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양을 이리 가운데 보내기 (눅 10: 1-16)



(눅 10:1, 개역) 『이 후에 주께서 달리 칠십 인을 세우사 친히 가시려는 각동 각처로 둘씩 앞서 보내시며』

(눅 10:2, 개역) 『이르시되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으니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어 주소서 하라』

(눅 10:3, 개역) 『갈지어다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어린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눅 10:4, 개역) 『전대나 주머니나 신을 가지지 말며 길에서 아무에게도 문안하지 말며』

(눅 10:5, 개역)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먼저 말하되 이 집이 평안할지어다 하라』

(눅 10:6, 개역) 『막일 평안을 받을 사람이 거기 있으면 너희 빈 평안이 그에게 머물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눅 10:7, 개역) 『그 집에 유하며 주는 것을 먹고 마시라 일꾼이 그 삯을 얻는 것이 마땅하니라 이 집에서 저 집으로 옮기지 말라』

(눅 10:8, 개역) 『어느 동네에 들어가든지 너희를 영접하거든 너희 앞에 차려 놓는 것을 먹고』

(눅 10:9, 개역) 『거기 있는 병자들을 고치고 또 말하기를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에게 가까이 왔다 하라』

(눅 10:10, 개역) 『어느 동네에 들어가든지 너희를 영접지 아니하거든 그 거리로 나와서 말하되』

(눅 10:11, 개역) 『너희 동네에서 우리 발에 묻은 먼지도 너희에게 떨어 버리노라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온 줄을 알라 하라』

(눅 10:12, 개역)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저 날에 소돔이 그 동네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눅 10:13, 개역) 『화 있을진저 고라신아, 화 있을진저 벳새다야, 너희에게서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면 저희가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

(눅 10:14, 개역) 『심판 때에 두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눅 10:15, 개역)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

(눅 10:16, 개역) 『너희 말을 듣는 자는 곧 내 말을 듣는 것이요 너희를 저버리는 자는 곧 나를 저버리는 것이요 나를 저버리는 자는 나 보내신 이를 저버리는 것이라 하시니라』



칠십인을 택해 각기 각지역에 하나님 나라를 전파케 하십니다.
칠십인을 세워 파견하시는 이유는

이들을 영접하라고 파견하시는게 아닙니다.


그 반대입니다. 

아무도 이들을 영접할 자들이 없다는 겁니다.
자 그러면 우리는 영접할자가 없는데 왜 보내냐?


영접할자 없으면 주님이 손해 아닌가?
주님은 손해 볼게 전혀 없습니다.
발등에 불이 떨어지는 것은 인간 쪽일 뿐입니다.
지난 시간에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했습니다.

수제자 베드로가 초막셋 아파트 세채를 지어서 머리 둘 곳을 만들어 주겠다고 해도
또 수 많은 부자들이 예수님을 위해 대형 교회를 세우겠다고 해도

주님은 머리 둘 곳이 없다고 하십니다.


즉 집을 마련해 준들 안계시겠다, 안 살겠다는 겁니다.

그것도 모르고 자꾸 집 지어 드리겠다는
다윗처럼 자꾸 집 지어 본들

피 묻은 손으로 지을 뿐인 겁니다.

우리가 아무리 선하게 착하게
교회에 충성 봉사이웃사랑 실천 하겠다고 해 본들

다 피 묻은 손으로 하겠다는 겁니다.

그러니 거부하시는게 당연한 겁니다.

머리 둘 곳을 만들지 않겠다는 뜻인데
자꾸 머리 둘 곳을 만들겠다고 시근 없이 구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지혜는 아무도 모르는 단절성 때문이다는 겁니다.

오직 성령이 임하면 그 이유를 알고
비로소 성령이 임한자는
머릴 둘 곳을 만드는게 아니라

그 반대로 머리를 둘 곳이 없도록 만드는 일을 하도록 되어 있는 겁니다.


