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가 배태한 걸림돌의 몸

이미 변이 된 몸으로써의 출발 - 성령의 전 됨을 누리기

2012년 3월 23일 금요일 오후 2:24:06  김대식


(눅 1:46, 개역) 『마리아가 가로되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
(눅 1:47, 개역) 『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음은』
(눅 1:48, 개역) 『그 계집종의 비천함을 돌아 보셨음이라 보라 이제 후로는 만세에 나를 복이 있다 일컬으리로다』
(눅 1:49, 개역) 『능하신 이가 큰 일을 내게 행하셨으니 그 이름이 거룩하시며』
(눅 1:50, 개역) 『긍휼하심이 두려워하는 자에게 대대로 이르는도다』
(눅 1:51, 개역) 『그의 팔로 힘을 보이사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고』
(눅 1:52, 개역) 『권세 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셨고』
(눅 1:53, 개역)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부자를 공수로 보내셨도다』
(눅 1:54, 개역) 『그 종 이스라엘을 도우사 궁휼히 여기시고 기억하시되』
(눅 1:55, 개역) 『우리 조상에게 말씀하신 것과 같이 아브라함과 및 그 자손에게 영원히 하시리로다 하니라』


변해야 할 몸? 아니 변한 몸? 변이 될 몸? 이미 변했던 몸? 이미 완료된 몸?

적당한 표현을 어떻게 찾아야할지 모르겠습니다.

이미 완료된 변한 몸 이라는 의미를 축약해서 제목처럼 생각하면 될 것 같습니다.


누가복음과 다르게 마태복음은 계보로서 처음자리가 이미 예수님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이다 라고 선언하면서 시작함으로써
상대적인 육의 족보를 대치시키면서
아브라함 자손이라고 우기는 너거들은 이 족보에서 누락될 뿐이다 라고 시작합니다. (다윗을 의도적으로 빼버립니다. 다윗 조차도 단절된 족보입니다. 그래야 다윗의 자손으로 오신 이가 주가 되시는 겁니다.)

마침 며칠전에 어무이가 셰례요한에 관해서 (오전 설교 권세) 묻고 난 그 다음 날 아침 밥상에서 어제 밤에 예수님의 족보를 쭈우욱 적어봤다고 적은 종이를 나에게 보여주었습니다.

보니까 어무이 이거 틀렸습니다.

아니 그러고 보니 왜 14대 14대 14대냐 아무리 해도 틀리던데?

그러니까 어무이가 적은 것 틀린겁니다.

적으시다 보니 14대 14대 14대가 아니다는 것을 아셨고
그것을 계산하다 시피 적어보니 맞출수가 없으셨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것이 틀린 것이 아니라
어무이 말 마따나 14대 14대 14대 그거 안 맞습니다. 14대 13대 14대 이거나 14대 15대 14대입니다.

제가 틀렸다고 한 것은 틀렸다고 본 그 14대 14대 14대는 잘 맞고(성경의 기록은 맞고)

어무이가 종이에 적은 족보에 참재미있게도 어머니가 여자 이름은 하나도 적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틀렸다고 보자 마자 땡 틀렸습니다 라고 하니 그래 그래 14대 14대 14대 백날해도 안되더라 라고 하셨습니다.

아뇨 아뇨 어무이!! 그것은 원래 안 맞고요
제가 틀렸다고 한 것은

처음자리가 [꼬끼오 에게서,  꼬끼오 에게서, 꼬끼오 에게서] 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이렇게 새로 적어드렸습니다.

세 뭉태기의 그림을 둥글넙적하게 그리고서는 그 속에 이름을 적었습니다.
놀랍게도 어무이가 적은 남자 이름을 모조리 작살 냈습니다. 간디작살ㅋㅋㅋㅋ
모조리 빼버렸습니다.

아주 간단하게 5명의 여자 이름만 적었습니다.


처음 [꼬끼오 에게서] 는 뭐냐?  여자 이름 세 명이 들어갑니다.
[다말 에게서] [라합 에게서] [룻 에게서]

오히려 아브라함 마누라 사라에게서를 넣어야 하지 않을까요?
그러니까 남자인 아브라함을 족보를 끊어버리는 것이 다말입니다. 이방여자입니다.

모세 부족(율법 민족)을 끊어버리는 단절성이 라합입니다. 이방여자요 기생입니다. 율법과 모순 됩니다.

이스라엘 전체를 끊어버리는 것이 룻입니다.

