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인의 말을 이긴 복음 (행 18:18-28)


(행 18:18, 개역) 『바울은 더 여러 날 유하다가 형제들을 작별하고 배 타고 수리아로 떠나갈새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도 함께 하더라 바울이 일찍 서원이 있으므로 겐그레아에서 머리를 깎았더라』

(행 18:19, 개역) 『에베소에 와서 저희를 거기 머물러 두고 자기는 회당에 들어가서 유대인들과 변론하니』

(행 18:20, 개역) 『여러 사람이 더 오래 있기를 청하되 허락지 아니하고』

(행 18:21, 개역) 『작별하여 가로되 만일 하나님의 뜻이면 너희에게 돌아오리라 하고 배를 타고 에베소를 떠나』

(행 18:22, 개역) 『가이사랴에서 상륙하여 올라가 교회의 안부를 물은 후에 안디옥으로 내려가서』

(행 18:23, 개역) 『얼마 있다가 떠나 갈라디아와 브루기아 땅을 차례로 다니며 모든 제자를 굳게 하니라』

(행 18:24, 개역) 『알렉산드리아에서 난 아볼로라 하는 유대인이 에베소에 이르니 이 사람은 학문이 많고 성경에 능한 자라』

(행 18:25, 개역) 『그가 일찍 주의 도를 배워 열심으로 예수에 관한 것을 자세히 말하며 가르치나 요한의 침례만 알 따름이라』

(행 18:26, 개역) 『그가 회당에서 담대히 말하기를 시작하거늘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듣고 데려다가 하나님의 도를 더 자세히 풀어 이르더라』

(행 18:27, 개역) 『아볼로가 아가야로 건너가고자 하니 형제들이 저를 장려하며 제자들에게 편지하여 영접하라 하였더니 저가 가매 은혜로 말미암아 믿은 자들에게 많은 유익을 주니』

(행 18:28, 개역) 『이는 성경으로써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증거하여 공중 앞에서 유력하게 유대인의 말을 이김일러라』



아덴에서 소피스트와 충돌한 바울은 할 말 다 하고 냅따 고린도로 갑니다.
고린도에서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 냅따 수셔대면서 할 말 다 하고 갑니다.

자극을 받은 고린도 유대인들이 끝까지 따라오면서 훼방을 놓지만

전혀 요동이 없이 바울은 할 말 다 하고, 할 일 다 하고
먼지 털고 갑니다.


이런 바울의 일방적인 행동은
바로 희년완성인 다 이루었다라는 주의 주 되심을 위해
이 땅이 악마의 세상임을 수셔대면서

챙길 것은 다 챙기면서(이방인구원) 약을 바짝 올리듯이
유대인들을 자극하면서 그 소욕을 과시하는 듯 대립시키면서 벌어지는 사건입니다.

그러니 바울이 주체가 아니라

성령이 주체로써 바울은 꼬챙이에 불과한 겁니다.

쇠파리로 사용하시면서 여기 저기 수셔대면서 성령 자신의 소유욕을 드러내시는 성령의 활동이다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는 아볼로가 그 꼬챙이 역할을 합니다.


아볼로가 성령의 꼬챙이로써 활동하게 됩니다.

바울이든 아볼로이든 복음은 이들을 철저하게 소모품으로 사용하면서
전쟁을 곧 소욕을 펼치는 겁니다.

그 정도로 유대인의 사상이 복음에 가장 적대적인 상황에 놓여져 있다는

복음만이 심각하게 인식하고 있다는 겁니다.


오늘날로 치면
이단과 거리를 두고 있는 가장 정통적인 기독교가
가장 복음과의 적대적인 상황에 놓여진 겁니다.

왜냐하면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일단 보이지 않는 것을 추구한다면

기독교 자체가 형성 될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또 무교주의를 추구하라는 것이냐?
아니지요
무교주의 라는 것도 과거에 있었죠
그것도 결국 성령과 무관했지 않았습니까? 내촌감삼이였나요? 하여튼 그런 쪽도 그랬죠.

복음은 보이지 않는 것을, 마치 추상적인 것을
보이도록 하면서 동시에 잠깐 보인 것을 다시 보이지 않도록 하는 겁니다.

보이지 않는 다는 것은 그 정도로 단절되었고
차단 되었다는 접근 불가능성을 말합니다.
불가능이요 불이해 즉 이해 불가 해석불가 납득불가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흔적과 증거가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 흔적과 증거가 보이도록 하는 구실을 하는게 아니라

더더욱 이중적인 차단성과 차이성 단절성 접근불가로 현실화 되는 겁니다.