오늘날 목사들을 보면 참으로 가관입니다.

머리 둘 곳 만들고 싶어서 환장했습니다.

교회 핑계대고 하나님 핑계대고 예수님 핑계대고 십자가 핑계대면서

머리 둘 곳을 너무 너무 많이 만들고 있는 겁니다.

얼마나 정당화 하는지

교인들이 다 속아 넘어갑니다.

안 넘어가는 놈이 없을 정도입니다.


성령이 임하기 전의 예수님의 제자들도 동일했습니다.

예루살렘에 들어가는 것을 엘리야의 승천사건의 재현으로 보고
유대인으로써 그런 영광이 없기에 빨리 빨리 달성할려고 합니다.
그 승천 길에 사마리아가 방해를 하니 불로 멸하겠다고 제자들이
엘리야 사건을 역시나 자신들의 기존의 해석을 끄집어 냅니다.


그런데 여기에 예수님이 초를 치십니다.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정작 예루살렘이든 사마리아이든 땅끝이든
머리 둘 곳 없도록 만들겠다는 취지인데

우리는 자꾸 예수님이 거할 처소를 만들어 주겠다고 나대기 시작하는 겁니다.

제자들의 고양된 태도도 아 이거는 내가 아는 해석이다 라고
대뜸 나서게 되는 겁니다.


예수님의 승천을 위한 일이라면

아무도 방해가 되지 않도록 하겠다는 겁니다.

그 길에 사마리아가 동의를 해주지 않고 방해를 하니

어 엘리야 사건 때와 똑같잖아 라고 바로 불로 심판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눅 9:54, 개정) 『제자 야고보와 요한이 이를 보고 이르되 주여 우리가 불을 명하여 하늘로부터 내려 저들을 멸하라 하기를 원하시나이까』

(눅 9:54, 가톨릭) 『야고보와 요한 제자가 그것을 보고, “ 주님, 저희가 하늘에서 불을 불러 내려 저들을 불살라 버리기를 원하십니까?” 하고 물었다.』

(눅 9:54, 새번역) 『그래서 제자인 야고보와 요한이 이것을 보고 말하였다. "주님,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그들을 태워 버리라고 ㉩우리가 명령하면 어떻겠습니까?" / ㉩다른 고대 사본들에는 '엘리야가 한 것 같이 우리가'』

(눅 9:54, 공동) 『이것을 본 제자 야고보와 요한이 "주님, ㉠저희가 하늘에서 불을 내리게 하여 그들을 불살라 버릴까요?" 하고 물었으나 / ㉠어떤 사본에는 "엘리야가 한 것처럼"이라는 말이 있다(2열왕 1:10, 12 참조).』

(눅 9:54, 현대어) 『이 말을 듣고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께 말하였다. `선생님, 저희가 ㄱ) 하늘에서 불을 내리게 하여 그들을 태워 버릴까요?' (ㄱ. 왕하1:10)』


(왕하 1:10, 개역) 『엘리야가 오십부장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내가 만일 하나님의 사람이면 불이 하늘에서 내려와서 너와 너의 오십 인을 사를지로다 하매 불이 곧 하늘에서 내려와서 저와 그 오십 인을 살랐더라』

(왕하 1:11, 개역) 『왕이 다시 다른 오십부장과 그 오십 인을 엘리야에게로 보내니 저가 엘리야에게 일러 가로되 하나님의 사람이여 왕의 말씀이 속히 내려 오라 하셨나이다』

(왕하 1:12, 개역) 『엘리야가 저희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내가 만일 하나님의 사람이면 불이 하늘에서 내려와서 너와 너의 오십 인을 사를지로다 하매 하나님의 불이 곧 하늘에서 내려와서 저와 그 오십 인을 살랐더라』

여기에 예수님은 초를 치시면서 인자는 머리 둘 곳 없다고 하는 겁니다.

