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하에 퍼진 유대인을 소요케 하는 복음(행 23-24장)


(행 23:1, 개역) 『바울이 공회를 주목하여 가로되 여러분 형제들아 오늘날까지 내가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노라 하거늘』

(행 23:2, 개역) 『대제사장 아나니아가 바울 곁에 섰는 사람들에게 그 입을 치라 명하니』

(행 23:3, 개역) 『바울이 가로되 회칠한 담이여 하나님이 너를 치시리로다 네가 나를 율법대로 판단한다고 앉아서 율법을 어기고 나를 치라 하느냐 하니』

(행 23:4, 개역) 『곁에 선 사람들이 말하되 하나님의 대제사장을 네가 욕하느냐』

(행 23:5, 개역) 『바울이 가로되 형제들아 나는 그가 대제사장인 줄 알지 못하였노라 기록하였으되 너희 백성의 관원을 비방치 말라 하였느니라 하더라』

(행 23:6, 개역) 『바울이 그 한 부분은 사두개인이요 한 부분은 바리새인인 줄 알고 공회에서 외쳐 가로되 여러분 형제들아 나는 바리새인이요 또 바리새인의 아들이라 죽은 자의 소망 곧 부활을 인하여 내가 심문을 받노라』

(행 23:7, 개역) 『그 말을 한즉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사이에 다툼이 생겨 무리가 나누이니』

(행 23:8, 개역) 『이는 사두개인은 부활도 없고 천사도 없고 영도 없다 하고 바리새인은 다 있다 함이라』

(행 23:9, 개역) 『크게 훤화가 일어날새 바리새인 편에서 몇 서기관이 일어나 다투어 가로되 우리가 이 사람을 보매 악한 것이 없도다 혹 영이나 혹 천사가 저더러 말하였으면 어찌 하겠느뇨 하여』

(행 23:10, 개역) 『큰 분쟁이 생기니 천부장이 바울이 저희에게 찢겨질까 하여 군사를 명하여 내려가 무리 가운데서 빼앗아 가지고 영문으로 들어가라 하니라』

(행 23:11, 개역) 『그 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거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거하여야 하리라 하시니라』

(행 23:12, 개역) 『날이 새매 유대인들이 당을 지어 맹세하되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먹지도 아니하고 마시지도 아니하겠다 하고』

(행 23:13, 개역) 『이같이 동맹한 자가 사십여 명이더라』

(행 23:14, 개역)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가서 말하되 우리가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아무 것도 먹지 않기로 굳게 맹세하였으니』

(행 23:15, 개역) 『이제 너희는 그의 사실을 더 자세히 알아볼 양으로 공회와 함께 천부장에게 청하여 바울을 너희에게로 데리고 내려오게 하라 우리는 그가 가까이 오기 전에 죽이기로 준비하였노라 하더니』

(행 23:16, 개역) 『바울의 생질이 그들이 매복하여 있다 함을 듣고 와서 영문에 들어가 바울에게 고한지라』

(행 23:17, 개역) 『바울이 한 백부장을 청하여 가로되 이 청년을 천부장에게로 인도하라 그에게 무슨 할 말이 있다 하니』

(행 23:18, 개역) 『천부장에게로 데리고 가서 가로되 죄수 바울이 나를 불러 이 청년이 당신께 할 말이 있다 하여 데리고 가기를 청하더이다 하매』

(행 23:19, 개역) 『천부장이 그 손을 잡고 물러가서 종용히 묻되 내게 할 말이 무엇이냐』

(행 23:20, 개역) 『대답하되 유대인들이 공모하기를 저희들이 바울에 대하여 더 자세한 것을 묻기 위함이라 하고 내일 그를 데리고 공회로 내려오기를 당신께 청하자 하였으니』

(행 23:21, 개역) 『당신은 저희 청함을 좇지 마옵소서 저희 중에서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기로 맹세한 자 사십여 명이 그를 죽이려고 숨어서 지금 다 준비하고 당신의 허락만 기다리나이다 하매』

(행 23:22, 개역) 『이에 천부장이 청년을 보내며 경계하되 이 일을 내게 고하였다고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고』

