 강제퇴장 시켜버립니다.)

구조만 형성해 버리는 겁니다. 긍휼 곧 은혜가 떳군요 라고 외치고
용서하실자가 떳다 라고 외치고 누락됩니다.

이제 행함의 세계는 예수님에게 정면 도전하게 되는 충돌이 벌어지는 겁니다.

그 행함의 세계를 역사 라고 합니다. 역사란 긍휼이 아닌 짐승이라는 육의 방식을 추구합니다. 그래서 그 댓가를 획득하겠다는 겁니다. 역사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투자 하지 않으면 절대로 꽁꼬물도 안 떨어지는 세계입니다.

그러나 구조란 비역사입니다. 긍휼로써 짐승의 역사라는 남근을 할례시키는 방식으로써 단절로써 다가옵니다. 그래서 나로 인하여 실족치 않는 자는 복이 있도다 라고 했습니다. 실족할정도로 단절성으로써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꽝하고 일방적으로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박아버려서 차를 폐차 수준으로 만들어버립니다. 육이 이라는 기관 없는 신체(묵시운동하는 몸)를 박살내는 겁니다.

그래서 지금의 모든 철학은 인간의 신체를 주제로 하는 몸철학입니다.
처음부터 그랬고 나중도 그렇습니다.

여기에 대비되는 복음은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그냥 그리스도의 몸이 아니라, 십자가에 달린 몸입니다. 그래서 사도행전은 너희가 죽인 몸이 다시 살아나 주가 되셨다 라고 외치니까
저절로 무너지는 몸떵어리를 격는 몸이 그 죽었다 살아난 몸에게 무조건 엎드리는 겁니다.
여기에 항복하는 살고 그렇지 않는 자는 죽는 통보를 통보 조차 일방적으로 하는 겁니다.

이것이 오늘날 현재에도 동일합니다.

물론 현대인의 사고에서는 말도 안되는 비웃음꺼리 밖에 안되는 소리입니다.
미친놈이 아니고서야 그런 복음을 외칠 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교회도 안 외칩니다. 장사를 해야지 복음을 외치면 돈이 들어오지를 않아 굶어죽게 됩니다. 물론 중용적인 교회도 있습니다. 적당히 눈치 보면서 외칩니다. 어느 정도의 수위가 넘어가면 교인들의 반응이 나타나기에 들을만한 수준까지만 합니다. 이것이 바로 개혁주의 라고 하는 자들입니다. 적당한 묵시운동인 겁니다. 성화론이지요.

그러면 성화론을 욕하는 저는 그러면 다르냐? 다르지 않습니다. 그래서 십자가 스스로가 매우 부지런히 늘 우리를 치셔야 합니다. 계속 계속 사건을 유발시켜서 계속 계속 쳐야 합니다.
그것이 사랑입니다. 매가 있기에 그 처음자리를 보게 됩니다.
안 맞으면 늘 그 처음자리를 무시하게 되기에
희년을 몰고온 주님 앞에서 왜 저런 개같은 이방인에게 긍휼을 베푸냐고
그 일하심을 이해할 수가 없고 반발하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늘 수시로 간섭하시고 치시는 겁니다.
우리는 심심하면 육의 사고에 빠져들고 심심하면 묵시운동
심심하면 성화운동 심심하면 개혁을 부르짖어서

아무것도 한 것이 이룬 그 십자가의 공로인 믿음의 자리
처음사랑을 자리를

자꾸 행함의 댓가로써 따져들게 되는 버룻을 추구하는 겁니다.

그래서 늘 흔적을 내십니다.

늘 악한 우리가 저런 기적 따위를 바랄 때
정작 예수님은 흔적이라는 표적을 휙 그어버리듯이 할켜버립니다.

와냐하면 우리 인간이라는 육도 심심하면 기적을 바라는 악한세대에 갇혀있기 때문입니다.
(곧 성공이지요 실패하면 안된다는 겁니다. 믿음조차도 성공여부롤 따지는 겁니다. 그러나 복음은 죄인 중의 괴수의 자리 곧 심판의 자리가 처음사랑인 십자가의 용서라고 하는 겁니다. 이 차이의 갭을 점점더 벌려 버리니, 아무리 믿고싶은 행함을 펼쳐도 안되는 겁니다.)