머리 둘 곳을 마련하기 위해서 하는 행동들이 불로 심판하겠다는
예수님을 도와 주겠다는 발상인데

오히려 방해를 하는 겁니다.

예루살렘은 예수님이 머리 둘 곳이 아니다는 겁니다.


다윗이 손으로 짖는 성전은

여호와께서 머리 둘 곳이 아니다는 겁니다.


즉 그 어떤 곳도 머리 둘 곳으로 만들지 않겠다는 겁니다.

왜? 머리 둘 곳을 만드는 자는 졸지에 정당성이 생기는 겁니다.

고정되고 딱딱한 회칠한 무덤이 생기는 꼴입니다.


예수님 믿는 내가 이렇게 정당한데 어떻게 예수님만 옳겠습니까?

그래서 머리 둘 곳 만들지 않겠다는 겁니다.


오직 예수님 스스로가 처소를 만드시는데 그 처소가 바로
나를 죽이는 그 십자가의 자리이다는 겁니다.


맞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다급히 죽으시러 가시는 것은
우리를 죽이실려고 하시는 겁니다.


뭐 빌라도가 너희를 죽인다고?

나도 빌라도 손에 죽으러 왔거든

빌라도도 내 손에 죽어야 하거든
빌라도의 심판이 겁나니? 아니면 나 예수의 심판이 더 겁나니?
누가 더 두렵고 떨리느냐?


빌라도 심판 그 바닥을 한번 뜯어 보자 라는 겁니다.

인자를 위해 머리 둘 곳 마련한 그 심뽀, 바닥 한 번 뜯어 보자 말입니다.

십자가의 사랑은 없고 다들 자기 사랑을 가득 채운 겁니다.

그런 심뽀면 빌라도와 뭐가 다르냐 말입니다.


머리 둘 곳 없다는 것은 이 세상 바닥이 삭제 될 곳이다는 겁니다.

왜 모래 위에 집을 짖냐 말이지요.

반석 위에 집을 지어야죠.


그래서 얼마나 자신이 짖는 집이 어설프기 짝이 없으면

바람에 휭 하고 날라가 버리는 ~~~~~

폭풍우에 쓸려 내려가 버리는 ~~~~~

쓰나미에 쓸려 내려가는 어설픈 집인 것은

반석과 전혀 무관해 보이는 베드로를 통해서 보여주는 겁니다.


반석의 반대 짖만 했음에도 불구하고 베드로는 반석이 되는 겁니다.
반석 다운 짖을 베드로는 하면 안되는 겁니다.

베드로는 막살았고 반석과 전혀 무관했기에 반석이 된 겁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피 공로 때문이지 베드로의 믿음은 늘 가짜로 들통만 났을 뿐입니다.

(마 16:18, 개역)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베드로는 늘 풍랑에 쓰러질 것만 내어놓고서는

믿습니다. 밋숩니다 라고 자신을 세뇌 시키는 것을 의도적으로 표출하면서 알아달라고 합니다.
오늘날 우리들의 모습을 대변해 주고 있습니다.

그거 받아주시는 주님이라면 가짜입니다. 안받아 주십니다.


풍랑을 일부러 더 일으켜서 휭 날라가 버리게 합니다.

그거 믿어서 자꾸 가짜 예수 만들어 내지 말라고 합니다.

그래서 그 반대로 물 위를 걸어서 만나는 예수가 아닌물 밑에 빠져서 만나는 예수님

죽음 속에서 만나는 예수님

심판 속에서 만나는 예수님을 보여주심으로써


주여 뉘시니까? 라고 낯설기 짝이 없는 예수님을 통해
자신이 습득한 정보로써 알던 예수님이 휭 하고 날라가서
주님 쪽에서 마련한 심판 속에서 만남으로써
그 어떤 심판에도 흔들리지 않는 반석이 되는 겁니다.


역시나 오늘 본문에서도 그렇지만 지난시간처럼 베드로처럼

제자들이 오해를 해서자꾸 예수님을 위한 자리를 마련해 주겠다는냥 나서는데
우리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이런 오해가 참으로 고마운 겁니다.


