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못된 이웃 설정 (10:25-37)


강도 만난 자는 없다.


이웃사랑을 지키기 위해 이웃(강도만난자)을 피하는 자들

선한 사마리아인이 되기 위해 이웃을 등쳐먹는 자들

 

(10:25, 개역) 어떤 율법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가로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10:26, 개역) 예수께서 이르시되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10:27, 개역) 대답하여 가로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10:28, 개역)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하시니

(10:29, 개역) 이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여짜오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오니이까

(10:30, 개역)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10:31, 개역)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10:32, 개역) 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10:33, 개역) 어떤 사마리아인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10:34, 개역)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고

(10:35, 개역) 이튿날에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막 주인에게 주며 가로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부비가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10:36, 개역) 네 의견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10:37, 개역) 가로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

 

 

계명은 지키라고 준게 아닙니다.
율법 곧 십계명은 일종의 방향을 제시해 주는 겁니다.


율법을 지키라고 준게 아니기에 어길 수 밖에 없다고 하니까

또 어기는 것을 지키는 자들이 있습니다.

 

막산다 라는 의미가 바르게 산다 라는 것의 불가능성을 말하는데

정작 막살기(불가능성)를 지켜버리면 그것은 막살기가 아니라 막살기를 제대로 살려고 하게 되는 겁니다.
막살기라는 불가능성 곧 단절이 졸지에 가능성으로 되어버리는 겁니다.
그게 무슨 막살기 입니까?
불가능성 그 자체로 남겨져야 하는데 말입니다.

 

결국 인간은 자기 유리한 쪽으로 해석을 한다는 겁니다.

최종적인 관심사가 결국 자신의 몸이다는 겁니다.

그래서 몽학선생인 율법은 그 방향을 누구 라는 딴 몸을 겨냥하고 있습니다.
율법은 나 아니요 이 분입니다. 라고 이 인물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는 겁니다.
율법 지킨자 치고 이 분 입니다 라고 하는 자들이 없습니다.
이것이 신비한 일입니다.
아무도 없습니다.

바로 십자가에 누가 달렸는가 라는 겁니다. 누구 라는 인물을 말입니다.
인간이 끼여들 틈이 없는 십자가의 죽음으로만 촘촘하게 매듭지어져 있습니다.

결국 율법사가 묻는 누가 내 이웃입니까? 라는 물음의 답은
내가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그가 바로 유일한 이웃이다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 자기를 옳게 보일려고 예수님께 율법은 꺼내는 자가 있습니다.

말씀은 무서운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 보다 인간이 먼저 말씀은 운운한다는 자체가

말씀을 얼마나 엉터리로 보고 있다는 증거로써 비유를 말씀하시는 겁니다.

비유란 기존의 해석의 차단입니다.
그리고 비밀 수수께끼로 차단하는 잠금장치로 작용하게 됩니다.
풀었다가 목적이 아니라 못풀겠다가 목적입니다. 단절 곧 불가능성입니다.


결국 그 무서운 말씀을 인간이 뭔데 먼저 운운하면서 꺼내는 것일까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먼저 꺼내는 이유는 말씀을 지켰다고 주장하고픈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 19:30, 개역)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

(고전 10:12, 개역)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그럼 말씀의 의미는 뭔가
?

바로 불가능성입니다.
(여기서 불가능성의 의미는 바로 눈에 보이지도 않는 마귀를 역는다는 겁니다.
곧 행함을 역는 겁니다. 그래야 믿음을 그 뒤에 표출 시키는 겁니다.
막살기도 같은 의미입니다. 마귀를 역는 의미로써 단절 곧 불가능성입니다.
인간의 말씀 지킴이 엉터리인 이유는 이런 마귀를 역을줄 모릅니다.
혹여나 역게 되는 은사를 받게 된다면 예수님처럼 같은 죽음을 격게 됩니다.
그러니 누가 하겠습니까?
누가 자력으로 하겠습니까?
그러니 주님이 알아서 역으니 가만히 서서 장대 높이 달린 인자를 쳐다보기만 하면 됩니다.
아무도 바로왕을 강퍅케 못하기 때문입니다. 바로왕을 강퍅케 못하는 복음은 가짜복음 입니다.)

