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전한 밝은 빛 (11:33-36)

 


(
11:33, 개역) 누구든지 등불을 켜서 움 속에나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는 들어가는 자로 그 빛을 보게 하려 함이니라

(11:34, 개역) 네 몸의 등불은 눈이라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만일 나쁘면 네 몸도 어두우리라

(11:35, 개역) 그러므로 네 속에 있는 빛이 어둡지 아니한가 보라

(11:36, 개역) 네 온 몸이 밝아 조금도 어두운 데가 없으면 등불의 광선이 너를 비출 때와 같이 온전히 밝으리라 하시니라

 

 

이웃 기도 표적 에 이어서 오늘 본문은 빛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즉 뭔가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엉터리 이웃 엉터리 기도 엉터리 표적

오늘은 엉터리 빛

 

그리고 대조, 비교해 보라는 겁니다.

 

그럼 그 엉터리 빛이 무엇입니까?

 

그 내용은 그 다음 본문에 나옵니다.

빛의 자녀라고 하는 자들이

사실상 어두운 짖만 골라서 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것이 참 모호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백날 봐도 그것이 빛 답다고 배워왔고

또 그것이 맞다고 합니다.

 

그것이 아니면 빛 다움이 뭔지 알길이 없을테니 말입니다.

다른 [빛 다움]이 뭔지 모른다는 겁니다.

 

이것이 참 신비입니다.

 

즉 단 한번도 우리는 빛을 본 적이 없습니다.

그래놓고 빛의 사람이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 대표성이 바로 바리새인의 행동으로써 그 다음 본문에 지적하시는 내용입니다.

 

에이 그냥 다 오늘 다루어 보기로 하죠 뭐

 

(11:37, 개역) 예수께서 말씀하실 때에 한 바리새인이 자기와 함께 점심 잡수시기를 청하므로 들어가 앉으셨더니

(11:38, 개역) 잡수시기 전에 손 씻지 아니하심을 이 바리새인이 보고 이상히 여기는지라

(11:39, 개역) 주께서 이르시되 너희 바리새인은 지금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나 너희 속인즉 탐욕과 악독이 가득하도다

(11:40, 개역) 어리석은 자들아 밖을 만드신 이가 속도 만들지 아니하셨느냐

(11:41, 개역) 오직 그 안에 있는 것으로 구제하라 그리하면 모든 것이 너희에게 깨끗하리라

(11:42, 개역) 화 있을진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의 십일조를 드리되 공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버리는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아니하여야 할지니라

(11:43, 개역) 화 있을진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회당의 높은 자리와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을 기뻐하는도다

(11:44, 개역) 화 있을진저 너희여 너희는 평토장한 무덤 같아서 그 위를 밟는 사람이 알지 못하느니라

(11:45, 개역) 한 율법사가 예수께 대답하여 가로되 선생님 이렇게 말씀하시니 우리까지 모욕하심이니이다

(11:46, 개역) 가라사대 화 있을진저 또 너희 율법사여 지기 어려운 짐을 사람에게 지우고 너희는 한 손가락도 이 짐에 대지 않는도다

(11:47, 개역) 화 있을진저 너희는 선지자들의 무덤을 쌓는도다 저희를 죽인 자도 너희 조상들이로다

(11:48, 개역) 이와 같이 저희는 죽이고 너희는 쌓으니 너희가 너희 조상의 행한 일에 증인이 되어 옳게 여기는도다

(11:49, 개역) 이러므로 하나님의 지혜가 일렀으되 내가 선지자와 사도들을 저희에게 보내리니 그 중에 더러는 죽이며 또 핍박하리라 하였으니

(11:50, 개역) 창세 이후로 흘린 모든 선지자의 피를 이 세대가 담당하되

(11:51, 개역) 곧 아벨의 피로부터 제단과 성전 사이에서 죽임을 당한 사가랴의 피까지 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과연 이 세대가 담당하리라

(11:52, 개역) 화 있을진저 너희 율법사여 너희가 지식의 열쇠를 가져 가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또 들어가고자 하는 자도 막았느니라 하시니라

(11:53, 개역) 거기서 나오실 때에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맹렬히 달라붙어 여러가지 일로 힐문하고

(11:54, 개역) 그 입에서 나오는 것을 잡고자 하여 목을 지키더라

 

11장 마지막 절까지

 

바로 이 모습이 빛의 자녀라고 하는 자들의 어두운 모습입니다.

