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강한 자와 요나의 표적 ( 11:14-32)

 


(
11:14, 개역) 예수께서 한 벙어리 귀신을 쫓아내시니 귀신이 나가매 벙어리가 말하는지라 무리들이 기이히 여겼으나

(11:15, 개역) 그 중에 더러는 말하기를 저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 하고

(11:16, 개역) 또 더러는 예수를 시험하여 하늘로서 오는 표적을 구하니

(11:17, 개역) 예수께서 저희 생각을 아시고 이르시되 스스로 분쟁하는 나라마다 황폐하여지며 스스로 분쟁하는 집은 무너지느니라

(11:18, 개역) 너희 말이 내가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 하니 만일 사단이 스스로 분쟁하면 저의 나라가 어떻게 서겠느냐

(11:19, 개역) 내가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면 너희 아들들은 누구를 힘입어 쫓아내느냐 그러므로 저희가 너희 재판장이 되리라

(11:20, 개역) 그러나 내가 만일 하나님의 손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11:21, 개역) 강한 자가 무장을 하고 자기 집을 지킬 때에는 그 소유가 안전하되

(11:22, 개역) 더 강한 자가 와서 저를 이길 때에는 저의 믿던 무장을 빼앗고 저의 재물을 나누느니라

(11:23, 개역) 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헤치는 자니라

(11:24, 개역)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에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되 얻지 못하고 이에 가로되 내가 나온 내 집으로 돌아가리라 하고

(11:25, 개역) 와 보니 그 집이 소제되고 수리 되었거늘

(11:26, 개역) 이에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 심하게 되느니라

(11:27, 개역) 이 말씀을 하실 때에 무리 중에서 한 여자가 음성을 높여 가로되 당신을 밴 태와 당신을 먹인 젖이 복이 있도소이다 하니

(11:28, 개역) 예수께서 가라사대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 하시니라

(11:29, 개역) 무리가 모였을 때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이 세대는 악한 세대라 표적을 구하되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나니

(11:30, 개역) 요나가 니느웨 사람들에게 표적이 됨과 같이 인자도 이 세대에 그러하리라

(11:31, 개역) 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가 솔로몬의 지혜로운 말을 들으려고 땅 끝에서 왔음이어니와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으며

(11:32, 개역) 심판 때에 니느웨 사람들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들이 요나의 전도를 듣고 회개하였음이어니와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

 

 

기도에 대한 이야기에서 표적 이야기로 이행을 합니다.
즉 이 말은

이웃을 순 엉터리로 설정했듯이

기도도 순 엉터리로 한 것을 지적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은 표적에 대한 이야기로써

표적을 순 엉터리로 구하고 있다는 것을 지적하시는 겁니다.

결론은 이미 나 버렸네요.

 

그렇기에 우리가 늘 구하는 표적, 기적

왜 순 엉터리인지 같이 한번 지적 당해 봅시다.

 

 

인간은 만만치 않습니다.

반드시 최고의 것을 고르고 골라서 설정, 또는 꾸며놓습니다.

 

왜냐하면 몸이 선악을 기억하기 때문에

항상 동일성 동질성 일치성에 집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오늘 본문에서는 강한 것, 강하다 라고 표현 합니다.

 

기존의 것을 검증하고 검증해서 가장 좋은 것으로,

가장 강한 것으로 자신의 몸에 장착하면서 설정 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이웃을 순 엉터리로 설정하였듯이

기존의 강한 최고의 해석, 최고의 의미를

 

더 강한 것이 오지 않으면 그 틀에서 벗어날수가 없을 정도로

선악에 갇혀 버린 몸이라는 것을 직시케 됩니다.

 

선악을 기억하는 몸이 이웃을 설정해 본들

또는 선악을 기억하는 몸이 기도를 해 본들

또는 선악을 기억하는 몸이 예수님을 대접하겠다고 분주하게 열심을 다 해 본들

 

다 엉터리가 되는 겁니다.

