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적인 편파 복음

 

 

(10:38, 개역) 저희가 길 갈 때에 예수께서 한 촌에 들어가시매 마르다라 이름하는 한 여자가 자기 집으로 영접하더라

(10:39, 개역) 그에게 마리아라 하는 동생이 있어 주의 발 아래 앉아 그의 말씀을 듣더니

(10:40, 개역) 마르다는 준비하는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한지라 예수께 나아가 가로되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지 아니하시나이까 저를 명하사 나를 도와주라 하소서

(10:41, 개역) 주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10:42, 개역) 그러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지난 시간에 잘못된 이웃을 설정함으로써
이웃을 통한 단절성을 살펴봤습니다.

사람이 이웃을 설정한다는 자체가 정치적입니다.
정치란 유익성을 따지는 것입니다.

정치 하지 말라는 말이 아니라

어느 것이 더 유익하냐 라는 더 나은 정치를 하라는 겁니다.

즉 너희들이 백날 이웃을 설정해 본들 고만 고만 하다는 겁니다.

 

진짜 더 나은 정치란

끝내주게 정치를 잘하는 분에게 정치를 맡기면 된다는 겁니다.

 

오늘 본문도 정치성에 관한 내용이라고 저는 봅니다.

 

즉 정치란 편파성입니다.

 

누가복음 10장 전체가 아니 성경 전체가 이 정치 곧 줄을 잘 서는 겁니다.

 

칠십인을 세우고 추수할 것이 많은데 일꾼이 적다 라고 합니다.

그리고선 양을 늑대 소굴에 보낸다고 합니다.

그리고 전대 곧 지갑을 가지지 말고 주머니 곧 가방을 가지지 말고

신 신발을 가지지 말며 아무에게나 만나지 말고
어느 집에 가든지 평안을 빌라 라고 합니다.

 

평안전쟁 곧 샬롬전쟁을 펼치는데 집 곧 공간의 전쟁화입니다.

얼마나 정치적인 선포 입니까?

 

즉 하나님 나라의 전쟁 선포입니다.

 

마치 가나안 정탐하러 들어간 이스라엘처럼

 

머물기 위한 목적이 아닌

억수로 정치적인 목적으로써 평안을 받을 만한 자인지

아닌지를 가려내는 식인 겁니다.

 

그 평안에 간담이 녹아서 그 평안을 기다리고 기다린

기생라합과 같은 민족의 배신자

국가의 배신자

가정의 배신자

사회의 배신자

종교의 배신자를 찾아내라 라는 식입니다.

 

여기서 필수적인 요소가 부딧힘 곧 충돌입니다.

당연히 전쟁은 필수적인 요소가 되는 겁니다.

 

하나님 나라를 선포했기에

영역적인 다툼은 반드시 필요한데(공간)
그 영역을 초토화 시켜서 떠나는 방식입니다.

 

그래서 사탄이 떨어지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네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라고 합니다.

 

즉 전쟁에서 적군이 막 죽어나가서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이미 생명이 당연히 영광을 받으심이 마땅하다는 것을 보라는 겁니다.

 

그렇지 않으면 엉뚱한 자들이 내가 전쟁 공로를 세웠다고

내가 더 많이 적군을 없앴다고 자랑하면서 나오게 되는 겁니다.

 

아니 누가 영광을 받아야 합니까?

처음부터 주님 홀로 영광 받으심이 마땅한데
이제 마귀 좀 물리쳤다고 할 문제가 아닌 겁니다.

 

 

사도행전의 마지막 부분이 그러했습니다.

그렇게도 죽을 고비를 넘겨 넘겨 넘겨서

로마에 있는 유대인들에게 끝까지 이방의 사도는 복음을 증거케 됩니다.

 

그 결과는 믿을 자는 믿고 안 믿는 자는 안 믿더라 라는 겁니다.

 

얼마나 정치적인 발언 입니까?

