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어있는 보좌와 [진리는 공백이다]. (눅 8:40-56)

예수께서 경계하사 이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



(눅 8:40, 개역) 『예수께서 돌아오시매 무리가 환영하니 이는 다 기다렸음이러라』

(눅 8:41, 개역) 『이에 회당장인 야이로라 하는 사람이 와서 예수의 발 아래 엎드려 자기 집에 오시기를 간구하니』

(눅 8:42, 개역) 『이는 자기에게 열두 살 먹은 외딸이 있어 죽어감이러라 예수께서 가실 때에 무리가 옹위하더라』

(눅 8:43, 개역) 『이에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는 중에 아무에게도 고침을 받지 못하던 여자가』

(눅 8:44, 개역) 『예수의 뒤로 와서 그 옷 가에 손을 대니 혈루증이 즉시 그쳤더라』

(눅 8:45, 개역)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게 손을 댄 자가 누구냐 하시니 다 아니라 할 때에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무리가 옹위하여 미나이다』

(눅 8:46, 개역)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게 손을 댄 자가 있도다 이는 내게서 능력이 나간 줄 앎이로다 하신대』

(눅 8:47, 개역) 『여자가 스스로 숨기지 못할 줄을 알고 떨며 나아와 엎드리어 그 손 댄 연고와 곧 나은 것을 모든 사람 앞에서 고하니』

(눅 8:48, 개역) 『예수께서 이르시되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하시더라』

(눅 8:49, 개역) 『아직 말씀하실 때에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이 와서 말하되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선생을 더 괴롭게 마소서 하거늘』

(눅 8:50, 개역) 『예수께서 들으시고 가라사대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그리하면 딸이 구원을 얻으리라 하시고』

(눅 8:51, 개역) 『집에 이르러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와 및 아이의 부모 외에는 함께 들어가기를 허하지 아니하시니라』

(눅 8:52, 개역) 『모든 사람이 아이를 위하여 울며 통곡하매 예수께서 이르시되 울지 말라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

(눅 8:53, 개역) 『저희가 그 죽은 것을 아는 고로 비웃더라』

(눅 8:54, 개역) 『예수께서 아이의 손을 잡고 불러 가라사대 아이야 일어나라 하시니』

(눅 8:55, 개역) 『그 영이 돌아와 아이가 곧 일어나거늘 예수께서 먹을 것을 주라 명하신대』

(눅 8:56, 개역) 『그 부모가 놀라는지라 예수께서 경계하사 이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 하시니라』


지난 시간에 마귀가 들린 청년이 소리칩니다.
왜 아직 시간도 안되었는데 왜 벌써 왔느냐?
나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길래 우리를 괴롭히느냐?

라고 말입니다.


적반하장이지요. 즉 마귀입장에서 인간은 밥입니다.

마귀가 인간을 사랑하는 이유입니다.

마귀가 인간을 미워할 이유가 하등 없는

전혀 전혀 미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밥인데요 뭘


마치 니체가 말하는 독수리와 양의 비유처럼 말입니다.

오늘날 양의 탈을 쓴 늑대들이 양을 미워하고 싫어할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오히려 죽도록 사랑합니다.

죽어도 돈을 사랑하는 우리 인간처럼 말입니다.


나 돈 미워 할 거야.

다시는 평생을 걸쳐 돈이랑은 안 마주칠 거야 라고 다짐하는 인간은 아예 없습니다.

목사?

돈 줘 보세요.

입에 늑대처럼 침을 질질 흘리면서 꿀꺽 꿀꺽 삼키고 춤을 추고 좋아라 합니다.


마귀는 자기 밥에만 상관있다는 겁니다.

밥이 되는 인간에게만 상관이 있는 겁니다.
그런 밥을 미워할 이유가 전혀 없으니 말이지요.
그런데 그 밥을 빼앗는 예수님과는 상관이 없다고 하는 말이 맞습니다.


문제는 예수님은 상관있다고 우깁니다.
왜?
마귀가 이제는 예수님의 밥이 되기 때문입니다.

마귀 없이는 영광 안 받으십니다.

마귀가 그 역할을 톡톡히 해줘야만 하는 겁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당신과 나와 무슨상관이 있냐고?

