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말의 징조와 계류의 기술
 
계류의 기술  (성령의 은사 ; 서로 발가벗겨버리기, 껍데기 벗겨 찢어버리기, 서로 서로 죽이기)

2012-04-23 15:59:09 이름 : 김대식


계류의 기술 (무한연기, 무한집행유예)

어제 설교를 듣고 그 동안의 감격 기쁨 환희를 만끽하듯이
무지 무지 기쁘게 느껴질줄 알고 무지 무지 기대를 했었으나
막상 설교를 들으니까 허탈했다.

어라 !! 뭐여 이거?
완전히 자기 변명이잖아? 푸하하하하하
어떻게 저렇게 뻔뻔할수 있는지? 완전히 배꼽잡았다.
어쨌든 예상을 벗어난 설교라서 또 공부할 것이 생겨버렸다.

마침 차반(차이와 반복=영원회귀)을 설레는 마음으로 접하던 중에
처음부터 막혀서 도통 무슨소리인지 머리아파하는 가운데
계류의 기술이라는 단어를 접하게 되었다.

뭐 말만 대따 바꿀 뿐이였지
해학 ? 채널돌리기 또는 전복 또는 비역질(계간 ; 강간)
끝을 미리 앞당겨서 소급하는 것(선취)
다 같은 의미이다.
이것이 종말의 이미지와 딱 떨어졌다. 그래서 구조(비역사 ; 판대기)라고 했던 것일까?
(오히려 시원하게 뻥뻥 뚫혀버렸다. 막힌 담이란 있을 수 없을 정도로 모두다 밀어버려서 첩경을 평탄케 하는
시원한 까스활명수다. 희년이다. 종말이다. 심판속에서의 구원이다.)

천개의 눈 천개의 길을 읽다가 갑자기 2부에서 베버가 툭 하고 튀어나오더니
뭐야 갑자기 재미가 없어져 버렸다.
이게 무슨 영원회귀랑 상관있는가? 또 장난질인가? 노마니즘을 한 참 재미있게 읽었는데
결론은 무자아 로 귀결이 되니, 뭐야? 장난해? 갑자기 허탈해졌다.
또 다시 그거랑 같은 느낌이라고나 할까?
(피 라는 책도 그런 느낌이였다. 갑자기 뚝 낭떠러지로 추락하는 계류의 기술 이라고나 할까?)

실컷 뭐 있는냥 이야기 해가며 사람을 끌여들어놓고서는
나도 모르겠다 라고 모르쇠 작전처럼 몰고가니 허탈했다.
이런 모호한 소리 할 것 같으면 말라꼬 꼬시냐 말이지?
그런데 이 무슨 장난질인지 또 뭔가가 보이니까
숨박꼭질 하듯이 찾아헤맨다.
안보이면 빨랑 접어버릴텐데
또 보여주니 뭔가 있나 싶어서 술래가 되어준다.

왜 갑자기 베버가 튀어나오나?
마침 우연인지?(요즘은 이 우연이 무지 싫타, 거의 농락당하는 기분처럼 찝찝하다. 또 보이니까 또 술래가 되어 이 수수께끼 놀이(주사위 놀이)에 또 말려야 하니까 말이다. 그런데 막상 답을 알고 나면 얼마나 우스운지! 아이고 이 바보야 이렇게 쉬운 것을 ㅋㅋㅋ)
잡히기만 해 봐라. 너 죽었어 !
나 잡아봐라 라고 하는 장난질에,
뭐 할짓이 없으니 장단 맞쳐준다.

우연스럽게도 공각기동대를 평가한, 니체는 자신의 신체를 어떻게 변이시키는가? 또는 신체는 자신을 어떻게 변이시키는가 라는 글을 보고서는 아 그래서 베버가 언급되는구나

국가 또는 정치 개념이 나올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신체 몸 몸 몸, 인간은 자기 몸에 미쳐있다. 그것이 국가라는 거대한 신체에 집약되어있다. 리바이던 인줄 뻔히 알지만은 어떻게 해서든 대항해서 회개를 하고 전복시켜서 처음의 신체로 되돌리고자 하는 소박한 소망. 변신, 변이, 그래서일까? 돌연변이만이 희망이다? 정신분열의 특화화? 편집증(신경증)으로부터 미분화? 도주?)