 

이 간택은 이미 끝난 완료 문제이다는 겁니다.

모호하거아 불완전한게 아닌

명료하고 구체적으로 끝난 문제는

 

사도바울 본인이 확인하는 것에 불과 했던 겁니다.

 

아무리 평안을 빌어도

즉 기쁜소식을 전해도

못받은 놈은 못 받더라 라는 겁니다.

이런 정치성을 확인하는 것 밖에 없습니다.

 

그렇다고 낙심합니까?

 

마귀가 눈에 막 떨어지면 또 구원의 확신해야 합니까?

 

그런 것과 무관하게 확정적으로 끝난 문제였기에

오히려 더 기쁜 겁니다.

 

낙심은 커녕 더욱더 신나는 겁니다.

자만은 커녕은 생명책에 주의 이름이 명료하게 기록됨을 더욱더 기쁘게 넘치는 사건을

또 확인하는 기쁨을 누리게 되는 겁니다.

 

 

(10:20, 개역)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시니라

(10:21, 개역) 이 때에 예수께서 성령으로 기뻐하사 가라사대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10:22, 개역)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이 누군지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가 누군지 아는 자가 없나이다 하시고

(10:23, 개역) 제자들을 돌아보시며 종용히 이르시되 너희의 보는 것을 보는 눈은 복이 있도다

(10:24, 개역)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많은 선지자와 임금이 너희 보는 바를 보고자 하였으되 보지 못하였으며 너희 듣는 바를 듣고자 하였으되 듣지 못하였느니라

(10:25, 개역) 어떤 율법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가로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그리고 나서 너희는 복되도다 라고 하십니다.

지혜롭고 슬기로운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시는

그 비밀을 너희는 보게 되었다는 겁니다.

많은 선지자와 임금이 보고자 했던 그 비밀

곧 하나님 나라의 비밀 곧 영생을 주시는 자 말입니다.

 

그 영생이 뭔가를 말하기 위해

율법사 곧 영생을 정반대로 알고 있는 자 율법사를 붙여서 설명하십니다.

 

선한 사마리아 사람을 통해서 영생을 말하시면서 이웃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웃과 영생 ?

 

무슨 관계입니까?

 

 

영생은 이웃으로 결정 된다는 겁니다.

 

영생은 내가 획득해야 할 현재진행형이 아니라

누가 너를 배려해 주는 이웃이냐 로 결정된다는 겁니다.

 

자 이렇게 되면 모든 종교는 깨지는 겁니다.

종교는 일종의 돈벌이입니다.

돈벌이라는 생존은 내가 어떻게 하면 되느냐 라는 겁니다.

 

율법사가 그러합니다.

내가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습니까?

 

여기에 예수님은 고래? ~~~~ 그럼 이렇게 해 보렴 !!

 

아! 그거요? 마침맞게 내가 그 일을 하는데 도사입니다.

 

고래 ?

 

정말일까?

 

그럼 맞는지 틀리는지 한번 보자 라고 선한사마리아인 비유를 하십니다.

하나님 나라 비유입니다.

 

막상 가장 그 일에 적합했다고 자부했던 율법사가

졸지에 가장 그 일과 무관한 정반대의 일만 골라서 했다는 것이

부인을 못할 정도로 명료하게 드러나게 됩니다.

 

아니 율법사가 이웃 사랑 안했습니까?

이웃사랑의 달인 아닙니까?

 

그런데 하기는커녕 근처도 못갔고

근처를 가기는커녕 아예 정반대로 갔던 것이 들통나 버렸습니다.

 

이웃에 대한 설정이 순 엉터리 였던 겁니다.

 

먼저 강도가 있어야 하는데 가장 기이한 것이 강도의 부재입니다.

강도는 없고

강도 만난자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강도 만난자를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서 이웃이 결정이 납니다.

 

곧 영생을 얻게 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누구나 당연히 이 사람은 이웃일 거야 라고 생각했던 자는

 

강도 만난자를 피해 가 버립니다.