우리는 늘 엉터리 가짜이다는 증거입니다.

그 마련한 자리 예수님이 거부하시고

주님께서 직접 마련해 주신 자리에 우리들을 도리어 그 속에 집어 넣으시는 겁니다.

그래야 심판 속에서 패쓰 하고 넘어갑니다.

인간의 피(공로)가 아닌 예수님의 피가 묻힌 자리만이 패쓰 하고 심판이 넘어가는 겁니다.


칠십인을 왜 세우겠습니까?
지난 시간의 제자들의 모습나만 남았나이다 라고 하는 그 모습인 자들을 칠십인을 세우는 겁니다.

즉 선지자인데요


선지자란 심판을 바닥에 까는 자입니다.
개인의 사적인 견해나 사적인 성경해석을 바닥에 깔지 않습니다.

그 심판을 깔면서 자기자신도 그 심판 속에 놓여지게 되는 겁니다.

심판을 깔면 두 갈래로 갈라지게 됩니다. 이것을 아름답다 라고 합니다.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는 자가 바로 선지자 입니다.
불화케 하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얄밉겠습니까?


예레미야를 보세요
화평한 시대에 너희들은 쫄딱 망해서 포로 잡혀 갈 것이다 라고

늘 부정적인 표현으로 외쳤습니다.
그런 부정적인 표현에 다들 반대 했습니다.
예레미야 어떻게 하면 죽여버릴까 라고 모의를 했습니다.


그런데 결국은 졸딱 한 방에 훅 가버려서 망해가 포로 잡혀 가는데이게 얄미운게 아닙니다.

진짜 얄미운 것은말이 씨앗이 된다고
그래 니 말대로 쫄딱 망했다 우짤래?

그래 속 시원하니 니 말대로 되었으니 기분 좋니? 다들 그런 심정인데

깐따나 얄미운데 더 얄밉도록
그 포로 당해 가는 길에 졸졸 따라오면서
언젠가는 다시 돌아온단다 표시 해 두어라 라고

또 말도 안되는 소리를 하는 겁니다.

백성은 자꾸 원인은 사람에게 둡니다.

문제는 사람이란 없습니다.

인간이란 없습니다.

그런데 자꾸 있다고 여기니까
그 원인을 인간에게 두고 인간에게 두니까 인간의 행동을 따지기 시작 합니다.

아 이런 행동을 해서 복 받고
아 이런 행동을 했기에 저주 받는 구나

그럼 이런 것 까지 알려 주신 분이 여호와이니까
이 행동은 하지 않고 고쳐서 회개하고

저 행동은 여호와께 드리도록 하자 라고 하는 겁니다.

분명히 말하지만 인간은 없습니다.
그러니 그 원인을 자꾸 인간에게 찾기 마시길 바랍니다.
인간 아닌 인간을 파악해야 합니다. 바로 예레미야 선지자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인간이 아닙니다. 묵시입니다.

즉 예수님의 그림자이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예레미야 당시에 있었던 거짓선지자 또한 누구의 그림자로써 봐야 합니다.

누구 입니까? 마귀입니다.

이 둘의 간격 속에 우리는 놓여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말이 씨앗 된다고 불평할게 아니라

그 간격 속에서 주님이 어떻게 하시는 가를 보고

마귀가 어떻게 하는 가를 보는

그 둘의 차이를 보는 겁니다.


못 본다고요?
아닙니다. 가시화 됩니다.


문제는 우리가 보기 싫어한다는 겁니다.
또 보고픈 것만 볼려고 하기 때문에

못 봤다고 우길 뿐입니다.

충분히 보여줬습니다.


넘치도록 말입니다.


그렇다면 말이 씨가 된다고 불평할게 아니라그 간격을 누려 ~~~~


누리는 것 뿐입니다.