 

더 나은 것이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더 나은 것이 더 나은 것으로 보일려면

자기가 가지고 있는 , 소유화 된, 경험화 된, 몸과 일치화 된 것을

헌 것으로 취급해야만 새것이 새것으로 의미가 되는 겁니다.

 

아니! 자기가 가진 것이 최고의 것인데

그것을 어떻게 헌 옷으로, 쓰레기로, 무능한 것으로 취급해야만 합니까?

그거 모은 다고 그렇게도 온 몸을 불태워 버렸는데?

 

 

그래서 부자 청년을 등돌려 보내버릴 정도로

너무 너무 강한 더 나은 강한 것이

부자 청년을 꽝 하고 박아버린 겁니다.

 

자 더 나은 강한 것 받을래?

아니면 니가 그렇게도 힘들게 모으고 모은, 최고의 강하다 한, 그 기존의 최고를

그냥 간직할래?

 

두 주인은 못 섬기거든? 우짤래?

 

그래서 부자청년은 전재산을 다 버리고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 주라는 말씀은

도저히 지키지 못하게 된 겁니다.

아니 지켰다매? 지켰으면 그 지킨 연장선에서
역시나 전재산 가난한자에게 주라는 말씀은 왜 못 지키냐 말이죠.

 

왜냐 하면 지키는 것으로써 자신을 버텨왔는데

그래서 기존의 모든 지킴은 다 행했는데

 

이렇게 더 강한 지킴을 요구해 버리니까

그만 한계에 부딧히고 만 겁니다.

 

아니 진작 부딧혀야만 했던 겁니다.

즉 애초부터 지키는 것을 할 필요가 없었던 겁니다.

 

복음은 애초부터 지키는게 하나도 없습니다.

말씀 지키지 마세요

 

제발 말씀을 지키지 마세요

성경 어디에도 말씀을 지키라는 소리는 단 하나도 없습니다.

 

마귀 씌인 자에게만 그렇게 보일 뿐입니다.

? 자기가 문자 해석할 수 있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남들은 몰라도 자신은 말씀을 지킬수 있다고 여겼기 떄문입니다.
남들은 몰라도 나는 예수님을 믿는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문자를 해석 할 줄 모르는

아니 까막눈인 글씨를 모르는 저 세리와 같지 않음을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라고 하면서 말이지요.

 

성경 어디에도 말씀을 지키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 반대입니다.

모든 성경 말씀은 지키는 것이 하나도 있지 않고

모조리 다 누리라 라는 것 밖에 없습니다.

 

누리라도 명령어 아니냐 라고 따지는 사람은

더 이상 대화 자체가 안된다는 겁니다.

 

성경 어디에도 기적은 없습니다.

그것은 악한 세대가 요구하는 것입니다.

 

모든 성경은 요나의 표적 밖에 없습니다.

 

자 이러면 말 좀 통할까요? ㅋㅋㅋㅋ

역시나 안 통하죠 단절이니까 말입니다
.


도대체 어디에 말씀 지키라는 소리가 적혀 있습니까?
성경 어디 있습니까? 몇장 몇절?
보는 눈이 서로 달라도 너무 다르죠?
 

구체적 보편은 우리의 성경 명령어를 인식하는 나 라는 존재 또는 주체가 아니라

 

그런 나로부터 예외 취급 당하는 십자가가 바로 구체적 보편인 겁니다.

 

그래서 구체적 보편은 반드시 이 간격을 벌려 버리는 겁니다.

그래서 단절입니다. 성경 용어로는 거룩 입니다.
 

단절을, 갈라놓음을, 분리를, 차이를, 간격을 드러내지 못하는 것은

구체적 보편 즉 십자가가 아닌 겁니다.

 

십자가 조차도 다 일치성으로 떠들어 대고 있을테니 말입니다.


악한 세대가 요구하는 표적이, 이 일치성, 동질성, 개방성, 근육쓰면 된다는 둥

어떻게든 하면 된다는 식입니다.

 

여기에 요나의 표적은 그 반대입니다.

간격을 벌려 버립니다.