 

이 불가능성은 비가능성 곧 가능성이 없다 라는 의미가 아니라

그 반대로 가능성의 과잉을 말하고 있는 겁니다.
마귀를 강퍅케 하는 가능성의 과잉입니다. 곧 믿음입니다.
행함으로는 택도 없습니다.

주님은 이런 악마들을 강퍅케 하시는데 도사다 라는 겁니다.

 

즉 행함에 관한 표현이 아니라

그 반대로 믿음에 관한 표현인 겁니다.

마귀가 도저히 할수 없는 믿음을, 마귀가 못하는 일만 하신다는 겁니다.

그러니 마귀를 역듯이 반드시 행함을 역는 겁니다.

 

언어구성 자체가 믿음이라는 한 인물을 겨냥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언어는 즉 그 인물은 다른 인물을 거쳐서 오라는 겁니다.

 

다시말해서 마귀를 거쳐서 오라는 겁니다.

바로 가능성의 과잉으로 갈수 없고

뭔가를 거쳐야 하는데 마귀가 해석하는 그 가능성의 과잉을 거쳐서 오라는 겁니다.

 

그런데 문제는 마귀가 없습니다. 눈에 보이질 않으니 마귀를 거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합니다.

즉 불가능성입니다.
바로왕을 강퍅케 한 그 단절을 거치지 않고서 어떻게 구원을 운운할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마귀를 거칠수 없다는 의미에서 인간은 안되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 곧 믿음은 그러니까 오늘 본문을 언급하고 있잖아 라고 하시는 겁니다.

즉 인간입니다. 그 마귀가 그 바로왕이 바로 인간 율법사 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사고방식과 똑같은 자 입니다.
우리가 바로왕과 같은 강퍅함이 예수님의 해석 때문에 들통나는 겁니다.

 

인간을 마귀로 보는 시선은 마귀에게는 없습니다.

오로지 예수님만 인간을 마귀로 보는 시선을 가지고 있습니다.

 

인간 자신을 스스로 마귀로 인식한다는 자체가 불가능합니다.

 

다시말해서 죄인으로, 죄인 중의 괴수로, 죄인의 과잉으로 스스로를 보는 사람이 없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 말씀 곧 언어 자체가 왜곡이 되어서

듣는 이 마다 같은 말 같은 언어로 듣고 말하고 보고도

다른 해석들이 나오게 되는 겁니다.

 

그 각각 다른 그 해석의 차이를 우리는 주님의 배려 때문에 오늘 보게 됩니다.

 

곧 우리들의 해석이 얼마나 엉터리인가를 말입니다.

 

지금까지 오늘 본문을 가지고서 기독교 뿐만 아니라 천주교 다들 사기를 치고 있습니다.

 

분명히 말하지만 계명은 지키라고 준게 아닙니다.

 

어머니랑 며칠 전에 대화를 하는 가운데

이런 말을 했습니다.

 

말씀은 항상 누가 먼저 캐취를 하는고 하니

마귀가 항상 먼저 캐취를 해서 낚아채 자기 쪽으로 끌어 당긴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항상 늦습니다. 그래서 먼저 잡고 싶어도 잡을수가 없습니다.

마치 혈루증 12년 동안 앓은 여인이

 

아니 베데스다 연못에 앉은뱅이 38년 병자를
아무도 연못으로 이동 시켜줄수 있는 자가 없어서
고침을 받을 수가 없다는 내용입니다.

항상 늦을 수밖에 없습니다.

 

(5:1, 개역) 그 후에 유대인의 명절이 있어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니라

(5:2, 개역) 예루살렘에 있는 양문 곁에 히브리 말로 베데스다라 하는 못이 있는데 거기 행각 다섯이 있고

(5:3, 개역) 그 안에 많은 병자, 소경, 절뚝발이, 혈기 마른 자들이 누워 [물의 동함을 기다리니

(5:4, 개역) 이는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동하게 하는데 동한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됨이러라]

(5:5, 개역) 거기 삼십팔 년 된 병자가 있더라

(5:6, 개역)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랜 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

(5:7, 개역)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동할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줄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5:8, 개역) 예수께서 가라사대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5:9, 개역)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니라 이 날은 안식일이니

(5:10, 개역) 유대인들이 병 나은 사람에게 이르되 안식일인데 네가 자리를 들고 가는 것이 옳지 아니하니라

(5:11, 개역) 대답하되 나를 낫게 한 그가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더라 한대