참 재미있는 표현이지요? 빛의 자녀라고 하는 자들의 어두운 모습!
전혀 빛과 상관이 없는
예수님과 상관이 없는 자들의 모습 

 

바로 이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바리새인의 모습에서 한 발짝도 벗어난 적이 없다는 겁니다.

이들과 똑같이 빛의 자녀라고 하면서 정작 우리는 이 어두운 자들과 똑같습니다.

어두운 속내가 어쩌면 우리 모습을 그대로 적나라 하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런 소리 조차도 교회에서 해 보세요 누가 가장 싫어하겠습니까?

 

결국 교회는 사기 집단일 뿐입니다.

 

이 본문을 그대로 교회에 적용해 봅시다.

 

누가 과연 화를 내겠습니까?

 

딴데 적용할 곳도 없잖아요?

교회에 적용할 곳 외에는?

 

자 그럼 답이 나왔습니다.

빛 다움이 뭐냐?

 

빛과 소금이 되자 라고 교회에서 외치지만

정작 그 내용 그대로 적용해 보면

 

우리가 이런 어두운 마음이 있으면서

곁으로는 빛으로 둔갑한 모습이다는 겁니다.

 

그럼 진짜 빛은 이런 가짜 빛을 어두움으로 제대로 규정하는 겁니다.

그렇지 못한 빛은 가짜 빛이지요

 

그렇기에 빛은 그 빛 다움을 제대로 보여주기 위해

더 나은 거리두기를 펼치는 겁니다.

즉 단절의 단절입니다.

 

그것을 지난 시간에는 강한 것 보다 더 나은 강한 자

 

또는 요나 보다 더 큰 이, 더 큰 자 라고 했습니다.

 

뭔가 더 낫다 라는 것은

 

인간들이 이것 보다 더 나은 것은 없을 꺼야 라고

모든 것을 끌어 모아서 찾아내고 열심히 쌓은 것

그 강함 보다

 

월등히 앞서 버리는 더 나은 강함

더 나은 크다 앞에서

졸지에 상실감을 얻게 되는

 

졸지에 그 앞에서 무능함을 얻게 되는 상태를 말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일단 모든 열심히 끌어 모아서

이것 보다 더 강한 것 없을 꺼야 라고 일단 모아 놓고

 

그것 조차도 무능하게 만들어 버리는

원인 없는 결과인 우발성 앞에서

무릎 꿇게 만들어 버리는 더 나은 강함

더 크신 자를 만나는 것이 중첩 공명을 이루어야 하는 겁니다.

 

 

앞의 것이 선행이 되지 않으면 뒤의 것이 의미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뒤의 것이 먼저 있었다는 것이 될려면

앞의 것이 무능함으로 취급 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위해서는 앞의 것은 뒤의 것을 무시하는 상태가 전제 되어야

팔을 어긋맞게 하는 은혜(단절)을 보게 되는 겁니다.

 

그럼 그 단절이 뭐냐?

강한 것 보다 더 강한 것

큰 것 보다 더 큰 것

 

이런 과잉성은 무엇인가?

단절의 단절이라는 과잉성은 바로

 

창세전에 있었던 겁니다.

 

놀랍게도 모든 인간이 저 마다 가치 있다는 것을 외치는 바람에

가장 무시받고 없음 취급 당한 것이

바로 창세전에 유일하게 있었던 겁니다.

 

바로 은혜입니다.

 

흔히 종교에서 은혜 은헤 라고 하지만

정작 은혜의 의미를 순 엉터리로 설정한 겁니다.

 

왜냐하면 그 은혜가 나에게 은혜가 되어야 은혜라고 외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은혜가 아닌 거죠.

 

진짜 은혜는 나에게 전혀 은혜가 되지 않는 것이 은헤입니다.

 

나에게 은혜가 안된다?????

 

그럼 은혜가 안되면 무엇이 되는데?

 

 

그 반대입니다.

은혜란 몽둥이입니다. 찔림입니다.

 

차단당함입니다. 은혜로부터 은혜 받는게 아니라

은혜로부터 단절 당하고 무시당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그 은혜를 과연 원하고 소망하고 쳐다 볼수 있겠니 라는 것이 오늘 본문의 취지입니다.

