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여! 나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눅 8:26-39)


(눅 8:26, 개역) 『갈릴리 맞은편 거라사인의 땅에 이르러』

(눅 8:27, 개역) 『육지에 내리시매 그 도시 사람으로서 귀신들린 자 하나가 예수를 만나니 이 사람은 오래 옷을 입지 아니하며 집에 거하지도 아니하고 무덤 사이에 거하는 자라』

(눅 8:28, 개역) 『예수를 보고 부르짖으며 그 앞에 엎드리어 큰 소리로 불러 가로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나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당신께 구하노니 나를 괴롭게 마옵소서 하니』

(눅 8:29, 개역) 『이는 예수께서 이미 더러운 귀신을 명하사 이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셨음이라 (귀신이 가끔 이 사람을 붙잡으므로 저가 쇠사슬과 고랑에 매이어 지키웠으되 그 맨 것을 끊고 귀신에게 몰려 광야로 나갔더라)』

(눅 8:30, 개역) 『예수께서 네 이름이 무엇이냐 물으신즉 가로되 군대라 하니 이는 많은 귀신이 들렸음이라』

(눅 8:31, 개역) 『무저갱으로 들어가라 하지 마시기를 간구하더니』

(눅 8:32, 개역) 『마침 거기 많은 돼지 떼가 산에서 먹고 있는지라 귀신들이 그 돼지에게로 들어가게 허하심을 간구하니 이에 허하신대』

(눅 8:33, 개역) 『귀신들이 그 사람에게서 나와 돼지에게로 들어가니 그 떼가 비탈로 내리달아 호수에 들어가 몰사하거늘』

(눅 8:34, 개역) 『치던 자들이 그 된 것을 보고 도망하여 성내와 촌에 고하니』

(눅 8:35, 개역) 『사람들이 그 된 것을 보러 나와서 예수께 이르러 귀신 나간 사람이 옷을 입고 정신이 온전하여 예수의 발 아래 앉은 것을 보고 두려워하거늘』

(눅 8:36, 개역) 『귀신 들렸던 자의 어떻게 구원 받은 것을 본 자들이 저희에게 이르매』

(눅 8:37, 개역) 『거라사인의 땅 근방 모든 백성이 크게 두려워하여 떠나가시기를 구하더라 예수께서 배에 올라 돌아가실새』

(눅 8:38, 개역) 『귀신 나간 사람이 함께 있기를 구하였으나 예수께서 저를 보내시며 가라사대』

(눅 8:39, 개역) 『집으로 돌아가 하나님이 네게 어떻게 큰 일 행하신 것을 일일이 고하라 하시니 저가 가서 예수께서 자기에게 어떻게 큰 일 하신 것을 온 성내에 전파하니라』


푸코 라는 철학자는 24시간 마귀만 생각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런 마귀가 마귀가 맞냐 하는 점입니다.

과연 인간에 의해 규명이 되는 마귀란 있느냐 하는 점입니다.
인간이 무슨 기준으로 마귀라고 규정할수 있을까요?


없습니다.

성경말씀을 찾아 봐도 없습니다.

그러니 마귀를 규정하기 위해서 성경말씀을 찾아 볼 생각은 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성경말씀은 너희들은 이 마귀에게 갇혔다고만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갇혔다 라고 오히려 마귀를 두둔하는냥 얄밉게 놀려먹는것 같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누가 마귀의 숙주인가를 보여줍니다.

놀랍게도 성경말씀은 마귀를 규정하는 그 인간들이 바로 마귀의 숙주들이라고 하십니다.

즉 마귀는 은닉 되어 있고
주님께서 이 숨어있는 마귀에 대해서 감추어버린 이상
우리 인간이 이 마귀에 대해서 풀이 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 라는 것을 밝혀 내고 있습니다.
마귀가 해석불가임을 예수님이 오히려 두둔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것은 불가능한 영역인데

그 불가능한 것을 가능한 영역으로 교체해서

마귀를 규정하고 있으니

마귀가 마귀라고 규정하고 있는 셈입니다.

그런 마귀들의 특징이 바로 예수님을 마귀로 규정한다는 점입니다.

더 웃기는 것은 전체 사회가 거기에 동의를 한다는 점입니다.


결국 예수님의 말씀이 맞았습니다.

이 세상은 악마의 세상이요

예수님을 죽일 수 밖에 없는 세상임을 말입니다.