부요함에도 처하게 하고
가난함에도 처하게 하기에

그 간격 속에서
이렇게 간섭 하신다는 자체가 이미 사랑이다는 겁니다.
사생아가 아니다는 증거입니다.


자 다시 본문으로 들어가서
칠십인을 세우시는 이유는

영접하라고 보내시는게 아니라

도저히 영접 못한다는 것을
머리 둘 곳 마련하라고 보내시는게 아니라

도저히 머리 둘 곳이 없는 세상임을 드러내는 그 심판성 그 단절성을 보여주기 위함이다는 겁니다.

왜? 사람들이 이들을 영접안해서? 그렇게 되면 인간이 원인인 거지요?

아닙니다. 칠십인 본인도 영접하지 않는 것은 매마찬가지입니다.

심판 속에 들어가기 싫은 겁니다.

누가 맨 정신으로 불 속에, 심판 속에 들어 갈려고 합니까?
성령 받았을 때만 3초?


모래 위에 짖는 집에 살고 싶은 겁니다. 즉 육입니다.
익숙한 것만 소유할 뿐입니다.

성령을 바닥에 까는 것을 본인들도 싫어합니다.

나만 남았나이다 라고 엘리야가 외쳤고 차라리 죽여라 라고 했듯이

요나 선지자도 날 말라꼬 선지자 세웠냐 차라리 죽여라 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요나의 표적입니다.그 어떤 누구도 처소를 마련 할 자가 없다는 겁니다.

그 간격을 누릴 수 밖에 없다는 겁니다.즉 포로 당했다는 겁니다.


엘리야든 요나든 이스라엘이든 모세든

오죽하면 모세가 변화산에서 갑자기 우발적으로 나타나

기껏 한다는 소리가
주여 제발 죽어 주시옵소서 라고 엘리야와 함께 깜짝 까메오 출연을 합니다.
얼마나 싸가지 없습니까?

그러나 그 말은 본인도 갇혔다는 겁니다.

포로 당했다는 겁니다.

누구에게?

본인 자기자신에게 말입니다. 포로 당했고 갇혔고 억눌렸다는 겁니다.

없는데 자꾸 있다고 여겼으니
탈락 당했던 겁니다.

엘리야도 그렇고

요나도 그렇고


없는데 자꾸 있다고 우긴 겁니다.


자꾸 대식씨 당신은 자꾸 [없음] [없음] 이라고 주장하는데

도대체 [없음]이 뭡니까?


저도 모릅니다. 일단 주껴 보는 겁니다.

무조건 [있음] 은 아니다는 겁니다.


[없음]도 모르면서 어떻게 [없음]을 외칩니까?
[없음]을 외치는 것도 결국 [있음]의 시선에서 외치는 [없음]이니 [없음]이 아니지 않습니까?

진정한 [없음]도 아니면서 말입니다.

맞습니다. 결국 [없음]은 [있음]이 [있다]고 주장할 때에만 잠시 파악할 기회가 될 뿐입니다.

저도 철학책 쪼금 신학책 쪼금 살펴봐도 [없음]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다들 어설픕니다.
당연히 저도 어설플 따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금의 힌트를 얻는 것은 [있음]이 고맙게도 중간 중간에 {나 [있음]} 이라고 외쳐 주고 있다는 겁니다.

고때 아 저거는 아니구나 라고 하고 힌트를 얻는 거죠.

결국 차이성 단절성 심판성으로만 파악 할 수 밖에 없습니다.

마치 베드로가 물 위를 걷게 됨으로써 졸지에 순간적으로 [있음]을 누렸을 겁니다.
그거 말릴수도 없고 잘못되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어쩔수 없는 겁니다. 주님이 허락하신 것이니 말입니다.

그런데 감사하게도 [없음]이 또 그 순간 찾아와서
[없음]이 무엇인가를 잠시 보여주는 겁니다.

그래서 물 위를 걷던 베드로가 풍랑을 보고 꼬로록 물 아래로 빠져서 죽게 됩니다.