(행 23:23, 개역) 『백부장 둘을 불러 이르되 밤 제 삼 시에 가이사랴까지 갈 보병 이백 명과 마병 칠십 명과 창군 이백 명을 준비하라 하고』

(행 23:24, 개역) 『또 바울을 태워 총독 벨릭스에게로 무사히 보내기 위하여 짐승을 준비하라 명하며』

(행 23:25, 개역) 『또 이 아래와 같이 편지하니 일렀으되』

(행 23:26, 개역) 『글라우디오 루시아는 총독 벨릭스 각하에게 문안하노이다』

(행 23:27, 개역) 『이 사람이 유대인들에게 잡혀 죽게 된 것을 내가 로마 사람인 줄 들어 알고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구원하여다가』

(행 23:28, 개역) 『유대인들이 무슨 일로 그를 송사하는지 알고자 하여 저희 공회로 데리고 내려갔더니』

(행 23:29, 개역) 『송사하는 것이 저희 율법 문제에 관한 것뿐이요 한 가지도 죽이거나 결박할 사건이 없음을 발견하였나이다』

(행 23:30, 개역) 『그러나 이 사람을 해하려는 간계가 있다고 누가 내게 알게 하기로 곧 당신께로 보내며 또 송사하는 사람들도 당신 앞에서 그를 대하여 말하라 하였나이다 하였더라』

(행 23:31, 개역) 『보병이 명을 받은 대로 밤에 바울을 데리고 안디바드리에 이르러』

(행 23:32, 개역) 『이튿날 마병으로 바울을 호송하게 하고 영문으로 돌아가니라』

(행 23:33, 개역) 『저희가 가이사랴에 들어가서 편지를 총독에게 드리고 바울을 그 앞에 세우니』

(행 23:34, 개역) 『총독이 읽고 바울더러 어느 영지 사람이냐 물어 길리기아 사람인 줄 알고』

(행 23:35, 개역) 『가로되 너를 송사하는 사람들이 오거든 네 말을 들으리라 하고 헤롯 궁에 그를 지키라 명하니라』


(행 24:1, 개역) 『닷새 후에 대제사장 아나니아가 어떤 장로들과 한 변사 더둘로와 함께 내려와서 총독 앞에서 바울을 고소하니라』

(행 24:2, 개역) 『바울을 부르매 더둘로가 송사하여 가로되』

(행 24:3, 개역) 『벨릭스 각하여 우리가 당신을 힘입어 태평을 누리고 또 이 민족이 당신의 선견을 인하여 여러 가지로 개량된 것을 우리가 어느 모양으로나 어느 곳에서나 감사무지하옵나이다』

(행 24:4, 개역) 『당신을 더 괴롭게 아니하려 하여 우리가 대강 여짜옵나니 관용하여 들으시기를 원하나이다』

(행 24:5, 개역) 『우리가 보니 이 사람은 염병이라 천하에 퍼진 유대인을 다 소요케 하는 자요 나사렛 이단의 괴수라』

(행 24:6, 개역) 『저가 또 성전을 더럽게 하려 하므로 우리가 잡았사오니』

(행 24:7, 개역) 『당신이 친히 그를 심문하시면』

(행 24:8, 개역) 『우리의 송사하는 이 모든 일을 아실 수 있나이다 하니』

(행 24:9, 개역) 『유대인들도 이에 참가하여 이 말이 옳다 주장하니라』

(행 24:10, 개역) 『총독이 바울에게 머리로 표시하여 말하라 하니 그가 대답하되 당신이 여러 해 전부터 이 민족의 재판장 된 것을 내가 알고 내 사건에 대하여 기쁘게 변명하나이다』

(행 24:11, 개역) 『당신이 아실 수 있는 바와 같이 내가 예루살렘에 예배하러 올라간 지 열이틀밖에 못되었고』

(행 24:12, 개역) 『저희는 내가 성전에서 아무와 변론하는 것이나 회당과 또는 성중에서 무리를 소동케 하는 것을 보지 못하였으니』

(행 24:13, 개역) 『이제 나를 송사하는 모든 일에 대하여 저희가 능히 당신 앞에 내세울 것이 없나이다』

(행 24:14, 개역) 『그러나 이것을 당신께 고백하리이다 나는 저희가 이단이라 하는 도를 좇아 조상의 하나님을 섬기고 율법과 및 선지자들의 글에 기록된 것을 다 믿으며』