(5:12, 개역) 저희가 묻되 너더러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한 사람이 누구냐 하되

(5:13, 개역) 고침을 받은 사람이 그가 누구신지 알지 못하니 이는 거기 사람이 많으므로 예수께서 이미 피하셨음이라

(5:14, 개역) 그 후에 예수께서 성전에서 그 사람을 만나 이르시되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시니

(5:15, 개역) 그 사람이 유대인들에게 가서 자기를 고친 이는 예수라 하니라

(5:16, 개역) 그러므로 안식일에 이러한 일을 행하신다 하여 유대인들이 예수를 핍박하게 된지라

(5:17, 개역)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시매

(5:18, 개역) 유대인들이 이를 인하여 더욱 예수를 죽이고자 하니 이는 안식일만 범할 뿐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친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이러라

(5:19, 개역) 그러므로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들이 아버지의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

(5:20, 개역)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자기의 행하시는 것을 다 아들에게 보이시고 또 그보다 더 큰 일을 보이사 너희로 기이히 여기게 하시리라

(5:21, 개역)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 같이 아들도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살리느니라

(5:22, 개역)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

(5:23, 개역) 이는 모든 사람으로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 같이 아들을 공경하게 하려 하심이라 아들을 공경치 아니하는 자는 그를 보내신 아버지를 공경치 아니하느니라

(5:24, 개역)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5:25, 개역)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5:26, 개역)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 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고

(5:27, 개역) 또 인자됨을 인하여 심판하는 권세를 주셨느니라

(5:28, 개역)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5:29, 개역)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5:30, 개역) 내가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 듣는 대로 심판하노니 나는 나의 원대로 하려 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이의 원대로 하려는고로 내 심판은 의로우니라

(5:31, 개역) 내가 만일 나를 위하여 증거하면 내 증거는 참되지 아니하되

(5:32, 개역) 나를 위하여 증거하시는 이가 따로 있으니 나를 위하여 증거하시는 그 증거가 참인 줄 아노라

 

 

그런데 놀랍게도 제논역설처럼(아킬레스와 거북이의 경주) 또는 거짓의 역량처럼

 

누가 봐도 법적으로 볼 때 거짓이고 저주이고 늦는 것이

오히려 참되고 축복이고 먼저이다는 겁니다.

 

아킬레스 또는 토끼는 절대로 거북이를 이길수가 없다는 겁니다.

 

반드시 38년 된 앉은뱅이를 안식일날 고치셔야 한다는 겁니다.

그래야 십자가의 저주 곧 죽음으로 직결이 되는 겁니다.


그냥 고치시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기존의 엉터리를 그 우발적 사건에 다 담아서 터트리는 식입니다.
그래야 십자가의 죽음으로 연결이 되는 겁니다.
즉 건드렸다는 겁니다.
인간의 심기를 건드릴 불편함이
이 앉은뱅이를 고친 것이 가시로 작용한 겁니다.
맞습니다. 십자가의 피용서는 반드시 가시로 작용해야만 하는 겁니다.

 

이것이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지키시는 아들 예수님의 일하심 곧 믿음이다는 겁니다.


예수님의 믿음은 보이지 않는 마귀의 심기를 건드리는 가시입니다.
 

막살기란 반드시 십자가의 죽음과 직결되는 겁니다. 가시 입니다.

막살기를 지켜서 십자가의 죽음과 무관하게 된다면 그것은 막살기가 아닌 겁니다.
제대로된 막살기는 십자가의 죽음입니다. 종말의 종말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 내용은 결론이 난 겁니다.

 

이웃 사랑이란 곧 십자가의 죽음과 직결이 되는 겁니다.

그렇지 않는 이웃 사랑은 거짓입니다.

또 오해를 해서 십자가의 죽음을 지킬려고 하면 잘못이해하신 겁니다.
예수님만이 피 흘렸다는 겁니다.
나의 죄를 내 피로, 나의 십자가의 죽음으로 씻을수 없습니다.
십자가는 나의 신앙이나 행함의 대상물이 될 수 없습니다.
그 반대로 십자가의 대상물로써 그 혜택만을 받을 뿐입니다.

