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 죽이기라는 십자가 지혜(이중성)



(
12:27, 개역) 백합화를 생각하여 보아라 실도 만들지 않고 짜지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12:28, 개역)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12:29, 개역)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여 구하지 말며 근심하지도 말라

(12:30, 개역) 이 모든 것은 세상 백성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아버지께서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될 줄을 아시느니라

(12:31, 개역) 오직 너희는 그의 나라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런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27:1, 개역) 우리의 배 타고 이달리야로 갈 일이 작정되매 바울과 다른 죄수 몇 사람을 아구사도대의 백부장 율리오란 사람에게 맡기니

(27:2, 개역) 아시아 해변 각처로 가려 하는 아드라뭇데노 배에 우리가 올라 행선할새 마게도냐의 데살로니가 사람 아리스다고도 함께 하니라

(27:3, 개역) 이튿날 시돈에 대니 율리오가 바울을 친절히 하여 친구들에게 가서 대접받음을 허락하더니

(27:4, 개역) 또 거기서 우리가 떠나가다가 바람의 거스림을 피하여 구브로 해안을 의지하고 행선하여

(27:5, 개역) 길리기아와 밤빌리아 바다를 건너 루기아의 무라 성에 이르러

(27:6, 개역) 거기서 백부장이 이달리야로 가려 하는 알렉산드리아 배를 만나 우리를 오르게 하니

(27:7, 개역) 배가 더디 가 여러 날만에 간신히 니도 맞은 편에 이르러 풍세가 더 허락지 아니하므로 살모네 앞을 지나 그레데 해안을 의지하고 행선하여

(27:8, 개역) 간신히 그 연안을 지나 미항이라는 곳에 이르니 라새아 성에서 가깝더라

(27:9, 개역) 여러 날이 걸려 금식하는 절기가 이미 지났으므로 행선하기가 위태한지라 바울이 저희를 권하여

(27:10, 개역) 말하되 여러분이여 내가 보니 이번 행선이 하물과 배만 아니라 우리 생명에도 타격과 많은 손해가 있으리라 하되

(27:11, 개역) 백부장이 선장과 선주의 말을 바울의 말보다 더 믿더라

(27:12, 개역) 그 항구가 과동하기에 불편하므로 거기서 떠나 아무쪼록 뵈닉스에 가서 과동하자 하는 자가 더 많으니 뵈닉스는 그레데 항구라 한 편은 동북을, 한 편은 동남을 향하였더라

(27:13, 개역) 남풍이 순하게 불매 저희가 득의한 줄 알고 닻을 감아 그레데 해변을 가까이 하고 행선하더니

(27:14, 개역) 얼마 못되어 섬 가운데로서 유라굴로라는 광풍이 대작하니

(27:15, 개역) 배가 밀려 바람을 맞추어 갈 수 없어 가는 대로 두고 쫓겨가다가

(27:16, 개역) 가우다라는 작은 섬 아래로 지나 간신히 거루를 잡아

(27:17, 개역) 끌어 올리고 줄을 가지고 선체를 둘러 감고 스르디스에 걸릴까 두려워 연장을 내리고 그냥 쫓겨가더니

(27:18, 개역) 우리가 풍랑으로 심히 애쓰다가 이튿날 사공들이 짐을 바다에 풀어 버리고

(27:19, 개역) 사흘째 되는 날에 배의 기구를 저희 손으로 내어 버리니라

(27:20, 개역) 여러 날 동안 해와 별이 보이지 아니하고 큰 풍랑이 그대로 있으매 구원의 여망이 다 없어졌더라

(27:21, 개역) 여러 사람이 오래 먹지 못하였으매 바울이 가운데 서서 말하되 여러분이여 내 말을 듣고 그레데에서 떠나지 아니하여 이 타격과 손상을 면하였더면 좋을 뻔하였느니라

(27:22, 개역)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이제는 안심하라 너희 중 생명에는 아무 손상이 없겠고 오직 배뿐이리라

(27:23, 개역) 나의 속한 바 곧 나의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제 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되

(27:24, 개역) 바울아 두려워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행선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

(27:25, 개역)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

(27:26, 개역) 그러나 우리가 한 섬에 걸리리라 하더라

(27:27, 개역) 열나흘째 되는 날 밤에 우리가 아드리아 바다에 이리저리 쫓겨 가더니 밤중쯤 되어 사공들이 어느 육지에 가까워지는 줄을 짐작하고