그런데 지금 현재 여러분의 주위를 둘러 보세요.
악마적인 것이 있는가? 없는가?

아무리 둘러 봐도 없습니다.


그럼 더 깊게 파고들어 질문을 해 봅니다.
과연 멸망받아 마땅한 것들이 있는지
주변을 둘러 보세요

사물이나

어떤 사상

어떤 인간

어떤 국가 등 등

과연 심판 받아 마땅한 것들이 주변에 있는지를 살펴 보세요

없습니다.

심지어 여러분이 믿는 신?
인간이 믿는 신?
종교를 가졌다면 그 종교가 과연 마귀 일 리가 있겠습니까?
교회 성당 절 에 다닌다면 그것들이 다 마귀의 터전일리가 없잖아요?
만들어진 신 인줄? 그럴 이유가 없겠지요.

주변의 모든 것들,

조금이라도 가치성을 인정받고 있는 것들이
영웅적이며 인간의 유익을 위한 존재들이 이 무슨 마귀라고 운운할 수가 있겠습니까?

사도바울이 아테네에서 시비걸고 가는 점이 바로 이런 점 때문입니다.
매사가 종교성이 많다는 겁니다.

주변이 모든 것들이 악마와 우상에 둘러 쌓여있다는 겁니다.

그런 사도바울의 시선을 지금 우리 주변으로 돌려 보세요
과연 우상이 가득한 것 맞습니까?


사도바울의 눈에만 보이는 사도의 큰 걱정인 겁니다.

주변의 모든 것들은 인간을 위해서 있습니다.

가정 사회 국가 종교 모든 물건들 자연 등등 그 모든 것들이 말입니다.


전혀 문제 없습니다.

분명히 말씀 드립니다.

전혀 문제 없습니다.


그런데 이런 전혀 문제 없는 것들에 대해서 예수님의 복음은 시비를 겁니다.

모조리 다 심판 받아 마땅하다는 겁니다.


에이! 너무 심하다!! 모두다 심판 받아야 한다니!


예수님은 너무 너무 지나치게 당당합니다.

모조리 다 심판의 불에 집어 넣었다가 꺼내 보자 라고 합니다.


만약 넣어서 다시 나오는 것이면

심판 받을 것이 아닌 것이 되고


만약 넣어서 다시는 나오지 못하는 것이면

심판 받아 마땅한 것이다 라고 말입니다.


여기에 누가 과연 동의하겠습니까?


동의 유무는커녕 그런 발상 자체를 거부하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뻔뻔스럽게 밀어 붙입니다.

여기에 마귀들은 반발합니다.
아직 때가 안되었는데
왜 벌써 일을 벌리느냐? 너의 계획에 우린 아직 시간이 덜 되었는데? 왜 배신 때리냐?

더 이상 괴롭히지 말아라, 약속을 지켜야지? 왜 벌써 지옥 무저갱이 집어 넣느냐?

그러나 예수님은 마귀말 들을 분이 아닙니다. 그냥 밀어 붙입니다.



오늘 본문이 그러합니다.


사람들이 규정한 악마, 저주, 심판의 장소와 시간이 지배하는 곳이 있습니다.


바로 몸입니다. 시공간이 되는 몸. 곧 육입니다.


이 몸을 상하게 하는 귀신들린 청년이 있습니다.


(막 5:3, 개역) 『그 사람은 무덤 사이에 거처하는데 이제는 아무나 쇠사슬로도 맬 수 없게 되었으니』

(막 5:4, 개역) 『이는 여러 번 고랑과 쇠사슬에 매였어도 쇠사슬을 끊고 고랑을 깨뜨렸음이러라 그리하여 아무도 저를 제어할 힘이 없는지라』

(막 5:5, 개역) 『밤낮 무덤 사이에서나 산에서나 늘 소리지르며 돌로 제 몸을 상하고 있었더라』


그런데 누가복음에서는 이 귀신들린 청년을 가지고서
역으로 누가 과연 귀신들린자인가를 거짓의 역능으로 지적하고 있습니다.


몸 개념을 이렇게 앞장세우는 것은 바로 관계성을 말하고 있습니다.

누가 봐도 귀신들린 청년은 예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단절 된 자입니다.


즉 유대인이 보는 입장에서 귀신들린 청년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자입니다.

