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라는 정치적 사건 (잔인한 고문)

 

(25:1, 개역) 베스도가 도임한 지 삼 일 후에 가이사랴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니

(25:2, 개역) 대제사장들과 유대인 중 높은 사람들이 바울을 고소할새

(25:3, 개역) 베스도의 호의로 바울을 예루살렘으로 옮겨 보내기를 청하니 이는 길에 매복하였다가 그를 죽이고자 함이러라

(25:4, 개역) 베스도가 대답하여 바울이 가이사랴에 구류된 것과 자기도 미구에 떠나갈 것을 말하고

(25:5, 개역) 또 가로되 너희 중 유력한 자들은 나와 함께 내려가서 그 사람에게 만일 옳지 아니한 일이 있거든 송사하라 하니라

(25:6, 개역) 베스도가 그들 가운데서 팔 일 혹 십 일을 지낸 후 가이사랴로 내려가서 이튿날 재판 자리에 앉고 바울을 데려오라 명하니

(25:7, 개역) 그가 나오매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유대인들이 둘러 서서 여러 가지 중대한 사건으로 송사하되 능히 증명하지 못한지라

(25:8, 개역) 바울이 변명하여 가로되 유대인의 율법이나 성전이나 가이사에게나 내가 도무지 죄를 범하지 아니하였노라 하니

(25:9, 개역) 베스도가 유대인의 마음을 얻고자 하여 바울더러 묻되 네가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이 사건에 대하여 내 앞에서 심문을 받으려느냐

(25:10, 개역) 바울이 가로되 내가 가이사의 재판 자리 앞에 섰으니 마땅히 거기서 심문을 받을 것이라 당신도 잘 아시는 바에 내가 유대인들에게 불의를 행한 일이 없나이다

(25:11, 개역) 만일 내가 불의를 행하여 무슨 사죄를 범하였으면 죽기를 사양치 아니할 것이나 만일 이 사람들의 나를 송사하는 것이 다 사실이 아니면 누구든지 나를 그들에게 내어줄 수 없삽나이다 내가 가이사께 호소하노라 한대

(25:12, 개역) 베스도가 배석자들과 상의하고 가로되 네가 가이사에게 호소하였으니 가이사에게 갈 것이라 하니라

(25:13, 개역) 수일 후에 아그립바 왕과 버니게가 베스도에게 문안하러 가이사랴에 와서

(25:14, 개역) 여러 날을 있더니 베스도가 바울의 일로 왕에게 고하여 가로되 벨릭스가 한 사람을 구류하여 두었는데

(25:15, 개역) 내가 예루살렘에 있을 때에 유대인의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그를 고소하여 정죄하기를 청하기에

(25:16, 개역) 내가 대답하되 무릇 피고가 원고들 앞에서 고소 사건에 대하여 변명할 기회가 있기 전에 내어주는 것이 로마 사람의 법이 아니라 하였노라

(25:17, 개역) 그러므로 저희가 나와 함께 여기 오매 내가 지체하지 아니하고 이튿날 재판 자리에 앉아 명하여 그 사람을 데려왔으나

(25:18, 개역) 원고들이 서서 나의 짐작하던 것 같은 악행의 사건은 하나도 제출치 아니하고

(25:19, 개역) 오직 자기들의 종교와 또는 예수라 하는 이의 죽은 것을 살았다고 바울이 주장하는 그 일에 관한 문제로 송사하는 것뿐이라

(25:20, 개역) 내가 이 일을 어떻게 사실할는지 의심이 있어서 바울에게 묻되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이 일에 심문을 받으려느냐 한즉

(25:21, 개역) 바울은 황제의 판결을 받도록 자기를 지켜주기를 호소하므로 내가 그를 가이사에게 보내기까지 지켜두라 명하였노라 하니

(25:22, 개역) 아그립바가 베스도더러 이르되 나도 이 사람의 말을 듣고자 하노라 베스도가 가로되 내일 들으시리이다 하더라

(25:23, 개역) 이튿날 아그립바와 버니게가 크게 위의를 베풀고 와서 천부장들과 성중의 높은 사람들과 함께 신문소에 들어오고 베스도의 명으로 바울을 데려오니

(25:24, 개역) 베스도가 말하되 아그립바 왕과 여기 같이 있는 여러분이여 당신들의 보는 이 사람은 유대의 모든 무리가 크게 외치되 살려두지 못할 사람이라고 하여 예루살렘에서와 여기서도 내게 청원하였으나