베드로가 심심하면 몇 번 용서할까요? 7번? 자신이 가능하다는 것을 늘 끄집어 냅니다.
예수님이 못때 빠지게 그 7번 용서를 휙 하고 찢어버립니다.
7에 70번 490번? 무한대로 용서하라고 합니다. 바닥을 치라는 겁니다.
그거 죄라고 말입니다. 남을 용서하는 것 죄입니다.
남을 사랑하는 것 죄입니다.
네 이웃을 내 몸 같이 사랑하는 것 죄입니다.
캬 제가 지금 성경말씀을 뒤엎어버렸으니 기가막힙니다. 이단 중에 이단이 되겠지요.
7번 용서하면 큰일 납니다.
490번 용서 하면 큰일 납니다.
그때부터 그렇게 못한 6번 용서한 자는 얍잡아 보게 됩니다.
안 얍잡아 보도록 자신들이 회개 생활 하면 된다고 우깁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일부러 일만달란트 탕감받은 그 기쁨을 누리는데
백데나리온 빚진자를 하필이면 그 기쁨을 누리는 코 앞에서 지나가게 되니
갑자기 그 빚진자를 도저히 안 잡고는 못배기는 겁니다.
결국 용서를 그렇게 비유로써 증거하고 있습니다.

용서를 이데올로기 화 하면 안됩니다.
아니 안된다고 외치는 것 조차도 이데올로기이니 어쩔수 없네요

제 말은 인간의 육은 죽기전까지 뭐든지 이데올로기화(기의 없는 기표: 허구)  해버린다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미쳐 버립니다. 모호한 흐릿한 희미한것만을 붙잡고 평생을 종노릇하는 겁니다.
(그래서 저들에게서 곧 육체가 이데올로기 기의 없는 기표가 된 몸에서 싫어버린바 되는 기표가 바로 십자가 입니다. 요나의 표적이요 십자가 사랑의 흔적입니다.)

7번 용서 8번 용서 손가락 세고 있게 되는 겁니다.
이웃을 도대체 몇 명 용서해야 용서 다울까요?
그것도 이웃이라는 선을 어느 기준으로 해야한다 말입니까?

결국 인간이란 자신의 가능성 곧 육체를 기준으로 설정하지
성경말씀의 기준이 아니다는 겁니다. 끝까지 성경을 참조하고 성경기준이라고 우기지만
정작 성경말씀은 우리 지키라고 준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마귀보란 듯이 준 겁니다.
반대로 우리는 예수님의 숙제의 결과물로써 누리는 것 뿐입니다. 지킬성경 단 하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성경 말씀은 인간의 육체를 염두하고서 도저히 지킬수 없는 것들만 나열한 겁니다.
지키면 지킬수록 말려드는 겁니다.
올무입니다. 율법은 포획장치입니다.
의문의 증서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 육체라는 몸 때문입니다.
그래서 율법 외에 한 의가 와야 한다는 겁니다. 다른 몸이 와야 합니다.
그 몸을 증거하는데 있어서
육체에 가망이 없는
누가 봐도 가망이 없고
자신들이 쳐다봐도 가망 없는 육체에게
희년을 이미 완료로써 다이루었다고 외치는 믿음이 온 겁니다.

그 오신 믿음을 더더욱 증폭 시키기 위해서
상대적인 반발하는 육체가 놀랍게도 율법 하나님말씀을 더더욱 잘 지키는 자들이
이 믿음을 더욱더 또렷하고 명료하게 하기 위해서
걍팍함으로(행했기 때문에, 그런 육체이기에) 동원이 되는 겁니다.

힘이 없다면 출애굽하는 히브리인들을 따라갈 리가 없습니다.
힘이 있고 칼과 창이 있기에 달려듭니다.
그러면 그렇게 될수록 주님은 영광을 애굽 군사를 통해서 받는 겁니다.

주 여호와의 구원은 방해 받을 리가 없고
인간의 믿음이 애굽군사를 보고 낙심한다고 해서
원망한다고 해서 전혀 그 구원의 손이 굽혀질 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정작 애굽군사를 일으킨 당사자가 여호와 자신입니다.

이런 주님의 일방적인 사랑 곧 죽음을 시기 질투 투기하는 사랑이 아니면
반대로 인간은 자신의 육체의 이데올로기에 빠져버립니다.
선악과를 따먹고 하나님과 같이 되어버렸기에 심심하면
육체에서 나온 것들을 절대화 해 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늘 수시로 뒤에서 박아버려야 하는 겁니다.

희년을 구원의 뿔이라고 했습니다.