그런데 그런 시각에 예수님이 시비를 겁니다.


과연 그런가? 하여 말이죠.



맞습니다.
유대인들도 예수님도 귀신들린 청년은 하나님과 관계가 끊어진 자 맞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지금 그 관계성을 새롭게 배치 시키십니다.
즉 창조성을 발휘하시는 겁니다.


그런 입장에서 유대인들은 저 귀신들린 청년을 새로운 배치 속에서 새롭게 볼수 있는 눈이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과연 누가 귀신들린자인가 라는 점을 예수님의 새로운 배치로써 그 새술은 새 부대의 의미를 볼 수 있는가?
아니면 한 번 자신들이 판단해 버리는 그 시각을 계속 보존 고수 확정하느냐 하는 점입니다.


문제는 귀신들린 청년이나 유대인이나 판단할 권리가 있느냐 하는 점입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예수님의 새로운 해석으로 인한 새로운 배치로 인해서

유대인이나 귀신들린 청년이나 도리어 판단 받아야 할 입장에 놓여진 겁니다.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이 귀신들린 청년이 하나님과 관계가 끊어졌다 라는 과거의 해석을 비난하는게 아닙니다.

그것은 이미 과거입니다.


문제는 지금 현재입니다. 지금 현재에 새로운 배치에 졸지에 비밀과 수수께끼가 걸려 버리니까

해석 못하는 입장이라면 과거에 확정, 고정 시켜 버린 해석을 내려놓고 포기를 해야 합니다.
즉 내가 어떤 해석을 하든, 반대를 위한 반대의 해석으로써 새로운 배치를 해 버리신다는 겁니다.


그렇지 않게 되면

놀랍게도

참으로 이것이 신비인데요

놀랍게도 예수님을 귀신들린 자로 해석할 수 밖에 없는
그 시스템 구조에 말려들 수 밖에 없다는 겁니다.


결국 그 동안의 해석이 엉터리였고

해석할 수 있다고 해석능력이 있는 줄 착각한 겁니다.

이것이 바로 강요된 선택입니다.


눈이 있다고 여겨서 눈으로 본 대로 이야기 했고
귀가 있다고 여겨서 귀로 들은 대로 이야기 했는데

그것이 강요된 선택이다는 겁니다.


즉 귀신들린 청년과 다를바 없는 귀신이 들려서 해석한 해석이다는 겁니다.

여기에 엎친데 덮친격으로 더더욱 겹으로 짐을 지우듯 뒤짚어 씌웁니다.

(마 13:11, 개역)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저희에게는 아니 되었나니』

(마 13:12, 개역)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되 무릇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마 13:13, 개역) 『그러므로 내가 저희에게 비유로 말하기는 저희가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함이니라』

(마 13:14, 개역) 『이사야의 예언이 저희에게 이루었으니 일렀으되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마 13:15, 개역)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 함이라 하였느니라』

(마 13:16, 개역) 『그러나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

(마 13:17, 개역)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많은 선지자와 의인이 너희 보는 것들을 보고자 하여도 보지 못하였고 너희 듣는 것들을 듣고자 하여도 듣지 못하였느니라』



그러니 결과적으로 그 해석을 판대기 뒤엎어버린 예수님을
예수님에 대한 적개심으로 살인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이상하게 한데 모아진다는 겁니다.


그것 때문에 예수님은 새로운 배치를 했다는 겁니다.

새배치란 즉 창조란 이런 어두움의 속성을 반드시 동원한다는 겁니다.


귀신들린 청년을 동원해서가 아니라

나는 귀신들린자가 아니다 라는 자를 동원해서 창조를 높이신다는 겁니다.


그러니 누가복음의 특징은 즉 희년의 특징은

은혜의 날, 기쁜소식의 특징은,

복음의 특징, 십자가의 특징은


바로 우리가 판단한 귀신들린자가, 개같은 이방인이, 소경이, 창녀가, 탕자가, 불의한 청지기가,

심판 받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칭찬받고


우리가 판단한 의로운 자가. 십의 이조를 내는 자가. 안식일을 지키는 자가. 빛의 아들들이,
구원 받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도리어 지옥의 자식임이 드러나는


팔을 어긋맞게 배치시키는 상황으로 벌어짐으로써

기쁜소식

또는 희년

은혜

또는 복음이라고 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 제자들은 맨날 하는 말이


그럼 누가 구원 받겠는고? 라는 탄식만 나오는 것이

참 제대로 주님이 일하셨다는 결과입니다.