(25:25, 개역) 나는 살피건대 죽일 죄를 범한 일이 없더이다 그러나 저가 황제에게 호소한 고로 보내기를 작정하였나이다

(25:26, 개역) 그에게 대하여 황제께 확실한 사실을 아뢸 것이 없으므로 심문한 후 상소할 재료가 있을까 하여 당신들 앞 특히 아그립바 왕 당신 앞에 그를 내어 세웠나이다

(25:27, 개역) 그 죄목을 베풀지 아니하고 죄수를 보내는 것이 무리한 일인 줄 아나이다 하였더라

 

(26:1, 개역) 아그립바가 바울더러 이르되 너를 위하여 말하기를 네게 허락하노라 하니 이에 바울이 손을 들어 변명하되

(26:2, 개역) 아그립바 왕이여 유대인이 모든 송사하는 일을 오늘 당신 앞에서 변명하게 된 것을 다행히 여기옵나이다

(26:3, 개역) 특히 당신이 유대인의 모든 풍속과 및 문제를 아심이니이다 그러므로 내 말을 너그러이 들으시기를 바라옵나이다

(26:4, 개역) 내가 처음부터 내 민족 중에와 예루살렘에서 젊었을 때 생활한 상태를 유대인이 다 아는 바라

(26:5, 개역) 일찍부터 나를 알았으니 저희가 증거하려 하면 내가 우리 종교의 가장 엄한 파를 좇아 바리새인의 생활을 하였다고 할 것이라

(26:6, 개역) 이제도 여기 서서 심문 받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 조상에게 약속하신 것을 바라는 까닭이니

(26:7, 개역) 이 약속은 우리 열두 지파가 밤낮으로 간절히 하나님을 받들어 섬김으로 얻기를 바라는 바인데 아그립바 왕이여 이 소망을 인하여 내가 유대인들에게 송사를 받는 것이니이다

(26:8, 개역) 당신들은 하나님이 죽은 사람 다시 살리심을 어찌하여 못 믿을 것으로 여기나이까

(26:9, 개역) 나도 나사렛 예수의 이름을 대적하여 범사를 행하여야 될 줄 스스로 생각하고

(26:10, 개역) 예루살렘에서 이런 일을 행하여 대제사장들에게서 권세를 얻어 가지고 많은 성도를 옥에 가두며 또 죽일 때에 내가 가편 투표를 하였고

(26:11, 개역) 또 모든 회당에서 여러 번 형벌하여 강제로 모독하는 말을 하게 하고 저희를 대하여 심히 격분하여 외국 성까지도 가서 핍박하였고

(26:12, 개역) 그 일로 대제사장들의 권세와 위임을 받고 다메섹으로 갔나이다

(26:13, 개역) 왕이여 때가 정오나 되어 길에서 보니 하늘로서 해보다 더 밝은 빛이 나와 내 동행들을 둘러 비추는지라

(26:14, 개역) 우리가 다 땅에 엎드러지매 내가 소리를 들으니 히브리 방언으로 이르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가시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

(26:15, 개역) 내가 대답하되 주여 뉘시니이까 주께서 가라사대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26:16, 개역) 일어나 네 발로 서라 내가 네게 나타난 것은 곧 네가 나를 본 일과 장차 내가 네게 나타날 일에 너로 사환과 증인을 삼으려 함이니

(26:17, 개역)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서 내가 너를 구원하여 저희에게 보내어

(26:18, 개역)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두움에서 빛으로, 사단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하고 죄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케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 하더이다

(26:19, 개역) 아그립바 왕이여 그러므로 하늘에서 보이신 것을 내가 거스리지 아니하고

(26:20, 개역) 먼저 다메섹에와 또 예루살렘에 있는 사람과 유대 온 땅과 이방인에게까지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가서 회개에 합당한 일을 행하라 선전하므로

(26:21, 개역) 유대인들이 성전에서 나를 잡아 죽이고자 하였으나

(26:22, 개역)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 내가 오늘까지 서서 높고 낮은 사람 앞에서 증거하는 것은 선지자들과 모세가 반드시 되리라고 말한 것밖에 없으니

(26:23, 개역) 곧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으실 것과 죽은 자 가운데서 먼저 다시 살아나사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 빛을 선전하시리라 함이니이다 하니라

