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중에 딴소리 카기 없기다, 먼지 털기 (행 18:1-17)

잠시만요! 바울 오빠, 먼지 털고 가실께요!!


율법이냐 vs 그리스도냐 (율법 외에 한 의 냐?)


(행 18:1, 개역) 『이 후에 바울이 아덴을 떠나 고린도에 이르러』

(행 18:2, 개역) 『아굴라라 하는 본도에서 난 유대인 하나를 만나니 글라우디오가 모든 유대인을 명하여 로마에서 떠나라 한 고로 그가 그 아내 브리스길라와 함께 이달리야로부터 새로 온지라 바울이 그들에게 가매』

(행 18:3, 개역) 『업이 같으므로 함께 거하여 일을 하니 그 업은 장막을 만드는 것이더라』

(행 18:4, 개역) 『안식일마다 바울이 회당에서 강론하고 유대인과 헬라인을 권면하니라』

(행 18:5, 개역) 『실라와 디모데가 마게도냐로서 내려오매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유대인들에게 예수는 그리스도라 밝히 증거하니』

(행 18:6, 개역) 『저희가 대적하여 훼방하거늘 바울이 옷을 떨어 가로되 너희 피가 너희 머리로 돌아갈 것이요 나는 깨끗하니라 이 후에는 이방인에게로 가리라 하고』

(행 18:7, 개역) 『거기서 옮겨 하나님을 공경하는 디도 유스도라 하는 사람의 집에 들어가니 그 집이 회당 옆이라』

(행 18:8, 개역) 『또 회당장 그리스보가 온 집으로 더불어 주를 믿으며 수다한 고린도 사람도 듣고 믿어 침례를 받더라』

(행 18:9, 개역) 『밤에 주께서 환상 가운데 바울에게 말씀하시되 두려워하지 말며 잠잠하지 말고 말하라』

(행 18:10, 개역)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아무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 하시더라』

(행 18:11, 개역) 『일 년 육 개월을 유하며 그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니라』

(행 18:12, 개역) 『갈리오가 아가야 총독 되었을 때에 유대인이 일제히 일어나 바울을 대적하여 재판 자리로 데리고 와서』

(행 18:13, 개역) 『말하되 이 사람이 율법을 어기어 하나님을 공경하라고 사람들을 권한다 하거늘』

(행 18:14, 개역) 『바울이 입을 열고자 할 때에 갈리오가 유대인들에게 이르되 너희 유대인들아 만일 무슨 부정한 일이나 괴악한 행동이었으면 내가 너희 말을 들어주는 것이 가하거니와』

(행 18:15, 개역) 『만일 문제가 언어와 명칭과 너희 법에 관한 것이면 너희가 스스로 처리하라 나는 이러한 일에 재판장 되기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고』

(행 18:16, 개역) 『저희를 재판 자리에서 쫓아내니』

(행 18:17, 개역) 『모든 사람이 회당장 소스데네를 잡아 재판 자리 앞에서 때리되 갈리오가 이 일을 상관치 아니하니라』


지젝의 책에 이런 문구가 있습니다.

법이란 위반하라고 세워지는 것이 법이다 라고 말이죠.

처음부터 위반을 목적으로 해서 세워지는 것이 법이다는 것이다 라고 합니다.

인간이 왜 법을 사랑하는고 하니
그 법이 자기를 위한 하나의 보호막으로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유대인들처럼 법에 하나님까지 합쳐 보세요.
첨상첨화가 되는 겁니다.
때려죽어도 유대인을 위한 하나님이다는 겁니다.

문제는 그 유대인이 유대인 맞기는 맞냐 라는 거죠?
졸지에 절대로 변할수 없는 불변성이
예수님 때문에 박살 해체가 됩니다.

유대인은 예수님 혼자 뿐이게 되니
정작 유대인이 공중에 붕 떠 버리게 되는 겁니다.

(눅 3:4, 개역) 『선지자 이사야의 책에 쓴 바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가로되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

(눅 3:5, 개역) 『모든 골짜기가 메워지고 모든 산과 작은 산이 낮아지고 굽은 것이 곧아지고 험한 길이 평탄하여질 것이요』

(눅 3:6, 개역) 『모든 육체가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보리라 함과 같으니라』

(눅 3:7, 개역) 『요한이 침례 받으러 나오는 무리에게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장차 올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눅 3:8, 개역)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 말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눅 3:9, 개역)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리라』



마치 그 순간 국가가 멸망해 버리게 되면
어디를 가도 나그네가 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결국 법이 없으면 개판이 된다는 거죠. 
국가가 없으면, 민족이 없으면, 즉 소속감이 없으면

어디를 가더라도 객 곧 나그네 이방인 취급받게 되는 겁니다.
타국에 가면 저절로 애국자가 되는 이유도 이러합니다.


이리 저리 공차이듯 차이는 꼴만 당하는 셈입니다.

그러니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는 고아가 아니라
처음자리가 있다는, 계보가 있는, 족보가 있는 가문 이다는 것은

곧 법이 있다는 겁니다. 법 처럼 든든하고 튼튼한 견고한 성전은 없다는 거죠.

씨족이 있고, 민족이 있고, 국가가 있다는 겁니다.

참 재미있게도
창세기 초반에 보면 형 가인이 동생을 죽이고 난 이후에 쫏겨난 뒤부터

가인이 찾아 헤매게 되는 것이 바로 자신의 보호막들을 끌어 모으기 시작한다는 점입니다.