자동적으로 세례 연합 속에 들어가게 됩니다.

이 둘의 간격입니다.

그 중앙에 들었돠 놨다 들었돠 놨다 하는 요물 ~~~~ 예수님이 중간에 있습니다.

병주고 약주고 병주고 약주고 이랬다 저랬다 이랬다 저랬다
우리는 그저 신상털리는 것 뿐입니다.

주머니에 가득채운 예수님을 포착한 정보를 탈탈탈 털리고 삭제당하는
내 개인의 신상까지모조리 다 빈털터리로 털리는 겁니다.
이것을 통해서 아 예수님과 예수님이 아닌 것 즉 진짜 예수님과 내가 조작해 내는 예수님 또는 마귀


등등의 차이를 격는 겁니다.


얼마나 신나는 경험입니까?


칠십인은 바로 이런 경험을 본인들이 그 심판의 흔적을 등에 새겨진 흔적을 가지고서
선발대처럼 심판이 몰려 온다 라고


멀쩡한 하늘에 불 내린다로 외치는 겁니다.


노아 때처럼 한번도 비를 본적이 없는 자들에게

비라는 낯설고 생소한 소리를 들으면


귀에 들어오겠습니까?

눈에 보이겠습니까?


경험이 전무 한데

비를 본적이 없습니다.


심판을 본적이 없습니다.


그 무시 무시한 심판 120일 동안 물 속에 잡겨져 보세요
베드로가 비로소 이해가 됩니다.


주여 뉘십니까?

도대체 당신 누구요? 케보이 ~~~~



내 눈으로 귀로 듣고 보고 했던 세상은 다 날라가 없어져 버리고휭하니 남은 것은 전혀 낯설고 듣도보도 못한 듣보잡

갑자기 불쑥 툭 하고 튀어나온 갑툭튀

새것


이전 것을 다 지나가게 하는 새것
(이전 것을 지나가게 못하는 것은 새것이 아닙니다.)

(고후 5:17, 개역)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내가 봤다고 했던 것
내가 들었다고 했던 것다 날려버리는 새것

전혀 들어본적 없었던
전혀 본적이 없었던

그 [없음]이 [있음]을 없애버리고서야 비로소
그 차이를 드러낼 때
이 [없음]이 바로 [믿음]이였다는 겁니다.

[있음]은 그 차이로 [믿음]의 반대였던 바로 [행함]이였고 말입니다.


그러니 칠십인이든 칠천명이든 12제자든이 둘의 차이를 자신들 신체에 담고서 보여줄 수 밖에 없다는 겁니다.


얼마나 행함에 푹 빠져 살고 있는지 [있음] [있음]

나 예수 제자 맞잖아그것도 모잘라기 때문에 서로 서로가 내가 더 큰 제자이다 라고 싸울 때

나 예수 믿는거 맞잖아, 나 바른목사 맞잖아, 나 성도 맞잖아, 나 제자 맞잖아,

이런 모든 [있음]을

[없음]이라는 어린아이로 인해 고발당하는

그렇게 간섭 받다가 성령이 임하게 되니까

내가 언제 그랬냐는둥
뻔뻔스럽게
자기도 예수님을 세번씩이나 부인한 주제에 남들을 수셔대는 겁니다.

내 양을 먹이라, 치라, 먹이라

(요 21:15, 개역) 『저희가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요 21:16, 개역) 『또 두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양을 치라 하시고』

(요 21:17, 개역) 『세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가로되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양을 먹이라』

이 모순 덩어리 베드로를 모순 그대로 세상에 까는 겁니다.
바울? 세번 씩이나 사단의 가시 빼달라고 했습니다.
안 빼줍니다. 그 모순 덩어리 그대로 내어놓습니다.
그 3이라는 간격 좁히면 안되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반대로 남들을 추궁하고 수셔대기 시작하는 겁니다.
무조건 [있음]이라고 지적하면서 본인들이 당했던 그 심판성이라는 단절성을
이제는 남들을 수셔대면서 그 심판성을 까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세상사람들은 반대로 볼 수 밖에 없겠지요.