 

그리고 누구나 당연히 이 사람은 때려 죽어도 이웃이 될 수 없어 라는 사마리아인이

졸지에 강도 만난자의 이웃이 되어버린 겁니다.

 

팔을 어긋맞게 된 예상을 뛰어넘는 반전이 된 겁니다.

 

도저히 이웃이 될 수 없는 자는 이웃이 되고

누구나 그 사람은 당연히 이웃일 거라고 생각 한 자는 이웃이 되지 않았던 겁니다.
즉 강도였던 겁니다.

 

김연아가 누구나 금메달인줄 당연히 알았습니다.

러시아선수는 아무도 금메달이라고 여기지 않았습니다.

 

여기에 작용하는 것이 편파성이라는 정치성입니다.

 

누구는 스캔들 이라고 표현했듯이

불합리한 모순이 벌어졌다는 겁니다.

 

율법사가 당연히 영생을 얻을 만한 조건인 이웃사랑의 달인이였습니다.

사마리아 초짜가 어떻게 율법을 지킨다는 겁니까?

저 세리와 같지 않음을 감사합니다 라고 말하는 당연한 판국을 판 뒤집기라는 정치가 벌어지는 겁니다.

 

사마리아인? 율법 곧 이웃사랑을 단 한번도 실천한 적이 없는데 말입니다.

 

문제는 여전히 우리는 율법사와 같은 사고방식에서

이 불합리성에 부딧히게 됩니다.

여기에 선하다 선한 사마리아인 이라고 이중중첩시켜 이중화 분절화 거룩화로 증폭시켜버립니다.

그러니 불합리성을 배가가 되는 겁니다.

 

그런데 그 이웃이 바로 예수님

선한사마리아인이 바로 예수님이다 라고 말하면

또 얼렁뚱땅 그냥 넘어가 버립니다.

 

우리는 그냥 넘어갈게 아니라

이 부딧히는 돌에 부딧혀 봅시다.

이 불의성을 배가 시킨
걸림돌에 걸려 넘어져 보자 라는 겁니다.

과연 일어날수 있는지?
아니면 이 강도만난자를 일으켜 주는 이웃이 있는지?

 

우리가 이 율법사처럼 이웃 사랑했다고 자부하는 심정으로

예수님이 주시겠다는 그 영생에 가장 합당한자라고 자부했습니다.

 

그 자부심에 들떠 당연히 여겼다고 해 봅시다.

 

그런데 깡끄리 와르르 무너집니다.

 

이웃사랑은커녕 우리는 강도만난자를 피해 다니는 제사장과 레위인 이였다는 겁니다.

 

이웃 사랑은커녕 말씀을 지키겠다는 목적으로

이웃사랑을 실친하겠다는 이유로 강도만난자를 피해 다녔던 겁니다.

 

그래놓고 이웃사랑한다고 우기는 모습이

 

선한사마리아 비유에서 고대로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게 복음입니다.

 

복음이 나를 구원하는데 목적이 아니였던 겁니다.

오히려 넌 백날천날해도 지옥 가도 마땅한 할 말이 없는 자야 라고

오히려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는 겁니다.

 

우리가 율법사와 똑같은 심뽀로

예수님을 이용해서

이웃사랑 실천했다고 자부하면서 예수님의 입을 통해

과시할려고 했던 겁니다.

 

그런데 똑같이 율법사처럼 당해보라는 겁니다.

 

율법사 의 정치성 보다 더 나은 정치성이 예수님의 정치성인 겁니다.

기가막힌 간택 아닙니까?

 

정치란 간택, 선택 즉 마음에 쏙 들었다는 겁니다.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라는 겁니다.

뭐가? 제사 보다 더 나은 제사가 따로 있었다는 것!!
따로 감춰놓고 숨겨놓았다는 것은
바로 몽학선생이 가리키는 딴 몸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정치 입니다. 더 심히 보시기에 좋았더라 라는 안식말입니다.

