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판의 자리가 곧 용서의 자리 (예수 안과 예수 밖의 차이)


사도행전의 출발을 저는 예수 안과 예수 밖의 차이성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의 죽음으로 곧 10번의 재앙으로 장자를(인간의 육체) 십자가에 못 박음으로써, 심판함으로써

출 애굽,
출 예루살렘,
출 육,
출 세상을

실행하심으로써 점을 찍고


다시 예수님의 부활하심으로

입 광야(예수 안; 용서 안, 긍휼 안, 십자가 안)
입 성령의 전(사람의 손으로 지을수 없는)
입 그리스도의 몸
입 약속성취 안 곧 예수님 나라 (공간 개념의 이동이 아닌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다는 다 이루셨다는 언약 완료의 의미 곧 십자가의 사랑(은혜)를 이루심)

완성으로 점 찍어서

이 두 점의 간격을 벌리심으로써 주의 주 되심을 실현하십니다.

이 주의 주 되심의 대상이, 새창조물이, 바로 성령을 입은자 곧 약속하신 성령을 선물로 받은자 인데

선물 받는 자가 소유개념으로써 주도권을 쥔게 아니라
도리어 선물이 주도권을 쥐어서
선물 받는 자를 장악하는 방식입니다. 곧 전쟁입니다.

선물 받는자가 도리어 선물에게 침노당하는,
침략당함으로써 전리품이 되는 방식이
바로 십자가의 약속 구조입니다. 비역사적입니다.

분리 시키고 구별시키고 분별 차이 간격벌리는 주체가 선물받는자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선물이라는 소유 의미처럼 보이는, 유물처럼 보이는 포획장치에게 있는 겁니다.

정작 이 성령 조차 소모품처럼 누락되어야 마땅함을 보여주는 방식입니다.
성령이 주의 영으로써 나 아니요 예수님이 옳았습니다 라고 내 속에 없는 정직한 영을 심으시는 겁니다. 할례 곧 단절로써 말입니다. 회개의 영을 부으시는 겁니다.(내가 주께만 범죄했사오니 주께서 나를 순전케 하셨군요 시 51:4 )
주의 주 되심을 위해서 소외되고 배제 되는 방식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엘리 엘리 라마사박다니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옵소서)

바로 십자가의 사랑 때문에, 그 언약의 구조 때문에 철저하게 기계(기능, 은사)가 되는 방식입니다.

그래서 사도행전은 성령행전으로써 성령이, 종말의 영이 홀로 활동하심으로써 종말의 토네이도를 형성하십니다.(불을 지르십니다.)

그 불이 바로 처음자리입니다. 그 불의 자리, 심판의 자리, 예수 안, 첫사랑의 자리를

이스라엘(유대인)이 외면하고, 이스라엘의 처음자리를 이스라엘 스스로가 발로 차버린 자리를 새롭게 다시 형성하심으로써

절대로 그 처음자리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더 넉넉하게 풍성하게 완성하십니다.

그들 이스라엘이 이 십자가의 사랑인 처음자리를 발로차고 외면해 버리고 삭제 시켜 버렸다 손치더라도

정작 처음자리는 삭제 되기는커녕 더욱더 또렷하고 생생하게 자리잡게 됩니다.
이 처음자리를 선명한 고화질 풀hd 소문자가 아니라 대문자 ㅋㅋㅋ ,
풀 HD 초고화질로써 다이나믹하게 역동적으로 한치오차없이 보여줍니다.

너희 죽인 나사렛 예수가 다시 살아나 주가 되셨다 라고 말입니다.

그 홀로 외침의 성령의 전쟁 앞에

주님이 승리하심에 기뻐하는 자
주님은 나 보다 강하십니다 라고 그 전쟁을 다이나믹하게 격어서 전리품이 됨을 실감한자
주가 다 이루셨음이 남이 아닌 나를 이기심으로써 약속이 덮침을 감사한자가

그 거룩한 전쟁의 기계로써 전리품으로써 주 예수 그리스도의 다시 사심을, 주 되심을 외치는 겁니다.