(행 24:15, 개역) 『저희의 기다리는 바 하나님께 향한 소망을 나도 가졌으니 곧 의인과 악인의 부활이 있으리라 함이라』

(행 24:16, 개역) 『이것을 인하여 나도 하나님과 사람을 대하여 항상 양심에 거리낌이 없기를 힘쓰노라』

(행 24:17, 개역) 『여러 해 만에 내가 내 민족을 구제할 것과 제물을 가지고 와서』

(행 24:18, 개역) 『드리는 중에 내가 결례를 행하였고 모임도 없고 소동도 없이 성전에 있는 것을 저희가 보았나이다 그러나 아시아로부터 온 어떤 유대인들이 있었으니』

(행 24:19, 개역) 『저희가 만일 나를 반대할 사건이 있으면 마땅히 당신 앞에 와서 송사하였을 것이요』

(행 24:20, 개역) 『그렇지 않으면 이 사람들이 내가 공회 앞에 섰을 때에 무슨 옳지 않은 것을 보았는가 말하라 하소서』

(행 24:21, 개역) 『오직 내가 저희 가운데 서서 외치기를 내가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하여 오늘 너희 앞에 심문을 받는다고 한 이 한 소리가 있을 따름이니이다 하니』

(행 24:22, 개역) 『벨릭스가 이 도에 관한 것을 더 자세히 아는고로 연기하여 가로되 천부장 루시아가 내려오거든 너희 일을 처결하리라 하고』

(행 24:23, 개역) 『백부장을 명하여 바울을 지키되 자유를 주며 친구 중 아무나 수종하는 것을 금치 말라 하니라』

(행 24:24, 개역) 『수일 후에 벨릭스가 그 아내 유대 여자 드루실라와 함께 와서 바울을 불러 그리스도 예수 믿는 도를 듣거늘』

(행 24:25, 개역) 『바울이 의와 절제와 장차 오는 심판을 강론하니 벨릭스가 두려워하여 대답하되 시방은 가라 내가 틈이 있으면 너를 부르리라 하고』

(행 24:26, 개역) 『동시에 또 바울에게서 돈을 받을까 바라는 고로 더 자주 불러 같이 이야기하더라』

(행 24:27, 개역) 『이태를 지내서 보르기오 베스도가 벨릭스의 소임을 대신하니 벨릭스가 유대인의 마음을 얻고자 하여 바울을 구류하여 두니라』



천하에 퍼진 유대인을 소요케 하는 복음이다면
오늘날로 치면 전세계에 퍼져 있는 기독교를 소요케 하는 복음이다는 겁니다.
그런 기독교에 이단의 괴수라는 소리를 듣지 못하는 복음은 복음도 아닌 셈입니다.

바울은 자신을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이라고 합니다.

바리새인의 아들이라고 합니다.


(행 23:6, 개역) 『바울이 그 한 부분은 사두개인이요 한 부분은 바리새인인 줄 알고 공회에서 외쳐 가로되 여러분 형제들아 나는 바리새인이요 또 바리새인의 아들이라 죽은 자의 소망 곧 부활을 인하여 내가 심문을 받노라』

(행 23:7, 개역) 『그 말을 한즉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사이에 다툼이 생겨 무리가 나누이니』


이 말은 사실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소요케 하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지금 유대인들이 복음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관심을 두는게 아니라

오히려 곁으로는 가장 그렇게 표출하고자

정작 더욱더 숨기는 것을
지금 바울의 우발적인 표현으로 더욱더 들통나도록 한 겁니다.

그 들통남이 바로 자신들의 바리새인 됨 사두개인이 됨입니다.


이것은 다른 파 보다 내가 속한 파와 교단이 더욱더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수행한다는
스스로의 외설적인 법체제를 갖추는 겁니다.


그 사이에 바울이 낑겨서  나도 바리새인인데?

나도 사두개인인데? 라고 하니


이 바울이라는 바리새인을 깨뜨리면 스스로를 무너뜨리는 짖이 되는 겁니다.
누워서 침뱉기죠.