그리고 언약이 다시 갱신 됩니다. 두 번째 [꼬끼오 에게서] 로 넘어갑니다.


두 번째 [꼬끼오 에게서] 는 누가 들어가냐? 놀랍게도 여자 이름이 아니라 남편 이름이 들어가는데 처음남편 두 번째 남편 둘 다 언급하면서 사건이 담겨진 이름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남편이 처음 남편을 고의적으로 아주 야비하고 철저하게 계산해서 죽여버린 그래서 남편 자리를 빼앗은 다윗이라는 남편이 죽인 우리야 장군이라는 처음 남편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밧세바 에게서) 라고 기록하지 않고, [우리야의 아내 에게서] 입니다. 그래서 [꼬끼오 에게서] 입니다.

즉 이스라엘 하나님을 끊어버립니다. 인간의 믿음의 대상인 하나님을 단절시키는 겁니다.


그 다음 세 번째 [꼬끼오 에게서] 는 족보 제일 끝에 나열 되면서 [마리아 에게서]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최종적으로 예수님을 드러내기 위한 족보로써 앞의 것이 모두 동원이 됩니다.

[걸림돌 족보] 입니다.

마치 7이레 동안 민족이라는 육 혈육성을 짐승을 배경으로 깔고

그 짐승이 국가화 되었을때에 62이레 동안 짐승으로부터 핍박받는 사실은 전쟁을 먼저 시비붙듯이 붙은 것은 이스라엘 쪽이였지만 정작 그들이 전쟁을 싫어하게 되고
국가(짐승) 개념에 푹 빠지게 되니 자동적으로 짐승이 됩니다.

자 이런 두 몸(이레)을 배경으로 깔고 등장하는 몸이  한 이레. 한 몸, 다른 몸이 바로 예수님이요 여자에게서 난 여자후손이니 마태복음의 족보의 의미는 인간은 짐승이요 그 대표성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유대나라이다 라는 겁니다.
(바벨론 포로를 기점으로해서 세번째 [꼬끼오 에게서] 로 전환이 되는데, 아들이라고 했던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에서 쫏겨나면서, 즉 방청소 할테니 나갔다 오너라 하고 다시 돌아오도록 표시를 해라 그때는 아들이 아니라 처녀가 된다고

남근(원수된 짐슴의 몸)이 짤려 할례(성전 파괴)가 된 몸으로써 온다고 했습니다. 결국 자신들 조차도 짐승임이 드러나고 바지벗겨지듯이 약속의 궤만을 쳐다보도록 하는 조치 입니다. 단절 된 역사 곧 비역사적 존재인 예수님을 쳐다보지 않는 자는 짐승에게서 벗어나기 싫다는 강퍅성을 드러내는 꼴입니다. 그래서 단절이라는 묵시로써 모든 인간의 역사를 차단합니다. 심지어 이스라엘 조차도 차단하여야 처녀가 되듯이 말입니다. 그 원수의 터 위에서 참성전이 세워집니다.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교회 입니다.)

그래서 제가 어머니께 두루마리 휴지를 한칸 때에서 접기를 해서 세가지 주름을 만들어 내어서 보여드렸습니다. 산처럼 세 기둥이 뾰족하게 만들어서 보여드리고. 그 처음에 첫 번째 꼬끼오 에게서, 중간에 뾰족하고 접혀진 윗 부분을 두 번쩨 꼬끼오 에게서, 마지막 세 번째 기둥을 세 번쩨 꼬끼오 라고 하면서 이것이 묵시 곧 예수님의 계시인데 이 묵시가 역사 라는 인간을 모조리 전멸시킨다고 했습니다. 인간을 구멍 뻥뻥뻥 뚫어버린다고 했습니다.

이 세 기둥의 비역사(구조)인 묵시가 인간의 모든 역사를 조각 조각 깨뜨린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출발을 이렇게 시작하니 빨리 투항하고 자수하고 항복하라 라고

일방적으로 범죄자 만들어서 항복하면 살려준다 라는 식으로 선포를 하니 아무도 항복하지 않는 겁니다. 그럴줄 알았다 하하하 라고 본격적인 천국의 침략이 시작되는 겁니다.

이것을 처음자리(예수안- 여자가 남자를 안는) 라고 설명했습니다.

그런데 누가복음에서는 이 처음자리를 일방적으로 고아(꼬끼오) 과부(꼬끼오) 나그네(꼬끼오)가 바로 너야 라고 선언하고 들어가는 겁니다.