(27:28, 개역) 물을 재어보니 이십 길이 되고 조금 가다가 다시 재니 열다섯 길이라

(27:29, 개역) 암초에 걸릴까 하여 고물로 닻 넷을 주고 날이 새기를 고대하더니

(27:30, 개역) 사공들이 도망하고자 하여 이물에서 닻을 주려는 체하고 거루를 바다에 내려놓거늘

(27:31, 개역) 바울이 백부장과 군사들에게 이르되 이 사람들이 배에 있지 아니하면 너희가 구원을 얻지 못하리라 하니

(27:32, 개역) 이에 군사들이 거룻 줄을 끊어 떼어 버리니라

(27:33, 개역) 날이 새어 가매 바울이 여러 사람을 음식 먹으라 권하여 가로되 너희가 기다리고 기다리며 먹지 못하고 주린 지가 오늘까지 열나흘인즉

(27:34, 개역) 음식 먹으라 권하노니 이것이 너희 구원을 위하는 것이요 너희 중 머리터럭 하나라도 잃을 자가 없느니라 하고

(27:35, 개역) 떡을 가져다가 모든 사람 앞에서 하나님께 축사하고 떼어 먹기를 시작하매

(27:36, 개역) 저희도 다 안심하고 받아 먹으니

(27:37, 개역) 배에 있는 우리의 수는 전부 이백칠십육 인이러라

(27:38, 개역) 배부르게 먹고 밀을 바다에 버려 배를 가볍게 하였더니

(27:39, 개역) 날이 새매 어느 땅인지 알지 못하나 경사 진 해안으로 된 항만이 눈에 띄거늘 배를 거기에 들여다 댈 수 있는가 의논한 후

(27:40, 개역) 닻을 끊어 바다에 버리는 동시에 킷줄을 늦추고 돛을 달고 바람을 맞추어 해안을 향하여 들어가다가

(27:41, 개역) 두 물이 합하여 흐르는 곳을 당하여 배를 걸매 이물은 부딪혀 움직일 수 없이 붙고 고물은 큰 물결에 깨어져가니

(27:42, 개역) 군사들은 죄수가 헤엄쳐서 도망할까 하여 저희를 죽이는 것이 좋다 하였으나

(27:43, 개역) 백부장이 바울을 구원하려 하여 저희의 뜻을 막고 헤엄칠 줄 아는 사람들을 명하여 물에 뛰어 내려 먼저 육지에 나가게 하고

(27:44, 개역) 그 남은 사람들은 널조각 혹은 배 물건에 의지하여 나가게 하니 마침내 사람들이 다 상륙하여 구원을 얻으니라

(28:1, 개역) 우리가 구원을 얻은 후에 안즉 그 섬은 멜리데라 하더라

(28:2, 개역) 토인들이 우리에게 특별한 동정을 하여 비가 오고 날이 차매 불을 피워 우리를 다 영접하더라

(28:3, 개역) 바울이 한 뭇 나무를 거두어 불에 넣으니 뜨거움을 인하여 독사가 나와 그 손을 물고 있는지라

(28:4, 개역) 토인들이 이 짐승이 그 손에 달림을 보고 서로 말하되 진실로 이 사람은 살인한 자로다 바다에서는 구원을 얻었으나 공의가 살지 못하게 하심이로다 하더니

(28:5, 개역) 바울이 그 짐승을 불에 떨어버리매 조금도 상함이 없더라

(28:6, 개역) 그가 붓든지 혹 갑자기 엎드러져 죽을 줄로 저희가 기다렸더니 오래 기다려도 그에게 아무 이상이 없음을 보고 돌려 생각하여 말하되 신이라 하더라

(28:7, 개역) 이 섬에 제일 높은 사람 보블리오라 하는 이가 그 근처에 토지가 있는지라 그가 우리를 영접하여 사흘이나 친절히 유숙하게 하더니

(28:8, 개역) 보블리오의 부친이 열병과 이질에 걸려 누웠거늘 바울이 들어가서 기도하고 그에게 안수하여 낫게 하매

(28:9, 개역) 이러므로 섬 가운데 다른 병든 사람들이 와서 고침을 받고

(28:10, 개역) 후한 예로 우리를 대접하고 떠날 때에 우리 쓸 것을 배에 올리더라

(28:11, 개역) 석 달 후에 그 섬에서 과동한 알렉산드리아 배를 우리가 타고 떠나니 그 배 기호는 디오스구로라

(28:12, 개역) 수라구사에 대고 사흘을 있다가

(28:13, 개역) 거기서 둘러가서 레기온에 이르러 하루를 지난 후 남풍이 일어나므로 이튿날 보디올에 이르러

(28:14, 개역) 거기서 형제를 만나 저희의 청함을 받아 이레를 함께 유하다가 로마로 가니라

(28:15, 개역) 거기 형제들이 우리 소식을 듣고 압비오 저자와 삼관까지 맞으러 오니 바울이 저희를 보고 하나님께 사례하고 담대한 마음을 얻으니라