이것이 바로 법과 법 사이의 틈에 낑겨서 그 법을 허물어버리는 방식입니다.

주님께서 이런 바울 죽이기를 통해서 이런 숨겨진 속성을 드러내시는 겁니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이 사도바울을 잡아 죽이고자 하는데

바울의 관심사는 죽이든 말든 그것에는 관심이 없고
또 아무리 말려도 예루살렘으로 향한 이유이기도 하구요

어찌하던지 간에 기회가 닿으면 복음을 증거하는데만 관심을 두는 겁니다.


지금 이 상황은 누구보다 사도바울 자신이 잘 알고 있는 겁니다.

왜냐?


예수님을 죽이고자 했던 그 법정의 모든 행정 사무 관할을 바울 본인이 총 지휘지도를 했기에
왜 저들이 이런 반응을 일으키는지를 바울 본인이 잘 알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오해를 하든 말든 관심이 없습니다.

어찌하든지 간에 기회가 오면 복음을 외치는데만 신경을 쓰는 겁니다.


그런 우연적인 복음이

필연성을 주장하는 그 딱딱한 돌 사이의 틈에

졸지에 다이나마이트 같은 바울이 심겨져서 폭발할 수 밖에 없도록

그 사이에 낑기게 되는 겁니다.


나 로마 시민을 돈 주고 산 너 보다 태어날때부터 로마시민권을 갖고 태어났어

나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이야

나 사두개인이기도 해


이런 세상 사람들이 열심히 돈이라는 전재산을 바쳐서라도 갖추고자 했던 그런 조건들을

다 갖추고서


심지어 하늘에 속한 시민권 조차도 갖추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말도 안되는 이 상황에 전혀 낑길 필요가 전혀 없음에도 불구하고

우발적으로 낑겨서

의도적으로 빠져나올 생각 조차도 안하고

그저 복음을 전할 기회로만

복음을 외치는데만 신경을 쓰고 있는 겁니다.


로마시민권

바리새인

사두개인

심지어 마귀도 인정하는 예수님 나라 시민권을 가진자


누구보다 그 조건을 남용할 수 있을 정도로 자유롭게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들의 경계선에서 그런 조건을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그 경계선을 들락날락 하면서

저들의 불편한 심기를 건드리는 복음을 외치는 기회로만

모든 자유를 포기하고 있는 겁니다.

의도적인 포기가 아니라


복음을 외치는데 신경을 쓰다 보니 

저들이 주장하는 그런 조건에

나도 그런 조건이 있지만

그런거 소용이 없고

진짜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죽음인 십자가다 라고

자꾸 심판 곧 예수님의 죽음을 깔아버리는데 있어서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기고 있다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뭔가 대단한 조건인냥 소욕으로 간직하던

로마 시민권

바리새인

사두개인이라는 것이


예수님의 죽음 앞에서는 부도맞은 수표에 지나지 않는 겁니다.


그러니 제발 부도 맞으라고, 쫄딱 망해버려라고,


심판을 까는데 정신 팔려 있는 겁니다.


저는 이 상황을 보면서 남의 일이 아니긴 하지만

왠지 너무 너무 웃겼습니다.


지금 심판의 불을 먼저 예고하는 식으로

바울이라는 부지깽이, 불 쏘시개(선발대)로 앞서 보내고 있는데


사람들은 그 임박한 심판 보다는

왜 나에게 오느냐? 나는 로마시민이야

그 로마 시민권을 돈 주고 사기 위해서 얼마나 노력했는데

내 뭐 잘못했는데? 라는 옹알이


나는 바리새인이야 바리새인이다면 얼마나 말씀을 지킬려고 얼마나 노력했겠어?

그 학교가 엄격하기로 유명하잖아?


나는 사두개인이야 시형제결혼법이 죽어서도 유지된다면 부활이 얼마나 더러운 짖이야?