단절을 보여주는 겁니다.

 

요나가 큰 물고기 뱃속에서 3일이라는 간격을 누렸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그 심판성을 니느웨에게만 퍼부을 줄 알았지

그 예외인 이스라엘에게는 퍼부을 마음이 없었던 겁니다.

 

그래서 요나는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았다고 하나님께 자살 시위를 하는 겁니다.

 

이웃을 엉터리로 설정한 겁니다.

왜 이스라엘은 회개케 안하고! 왜 니느웨 백성을 회개케 하냐! 라고 말입니다.

회개를 엉터리로 설정한 겁니다.

 

똑같이 엘리야가 갈멜산에서 바알과 아세라 제사장 850명과의 대결에서

기도는 단절 되는 것이다 라고 본인이 정답을 외쳐 놓고서는

정작 내 열심히 특심인데 나만 남았다고

역시나 자살 시위를 하나님께 합니다.

 

본인이 말해놓고도 본인이 뭔지 모르는 겁니다.

적을 이기면 또 다른 적이 생기는데

그 적이

그 하나님의 적(웬수)이 자기자신인줄 요나도 엘리야도 역시나 몰랐던 겁니다.

 

하나님의 편에 섰다고 역시나 동질성을 일치성을 누릴려고 했던 겁니다.

 

누린다는 의미는 정작 그 반대입니다.

 

항상 주의 목전에 항상 죄 밖에 없는 하나님의 원수임을 발견하는 것이 누리는 겁니다.

 

누린다(막살기)고 하니까 역시나 그 용어 단어 문자를 내 쪽으로 끌어당기는데

이들 선지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인간은 어쩔수 없습니다.

 

주님 시키는대로 했으니 나 하나님 편 맞지요 라는 겁니다.

 

그러나 그것은 순 엉터리 내 믿음일 뿐이고 ~~~, 주체(주인공)이 너일 뿐이고 ~~~,

정작 주님의 믿음에서는 내 믿음이 아작 나면서 부딧히는 돌에 부딧혀 가루가 되어야 하는 겁니다.

 

여기서 구체적 보편은 주님의 믿음 곧 내 믿음을 찢어버리는 주님의 믿음이지

 

내 믿음이 구체적 보편이 될 수가 없다는 겁니다.

 

남을 위해 십자가를 대신 질 수조차 없을뿐더러

남의 허물을 대신 감당치도 못합니다.

오히려 내 허물을 나도 감당못해

주님이 대신 이 허물을 감당하셔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요나와 엘리야 선지자는 실패를 해야만 합니다.

 

그들이 성공해 버리면 골치 아픕니다.

 

요나와 엘리야가 타인의 죄를 감당하고 대신 십자가를 져야 하니까 말입니다.
예수님이 오실 이유가 없이 자기들끼리 다 해결해 버리는 식이니까 말입니다.
빈 자리 공백이 구지 필요치 않는 겁니다. 구체적 보편성이 형성 되지 않는 겁니다.

 

그래서 베드로 역시 내가 남을 몇 번 용서 해야만 합니까 라고 묻는 겁니다.
자꾸 빈 공백의 자리를 앉을려고 하는 겁니다.

 

주는 그리스도 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라고 고백해 놓고서는

그 고백이 무슨 소리인지 본인이 몰랐기 때문에

 

사탄아 너는 나를 넘어뜨릴려고 하는 자다 라는 소리를 들을 수 밖에 없었던 겁니다.
분명히 너가 한 소리가 아니라 성령이 너를 그렇게 고백케 했다고 하셨거든요.

 

그러니 이런 양쪽 상황을 우리는 다 겪어야 하는 겁니다.

그것이 누리는 겁니다. 원수로써 말입니다. 죄인 중의 괴수로써 말입니다.

 

남들 보기에 좋아보이고

자기도 흡족해 보이는

칭찬들을 만한 것

즉 일치성 만 챙기고픈데

 

어림 반푼어치도 없는 거죠.

 

사단의 가시도 누려야 하는 겁니다.