방금 청년들을 괴롭힐 때는 언제고,

이제와서는 자기가 예수님으로부터 방해받게 되니 괴롭힘을 당한다고 찡찡 거리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는 역시나 지난 시간처럼

마귀의 정체를 주님만 의식하시면서 꽁꽁 감추시면서

정작 마귀의 숙주 노릇을 하고 있는 인간을 수셔대기 시작하십니다.
귀신들인 자를 구원한 그 사건을 정작 보고 듣고 체험했음에도 불구하고
거라사 동네 사람들은 어서 빨리 우리 동네에서 나가주세요 라고 합니다.


반드시 한 쪽이 기쁨의 은혜를 입으면 반드시 다른 한 쪽은 그 은혜를 거부하는 모습이 나타납니다.

이것을 정치 라고 합니다.



오늘 본문에 하나의 사건에 또 다른 한 사건이 개입이 되면서 중첩이 됩니다.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고치시는 사건 중에 혈루증 앓은 여인을 고치시는 사건이 중간에 낑기게 됩니다.

이 둘의 공통점이 공교롭게도 아무 연관성이 없어 보이는 12라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여성성입니다.

열두살의 야이로의 딸과 12년 동안 혈루증을 앓고 있는 여인의 공통점이 바로 12입니다.

바로 이스라엘의 의미입니다.


즉 이스라엘이 예수님을 운좋게 만나서 이스라엘이 되는게 아니라

예수님이 이스라엘을 찾아내어서 이스라엘이 되는 겁니다.
그 12지파 이스라엘이 바로 예수님의 보좌인 겁니다.
거하실 처소입니다. 성령의 전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봐도 그 12지파 이스라엘이
전혀 이스라엘 다운 구석이 전혀 보이질 않는다는 것이 오늘 본문의 핵심입니다.


바로 공백상태이다 라는 겁니다.

전혀 없습니다.

이스라엘 다운 구석이 말입니다.


곧 죽어가는 12살의 딸과12년 동안 혈루증을 앓고 있는 여인이

무슨 이스라엘의 조건성을 갖춘 겁니까?

병들었고 곧 죽어가는데 말입니다. 아니 이미 죽어버렸는데?


자 그러면 인간들 스스로가 이스라엘 다움을 갖추는 방식은 바로
그 공백상태를 없애버리고 꽉 꽉 잘 짜여진 시스템을 갖추는 방식입니다.


그것이 바로 회당장의 딸의 아버지 즉 야이로 본인입니다.

(눅 8:49, 개역) 『아직 말씀하실 때에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이 와서 말하되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선생을 더 괴롭게 마소서 하거늘』

즉 이스라엘이라고 하면서도 정작 이스라엘이 아닌 육의 껍데기로만
이스라엘을 추구하고 있는 어른들이
이 딸과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정작 아이는 산자입니다. 누구 죽은자입니까?

야이로와 그의 하인들입니다.
예수님은 이 딸을 통해서 이들에게 이스라엘을 각인시킵니다.
처음사랑을 말입니다.

아무것도 한 것이 없는 그 공백의 상태를 되돌릴려고
이 아이가 어른들의 무지를 깨우는데 사용이 되고 있습니다.


마치 지난 시간과 똑같은 의미입니다.

정작 귀신들린 청년이 귀신들린게 아니라(분명히 귀신들렸음에도 불구하고)

멀쩡하고 건강하다고 여기는 돼지 축산업을 하고 있는 거라사 동네 사람들이
진짜 마귀의 숙주임을 제대로 보여주고 있는 겁니다.


믿음이란 바로 이 공백상태입니다.
빈터입니다.


그런데 믿음의 반대인 의미인 행함이란 빈 공백상태가 아닌
뭔가 꽉꽉 채워져 있습니다.
회당장 야이로처럼 우리 인간은 뭔가 꽉꽉 채워져 있어서
뭔가 결핍이 생겨 버리면 그 결핍을 메꾸어 넣을려고 안달이 날 수 밖에 없습니다.

어쩔수 없습니다. 그것을 탓탓하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쩔수 없는 겁니다.
문제는 예수님께서 희년을 성취하시는데 있어서
예수님의 믿음이 그런 꽉꽉 차 있는 것들을 비우실려고 할때에
반발한다는 사실이라는 겁니다.
내 물건에 손대지 말라는 겁니다.
주님은 자꾸 비워버리실려고 하고
인간은 절대로 빼앗기지 않겠다고 비울려고 하는 주님을 비웃고 있다는 겁니다.