(26:24, 개역) 바울이 이같이 변명하매 베스도가 크게 소리하여 가로되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 하니

(26:25, 개역) 바울이 가로되 베스도 각하여 내가 미친 것이 아니요 참되고 정신차린 말을 하나이다

(26:26, 개역) 왕께서는 이 일을 아시기로 내가 왕께 담대히 말하노니 이 일에 하나라도 아시지 못함이 없는 줄 믿나이다 이 일은 한편 구석에서 행한 것이 아니로소이다

(26:27, 개역) 아그립바 왕이여 선지자를 믿으시나이까 믿으시는 줄 아나이다

(26:28, 개역) 아그립바가 바울더러 이르되 네가 적은 말로 나를 권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 하는도다

(26:29, 개역) 바울이 가로되 말이 적으나 많으나 당신뿐 아니라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노이다 하니라

(26:30, 개역) 왕과 총독과 버니게와 그 함께 앉은 사람들이 다 일어나서

(26:31, 개역) 물러가 서로 말하되 이 사람은 사형이나 결박을 당할 만한 행사가 없다 하더라

(26:32, 개역) 이에 아그립바가 베스도더러 일러 가로되 이 사람이 만일 가이사에게 호소하지 아니하였더면 놓을 수 있을 뻔하였다 하니라

 

 

십자가는 반드시 정치적인 사건으로 표출이 됩니다.
그러니 나무 쪼가리 십자가를 섬기고 우상화 하는게 아닙니다.

그것을 시기하는 자도 없습니다.
나무 쪼가리 섬긴다고 무서워 하는 자도 없습니다.

십자가는 모든 사람들로부터 미움 받는 사건입니다.
그래야 모든 사람들이
이 십자가 사건을 외면하고 고개돌리며 싫어버린바 되는

무서워 할 수 있는 근거가 됩니다.

 

즉 정치적이어야 한다는 겁니다.

정치성은 놀랍게도 반드시 권력이 개입하게 됩니다.

권력이 자기 스스로의 힘이라는 권력을 뽐내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개입할 수 밖에 없도록 십자가는 정치적인 겁니다.

그 권력의 개입과 법의 근거를 둔 지혜가 동원이 되어야
이 십자가는 그 차이로써 그 차별성을 드러내는 겁니다.

 

저는 오늘 본문을 보면서
스토리 자체를 제가 잘 이해를 워낙 못하는 편이라 어렵고

또 정치학도 모르고

법학도 모릅니다.

그런데 그런 것들이 오늘 본문에 복잡하게 나열이 되어 있습니다.

그런것들이 엄청나게 중요하고 또 중요하게 다루어져야 함에도 불구하고
저는 전혀 그런 것들이 안보이고

이 바울의 모습에 전혀 웃을수 없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웃음이 나오는 것은

바울을 통해서 저는 설레임을 보게 되었습니다.

정치적인 상황에서 재판의 과정이 복잡하게 이리로 옮기고 저리로 옮기고 하면서
장황하게 또 성령께서 세세하게 사건의 흐름을 조밀하게 촘촘히 짜고 있지만

워낙 어려워서 그런 것은 잘 안 보이고

지금 바울은 그런 것 보다

설레임으로 어떻게하면 저들에게 예수님을 전할까 라는 그저 단순한 모습을 보고
놀랍기도 하고
웃음이 나기도 합니다.

이 얼마나 심각한 상횡인데 전혀 심각함이 없는 그 여유로운 모습이

저를 웃게 하고 얼마나 부럽게 만드는지 모릅니다.

아 그래서 십자가는 반드시 정치적이어야 하구나 라는 것을 보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바울을 중심으로 한 주변의 인물들을 살펴보면

다들 그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서 얼마나 공부를 했으며

또 전쟁의 공로를 세우고
행정관리직을 차지하기 위해 수많은 경쟁자를 물리치고
또 경쟁의 경쟁을 뚫고 그 자리에 섰느냐 말이죠.

특히 법을 다루는 자는 오죽 더 하겠습니까?

평생을 법만 공부했을테니 말입니다.

 

그들에게 갑자기 바울이 툭하고 튀어나와 그들 앞에 섰습니다.

 

다들 그 자리에 앉기까지 얼마나 고생의 고생, 수고를 하면서
딱딱한 그 자리를 차지하는데 있어서

 

바울은 마치 말랑 말랑한 젤리 같아 보입니다.
자기 스스로를 변호할 그 어떤 든든한 방패막이가 없이
홀라당 발가벗겨진채로 놓여져 있습니다.