땅에서 자신의 소속감을 찾는 겁니다. 곧 소유성입니다.
단절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단절 되지 않았다는 소속을 찾고,
그 소속 속에서 소속의 한 일원으로써 사명감을 다하겠다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법입니다. 즉 몸입니다.


그래서 가족도 특히 자식들도 법이 되고

또 법이 되는 성곽을 세우게 되며

그 성곽이 국가 체제가 되고

그 국가 체제는 개판이 되지 않도록 법을 세우게 되는 겁니다.
육체라는 몸은 곧 법이 되어서 온 몸을 휘감게 되는 주변의 배치물로 작용이 되는 겁니다.


즉 아벨을 죽인 그 살해자 가인의 살인이 결국 최종적으로 찾는 것이 바로

법적인 보호막이다는 겁니다.

마치 애굽의 10가지 재앙을 통해서 애굽의 10가지 신들이 나열이 되는 식과 같습니다.

국가 라는 신체가 이 10가지 애굽의 신들로 인해 보호막을 형성하고 있는데

그것을 여호와 하나님이 하나 하나 작살을 내면서 박살을 내고 있으니
하루 아침에 최고의 강성대국이 쫄딱 망해 버리는 겁니다.


법이라는 외설성은 나를 건드리지 못하도록 해 달라는 겁니다.
그런데 더 외설적인 여호와 하나님이 아예 해체해 버리는 겁니다.

법이 말도 안되게 웃싸꺼리가 되는 셈입니다.
겨우 겨우 튼튼하게 그렇게 오랜 세월동안 역청과 철근으로 단단하게 지어서 세웠는데

훅 불어 버리니까 그 동안의 수고가 휭 날라가 버리는 겁니다.
(분명히 이렇게 출애굽한 경험이 있는 이스라엘이,
도리어 예수님으로부터 이 성전을 헐라 내가 3일만에 다시 세우겠다 라고 하니
참으로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히는 겁니다.
어디서 굴러 들어온 돌삐 하나가

건축자들의 머릿돌을 대신해 모퉁이 돌로 되었으니
이것이 애굽 만의 입장이냐? 라는 겁니다.
지금 유대인들이 예수 라는 딱 한 명 앞에서 지금 왕창 뽑힘 당할 판국에 놓여졌다는 겁니다.
46년 동안의 성전 건축이? 수천년의 유대인 역사가? 하루 아침에 와르르????) 


그것을 보고서도 여전히 가인의 후예들은 이마표 달라고 아우성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보호한다는 에녹성처럼 하나님도 법으로써 작용되는 보호막으로 차용 되는 겁니다.

그러니 허물어 뜨려도 허물어지는 것을 가만히 당하는 자들이 아닙니다.
다시 짖도록 되어 있습니다.

애굽을 멸망시켜도 다시 돌아가 재건을 하듯이
기여이 법을 찾고 법을 세우도록 되어 있습니다.
백날 의문의 증서 찢어도 말이지요.
곧 육체를 찢어도 말입니다.

오냐 오냐 그래 그래 아무도 너를 건드리지 못하도록 이마에 표 줄게!
아나 됐냐? 됐제!!


그리고 그것도 못믿어워서 견고한 딱딱한 것들을 자기 몸에 채우듯이

주변의 모든 것들을 견고한 것으로 세우기 시작입니다.


바벨탑의 재료도 어떻게 하면 더욱더 견고하고 딱딱한 재료가 되어야 하듯이 말입니다.


그러나 정작 아벨은 물렁 물컹 그냥 죽고 없습니다.

어 언제 태어났지? 태어났기는 했느냐? 라는 식으로 물컹 물컹 안개처럼 허무하게 그냥 사라져 버렸습니다.


오히려 생생하고 또렷하게 남아 있는 자는 형 가인인데,
가인은 점점더 강하고 튼튼하고 딱딱한 것들만을 찾아야만 하는
그런 식의 삶으로 전 인생을 채워버립니다.


그래서 탄생한게 바로 법입니다.


그 법은 가인의 자식처럼 바로 영웅과 결합이 됩니다.

영웅은 더욱더 튼튼하고 딴딴한 최첨단 기술로써
자신의 몸 곧 육이라는 옷을 아이언맨처럼 그 딱딱한 미사일도 못 뚫는 슈트로 온 몸에 칭칭 감게 됩니다.


법을 감는 겁니다. 법 법 법. 나만 법이다 라고 말이지요.


더욱더 딴딴해 지기 위해서

더욱더 튼튼해 지기 위해서

그 슈트의 피부는 말랑 말랑하지 않고 땡그랑 땡그랑 쇠 소리로만 채워지는 겁니다.
(그리고보니 지젝의 책 신체없는기관 이라는 책에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앞으로 옷으로 입는 컴퓨터가 나온다고, 이것은 곧 피부 또는 육체가 점점점 불멸성과 영웅적 완벽함으로 대체되기를 바라는 그 마음을 반영한다고 말입니다.
그러니 나약하기 짝이 없는 피부들은 앞으로 영원불멸의 피부로 대체 된다는 거죠.
그 시대 당시만 아벨이 죽어야만 하는게 아닙니다, 오늘날도 동일한 겁니다.)


왜 여성의 피부가 말랑 말랑한 피부로써 남자보다 딴딴한 근육이 없이

물컹 물컹한 것일까요?