거부하는 그 반발이 이루 말도 못할 정도로 강렬하다는 겁니다.
귀신들린 청년들이 셉니까?

아니면 거라사인들이 셉니까?

누가 봐도 귀신들린 청년들이 얼마나 세고 센지?
그런데 예수님이 등장하면 모든 시선은 거꾸로 변해 버립니다.

귀신들린 그 힘센 자들이 예수님 앞에서는 꼼짝도 못합니다.
고분 고분해져서 귀신들이 나갑니다.

그런데 오히려 그 동네 사람들 얼마나 건전하게 건강하게 살고 있습니까?
그런데 그들이 얼마나 세면 귀신들린 청년들 보다 힘이 센 귀신을 쫏아내신 예수님을
그 동네 사람들이 쫏아내고 있습니다.

이것을 지젝이라는 철학자는 과잉이라고 오바액션이라고 하고
영화의 어떤 기법이라고 했는데 용어를 까먹었네요
아무튼 이것을 또 알랭바디우는 초과점이라고 합니다.
진리는 공백이다 라고 말하면서 말이지요.


개그콘서트 같은 프로그램에서 나오는 하나의 기법이기도 합니다.
삼각형처럼 그려서 하나의 도식을 만들면 그렇게 되는 겁니다.

A B C를  삼격형의 꼭지점으로 그려서 설정하고서는

C 동네 사람들은 A 귀신들린 청년에게 무능하고
A 귀신들린 청년은 B 예수님에게 무능하고
B 예수님은 C 동네 사람들에게 쫏겨나고

이런 식으로 맞물려서 말입니다. 라캉의 L도식(욕망도식)도 이런 식으로 보시면 되겠지요.
성령의 일에는 반드시 이 비웃음 곧 무시 무능을 가지고서 하나님께 영광되게 하십니다.


야이로의 딸 고침 받아 구원 되었다 달리다굼 으로만 보면

전혀 본문과 무관한 겁니다.

반드시 예수님의 말씀에 토를 다는 무시하는 자들 비웃는 자를 끄집어내지 못한다면 그것은 복음이 아닙니다.
고치거나 병 낫게 하는게 목적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은 예수님의 보좌입니다.


그 보좌는 비어 있습니다.

비어 있다는 그 불임상태, 아무것도 없음의 상태를
비웃고 거부하는 자를 뽑아내는 것이 보좌의 특징입니다.

자리는 비워져 있습니다.
자리가 비워져 있는데 어떻게 왕이 있다고 외칠수가 있겠습니까?
부재 상태인데?

그런데도 불구하고 있다 라고 외치는 자는 바로 이스라엘 밖에 없도록 하신 겁니다.





(영화 [광해] 에서 한 컷. 영화의 주인공은 이 빈 보좌이다.)


오늘 본문에 야이로의 딸은 죽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안 죽었다고 합니다.


다들 비웃습니다.

야이로와 하인들은 괜한 수고를 하지 마시라고

더 이상 예수님을 괴롭게 즉 귀찮게 하지 않겠다고 합니다.
왜? 죽었으니까


이것이 전혀 이스라엘과 무관한 자들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냥 지나치실수가 없습니다.


반드시 이스라엘 만들겠다고 하십니다.

간따나 비웃는 분위기에서 그야말로 철없는 소리 같은 소리를 하신겁니다.
다들 비웃음이 마땅하도록 하신 겁니다.


잔다 라고 말입니다.


자고 있다 라고 말입니다.


캬캬캬캬! 이 얼마나 비웃을 수밖에 없습니까?

맞습니다. 비웃게 하셔야 합니다.

비웃도록 만들어야만 하는 겁니다.


그것이 예수님 다움입니다. 주의 주 되심입니다.
저들이 생각한 메시아? 구원자? 다 해체시켜 버리는 겁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것은 복음이 아닙니다.


믿음이란 반드시 [행함]과의 양보없는 전쟁에 놓여진 겁니다. 왜? 소욕 때문입니다. 욕망때문입니다.
죽음보다 강한 시기의 사랑입니다.

사귐이라는 소욕은 반드시, 사귐이 아닌 것들, 거짓사랑을 걸러내어야만 하는 겁니다.