날카로운 뿔이 늘 수시로 우리를 구멍을 뻥뻥 내버려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그 처음자리를 외면하도록 되어 있는
육체의 구조에 빠져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예수님의 숙제입니다.

인간의 숙제가 없습니다. 인간이 숙제하면 지 잘났다고 까불기 때문입니다.

늘 수시로 일방적으로 뒤에서 박아버려서 실족케 만들어버리실 때
오히려 마땅히 죽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감히 임금의 차를 박은 것이 평생 감옥살이 해야함에도 불구하고
박았기 때문에 임금님을 만났다는 그 기쁨
임금님의 얼굴을 보고도 타 죽지 않았다는 그 용서의 긍휼 샬롬을
신나게 노래 할 수 가 있는 겁니다.

놀랍게도 평생을 교회에 충성 봉사하고 모든 것을 다 바친자들은 노래하지 않는 이 환경에

도저히 노래라고는 할수 없는 교회 다닌적 없던
창녀 세리 강도 문둥이 흑암의 백성 사망의 그늘에 폭삭 주저 앉은자 개같은 이방인이

은혜가 덮쳐져서 일방적인 용서가 부어져서

희년을 외치는 겁니다.

예루살렘이 졸지에 이 소동에 시끄러워집니다.

이들이 외치지 않으면 돌들이 외치는 겁니다.


뿌뿌뿌 ~~~~~~~~~~~~ 뿌뿌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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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70이레가

7이레 기간 동안 짐승을 만들어 세우는 기간
62이레 기간 동안 성전을 세웠다가 성전을 부수는 기간이고
한 이레가 이 두 기간을 배경으로써 완료되는 예수님의 때인데

짐승에게 핍박받는 유대인들이 62이레를 거치면서
이런 자신들의 이레 계산 즉 70이레를 계산할줄 아는 자신들이 핍박받았고
예언대로 되었다고 주장한다는 그 자체가 역사적인 해석인 짐승의 해석임을
정작 예수님을 핍박하는 그 모습 속에서 예수님이 들추어내십니다.

짐승에게 핍박받았기에 설마 자신들이 짐승이 아니다고 여긴 겁니다.

그것이 역사적해석 곧 짐승의 해석임을 일부러 성전세우는데 방해꾼 노릇을 한 사마리아인을 가지고서 거봐 너희들도 짐승임을 들추어내는 방식이 바로 비역사적인 해석인 십자가 해석입니다.

결국 인간의 모든 해석은 십자가의 해석에 대립되는 해석입니다.,
도리어 해석을 손 놓고 십자가로부터 해석당해야 마땅할 입장인데

놀랍게도 십자가로부터 해석 당하는데 있어서 그 해석을 딱 하나 뿐입니다.

제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 라고 외친자입니다 라는 답변 뿐입니다.

너희가 죽인 예수를 주께서 다시 살려내서 주의 자리에 등극했다는 것이

뻥뻥뻥 뿔에 뚫혀서 기쁨으로 다가오지 않으면
그저 화나고 나를 쪽팔리게 만들고
그럼 내가 살인자냐 라는 반발과
이거 완전 어거지로 뒤짚어 씌우기 작전에 말려든거잖아 라는 의식이

십자가로부터의 해석에 의해 나타나는 겁니다.

십자가가 아니면 믿음으로 가장한 죄를 들추임 당할 능력이 없는 겁니다.

62이레에서 형성된 몸(성전) 조차도 ? 인간의 손으로 지은 성전
예수님이라는 몸을 핍박하는데 일관하는 겁니다.

그래서 십자가로 돌진하지 않으면 우리는 악마에서 벗어날수가 없습니다.
철저하게 갇혀버린 겁니다.

그래서 광야교회에서 10가지 원망을 증거궤에 담아내어야만 하는 겁니다.

예수님의 몸은 우리의 죄악을 담아내고자 넉넉한 십자가의 사랑을 다 이루신 겁니다.

이 처음자리가 우리가 그렇게도 싫어하는 예수 안입니다.



주님 감사합니다. 아무리 봐도 위선적인 해석 뿐입니다.
주님 쪽에서 해석해 주시길 바랍니다.
이런 위선적인 해석에서 벗어날 길이 없음을
십자가의 용서로써 매일 매일 건져 주시옵소서.

이 육체에서 빨리 건져 주시옵소서.
늘 나에게 내가 미쳐버리는,
나에게서 내가 갇혀버린,
이 악마의 세계에서 걷져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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