 

그래야 네 은혜가 네게 족하다 라는 구체적 보편을 누리는 겁니다.

심판성이란, 단절성이란 누구에게만 특별하게 주어지는게 아니라
모든 것에 다 적용시키는 겁니다. 심지어 모든 피조물에게도 말입니다.
그래서 모든 피조물은 탄식하는 겁니다.

 

말씀은 단 한 개도 지킬것이 단 하나도 없이

고조 누리는 것 밖에 없는 고조 고조 고조

 

사단의 가시를 거치지 않고서는 족한 은혜 또한 누릴 수 없는 겁니다.

 

사단의 가시를 빼버려 보세요

자만치 못하도록 하신 주님의 배려가 날라가 버리잖아요?

 

그게 무슨 은혜입니까?

 

주님의 섬김이 없는, 배려도 없는? 그게 은혜입니까?

 

아니면 여전히 선악을 기억하는 몸이 쟁취한 획득 아이템 소유물입니까?

 

 

소유물 곧 모든 사물은 정작 이 구체적인 보편을 드러내기 위해서

나타나야만 하는 것으로써 나타나는 겁니다.

 

그것을 [먼저 있었다] 라고 합니다.

 

즉 말씀이 먼저이지

말씀 지키는 내가 먼저가 아니다는 겁니다.

 

그러나 이것이 무슨 소리인지 모르기에

단절 즉 차단을 격게 되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소유물 즉 사물로 부터의 섬김입니다.

 

내가 사물을 섬기는게 아니라

또 섬길수도 없고 섬김 생각도 하지 마세요

 

도리어 사물이 나를 섬기기 위해서 늘 나타나야만 할 때에 나타나야만 한다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닭입니다. 이것이 비존재 입니다. 먼저 존재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비존재라니?
비존재란 존재의 과잉성을 말하는 겁니다. 존재 보다 더 나은 존재로써의 과잉된 존재 말입니다.

 

닭이 나를 단절케 하기 위해서

나 보다 닭이 먼저 있었던 겁니다.

 

그리고 그 간격을 벌리는 겁니다.

 

꼬끼오 ~~~ 꼬끼오 ~~~ 꼬끼오 ~~~~

비인간으로써 닭? 울어야 할 인간 보다 더 울음을 터트리는 과잉된 우는 선지자!

 

다윗은 이 간격을 메꾸어 볼려고

눈물로써 기도를 합니다.

식음을 전패하는 금식을 합니다.

옷을 찢으면서 회개를 합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절대로 여디디야 여디디야 여디디야 보다 먼저 있지 않았던 겁니다.

 

오히려 여디디야(선물)를 누려야 할 판국입니다.

 

도저히 그 덮쳐오는 그 은혜를 막을 길이 없어서

그 여디디야라는 선물로 인해 잠식 당해

 

비로소 막춤추고 막마시고 막노래하게 되는

누려 ~~~~를 누리는 겁니다.

 

바로 이겁니. 막살기

 

기도 회개 금식이 바로 그것을 막아볼려는 속셈이였던 겁니다.
누려 ~~ 라는 막살기를 가로막고자 동원이 되는 겁니다. 지키고 지켰으니 지키리라 가 말이죠.

몸이 선악을 고수할려고 그것을 막을려고 버티고 ~~~ 버티고 ~~~ 버틸려고
막고자 했던 겁니다.

 

그러나 더 강한, 더 나은 은혜는

끝까지 섬겨서

기도 회개 금식을 무너뜨려 버리고서

 

네 은혜가 네게 족하다 라고 침범해서

 

니가 부자청년처럼 말씀 잘 지켜서가 아니라

니가 나를 사랑한 것이 아니라

 

내가 너를 사랑해서

화목제(여디디야, 값없는 선물)

그 아들 주셨다는 겁니다.

 

여기서 이 간격(구체적 보편)이 벌어지는 겁니다.

 

내 사랑과 하나님의 사랑의 간격 즉 단절 말입니다.