국가와 국가가, 민족과 민족이 배신 때리고 가족의 구성원끼리 배신때려서 넘겨줄 때

(눅 21:5, 개역) 『어떤 사람들이 성전을 가리켜 그 미석과 헌물로 꾸민 것을 말하매 예수께서 가라사대』
(눅 21:6, 개역) 『너희 보는 이것들이 날이 이르면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리우리라』

(눅 21:7, 개역) 『저희가 물어 가로되 선생님이여 그러면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이런 일이 이루려 할 때에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
(눅 21:8, 개역) 『가라사대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내가 그로라 하며 때가 가까웠다 하겠으나 저희를 좇지 말라』
(눅 21:9, 개역) 『난리와 소란의 소문을 들을 때에 두려워 말라 이 일이 먼저 있어야 하되 끝은 곧 되지 아니하니라』

(눅 21:10, 개역) 『또 이르시되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눅 21:11, 개역) 『처처에 큰 지진과 기근과 온역이 있겠고 또 무서운 일과 하늘로서 큰 징조들이 있으리라』
(눅 21:12, 개역) 『이 모든 일 전에 내 이름을 인하여 너희에게 손을 대어 핍박하며 회당과 옥에 넘겨주며 임금들과 관장들 앞에 끌어 가려니와』
(눅 21:13, 개역) 『이 일이 도리어 너희에게 증거가 되리라』

(눅 21:14, 개역) 『그러므로 너희는 변명할 것을 미리 연구치 않기로 결심하라』
(눅 21:15, 개역) 『내가 너희의 모든 대적이 능히 대항하거나 변박할 수 없는 구재와 지혜를 너희에게 주리라』
(눅 21:16, 개역) 『심지어 부모와 형제와 친척과 벗이 너희를 넘겨주어 너희 중에 몇을 죽이게 하겠고』
(눅 21:17, 개역) 『또 너희가 내 이름을 인하여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눅 21:18, 개역) 『너희 머리털 하나도 상치 아니하리라』
(눅 21:19, 개역) 『너희의 인내로 너희 영혼을 얻으리라』

이 배신 곧 팔아넘기기 가 선행되는 가운데 그 배경을 깔고서
종말은 등장한다. 참 얄밉다. 곧 해학의, 가로지르기의 전형적인 전복이 아니던가?
내만 남았나이다. 하나님 이러기요? 왜 날 왕따 시키는거요? 당신 시키는대로 했는데?
내 열심히 특심인데 이런 배신 때리기요?

니가 원했잖아 케보이 !!
제가 언제예?

7천명 남겨놨다. 우짤래 우짤래 뭐 뭐 뭐 ~~~~~~~ 우짤래 우짤래 우짤래!!
입이 쑥 들어간다. (자작극에 말려들었다.)

아닙니더 제가 뭐라 캡던가요? 전 그칸적 없심더
왕뻔뻔처럼 입을 가리우고 머리를 쳐박고 재를 뿌린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께서 너무 너무 잘 아십니더 라고
입에 침도 안 바르고 거짓말하며 웃는다.
시치미떼기이다. 곧 이보다 더 낯설은 것이 없다. 그야말로 충격이다. 헉 헉 헉.

화로다 나는 망하게 되었도다 람쥐 다람쥐 ~~~~ 공황상태
입이 천개라도 할 말이 없도록 잠잠케 만드는 침묵의 종결자 !!!! (왕상 19:12 세미한 음성)
나보다 나를 더 사랑하는 십자가의 피 흘리심이다 람쥐. 다람쥐. 허걱

(요 12:34, 개역) 『이에 무리가 대답하되 우리는 율법에서 그리스도가 영원히 계신다 함을 들었거늘 너는 어찌하여 인자가 들려야 하리라 하느냐 이 인자는 누구냐』

배신과 해학이 짝이 되는 종말(인자가 들려야하는 판대기 구조에 말려들어야할 판국)
쉽게 말해서
개콘(개그콘서트)의 감수성 코너 어제 내용에서
왕을 위해서 모두다 충성하겠다고 목숨걸겠다고 그렇게 맹세해놓고서는(베드로)
정작 그 왕의 목을 배어서 현상금을 타서
처자식 먹여살리겠다고 암살하는 그런 전복(비역질:배신때리기)
그런데 산채로 잡아야 하는데 정작 죽여버렸으니 부랴 부랴 살리겠다고
다시 한번 또 전복 이중전복의 해학 웃음보따리 라는 가로지르기야 말로
무한한 집행유예라는 종말의 이미지를 보여준다.

http://www.youtube.com/watch?v=gryDX5o0yLg

http://www.youtube.com/watch?feature=player_detailpage&v=gryDX5o0yLg




마침 어제 설교가 그랬다.

하루 종일 어제 설교를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웃음보가 터진다.

한참 심각하던 배신의 배신 때리기의 상황이
판대기가 무너지는 판국에서는 그것이 한낯 심각할게 없는
웃음의 공황상황이다. (꺽기도 공황상태)

얼마나 심각했으면 비웃었던가(비역질)
그런데 그 비웃음의 전복이(비역질) 벌어져서
팔을 어긋맞게끔, 웃음이 되어버릴 수밖에 없는 현실이 말씀의 세계이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행 2:21-37)

뭐든지 예 뿐이다.
아니요 가 없는 세계가 십자가 라는 종말의 세계이다.