성령이라는 보이지 않는 분이

분명히 역사적인 사건 속에서 벌어진 그 십자가의 사건을
2000년 전의 시간과 공간으로 한번 벌어진 사건으로 끝내는게 아니라

오히려 무한 반복으로 지금까지 펼쳐지는

불쑥 불쑥 나타났다가 뭔가를 낙아채고 다시 유유히 사라져 보이지 않게 되는
그 사건으로 구체화 된다는 겁니다.


결국 이것은 설명 자체가 불가능 합니다. 대화가 안됩니다.

대화하겠다고 나서게 되면 미쳐 버립니다.


한 쪽은 성령을 받아서 그것이 저절로 믿게 된 겁니다.

다른 한 쪽은 성령을 못 받았기에 믿을려고 너무 너무 애를 쓴다는 겁니다.

인간쪽에서의 믿음이 좋니 마니의 문제가 전혀 없습니다.

성령 쪽에서 일방적으로 쳐들어 왔으니

그 흔적 때문에 거부할수 없는 불가항력적 은혜를 보게 된 겁니다.

즉 은혜를 봤다는 말은 상대적으로 선악적으로 따질수가 없게 되었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런 자가 성령을 받지 않은 자에게 설명을 한다든지

대화를 하게 되면 소통이 되는 것이 아니라

더더욱 단절성을 격게 되는 겁니다.

행함에서 믿음으로 넘어올수가 없습니다. 단절이니 말입니다.


그러니 아쉬운 쪽은 누구냐? 바로 소피스트처럼

다시 한 번만 알려 달라고 부탁을 해도

사도바울은 먼지 털고 휙 가버리듯이나 분명 알려 줬다 나중에 딴 소리 하지 말아라 라고
얼마나 당당하고 뻔뻔하게 먼지 털고 가는 겁니다.


오히려 일자 무식인 자들 즉 상대적으로 저들에게 무시받는 자들

믿음없다고

비거룩한 자들이라고 하는 자들에게

일부러 보란 듯이
몇 개월 동안 함께 머물고
1년 2년? 몇 년을 함께 하면서 일방적인 편파적인 사귐을 보여줍니다.


아니 먼지 털고 1초만에 휙 가버리는 사도바울이

그렇게 바쁘게 후다닥 가더니

정작 보란 듯이 한 이방인에게는 눌러 앉아 함께 지내도 너무 오래 함께 지내는 겁니다.

그렇게 무척이나 바쁘다고 휙 가버리는 바울이 말입니다.


아볼로도 성령을 통해서 그렇게 활용이 됩니다.

그가 비록 그리스도를 증거함에 있어서

세례요한의 안목으로만 증거했지만

세례요한이 유대인과 늘 충돌했듯이

아볼로도 결국은 유대인과의 마찰에 대립된 겁니다.

결국 구약의 참선지자도 신약의 사도들도
최종적으로 충돌할 수 밖에 없는 자들은 유대인들인 겁니다.


왜 그렇게 유대인이 있는 회당만을 골라서
사도바울이 논쟁을 벌리고 충돌을 하면서

왜 자꾸 유대인과의 마찰을 왠지 의도적으로 하는 듯이 보일정도로 충돌하는 것일까요?

우리가 보기에는 오히려 저 철학자들 소피스트들과 제대로 한판 붙으면 뭔가 꼬소한 느낌이 들텐데
아예 1초만에 훌훌털 듯이 가버리고
오로지 유대인에게만 시비걸려고 하듯이 그렇게 바삐 움직이는 겁니까?
솔로몬 이후의 참선지자들의 활동 같아 보입니다.


아볼로가 그런 속성을 보여줍니다.

세례요한의 제자로써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있으니 

똑같은 죽음을 아예 각오한 듯 합니다.


결국 아볼로나 사도바울이나 이들을 죽일 수밖에 없는 자들은 유대인들 뿐입니다.

정치적인 것을 건드릴 이유가 없으니

유대인들만이 이들을 성가시게 느낄 수밖에 없는 겁니다.

아니 바울이 즉 성령께서 먼저 시비를 걸고 있으니 말입니다.


이것은 오로지 성령의 소욕 때문입니다.

십자가를 멈추지 않겠다는 취지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껄끄러운 걸림돌이 된 사건은 한번으로 족합니다.

가마리엘 문하생들인 바리새인이 말했듯이

조심 조심

그러면서 율법과 성전을 고수하는데 매진할수 있도록
새롭게 정비를 하면서 마음을 다잡고 살려고 하고 노력하는 겁니다.