(28:16, 개역) 우리가 로마에 들어가니 바울은 자기를 지키는 한 군사와 함께 따로 있게 허락하더라

(28:17, 개역) 사흘 후에 바울이 유대인 중 높은 사람들을 청하여 모인 후에 이르되 여러분 형제들아 내가 이스라엘 백성이나 우리 조상의 규모를 배척한 일이 없는데 예루살렘에서 로마인의 손에 죄수로 내어준 바 되었으니

(28:18, 개역) 로마인은 나를 심문하여 죽일 죄목이 없으므로 놓으려 하였으나

(28:19, 개역) 유대인들이 반대하기로 내가 마지 못하여 가이사에게 호소함이요 내 민족을 송사하려는 것이 아니로라

(28:20, 개역) 이러하므로 너희를 보고 함께 이야기하려고 청하였노니 이스라엘의 소망을 인하여 내가 이 쇠사슬에 매인 바 되었노라

(28:21, 개역) 저희가 가로되 우리가 유대에서 네게 대한 편지도 받은 일이 없고 또 형제 중 누가 와서 네게 대하여 좋지 못한 것을 고하든지 이야기한 일도 없느니라

(28:22, 개역) 이에 우리가 너의 사상이 어떠한가 듣고자 하노니 이 파에 대하여는 어디서든지 반대를 받는 줄 우리가 앎이라 하더라

(28:23, 개역) 저희가 일자를 정하고 그의 우거하는 집에 많이 오니 바울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강론하여 하나님 나라를 증거하고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말을 가지고 예수의 일로 권하더라

(28:24, 개역) 그 말을 믿는 사람도 있고 믿지 아니하는 사람도 있어

(28:25, 개역) 서로 맞지 아니하여 흩어질 때에 바울이 한 말로 일러 가로되 성령이 선지자 이사야로 너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것이 옳도다

(28:26, 개역) 일렀으되 이 백성에게 가서 말하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도무지 깨닫지 못하며 보기는 보아도 도무지 알지 못하는도다

(28:27, 개역)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로는 둔하게 듣고 그 눈을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아와 나의 고침을 받을까 함이라 하였으니

(28:28, 개역) 그런즉 하나님의 이 구원을 이방인에게로 보내신 줄 알라 저희는 또한 들으리라 하더라

(28:29, 개역) (없음)

(28:30, 개역) 바울이 온 이태를 자기 셋집에 유하며 자기에게 오는 사람을 다 영접하고

(28:31, 개역) 담대히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께 관한 것을 가르치되 금하는 사람이 없었더라

 

 

지난 시간에 사도바울이 심각한 상황에 처해 있는 사건들이 복잡하게 나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아랑곳 하지 않고

어찌하던지 복음을 증거하는 기회로 삼는 상황으로

분위기가 완전히 바울 중심으로 흘러가는 것을 살펴봤습니다.

 

남들은 그랬든 어쨌든 넌 이제 죽은 목숨이나 마찬가지야?

 

왜 넌 정치적인 희생양이 되었거든!!

 

이라고 분위기 파악 못하는 사람으로 취급하듯이 보고 있지만

정작 사도바울은 그것을 몰라서 당하는게 아니라

이미 본인 조차도 예수님을 그렇게 몰아넣어서 죽여 봐서 잘 알기에

이제는 그 바톤을 이어 받아 어찌하든지 복음을 전하는 기회로 삼는다는 것에 매진 하는 모습이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런 의미로 설레임이라고 표현했습니다.

 

마치 아기가 태어나기 전에

엄마는 해산하는 고통을 죽음 속을 들락날락 하듯이 격게 됩니다.

 

바깥에 있는 아빠는 두려움반 설레임반 온갖 생각들을 하면서

발을 동동 구르면서 그 심각한 상황에 직면하면서

마치 자기가 대신 아팠으면 하는 심정에 마음 아파 합니다.