행함으로 꽉 차버린 자들에게서의
믿음은 반드시 비웃음이 되어야 하는 겁니다.


무시꺼리가 되어야 하는 거죠.


그래서 더 더 더 비웃도록 [잔다] 라는 소리에 행함 곧 거짓이스라엘들은 빵 터져 버린 겁니다.
믿음이 아니기에 결국은 빵 터져 비웃을 수밖에 없는 겁니다.

신은 죽었다.
빵 터져 버렸습니다.
다 웃다가 죽어버린 겁니다.


이 심각한 상황에 한가하게 잔다 라고 말하고 있으니

저들이 화가 나는 겁니다.


왜? 자기들이 비웃음 당했다고 여기는 거죠. 무시 당했다고 여기는 겁니다.


자 L 도식(욕망도식)처럼 또 그려보죠

무능하게 죽은 야이로의 12살 딸 A

그 죽은 딸을 잔다 라고 하신 예수님 B 죽음을 우습게 취급해 버리는 모습으로 비추는 예수

잔다 라는 말에 발끈해 비웃는 어른들 C


위에서는 [쫏아냄] 이라는 의미로 도식을 삼각형으로 그렸다면
이번에는 [비웃음] 이라는 의미로 도식을 삼각형으로 그리면 이렇게 되는 겁니다.

자 바로 이것이 진리는 공백이다 라는 겁니다.


진리는 무능함으로
비웃음 당함으로
비워있는 빈터로

부재성으로써

자신의 짝꿍인 이스라엘을 생산하고 있는 겁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마귀들린 우리들을 거침없는 하이킥으로 바로 바로 즉각적으로 건져내시지만

희년완성처럼 고아 과부 나그네에게 기쁜소식이요
포로된자 억눌린자 눈먼자를 놓아주는 자유케 하는 소식이지만

(눅 4:17, 개역)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드리거늘 책을 펴서 이렇게 기록한 데를 찾으시니 곧』

(눅 4:18, 개역)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눅 4:19, 개역)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눅 4:20, 개역) 『책을 덮어 그 맡은 자에게 주시고 앉으시니 회당에 있는 자들이 다 주목하여 보더라』

(눅 4:21, 개역) 『이에 예수께서 저희에게 말씀하시되 이 글이 오늘날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하시니』

(눅 4:22, 개역) 『저희가 다 그를 증거하고 그 입으로 나오는 바 은혜로운 말을 기이히 여겨 가로되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

(눅 4:23, 개역)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반드시 의원아 너를 고치라 하는 속담을 인증하여 내게 말하기를 우리의 들은 바 가버나움에서 행한 일을 네 고향 여기서도 행하라 하리라』

(눅 4:24, 개역) 『또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가 고향에서 환영을 받는 자가 없느니라』

(눅 4:25, 개역)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엘리야 시대에 하늘이 세 해 여섯 달을 닫히어 온 땅에 큰 흉년이 들었을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과부가 있었으되』

(눅 4:26, 개역) 『엘리야가 그 중 한 사람에게도 보내심을 받지 않고 오직 시돈 땅에 있는 사렙다의 한 과부에게 뿐이었으며』

(눅 4:27, 개역) 『또 선지자 엘리사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문둥이가 있었으되 그 중에 한 사람도 깨끗함을 얻지 못하고 오직 수리아 사람 나아만뿐이니라』

(눅 4:28, 개역) 『회당에 있는 자들이 이것을 듣고 다 분이 가득하여』

(눅 4:29, 개역) 『일어나 동네 밖으로 쫓아내어 그 동네가 건설된 산 낭떠러지까지 끌고 가서 밀쳐 내리치고자 하되』

(눅 4:30, 개역) 『예수께서 저희 가운데로 지나서 가시니라』


정작 인간들에게는 무능하기 짝이 없게
어리석기 짝이 없는 방식으로만
미련하기 짝이 없는 방식으로만
십자가는 지혜를 펼친다는 겁니다.
즉 반드시 싫은 소식이 되도록 한다는 겁니다.
거부케 하는 소식이 비로소 떠버린 겁니다.

싫어버린바 된 소식 과 기쁜소식으로써의 이중성입니다.


그 이유가 바로 


예수께서 경계하사 이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


마지막 절에 경계케 하기 위함입니다.