본인들이 다 당해 봤으니까
그것만이 옳기 때문에 깔아버리는 겁니다.
이 땅은 행함만을 인정하는 세계입니다.

믿음을 인정하지 않는 세계입니다.

즉 믿음 되신 예수님을 인정하지 않는 세계입니다.

인자는 머리 둘 곳 없는 곳입니다.
그래서 믿음을 깔아버리는 겁니다.
칠십인 본인들이 행함으로 가득차 있는데 어떻게 믿음을 깔수 있을까요?
우리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 라고 외쳤는데

어떻게 그 십자가를 외칠수가 있습니까?
행함으로는 안된다는 겁니다.


그 모순의 간격을 좁힐려고 달려들기 때문입니다.


오직 믿음으로만 되는 겁니다.

그 모순의 간격을 더욱더 오해하도록

못 듣도록

못 보도록


그 간격을 더욱더 벌리는 겁니다.

제발 좀 오해 하라고오직 믿음되신 예수님의 불쌍히 여겨주심만이 옳았음을


그러니 칠십인은 남이 자신들을 영접하냐 영접안하냐에 신경쓰는게 아니라
아예 기대할 필요가 없이


애초부터 늑대 소굴 속으로 들어가는
신나는 심판을 깔아버리는 겁니다.
사람의 손으로 지은 교회는 늑대소굴일 뿐입니다.

본인들이 이 심판성을, 이 모순성을, 이 단절성을
영접해야 할 판국인 겁니다.
이 모순이 옳았습니다 라고 ~~~

오히려 누려야 합니다. 누려 ~~~~~~

자 이렇게 되면 기존의 공포들이 공포라고 우기는 것들이 시시해 집니다.

얼마나 감사합니까?
공포 깝도 못하는 것들이 공포 인체 하면서 기웃기웃거리면서

또 그걸 보고 벌벌 떨었던 것이 얼마나 우스깨였던 것을
비로소 알게 되는 겁니다.


6.25때 난리는 난리도 아니였던 겁니다.

얼마나 그 무시 무시한 전쟁을 전쟁 취급도 안하는 겁니다.


빌라도의 사망의 권세를 권세 축에도 못드는 겁니다.


진짜 공포는 나의 원수됨을 뚜껑여는 겁도없는 분입니다.

바로 사랑입니다. 그 분만이 믿음이요 소망입니다.


빌라도도 못 여는 나의 원수됨

마귀도 못 여는 나의 원수됨

죽음도 뚜겅 못 여는 나의 원수됨을


믿음이요 사랑이신 예수님만이 뚜껑여는 겁니다.


소돔 심판은 심판도 아닙니다.

예수님의 심판만이 유일한 살길입니다.

나의 뚜껑을 열기 때문입니다.


어린양 되신 예수님이 인간도 없는 인간이라는 탈을 쓴 이리 가운데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잡아 먹고 싶어서 환장한 늑대입니다.

결국은 잡아 먹었습니다.


어 그런데 또 살아납니다.

우리의 이빨이 소용이 없어져 버립니다.

없음을 먹어버렸으니 말입니다.

그렇게 매일 매일 선물을 받아버리니까

우리도 양같이 변해 버린 겁니다.

그리고서는 늑대 가운데에 보냄을 받게 되는 겁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잡아먹었으니

당연히 잡혀 먹혀야지요


피해자는 없도록 하기 위함이요

모조리 다 가해자 뿐이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 말입니다.


이것이 칠십인을 보내시는 취지입니다.