저 더러운 아비없는 왕따 고아입니다. 내가 니 아빠 할께 일방적인 선언으로 완료가 되었습니다. 반응하든 말든 순응하든 말든 이미 완료로 출발합니다.

저는 남편없는 과부 입니다. 나를 떠나소서, 내가 니 남편할께 ! 과부 딱지 뻥뻥뻥 뚫어버립니다.

저는 임금없는 떠돌이 나그네 입니다. 내가 너를 나의 백성으로 삼으마 내가 너의 임금이 되어주마. 라고

일방적으로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선언하고 들어가는 겁니다. 불임여성에게 만민의 어머니다 라고 선언하는 식으로, 나팔 불고 뿌뿌뿌 하고 들어가버리는 겁니다. 시간이 뒤죽박죽 공간이 지멋대로가 되어버리는 묵시가 미래(완료)에서 덮쳐버리듯이 말입니다. 예수님의 믿음이 덮친겁니다. 인간의 믿음은 역사라서 행위의 법이요 댓가를 바라지만, 예수님의 사랑은 오로지 용서 뿐입니다. 피 흘림 뿐입니다. 죽음 뿐입니다.

(히 11:11, 개역) 『믿음으로 사라 자신도 나이 늙어 단산하였으나 잉태하는 힘을 얻었으니 이는 약속하신 이를 미쁘신 줄 앎이라』
(히 11:12, 개역) 『이러므로 죽은 자와 방불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하늘에 허다한 별과 또 해변의 무수한 모래와 같이 많이 생육하였느니라』

마치 전쟁 하지도 않고 싸움도 시작하지도 않았는데 미리 지도를 펼치고 가나안 땅을 갈라먹기 합니다. 12지파의 대표들이 현실(가시적)이냐 말씀(추상적;안보임)이냐 에 의해 저마다 자신들이 차지할 땅을 갈라먹습니다. 웃기는 것은 전쟁에서 이길지 질지는 불확실합니다. 그렇다고 이런 괘상망측한 지도 펼치고 갈라먹기를 하는 모습에는 동참을 하지 않을수가 없습니다. 연기를 해야하고 위선적으로 행동해야 합니다. 그것조차도 이런 분위기(이스라엘) 속에서는 현실이니까 말이죠.

실제로 쳐들어가서 전쟁의 결과로써 땅을 배분할 때 그 때 갈라먹는 것은 의미없는 짖이 되는 것이 이스라엘 속의 사고방식입니다. 소용없습니다.

완전히 도박과 같습니다. 이럴줄 알았으면 많이 차지하겠다고 할걸 껄껄껄
소용없습니다.

미리 갈라먹는 겁니다.

여기에 인간의 후회나 아니 그 이전의 한 참 전에 후회 안하도록 적극적인 참여를 한다손 치더라도 소용이 없습니다. 어디까지나 감독의 시나리오입니다. 예수님의 자작극입니다.
차라리 우리 속내 그대로 들키는 것이 낫습니다. 마귀만을 상대로 하기에 우리의 행동을 안봅니다. 연민할 필요없습니다, 피의 영광만을 드러내기 위해, 환자만, 죄인만 찾습니다. 마귀 보란듯이 말입니다.
나를 위한 묵시가 아니라
예수님 자기자신만을 위한 묵시이기에
백날 천날 만날 믿음 좋기를 바라는 나의 믿음과 무관하게 오로지 예수님의 믿음만 세우면 끝난겁니다.

그래서 이와 같은 방식이 만민의 어머니, 열국의 어머니 사라에게서 조차
미리 이름을 사래라 하지 말고 사라라 라고 합니다.
사라(십자가가 배태한 자 =새피조물 새몸) 라는 미리 완료된 이름을 일방적으로 덮쳐서 미완료의 육의 이름과의 대조 차이성을 격게 하십니다.

(창 17:15, 개역) 『하나님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네 아내 사래는 이름을 사래라 하지 말고 그 이름을 사라라 하라』
(창 17:16, 개역)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로 네게 아들을 낳아 주게 하며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로 열국의 어미가 되게 하리니 민족의 열왕이 그에게서 나리라』

마치 아브람 이라고 하지 말고 아브라함 이라고 하라 라는 이름이 차이나게 주어집니다.
이름을 먼저 개명 시켜버리고서 이름에 걸맞는 운명을 사라 쪽에서가 아닌 여호와 자신의 숙제로써 펼쳐집니다.