그런데 문제는 자꾸 사도바울과 아볼로라는 성령의 꼬챙이들이

자꾸 이들 유대인들을 자꾸 수셔대고 있으니

긁어대는 그 모때먹은 모습들이, 그 싸가지 없는 모습들이

폭발할 수밖에 없도록 자꾸 시비를 거는 겁니다.


이런식으로 십자가가 작동하는 겁니다.


마치 시아버지 유다에게 귀찮은 존재 며느리 다말처럼

자꾸 자꾸 불의한 모습으로써 들이대며 기여이 불의한 3가지 물증을 획득할려고 달려드는

며느리 다말과 같은 모습처럼 말입니다.


왜? 사도바울 본인도 그렇게 성령으로부터 당해서 은혜를 보게 되었거든요.

그러니 물 불을 가릴 양반이 아닌 거죠.

무조건 들이대는 겁니다.


아볼로?

세례요한이 그에게 본을 보였으니

아예 죽을 각오한 겁니다.

그 세례요한이 쳐다본 세상 죄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을 봤으니

이 양반도 아예 목숨은 내 던진 것입니다.


그러니 이들이 목숨을 건 판국에

유대인들의 그에 대한 반응은 결국 보이는 것들에 대한 사수 보전으로 소극적이 될 수 밖에 없는 겁니다.


유대인의 말을 이겼다고 해서 힘이 세거나권력이 있거나

말빨로써 상대방을 눌러 기를 팍 죽였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처음부터 이긴 복음인데 새삼스럽게 싸워 이길 이유가 없습니다.
유대인의 말을 이겼다는 말은
사랑이 옳았다 라는 겁니다.


시아버지 유다가 며느리 다말 보고

그가 나보다 옳도다 라고 했듯이 말입니다.


아덴 아테네의 소피스트에게 할 말 다 하고 휙 떠나가 버리든
고린도에서 유대인들에게 할 말 다 하고 먼지를 털어서 이방인 유스도 집에 거하든

이것은 사랑이 옳다 라는 의미를 말하는 겁니다.


그럼 유대인의 말은 고로 뭡니까?

사랑이 아니다는 겁니다.

사랑이 없다는 증거가

보이는 것들을 쥐고 놓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약속도 아닌 것들을 쥐고 있는 겁니다.
선택론 구원론 율법 교회라는 성전을 꽉 쥐고서 놓지를 않는 겁니다.


어떤 분이 목사 딸로서 살아와서
교회의 주장이 뭔가를 딱 한 마디로 정리를 했는데

바로 구원이라는 선택을 쥐고 있다는 겁니다.

선민사상이지요.
그게 바로 악마들의 특징이다는 겁니다.


왜 사도바울과 아볼로가 유독 유대인들에게만 시비를 걸 듯이 충돌을 벌리는 겁니까?

일부러? 의도적으로?

아닙니다.
사랑이 덮쳤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사랑이 저들에게는 너무 너무 싫어버린바 되기에

더더욱 걸림돌로써 껄끄러운 거친 돌로 작용케 되니

더더욱 그 충돌이 심화 되는 겁니다.

그러면 멈추면서 숨 좀 쉴수 있는 여유를 바울 쪽에서 보여주는 생각할 틈이라도 있을텐데

아예 요만큼도 양보 없이 그냥 그대로 밀어붙이는 겁니다.

즉 확정적이다는 거죠.
그러니 막무가내로 밀어붙입니다.

숨 쉴 틈도 주지 않습니다.


사랑에 무릎 꿇든지

사랑 아닌 것을 붙잡고 지옥에나 가든지

단판짖자 라는 식으로 밀어붙입니다.


즉 사랑 아닌 것을 붙잡고 있는 꼴을 못 보겠다는 겁니다.

얼마나 다급한지성령만이 심각합니다.


그 죄의 심각성을 성령만이 예민하게 의식합니다.

바울도 아닙니다. 아볼로도 아닙니다.

성령만이 심각합니다.

바울도 아볼로도 성령의 놀라운 탄식이 아니면

얼마든지 옆길로 빠질 수밖에 없는 껍데기일 뿐입니다.

주체는 곧 성령은 그래서 바울과 아볼로는 말랑 말랑하게 만들어서

사용하는 겁니다.

죽어나는 거죠.

유대인들에게 죽어나는게 아닙니다.

바울과 아볼로는 성령에게 죽어나는 겁니다.


그러니 그들은 자기 개인의 인생은 이미 포기한 사적인 영역은 없는 겁니다.


피할수 없으니 아예 즐기는 식으로 갈 뿐이지

저들이 자력으로 믿음이 좋아서가 아닙니다.