즉 다 단절시켜 버리니

아무도 구원 받을수 없지 않냐 라는 제자로써 유대인으로써의 해석이 나오는 겁니다.


맞습니다. 진짜 복음은 구원을 차단하는 겁니다.

누가 봐도 구원 받은자로 여겼던 자는 지옥깜이요

누가 봐도 지옥 갈자였던 창녀 세리 강도가 먼저 천국에 간다고 하니


누가 믿겠습니까? 인간의 믿음은 다 깨어지는 겁니다.


마귀가 예수님께 외칩니다.

예수여 나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상관있냐 라는 관계성은 예수님의 독자적인 일로써 형성이 되는 겁니다.

마귀가 참 제대로 말했습니다.

마귀는 압니다.

예수님 자신이 흘리신 피가 자신에게 발릴 리가 없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래서 나와 당신은 상관이 없는 관계이다는 겁니다.


자 그럼 위에서 언급된 새로운 배치는 바로 예수님 자신이 흘리신 피로써 새롭게 형성이 되는 겁니다.


자신의 피로 결정되는 관계인데


진짜 마귀들린 자들은 그 예수님의 살과 피가 나와 상관이 없다는 겁니다.


귀신들린 청년은 자신들 스스로 귀신에서 벗어날 능력이 없습니다.

외부에서 예수님께서 그 귀신을 쫏아냄으로써 이 청년들은 예수님과의 관계성에 놓여진 겁니다.


즉 불쌍히 여겨주심입니다.


누가 복음의 특징은 그저 불쌍히 여겨주심 이것이 바로 핵심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 자손이라고 자칭 하나님의 자녀라는 유대인은

구지 새롭게 불쌓히 여겨주심이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으로부터 새로운 관계성을 바라거나 원한다면

그의 살과 피를 먹어야 함 뿐만 아니라

유대 사회에서 이단이 되어야 하며

가장 큰 문제

하나님과의 관계성을 끊어야 한다는 겁니다.


자발적으로 누가 귀신들린 청년처럼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길 바라는 자가 어디있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 희년을, 누가복음에서는 은혜의 날

마태복음에서는 8복 산상수훈을


바로 유대인이 아닌 개같은 이방인, 사망의 그늘에 폭삭 주저앉은자, 흑암 곧 지옥의 백성들에게 부어집니다.


(눅 4:16, 개역) 『예수께서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이르사 안식일에 자기 규례대로 회당에 들어가사 성경을 읽으려고 서시매』

(눅 4:17, 개역)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드리거늘 책을 펴서 이렇게 기록한 데를 찾으시니 곧』

(눅 4:18, 개역)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눅 4:19, 개역)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눅 4:20, 개역) 『책을 덮어 그 맡은 자에게 주시고 앉으시니 회당에 있는 자들이 다 주목하여 보더라』

(눅 4:21, 개역) 『이에 예수께서 저희에게 말씀하시되 이 글이 오늘날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하시니』

(눅 4:22, 개역) 『저희가 다 그를 증거하고 그 입으로 나오는 바 은혜로운 말을 기이히 여겨 가로되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


고아 과부 나그네입니다.


아니 누가 멀쩡한 가족 부모 자식이 멀쩡하게 살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고아라고 보고


남편이 시퍼렇게 살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과부 라고 여기며


백성을 섬기는 왕이 있고 국가가 있어 시민으로써 세금도 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나그네로 여기는 자가 어디 있습니까?


바로 예수님 때문에 그런 자들이 우발적으로 발생해 버리는 겁니다.

새창조 때문에 말입입니다.


그러면 새창조 앞에서 기존의 것을 모조리 다 손놓아 버림으로써

새창조를 고대하고 기다리게 되는 겁니다.


거기에 부합되는 것이 예수님의 살과 피 였듯이

은혜의 날 바로 희년이 되는 겁니다.


모세가 변화산에서 한 말이 정말 정말 제대로 된 외침입니다.


예수님 어서 빨리 죽어주십시오 빨리 죽음당해 주셔야 내 죄가 씻겨 집니다 라는 겁니다.