그런데 막상 생명의 아기가 태어나면

언제 그랬냐 는냥 그 모든 심각한 상황이 일소에 말소 되고

기쁨으로 넘쳐 납니다.

 

돈이 갑자기 공짜로 생겨서 로또당첨이 된 것도 아니요

재산이 늘어나거나

아프고 병든 몸이 말끔하게 고침을 받았거나

아니면 기적이 생겨나서 홍해를 가르듯이
성전에서 뛰어내려 천사들이 두 손을 딱 받쳐서
죽지 않게 되었거나 하는 그런 기쁨이 아닌

 

차원이 전혀 다른 기쁨이 넘쳐나는 겁니다.

방금 전 까지만 해도 그 심각했던 것은 어디로 간 것일까요?

 

마치 다윗이 이름 없는 아기를 살려달라고 그렇게 눈물로써 기도하고 회개에다 금식까지 덧붙여도

 

도저히 살려낼수가 없음을 알고

 

오히려 너무 너무 기뻐서

 

막 먹고 막 마시고 막 춤을 추듯이 말입니다.

 

나의 기도가 단절 되었다는 것이 얼마나 기쁘냐 말이죠?

 

과연 기쁠까요?

 

그 기쁨과 아기낳는 기쁨이 무슨 상관이 있다고?

 

동네 사람들 동네 사람들 나의 죄를 아는 선지자가 여기 떳어요 라고

우물 가의 여인 사마리아 여인이 외친 그 기쁨처럼

 

과연 내 죄를 아는 이가 나타났다고 기뻐서 동네 떠들어대는 사람이,

세상에 그런 사람이 세상 천지 어디 있냐 말이죠?

 

자 말하다 보니 기쁨이 졸지에 우발적으로 나와버렸습니다.

 

나의 기도가 단절되어서 기뻐 날뛰는 기쁨

아기 낳아서 좀전까지 심각하던 모든 상황이 기쁨으로 변했다는 기쁨

나의 죄를 아는 선지자가 나타났다는 기쁨

전복의 기쁨입니다. 팔을 어긋맞게 하는 기쁨입니다.
이것이 간격의 기쁨, 단절의 기쁨입니다.
딴 말로 복음입니다. 희년입니다.

 

물론 남자가 모르는 여자의 아기낳는 것은

단순이 육의 아기가 아닌

자유하는 여자의 아기입니다.

마리아 보세요

얼마나 심각했습니까?

이 아기 놓으면 율법에 의하면 돌삐 맞아 죽어야 하잖아요

그래서 배가 올라오니 빨리 제거해야 하는 것이 유대인의 지혜입니다.

다말을 불에 태워 죽여 화형시키는 유다의 지혜처럼 말입니다.

 

이틀 전이였던가? 며칠 전에 나눈 대화인데?

 

마리아가 오죽 답답했으면 안믿겨져서 천사말이 맞는지 안맞는지

확인할려고 지금의 대구에서 경산까지 그 길을 하루아침에 다 돌아다니는 겁니다.

 

믿음? 내가 믿는게 아니지요. 마리아도 못믿는 판국에 ?

 

안 믿고는 못 배기도록 만드시는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사건이 아니면 운동력이 발생하지 않습니다.
사건 만이 차이라는 간격을 만들어 냅니다.

 

인간의 자체적인 운동력은 일종의 복수심이요 원한입니다.

나 봐라 나 아직 안 죽었잖아 나 살아있다 라는

생명을 흉내내는 겁니다.

 

(고전 13:7, 개역)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고전 13:8, 개역) 사랑은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아니하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고전 13:9, 개역) 우리가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고전 13:10, 개역)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고전 13:11, 개역)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고전 13:12, 개역)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고전 13:13, 개역)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그래서 진짜 생명은 죽여버립니다. 죽음으로 다가오는 겁니다.

 

장성한자와 어린아이와의 차이점은

죽음에 대한 인식의 차이입니다.

 

죽음이 움직이는 자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리는 자입니다.

 

그래서 무가치하고 무능하고 어리석고 미련한 것을

귀하게 볼 줄 압니다.

 

상대적인 어린아이는 영원한 줄로 알고

자기가 행한 일을 절대로 무가치하게 여기지 않고

영원한 것으로 취급하기 때문에

귀한 줄을 모르는 겁니다.
어린아이는 자기것만 영원히 취급하기에, 자기것만 가치있다고 보는 겁니다.