 

 

오늘 본문에 그것이 눈과 빛의 관계성으로 나타납니다.

눈이란 뭔가를 본다는 것이 전제 되어 있습니다.

눈의 기능인 본다 라는 것이 없으면 그 눈은 눈의 의미가 더 이상 없는 겁니다.

 

눈은 뭔가를 봐야만 하도록 되어 있다는 겁니다.

 

여기에 빛은 하나의 응시물입니다.

눈을 확 끌어 당기는 자극제입니다.

안 쳐다 보고는 못배기도록 하는

눈의 기능을 뛰어넘는

그래서 눈을 다 확 사로잡아 버리는 기능인 겁니다.

 

 

마치 짝꿍과 같이 눈과 빛은 공명을 이루는 겁니다.

그렇다고 하나다 라고 하는게 아니라

오히려 두 개가 두 개의 기능을 확실히 하면서

그 기능에서 전혀 새로운 기능은 단절이 그 간격에서 나오는 것을 말하는 겁니다.

결코 하나 라는 동일성이 되는게 아니라

그 반대로 차이성을 제대로 보여준다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둘 다 응시물로써 자리잡게 되는 것이겠지요.

 

눈이 빛을 응시하게 되고

그 빛을 봄으로써 눈은 응시물로써 어두움으로부터 단절 되는 겁니다.

 

 

쉽게 말해

제가 몇 달 전부터 계속 머리 속에서 떠나지 않는 생각이 뭔고 하니

아니 오래전부터 늘 잠재해 있던 생각이 있는데

처음 예수님을 믿고 성경을 접하게 되면서 늘 떠나지 않는 문제가 뭔고 하니

 

그 부분을 읽을 때 마다 참 이상하다는 겁니다.

 

즉 요나 이야기에서

 

큰 물고기 뱃속에서 3일 동안 있다가 구원 받고서

그 다음에 니느웨 심판을 외치는데

요나가 그만 삐져서 자살 시위를 하고서

주님은 그런 요나를 설득 시키는데

사실은 설득이 아니지만 말입니다만

 

늘 떠나지 않는 의문이

 

왜 이야기 구성이 뭔가 잘못 된 것 아니냐 하는 겁니다.

큰 물고기 뱃속 3일 사건이 사실은 제일 뒤에 클라이막스로 가고

그 뒷 이야기들은 앞으로 와야 하지 않는가 하는 점입니다.

 

왜 그럴까?

얼마전에 아 이거구나 라고 해 놓고서는

또 까먹어 버리고

다시 참 이거였지 해 놓고서는 또 까먹어 버릴 정도였으니

참 신기했습니다.

 

답이야 쉽게 십자가가 먼저 이고 우리는 나중이니까 당연하다고 생각하면 쉽지만

정작 우리는 선악을 기억하는 몸 곧 시공간을 기억하는 몸이기에

 

 

얼마나 이 의미를 거부하는 몸인지를 생생하게 보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몸이 장난이 아니게 거부하는 모습을 격게 되는 겁니다.

 

요나도 마찬가지 였지요 자살시위를 하잖아요

엘리야도 마찬가지

 

베드로도 마찬가지 절대로 나는 예수님을 배반하지 않겠습니다 손에 장 지집니다

 

왜 이러냐 말이죠.

 

이것이 바로 인간의 믿음과 차이나는 빛되신 예수님의 믿음이 채우시는 내용물입니다.

 

원인 없는 결과로써 이미 우리 몸은 단절을 격게 됩니다.

요나의 표적으로 그 3일 이라는 간격을 격게 됩니다.

그러나 정작 우리는 그 의미가 뭔지 모르기 때문에

내 믿음으로 채워넣는 겁니다.

?

나는 이제 십자가를 알았으니까

남들이 격지 않은 나만의 십자가의 내용물을

이렇게 그 속에 담아서 채워야지 라고 채우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그것 마저도 튕겨버리고

그 튕겨버리는 상실감을 통해서

더 나은 것을 채워넣으시는 에수님의 믿음이 뭔가

그 내용물이 뭔가를 보게 하신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내가 채워넣겠다는 것과의 대조 비교를 통해서

우리가 얼마나 원수 짖만 골라서 해 왔던가를 밝혀 보여주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빛의 기능입니다.