 

유대인의 고소로 재판에 서게 되었지만

정말 정말 어울리지 않는 말랑 말랑한 젤리가

저들의 회칠한 무덤과 같은 딱딱한 돌덩이 속에

그 가운데 말랑 말랑한 젤리가 있다고 상상을 해 보세요

모조리 다 절망 절망뿐인
생명이라고는 눈꼽만치도 찾아볼수 없는 쇳덩어리들 속에서

설레임이 가득한 물 한방울이 있다고 생각해 보세요

손대면 톡하고 터질것만 같은 그대 바울 ~~~~ 물 방울이라 부르리 ~~~

마치 바울은 그런 물 방울과 같이 보입니다.

그런데 이 설레임이 가득한 물을 어떻게 해서든 죽이고자 합니다.

 

또 재판에 승소해서 자신의 경력을 쌓고자 합니다.

또 어떻게 해서든 딱딱한 체제를 유지하고자
이 부드럽고 유약한 나약하고 어리석고 무지한 것들을 제거하고자 합니다.

어떤 죄목을 붙여서라도 이 기존의 체제를 유지하고자 하는 그런 마음들로 가득한 곳에서

전혀 어울리지도 않는 물컹물컹한 설레임이 이들 가운데서서

 

전혀 낯설기 짝이 없는 사건을 유발시키는 겁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제자들이 서로 누가 크냐 라고 논쟁하는 가운데
어린아이 하나를 중앙에 세워
천국에서는 이런 어린아이의 것이다 라고 하듯이

 

바로 이 내용을 확장시켜서 보면

오늘 본문과 같이 되는 겁니다.

 

 

! 우리가 어린아이를 하나를 중앙에 세워 놓고
재판을 한다고 해 봅시다.

너 왜? 대학교 안 나왔어?
너 왜? 부자 되지 못했어?

너는 왜 수준이 아직도 그 수준이야?

우리는 다 결혼한 성공한 남자인데, 너는 왜 아직도 성공 못해서 결혼도 못해?
너는 왜 아직도 자라지 못한 거야?

이렇게 물어 보세요
얼마나 웃깁니까?

이것은 이미 자기자신을 안정빵에 놓고서는 상대적으로 거리감을 두기위해
상대방을 공격하는 겁니다. 

에이 설마 이제 초등학교 막들어갈려는 어린아이에게 그렇게 묻는 사람이 어디있어요?
오바하고 있네!!

그런데 저런 기준으로 살지 않는 사람이 있느냐 말이죠?
다들 그런 기준으로 삽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예수님 앞에서도 누가 크냐 라는 논쟁이 된 겁니다.

즉 논쟁이 되었다는 것은 그들의 일상 곧 평상시의 모든 관심사였던 겁니다.

저런 질문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오늘 본문 끝부분에

바울아 너 미쳤구나 라는 말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너가 너무 학식이 많아서 너를 미치게 했구나 라고 말입니다.

저는 이 표현이 참 제대로 봤구나 라고 생각했습니다.
베스도라는 유대총독은 지금 바울을 호의적으로 대해왔습니다.

최대한 공정하게 어느 편에도 서지 않고 중립의 자리를 지키면서 말입니다.

 

그런 이성적인 사람인 베스도 조차도 못말릴정도로 바울은 미쳤다 라는 소리를 할 수 밖에 없는 것은

 

바로 바울이 지금 죄인으로써 고소 당해 죄가 있냐 없냐 라는 그런 판국에
그 재판의 장인, 
그 장소를

 

엉뚱하게 자신의 사명인 복음을 증거하는 자리로 만들어 버림에 있어서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하니

 

비로소 본색이 드러나면서 그렇게 이성적인 사람이 홱까닥 변해 버리는 겁니다.

 

아니 죽은 자가 어떻게 다시 살아나느냐 말이지요

 

미쳐도 보통 미친게 아닌 겁니다.

 

베스도 총독이 봐도 보통 학식이 아닌 바울임을 보게 됩니다.

재판을 진행하는 그 과정 속에서 뛰어난 변호와 통찰력

어떻게 이런 재판이 흘러가는 지를 다 알고 있다는 것을

베스도 유대 총독과 아그립바 2세 유대왕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 너가 나를 그리스도인으로 만들려고 하는구나 라고 아그립바는 말합니다.