아니 이미 다 공개된 이야기인데고 불구하고 단절 되었다는 겁니다.

개방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단절된 비밀이라는 겁니다.

쉿 쉿 비밀이야 비밀,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 알았지?
둘이 약속해 !!
새끼 손가락걸고 약속, 도장, 사인, 복사, 안구인식, 비밀번호, 잠금장치
빈 금고에 들어가기!!

왜 왜 왜? 부끄러워서 그래? 불끄까?


즉 부재의 상태로 만들어 버리겠다는 겁니다.

이미 다 아는데?

봤는데?

들었는데?


모르게

못보게

못듣게


(씨뿌리는 비유. 이미 다 아는 이야기
이미 다 외운 시편

분명 다 아는 씨 뿌리는 이야기를 전혀 모르는, 아무도 모르는 비밀로써 패쓰워드 걸어버리는
시편 그대로 오셨음에도 불구하고 도 시편대로 다 행하심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모르는 분으로 오심

다 부를 줄 아는 찬양인데
아무도 못 듣는 찬양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슬피 애곡을 하여도 아무도 슬퍼하지 않는 새노래)

이것이 예수님의 보좌로써

즉 예수님의 신부인 교회로써의
이스라엘을 새롭게 만드시는 방식입니다.
이스라엘의 기능입니다.

예수님이 찾아내어 새롭게 부여한 새기능으로써의 이스라엘 기능입니다.

너에게만 알려 주고 보여주고 싶었고, 너에게만 들려 주고 싶었던 노래이다는 겁니다.
너 한테만 주겠다는 겁니다. 
편파 기쁜소식입니다.


이 편파적인 사귐은,
편파적인 사랑은,


바로 비웃음의 방식

쫏겨남을 당하는 방식

싫어버린바 되는 방식
어리석기 짝이 없는 방식

미련하기 짝이 없는 방식


바로 무시 받는 방식으로써


십자가의 지혜는 펼쳐지는 겁니다.

이것이 행함을 거부하는 믿음의 방식인
믿음 되신 예수님의 방식입니다.


일체 행함에게 양보 못하겠다는 믿음이 벌리는 전쟁

곧 사귐인 겁니다.


죽음보다 강한 십자가의 피 소식 입니다.



진리는 공백이다 와 비어 있는 보좌


영화 [광해] 에서 한 컷
진리는 공백이다 와 비어 있는 보좌


영화 [광해] 에서 한 컷




















좋아요 ·  ·  · 약 1시간 전 · 수정됨 · 



---


광해 하는 구나

또 봐도 역시 재미남

진짜가 거짓이고, 거짓은 진짜가 되는 

Stand Alone Complex 스탠드 얼론 컴플렉스 (홀로서기 강박증 / 군중 속의 고독)

거짓의 역량

예수님이 하나님의 영광을 버리고 죄인이 되심은

십자가 라는 부정성에 충실하시고자 함이다.

구원 받을 자가 심판 받고, 심판(종말) 받아야 할 자가 구원 되는

불의한 재물에 충성하시는 예수님의 사랑

고로, 아무도 구원 받을 자 없다.
  • 김대식 부조리 극의 대표소설로 카프카의 심판도 있지만

    왕자와 거지 라는 소설도 있다. 허클베리핀, 톰 소여의 모험의 작가 이기도 한 마크 트웨인의 소설이다.

    어제 밤에 이 영화를 보면서 눈물이 핑 돌았다.


    요즘 한국 인문학에서 광해가 갑자기 부상하면서 인기 몰이를 하고 있다.

    과연 백성을 섬기는 임금이 이 나라에서 나오기는 나오는 것일까? 라는 의문을 던지면서

    박정희 부녀의 흐름에서 벗어나자고 그렇게 외쳤건만

    외친 소리가 얼마 되지 않은 외침이라서

    여지없이 미끄러져 버려 그네언니가 그만 당첨 되었다고
    이제 또 백성들의 피를 빨아 먹는다고

    인문학자들이 투덜 대고 있다.

    바리새인들이다.

    과연 이들이 백성을 생각하는 마음이 있는 지식인들이 맞을까?

    성경말씀은 이미 백성을 섬기는 왕이 왔다고 한다.

    그 분은 본인도 빌라도 손에 죽으러 왔다고 하신다.