내가 빛 다운 행동을 어두움을 끊고서 겨우 겨우 개가천선해

억수로 열심히 노력해서 그 내용물을 채워넣었는데

졸지에 무참히 똥덩어리 배설물 취급당하는

그 주체

더 나은 빛이 그것을 깡그리 무시하고 그 내용물로써 확 채워질 때

과연 그 빛을 쳐다보고

감사하고

고마워하고 할수 있느냐 하는 겁니다.

 

즉 내가 모은 은혜의 조건에 부합된 것들을

모조리 무시하는 진짜 은혜

 

나의 은혜를 나의 믿음을 무시하는 진짜 믿음을 쳐다 볼수 있느냐

나의 빛된 행동을 어두움 마귀 취급하는 진짜 빛

진짜 빛이란 나의 빛을 반드시 무조건 가짜 취급해 버리는 빛 만이 진짜 빛이라고

과연 기쁘게 쳐다볼수 있느냐 하는 문제이다는 겁니다.

 

그것이 오늘 본문에 나오는 빛을 제시하시는 예수님이 말하시는 빛입니다.

 

결국 쉽게 말해 나를 무조건 어두움 취급해 버리는 빛인 겁니다.

 

그럼 나는 빛과 무관하게 되잖아요?

 

과연 그럴까?

 

너 보다 더 빛의 행동의 달인들은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이라는 빛에 완전 깡그리 무시 당하는 내용물을 채워서 보여주니까

 

내가 그렇게도 부러워 하고

나도 저렇게 해서 빛의 자녀로써 주님께 영광 돌리겠다는 그 내용물들이

 

사실은 예수님을 죽이고 싶어서 안달이 난 모습이다는

 

그 겉모습을 홀라당 벗겨버리는 그 속내를 보고

 

바리새인만 놀란게 아니라

 

우리도 똑같이 놀라서

 

왜 벗기냐고 달려드닌 저 적나라한 속모습을 우리도 똑같이 지적 당해 보자라는 겁니다.

 

즉 빛은 내 숙제가 아니라

진짜 빛 스스로가 자신의 숙제

빛의 숙제를 어떻게 보여주는지

빛이 뭔가를 보여주는지를 한번 빛을 보자 라는 겁니다.

 

그런 빛을 보는 눈이 아니다면 저들과 똑같은 어두움이다는 겁니다.

 

빛이 어두움을 밝히는 그 과격함을 누려보자 라는 겁니다.

 

그것을 쳐다 볼수 없다면

그 눈은 어두운 눈이요

그 눈의 출처인 몸은 어두운 몸

즉 성하지 못한 몸

병든 몸이다는 겁니다.

 

우리가 보아 왔듯이

정작 소경은 예수님을 봤습니다.

 

그러나 그 실로암 소경을 가지고 노는 신학박사들은

자신들이 본다고 하니까 정작 어두운 소경이였음을 예수님께서 지적하신 겁니다.

 

눈을 누가 지었습니까?

 

 

눈이 예수님을 봐 버렸다면

병든 몸일지라도 건강한 몸입니다.

 

그런데 소경도 아닌데 예수님을 못 본다면

그 몸이 아무리 건강한 몸이라 해도

 

예수님과 상관이 없는 의인이라서 지옥에 갈 몸이다는 겁니다.

 

참 재미있고 역설적인 표현이지요

 

의인이라서 건강해서 지옥에 가고요

죄인이라서 병든 소경이기에 천국에 가는

 

이 역설

 

아킬레스가 죽었다 깨어나도 거북이를 못 따라 잡는 이유인 겁니다.

 

거북이는 누릴 뿐이고

아킬레스는 평생을 지킬 뿐이니까 말이죠.

 

창녀와 세리와 강도는 누리는 삶이고

의인과 건강한 자와 지키는 삶이기에

 

창기 세리가 먼저 하늘나라에 간다고 하시는 겁니다.

 

이 간격을 무슨 수로 매구어 넣겠습니까?

봉합 자체가 불가능 한데?