 

율법사의 정치성 보다 더 심히 좋았더라의 정치성이 여기 있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꼬리 내리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오히려 트라우마로 작용하게 되니까

우울해지고 우을하니 자학성이 펼쳐지는 겁니다.

 

오히려 기쁜게 아니라 말입니다.

사도바울이 믿는자는 믿고 안믿는자는 안믿더라를 본인이 다시 믿어야 하는 판국이다는 것은

 

창세전에 생명책에 기록된 자는 다 믿더라 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면 된 겁니다.

더 나은 정치성에 바울은 말려들어야 하는 겁니다.

 

그런데 내가 이만치 했으면 하나님도 날 따라와 줘야지

내가 이렇게 열심히 특심인데

왜 내 뜻대로 되지 않는거요?

왜 김연아가 금메달 아닌거요?

라고 한다면

 

이것은 말씀이 먼저가 아니라

닭이 먼저가 아니라

생명책이 먼저가 아니라

 

내가 먼저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먼저라고 우기는 우리를 그 율법사를

평안을 빌 듯이 전쟁을 벌려서

 

나중 된 것을 먼저 되게 해 버리는 겁니다.

 

닭이 먼저되게 하고

개같은 이방인 사마리아인, 성전짖는데 가장 방해꾼인 그 사마리아인에게

 

먼저된냥 선하다 라는 의미를 붙여버리니까

 

졸지에 스캔들 즉 부조리가 발생해 버리는 겁니다.

 

그러면 그럴수록 나는 더욱더 율법사와 같이 정당성을 표출하고자

아예 법관을 없애 버릴려고 하게 되는 겁니다.

 

말씀이 먼저가 아니라 나의 이웃사랑실천이 정당하게 먼저이다고 우기는 겁니다.

 

내가 정당하면 정달할수록 더더욱 죄인이 되듯이

이 선악의 법에 말려들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 나의 정당성만 가지고서 지옥가게 되는

이 율법사의 사고방식과 같은 겁니다.

 

차라리 강도만났으면 강도만난자의 이웃을 만나게 될 텐데

 

강도만난적이 없다고 여기고 이웃사랑 실천했다고 우기고 있으니

 

주님이 강도를 집어넣는 겁니다. 강도는 부재된채

강도만난자만 나열이 되어 있는 겁니다.

 

넌 강도 만난자야 ! 뭐 이웃사랑 실천하겠다고?

영생 얻을 만 하지 않냐고 조건 갖추었다고?

 

7번 용서 했는데 몇 번 더 용서 해야 하냐고?

몇 번 용서 하면 영생을 얻냐고?

무슨 카스트 인도 종교냐?

성화론이냐?

불교냐?

천주교냐?

 

490번 용서 받아도 시원찮아

수천번 수억번

일만달란트 탕감 받아도 시원찮을 놈아

 

지금 당장 주님의 배려가 아니면 지옥가도 천부당 만부당한데

그 와중에 내가 행한 행함을 들이대?

 

지금 그런 너의 사고방식 때문에 십자가에 죽으러 가시는 예수님

참이웃사랑을 실천하실려는 예수님이 안보이냐?

누가 꾀더냐?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데?

이런 불합리가 아니면 너 지옥가는데

 

마땅히 지옥갈 너를 건질려고 십자가에 죽으시러 가시는데

뭐 불합리 하다고?

 

 

진짜 불합리 한 것 제대로 보여 드려요?

어떻게 ~~~~

 

어떻게 ~~~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데 누가 꾀더냐?

 

그래놓고 양탈늑대무리는 이웃사랑을 실천해야 한다고

빡빡 우기는 겁니다.

 

희한하죠

 

귀가 있어도 안 들리는 겁니다.

 

마치 이웃사랑 실천해야 하기 때문에

죽은 시체를 만지면 안된다는 율법을 지킬려는 제사장과 같습니다.