즉 이 바울은 지금 유대인의 고소나 이들 정치가들의 재판 따위에 관심이 없어
그저 자신이 복음을 외치는 기회로써만 이 시간과 공간마저도 활용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겁니다.

그동안의 바울에 대한 소문을 통해서도 말입니다.

 

그러니 이것은 재판이고 뭐고 그냥 소음으로 취급해 버립니다.

듣기 싫은 겁니다.

유대인들의 고소 즉 그 심각성에 대해서

듣기 싫은 소음으로 처리함으로써 더 이상 귀찮게 하지 말라는 겁니다.

 

애들은 가라 애들은 꺼져입니다.

그러나 십자가는 반드시 이 어린아이를 이 딱딱한 체제 속의 한 가운데 집어넣습니다.

 

마치 칠십인을 보낼때에 어린양을 늑대소굴에 보냄과 같다고 하신 것처럼 말입니다.

그렇게 되면 늑대들이 갑자기 마늘먹으면서 인간이 되고파 하다가
갑자기 이 양냄새 때문에 삐죽 삐죽 날까로운 발톱을 드러내어야만 하듯이
그 본색을 드러내는 겁니다.

 

천개의 마늘, 천개의 고원, 이제 거의 다 왔는데
고지가 눈 앞에 보이는데

하필이면 969개째, 970개째 마늘을 먹는 찰라에

바울이라는 것이 갑자기 툭 하고 튀어나왔으니
미치고 환장합니다.

 

참고 참고 또 참는데
더 복장 터지는 소리를 하는 겁니다.

 

간따나 갈기 갈기 찢어 죽이고 싶어서 환장한 마음을 꾹 참는데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자꾸 이야기 합니다.


이 늑대소굴이 늑대우리가 된게 아니라
바울의 예수님의 죽었다 다시 살아나심을 외치는 복음전파터가 된 겁니다.
천국이 침노 당하는 터가 된 겁니다.

그러니 이놈이 미쳤구나 봐줄려고 했는데 똑똑한게 아니라
너의 학문이 너를 미치게 했구먼

감히 우리의 천국을 침략하다니

안어울리는 겁니다.
물과 기름처럼 제대로의 단절성을
오히려 저들이 고맙게도 외쳐주고 있는 겁니다.

자 이런 의미에서 십자가는 반드시 정치적이어야 하는 겁니다.
하늘나라와 땅의 나라의 부딧힘이어야 합니다.

저들의 심기를 건드리는 불편함을 그 중앙에 푯대를 꼿듯이 꼿으면
그 건드릴수 없는 성역이 툭 하고 건드리게 되니
도저히 견딜수 없는
육의 원수성이 막 터져나오는 겁니다.


그러니 이 상황이 완전 거꾸로 된 겁니다.

원수의 성문을 벌컥 벌컥 열어재낀 겁니다.

죄인이 재판관 한테 심문을 당해야 하는 판국인데

우찌 거꾸로 죄인인 바울이 재판관을 심문하면서

꼬깃 꼬깃 감추어진 본성을 확 터트리게 하는 겁니다.
고문도 이런 고문이 없습니다. 

이런 경우가 예수님의 생애에서 많이 나타났습니다.

유대인들의 심기를 초반 초장부터 건드리게 되니까
낭떠러지 끝으로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밀어 붙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착각한 겁니다.

분명히 자신들이 예수님을 등떠밀어 몰아넣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이 예수님을 낭떠러지로 밀어 붙인게 아니라
거꾸로 예수님이 유대인을 낭떠러지로 우르르 몰리게 했던 겁니다.

그리고서는 약을 바짝 올릴대로 올려 놓고서는
유유히 아직 죽을 시간이 아니다 라고
그 가운데를 벌리면서 여유있게 내려오시는 겁니다.

괜히 꼬깃 꼬깃 감추어온 메시아 살인의지만을 들통당한 겁니다.

왜 이런 이상한 장면이 연출이 되어야 하는 겁니까?

바로 정치성입니다.


제가 이 목사로부터 놀라운 점을 발견해서 참으로 신비하고 이상한 체험을 무수히 많이 했습니다.

그런다고 죄아닌 것은 아닙니다. 다 죄일 뿐입니다.

자꾸 사람들을 약을 바짝 바짝 올리는 겁니다.