 

오히려 더 벌려놓는데 말입니다. 단절의 단절

 

 

그것도 모르고

요나 엘리야 베드로가

 

자꾸 나는 의인이다 나는 건강하다

내 열심히 특심인데 내만 남았다고 자꾸 우길떼에

 

주님은 그들은 일부러 병자 만들어 버리고

소경만들어 버리고

죄인 곧 에수님을 세 번씩이나 부인하는 자로 만들어야

 

그 원인 없는 결과의 간격에

자신의 은혜를

은혜의 숙제를 채워 넣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단절 단절 단절 이라는 무한 단절

7번 용서가 아닌 무한 용서라는 무한갭을 벌려놓는 겁니다.

 

바로 이것이 빛의 숙제입니다.

 

제발 빛과 소금 되지 마세요

빛의 기능

소금 기능 하겠다고 나대지 마세요

 

왜냐하면

그것은 아무리 해본들 갭이 생겨나질 않습니다.

 

갭이 안 되요 안돼

 

안생겨요 안생겨

 

백날 해도 3일 이라는 간격이 생길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십자가가 아닌 겁니다.

 

빛 흉내만 깨작 깨작 했을 뿐인 겁니다.

 

그렇게 되면

오늘 본문의 바리새인처럼 어두운 짖만 골라서 해 놓고서는

빛이라고 우길 뿐이니

 

진짜 빛한데 지적 받으니까

비로소 악한 속내의 진심이 드러나는 겁니다.

 

어떻게 하면 저 빛이신 예수를 죽일꼬 하는 마음 말입니다.

 

바로 요 마음

 

나에게서 예수님을 죽이고픈 마음을 들추어내지 못하는 빛은 가짜 빛이요

가짜 예수 라는 겁니다.

 

예수 잘 믿는 나 말입니다.

 

에이 하필이면 왜 나 인가?

남들은 몰라도 저는 절대로 예수님을 배신 안합니다 라고 우기는 나 말입니다.

 

나 자신이 거기에 맛물려야 진짜 십자가입니다.

 

그렇기에 집단적인 이스라엘은 바로 이런 엉터리 빛을 추구하는 모습속에 말려들어야 하고

 

그 속에서 빼내기를 하시는데 있어서 죄인 중의 괴수로써 남은자를 빼내시기를 직접 하시는 겁니다.

 

즉 교회 속에서 교회를 새롭게 만드시는 겁니다.

 

교회 속에 또 다른 교회가 있는 겁니다.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받은 자는 적다 라는 겁니다.

 

이스라엘 속에서 잃어버린 자기 양을 찾는 겁니다.

 

유대인 외에는 보냄을 받지 않았다 하시고서는

유대인 보다 더 유대인인 귀신들린 딸의 이방여자를

드디어 찾아내시는

빛의 솜씨 이다는 겁니다.

 

여기에 무슨 이방여자의 빛 된 모습이 어디있습니까?

 

오히려 그 결과물을 빛의 자녀라는 자들이 공격하고

심중에 저 예수를 어떻게 하면 없애버리지 라고

비로소 빛의 숙제로 인해서

저들이 마음 먹게 만들도록

동기부여를 하게 하는 빛 다움을 펼치는 겁니다.

 

진짜 빛은

우리를 더더욱 어둡게 만들어 버립니다.

 

어두움의 과잉으로 말입이다. 죄인 중의 괴수

 

이렇게 되면

 

빛의 자녀라고 우기는 자들에게

이들은 응시물이 되는 겁니다.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할 정도면

이것은 기독교를 완전 엎어버릴 정도로

이단 중의 이단인 소리를 하게 되는 겁니다.

 

스스로 어두움의 과잉이 될 필요는 없습니다.

어차피 어두움이요

어차피 막살아 왔는데 구지 일부러 새삼스럽게 막살 필요가 없습니다.

 

진짜 빛은 우리를 어두움의 과잉으로 만들어서

 

가짜 빛을 추구하는 자들과 역이도록 하시는 겁니다.

 

이것이 요나 보다 더 큰 이가 하시는

빛으로써의 기능입니다.

소금으로써의 기능과 같은 의미입니다.

더더욱 비린내 나도록 썩게끔 하십니다.

소금 팍팍 안치면 안될정도로 말입니다.

 

팍팍 썩는 그 지독한 비린내 속으로 들어가면

하나도 비린내 안 납니다.