그 만큼 용서가 컷기에 즉 자신의 죄가 너무 너무 커서 너무 너무 많이 탕감받았음을 알기에

그냥 성령의 소욕에 내맡겨진 것 뿐인 겁니다.

그정도로 미쁨을 누렸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개인적인 사적인 영역이 있다는 자체가 자신들은 시험이였음을 아니까 말입니다.


그러니 그것을 다 격어본 이들이기에

유대인들에게 조금의 양보가 허용되지 않는 겁니다.


이들은 유대인의 말이 뭔지를 잘 알고 있습니다.


바로 선민사상입니다.


오늘날로 치면 구원입니다.


그거 확 찢어버립니다.

확 찢어봐도

안 찢어지는 사랑이 있기에

오히려 더 당당하고 뻔뻔스럽고 싸가지 없게 확 찢어 버리는 겁니다.


진짜 진짜 개방이라면

찢어보자 라는 겁니다.


성전의 헐라 내가 3일 만에 다시 세우리라


허물어 보자 라는 겁니다.


그리고 그 사랑이 옳다면

그 3일이라는 간격을 남겨야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안 찢을려고 합니다.


할례를 하지 않을려고 합니다.

손할례만 했으니 선민이 맞다고 우길 뿐입니다.


손할례가 구약에서 이방인과의 차이성 구별 즉 단절성을 보여줬듯이

이제 그 단절의 단절 

단절의 이중성을 보여주는

마음판의 할례를 해도 무방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손할례를 했기에 마음판의 할례를 때려죽어도 하지 않겠다는 겁니다.


자 이러니 오히려 악마들이 된 겁니다.

차라리 손할례를 하지 않는 비거룩한 자였다면

거룩케 해 달라고 고쳐달라고 했을텐데


이미 거룩하다고 여기니본다고 하니 고칠 이유가 없는 겁니다.


자 이런 취지로 아볼로와 사도바울은 성령을 통해서

유대인에게 더더룩 시비를 불러일으키는 일만 골라 골라 하게끔 보이도록 하시는 겁니다.


즉 소유욕입니다.


악마의 소유욕이 유대인들을 장악했다는 겁니다.

그 육의 소욕을 볼 수 있는 분은 성령 밖에 없기에

이 성령께서 자신의 소욕을 사도바울과 아볼로를 통해서 펼치고 있는 겁니다.


보호자 싸움에 장기알로써 배치되는 겁니다.


이미 게임의 결과는 확정 되었습니다.

십자가가 이겼습니다.


사랑이 넉넉히 이겼습니다.

이겼다는 증거가 죽는 겁니다.


죽는 것이 이긴 증거이다는 겁니다.


왜 도살장이 끌려가도 넉넉히 이겼다고

사랑이 끊어지지 않았다는 증거로 죽음이라는 도살장에 끌려감이 그 증거라고 할까요?


사랑을 봐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사도바울과 아볼로의 유대인과의 충돌은 새삼스럽게 싸울려고 이길려고

그래서 힘겹게 싸워 이기는게 아니라


이미 통보하는 것 뿐입니다.


너희 유대인들아

너희의 주인인 악마가 졌단다 라고

통보하고 돌아다니는 겁니다.

그러니 얼마나 바쁩니까?

너희들은 이미 끝났다

십자가가 이겼거든

빨리 빨리 항복해라 라고

종말성을 외치는데


정작 사망권세를 이긴 십자가의 활동상황을 못 본

즉 져서 패배한 악마로부터 그 어떤 소통도 없이 고립이 되어버린 유대인들은
자력으로만 버티고 버티고 있는 겁니다.


마치 2차대전 태평양 전쟁에서 일본은 이미 항복을 했는데
그 패전병들이 끝까지 항거하면서 어차피 죽은 목숨 버티겠다고

섬 구석 구석에 굴을 파서 반항하는 일본군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막상 눈으로 보이고 해석 가능한 방식의 모습들은 오히려 정반대로 보이는 거죠.

아볼로나 사도바울은 딸랑 한 명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이미 다수입니다.


그러니 항복하라 너희 주인은 패 했다고 외쳐 본들

유대인들이 비웃는 것은 당연한 겁니다.


이것을 소위 미끼 상품이라고 하는데

항복하라 라고 하고서는

도저히 항복할 수 있는 근거를 주님 쪽에서 마련해 주지 않는 겁니다.


그렇다고 주님이 아쉬울게 있습니까?