 

그렇기에 애초부터 이웃을 설정하겠다는 발상 자체가 웃기는 겁니다.

도리어 이웃으로 설정 당해야 할 판국입니다.

종교가 사기인 이유는 이웃사랑을 빼버리면 장사가 안됩니다.
돈이 안됩니다. 사랑을 자꾸 운운해야 돈이 됩니다.
그런데 그런 종교에 가시를 집어넣어 보세요
그 종교의 존패위기가 발생하는 겁니다.
예수님이 그래서 죽임 당한 겁니다.

 

곧 우리가 38년 된 병자이다는 겁니다.

우리가 강도 만난 자이다는 겁니다.

소금의 대상물인 썩은 비린내 나는 오염물이요
의사의 대상물인 환자요
예수님만이 부르시는 죄인입니다.

십자가는 그렇게 일방적으로 해석하는 겁니다.
그런데 아무도 강도 만난 자가 없다는 것이 또한 신비함(불가능) 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이웃사랑하겠다는, 계명을 지켰다는 마귀를 거쳐서

마귀의 해석을 거쳐서 새로운 해석을 하는데 있어서

 

인간들은 기존의 해석 중에서 가장 좋은 훌륭한 해석이

사람들에게 먹혀들었으니

예수님에게도 먹혀들 것이라고 여기고 그 해석을 들이대다가

완전 쪽박을 차게 되는 겁니다.

 

얼마나 이웃을 엉터리로 설정해 놓고서는

그 말씀을 그 계명을 지켰다고

예수님에게 보란 듯이 자신의 계명 지킴을

예수님의 입을 통해서 증명받고 싶어 했는데

도리어 예수님의 해석 때문에

 

살인의지를 표출하게 되는 겁니다.

 

안식일날 고쳤으니 말입니다.

말씀을 지킨다는 것은 동시에 말씀을 어기게 되는 것인줄 모르는 겁니다.

 

그 안식일도 사실은 십자가의 죽음과 직결되는 해석이어야 하는데

인간에게는 안식일이 어떻게 십자가의 죽음과 연결될수 있는가?

그런 해석 자체가 나오질 않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어머니와 대화한 내용이 뭔고 하니

마귀가

보이지 않는 마귀가 어떻게 말씀을 먼저 낚아채서

그 말씀을 어떻게 활용하는가를 보고

 

얼마나 엉터리로 해석하고

자기 쪽으로 끌어당기는지를 보고서

 

아 저래서 잘못된 해석이구나를 보고

어부지리로 그런 해석이 잘못됨을 보고서 불가능함을 직시함으로써

 

다른 해석 즉 전혀 다른 예수님의 해석에 모든 것을 일임함으로써

긍휼을 얻게 된다고 했습니다.

 

아니 나도 똑같은 해석을 했었는데 그것이 순 엉터리 해석임을

마귀가 고맙게도 먼저 보여줌으로써 아 나는 해석할 권리가 아예 없구나

 

주여 저는 심판 받아 마땅합니다.

 

나의 해석의 영역을 훨씬 뛰어넘는 분은 예수님 뿐입니다.

 

나는 무조건 죄인입니다.

뭘 해도 죄 밖에 나오지 않습니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나는 심판받아 마땅합니다.

 

주여 불쌍히 여겨주옵소서

 

 

바로 이것이 불가능성 곧 가능성의 과잉인 겁니다.


얼마나 귀한 마귀입니까? 고마운 마귀입니까?

 

진짜로 제대로 된 존재를 보게 됨으로써

자신이 비존재일 뿐임을 보게 된다는 겁니다.

존재라고 우겼던 마귀가 저 꼴 당하는 것 보니

나야 백번 만번 마땅히 무조건 틀렸기 때문이다는 겁니다.


예수님만 옳은 인간이고 나머지 모든 인간은 마귀이니까 말입니다.
 

그런데 더더욱 그 존재 뿐인 예수님께서 비존재로써 십자가의 죽음으로 돌진해 버리는 모든 해석으로 귀결되니

 

이 비존재가 됨이 가장 존재의 과잉으로써 드러남을 보게 되니

 

무한 영광이다는 겁니다.

 

유일한 존재요 유일한 과잉이니까 말입니다.

 

그래서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데 누가 꾀더냐 라고

십자가의 과잉을 외치는 겁니다.