바로 생명이 태어날 수 있는 조건으로써의 아기를 낳고 품고 아기를 위해 온 몸 자체가
아기 중심으로 즉 생명 중심으로 돌아가도록 하기 위한 몸이기에

여성의 몸은 남자 보다 상대적으로 약한 피부인 겁니다.
결국 생명은 법의 반대인 셈입니다.


생명인 아기를 한 번 안아보고 이쁘다고 뽀뽀 좀 할려고 다가가면

아기는 바로 그냥 울음을 앙 터트려 버립니다.


몸이 푹신하지 않기 떄문이고

더군다나 그 까칠한 수염 땜에

아기들은 싫어합니다.

수염 깍아도 그 자리는 까끌 까끌하니 말이지요.


오늘 제목을 법이냐? 그리스도냐 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법의 반대가 생명이듯

생명이 누구입니까?


그리스도입니다.


즉 사도바울은 이 법체제 속에 그리스도를 들이대는 겁니다.


곧 생명을 들이대는 겁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과 똑같은 현상이 벌어지게 됩니다.


이스라엘 속에서

특히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전 중심으로
복음을 자꾸 들이댐으로써

이런 현상들이 벌어졌듯이


교회 속에서도 늘 이런 현상들이 나타나는 이유는


항상 법 체제와 그리스도라는 생명과의 대립이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애굽의 처지가 이스라엘도 같은 처지가 되었듯이

오늘날도 동일합니다.


우리 신체는 애굽처지처럼, 이스라엘 처지처럼, 예루살렘 처지처럼

똑같이 그리스도 라는 지금 사도바울이 들이대고 있는 생명에 의해
와르르 쫄딱 망해야 하는 법체제를 무너뜨리는 생명과의 대립 속에 놓여지게 된다는 겁니다.


이런 나를 망하게 하는 생명되신 그리스도를 영접할수 있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나를 망하게 하는 신나는 종말로써 말입니다.


사도바울은 아주 아주 신이 났습니다.

시원하게 깨뜨리는 해체의 즐거움을 누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다가 주님께서 환상으로 나타나
절대로 멈추지 말고, 할 말 다 하라고 합니다.
너를 건드리는 자가 없도록 하겠다는 겁니다.
그 이유는 가인처럼 보호막 되어줄께가 아니라그 성에 에수님 자신의 백성이 많다 라는 이유 때문입니다.


곧 법이 아닌 생명이다는 겁니다.


그러니 사도바울을 해산하는 고통을 짖는 모태로 삼는 겁니다.
사실은 그림자죠 실체는 십자가가 우리를 해산하는 모태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 라고 외치심은
마치우리를 잉태하시는 해산의 고통과 같습니다.
그러니 다 이루신 겁니다.
내가 너를 낳았잖아 잖아 잖아 낳았잖아 라고 당당하게 세상을 이기시며 외치신 겁니다.


(행 13:33, 개역) 『곧 하나님이 예수를 일으키사 우리 자녀들에게 이 약속을 이루게 하셨다 함이라 시편 둘째 편에 기록한 바와 같이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너를 낳았다 하셨고』

(행 13:34, 개역) 『또 하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저를 일으키사 다시 썩음을 당하지 않게 하실 것을 가르쳐 가라사대 내가 다윗의 거룩하고 미쁜 은사를 너희에게 주리라 하셨으니』

(행 13:35, 개역) 『그러므로 또 다른 편에 일렀으되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하지 않게 하시리라 하셨느니라』

(시 2:6, 개역) 『내가 나의 왕을 내 거룩한 산 시온에 세웠다 하시리로다』

(시 2:7, 개역) 『내가 영을 전하노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도다』


이 새 생명 때문에 주변의 열왕들이 동원이 되는 겁니다. 애굽왕과 군사를 통해서 영광 받듯이 말입니다.
새 생명의 티를 팍팍 내도록 하시기 위해서 마귀가 동원이 되는 겁니다.


얼마나 말랑 말랑한 사랑이였으면
우리를 그 십자가에서 태어나게 하신 생명되신 그리스도 되심입니까?

때려죽어도 법체제에서 태어나지 않도록 하시겠다는 취지입니다.



지난 시간에 철학을 트릭 속임수라고 했습니다. 초등학문이라고 했는데
사실은 그들은 엄청나게 생명을 추구하는 학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명 근처에도 못 옵니다.

이상하죠?


아벨의 형 가인 보세요

자신의 몸 신체를 영원불멸한 것들로 온 몸을 칭칭 감아도
생명이 되기는커녕 

도리어 딱딱한 우상으로 변해가 버리는 겁니다.

마치 마이다스 라는 우화처럼 말입니다.



오늘 본문처럼

법체제가 된 딱딱한 자들에게

특히 유대인만 골라 골라 회당에 있는 자들에게
생명인 그리스도를 들이대면

저들의 딱딱한 우상성이 고대로 표출이 되는 겁니다.


그 단단한 성전이 무너질까봐율법 체제가 무너질까봐 말이지요.


정작 율법의 완성은 말랑 말랑한 사랑인데 말입니다.


그러니 사도바울이 먼지를 털면서 말합니다.


나중에 딴 소리 하기 없기다.

나 분명 말해 줬데이?
주님이 카라 캐서 했는데

너거들 분명히 안들었데이

내 한테 책임 묻지 마래이
이제 나는 이방인에게 갈끼다.
나중에 딴소리 카긴 해 봐라

아 이것을 제목으로 해야 겠네요 ㅋㅋㅋ

천국 간 거지나사로와 지옥 간 부자 이야기가 생각 나네요
그 이야기의 핵심이 바로 이 부분입니다.