그러면 간단합니다. 사래는 사래 짖만 하지 사라 짖을 못합니다.
아브람은 아브함 짖만 골라서 하지 아무리 아브라함 짖을 누리고 싶어서 아브라함 되기를 펼쳐도 못합니다. 성도 되기가 불가능 합니다.
그 반대입니다. 막살기 밖에 안나오는 겁니다.

(참으로 신기한 것은 즉 감추어진 공개되었으면서도 비밀이 된 것은
육의 이름의 몸은 믿지도 않으면서 그것도 가장 고상하게 잘 믿는척을 잘합니다. 그래서 낳은 것이 이스마엘인데
놀랍게도 이삭을 괴롭히는 짖만 골라합니다. 육의 열매입니다.

그러나 새이름의 몸은 아무것도 한 것이 없는데, 막산것 뿐이고, 신앙포기한것 뿐인데, 덜커덕 아무리 애 써도 낳은 수 없는 죽은 태에서 임신이 되는 겁니다. 약속의 씨 입니다.)

(갈 4:21, 개역) 『내게 말하라 율법 아래 있고자 하는 자들아 율법을 듣지 못하였느냐』
(갈 4:22, 개역) 『기록된 바 아브라함이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계집종에게서 하나는 자유하는 여자에게서 났다 하였으나』
(갈 4:23, 개역) 『계집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하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
(갈 4:24, 개역) 『이것은 비유니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 하나는 시내 산으로부터 종을 낳은 자니 곧 하가라』
(갈 4:25, 개역) 『이 하가는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 산으로 지금 있는 예루살렘과 같은 데니 저가 그 자녀들로 더불어 종 노릇 하고』
(갈 4:26, 개역)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갈 4:27, 개역) 『기록된 바 잉태치 못한 자여 즐거워하라 구로치 못한 자여 소리 질러 외치라 이는 홀로 사는 자의 자녀가 남편 있는 자의 자녀보다 많음이라 하였으니』
(갈 4:28, 개역) 『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
(갈 4:29, 개역) 『그러나 그 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핍박한 것 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

그렇다면 이것은 누구 숙제 입니까?

아브람 배경을 깔고 아브라함을 차이내고 뽑아내시는 것은 예수님 숙제입니다.

예수님이 마태복음 족보를 인간의 손에 맞긴적 있을까요? 없을까요?

인간이 과연 저런 족보를 이루어 낼수가 있을까요 없을까요?
성화론자 라는 마귀들은 이룰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렇다보니 예수님과 졸지에 경쟁자가 되어버리고 마는 겁니다.
빨리 손 때시길 바랍니다.
제발 교회 다니지 마세요 마귀집단입니다.
바리새인이라는 인간들로부터 존경받고 자신들 조차도 완벽주의의 회개운동으로 철저한 신앙생활을 했던 안막사는 그 바리새인들이
어떤 누구도 밝혀내지 못한 배경을 깔고서 예수님만이 그들이 바로 마귀새끼임을 적나라하게 밝혀냈습니다. 에수님이 아니였다면 우리는 천번 만번 속아넘어갈 수밖에 없는 구조가 바로 역사입니다. 행함입니다.

그래서 율법 외에 한 의가 와야지만 된다는 비역사 만이 그 차이성을 알게 하시는 겁니다.

자 그러니 사래에서 사라 라는 이름을 덜커덕 약속을 임신하듯이 임신해 버려서 그 이름에 걸맞는 열국의 어머니 만민의 어머니가 되어야 할텐데

웃사꺼리가 됩니다.

이제는 몸쫑까지 머리끝까지 기어올라와서 아이가 없다면 기어오르지 못할텐데
아이가 생겨버리니까 졸지에 웃사꺼리가 되고 그 유세를 부리는것에 일방적으로 당하게 됩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숙제를 하시는 방식입니다.

마귀를 깔아야 합니다.

마귀를 깔지 않으면 우리는 바로 이 약속(언약)과 바로 하나가 될려고 달라붙게 되니
예수님이 누구인지 전혀 모르게 됩니다.

바로 물 위를 걸어버리는 기적을 누리면 예수님과 동일한 물 위를 걷는 행위가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빠뜨려야 합니다.

십자가의 죽음으로 내달리는 예수님을 막아서는 베드로를 사탄아 물러가라 라고 외쳐야 합니다.