유대인들의 영웅인 모세 조차도 예수님께 애걸복걸 하면서 기존의 모든 것을 종말로써 확 태워 달라는 겁니다.
얼마나 엉터리가 판을 치고 있고

자신의 몸에 또, 모세 자신의 이름을 언급하면서 저지르는 그 죄악된 유대인 사회를 보니

기가막히고 코가 막히니까

빨랑 빨랑 불질러서 순금만 불속에서 끄집어 내어 달라는 겁니다.


가짜들이 판을 치고 있으니

거짓생명들이 판을 치고 있으니

어두움이 판을 치며 빛으로 가장하고 있으니

늑대들이 양의 탈을 쓰고 있는 것을 어서 빨리 가려달라는 겁니다.

이것이 거룩 곧 종말로써 가려달라는 겁니다.


그 기준이 바로 예수님의 죽음 곧 예수님의 살과 피라는 겁니다.


이것으로만 그 관계성의 진위를 가릴수가 있기 떄문에


모세는 빨리 별세해 달라고 하고

싸가지 없는 마리아는 예수님을 대접하기 바쁜 마르다로부터 지적당하면서도 불구하고
싸가지 없게 예수님의 무릎 팍에 누워서 말씀 듣기만을 하고 있고

불의한 청지기는 주인의 재산을 지멋대로 빚을 탕감함으로써 종말을 대비했던 겁니다.


또 뭐 있나요?

일급살인자 모세  애굽사람 죽여서 모래에 감추고 히브리인에게 우리까지 죽일려고 하느냐 라는 소리에
도망쳐 버린 모세


여호와의 전쟁에서만 관심둔 우리야 장군을 철저하게 계획적으로 살인하고
그의 아내를 고의적으로 밧세바를 빼앗은 일급 살인자 다윗


스데반 집사를 죽인 일급살인자 사도바울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부인하면서 저 사람 내가 알면 손에 장지진다 했던 수제자 베드로
그래놓고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사랑한다고 참으로 뻔뻔스러움의 최극치를 나타내는 든든한 베드로

또 누가 있나요?

아! 향유를 부은 여인은 예수님을 미리 장사치르는 의식을 행함으로써 제자들로부터 욕먹죠.

특히 가룟유다로부터 그 아까운 비싼향유를 팔아 가난한자에게 주지 않는다고 말이지요.

과연 가난한자를 생각한 것일까요? 오늘날 이웃사랑을 실천하는 자들이 과연 진짜로 이웃을 생각해서일까요?
아니면 자기 보람 때문일까요?

자기 보람 때문에 가난한자가 계속 있어야 하니 어쩌면 제 몸 같이 사랑했다면

자기 전 재산을 줘서 본인이 도리어 가난한자가 되고
그 사람을 자기 몸처럼 나를 이웃사랑할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그런데 둘 다 막연한 일인 겁니다. 불가능한 겁니다.
그래서 가능한 것을 모아 보니 문자를 지키는 행함이였던 겁니다. 얼마나 무책임한 행함입니까?


결국 전혀 이웃사랑함이 없는 겁니다. 자기 몸 같이 라는 이 부분을 누락한 겁니다.

성경말씀이란 이상합니다. 하나를 지키면 도리어 하나를 더욱더 어기도록 되어 있는 겁니다.
철저한 모순이요 철저한 부조리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웃사랑을 실천해 버리면, 자기 몸 대하듯이 라는 것을 어기도록 되어 있다는 겁니다.


남들은 다 속여도 예수님은 그 누락 한 것을 추궁하면 우짜실려구?


그럼 자꾸 따지는게 그럼 하지 말라는 말이냐?

이웃 사랑하지 말라는 말이냐?


그 말이 아닙니다.

성경 전체 말씀은 바로 예수님이 하신다 라는 것이고 

그 하심에 있어서 그 대상물이 바로 우리이기 때문에

예수님의 이웃이 바로 우리인 겁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예수님이 하시는 일을 보고자 듣고자 하는 눈과 귀가 없기에

자기가 어떻게 이 말씀을 지키냐 안지키냐에 신경 쓰다 보니

예수님의 새로운 배치로 인해서 졸지에 적개심을 일으키는 살인자로,
어두움으로써 그 속내가 드러나더라 라는 겁니다.


새창조 앞에서 말입니다.


아버지 말씀을 한번도 어긴적 없이 아버지 곁을 떠난적도 없이 다 지켰는데

아버지의 새창조 즉 새사랑 때문에

졸지에 그 탕자라는 새창조물에 졸지에 시기심이 발휘하게 되는 어두움의 속성이 들통나게 되더라 라는 겁니다.