 

믿는 자들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라는 말씀으로 얼마나 사기를 치는지 모릅니다.

그렇다면 당장 산을 옳기는 믿음을 지금 당장 보여 달라고 해야 합니다.

그것을 못 보여주면 마귀입니다.

그런데 그런 요구를 못하니까

도리어 사기에 넘어가는 겁니다.

 

모든 말씀은 인간 지키라고 준게 아니라

오직 예수님만이 하신다는 것을 보여주는 겁니다.

 

안식일도 지킨 적도 없는 인간이

예수님을 안식일을 어겼다고 십자가에 못 박는 겁니다.

 

바르게 산 적이 단 한번도 없는 인간이

막사는 예수님을 먹기를 탐하고 세리와 죄인의 친구요 포도주를 즐기는 술꾼이라고

기여이 십자가의 죽음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저주 받은자라고 연결시켜버리는 겁니다.

 

그러니 이웃사랑 제발 하지 마세요

예수님을 또 십자가에 못 박는 사건으로 연결케 되니까 말입니다.

 

설마! 안그럴꺼 같죠?

문제는 예수님이 반드시 그렇게 연결 짖도록 직결 시키겠다는 의지가

바로 오늘 본문입니다.

 

이웃 사랑 괜히 지키는 바람에

예수님을 죽이고픈 살인의지를 드러내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 제발 어기세요

막사세요

괜히 지키면 죽이고픈 마음만 드러냅니다.

 

가인의 제사와 아벨의 제사 사건이 그때 그 시절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늘도 일상에서 수시로 일어나는 반복의 사건입니다. 무한반복입니다.

 

이 사건이 어떻게 십자가사건과 연관이 됩니까?

 

그런데 문제는 십자가가 십자가 스스로 자신의 십자가 사건을 단번으로 취소 시키는게 아니라

무한반복사건으로 만들어 버린 믿음을 펼치시기 때문에(행함이 아닌)

 

모든 인간들의 행동은 결국 이 십자가사건에서 한 발치도 못 벗어나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 사도바울이 괜히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데 누가 꾀더냐 라고 한게 아닙니다
.

 


모든 매사가 이 십자가사건의 반복으로써 작용하게 되는 겁니다
.

 