 

그러니 제발 말씀지키지 마세요

말씀을 하나 지킨다는 것은

상대적으로 그 말씀을 다시 동시에 어긴다는 겁니다.

 

지키면 어기는 셈입니다.

 

그래서 몽학선생인 겁니다.

 

딴인물을 보라는 겁니다. 니까짓것 백날 해도 안되니까 다른 몸을 보라는 겁니다.

 

이웃을 보라는 겁니다. 니가 이웃 될려고 하지 말고.

 

그러니 이 단절성을 못보면 개방성이라고 우기는 겁니다.

알려줘도 오히려 더욱더 화를 냅니다.

개방성인데 자꾸 단절성이라고 외치니

화를 내는 겁니다.

 

개방하는 본인이 의롭기 떄문인 겁니다.

 

그리고 그들의 시선에서는 아무리 봐도 단절을 외치는 자는

성령이 아닌 악마가 들린 모습만 보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자 이제 본문으로 들어갑니다.

 

자 영생은 어떻게 얻는가?

 

율법사처럼 이웃사랑 실천하면 영생을 얻는 가?

 

오늘 본문에 마리아와 마르다가

예수님을 대접하는데 있어서

마르다는 열심히 분주하게 일합니다.

여기에 마리아는 싸가지 없게

일을 도와주기는커녕 예수님 턱 밑에서 히히덕 거리면서 웃고 놀고 있습니다.

 

그야말로 막살고 막 누리고 있습니다.

 

자 우리는 이 마르다 입장에서 마리아를 보고

그리고 마리아 편을 드는 예수님의 따끔한 충고를 듣는다고 해 봅시다.

 

과연 받아들일수 있는 충고일까요?

 

영생과 관련된 말씀입니다.

 

영생 얻기는커녕 지금 영생이 날라갈 판국입니다.

 

편파복음에 졸지에 금빛나는 은메달인 꼴입니다.

 

백날 은메달이라고 해 본들

아무리 금빛난다고 해 본들

 

이 정치성의 갈라놓는 그 간격을 메울길이 없습니다.

 

7번 용서 하겠다

이웃사랑을 실천했다 라는 이 동일성이

이 동질성을 추구하는 합리성 앞에

 

정작 간격이 벌어지는 차이성을 격게 되는 겁니다.

정작 경험케 되는 것은 동일성 동질성이 아니라

차이성 그 간격의 혹독한 단절성을 경험케 되는 겁니다.

 

이 율법사가 격는 경험을 우리 경험으로 해 봅시다.

이 마르다가 격는 싸가지 없는 마리아 편에 써는
편파적인 예수님을 접하는 경험을 우리 경험으로 해 봅시다
.

 

과연 누가 좋은 것을 택한 것이 맞습니까?

 

마리아가 행동을 잘했냐 못했냐 라는 선악을 따지는 문제가 아닙니다.

사마리아인이 선하냐 악하냐 하는 문제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러면 그럴수록 마리아가 더더욱 싸가지 없음으로만 비춰질 뿐입니다.

 

왜 그렇게 되냐구요? 정치성 때문입니다.

 

지금 판대기가 전체성을 이 부분성에 집어넣어서 펼쳐지는데

하나님 나라 전쟁의 상황이

정작 조그마한 내 마음 속에서 이렇게 펼쳐지는 겁니다.

 

그러니 모두다 주의 목전입니다.

 

주의 목적에 항상 우리는 죄 밖에 안 나타내고 있는 겁니다.

 

큰 영역의 전쟁 전투에 나 같이 조그마한 자가 전쟁터를 벗어나서

도망쳐 조그마한 시골 마을에 도망쳐 살아본들

그 전쟁과 무관해 지는게 아니다는 겁니다.

 

자의든 타이든 이 전쟁 속에 놓여졌습니다.

주님의 전쟁입니다.