이 새 배치가 부당하냐 말이죠?

힐문할 자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 힐문할 자가 없기에

이 부조리로써만 일을 하시겠다는 겁니다.

그것이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를 자꾸 포장하는데

십자가는 우리의 살인자 속성을 들추어내는데 목적이 있습니다.


자 본문으로 다시 돌아가면


그 귀신들린 청년을 고쳐서 귀신떼거리를 돼지떼 속에 집어 넣습니다.

졸지에 축산업 종사자들 다 망했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망한겁니까? 귀신들 때문에 망한겁니까? 아니면 새창조 때문에 망한겁니까?


문제는 힐문할 수가 없다는 것이 화가나서 예수님을 쫏아냅니다.


(눅 8:36, 개역) 『귀신 들렸던 자의 어떻게 구원 받은 것을 본 자들이 저희에게 이르매』

(눅 8:37, 개역) 『거라사인의 땅 근방 모든 백성이 크게 두려워하여 떠나가시기를 구하더라 예수께서 배에 올라 돌아가실새』


그렇게 유대인들이 고대하고 기다렸던 희년 아닙니까?

그런데 그 희년이 남이 아닌 나에게 베풀어져야 하는데

남에게 그것도 귀신들린 청년에게 베풀어지게 되니

기쁜 은혜의 날이 된 겁니까?

아니면 탕자의 형 맏아들처럼 기분 나쁜 절망의 날이 된 겁니까?


새창조가 기쁩니까? 아니면 기분 나쁩니까?

새로운 배치로 인해서 기존의 것이 날라가 버리고 깨지고 부서진 것이 기쁜겁니까?

아니면 기분 나쁜 제대로 화가 나도록 제대로 콕 찔러 버린 날로써의 새창조 입니까?


분명 귀신들린 자가 어떻게 구원 받은 것을 본자들이다고 했습니다.


(눅 8:36, 개역) 『귀신 들렸던 자의 어떻게 구원 받은 것을 본 자들이 저희에게 이르매』


구원이 펼쳐진 것에 기쁜겁니까?

화가난다 화가나 앵그리 버드 화가나


죄인 하나가 회개하고 돌아오면 천군천사들이 잔치를 벌린다고 합니다.

죽은 자가 다시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잃어버렸다가 되찾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비유죠


그러니 하나님 나라 비유는 얼마나 무시무시한 무섭기 짝이 없는 비유인줄 몰랐던 겁니다.


의인을 지옥 보내고

죄인을 천국 보내기 위한 비유인 겁니다.


하나님 나라가 지상에 내려와서 하는 일은

결국 의인을 지옥 보내는 일입니다.

그리고 누가 봐도 지옥갈 죄인을 끝까지 놓치지 않고 천국 보내겠다고

자신의 살과 피를 뿌려서라도 그렇게 하시겠다는 예수님 자신의 다짐이 바로 십자가에서 죽으심입니다.


그것을 다 이루심입니다.


거기에 반발하는 세력이 이 땅에서 의인이라고 불리던 자들인 겁니다.

그 십자가 만큼은 절대로 절대로 퍼지지 못하도록 가로막겠다는 겁니다.


그러니 진짜 십자가는 이런 두 양상을 제대로 펼치는 겁니다.


오늘 본문이 그러합니다.


그래서 니 이름이 뭐냐 라고 물었습니다.


군대 라고 합니다.


군대란 소속 곧 소유성을 말하는 겁니다. 관계성이지요.


철학이 왜 속임수냐? 다수성을 추구한다고 해서 속임수라고 지난 글에 올렸습니다.

다수성이 바로 보편성이요 그 보편성이 동일성 추구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소수성을 추구하는 니체 계열도(소피스트) 있지만
그들 역시 파시즘을 거부하는 파시즘으로 욕먹고 있습니다.
아니 스스로 자처 하고 있습니다. 무슨 수로든 벗어나겠다는 거죠.


그러나 소수성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겁니다. 인기 없는 길로 가겠다?

넓은 길로 가지 않고 좁은 길로 가겠다?
무정치는 정치 아닌가요?


없는 길을 만들어 새 길로만 가는 창조를 하는 예술가가 되겠다?