아니 어떻게 ~~~~~~~

 

~~~ 떻게

 

십자가사건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알려드려요?

 

안식일 날 38년된 앉은뱅이 병고침이

어떻게 ~~~~~~~ ~~~~~~~~ 떻게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으로 연결이 되는 겁니다.

 

괜히 안식일을 먼저 지켰던 겁니다.

차라리 안식일 안 지켰다면
오히려 안식일날 고침을 받았을텐데
그것이 참 안식의 주인을 만난 날인데
곧 십자가에 달리신 분을 만나는 날인데
그 날이 나의 날이 되어버리니
주님의 날을 도적질 해 놓고서는
거꾸로 예수님께 뒤짚어 씌우는 겁니다.
그것이 어리석은 지혜에 걸려드는 모습니다.
강퍅을 거쳐서 드러내시는 선하심 인 겁니다.

 

이웃사랑을 괜히 지키고

두 번째 계명을 괜히 지키는 바람에

 

예수님의 더 나은 이웃사랑인 십자가 사랑의 용서를 시기하는 겁니다.
못 보는 겁니다. 볼려는 마음이 아예 없습니다.

 

더 나은 안식일

더 나은 이웃사랑

더 나은 계명지킴이

 

있기 때문에

 

안지켜도 되는 겁니다.

다행히 못 지키도록 하십니다.

휴 얼마나 다행인지 지킬수가 없도록 아예 율법이라는 의문의 증서를 찢어버렸습니다.
그러나 강퍅케 하실 자에게는 율법이 생생하게 작용토록 하시는 겁니다.
율법을 폐하러 온게 아니라 완전케 하러 오신 겁니다.

 

결국 성령이 임하지 않은 자는

괜히 지켜버림으로써

 

가인과 같이 안색이 변하여 살인의지를 드러내도록 되어 있는 겁니다.

 

한번은 다짜고짜 고함을 치는 바람에

제가 약골이라 심장이 약해 고함소리에 귀가 먹먹해 몸이 떨려 얼굴이 붉어지니까

안색이 변해버렸다고 가인이다고 뒤짚어 씌우는 것을 보고

 

아 이렇게 말씀을 자기 쪽으로 끌어당기는 구나 싶었습니다.


그 심각한 상황 속에서도 속으로 얼마나 웃기는지 막웃었습니다.
왜냐하면 저 보다 더 얼굴이 붉어져서 화를 내었으니 말입니다.
얼마나 웃기던지.

이 맞구나 모든 인간은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안색이 다 변하여
십자가에 못 박으라 라고 외친 그 상황이 지금 나에게도 벌어지는 구나.
내가 가인 맞구나 라고 말이죠.

 

그래서 온갖 저주를 하더니

정작 주님이 쫏아낸 자는 안색이 변한 제가 아니라

그렇게 규정짖는 그 사람을 쫏아낸 겁니다.

 

목사말 괜히 들어가 말입니다.
목사는 의인이 아닙니다. 목사는 죄인 곧 환자 입니다.
환자가 환자 말을 듣는 것처럼 웃기는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환자는 의사 말만 들으면 됩니다.

너희를 저의 말만 들으라 라고 했습니다.

(마 17:5, 개역) 『말할 때에 홀연히 빛난 구름이 저희를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하는지라』

 

자기는 목사말 지키는 자고

저는 의도적으로 안 지키고 있으니

 

얼마나 미웠겠습니까?


말로는 누가 도둑놈이다 고함치면서 몰아세우며 고래 고래 외쳤지만
의를 외쳤지만
정작 마음은 딴데 있었던 겁니다.
 

아 저는 주님이 더 무서웠습니다.

차라리 절 쫏아내시지
왜 안 쫏아내시는지? 지금도 도통 알수 없습니다.

케 보이! 도대체 원하는게 뭔지 본인들도 뭔지도 모르고 막 달려드는 겁니다.

도리어 더욱더 그런 자를 더 많이 양산하시는 것을 보고
더욱더 무섭기만 할 뿐입니다.
환상이 보여요 보여
그들의 얼굴이 이상하게 보입니다.
얼굴의 반이 썩어 버린 모습을 말입니다.

짤릴 놈은 나 인데 자꾸 엉뚱한 자들이 짤리니까 말입니다.
그 뒤에도 젊은 목사가 덤벼들다가 또 주님이 쫏아내었습니다.
멈추질 않습니다 멈추질 않아

 

멀쩡하던 그들에게 미워하는 마음을 집어 넣으니까

정작 본인들이 어떻게 할 수가 없는 겁니다. 어쩔수 없이 안 미워하고는 못 배기는 겁니다.

 

미워 죽는 겁니다. 미워 죽어

 

요즘은 더욱더 확대 되어서

얼마나 주님이 하신 일이 놀라운지

막 집어넣는 겁니다. 막 넣어

 

그래야 십자가사건이 반복이 되는 겁니다.

 

이것을 인간이 막을수가 없습니다.

피한다고 될 일도 아니요

주님도 그렇게 죽는 판국에 말입니다.

역시 인간은 안됩니다. 안돼 !!

 

십자가 스스로가 자신의 십자가영광을 드러내기 위해서
십자가 자신만이 주인공임을 드러내기 위해서

모조리 다 소모품으로 작용되는 삭제될 것들로 철저하게 이용당할 뿐입니다.

 