단절시켜야 그 차이성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죽여버리고 빠뜨리고 단절시켜서 다시 건져내면
아까 알던 주님 아닌데요? 주여 누구십니까? 라고 물음이 새롭게 나오는 겁니다.
도통 내 머리로는 해석불가능한 주님이고 낯선 주님이다 라는 겁니다.
내 쪽으로 끌어당길수가 없는 주님이다 라는 겁니다.

꼭 마귀 보란 듯이 마귀를 배경으로 깔아서 그 마귀만을 상대로 하지 우리를 상대 안합니다.
그래서 하갈이 마음껏 기어오르도록 한 뒤에
아이를 주시는 겁니다.
그래서 자녀가 차이가 나는 자녀가 되는 겁니다.
심지어 사라 본인도 무시한 약속이어야만 합니다.
비웃었습니다. 그 비웃음을 그대로 담아서 약속이 주어지는 겁니다.
웃음이라고 말입니다.

짐승도 비웃었지만, 웃사꺼림을 당한 본인도 약속을 비웃는 매 마찬가지 짐승입니다.
하나되고 일치는커녕 죄인 중의 괴수 괴물 이다는 차이성을 그 단절성을 철두철미하게 격는 겁니다.

욥은 그 단절성을 배타성을 철저한 소외 배제당함 누락당함을 보게 됩니다.
이유를 몰랐습니다.

그런데 묵시가 덮치자 입을 막고 머리를 쳐박으면서 나는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다고 합니다.
도대체 누굴 본 겁니까? 십자가에 달리시는 예수님을 본 겁니다.

너무 너무 참혹해서 자신의 밤새도록 박박 기왓장으로 끌어내는 피부병을 그분의 죽음 앞에서는 감히 입 바깥으로 새어나갈수 없는 지뿔도 아닌 겁니다. 격리입니다. 단절입니다.
죽어 마땅한 자임을 스스로 자신을 차단시키는 겁니다. 이것이 회개입니다.
회개를 행해서 회개가 아니라 회개가 덮친겁니다. 불쌍히 여겨달라고 말입니다.
주체가 저쪽에서 흔들어재낀 것이지 내쪽에서 깨달아내어서 회개한게 아니다는 겁니다.
그저 압도 당하고 장악당하는 충격 그 자체인 겁니다.

그런 비웃었던 사라 만국의 어머니인 불임여성에게서 이삭은 그저 입을 막아버리게 만들어 버리는 부끄 부끄 부끄 꼬끼오 꼬끼오 꼬끼오가 되는 겁니다.

이 삑사리를 주님을 앞장세우시는 겁니다. 이 어리석은 지혜를 참으로 뻔뻔스럽고 당당하게 세상천하만국에 당당히 구석 구석 증거하십니다. 하늘 우주에서 조차도 이 어리석은 지혜를 높이 높이 우주 만방에 외치는 겁니다.

이것이 처음자리요 첫사랑이요 빈공간으로써 이 [없음]이 모든 [있음]을 단절시키는 겁니다.

그래서 누가복음의 시작이 놀랍게도 단 한번도 예수님의 이름을 주 라고 불러본적 자들을 일방적으로 고아 과부 나그네 라는 꼬끼오 꼬끼오 꼬끼오로 삼아서 부끄 부끄 부끄 의 전쟁을 폂치시겠다고 이미 선언해서

순풍 순풍 순풍 녀들인 마귀 자식들과 불임자들인 고아 과부 나그네를 앞장세우는 전쟁
곧 은혜의 전쟁, 희년의 전쟁, 구원의 뿔의 전쟁을 펼치시는 겁니다.

사도행전을 예수님이 죽었다가 다시 사신후 성령을 부으셔서 그 전쟁이 성령을 받은 사도들로 인해서 펼쳐집니다.

놀랍게도 성령을 받기 전까지는 백날 사도들은 그 전쟁을 희한하게도 할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반대입니다. 낙망하여서 뿔뿔히 흩어져 버렸고
내가 미쳤지 이렇게 허망하게 될 줄 알았으면 아까운 시간을 허비하지 말았어야 한다고
후회하면서 되돌아가고 있는 그 발길을 가로막아서 새롭게 다시 불러들어서
그 비웃고 허망해진 마음을 성령을 부어서 새롭게 시작하는 겁니다.
성령 혼자입니다. 인간은 시작한 적 조차도 없고 시작도 못하며 낙망 뿐입니다.