예수님은 안 쳐다 본다는 자체가, 그 소수주의도 미시정치도  다 거짓인 겁니다.

(요 14:6, 개역)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결국 예수님이 불쌍히 여겨서 자신의 피를 발라 주지 않는 이상은

소수주의를 추구하든 보편주의를 추구하던 이를 보완한 변증적인 정신의 세계를 추구하던


유대인의 재반복일 뿐입니다.


즉 귀신의 이름인 군대입니다. 

육의 소욕이다는 겁니다.


그러니 성령의 소욕이 대립되어 나타나게 되니

자신이 군대임을 티를 팍팍내면서

발악을 하면서 돼지떼 속으로 들어가는 겁니다.


그 현상을 보고 기뻐하는 군대가 아니라

예수님을 동네에서 쫏아내는 군대인 겁니다.

유일한 소수자 곧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는 육의 단절성에서 난 분

육과 전혀 상관이 없는 자

예수여 나 마귀와 당신 예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자이기에

청년에게서 나와서 돼지떼 속으로 들어간 군대만이 군대가 아니라

그것을 보고도 예수님이여 제발 이 동네에서 나가 주세요 라고 말하는

그들도 군대 라는 겁니다.


상관이 없다는 겁니다.


예수님의 새창조(십자가)와 나와 무슨상관이냐 지금 내 손해가 막심한데?

귀신들린 청년 고치고 희년을 베풀고 은혜의 날을 이루시는 구원의 날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라는 겁니다.


바로 그것이 군대입니다.


(마 12:24, 개역) 『바리새인들은 듣고 가로되 이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지 않고는 귀신을 쫓아 내지 못하느니라 하거늘』

(마 12:25, 개역) 『예수께서 저희 생각을 아시고 가라사대 스스로 분쟁하는 나라마다 황폐하여질 것이요 스스로 분쟁하는 동네나 집마다 서지 못하리라』

(마 12:26, 개역) 『사단이 만일 사단을 쫓아 내면 스스로 분쟁하는 것이니 그리하고야 저의 나라가 어떻게 서겠느냐』

(마 12:27, 개역) 『또 내가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 내면 너희 아들들은 누구를 힘입어 쫓아 내느냐 그러므로 저희가 너희 재판관이 되리라』

(마 12:28, 개역)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 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마 12:29, 개역)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야 어떻게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그 세간을 늑탈하겠느냐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늑탈하리라』

(마 12:30, 개역) 『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헤치는 자니라』

(마 12:31, 개역)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모든 죄와 훼방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훼방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마 12:32, 개역)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

(마 12:33, 개역) 『나무도 좋고 실과도 좋다 하든지 나무도 좋지 않고 실과도 좋지 않다 하든지 하라 그 실과로 나무를 아느니라』

(마 12:34, 개역)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는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

(마 12:35, 개역)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내느니라』

(마 12:36, 개역)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

(마 12:37, 개역) 『네 말로 의롭다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

(마 12:38, 개역) 『그 때에 서기관과 바리새인 중 몇 사람이 말하되 선생님이여 우리에게 표적 보여 주시기를 원하나이다』

(마 12:39, 개역)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

(마 12:40, 개역) 『요나가 밤낮 사흘을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 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을 땅 속에 있으리라』

(마 12:41, 개역) 『심판 때에 니느웨 사람들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들이 요나의 전도를 듣고 회개하였음이어니와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으며』

(마 12:42, 개역) 『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가 솔로몬의 지혜로운 말을 들으려고 땅 끝에서 왔음이어니와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

(마 12:43, 개역)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에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되 얻지 못하고』

(마 12:44, 개역) 『이에 가로되 내가 나온 집으로 돌아가리라 하고 와 보니 그 집이 비고 소제되고 수리되었거늘』

(마 12:45, 개역) 『이에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욱 심하게 되느니라 이 악한 세대가 또한 이렇게 되리라』


귀신이 귀신 하나를 쫏아내고서는 도리어 일곱 귀신이 들어간다고 다수로 표현한 이유가

군대 라는 겁니다.


예수님이 귀신 쫏아냄을 바리새인들이 바알세불이라는 마귀의 대장의 힘으로 귀신을 쫏아내고 있다고 하기에

즉 여론을 조작하기에

바로 그렇게 말하고 있는 유대인들이 일곱귀신들린 군대라는 겁니다.