성령이 홀로 외치시는데 그 외침을 전리품을 가지고서 증거하십니다.
제자들 곧 사도들과 바울이 예수님의 버린자들이였지만, 핍박하고 죽인자들이였지만,
도리어 성령의 십자가 용서 전쟁에 전리품이 되어서
나사렛 예수를 오히려 외칩니다.
내가 죽인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셨고
내 죄 때문에 내가 죽인 예수님이 도리어 날 용서하셨다고 죄를 감추고 외치는 것이 아니라
죄를 들추어내면서 참으로 뻔뻔스럽게 외칩니다. 이 모순의 간격을 감추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더 노골적으로 이 텅빈공간의 수치를 가리우거나, 채워넣는방식이 아닌, 채울길이 없어서 좁힐길이 없는 간격 그 모습 그대로 외치는 겁니다.

이 외침이 복음입니다.

복음이 인간의 입술이나 손이나 몸이나 행함을 통하지 않고

복음이 복음 스스로 외치는 겁니다. (철저한 비역사성 곧 단절성입니다.)

복음(천국: 예수안: 처음자리: 심판: 십자가의 용서)에 침략당하면서 모든 것을 빼앗기고 약탈당해서, 복음이 침노하면서

이들 증인들은 빼앗긴 흔적 그대로
퍽, 윽, 헉, 으악, 거리는 그 육체의 허물어 지는 외침이
그 삑사리가 바로 찬양이 되어 외침이 되어 복음의 증거가 되는 겁니다.

이 흔적(증거)를 받은 겁니다.

나 주님의 전쟁에 참패 했다고
죽임을 당했다고 그 죄인됨이 비로소 들통났다고 증거하면서

이 흔적을 가지고서
이 흔적을 남긴 주인공을 증거하는 겁니다.

이 죄인도 용서 받았다 라고

이 샬롬, 이렇게 화평 평화를 이루심이지(심판으로써 이루심)
전쟁의 방식이 아니고서 이루는 거짓 평강은 악령 받은자의 돈벌이 수단입니다.

주께서 나를 원수 삼으시고 돌파 하심으로써 이루신 화평입니다.
자기 아들을 원수에게 내어주시고, 아낌없이 내어주심으로써 이루신 용서입니다.


이것이 거룩입니다. 분별 구별 분리 차이의 방식인 간격벌리기입니다.
이 차이성이 바로 거룩입니다.
예수 안과 예수 밖의 차이입니다.
심판이 없이는, 피 흘리심이 없이는 그 차이는 모호해 집니다.
그 피흘리심의 사건의 반복인 십자가의 사건의 반복이
그 증식이
흘러 흘러 넘치도록 남고 또 남고 또 남아도는 잉여가 바로 십자가 사건의 반복입니다.

점점점 그 간격의 차이는 벌어지게 하는 증식 증폭 잉여입니다.

이런 거룩한 전쟁을 성령 홀로 즉 약속하신 선물이 홀로 이스라엘이 외면한 그 처음자리를(불: 심판의 자리) 새롭게 만드시고(다른 잉여는 없기에) 그 간격을 벌리십니다.

영원히 건널수 없도록 그 텅빈 공간을 채워넣을길이 없도록
도저히 좁힐수 없도록

그 모순을 더 당당하고 선명하고 또렷하게 간격을 차이를 벌리는 겁니다.
모든 모호한 소리(평강이다 평강이다)를 일부러 배경으로 카페트로 깔고서
그 배경(역사)을 가지고서
그 차이성으로써 비역사(모순)인 너희가 죽인 예수가 다시 살아나셨다를 외치면서
간격 벌리기 라는 거룩을 가시화 하는 겁니다.

심판(십자가)이 아니고서는 거룩이란 없습니다. 다른 분별의 방식, 차이의 방식은 업습니다.

이 심판의 완료로 시작하는 것이 바로 사도행전의 출발 입니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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