그 정도로 거룩의 거룩, 거룩을 위해서라면 우리는 모든 이율배반의 모순을 없애는 거룩을 추구할거야


라고


지금 다 나름대로 지숨 지숨 거룩하고 의롭고 정결하고 믿음적인 즉 성경적인 것으로

그런 조건으로 이 임박한 심판을 비켜갈수 있는 대안으로 제시하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야들아 나 사도바울은 로마시민이야

나 바울은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인 바리새인의 아들이야 정통 중의 정통이야

나 바울은 사두개인이야


그런 것들이 이 십자가의 죽음 앞에서는 무용지물이란다. 


하나님께서 독생자 아들을 죽였다가 다시 살려냈어

왜 그랬겠니?


그런 조건들을 배설물 취급해 버리겠다는 것이야

새로운 조건이 떳는데

백날 그런 조건들 내세워 본들

임박한 심판을 비켜갈수 있겠니?


남이 아닌 내가 당해 봤잖아 라고


자신이 격은 일을 변호 변명의 차원이 아니라

무용지물이라는 의미에서 다메섹에서 격었던 일이라든지

복음을 알던 때와 그렇지 못한 때와의 차이를 증거합니다.


그것이 납득 설득케 하기 위함이 아니라

오히려 더욱더 모르도록 단절의 단절로써

그 간격을 쭈쭉쭉 쭉쭉 들어간다 들어간다 심판이 들어간다 라는 식으로

그 간격을 더욱더 벌리는 겁니다.


이것을 공포 획득 또는 원수의 성문얻기 라고 했습니다.


대부분 목사들이 자신의 회심장면을 바울의 이런 본문을 차용해서 이용해 먹고는 하는데요

그러니 나 정통맞잖아

나 예수 믿는 사람 맞잖아

나 이단 아닌거 맞잖아 라고

자신의 회심을 자랑하는데


그거 다 사기치는 짖이지요


오히려 저들로부터 이단 소리 안 들을려고 할게 아니라

그 반대로


저들의 심기를 건드려서

이단 괴수가 맞구나

니가 그런말을 하니까 더욱더 이단 괴수 맞네 맞어 라는 소리를 들어야 하는 것처럼


지금 사도바울은 자신의 회심을 인정받기 위해 하는게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로 저들의 숨기고자 하는 그 악마성을 건드리는데 있어서

복음을 증거하는 겁니다.


얼마나 제대로 복음을 증거했으면

나 하나님 사람 , 믿는 사람, 율법 제대로 지키는 사람 맞잖아 라는 조건을 갖춘자들이

버럭 거리면서 이단 괴수 라고 달려들겠습니까?



바울 본인이 그런 식으로 예수님을 죽였으니

제대로 저들을 건드리는 십자가의 복음이라는 것을 

본인 또한 믿어야 할 판국인 겁니다.


그러니 저들이 그 어떤 행동을 해도

지금 바울의 눈에는 전혀 보이질 않는 겁니다.

죽이든 말든 신경도 안 씁니다.


그저 어떻게 주님께서 바울 자신을 다루시는지에 대해서만 신경을 쓰는 겁니다.


그러나 저들은 그 반대인 겁니다.


자신의 영역을 침범하는 불쑥 들어온 이 이질감을 어떻게 처리하느냐에만 신경쓰는 겁니다.


동질의 영역에 하나님과 함께하는 그 일치감에

사도바울이 증거하는 십자가 복음은 너무 너무 낯설고

낯선 정도가 아니라

지금 까지 쌓아온 공든탑을 한꺼번에 무너지게 된다는 위협감을 줄 정도로 위기로 작용하는 겁니다.


그 정도로 모호한 종교를 수천년동안씩이나 붙잡아 놓고서는 무너찔까봐 전전긍긍한다는 것은

얼마나 거짓되고 거짓된을 소유했는가가 스스로 드러내고 있는데


남들 다 아는 것을 본인들만 모르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 바울은 자신감이 넘치는 겁니다.

막무너뜨리는 겁니다.

본인도 무너져서 살아났습니다.


그 헛된 것을 붙잡고 있는 것이 사는게 아니라 죽는 길이기에

그 헛된 우상들을 다 타파 할려고 막무가내로 무너뜨리는 겁니다.


그러니 얼마나 저들에게는 공포로 다가옵니까?

그래서 고래 고래 고함 칠 수밖에 없는 겁니다.


온 갖 법을 다 동원할 수 밖에 없는 겁니다.