지난 시간에도 말했지요

이것이 개그콘서트의 개그의 어떤 한 기법이라고
정작 비웃어야 할 자는 바울 쪽이요 아볼로 쪽인 성령의 쪽인데

성령은 탄식을 하고 있고

두려워 해야 하고 벌벌 떨어야 할 쪽은 유대인들 쪽인데
오히려 적반하장으로 비웃고 있는 겁니다.


이게 걸려든 겁니다.


미끼인 사도바울을 덮썩 무는 것이

이방인들 쪽에서 물게 되지만


정작 이들이 사도바울에게 덮썩 물리는 꼴인 겁니다.


왜? 이미 보호자 싸움은 끝났거든요.


그러면 잔상을 제거하는데 있어서 섬에 고립이 되어 쫄쫄 굶고 있는 유대인들에게

정작 미끼로 던져지는 사도바울이나 아볼로를

유대인들이 덮썩 물게 되지만

그렇게 나옴으로써 화염방사기에 활활 불태움을 당하게 되는 겁니다.


물론 눈에 보이는 시간과 공간 즉 역사에서는 반대입니다.

사도바울이 매 맞고 죽었다 싶어 그 시체를 쓰레기 장에 버리면

그 다음날 또 벌떡 일어나 또 덤뎌들고 있으니


뭘 믿고 저렇게 악바리처럼 달려드냐 말이지요?

딸랑 혼자서?


오히려 더 큰소리칩니다.

자신의 등 뒤에는 천군천사가 있으니

빨랑 항복하라고?


비웃죠 비웃어


딸랑 300명 몰고가서 기드온의 칼이여 하고 있으니?


여리고성 군사들이 비웃는 겁니다.


즉 비웃었다는 자체가 이미 진 겁니다.


보이는 것에 보이는 대로 말려들었다는 겁니다.


딸랑 환 명이여야만 비웃을 수 밖에 없고
그들 스스로가 당연히 이긴 전쟁이라고 여길 수밖에 없도록 하는 겁니다.


이것이 십자가라는 어리석은 지혜의 방식입니다.


이 방식 그대로 지금도 성령께서는 이 어리석은 방식을 고집하면서

십자가를 오늘날도 똑같이 들이대고 있습니다.

선민사상이 가득할수록

악마들이 빠글 빠글한 겁니다.


오늘 본문은 다음 장에 사도바울과 만남을 가지게 되는 아볼로 이야기이지만

정작 그 아볼로 또한

이런 성령의 소욕에 의해서주 예수 그리스도의 주 되심에

군사로써 동원이 되어 활용이 되는 겁니다.


비록 세례요한이 본 그리스도의 안목까지 가진 것 밖에 없지만
성령의 소욕에 의해 그는 사도들로부터 배워 그리스도에 대해 다 알게 됩니다.
문제는 주님께서 그를 사용하시고 놓치지 않았다는 겁니다.


12제자들 또한 성령 이후에 그 어떤 접촉점이 없이
오로지 성령의 단독적인 숙제로만 사도로써 예수님의 죽으심과 다시사심에 대해 증거하게 되었지


그 어떤 접촉점을 가질수가 없었습니다.

오히려 그거 가진 것 다 털털 털려버린 겁니다.

누구에게?

예수님에게 다 털린 겁니다.


내가 예수님의 제자 중에 수제자이니까 나는 당연히 구원받을 거야?


바로 이런 유대인의 말, 언어, 언어는 결국 자신을 세뇌시킨 겁니다.

언어 자체가 허구입니다. 그 허구로 자신의 몸을 칭칭 감았던 겁니다.
인간이 언어를 다루는게 아니라, 언어가 인간을 다루는 겁니다. 라캉이 한 말이지요.


그러나 수제자 베드로는 십자가에 죽으시러 가시는 예수님으로부터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뜨리는 자다 라는 말씀으로 인해


접촉점을 커녕

구원이라는 선민 선택은커녕


제대로 된 단절성(할례)을 격게 됩니다.
이 뿐 아닙니다. 참으로 잔인하고 잔혹한 사랑입니다.

도저히 평생을 씻을 수 없는
너는 닭 울기 전에 세 번 나를 부인할 것이다 라는 언어가 아닌 말씀이
더더욱 그 단절의 간격을 확 벌려 버리는 겁니다.

언어로 베드로는 다짐을 하나, 말씀은 그 다짐을 무참히 짖 밟아 버리는 겁니다.
언어로는 말씀을 못 넘어섭니다. 행함은 믿음을 못 넘어서는 단절성만 죽음만 격어야 합니다.
그래서 말씀 되신 예수님은 십자가의 저주로 대신 저주 받기 위해 가시는 겁니다,
소통입니까? 아니지요. 더더욱 단절시키기 위해서 말입니다.