    이것을 알려주시는 섬김

    맞다. 마귀가 활개 친다고 투덜 거릴게 아니라

    마귀의 손에 죽으러 오신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이미 넉넉하게 사랑은 완성이 되었다고 알려주시는
    그 섬김이 있기에

    함께 죽고 함께 산다는 것을

    넉넉히 누릴 뿐이다.
  • 김대식 광해군을 제대로 보다

    http://blog.aladin.co.kr/.../printPopup/print_Review.aspx...
    blog.aladin.co.kr
    조선왕조실록에 대한 나의 관심은 38년의 인생을 살아오는 동안..관심이 있었다고 할 만한 날이 손꼽을 정도이다..학교 다닐 때에 배운 지식이 다...더 보기
  • 김대식 벙커1 도서전 특강,한명기 교수,왕과 아들

    http://www.youtube.com/watch?v=kFEYLK41Ukk
    www.youtube.com
    벙커1 도서전,왕과 아들, 권력은 어떻게 계속되는가. 벙커1 특강,1~ http://www.youtube.com/playlist?list=PLr...더 보기











예수여! 나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눅 8:26-39)

2013/09/24 10:37 in 성령행전(피활동,인간극복)

 

예수여! 나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눅 8:26-39)



(눅 8:26, 개역) 『갈릴리 맞은편 거라사인의 땅에 이르러』

(눅 8:27, 개역) 『육지에 내리시매 그 도시 사람으로서 귀신들린 자 하나가 예수를 만나니 이 사람은 오래 옷을 입지 아니하며 집에 거하지도 아니하고 무덤 사이에 거하는 자라』

(눅 8:28, 개역) 『예수를 보고 부르짖으며 그 앞에 엎드리어 큰 소리로 불러 가로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나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당신께 구하노니 나를 괴롭게 마옵소서 하니』

(눅 8:29, 개역) 『이는 예수께서 이미 더러운 귀신을 명하사 이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셨음이라 (귀신이 가끔 이 사람을 붙잡으므로 저가 쇠사슬과 고랑에 매이어 지키웠으되 그 맨 것을 끊고 귀신에게 몰려 광야로 나갔더라)』

(눅 8:30, 개역) 『예수께서 네 이름이 무엇이냐 물으신즉 가로되 군대라 하니 이는 많은 귀신이 들렸음이라』

(눅 8:31, 개역) 『무저갱으로 들어가라 하지 마시기를 간구하더니』

(눅 8:32, 개역) 『마침 거기 많은 돼지 떼가 산에서 먹고 있는지라 귀신들이 그 돼지에게로 들어가게 허하심을 간구하니 이에 허하신대』

(눅 8:33, 개역) 『귀신들이 그 사람에게서 나와 돼지에게로 들어가니 그 떼가 비탈로 내리달아 호수에 들어가 몰사하거늘』

(눅 8:34, 개역) 『치던 자들이 그 된 것을 보고 도망하여 성내와 촌에 고하니』

(눅 8:35, 개역) 『사람들이 그 된 것을 보러 나와서 예수께 이르러 귀신 나간 사람이 옷을 입고 정신이 온전하여 예수의 발 아래 앉은 것을 보고 두려워하거늘』

(눅 8:36, 개역) 『귀신 들렸던 자의 어떻게 구원 받은 것을 본 자들이 저희에게 이르매』

(눅 8:37, 개역) 『거라사인의 땅 근방 모든 백성이 크게 두려워하여 떠나가시기를 구하더라 예수께서 배에 올라 돌아가실새』

(눅 8:38, 개역) 『귀신 나간 사람이 함께 있기를 구하였으나 예수께서 저를 보내시며 가라사대』

(눅 8:39, 개역) 『집으로 돌아가 하나님이 네게 어떻게 큰 일 행하신 것을 일일이 고하라 하시니 저가 가서 예수께서 자기에게 어떻게 큰 일 하신 것을 온 성내에 전파하니라』



푸코 라는 철학자는 24시간 마귀만 생각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런 마귀가 마귀가 맞냐 하는 점입니다.

과연 인간에 의해 규명이 되는 마귀란 있느냐 하는 점입니다.

인간이 무슨 기준으로 마귀라고 규정할수 있을까요?



Posted by 김 대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