그렇게 이성적이고 온순한 자들이 갑자기 바울 하나로 인해서

안색이 변해가면서 그 본심인 뿌리가 다 드러나도록

불편한 이질적인 것을 제거하고자 달려드는 겁니다.


천하에 퍼진 유대인들을 소요케 하기 때문입니다.


마치 아테네에서 먼지 털고 후딱 지나가버린 바울을

고린도에까지 끝까지 따라와서

자신의 먹거리를 방해한다는 이유로

소송을 거는 아테네와 고린도 시민처럼


아테네 우상 조각 관광품을 파는 그 생계수단에 위협이 되기에

온 아테네를 소요케 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유대인 이방인 다 건드리면서 바울은 지금 임박한 종말을 증거하는데 있어서

저들의 심각성에 아랑곳 하지 않고

더욱더 심각한 십자가의 단절성을 바닥에 까는데만 정신팔려 있는 겁니다.


바울은 아주 아주 신이 났습니다 신 났어


모든 반응 즉 인간의 행함은 결국 십자가의 그 사건의 반복으로써 반응하는 겁니다.

그 상황이 또 반복해서 벌어지는 겁니다.


본인도 그 사건에서 한발치도 벗어난적이 없이 십자가사건에 동원이 되어서 예수님을 죽였듯이

또 다시 이 십자가 사건을 반복케 되는 상황에 아주 아주 신이 난 겁니다.


이 공포획득 이 원수의 성문열기를


어머니께서 어떤 질문을 했는데 까먹었는데 답은 이렇게 했습니다.


유대인이 예수님 예수님 빌라도가 우리 유대인을 죽일려고 합니다.

얼마전에 제사드리다가 빌라도로 인해 유대인사람 피가 제물에 묻혀진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라고 하니까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을 깔아버리는데 더욱더 정신팔려 있는냥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이냐?

나도 빌라도 손에 죽으러 왔다 라고 하는 겁니다.


마치 예수님 나의 형이 나에게 배분된 재산을 혼자 다 뺏어갔습니다 라고 하니까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내가 너희 배분해 줄려고 왔느냐? 라고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눅 12:13, 개역) 『무리 중에 한 사람이 이르되 선생님 내 형을 명하여 유업을 나와 나누게 하소서 하니』

(눅 12:14, 개역) 『이르시되 이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는 자로 세웠느냐 하시고』

(눅 12:15, 개역) 『저희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 하시고』

(눅 12:16, 개역) 『또 비유로 저희에게 일러 가라사대 한 부자가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하매』

(눅 12:17, 개역) 『심중에 생각하여 가로되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꼬 하고』

(눅 12:18, 개역) 『또 가로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곡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눅 12:19, 개역)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눅 12:20, 개역)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눅 12:21, 개역)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



믄 말을 못하도록 입을 막아버리는 겁니다.


즉 그 어떤 조건을 갖추는데 있어서

이 심판을 피할길이 없다는 겁니다.


예수님이 재판장으로써 자신의 재산을 공정하게 나누실 선한 분일 거야 라고

자기 쪽으로 끌어들이기 바쁘니까


정작 예수님이 이 땅에 왜 왔는지를 모르는 겁니다.


심판 깔려고 왔습니다.

쓰나미로 밀어버릴려고 왔습니다.


그런데 그 앞에서 자꾸 엉뚱한 것으로 자신의 조건이 이러 이러 하다는 것만 자꾸 나열하는 겁니다.


바울 앞에서도 그러는 겁니다.


그래서 그 조건이 맞지 않으면 공포가 되고 두려워 떠는 겁니다.

그 조건이 맞으면 또 반대로 남에게 공포를 행사하는 빌라도가 되는 겁니다.


조건에 맞지 않는 죄인이면 두려워 떨고

조건에 맞으면 의인이 되어 공포를 행사하고


여기에 예수님은 되도않는 그 공포에 더욱더 제대로 된 공포를 획득하시는 겁니다.


원수의 성문을 얻는 겁니다.


이것이 미(美)라는 아름다움인 죽으면 죽으리라로 획득한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만이 아름답다는 겁니다.


제대로 가르기 때문입니다.