본인이 항상 주어는 생략한채로(나의원) 동기부여를 해서
일제히 공격을 하게 놓고서는

자기는 싹 빠져나가버리고서는

행동대장 보는 앞에서 갑자기 힘내세요 참으세요 라고 격려를 해 주는 겁니다.
아예 바로 코 앞에서 들으랍시고

그렇게 되니까 이 행동대장이 완전히 돌아버리는 겁니다.
저때문에? 아니죠. 아주 약을 바짝 바짝 올려버리니 말입니다. 증폭시켜버리는 겁니다.

저는 오히려
왜 이카지
?
이 사람도 이상하고
이목사도 와카는지 모르겠고

그러다가 이 행동대장이 주변사람의 눈이 있으니까
또 갑자기 저에게 잘해주더니

저는 또
야는 또 왜 오바를 하지 라고


그저 관심자체를 두지 않아버리니까

그게 오히려 더 열받게 했는지 몰라도
그런 호의를 무시했다고 여겼는지

그 다음에는 더 미친 듯이 날 뛰길래

그냥 그러든 말든 무시해버렸습니다.

이런 일들이 몇 번씩 반복이 되더니만 결국은 때거리로 나가버렸더군요.

지금 또 이런 행동대장 만들려고 부지런히 주님께서 일하시는 것을 보고
그저 주여 저 좀 빨리 죽여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어차피 나이들어 죽든 병들어 죽든
살아도 죄 뿐이요
뭘 해도 죄 뿐이요
늘 복음에 방해만 될 뿐이니 죽여달라고 말입니다.

즉 복음은 철저하게 정치적이다는 겁니다.
마귀를 만들어 낼 줄 모르는 복음은 가짜 인 겁니다.


아니 멀쩡하던 총독 베스도가
예수님의 부활을 이야기하니
해까닥 하는 겁니다.

바울을 아무리 도와줄려고 해도 안됩니다.

저들의 정치성을 말하는게 아닙니다.

그 반대입니다.

 

복음이 철저하게 정치적이다는 겁니다.
저들의 외설성 보다 더 외설적인 것이 십자가의 용서 입니다.

솔로몬 재판에서 평상시 버릇대로 잠자다가 깔려 죽은 아기
그 아기의 엄마인 창녀가
다른 창녀에게 고소를 했는데

이 장면이 하도 웃겨서 어머니랑 어제 이런 대화를 나누었는데요
왜 기여이 이 사건이 솔로몬이라는 왕의 자리까지 갔어야만 했느냐 말입니다.

제일 밑바닥 틍 지하 12층의 사건이 제일 꼭대기 63빌딩 63층으로 수직상승합니다.
평생을 걸려도 높은자리 한 층 올리는 것도 불가능한 판국에

어린아이 하나가 누가 제일 높냐라는 서로가 수준높다고 자랑하는 그 제일 꼭대기 층에
제일 먼저 올라가 버리는 겁니다. 잉여증폭기 처럼 말입니다.

(마 21:31, 개역) 『그 둘 중에 누가 아비의 뜻대로 하였느뇨 가로되 둘째 아들이니이다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리들과 창기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

(막 10:31, 개역)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


그 조그마한 동네에 자기들끼리 해결하거나
또 그런 창녀들간의 문제가 충분히 무시 받고도 남아
사라져버릴 일 임에도 불구하고

왜 높고도 높은 그 왕의 자리에 까지 이 사건이 올라가느냐 말입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물론 아무도 해결을 못하니까 올라갔다고 여기지만

저는 그게 올라갈 문제 꺼리가 되지 않는다고 보는 겁니다.

요즘 식으로 해 볼까요?
감옥에서 평생 썩고 있는 무기징역 사형수 두 죄인 두 창녀가
그 둘 간에 벌어진 다툼의 사건이
대통령의 지혜가 있느냐 없느냐 하는 문제로 까지 올라갔다는 겁니다.

얼마나 웃깁니까?

올라갈수 조차 없는 무시 당해도 벌써 무시 받는 사건이다는 겁니다.

중간에 수십번 건드려서 벌써 사라지고 묻혀 버릴 수 있는 사건을
아주 아주 무가치한 일, 그 정도로 사라져도 무방한 일이다는 겁니다.
창녀들 본인들도 원한적 없습니다.

기여이 한 쪽 창녀가 올리긴 해도
질 것 같으면 왜 올리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고의 지방법원 고등법원 대법원

심지어 대법원에서 조차 해결이 되지 않아서

대통령에게 까지 올라갔다고 칩시다.