일치는커녕 그 선명하고 또렷한 그 간격을 말입니다.

 

꼬기오 꼬기오 꼬기오 ~~~

 

이것이 구체적 보편인 십자가입니다.

 

그런데 웃기게도 십자가 조차도 그 간격을 없애버리고

개방적으로 누구나 믿을수 있다고 졸지에 악한세대가 구하는 표적이 되는

거짓선지자의 외침으로써 십자가를 주장하는 자들을 깔아버리는 겁니다.

 

단절로써 누구나 꼬끼오 꼬끼오 꼬끼오 당하는게 아니라

 

꼬끼오가 아예 없어요 없어 ~~~~~~

 

 

주님의 대신 기도 하심이 없이

내 기도로 충분히 된다는 겁니다.
절대로 뻔뻔스럽게 자기가 해야 할 회개를 주님께 몽땅 떠넘길수가 없다 라는 겁니다.

 

성령의 탄식이 없이도 내 기도로 충분하다는 겁니다.

 

성령은 탄식은 내 배터리가 떨어졌을 때 충전용일 뿐이다는 겁니다.
할수 있는데 까지 최선을 다해 해 보라 라는 겁니다.

 

그러니 이것은 단절은커녕 아예 보편화 시키는 겁니다.

오히려 엉터리 이웃 설정, 엉터리 기도 설정이

자기들끼리의 간격벌리기가 실행되는 겁니다.

강도만난자를 피해가듯이

똑같이 저 세리와 같지 않음을 감사합니다 라고 하는 겁니다.

저들만의 단절이 시작되는 겁니다.

 

더 나은 보편성 즉 구체적 보편성 앞에서는

아무리 강해 보이는 것이 알짱 되어도 소용이 없습니다.

 

 

자 그런 의미에서 오늘 본문 즉 강함과 더 나은 강함의 충돌을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개방을 외치는 자 앞에 더 나은 개방을 외치는 자가 나타나면

자신의 개방은 폐기처분해야만 할까요? 아니면

더 나은 개방에 더 나은 개방에 자신의 개방을 덧붙일수가 있는 것일까요?

 

헌 옷을 새 옷에 덧 붙일수가 있는 것일까요?

 

페기처분 해야만 하는 겁니다.

 

내 몸 보다. 그렇게 어릴적부터 말씀을 단 하나도 어긴적 없이 다 지킨 그 몸 보다

더 나은 몸이 내 눈 앞에 왔으면

내 몸은 폐기처분 대상입니까? 아니면 더 나은 예수님의 몸에 내 몸을 접붙이듯이 앵겨붙여야 하는 것일까요?

 

 

개방을 외치는 자는 사실은 그 개방을 통해서 단절케 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개방을 외친게 아닌 거죠.

 

바리새인이 저 세리와 같지 않음을 감사합니다

이것이 다 하나님의 뜻입니다 라고 했듯이 말입니다.

 

율법사가 어떻게 하면 자신을 옳게 보일까를 예수님의 입을 통해서

하나님의 계명이 뭡니까 라고 묻듯이 말입니다.

 

남들과의 차별성입니다.

선민사상 또한 남들과의 차별성인 겁니다.

개방성은커녕 트릭입니다.

 

나는 옳았다는 겁니다.

나는 하나님의 편이다는 겁니다.

내가 하나님을 이렇게 사랑한다는 겁니다.

 

그것 지 밟아버려야 합니다.

밟아버리니까 엘리야처럼 요나처럼 자살시위를 하게 되는 겁니다.

 

주님과의 관계는 개방하고서는, 다른 수준 낮은 인간들과는 차별화 시키는 단절을 벌리는 겁니다.

 

그것이 무슨 성령이 한 겁니까?

성령이 해야할 일을 지가 하고 있으니 말이지요.

 

단절은 성령의 숙제 몫인데?

자기가 하고 있으니

성령 있으나 마나 하잖아요?

 

그래서 존재 자체를 삭제 시켜야 하는 겁니다.

사단의 가시를 푹 찔러야 합니다.