(고후 1:18, 개역) 『하나님은 미쁘시니라 우리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예 하고 아니라 함이 없노라』
(고후 1:19, 개역) 『우리 곧 나와 실루아노와 디모데로 말미암아 너희 가운데 전파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예 하고 아니라 함이 되지 아니하였으니 저에게는 예만 되었느니라』
(고후 1:20, 개역)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
(고후 1:21, 개역) 『우리를 너희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견고케 하시고 우리에게 기름을 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고후 1:22, 개역) 『저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 마음에 주셨느니라』

뭐든지 예 가 되는
아니요가 없는 세계

종말(십자가의 피용서)이라는 판대기가 덮쳐버린 세계이다.
무시험 합격의 세계
무한 집행유예의 세계
죄를 쳐다보지도 않겠다는 세계
곧 용서의 세계를 따로 마련했다는 기쁜소식

그 기쁜소식은 나쁜소식이 판치는 가운데서
스스로를 빛내고 영광스럽게 하고자
일부러 나쁜소식에 가두어 희망조차 가질수 없을 때
모든 것이 소외 절망 배제 단절속에서 목마름에 허덕일때
우리를 모두다 비웃음의 세계로 몰아간다.

다 이루심을 보여주신다. 이미 처음부터 완료되었던 것이다.
심각한 것이 없이 넉넉함이 흘러넘친다.
(마침 어제 버스로 가는 길에 이런 멘트가 라디오에서 나온다. 찰리 채플린의 슬랩스틱 코메디에 관한 이야기였다. 그러나 시대적인 상황이 모두다 영웅이 되고픈 돈이라는 자본에 눈뜰 때 쯤에 오히려 추락하는 계류의 기술자를 보고서는 그 피로감을 달랬다. 그것에 아다리가 된 것이었기에 그의 연기가 먹혀든 것이다. 모두다 가해자가 되어야 하는 샤디즘 마귀자식들이 되어야 하는 판국에 마조히즘자가 나타나면 전부다 그 피해자를 찢어버릴려고 달려든다. 판대기이다 보니 어쩔수 없다. 그런데 찢기기는커녕 도리어 계간하러 달려드는 십자가라는 스캔들에게 말려든 것이다. 도리어 찢겨져야할 판국에 놓인 것이다. 어쩔수 없다. 모든 아담들이 그를 찢었으니 이제는 찢겨져야함이 마땅하지 않는가? 그래서 원수 만들기를 하시는 것이다. 이것이야 말로 해학 수수께끼 놀이가 아닌가? 심각할것이 없는 세계, 처음부터 명료하고 마지막도 깔끔하게 또렷한 세계)

그리고 부끄 부끄 부끄로 만들어 버린다.

(롬 12:20, 개역)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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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말 징조  이름 : 이근호

2012-04-15 15:39:03       
 
본문 : 누가복음 21 : 10-19 제목: 종말 징조

예수님의 언행이 점점 과격해집니다.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태도불량’처럼 보여질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종말을 말씀하시지만 실은 본인께서 종말의 의도적으로 자아내는 듯합니다. 종말이란 환경을 통해서 말해지고 있습니다. 이는 인간은 단독적인 행위로 삶을 영위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이 이끄는 대로 살 수 밖에 없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자연이라는 환경 속에 갇혀 있는 꼴입니다. 자연이 요구하는 대로 적응할 뿐입니다. 인간이 자연을 조정하는 것은 한계가 있습니다. 자연의 운명 안에 인간의 운명도 거기에 담겨 있습니다. 다람쥐가 쳇바퀴를 벗어날 수 없듯이 인간도 자연의 쳇바퀴를 인정하고 순응해야 합니다. 종말이란 하나님께서는 자연이라는 담요를 걷어가는 작업을 뜻합니다. 당연히 그 안에서 생명을 구하는 사람들의 노력도 무용지물이 됩니다. 자연의 실상과 더불어 인간의 실상도 드러납니다. 그렇다면 인간들이 그동안 믿었던 그 ‘하나님’이라는 것도 실상이 드러납니다. 실은 악마를 신봉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악마는 종말 대신 자연과의 조화를 권유합니다. 자연과 친하게 지내고 사이좋게 지내는 것이 유리하다는 겁니다. 이렇듯 인간에게는 자연이 곧 신입니다. 친화적인 신이요 마음에 부담안 주는 신이요, 인간의 행함의 가치를 무시하는 신입니다. 능력 따라 성과급을 주는 신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자연이라는 신이 메시아를 죽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죽이게 된 이유는, 예수님의 행위나 말씀이 자연스럽지가 못하다는 겁니다. 즉 상호 협조와 상호 연합을 훼방하는 발언들을 예수님이 쏟아놓았다고 보는 겁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에게는 ‘종말’이라는 큰 짐을 아버지께서 부터 받아서 이 세상에 등장하시고 부려놓으신 겁니다. 이 땅에 칼을 휘두르고 불을 번지게 하시려고 오셨다고 했습니다.(눅 12:49) 예수님의 평소 말씀 속에 이미 불과 칼이 담겨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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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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