(눅 16:27, 개역) 『가로되 그러면 구하노니 아버지여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소서』

(눅 16:28, 개역)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저희에게 증거하게 하여 저희로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

(눅 16:29, 개역) 『아브라함이 가로되 저희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니라』

(눅 16:30, 개역) 『가로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죽은 자에게서 저희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하리이다』

(눅 16:31, 개역) 『가로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요부분이 얼마 전에 어머니랑 대화하면서
사울왕이 죽은 사무엘 선지자를 무당을 통해서 불러내는 장면과 흡사한데요

어머니에게 물었습니다.

어무이요! 신접한 여자 무당이 사울왕의 부탁을 통해서 죽은 사무엘 선지자 불러내니까
불려집디까? 아니면 안 불려 집디까?

불려 졌지?

그럼 요즘 말로 무당말이 맞잖아요. 사울왕의 뜻대로 되었잖아요.

능력 좋죠?


뭔가 찝찝한 듯 그렇긴 한데? 왜 이렇게 저들의 말을 들어주는 거지?



제가 말했습니다. 저거들 말을 들어주는게 바로 안들어주는 겁니다.

자 그들 말 마따나 저들 뜻대로 불러내어 본들
정작 진짜 듣고픈 이야기를 죽은 사무엘 선지자를 통해서 들을 수 있습니까?

막판에 결국 안 들어주니 결국 실컷 약올리는

즉 강퍅케 만드는 더욱더 강퍅케 만드는 셈이니까


반드시 저들의 요구를 다 들어주어야 하는 겁니다.


항상 마귀 편에 드는 듯이 보이지만 항상 마지막 막판에 배신을 때리니 말이죠.

얼마나 억울 하겠습니까?

그러니 결정적인 순간에 판을 뒤짚어야 하기 때문에

고름이 익기를 기다리고 기다리는 겁니다.



사도바울이 저렇게 옷을 털 듯이 하는 이유는

충돌을 누그러뜨리는 것이 아니라
회피하는게 아니라
제대로 푸욱 찌르는 겁니다. 제대로 수셔대는 겁니다.


더욱더 약발이 까까득 차도록 바짝 바짝 약을 올리듯이 깐족 깐족 거리는 것과 같습니다.

(행 18:6, 현대인) 『그러나 그들이 반대하고 욕설을 퍼붓자 바울은 옷의 먼지를 떨며 이렇게 말하였다. `당신들이 멸망을 당해도 그것은 당신들이 책임을 져야 할 일이며 나에게는 아무 잘못이 없소. 이제부터 나는 이방인에게로 가겠소.'』

(행 18:7, 현대인) 『그리고서 그는 그들을 떠나 하나님을 섬기는 디도 유스도라는 이방인의 집으로 갔는데 그의 집은 회당 바로 옆에 있었다.』이방인 유스도에게 퍼뜩 가고자 말입니다.


혹 그 사이에 깨달으면 안될텐데들을 귀 생기면 안될 텐데

볼수 있는 눈이 생기면 안될텐데 라고 노심초사 하면서

후딱 후딱 이방인에게로 가는 겁니다.

(마 13:14, 개역) 『이사야의 예언이 저희에게 이루었으니 일렀으되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막 4:12, 개역) 『이는 저희로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며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여 돌이켜 죄 사함을 얻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하시고』

(행 28:26, 개역) 『일렀으되 이 백성에게 가서 말하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도무지 깨닫지 못하며 보기는 보아도 도무지 알지 못하는도다』

즉 그리스도를 들이대는 생명을 전하는 것은

깨닫게 하는 목적이 아니라

깨닫지 못하게 하려 함의 목적이다는 겁니다.


(막 4:11, 개역) 『이르시되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너희에게는 주었으나 외인에게는 모든 것을 비유로 하나니』

(막 4:12, 개역) 『이는 저희로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며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여 돌이켜 죄 사함을 얻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하시고』


생명 안과 밖이 이미 갈려졌기에깨닫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비유요 말씀이요 복음이다는 겁니다.

죄사함 받지 못하도록 하기 위함이 지금 사도바울의 증거 외침이다는 겁니다.


생명에 관심이 있지

자신의 전도로 인해서 사람들이 많이 포교당하는 것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다는 거죠.


주님께서 환상에 나타난 이유가 바로 그런 이유인 겁니다.


어제 전용열 목사의 글에 죄 짖지 말라고? 라는 제목의 글처럼

자꾸 교회 목사들이 죄 짖지 않는 삶을 살라고 가르치는데 그거 엉터리 라고 비판하더군요


바로 그겁니다

복음은 죄 안 짖는 인간을 찾는게 아니라

죄 지을 수 밖에 없는 자를 찾습니다.

의인을 부르러 온게 아닙니다. 죄인을 부르러 오신 겁니다.
죄인이 이뻐서가 아니라 예수님 자신의 기능 때문입니다.
피에는 웬수가 딱 맞거든요. 피의 기능 때문입니다.


그러니 생명에 관심이 없는 자를 교회에서 억지로 붙들어 놓을려고 할게 아니라

그 반대로 제발 좀 나가 달라고 해야 하는 겁니다.


돈 아까워서 그런 소리를 못하고 있으니

그 당사자들도 또한 생명에 관심이 없는 겁니다.


설교를 즉 복음을 외치는 것은

깨닫도록 하기 위해서 전하는게 아닙니다.