그래서 사도들이 배치가 됩니다. 전쟁군사로써 말입니다.

누가복음은 예수님 혼자 하십니다.
그 앞장세우는 배치물이 고아 과부 나그네입니다.
여기에 심지어 예수님의 제자들 조차도 이 고아 과부 나그네를 비웃는 자로써 등장하게 됩니다.

즉 인간의 믿음이 아무리 예수님을 졸졸 따라다니며 제자로써 행동하고 보고 배우고 해도 소용없다는 겁니다. 제자훈련은 소용없는 짖입니다. 제자훈련(성화운동)이 의미가 있다면 예수님은 제자훈련에 실패하면 안되는 겁니다. 그런식으로 따지면 예수님 조차도 실패한 것이 제자훈련입니다.

도리어 예수님은 제자훈련이 아니라 그 반대입니다.
제자들을 고아 과부 나그네를 무시하는 짐승의 자리에 놓습니다.
향유를 깨뜨려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예수님의 발을 씻는 그 여인을 조롱하고 비웃고 고소하는 위치에 서 있는 겁니다.

결국 은사란 인간이 짐승입니다 라는 것을 서로 서로 충돌(전쟁) 시켜서
서로가 부끄 부끄 부끄 럽게 만드는 것이 은사입니다.

그저 용서 만 쳐다 봐야할 입장이다 라는 겁니다.

(롬 12:20, 개역)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이것이 은사입니다. 예수님의 섬김을 먼저 맞보아 알게된 부끄 부끄 부끄가 된 너가
주님에게 거저 받았듯이 거저 주어라 라는 겁니다.

즉 예수님의 십자가의 용서의 사랑만을 외치라는 겁니다. 7번 용서를 행할려고 하지 말고
도리어 용서 받았다 라고 이런 7번 490번 무한대로 용서받은 그 사랑의 내용인 십자가를 외치라 라는 겁니다.

여기에 제일 방해꾼이 나를 괴롭히는 자가 아니라 도리어 내가 정작 이 용서를 늘 무시하고 있다는 사실이요 늘 비웃고 있다는 사실이다는 겁니다. 내가 그 용서를 정작 싫어한다는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나를 꺽으셨다는 증거가 바로 십자가입니다.

그래서 고아 과부 나그네를 앞장세우지
믿는자를 내세우지 않는 겁니다.

믿는자를 유대 사회에 들이대면
믿는자를 교회에 들이대면

아무도 안 비웃습니다.

고아 과부 나그네를 앞장세워야
교회 사회가, 유대사회가, 믿는자들의 모임이 비웃게 되는 겁니다.

왜 이런 어리석음을 일부러 유발하는 것일까요?

인간을 상대로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이미 모두다 짐승이요 선악과를 따먹인 저 나름대로 자신을 위한 신이 있습니다.
예수라는 우상, 여호와 라는 우상, 하나님이라는 우상이 이미 자리잡고 있는
마귀의 터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마귀만을 상대로 하시는 겁니다.
선악의 방식이 아닌 은혜의 방식 뿐입니다.
이것이 인간을 개무시하는 이유입니다.
마귀만을 상대로 하니 마귀의 집이요 마귀의 밥을 단절시키면 마귀는 물러가는 겁니다.

그래서 애초부터 인간 상대하지 않겠다는 이유로
주의 이름을 불러본적도 없고 주의 이름이 뭔지도 모르는 자를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에게 들이대서 충돌시키는 겁니다.

놀랍게도 고아 과부 나그네가 (누가 복음에서는 사망의 그늘에 폭삭 주저앉은자. 흑암(지옥) 의 백성, 개같은 이방인 특히 성전을 짖는데 방해한 사마리아인)

이스라엘로써 차출이 되어 예수님의 십자가 전쟁에 동원이 되고

반대로 육적 이스라엘은 애굽이 되어서 강퍅함을 드러내어서
출애굽 하듯이

출예루살렘 출 교회를 실행하시는 겁니다.

그리고 40년 광야 누리듯이 그 빈공간에서 목부러뜨림을 당하고
남이 아닌 내가 주님의 원수요 내가 주께만 범죄했음을 알게 하시고
그런 원수에게도 피(예수님 자신의 목숨 생명을 버리심)을 부으시니

십자가에서 태어나는 겁니다. 40년 광야가 십자가입니다.