사망의 권세가 되도 않는 것으로 공포를 발휘하고 있으니

웃기는 겁니다.


다들 죽기를 무서워 사망의 종노릇 하는 겁니다.


그래서 그 공포보다 더한 더 나은 공포를 획득함으로써

빌라도가 어떻게 해서든 안 죽일려고

유대인들은 죽이긴 죽이데 어떻게해서든 자신들 손에 피 안 묻힐려고


마치 오늘 본문처럼 바울이 공처럼 이리 차이고 저리 차이고 왔다리 갔다리 공차임 당하듯이


예수님이 이 공포를 획득할까봐 이리 차고 저리 차고 해서

다들 벌벌 떠는 겁니다.


마귀는 어떻게 해서든 안죽일려고 안죽일려고 하는데

이 무식한 백성들은 고지곳대로 죽이라고만 외쳐대니

저들이 부추기고서는 취소 취소 취소 할려고 하니

취소가 되지 않는 겁니다.


그러니 그 경계사이의 틈에 기기막히게 십자가의 어리석은 지혜가

이들의 두려움을 장악해서 사랑은 노골적으로 이 틈을 획득해


사망의 권세를 내어 쫏고자

우리의 완악함 속으로 들어오는 겁니다.


어떻게 해서든 원수의 성문을 못 열도록 하기 위해

복음을 막고자 했듯이


복음은 어떻게 해서든 공포를 획득하는 겁니다.

되도 않는 공포 따위에 떨지 말라고 말입니다.


그러니 복음은 원수의 성문 획득입니다.


그것이 사랑입니다.


사랑치 않는 삯꾼 목자는

사람을 기쁘게 하는 말로써


자꾸 삯꾼 목자가 아니다는 조건을 갖출려고 합니다.

나 거짓선지자 아니잖아 라고 말입니다.


마치 이것은 예수님을 인간과 인간끼리의 관계로 보는 버릇 때문에

빌라도 손에서 건져 달라

형과의 재산을 제대로 배분해서 관계가 엉망이 되지 않도록 해 달라

라는 등등의


인간끼리의 관계처럼

예수님도 그런 버릇으로 대하는 겁니다.


예수님 쪽에서 맺고자 하는 관계는 정반대입니다.

원수와 피의 관계 뿐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심판이라는 예수님의 죽음 곧 피를 깔려고 하듯이

빨랑 빨랑 원수로 들통나도록 하는 피를 뿌리는 겁니다.


인간과 인간끼리의 관계

그런 조건들은

심판을 넘어설수가 없습니다.

빌라도도 못 넘어서는 판국에

예수님이 깔아버리시는 이 심판을 무슨 수로 넘겠습니까?


우연의 우연이요, 단절의 단절이요, 공포의 공포요, 불가능성의 불가능인데?


그래서 바울은 지금까지의 모든 매개물

즉 접촉물들을 오히려 다 깨부시는 단절의 거리 간격을 벌리고 있습니다.


그러니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교회 곧 성전입니다.

교회를 깨 부셔 버려야

그 어떤 접촉점 매개물이 사라지는 겁니다.


우상타파입니다.

이것 때문에 아테네에서까지 끝까지 따라와 소송을 했고

유대인이 성전 건드린다는 이유로 유대인들이 바울을 이단으로 몰아 죽일려고 하는 겁니다.


그거 사라질까봐 공포가 되었던 겁니다.


아직 덜 공포를 느껴서입니다.


되도않는 공포가 사라졌다는 기쁨은 제대로된 더 나은 공포가 자리잡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 일을 바로 하나님이 보내신 자를 믿는 일을 성령이 바울이라는 불쏘시개로 수셔대고 있는 겁니다.


장자 라는 아들을 보호하기 위해 10이라는 애굽의 신들이 우상으로써 보호막을 형성한 겁니다.


그 10 애굽 신들을 10가지 재앙으로 보내서 무너뜨립니다.
최종적으로 아들 곧 부활을 깨뜨립니다.
단절성입니다. 어디에도 구원은 없다는 겁니다.


신을 믿지 마세요 구원 없습니다.

그런 신을 이름만 예수로 바꾸고 부처로 바꾸고 하나님으로 바꿔본들 구원 없습니다.