이런 글을 쓰는 목적도

죄사함 받도록 하기 위함이 아닌 겁니다.


그 반대입니다.

죄 사함 못 받도록깨닫지 못하도록


오히려 그렇게 될까봐 걱정하는 것이

비유의 목적입니다. 벌벌 떨고 있습니다.


비유 외에는 말씀하지 않는 이유는
모든 사람들이 알아먹는 이야기를 가지고서 아무도 못알아먹는 이야기로 만드시고자 함입니다.
분명 같은 이야기인데, 누구든지 다 알던 이야기가 전혀 모르는 이야기가 되고 마는 겁니다.

(마 13:34, 개역) 『예수께서 이 모든 것을 무리에게 비유로 말씀하시고 비유가 아니면 아무 것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니』

차단이 목적이요

단절이 목적인 겁니다.


어떤 목사를 만나서 대화하는 중에

바로 차단과 단절의 목적으로 교회에서 외치니까


교인들도 따라서 흉내내면서 자기들끼리 저러고 있으니

졸지에 회의에 빠지게 되더라

아 옛날이여 나의 착하고 순수했던 시절로 나 돌아갈래 


그래서 저는 생각했습니다.

귀신들렸구나


뭐 빙빙 돌려 말하지만 결국 교회장사가 안되더라 라는 거죠.


먼지 털고 나왔습니다.
납득이 가도록 하기 위한 복음은 없습니다.

복음증거는 확인작업일 뿐입니다.


생명 안과 밖

이미 갈려진 것을 확인하고본인 당사자도 믿을 판국에 놓여진 것 뿐입니다.


그러니

생명 안에 놓여진자가 아닌데도 불구하고 억지로 넣을려고 하고 있으니
도리어 생명 안에 놓여진 자를 쫏아내는

이전의 글 누가복음 귀신들린 청년 고쳐서 돼지떼 속에 귀신들이 들어간 사건처럼
예수님이라는 생명을 쫏아내고 있는 상황이 되는 겁니다.


두 주인을 못 섬기거든요

반드시 자신이 숙주로써

주인의 소욕 대로만 움직이도록 되어 있는 겁니다.


정작 귀신들린자는 구원 받고
귀신들리지 않은 자는 지옥 갈 수밖에 없는

육의 소욕을 드러내도록 되어 있다는 겁니다.


그들이 법 체제, 바로 헌 옷 헌 부대의 체제 라는 법 체제 육의 체제를 사수하기 위해서

예수님을 쫏아내었듯이


법체제에 놓여진 자는 교회를 장악하고 그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생명을 쫏아내도록 되어 있는 겁니다.

법체제이기 때문입니다.


백날 외쳐도 안되는 것은 안됩니다.

그러니 빨랑 빨랑 먼지 털고

빨랑 빨랑 후다닥 이방인에게로 가야함이 마땅합니다.


저들에게는 그냥 확인작업만 하고

빨랑 빨랑 후다닥창녀 세리 강도에게 전하는 것이


휴 ~~~~

혹 깨달을까봐 조바심으로 깨달으면 큰일 날 뻔뻔뻔 했네 라고 가슴을 쓸어 내려야 할 정도로

후다닥 뚜껑 열고 퍼뜩 닫는 겁니다.

생명인지 법체제인지 확인만 하면 되니까 말이지요.
쿡 눌러보고 딱딱한지 말랑 말랑 한지 퍼뜩 확인하고 말입니다.


죄사함 받으면 큰일 날뻔 했네 라고 말이죠

이 얼마나 약을 바짝 바짝 올리는 겁니까?


막 때릴려고 하면예수님께서 저 봐라? 봐라! 날 때릴려구?

날 낭떠러지에 몰아서 떨어뜨릴려구?
시계를 보시면서 아직 시간이 안 됐잖아~~~

다 돌아가야 되잖아 ~~~~

잖아 잖아 가야 잖아 ~~~


라고 약 바짝 올려 놓고서는 유유히 그 가운데 중앙을 갈라서 가로질러 내려가시는 겁니다.

(요 7:19, 개역) 『모세가 너희에게 율법을 주지 아니하였느냐 너희 중에 율법을 지키는 자가 없도다 너희가 어찌하여 나를 죽이려 하느냐』

(요 7:20, 개역) 『무리가 대답하되 당신은 귀신이 들렸도다 누가 당신을 죽이려 하나이까』

(요 7:30, 개역) 『저희가 예수를 잡고자 하나 손을 대는 자가 없으니 이는 그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음이러라』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것은 저들을 깨닫게 하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오히려 닫힌 귀 닫힌 눈 더욱더 못 떠도록 하시는 겁니다.

약을 바짝 올려서 저들의 속을 끍어내어 어떻게 하면 죽일꼬 라는 마음을 팍팍 심는 겁니다.


비유의 목적은, 말씀의 목적은,

복음의 목적은, 십자가의 목적은,듣기는 들어도 듣지 못하도록

보기는 보아도 보지 못하도록 하기 위함인 겁니다.


즉 단절입니다.


후딱 말하고서는 난 알려줬어 나중에 딴 소리 하기 없기다 라고 휭 떠나버리는 겁니다.

아테네에서 사도바울이 그랬던 겁니다.


약 바짝 오르죠 올라

실컷 궁금케 만들고서는 말이지요.


마치 게임 중에 네 사람이 네 단어를 하나씩 맡아서 동시에 말하고서는

맞춰 봐라 라는 식입니다.