 


이 전쟁은 정작 내 속에서 벌어지는 겁니다.


내가 얼마나 말씀을 싫어한다는 것을

내가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 싫어한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말씀을 지키는 것으로 때운다는 겁니다.

내가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 싫어한다는 것을

24시간 하나님만 생각한다고 표출함으로써 때워버린다는 겁니다.

 

정작 단 한번도 하나님을 마음에 둔 적이 없었으면서 말입니다.

 

우리가 이런 모습인데

뭐 이웃 사랑한다고?

 

그럼 강도 만난자가 있어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없어요?

 

의사가 모든 인간이 의사가 되어버리니까

 

정작 환자가 없는 겁니다.

 

환자가 없는데 의사라는 표현 자체가 모순이 된다는 겁니다.

 

주께서 왜 주가 되십니까?

 

나를 죄인 만들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주님 스스로 주 되심입니다.

 

인간이 은혜를 더할려고 죄인이 되어서 주를 주 답게 만드는게 아니라

우리가 원치 않는 죄인이, 죄인 중의 괴수가 되도록 작용하는 것이 주가 되는 겁니다.

 

이 주가 얼마나 주 같지 않았으면

바리새인 눈이 정확했던 겁니다.

바알 세불 걸인 왕이였던 겁니다.

마귀의 대 마왕이 바로 예수님이였던 겁니다.

 

맞잖아요?

주가 되기 위해 인간을 모조리 죄인 만들어 버리니까 말입니다.

 

그것이 십자가 이니까 말입니다.

 

그러니 십자가를 개방으로 외쳐야

 

마르다가 정당해 지는 겁니다.

 

그런데 마리아가 좋은 것을 택했다고

단절의 십자가를 외쳐 버리면

 

나의 열심히 특심인 모든 정당성이 날라가 버리는 겁니다.

 

바로 그겁니다. 나의 그 어떤 정당성


곧 정치성

 

곧 조건

 

구원의 조건들이 다 날라가 버려야

 

우연성 우발성이 되는 겁니다.

이런 나의 정치성 보다 더 나은 정치성이 아닌 십자가는 가짜 십자가 입니다.
나의 정치적인 십자가와 맞물린 십자가야 라야 진짜 십자가 입니다.

내가 매일 만들어내는 가짜 십자가를 꺽지 못하는 십자가는 가짜 십자가 입니다.

 

철저하게 단절성인, 동질성 동일성의 파괴입니다.

 

이것 파괴가 되지 않고서는 영생이란 없는 겁니다.

 

누가복음 10장을 영생이라는 주제를 놓고 볼 때

 

과연 영생을 인간 쪽에서 조건을 갖출수 있는 재간이 있으냐 하는 문제입니다.

 

결국 영생이 알아서 하실 문제이다는 겁니다.

 

전쟁 속에서는 그 어떤 조건 그 어떤 정당성은 다 날라가 버리는 상황이 전쟁 곧 정치성입니다.

 

강도라는 강한 자를 만났는데

 

강도는 부재된 상태에서 누가 더 강한

강도 만난자의 이웃이냐 라는 겁니다.

 

마르다 처럼

이웃이 될려고 할게 아니라

 

예수님을 대접할려고 할게 아니라

 

마리아처럼 더 좋은 것을 택한 싸가지 없음처럼

이웃으로부터 배려를 당하라는 겁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대접하는 더 나은 대접이다는 겁니다.

 

마르다의 대접이 나쁘다 라는 것이 아닙니다. 선악으로 따지자 라는 것이 아닙니다.

더 나은 것이 있다는 겁니다.

 

마르다의 대접 보다 더 나은 대접을 마리아는 예수님으로 대접을 받는 겁니다.

 

이것을 못 보게 되면

내가 대접한 것 그 대접의 우물물에 빠져서 못 빠져나오는 겁니다.

 

더 큰 세상이 바깥에 있는 겁니다.