화장실 들어가면 얼마나 똥내 나냐 말이지요

그러나 자신도 똥을 막 싸면 냄새 안납니다.

자기가 똥인데요 뭘

 

여기서 비린내 난다고 코 막는 자들

똥내 난나고 코 막는 자들이 역이는 겁니다.

 

안식일 어긴다고 안식일 지키는 자들이 역이는 겁니다.

 

이것이 빛과 소금의 기능입니다.

 

자 빛은 눈을 가려내고 있습니다.

빛을 보는 눈과 빛을 보지 못하는 눈 즉 어두운 눈

 

그리고 다시 그 눈은 리좀처럼

빛을 봄으로써 성한 몸과 빛을 못봄으로써 성하지 못한 몸을 가려내고 있습니다.

 

이중차단입니다. 이중거룩 무한대 간격 벌리기입니다.

 

이것이 은혜 거룩 빛 소금의 기능입니다.

 

간격 벌리기

봉합하고자 하는 지킴과 반대되는

차이내기입니다.

 

 

 

 

 

 

 

 

 

 

 

 

 

 

 

 

더 강한 자와 요나의 표적 (11:14-32)

2014/03/06 21:05 in 성령행전(피활동,인간극복)

더 강한 자와 요나의 표적 (11:14-32)

 

(11:14, 개역) 예수께서 한 벙어리 귀신을 쫓아내시니 귀신이 나가매 벙어리가 말하는지라 무리들이 기이히 여겼으나

(11:15, 개역) 그 중에 더러는 말하기를 저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 하고

(11:16, 개역) 또 더러는 예수를 시험하여 하늘로서 오는 표적을 구하니

(11:17, 개역) 예수께서 저희 생각을 아시고 이르시되 스스로 분쟁하는 나라마다 황폐하여지며 스스로 분쟁하는 집은 무너지느니라

(11:18, 개역) 너희 말이 내가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 하니 만일 사단이 스스로 분쟁하면 저의 나라가 어떻게 서겠느냐

(11:19, 개역) 내가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면 너희 아들들은 누구를 힘입어 쫓아내느냐 그러므로 저희가 너희 재판장이 되리라

(11:20, 개역) 그러나 내가 만일 하나님의 손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11:21, 개역) 강한 자가 무장을 하고 자기 집을 지킬 때에는 그 소유가 안전하되

(11:22, 개역) 더 강한 자가 와서 저를 이길 때에는 저의 믿던 무장을 빼앗고 저의 재물을 나누느니라

(11:23, 개역) 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헤치는 자니라

(11:24, 개역)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에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되 얻지 못하고 이에 가로되 내가 나온 내 집으로 돌아가리라 하고

(11:25, 개역) 와 보니 그 집이 소제되고 수리 되었거늘

(11:26, 개역) 이에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 심하게 되느니라

(11:27, 개역) 이 말씀을 하실 때에 무리 중에서 한 여자가 음성을 높여 가로되 당신을 밴 태와 당신을 먹인 젖이 복이 있도소이다 하니

(11:28, 개역) 예수께서 가라사대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 하시니라

(11:29, 개역) 무리가 모였을 때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이 세대는 악한 세대라 표적을 구하되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나니

(11:30, 개역) 요나가 니느웨 사람들에게 표적이 됨과 같이 인자도 이 세대에 그러하리라

(11:31, 개역) 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가 솔로몬의 지혜로운 말을 들으려고 땅 끝에서 왔음이어니와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으며

(11:32, 개역) 심판 때에 니느웨 사람들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들이 요나의 전도를 듣고 회개하였음이어니와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

 

기도에 대한 이야기에서 표적 이야기로 이행을 합니다.

즉 이 말은

이웃을 순 엉터리로 설정했듯이

기도도 순 엉터리로 한 것을 지적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은 표적에 대한 이야기로써

표적을 순 엉터리로 구하고 있다는 것을 지적하시는 겁니다.

 

결론은 이미 나 버렸네요.

그렇기에 우리가 늘 구하는 표적, 기적

왜 순 엉터리인지 같이 한번 지적 당해 봅시다.

인간은 만만치 않습니다.

반드시 최고의 것을 고르고 골라서 설정, 또는 꾸며놓습니다.

왜냐하면 몸이 선악을 기억하기 때문에

항상 동일성 동질성 일치성에 집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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