처음에는 몰라서 몇 번 몇 번을 외치면 겨우 상대방 팀에서 맞춥니다.


그러나 예수님과 사도바울은 딱 한 번 카고서는 아테네를 휙 떠나버리는 겁니다.


이 무슨 반칙입니까?
이 무슨 말도 안되는 갑의 횡포 입니까? 댕깡 부리는 것도 아니고 말이죠.


아테네 시민이 다시 한번 알려 달라고 해도 소용없습니다.

아쉬우면 따라오라 말이죠.
뭐 하나 아쉬울 것 없이
휭 ~~~~~~~~~~~~~~~~~~~~



오늘 본문에 고린도로 떠나버립니다.
고린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먼지 털기 위한 목적이지


이해 충만케 하기 위한 것이 목적이 아니였던 것이였던 것이였습니다.

지금 지신밟기 하듯이 땅 하나 하나 밟아서
종말의 심판 알리바이 근거로 삼는 것에 분주히 바쁜 겁니다.
아주 아주 신이 났어요 신났어!


나 땅 밟아서 알려 줬다.

언제예? 나 못 들었슴더

누가 카던데 뭐라 뭐라 카면서 누가 왔다 갔다는 소리는 들었습니다만
다들 무슨 소리 카는지 알마 먹는 사람들이 없다 아입니까
내도 못들었으니 알려주이소마! 나는 못 들었다 아입니까?


백날 캐도 소용없습니다.


아니 용광로의 

또는 화산폭발로 인한 용암이 지나가면서 주변의 돌들 딱딱한 바위들을 녹여버리는게 목적이지

이해시키고 깨닫게 하고 보고 듣도록 하는게 목적이 아닙니다.
저런 소리는 그야말로 배불러 터진 소리입니다. 아직 조직의 쓴맛을 못 본 겁니다.


정작 그 용암 곧 종말로 인해서 녹아 없어져야 할 불타서 심판받아야할 위치에 놓여져 있지

깨달음은 무슨 깨달음?

그러니 뒤를 졸졸 따라오는 울고 있는 아낙네들을 향해
뒤돌아 쌱 째려보면서

아이고 너거들이 안됐다 쯧쯧쯧 나를 위해 울지 말고 너와 너의 자녀를 위해 울어라
지금 용광로 제작 하고 가실께요 라고 쪼매있으면 내가 용암이 되어 너희들을 지나갈것이다 라고
무시 무시한 말씀을 하시는 겁니다.

(눅 23:26, 개역) 『저희가 예수를 끌고 갈 때에 시몬이라는 구레네 사람이 시골로서 오는 것을 잡아 그에게 십자가를 지워 예수를 좇게 하더라』

(눅 23:27, 개역) 『또 백성과 및 그를 위하여 가슴을 치며 슬피 우는 여자의 큰 무리가 따라 오는지라』

(눅 23:28, 개역) 『예수께서 돌이켜 그들을 향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눅 23:29, 개역) 『보라 날이 이르면 사람이 말하기를 수태 못하는 이와 해산하지 못한 배와 먹이지 못한 젖이 복이 있다 하리라』

(눅 23:30, 개역) 『그 때에 사람이 산들을 대하여 우리 위에 무너지라 하며 작은 산들을 대하여 우리를 덮으라 하리라』

(눅 23:31, 개역) 『푸른 나무에도 이같이 하거든 마른 나무에는 어떻게 되리요 하시니라』


자 이렇게 한 쪽은 일방적으로 약을 바짝 올려놓도록만 하여

저들이 법체제를 고수 사수하는 일에 더욱더 표출 되도록 하면서


(행 18:5, 개역) 『실라와 디모데가 마게도냐로서 내려오매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유대인들에게 예수는 그리스도라 밝히 증거하니』

(행 18:6, 개역) 『저희가 대적하여 훼방하거늘 바울이 옷을 떨어 가로되 너희 피가 너희 머리로 돌아갈 것이요 나는 깨끗하니라 이 후에는 이방인에게로 가리라 하고』



동시에 다른 한 쪽에서는 일방적으로 편애적으로 일년 육개월 동안,
그것도 주님의 환상까지 더해져서 사귐이 펼쳐지는 겁니다.

이 얼마나 유들 유들 합니까?
일년 육 개월 씩이나?

저쪽은 하루도 안되어, 아니 한 시간도 안되어 먼지 털어 벌어고 말입니다.
하루 만에 46년동안 쌓아 올린 공든탑을 무너뜨리는 겁니다.

있는 자는 더 받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는 방식입니다. 비유의 목적입니다. 복음 증거의 목적입니다.


(행 18:7, 개역) 『거기서 옮겨 하나님을 공경하는 디도 유스도라 하는 사람의 집에 들어가니 그 집이 회당 옆이라』

(행 18:8, 개역) 『또 회당장 그리스보가 온 집으로 더불어 주를 믿으며 수다한 고린도 사람도 듣고 믿어 침례를 받더라』

(행 18:9, 개역) 『밤에 주께서 환상 가운데 바울에게 말씀하시되 두려워하지 말며 잠잠하지 말고 말하라』

(행 18:10, 개역)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아무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 하시더라』

(행 18:11, 개역) 『일 년 육 개월을 유하며 그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니라』그러니 저들은 일관되게 계속 법 법 법 으로만 사도바울에게 달려드는 겁니다.그런데 얼마나 웃기는 것은 법으로 달려 드는데

그 법이 더 큰 법을 만나니까 상관하지 않는 겁니다.