우물에 빠져 우상 섬기는 자기유익을 쫏게 되는 겁니다.

 

우상숭배입니다. 오히려 개방성은 우상숭배입니다.

 

단절성은 비개방성 곧 개방 보다 더 개방의 과잉이 단절성입니다.

 

더 큰 대접을 보게 되면

나의 7번 용서는 쥐 뿔도 아니라서

다시는 용서 하는 삶을 살지 않고

 

용서 받는 삶만 누리면서 사는 겁니다.

 

이것이 자기부인의 삶인 십자가 삶입니다.

 

십자가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대부분 반대의 십자가 삻을 살고 있습니다.

 

곧 마르다의 삶입니다. 7번 용서의 삶입니다.

이웃사랑 실천의 율법사의 삶입니다.

 

십자가의 삶이 아닌데 십자가의 삶이라고 우기는 삶입니다.

 

그것은 개방성 곧 우상숭배입니다.

 

진짜 십자가의 삶은 오늘 본문의 싸가지 없는 마리아의 삶처럼

예수님을 대접하는게 아니라

예수님으로부터 대접받는

예수님의 섬김을 누리는 삶입니다.

 

 

이 섬김을 당하는 삶에 우리는 누리기 싫어도 누릴 수 밖에 없도록

 

그 십자가의 사랑에 포로된 자입니다.

 

 

 

 

 

 

최일규

김연아 사례 보며 이런 생각이 든다
"체력이 국력이 아니라
국력이 체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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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대식 편파 천국 = 보이지 않는 손

    이미 결정된 사항을 통보


    딱 보면 압니다.

    아무리 뛰고 날고 해도

    자기새끼만 챙기는
    영원히 아킬레스는 거북이를 따라 잡을 수 없기에

    정치(불합리한 잔인한 고문이자 간택, 케보이)야 말로

    가장 공백의 거리두기의 기가막힌 기술(예술보다 더 잉여적인)이다.
  • 최일규 억울하다 억울하다
    재판장의 정당치 못한 판결은
    평등이 아니라 갈라놓음이다

    가인과 아벨, 에서와 야곱, 야곱과 그의 형제들처럼
    역사는 반복의 사이클로 묵시(차이생성)는 사건의 반복으로
    그래서 묵시는 편파적인 게 사랑이다

 

 

 

 

 

 

 

 

 

 

 

 

 

 

 

 

 

잘못된 이웃 설정 (10:25-37)

 

 

강도 만난 자는 없다.

 

이웃사랑을 지키기 위해 이웃(강도만난자)을 피하는 자들

 

선한 사마리아인이 되기 위해 이웃을 등쳐먹는 자들

 

(10:25, 개역) 어떤 율법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가로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10:26, 개역) 예수께서 이르시되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10:27, 개역) 대답하여 가로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10:28, 개역)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하시니

(10:29, 개역) 이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여짜오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오니이까

(10:30, 개역)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10:31, 개역)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10:32, 개역) 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10:33, 개역) 어떤 사마리아인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10:34, 개역)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고

(10:35, 개역) 이튿날에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막 주인에게 주며 가로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부비가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10:36, 개역) 네 의견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10:37, 개역) 가로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

계명은 지키라고 준게 아닙니다.

율법 곧 십계명은 일종의 방향을 제시해 주는 겁니다.

 

율법을 지키라고 준게 아니기에 어길 수 밖에 없다고 하니까

또 어기는 것을 지키는 자들이 있습니다.

막산다 라는 의미가 바르게 산다 라는 것의 불가능성을 말하는데

정작 막살기(불가능성)를 지켜버리면 그것은 막살기가 아니라 막살기를 제대로 살려고 하게 되는 겁니다.

막살기라는 불가능성 곧 단절이 졸지에 가능성으로 되어버리는 겁니다.

그게 무슨 막살기 입니까?

불가능성 그 자체로 남겨져야 하는데 말입니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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