이런 상황을 의도적으로 만들어가시는 겁니다.

 

 

그래서 어머니께 이런 말 했습니다.


이왕 이런 판국에 죽었다 셈 치고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데 누가 꾀는지 보자고

 

십자가가 더 중요란지?

 

아니면

딴게 더 중요하다고 그럴듯하게 이야기하는 놈들의 주장이 더 중요한지? 그 모습을 보자고

 

십자가가 얼마나 중요하면

되도않는 것들이 얼마나 꾈려고 달려드는지?

 

뭐 이거 못하게 만들겠다는둥

누가 너를 죽도록 미워한다는둥

반드시 자리 빼앗아버리겠다는 둥

온갖 헛소리를 하는 겁니다.

온갖 공갈 협박의 와중에도 과연 뭐가 중요한지?

 

그래! 그래라 그래!
너거들 원하는대로 제발 되길 바란다

 

그게 뭐그리 중요한데!!!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데

그런것들이 그렇게 중요하니?

 

 

나 라는 자아도 십자가의 소모품으로 지워지고 삭제되는 소모품으로 작용되는 판국에

뭐가 그리 중요하다고 그런것들을 마치 증거물인냥 막 들이대는 것 보고

 

아 마귀들렸구나 라는 것을 보게 됩니다.

증거물이 달라요 달라!

강도 만난 자는 놀랍게도 단 한 명도 없고
선한 사마리아인들 뿐입니다.

환자는 없는데 의사들만 넘쳐 납니다.

이 얼마나 기가막힌 역설입니까?
말씀의 본 취지가 강도 만난 자가 없다는 겁니다.
오히려 선한 사마리아인만 넘쳐 날 뿐입니다.

 

너무 십자가를 잘 믿어서

그래 그래 니가 십자가 더 잘 믿는다

라고 인정해 줘 버리면

 

비로소 악마의 본색을 드러내는 겁니다.

 

 

하여튼 온 몸이, 말씀을 지킬려고 환장을 했습니다 환장을

 
이웃사랑을 실천할려고 온 몸이 발악을 합니다 발악. 환장을 했어요 환장 ....

 

제발 말씀 지키지 마세요잉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데 언 놈이 꾀느냐 말이지요.

 

 

마귀는 말씀을 지킬려고 환장해 있습니다.

십자가를 믿을려고 환장해 있습니다.

 

그것이 마귀의 3가지 시험에 잘 나와 있습니다.

 

인간이라는 이웃을 너무 너무 사랑해서

돌을 떡 덩이 되게 해야

굻어죽는 아이를 살려낼 것 아닙니까?

 

기적을 보여줘야

거룩한 성전에서 떨어져 다치지 않게 천사의 손으로 바쳐줘야

살아갈 희망이라도 있을 것 아닙니까?

 

온 천하 만국의 영광이 되어야 왕 답지 않습니까?

 

이런 경제 종교 정치에 모범이 되어야 메시야 아니냐 말이지요

 

그런데 이것 경제 종교 정치가 어떻게 십자가의 죽음과 직결되는가에 대한 관심사는

오직 예수님 뿐입니다.

 

경제 속에 십자가의 죽음을 집어넣고

종교 속에 십자가의 죽음을 집어넣고

정치 속에 십자가의 죽음을 집어넣는

 

이 단절의 단절의 단절

 

단절의 과잉을 집어넣는

십자가 저주의 해석과

인간과 마귀의 뛰어난 경제 종교 정치적인 해석

 

그 차이를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보여주십니다.

경제 ; 돌이 떡덩이 되게 하는 자를 임금삼겠다는 것에 거부하는 것이 예수님 입니다.
반대로 주님의 살과 피를 먹어야 하는 가해자로 만들겠다는 겁니다. 원수 만들겠다는 겁니다.
죄인 만들겠다는 겁니다.

종교 : 거룩한 성전에서 뛰어내려도 다치지 않는 사랑받는자 하나님으로 부터 축복받는자 이다 라는 주장에

예수님은 그런 악한세대가 구하는 표적이 아닌 요나의 표적 곧 하나님으로 부터 저주 받은자가 누구인가를 보라고 합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을 보라는 겁니다.

정치 : 온 천하 만국의 영광을 받는 자가 되어라 라는 주장에
예수님은 그런 넓은 길이 아닌 좁은길 곧 십자가의 죽음으로만 돌진합니다.
십자가의 영광만 이 땅에 꼿아버리겠다는 겁니다.
그것이 악마라고 그 악마에 반대되는 영광인 십자가의 영광의 깃발을 꼿고자
그 일 외에는 다른 일을 하러 온 적이 없다고 말입니다.

 

이웃?

사실상 없습니다.


이 땅은 예수님을 죽은 세상입니다.
이웃은 커녕 

마귀들 밖에 없습니다.

 

교회에 가도 교인들 다 마귀요

목사들도 다 마귀요

 

이웃은 없고 어떻게 하면 서로가 서로를 이용해서 등쳐먹을까 하는 자들 밖에 없습니다.

 

즉 나의 죄를 위해 피흘려 십자가에 달리는 자는 없다는 겁니다.

 

아예 기대도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웃은 딱 한 분 뿐입니다.