자기 보호막으로서의 법이 즉 자신들의 육체가 더 큰 육체를 만나니까 찍 소리 못하고 물러나는 겁니다.(행 18:12, 개역) 『갈리오가 아가야 총독 되었을 때에 유대인이 일제히 일어나 바울을 대적하여 재판 자리로 데리고 와서』

(행 18:13, 개역) 『말하되 이 사람이 율법을 어기어 하나님을 공경하라고 사람들을 권한다 하거늘』

(행 18:14, 개역) 『바울이 입을 열고자 할 때에 갈리오가 유대인들에게 이르되 너희 유대인들아 만일 무슨 부정한 일이나 괴악한 행동이었으면 내가 너희 말을 들어주는 것이 가하거니와』

(행 18:15, 개역) 『만일 문제가 언어와 명칭과 너희 법에 관한 것이면 너희가 스스로 처리하라 나는 이러한 일에 재판장 되기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고』

(행 18:16, 개역) 『저희를 재판 자리에서 쫓아내니』

(행 18:17, 개역) 『모든 사람이 회당장 소스데네를 잡아 재판 자리 앞에서 때리되 갈리오가 이 일을 상관치 아니하니라』



마치 로마시민권을 가진 바울을 겁내어서 풀어주는 것과 같은 겁니다.
개입할 수가 없으니 상관없다고 다들 손 때는 겁니다.


마귀는 상관 없는 관계성에서 끼여들수가 없는 존재들이기에
개입할수가 없는 겁니다. 
이 모든 것이 주님 홀로의 자작극 입니다, 홀로 영광 받으심 입니다.

바로 생명이 이렇게 조치시킨 대로 된 겁니다.


우리는 이렇게 생명을 증거하여 생명이냐 아니냐를 가르는 성령의 소욕에 놓여있지


법체제로 가르치거나 보여주거나 들려주거나 전도하거나 깨닫게 하거나 죄사함받도록 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십자가의 복음은 걸러내는 겁니다.

가만히 있으면 채로 딱 바치고 있으면 밑의 물을 그냥 쭈우욱 하수구로 흘려 보냄으로써

저절로 남게 되는 것만 확인할 뿐입니다.


비유 스스로가

말씀 스스로가

생명 스스로가 생명을 찾고 있기 때문입니다.


잃어버린 새이스라엘 찾아서 말이죠.
여기에 심판이 같이 동원이 되면서 생명이 후다닥 지나가니까

법체제들이 이 생명을 잡아 족칠려고 아무리 고소 하고 밀까부듯이 법에 송사 할려고 아무리 애를 쓰고 애를 써도


쭐꾸덕 미끄러지듯이 빠져나가 버리는 겁니다.


이렇게 심판의 근거를 마련하는 겁니다.


복음은 사람을 기쁘게 하기 위함이 아닌
하나님을 기쁘게 하기 위함이기 때문입니다.


(갈 1:4, 개역)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리셨으니』

(갈 1:5, 개역) 『영광이 저에게 세세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갈 1:6, 개역)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 좇는 것을 내가 이상히 여기노라』

(갈 1:7, 개역)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요란케 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려 함이라』

(갈 1:8, 개역)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갈 1:9, 개역)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의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갈 1:10, 개역)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더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___


죄 안 짓기?

목사들이 설교중에 자주 사용하는 말이다.
죄를 짓지 않기를 위해 기도하자.
성경많이 읽고 기도 많이하고 예배 잘 참석해서 죄짓는 일에 둔해지자.
죄 짓는 자리는 피하고 가지 말자.
죄에 민감해지자...등등.
하지만 이들은 착각한 것이다.
인간은 출생부터 죄인이다.
죄인은 죄의 열매를 맺어야 맞다.
시도 때도 없이 죄의 열매(죄짓기)를 맺어야한다.
죄를 짓지 않으면 죙ㄴ이 아니다.

물론 주님을 믿음으로 죄인이 용서받아 의롭다함을 얻는다.
그럴지라도 여전히 죄의 몸을 가지고 살아간다.
그래서 성도도 여전히 죄를 안짓는사람으로 살수 없다.
주님의 십자가 거룩한 피를 믿고도 여전히 죄가운데 사는자가 성도다.
그래서 성도는 죄를 안짓는자가 아니라 죄가운데 사는 자기를 알고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주님의 십자가 거룩한 보혈로 대속해주심에 감사하는자로 산다.
그러니 죄 짓지말자라는 말이 안통한다.
인간은 죄를 안짓고 살수 없다.
죽기전까지 끊임없이 죄를 짓는 죄인이다.
행위의 죄만보지말고 마음을 보시는 주님을 알아야한다.

하지만 죄가운데 죄를 지으면 살아도 성도는 의인이다.
주님이 십자가에서 지금까지 지은죄만 아니라 앞으로 지을 죄까지 용서하셨다.
평생 죽는 날까지 지을죄까지 다 용서하셨다.
주님의 거룩한 피로 위리죄값을 치뤄주신 것이다.
그 주님의 피 때문에 죄가운데 살아도 하나님은 의인으로 보신다.
그러니 죄 짓지말자라하면 안된다.
죄를 지으며ㅕ살아도 주님의 십자가 거룩한 피만 바라보고 믿는자로산다.
그 십자가 피만 생명이요 천국가는 길이되신다.
성도는 나같은 죄인도 십자가 주님의 피가 용서하고도 남는다고 선포하는 것이다.
주님의 피의 능력을 전파하는자가 성도다.
오늘도 성령께서 그런 성도를 만들어 내시고 같이 찬양하게 하신다.
당신은 죄를 짓고도 의인됨을 믿습니까?