우리의 악마성을 벌컥 벌컥 뚜껑 열리도록


우물가의 여인이 꼬깃 꼬깃 감추인 되도 않는 죄책감을


물 좀 달라고 불쑥 들어와서


니 남편 데리고 온나 라고 불쑥 불쑥


남의 아픈 상처를 함부로 열어재끼는 그 무모함


그 상처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를 모르고 말이지요


술이 웬수라고 하지만

술 때문에 졸지에 아기가 덜컥 들어서는 바람에 졸지에 인생에도 없던 결혼을 하게 되었듯이(호박이 삼촌)
예수님은 이런 죄인을 부르러 오신 겁니다.


의인 필요 없습니다.

귀 있는 자 필요 없습니다.

눈 있는 자 필요 없습니다.


갇혔고 포로되었고 억눌린 자에게만

이 칠십인이 증거하는 복음이


필요한 겁니다.


이 [없음=믿음]이 [없음=믿음]으로 더욱더 은폐 되면서 말입니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소리(요나의 표적)만 외치는 겁니다.

누가 믿겠습니까?

(요 12:38, 개역) 『이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가로되 주여 우리에게 들은 바를 누가 믿었으며 주의 팔이 뉘게 나타났나이까 하였더라』


(사 53:1, 개역)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 여호와의 팔이 뉘게 나타났느뇨』

(사 53:2, 개역)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사 53:3, 개역)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버린 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사 53:4, 개역)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사 53:5, 개역)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사 53:6, 개역)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비로소 [없음] 만이 옳았고

모든 [있음]은 그 [없음] 앞에서 다 사라져야 마땅한 것입니다.





















왜 인자는 머리 둘 곳 없는가? (눅 9:49-62)

2013/12/25 13:11 in 성령행전(피활동,인간극복)

 

왜 머리 둘 곳 없는가?



(눅 9:49, 개역) 『요한이 여짜오되 주여 어떤 사람이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어 쫓는 것을 우리가 보고 우리와 함께 따르지 아니하므로 금하였나이다』

(눅 9:50, 개역) 『예수께서 가라사대 금하지 말라 너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너희를 위하는 자니라 하시니라』

(눅 9:51, 개역) 『예수께서 승천하실 기약이 차가매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기로 굳게 결심하시고』

(눅 9:52, 개역) 『사자들을 앞서 보내시매 저희가 가서 예수를 위하여 예비하려고 사마리아인의 한 촌에 들어갔더니』

(눅 9:53, 개역) 『예수께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시는 고로 저희가 받아 들이지 아니하는지라』

(눅 9:54, 개역) 『제자 야고보와 요한이 이를 보고 가로되 주여 우리가 불을 명하여 하늘로 좇아 내려 저희를 멸하라 하기를 원하시나이까』

(눅 9:55, 개역) 『예수께서 돌아보시며 꾸짖으시고』

(눅 9:56, 개역) 『함께 다른 촌으로 가시니라』

(눅 9:57, 개역) 『길 가실 때에 혹이 여짜오되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좇으리이다』

(눅 9:58, 개역)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 하시고』

(눅 9:59, 개역) 『또 다른 사람에게 나를 좇으라 하시니 그가 가로되 나로 먼저 가서 내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눅 9:60, 개역) 『가라사대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 하시고』

(눅 9:61, 개역) 『또 다른 사람이 가로되 주여 내가 주를 좇겠나이다마는 나로 먼저 내 가족을 작별케 허락하소서』

(눅 9:62, 개역) 『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니라 하시니라』




지난 시간에 제자들의 서로 누가 크냐 라는 논쟁에 무능한 어린아이를 중앙에 세워

이 어린아이를 영접하라고 합니다.


그런데 어떤 어른 치고 어린아이를 영접할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도리어 거꾸로 어린아이가 어른을 영접해 줘야 할 판국이다는 겁니다.


마치 누구하나 닭의 세 번 울음을 영접할 사람이 없듯이 말입니다.


너는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할 자야 라고 나발을 불며

동네 떠들고 꼬꼬덱 하고 돌아다녀 보세요

그 닭을 영접하고픈 마음이 있나?


없습니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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