예수님 뿐입니다.

나를 십자가의 원수로 만들줄 아는 자 만이 이웃입니다. 선한 사마리아인 입니다.

 

내가 설정한 엉터리 이웃을 매일 매일 설정하는 그 악마성에 갇혀버린

강도 만난 자인 나를 끝까지 섬기면서 감당하시는 분인 선한 사마리아인은 예수님 뿐입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이 되자 라는 해석을 해버리면 그 목사 마귀입니다. 마귀들에게 또 속는 겁니다.

 

그거 하지 말라고 선한사마리아인으로 오신 겁니다.

사마리아인 곧 유대인들에게는 일종의 거짓말쟁이입니다. 성전 파괴자들입니다.
지옥갈 자들인 우상숭배자들이요 개같은 이방인이요 악마들입니다. 사마리아인 말입니다.

그런데 선한 거짓말쟁이 이다는 겁니다.

 

이 간격, 이 모순, 이 단절을 무슨 수로 넘어서겠습니까?
무슨 수로 좁히겠습니까?


십자가는 좁히기는 커녕 더 그 간격을 벌리고 있는데 말입니다.
간격의 과잉인데?
 

다들 선한 사마리아인이 못 되어서 안달하고 환장하는 것입니다.

 

정작 반대로 단절의 과잉을 보여주는것인데 말입니다.

 

그래서 일부러 레위인 제사장을 지나가게 하시는 비유를 하신 겁니다.

 

이유는 딱 하나입니다.

 

말씀을 지켜야 하기 때문에 강도만난 자를 피하는 겁니다.

막살수 없기 때문에 말입니다.
죽은 시체를 만질수 없습니다.

이웃 사랑해야 하기 때문에 강도만난자를 피하는 겁니다.
만약 그 강도 만난 자를 만지면, 이웃이 되면 말씀을 어긴 것이 됩니다.

안식일날, 일부러 안식일을 어기시는 원리 입니다.
마귀 코 앞에서 마귀 보란 듯이 말입니다.

 

!!! 내가 말해도 멋진 말이네요

 

이웃사랑을 해야 하기 때문에 강도만난 자를 피하는 겁니다.

 

누구 들으랍시고?

 

누가 내 이웃입니까? 라고 묻는 율법사 율법 지키는자 들으랍시고 ....


아무리 해도 강도 만난자!! 안생겨요 안생겨 ~~~~~~~~~

 

 

 



 

 

 

 

 

 

 

 

 

 

숨기시고 vs 나타내심 (10:17-24)

2014/01/16 19:28 in 성령행전(피활동,인간극복)

단절의 단절 : 숨기시고 vs 나타내심 (10:17-24)

 

보고자 해도 못 보고 듣고자 해도 못들은

슬기롭고 지혜로운자에게는 감추고 어린아이 같이 어리석고 미련한 자에게는 나타내는 비밀

 

 

(10:17, 개역) 칠십 인이 기뻐 돌아와 가로되 주여 주의 이름으로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

(10:18, 개역) 예수께서 이르시되 사단이 하늘로서 번개 같이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노라

(10:19, 개역)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세를 주었으니 너희를 해할 자가 결단코 없으리라

(10:20, 개역)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시니라

(10:21, 개역) 이 때에 예수께서 성령으로 기뻐하사 가라사대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10:22, 개역)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이 누군지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가 누군지 아는 자가 없나이다 하시고

(10:23, 개역) 제자들을 돌아보시며 종용히 이르시되 너희의 보는 것을 보는 눈은 복이 있도다

(10:24, 개역)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많은 선지자와 임금이 너희 보는 바를 보고자 하였으되 보지 못하였으며 너희 듣는 바를 듣고자 하였으되 듣지 못하였느니라

 

 

뭔가를 감추고 숨긴다는 것은

그 외부적인 작용 때문에

내부가 영향을 받게 된다는 겁니다.

결국 내부는 외부로 인해 결정됩니다.

 

타인의 욕망이 나의 욕망을 결정하듯이 말입니다.

 

무엇을 심느냐에 따라 심은 것을 나타내도록 되어 있습니다.

진노를 담으면 진노를

긍휼을 담으면 긍휼을 나타내도록 말입니다.

 

그것을 [숨기시고] [나타내심] 으로 표현했습니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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