좋아요 취소 ·  ·  · 9월 23일 오후 11:5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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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대식 

    법이란 위반하기 위해서 세워지는 것이다.


    법이란 이미 위반하기 위해 세워지는 왕(귀족) 자신만의 보호막이다. - 지젝

    (롬 5:13, 개역) 『죄가 율법 있기 전에도 세상에 있었으나 율법이 없을 때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하느니라』

    (롬 5:14, 개역)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 위에도 사망이 왕 노릇 하였나니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라』

    (롬 5:17, 개역)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사망이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이 한 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롬 5:18, 개역)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롬 5:19, 개역)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롬 5:20, 개역) 『율법이 가입한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쳤나니』
    (롬 5:21, 개역)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니라』

    법이라는 이런 외설성 보다, 더 더 더 나은 외설적인 것은 십자가다.

    죄를 짖고도 허물치 않겠다는 십자가의 사랑이야 말로

    마귀가 도저히 침범할 수 없는
    무조건, 이유 없이 미운

    진짜 사랑이기 때문이다.

    이 불의한 십자가가 나를 지옥에서 건질줄이야 !!










































철학이냐 vs 십자가냐? (행 17:10-34)

2013/09/17 08:16 in 성령행전(피활동,인간극복)

 

철학이냐 vs 십자가냐? (행 17:10-34)


아테네의 우상과 vs 바울의 십자가



(행 17:10, 개역) 『밤에 형제들이 곧 바울과 실라를 베뢰아로 보내니 저희가 이르러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니라』

(행 17:11, 개역) 『베뢰아 사람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보다 더 신사적이어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행 17:12, 개역) 『그 중에 믿는 사람이 많고 또 헬라의 귀부인과 남자가 적지 아니하나』

(행 17:13, 개역) 『데살로니가에 있는 유대인들이 바울이 하나님 말씀을 베뢰아에서도 전하는 줄을 알고 거기도 가서 무리를 움직여 소동케 하거늘』

(행 17:14, 개역) 『형제들이 곧 바울을 내어 보내어 바다까지 가게 하되 실라와 디모데는 아직 거기 유하더라』

(행 17:15, 개역) 『바울을 인도하는 사람들이 데리고 아덴까지 이르러 바울에게서 실라와 디모데를 자기에게로 속히 오게 하라는 명을 받고 떠나니라』

(행 17:16, 개역) 『바울이 아덴에서 저희를 기다리다가 온 성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마음에 분하여』

(행 17:17, 개역) 『회당에서는 유대인과 경건한 사람들과 또 저자에서는 날마다 만나는 사람들과 변론하니』

(행 17:18, 개역) 『어떤 에비구레오와 스도이고 철학자들도 바울과 쟁론할새 혹은 이르되 이 말장이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느뇨 하고 혹은 이르되 이방신들을 전하는 사람인가보다 하니 이는 바울이 예수와 또 몸의 부활 전함을 인함이러라』

(행 17:19, 개역) 『붙들어 가지고 아레오바고로 가며 말하기를 우리가 너의 말하는 이 새 교가 무엇인지 알 수 있겠느냐』

(행 17:20, 개역) 『네가 무슨 이상한 것을 우리 귀에 들려주니 그 무슨 뜻인지 알고자 하노라 하니』

(행 17:21, 개역) 『모든 아덴 사람과 거기서 나그네 된 외국인들이 가장 새로 되는 것을 말하고 듣는 이외에 달리는 시간을 쓰지 않음이더라』

(행 17:22, 개역) 『바울이 아레오바고 가운데 서서 말하되 아덴 사람들아 너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성이 많도다』

(행 17:23, 개역) 『내가 두루 다니며 너희의 위하는 것들을 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단도 보았으니 그런즉 너희가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

(행 17:24, 개역)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유를 지으신 신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행 17:25, 개역)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자이심이라』

(행 17:26, 개역)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거하게 하시고 저희의 연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하셨으니』

(행 17:27, 개역) 『이는 사람으로 하나님을 혹 더듬어 찾아 발견케 하려 하심이로되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떠나 계시지 아니하도다』

(행 17:28, 개역)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있느니라 너희 시인 중에도 어떤 사람들의 말과 같이 우리가 그의 소생이라 하니』

(행 17:29, 개역) 『이와 같이 신의 소생이 되었은즉 신을 금이나 은이나 돌에다 사람의 기술과 고안으로 새긴 것들과 같이 여길 것이 아니니라』

(행 17:30, 개역)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허물치 아니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을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

(행 17:31, 개역)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저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하니라』

(행 17:32, 개역) 『저희가 죽은 자의 부활을 듣고 혹은 기롱도 하고 혹은 이 일에 대하여 네 말을 다시 듣겠다 하니』

(행 17:33, 개역) 『이에 바울이 저희 가운데서 떠나매』

(행 17:34, 개역) 『몇 사람이 그를 친하여 믿으니 그 중 아레오바고 관원 디오누시오와 다마리라 하는 여자와 또 다른 사람들도 있었더라』



일단 철학이란 하나의 마술과 같은 속임수입니다. 트릭.

왜냐하면 다수가 되지 않으면 그들은 사라집니다. 곧 대중성, 인기, 유행 말입니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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