이제 베드로는 솔직해 집니다. 도망치는 것 뿐입니다.


그렇게 좁히고 좁혀서 간격이 없도록 일심동체로 만들었다고 자부했건만

절대로 가시면 안됩니다. 남들은 몰라도 저는 때려죽어도 예수님을 버리지 않겠습니다 라고
자부하고 자부했건만

그런 언어로 자신을 늘 되내이면서 언어로, 자기말로 최면을 걸었겄만
그 환상을 무참히 찢겨져야만 했던 겁니다.

오히려 그것이 좁히기는커녕 한없이 벌어지게 되는 사건이 될 줄이야?
좋은 의도가 오히려 큰 벌을 받는 것이라고

아버지를 죽인 범인 잡겠다고
가난한자의 딸같이 여기는 양을 빼앗아 손님에게 바친 그 나쁜놈을 잡겠다는 그 좋은 의도

곧 율법을 지키겠다는 그 확고한 마음이


바로 너가 아버지를 죽인 범인이요 라고
나단선지자는 그 나쁜놈이 바로 너다 라고 다윗 너가 하나님의 원수야 라고 외치는 겁니다.

그 어떤 접촉점이 없도록 탈탈탈 털려버린 상태에서
예수님 홀로 십자가에서 사망권세를 이기시고

사망을 타넘고, 악마를 타넘고, 바리새인(유대인)을 타넘어서
그 세가지 물증을 가지고서
베드로에게 다가오시는 겁니다.

베드로가 타넘어서 예수님께 가야할 하등의 이유가 없습니다.

사랑은 그 반대로입니다. 간격을 벌리는 겁니다.


사망도 못이기지요, 악마도 못 타넘지요, 바리새인도 못 타넘습니다.


아나 닭이 너를 위해 울어줘야할 판국이다 라고 무시를 해도 너무 너무 무시를 합니다.

그렇게 무시를 받아야

예수님께서 넘어오시는 그 3일이라는 간격(단절)을 무시하지 않게 되기에

그 3가지 부정한 물증을 비웃지 않게 하기에
나의 믿음이 아니라

나의 사랑이 아니라

나의 행함이 아니라

나의 당당함이 아니라


주님의 믿음으로주님의 사랑으로 주님의 행하심으로주님의 당당함 때문에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라는 그 물음에

창조주의 물음에 피조물로써
생명의 피가 묻는 물음에 원수된 죄인으로써 비로소 참으로 뻔뻔스럽게 대답합니다.


와카십니까?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께서 더 잘 아시지 않습니까? 하모요!


바로 이 마음판의 할례인 십자가가 벌린 사랑을


유대인의 말, 언어, 사상은 이 걸림돌을 무시하고 비웃고
거부하는 겁니다.

그 정도로 추호도 모를 정도로 선민사상이라는 악마의 꾀임에 빠진 겁니다.

그러니 주님께서 건지시는 방법은 어리석은 십자가의 지혜 밖에 없는 겁니다.

이 사도바울과 아볼로의 모습을 보세요

완전 미쳤습니다.


즉 그 정도로 유대인들의 상황이 심각하다는 겁니다.


괜히 미친게 아닙니다


오늘날도 이 상황과 똑같습니다.


누가 선택론과 구원론에 빠져 있습니까?

그거 다 악마사상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만 선택했고 예수님만 구원하십니다.

바로 이것 때문에 우리의 구원이 다 깨지고
우리의 선택이 다 날라갔다는 것을 기뻐해야 합니다.


예수님만 건짐 받았으면 된 겁니다.


더 이상 뭐를 바라겠습니까?


그러면 더 이상 사수할 것도 없고 보존할 것도 없습니다.


교회를 왜 사수 합니까?


오히려 헐어버려야 할 판국인데?


예수님의 3일만에 다시 세워지는 예수님의 몸을 보기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가인이 제사를 안 드려서 살인자가 된게 아닙니다.

오히려 제사를 드렸기 때문에 살인자가 될 수 밖에 없습니다.


더 나은 제사 때문에 미쳐 돌아버리거든요.


즉 성전이 있는게 오히려 예수님을 죽일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이 일방적으로 자신의 몸이 3일 만에 다시 세워지는 것을 막았다고 일방적으로 선언하기 때문에
성전이 있다는 것이 오히려 저주가 된 겁니다.


우와 이거 제가 무서운 발언을 한 거죠?

교회가 있다는 것이 오히려 지옥에 갈려고 환장한 지름길을 찾고 있는 셈이다 라고 말하고 있으니 원 !!!