성령이라는 소유성, 소욕성, 관계성으로 인해서 그들이 군대라는 육의 속성, 육의 소욕이 드러난 겁니다.


이러한 원수 지간으로 갈려지는 현상을 거룩이라고 합니다.


거룩이 펼쳐진 겁니다.


(갈 5:17, 개역)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거룩이 가는 곳 마다

거룩이 입혀진자가 가는 곳 마다

이런 갈라짐의 현상이 벌어지는 겁니다.


새배치로써 귀신들린 자가 구원받고

귀신안들렸다고 철저하게 믿었던 하나님의 백성은 악마군대로 밝혀지는 겁니다.



내가 예수 잘 믿어야 할 텐데

잘 믿으면 복받는 모습이 되어야 하는데

이웃 사랑도 해야 하는데
그런 예수쟁이 모습을 보여야 할텐데

제대로 바르게 살아야 하는데
죄 지으면 안되는데


자 이런 못 지킬것들로 자신에게 더욱더 짐을 지우는
마치 율법을 온 몸에 칭칭 감은 유대인 처럼
자기 자신을 자해하는 제사를 드릴려고 합니다.

그러나 엘리야는 물 뿌려버리지요


종말인데? 마땅히 심판 받아야 하는 줄을 모르고 있는 그 자체가

종말을 빠져 나갈수 있다고 여겨서 심판 안 받는 길을 모색한다는 자체가


이미 관계에서 끊어진 자입니다.


그러나 예수 안에서 끊어지지 않는 자는

예수님의 별세에 주목합니다.


오히려 제발 종말이여 제발 좀 오세요 라고 하는 겁니다.


반대로 마귀는 왜 벌써 왔느냐 라고 하고요.

그 종말만이 내 죄를 대신해서 죽으신 그 사랑을 펼치신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 종말의 사건 십자가에만 감사할 뿐이다 는 겁니다.

그래서 무슨 짖을 해도 예수님의 죽으심과 관계된 그 관계성을 말하고 있지

자신의 성화 된 것에 대한 의식 자체가 없습니다.


누더기, 걸레(넝마) 옷(주이)을 입고서,
죄인 중의 괴수로써 범죄자 옷을 입은 채로

예수님의 피가 이런 나 같은 죄인 중의 괴수도 용서하는 피이다고

피만 자랑하는 겁니다.


이 피만 들이대는 겁니다.


마귀라는 군대의 소욕이 가득한 곳에 배치되면서 말입니다.
뻔뻔스럽게 심판 주 와의 관계성을 들이대면서 말입니다.


나를 심판 할 자는 내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님 뿐이다 라고 ......


이것이 마귀가 자기와 전혀 상관이 없다고 외치는 주의 주 되심입니다.



























예수 라는 문(門)과 불가능성에 대한 도전 (눅 8:22-25)

2013/09/13 21:31 in 성령행전(피활동,인간극복)

 

믿음이 어디 있느냐? 불가능성에 대한 도전과 예수 라는 문



(눅 8:22, 개역) 『하루는 제자들과 함께 배에 오르사 저희에게 이르시되 호수 저편으로 건너가자 하시매 이에 떠나』

(눅 8:23, 개역) 『행선할 때에 예수께서 잠이 드셨더니 마침 광풍이 호수로 내리치매 배에 물이 가득하게 되어 위태한지라』

(눅 8:24, 개역) 『제자들이 나아와 깨워 가로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죽겠나이다 한대 예수께서 잠을 깨사 바람과 물결을 꾸짖으시니 이에 그쳐 잔잔하여지더라』

(눅 8:25, 개역)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 하시니 저희가 두려워하고 기이히 여겨 서로 말하되 저가 뉘기에 바람과 물을 명하매 순종하는고 하더라』



예수님은 항상 불가능한 것만 제자들에게 요구하십니다.

즉 이 말은 정말로 그 불가능성을 실천하라 라는 뜻입니까?

아닙니다.


그럼 왜 이 말도 안되는 소리를 자꾸 자꾸 집요하게 하시는 것입니까?

이유는

자꾸 자꾸 자극을 주시고자 하심입니다.


자극요?

자극 줘서 뭐하게요?


자극이란 일종의 충돌로써 하나의 접힘현상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곧은 목을 꺽어버림으로써 자기부정케 하시는 겁니다. 그런 접힘으로써, 단절 삭제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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