 

그래서 마리아는 자기의 믿음을 버리고

사건이 자기 몸 속으로 들어온 사건을 확인하고자

의심하고 의심해서

무가치하고 무능한 그 사건이 뭔가를 확인하고자

단숨에 달려갔던 겁니다.

 

사건이 그녀를 섬겼기 때문에 안 움직이고는 못 배긴 겁니다.

 

진정한 삶 곧 삶의 과잉이

죽음으로써 그녀에게 다가온 겁니다.

죽음이야 말로 비-삶 곧 삶의 과잉 즉 진짜 삶인 겁니다.

 

가짜 인간을 임신하고 낳고 키우는게 아니라

진짜 인간 곧 비인간 즉 인간의 과잉을 임신하고
그 자녀로 인해 삶의 과잉을 누려야 할 판국인 겁니다
.
그러니 키우는게 아니라 도리어 키움 당하는 겁니다.
이 아기로 인해서 벌어지는 섬김의 일들을 섬깅 당해야 하는 겁니다.

 

그것이 복 된 여자여 라는 겁니다.

자녀가 원수의 문을 열어 재껴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시므온 선지자도 그래서 기뻐한 겁니다.

기쁨의 과잉이 비로소 그를 죽이는 겁니다.
비로소 이스라엘을 가르는 겁니다.
그 틈에서 다시 참 이스라엘 곧 예수님이 태어나고
참 몸을 구성하는 겁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소망입니다. 이스라엘의 과잉(비-이스라엘 = 참 이스라엘) 으로써 말입니다.
이스라엘은 십자가 사건을 임신하는 자인 겁니다.

그러니 딴 민족에서 죽으면 안됩니다. 예수님은 반드시 자기 백성의 손에 죽으셔야 하는 겁니다.

 

 

(2:25, 개역)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이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2:26, 개역) 저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 죽지 아니하리라 하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니

(2:27, 개역)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가매 마침 부모가 율법의 전례대로 행하고자 하여 그 아기 예수를 데리고 오는지라

(2:28, 개역) 시므온이 아기를 안고 하나님을 찬송하여 가로되

(2:29, 개역)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2:30, 개역)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2:31, 개역)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2:32, 개역)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 하니

(2:33, 개역) 그 부모가 그 아기에 대한 말들을 기이히 여기더라

(2:34, 개역) 시므온이 저희에게 축복하고 그 모친 마리아에게 일러 가로되 보라 이 아이는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의 패하고 흥함을 위하여 비방을 받는 표적되기 위하여 세움을 입었고

(2:35, 개역) 또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라 이는 여러 사람의 마음의 생각을 드러내려 함이니라 하더라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입니다. 딴데서 죽으면 안됩니다.

앙 대요 ~~~~~~~

 

앙 대요 ~~~~~

유대인의 손에서 죽으면 앙 ~~~ 대요 ~~

이방인의 손에 죽어야 대요 ~~~~~~~~~~

 

이것이 십자가의 지혜입니다.

맞물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곧 원수성입니다.

 

죄성입니다.

 

예수님처럼

 

사도바울은 이방인의 원수됨을 담는 언약궤 증거궤가 되어야 합니다.

 

순교하란 말이냐? 아니요

 

맞물려야 한다는 겁니다.

 

생명에 접붙이는 방식입니다.


복음 자체가 죽음이요 단절입니다.

그래서 기쁜소식이요 희년 은혜의 날입니다.


기존의 것이 단절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이전 것이 지나가게 될려면

이전 것이 단절 되어야
새 몸을 볼 것이 아니겠습니까?

옛것을 새것이 붙이면 둘 다 망치는 겁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하듯이

그 단절성을 제대로 보여주는

간격으로써
사물로써

사건으로써 바울은

 

하나의 사물로 취급당해야만 하고

하나의 사건으로 취급당해야 하고
하나의 간격으로 취급당해야 하기 때문에

 

은사는 곧 소모품 즉 단절품이 되는 겁니다.

 

그 은사를 입은 겁니다.

 

어떤 은사를 받아도 똑같은 기능입니다.

매인바 되었다는 겁니다. 이것이 시므온과 같은 매인바 된 은사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소망입니다.

 

(28:20, 개역) 이러하므로 너희를 보고 함께 이야기하려고 청하였노니 이스라엘의 소망을 인하여 내가 이 쇠사슬에 매인 바 되었노라

 

 

그리스도라는 몸 때문에 부여된 기능입니다.
그것이 기계 곧 기능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을 보여주기 위한 기계로써 작동하는 겁니다.