교회가 인간의 소욕이 된 겁니다.

구원이 인간의 소욕이 된 겁니다.

선택이 인간의 소욕이 된 겁니다.


결국 성령의 소욕은 그 반대입니다. 짤라버리고 단절시키고 간격을 벌리는 겁니다. 이것을 거룩 곧 차이두기입니다. 거리두기입니다.

성령의 전으로써 성령이 인간을 소욕해야 합니다.
인간은 성령에게 소욕 당해야 합니다.
인간이 구원에게 소욕 당해야 합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다가가는 사랑을 짤라버리는 겁니다.
단절시켜버리고 냉혹하게 사탄아 라고 해야 합니다.

왜? 구원자가 베드로를 소유하기 위해서

닭으로부터 3번의 울음이라는 간격을, 단절을 맛보게끔 당해야 한다는 겁니다.

인간이 약속을 선택하는게 아니라,
약속이 인간을 선택하도록 좀 내버려 두라는 겁니다.

아무것도 한 것이 말입니다.


그런데 유대인의 말 즉 오늘날로 치면 목사의 말은

그렇게 되면 교회가 안 돌아 간다고 합니다.

개판이 된다고 합니다.

다 세뇌 당하는 겁니다.


왜 아볼로를 통해서 이 말씀을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겁니까?


이미 패배한 유대인의 말은 거짓이요 우상의 말이요
우상 곧 약속이 아니다는 겁니다.


약속이 이미 밝히 보이는데

밝히 승리했는데


왜 그 따위 모호한 소리에의문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느냐 라는 겁니다.
베드로에게 닭이 울지 않고
예수님을 세 번식이나 부인하지 않았다고 쳐 보세요


과연 베드로가 모세처럼 변화산에 나타나서

주여 제발 좀 죽어주세요 별세해 주세요

나의 죄가 이렇게 심각합니다 라고 모세처럼 외칠수 있을까요?


나 세 번 씩이나 주님을 부인한 적이 없다고
천국에서 잘난체 할 것 아닙니까?


그런 놈들을 미리 짤라내시는 방식입니다.


오늘날도 유대인의 말이 허다하게 널려져 있습니다.

목사들이 대부분이 이 유대인의 말과 같은 소리를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오히려 주님의 말씀이 제대로 일하신다는 증거입니다.

유대인의 말은 운동력이 없습니다.
고립되어 섬의 굴 속에 갇혀
자기나라가 패배한 줄도 모르고
끝까지 총칼을 놓지 못하고 섬 밖으로 나올수 없는
이미 섬 자체가 감옥인데 그 감옥에 다시 굴까지 파서 이중감옥에서 벌벌 떨고 있습니다.

항복하면 그 섬은 휴양지 천국일텐데
우찌 같은 섬인데도 불구하고 이렇게 다를까요?
이들 2차대전의 일본군만의 문제입니까?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유대인의 말은 운동력도 없고, 무뎌빠진 무씨도 하나 짤라낼수 없는, 날이 다 빠진 검일 뿐입니다.

예리하게 찔러 쪼개지를 못합니다.

그런 판국에 혼 과 영과 관절 골수를 쪼개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할수 있겠습니까?

유대인의 말은 그냥 서로 서로 좋은게 좋은거다 라고 두리뭉실하게 말하지만 약속은 그럴수 없습니다.
율법을 지키는 우리 둘만 좋은것이여 라고 자기들끼리 어깨동무하고 있습니다.

그 꼴 못 봅니다.

그런 모호한 것들을 다 쪼개버립니다. 단절시켜 버립니다. 쪼개어서 갈라놓습니다.
마음판도 못 쪼깨는데 무슨 할례입니까? 뭐 할례를 지켰으니 아브라함 자손이라고?
돌삐로도 아브라함 자손 만들겠다. 세례요한이 그 꼴을 못 봤습니다.


손할례 했다고 쳐주지 않습니다.
나를 제대로 지옥 보낼줄 모르는 두리뭉실한 예수는 가짜입니다.

베드로는 제대로 버림받았기에 건짐을 받은 겁니다.

자기 쪽에서 그 어떤 접촉점도 통하지 않는 그 단절의 단절성을 격었기에
예수님의 찾아오심이 눈에 보인 겁니다.


(히 4:12, 개역)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약속도 못지키는 유대인의 말이 오히려 온세상을 다 뒤덮혀 있을 지라도

십자가의 넉넉한 사랑은 더 명료하고 또렷합니다.