오히려 단절을 누리세요 누려 ~~~~~~~~~


몸이 10 애굽신을 기억해서

자꾸 조건을 내세웁니다.


그게 관계인줄 알고 말입니다.


진짜 사귐의 관계, 사랑의 관계란

그런 보호막 다 깨뜨리고 얼굴과 얼굴을 마주하는 겁니다.


그 딴거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얼마나 불안하면 신과의 관계가 틀어질까봐

바울을 이리로 공 뻥 차서 자신 손에 피를 안 묻힐려고 하고

저리로 공 차듯 뻥 차서 피를 안묻힐려고 하느냐 말입니다.


그거 다 알기 때문에 일부러 의도적으로 그 경계선에 낑기도록 배치시킨 겁니다.


얼마나 인간은 날 때부터 악하고 평생을 그 악함을

죽기를 무서워서 사망의 종노릇 하는지를 말입니다.


(히 2:15, 개역)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 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려 하심이니』


죽음은 무서워 할 쨉도 아닌 이유가

심판을 못봐서 그런 겁니다.


예수님이 몰고온 심판은 죽음도 물러갈 정도로 무시 무시한 겁니다.

십자가의 죽음이라는 독생자의 심판을 못 봐서

자꾸 되도 않는 시시한 것들에 겁먹는 겁니다.


지금 바울은 이 십자가의 죽음이

그 심판을 바닥에 깔면서 진짜 공포는 십자가인데

왜 엉뚱한 것으로 벌벌 떠냐고 합니다.


뭐가 위기입니까?

유대인들처럼 천하에 흩어진 유대인을 소요케 만드는 바울의 복음증거가 위기입니까?

소요케 되고 성전이 무너지게 되고 율법이 엉망이 되고 하나님의 법이 무시받고

하나님의 사람이 나사렛 이단 괴수 바울의 꾀임에 빠지는게 위기입니까?

진짜 위기는
예수님의 죽음을 못 보고 있다는 것이 위기입니다.


아니 예수님이 자신의 죽음을 보여주지 않는다는 겁니다.
자신의 단절성을 보여주지 않는
눈이 있어도 못보도록 하신다는 겁니다.

인자가 나무에 달려야 함을 못 보는 것이 위기입니다.


바울은 성령의 지시로 죽든지 말든지

이 위기를 깔아버리는 겁니다.


이 공포를 획득함으로써 되도 않는 공포에 떨지 말고

진짜 공포를 보라고 합니다.


나무에 달려 죽는 이 인자가

구름 타고 다시 오실 분이기에


빨리 빨리 영접하지 않고
입맞추지 않으면 다 죽는다고 요나의 표적을 증거합니다.


그 단절성이 제대로 덮친자는

느니웨 백성처럼 회개하지 말라고 말려고 회개하도록 되어 있고


그렇지 않고 그 간격이 덮쳐지지 않은 자는

요나처럼 자꾸 조건을 따지게 되는 겁니다.

왜 불일치 하냐 라고?

왜 나랑 이렇게 마음이 안 맞게 구시는거요?


차라리 날 죽여라 죽여, 케보이 ~~~~



그 불일치가 십자가의 지혜인줄 모르고 말이죠.






































죽음의 예루살렘행 ▲ 어찌하던지 복음 (행 21-22장)

2013/12/21 21:00 in 성령행전(피활동,인간극복)

 

예루살렘행 죽음행 △ 어찌하던지 복음증거 (행 21-22장)


원수의 성문 열기 – 악마성을 여는 편애 받은자 (마귀 자녀들에게 지독히 미움받는자)



(창 24:59, 개역) 『그들이 그 누이 리브가와 그의 유모와 아브라함의 종과 종자들을 보내며』

(창 24:60, 개역) 『리브가에게 축복하여 가로되 우리 누이여 너는 천만인의 어미가 될지어다 네 씨로 그 원수의 성문을 얻게 할지어다』


(행 21:1, 개역) 『우리가 저희를 작별하고 행선하여 바로 고스로 가서 이튿날 로도에 이르러 거기서부터 바다라로 가서』

(행 21:2, 개역) 『베니게로 건너가는 배를 만나서 타고 가다가』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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