은사로써 작동하는 겁니다.

 

 

지난 시간에 아그립바와 베스도는 바로 이런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낯선 몸이 없기 때문에

사도바울에게 벌어지는 일들이 어리석다 라고 표현합니다.

 

마치 예수님을 죽이고자 하는 유대인들에게 말려들지 않을려고

빌라도가 손을 씻듯이

나는 예수에게서 죄를 찾지 못하겠다 라고 하는 것과 같은 식으로

 

바울에게서 죄를 찾지 못했는데

항소를 하는 바람에 석방될 일들을

스스로 제 무덤 판다고

유대인들에게 말려들고 있다고 여기는 겁니다.

 

 

그러나 정작 로마에서 사도바울은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기회를 더 얻게 됩니다.

2년 넘게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있습니다.

 

그렇게 해 놓고도 믿는자는 믿고 안믿는자는 안믿는다는

주님의 말씀을 바울 본인 자신이 믿게 되는 판국을 누리게 됩니다.

 

그 정도로 빨리 죽일 것 같이 사건이 진행이 되었지만

정작 2년을 로마에 있는 유대인들에게 집중적으로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막사는 복음이였으면

막살기의 막살기(부정의 부정)으로써

 

로마로 이동하는 가운데서도 복음으로 구원될자를 건지는 겁니다.

물에 빠지고 폭풍에 휩쓸린자는 바울이 아니라

바울과 동행한 자들입니다.

그들을 건지기 위해서 같이 빠져야 했던 겁니다.

 

바울이 얼마나 바쁜지

죽어도 그냥 안 죽습니다.

건지고 죽어야 하기에

별에 별 사건들이 다 벌어지는 겁니다.

 

그 폭풍이라는 죽음 속에 빠진 자들에게

죄수로써

죄인으로써

범인으로써

 

물에 빠진 경찰관을 살려야 한 겁니다.

바울을 구조하는 119 구조대원을 건져야 합니다.

 

이 얼마나 모순입니까?

 

물에 빠진놈 건져냈더니

도리어 물에 빠지니 그 물에 빠진놈이 나를 물에서 건져내는 겁니다.

 

모순의 모순이요, 부정의 부정인, 배신의 배신이요 어리석음의 어리석음인

십자가의 이중성인 겁니다.

 

그렇게 로마에서 죽이시고자 했는데 정작 로마에 도착하니

2년을 더 이방인 보다 유대인을 위해서 복음을 증거케 하시는 겁니다.
유대인 하나를 더 얻고자 함이 아니라

듣고도 깨닫고 고침이 될까 두려워 한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바울 본인이 믿어야 하는 판국에 놓이는 모순이다는 겁니다
.

남 믿도록 하기 위함이 아닌 본인이 믿어야 하는 판국으로 몰아가시는 그 섬김을 누리기 위해서 말입니다
.

 

그야말로 막살기 보다 더 나은 막살기, 막살기의 막살기입니다.
곧 십자가 사건의 반복입니다. 이중성입니다. 과잉입니다.

 

그 단절의 단절을 모순의 모순을 간격으로 벌려놓아야

그 어리석음과 미련함이

곧 죽음의 죽음이

 

풍성한 삶 진정한 삶으로 다가오는 겁니다.

 

마음껏 타락해 보세요

과연 나의 타락함과 흘러넘치는 용서와 누가 더 센지?

 

누가 피 흘렸습니까?

 

되도 않는 인간들의 행함과 믿음에 기댈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시험 들 뿐입니다.

 

본인들도 모르는 모호함일 뿐입니다.

 

바울을 죽이시는 분은 성령입니다.

그 바울을 죽이기 위해서 얼마나 풍성하고 귀하게 삶의 진정성을 넘치도록 하시는지~~

 

내일 아궁이에 던질 들 풀도 오늘 귀히 입히시는

 

이 모순의 사랑이 바로 십자가의 지혜입니다.

 

내가 너를 위해 죽었듯이

너도 나를 위해 죽어라 라는 겁니다.

 

죽음으로써 만나는 사랑이 십자가의 사랑인 겁니다.

 

나를 위해 사라지신 분이기에

귀한 사랑입니다.

 

진짜 십자가의 지혜는 바울 죽이기라는 모순을 펼치듯이

나를 죽이는 십자가의 지혜야 말로 진짜 지혜인 겁니다.

나를 살리고자 하는 십자가는 가짜입니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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