그래서 주님의 그 간격벌리기 거리두기 그 단절성을 냉혹하게 펼치지 않는다면

우리는 유대인의 말에서 벗어날수가 없을 겁니다.

철저하게 버리시는 그 버림만이, 그 단절만이, 그 간격만이, 그 십자가 만이 유일한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왜 미친 듯이 아볼로가 죽을 각오하고 세례요한처럼 목 베일려고 작정한 듯이

재촉하면서 달려드는 것입니까?

명료한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데? 왜 흐리멍텅한 모호한 의문의 것들이 꼬시느냐 라고 말이지요.


성령의 소욕 때문입니다.

도저히 눈 뜨고 못 보겠다고 탄식하시며 닭처럼 우시는 그 울음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눈물입니다.








































나중에 딴소리 카기 없기다, 먼지 털기 (행 18:1-17)

2013/09/25 10:27 in 성령행전(피활동,인간극복)

 

나중에 딴소리 카기 없기다, 먼지 털기 (행 18:1-17)


잠시만요! 바울 오빠, 먼지 털고 가실께요!!


율법이냐 vs 그리스도냐 (율법 외에 한 의 냐?)



(행 18:1, 개역) 『이 후에 바울이 아덴을 떠나 고린도에 이르러』

(행 18:2, 개역) 『아굴라라 하는 본도에서 난 유대인 하나를 만나니 글라우디오가 모든 유대인을 명하여 로마에서 떠나라 한 고로 그가 그 아내 브리스길라와 함께 이달리야로부터 새로 온지라 바울이 그들에게 가매』

(행 18:3, 개역) 『업이 같으므로 함께 거하여 일을 하니 그 업은 장막을 만드는 것이더라』

(행 18:4, 개역) 『안식일마다 바울이 회당에서 강론하고 유대인과 헬라인을 권면하니라』

(행 18:5, 개역) 『실라와 디모데가 마게도냐로서 내려오매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유대인들에게 예수는 그리스도라 밝히 증거하니』

(행 18:6, 개역) 『저희가 대적하여 훼방하거늘 바울이 옷을 떨어 가로되 너희 피가 너희 머리로 돌아갈 것이요 나는 깨끗하니라 이 후에는 이방인에게로 가리라 하고』

(행 18:7, 개역) 『거기서 옮겨 하나님을 공경하는 디도 유스도라 하는 사람의 집에 들어가니 그 집이 회당 옆이라』

(행 18:8, 개역) 『또 회당장 그리스보가 온 집으로 더불어 주를 믿으며 수다한 고린도 사람도 듣고 믿어 침례를 받더라』

(행 18:9, 개역) 『밤에 주께서 환상 가운데 바울에게 말씀하시되 두려워하지 말며 잠잠하지 말고 말하라』

(행 18:10, 개역)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아무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 하시더라』

(행 18:11, 개역) 『일 년 육 개월을 유하며 그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니라』

(행 18:12, 개역) 『갈리오가 아가야 총독 되었을 때에 유대인이 일제히 일어나 바울을 대적하여 재판 자리로 데리고 와서』

(행 18:13, 개역) 『말하되 이 사람이 율법을 어기어 하나님을 공경하라고 사람들을 권한다 하거늘』

(행 18:14, 개역) 『바울이 입을 열고자 할 때에 갈리오가 유대인들에게 이르되 너희 유대인들아 만일 무슨 부정한 일이나 괴악한 행동이었으면 내가 너희 말을 들어주는 것이 가하거니와』

(행 18:15, 개역) 『만일 문제가 언어와 명칭과 너희 법에 관한 것이면 너희가 스스로 처리하라 나는 이러한 일에 재판장 되기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고』

(행 18:16, 개역) 『저희를 재판 자리에서 쫓아내니』

(행 18:17, 개역) 『모든 사람이 회당장 소스데네를 잡아 재판 자리 앞에서 때리되 갈리오가 이 일을 상관치 아니하니라』



지젝의 책에 이런 문구가 있습니다.


법이란 위반하라고 세워지는 것이 법이다 라고 말이죠.


처음부터 위반을 목적으로 해서 세워지는 것이 법이다는 것이다 라고 합니다.


인간이 왜 법을 사랑하는고 하니

그 법이 자기를 위한 하나의 보호막으로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유대인들처럼 법에 하나님까지 합쳐 보세요.

첨상첨화가 되는 겁니다.

때려죽어도 유대인을 위한 하나님이다는 겁니다.


문제는 그 유대인이 유대인 맞기는 맞냐 라는 거죠? 

졸지에 절대로 변할수 없는 불변성이

예수님 때문에 박살 해체가 됩니

Posted by 김 대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