죽음의 강 홍해를 건너고 / 십자가를 거쳐 / 생명의 강 요단강을 건너는 겁니다.

이 웃싸꺼리 이 비웃음꺼리 이 어리석음을
교회 백날 다녀도 믿지도 않는 예수 믿는다고 우기는 자들 조차도 못믿는 비웃음꺼리를

꼬끼오 꼬끼오 꼬끼오 가 덮쳐서

주님 자신의 숙제를 달성하시는 겁니다.

지금 이 글을 적고 있는 저도 안믿습니다.
혹 믿어지게 될까봐 겁이 납니다.
그래서 나도 비웃어야 현실에 적응하게 됩니다.

그러나 주님은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숙제를 달성하십니다.
이미 처음부터 갈라먹고 시작하고
미리 이름을 바꿔버리고서는 열국의 어머니다 라고 하고서는 실행하시는 겁니다.
일부러 불임여성 없음 죽은자로 맹글어 버려서
미련한 십자가를 실시하시는 겁니다.

태어나기도 전에 발랐던 피를 높이기 위함이지
나를 상대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피를 마귀만이 의식하기에
마귀만을 상대로 일하시는 겁니다.

결국 우리는 이 피를 높이는데 동원이 되는 소모품으로 쓰이는 그 자체로도 영광스러운 겁니다.

벗겨질 수건도 영광스러울 정도로 대단했는데
그리스도 안에서의 영광은 오죽하겠습니까?

(고후 3:13, 개역) 『우리는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들로 장차 없어질 것의 결국을 주목치 못하게 하려고 수건을 그 얼굴에 쓴 것 같이 아니하노라』
(고후 3:14, 개역) 『그러나 저희 마음이 완고하여 오늘까지라도 구약을 읽을 때에 그 수건이 오히려 벗어지지 아니하고 있으니 그 수건은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질 것이라』
(고후 3:15, 개역) 『오늘까지 모세의 글을 읽을 때에 수건이 오히려 그 마음을 덮었도다』
(고후 3:16, 개역) 『그러나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어지리라』
(고후 3:17, 개역)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
(고후 3:18, 개역)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우리가 이 영광 때문에 고아 과부 나그네로 일부러 만드시는 겁니다.
죄인 중에 괴수요, 막사는 인간으로 만드시는 겁니다.

절대로 네버 네버 막살지않는, 수건을 벗지 않는 자들과 일부러 차이내기 위해서 말입니다.

예수님 혼자 피의 전쟁을 아주 아주 심각하게 하십니다.
아무도 도와줄수 없고 도움도 안될뿐더러 방해만 되는 가운데
우리는 그저 전리품으로써 짐승에게 갇혀진 바에서 옮기움을 당하는
그 생명을 그 섬김을 누릴 뿐입니다.

그 사랑을 받은대로 외치면 되는 겁니다.
안 외치고는 못배기는 넘침이지
행함이 될 수가 없습니다.
행함인지 넘침인지 어떻게 아냐고요?
건드려 보면 압니다.

낙심하고 시험이 들면 행함이요.
오히려 주님의 사랑만 더 크게 보이면
감사할 뿐인 겁니다.

아 이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어야만 했구나 라고 말입니다.

주님 당신은 도대체 누구십니까?

저는 죽여주실줄 알았는데 ......
왜 안 죽이시는 겁니까?
심지어 저보고 교회 나가라! 자살하라! 는 인간들이 한 둘이가 아닌데,
(이미 모든 인간은 예수의 죽음으로 이미 죽은자 입니다. (고후 5:14,)
이미 죽은 시체에게 죽어라 죽어라 라고 걸레이자 메말라버린 뼈에게 칼로 수셔본들 무슨 의미가 있으며,
눈에 보이는 사람의 손으로 지은 교회는 교회도 아니요, 교회란 눈에 보이지 않는데 나가라 해 본들 무슨 의미가 있는지? 이런 원수의 터 위에서 예수님의 몸이 대조적으로 세워집니다. 남이 아닌 내가 예수님의 원수였는데 그런 원수도 용서하시는 이웃사랑입니다.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교회라는 신부를 세우시는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피는 왜 저를 용서하시는 건지?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구나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건져내라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새것이 되었도다.

이래서 난 백날해도 아니군요! 항상 저는 틀렸군요 주님이 옳았습니다.
그저 불쌍히 여겨달라는 것 뿐입니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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