오늘 본문이 딱 그런 상황입니다.

(26:32, 개역) 이에 아그립바가 베스도더러 일러 가로되 이 사람이 만일 가이사에게 호소하지 아니하였더면 놓을 수 있을 뻔하였다 하니라

 

가이사 재판까지 올라갈 이유가 전혀 없었을 텐데 라고 하는 겁니다.


놓아줘도 벌써 놓아주고도 남았을 사건이라는 겁니다. 아니 사건도 아닌 겁니다.
유대인의 시기심 때문인것 뿐인데요 뭘.

그런데도 올라 갑니다. 참으로 신기합니다.
이것을 어머니랑 나누는데 서로 웃고 배꼽잡고 난리였습니다.

아니 바보입니까?
저들이 법을 모릅니까?

왜냐하면 억울한 창녀가 나쁜창녀와의 재판에서 이겼다고 해 보세요
또는 나쁜 창녀가 억울한 창녀를 이겼다고 칩시다.

기쁠까요? 안 기쁩니다.
왜냐하면 신분 때문입니다.

창녀가 이겼데요 호외요 호외 라고 외쳐보세요.
말도 안되는 일이 벌어졌다는 겁니다.


이건 뭐 더 쪽팔리게 하는 겁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핍박했다고 더 외쳐야 할 판국인 겁니다.
또 그리스도인들을 잡아 죽이기까지 했다고 더욱더 외쳐야 할 판국입니다.

그것도 반드시 정치범의 죄수복을 입고서 말입니다.

자신의 죄악을 조목 조목 이야기 하지 않으면 그게 무슨 복음증거입니까?

지난 시간에 말했죠 회심장면을 외치는게 아니다고
그거 우려먹는 목사들 다 개사기 라고
정반대입니다. 제발 날 좀 죽이세요 라고 약을 바짝 바짝 올리는 것이라고.

즉 전혀 정치화 될 필요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주님께서 이 사건을 반드시 철저하게 정치화 함으로써

 

그 당시의 최고의 권력의 자리에까지 올려놓습니다.

솔로몬 왕의 자리에 까지 올라가야만 하는 겁니다.

 

뭐가? 아주 볼품없는 아무것도 아닌 동네에서 벌어진 그 사건이

그 흔하디 흔한 사건으로 취급받아도 마땅한 일이 말입니다.

 

이것은 반드시 정치화 됨으로써

솔로몬 왕의 지혜를 발현케 하기 위함인 겁니다.

창녀의 억울함 풀어주기 위한 개인의 문제 해결용이 아닙니다.

 

반드시 정치화 된다는 것은

 

십자가의 지혜가 왜 옳은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즉 긍휼 곧 불쌍히 여겨주심 때문에

그 무가치한 사건이

왕의 자리에 까지 올라와야 한다는 것을 말하는 겁니다.

십자가의 용서 때문에 정치화 되는 겁니다.

 

바울은 그런 입장에서 사건을 날라 퍼 담는 하나의 그릇
신문지
편지
우편배달부

메신져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는 발걸음

바구니

접시

주머니
가방
보따리

라는 겁니다.

포대기로써 뭔가를 담는 겁니다.

 

바로 죄입니다.

죄란 바울 개인의 죄가 아니라

인간이 이 바울을 고소하는 죄
그것도 힘으로 권력으로 정치성으로써

뒤짚어 씌움인 겁니다.

 

자신들이 복음이라는 빛 앞에서 감추고자 하는 어두움의 죄덩어리를
이 바울을 통해서 담게 되는 겁니다.


발각당하는 겁니다.
 

바울은 그래서 담아야 합니다.

 

담고서 그 위에 피를 증거하는 겁니다.

본인조차도 그렇게 당해서 생명을 얻었다고 합니다.

 

이것이 맞물려야 합니다.

 

바울은 제외되는 겁니까? 아닙니다. 바울 본인도 포함되면서 말입니다.
피가 주인공이지 바울이 주인공이 아닙니다. 그저 피를 담는 포대기일 뿐입니다.
퍼 담는 그 그릇도 맞물리면서 말입니다.

 

이렇게 십자가는 두 양쪽을 정치적으로 고문하는 겁니다.

둘 다 다 십자가에 걸려들어야 하는 겁니다.

바울이 로마에 가서도 역시나 십자가의 정치성에 말려들어야 합니다.

양쪽 다 죄인일 뿐이며

양쪽 다, 다 죄가 걸려들어야 하는 겁니다.

도저히 좁힐수 없는 그 두 양쪽 그 사이의 간격을 형성해
그 빈터에서 모조리 다 미끄러지게 하는 겁니다.

솔로몬 자신의 지혜를 드러내기 위해서
되도 않는 무가치한 사건이 반드시 왕의 자리에 까지 올라와야 하듯이

십자가를 증거해도 역시나 죄입니다.
죄 아닌게 없습니다. 뭘 해도 죄 입니다.
십자가는 십자가 스스로 만이 증거할 뿐입니다.
바울이 무슨 짖을 해도 역시나 죄입니다.

중요한 것은 십자가의 정치성입니다.
여기에 인간들의 정치성이 말려들어야 합니다.

십자가 스스로가 자신의 십자가의 지혜를 드러내기 위해서
가장 높은 자리에 까지 비천한 것과 미련한 것들을

산넘고서 물건너서 바다건너서 셔셔셔 하면서

올라오도록 끌어올리는 겁니다.

그리고 이 십자가라는 정치는 양쪽다 고문을 합니다.

아주 아주 잔인한 고문을 하는 겁니다.

 

아기를 두 조각 내어서 양쪽다 나누어 주어라 라고

너무 너무 무심하기 짝이 없는
도저히 있을수 없는 잔인한 판결을 합니다.

그 혹독한 심판 속에
그 속에서만 긍휼이 있다는 겁니다.

용서가 있다는 겁니다.

예수님이 갈기 갈기 찢겨 죽으신 그 현장에 올라가야만이
사랑이 있다는 겁니다.

 

그 무시무시한 잔인한 불길 속에서만이

용서가 있는 겁니다.

 

이 십자가의 정치성은 우리를 몰아 넣고자 하는 겁니다.

잔인하지 못한 십자가는 다 약장사의 구라입니다.

바울은 지금 몰아넣는 겁니다.

딴서 보지 말고
이 십자가의 피 보자고

 

저들이 외면하든 말든

한꺼번에 다 싸잡아 포대기에 담아

이 예수님의 죽음과 다시 사심 앞에

모두를 풀어 헤치는 겁니다.

이건 설득해서 전도시킬려고 하는게 아니라

그 반대로 간따나 싫은데 더욱더 싫게 하는 겁니다.

그러든 말든 저들에게 그리스도의 긍휼을 증거합니다.

나 봐라 이런 예수님의 핍박한 나도 예수님의 용서를 받았잖아 잖아 자나 ~~~

다들 또 돌려보내버립니다.

나 안들을래 위로 올려 보내
법대로 해

가이사에게 가서 카렴

 

다 귀를 막고 눈을 가리우면서

못들은 척

외면해 버리는 겁니다.

 

법 재판도 흐지브지

오로지 귀를 막는대만 열중일 뿐입니다.

저 미친놈 누가 좀 데리고 갔뿌라
허이 허이
손사래 치는 겁니다.

이런 판국이니

유대인이 고소 안하고 배기겠습니까?

십자가의 정치성에 안 말려 들고 배기겠습니까?

 

누가 더 정치적입니까?
누가 더 강합니까?
저들의 살인의지입니까? 아니면 십자가의 피 용서 입니까?

누가 더 잔인한 겁니까?

일만달란트 탕감 보다 더 잔인한 용서 있으면 나와보라 하세요!!

뭐 7번 용서 ~~~ 뭐 일 곱 번 ~~~ 참나 소는 누가 키울지 웃기는 일곱번입니다.

마귀도 이 십자가의 피 용서에 동원되는 도구요 똘마니일 뿐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더욱 더 설레임이 가득차 있는 겁니다.

모조리 용서로만 깔려있기 때문입니다.
어디를 가든 무엇을 하든 먹든지 마시든지
피만이 깔려 있는 현장 현장 뿐이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또 어떻게 날 죽이실까?
주여! 오늘은 무슨 죄를 지을까요? ?













 

 







'성령행전(피활동,인간극복)' 카테고리의 다른 글

1초 신앙  (0) 2014.01.11
죄 값  (0) 2014.01.10
무한 집행 유예 (계류기술)  (0) 2014.01.09
거짓말과 천년이 하루 같이  (1) 2014.01.08
귀한 고난, 귀한 저주  (0) 2014.01.07
Posted by 김 대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