 

자고치 않도록 말입니다.

 

이것이 성령의 섬김입니다.

 

더 강한, 나 보다 더 강한, 내 믿음 보다 더 나은 믿음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엘리야와 요나 그리고 베드로 사실은 성경에 기록된 주님의 자녀들

모조리 다 이런 매를, 이런 허물을 먼저 지적 받았습니다.

 

우리도 이 앞서서 펼쳐진 이 지적당함의 섬김을 누려 봅시다.

 

강하다 라고 했을 때에

이미 본인들이 자신의 운명인냥 필연적으로

자신의 몸에 장착시킵니다.

 

그런데 더 강한 것이 나와 버리면 그것을 필연이 아닌

우연으로 취급해 버립니다.

 

그런데 이것이 인간의 어리석음입니다.

그 우연이 더 강한 것입니다.

 

인간은 필연이 더 강하고 가장 강하다고 여깁니다.

그러니 강한 것에 갇혀 버린 겁니다.

 

그렇다면 갇혔다는 것에 전혀 의식을 못합니다.

아 나는 갇혀 버렸어 라는 인식을 못합니다.

부자청년이 주여 절 좀 고쳐주세요

저는 자꾸 어릴적부터 말씀을 단 한 개도 어긴 적이 없이

자꾸 지킬려고 합니다. 주여 저를 불쌓이 여겨주셔서 제발 저를 고쳐 주옵소서 라고 할

 

인식 자체가 없습니다. 그것이 갇혀 버렸다는 인식이 있어야 나오는데

 

갇히기는커녕 자랑 꺼리이니까

결국은 어디 까지 자랑 하러 기어 올라가느냐 하면

예수님의 앞 까지 그까지 높이 높이 올라갔다는 겁니다.

높이 올라 갔다는 자체가 이미 갇혀버린 거죠.

 

바리새인이

예수님 예수님! 주여 제발 절 좀 고쳐주세요

세상에나 제가 이레에 자꾸 두 번 금식하고요

십의 이조를 드리고요

충성 봉사를 자꾸 할려고 합니다.

이런 마귀 들린 저를 제발 좀 고쳐 주세요

 

라고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주여 저 보세요 참 잘했지요? 라고 하잖아요

 

이것이 갇힌줄도 모르고

갇혀서 나온 행동들인데

안갇혔다고 우기는 겁니다.

 

 

그러니 주객이 전도 되어 나타나는 겁니다.

 

 

오늘 본문이 그 주객전도입니다.

그럼 요나의 표적은 그 주객전도를 똑바로 고쳐주느냐?

 

세례요한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 라고 하니까

아 회개 하라는 소리냐?

 

아니죠

 

회개 때려죽어도 못할껄 이라는 소리입니다.

 

즉 진정한 회개는 회개를 못하도록 하는 겁니다.

 

회개로 막고, 회개로 버틸려고 하기에

여디디야 라는 선물을 거부하는 겁니다.

 

나의 죄와 맞물려야만 하는 피인데

 

그 피를 거부해야만 나는 죄인이 아닌 의인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가짜 회개는 진짜 회개를 거부하고

진짜 회개는 그 가짜 회개를 찢어버려야 하는 겁니다.

 

 

악한 세대가 요구하는 기적은 요나의 표적을 거부하고

요나의 표적은 악한 세대가 요구하는 기적을 찢어버려야 하는 겁니다.

 

본문에 시비가 붙었습니다.

믿음 좋은 바리새인이 예수님이 행한 기적을 보고서는

행해졌다 라는 것을 부인할 수가 없기에

? 대중을 두려워 해서

 

그것을 어떻게 합리적으로 반박하는데 있어서

기가막힌 인간의 지혜가 나오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계보학입니다.

즉 출처입니다.

 

즉 마귀의 힘을 힘입지 않고서는 도저히 나올수 없는 기적이다 라는 겁니다.

 

참으로 고맙게도 바리새인이 예수님을 거부하는 이 표현을 통해서만

예수님은 요나의 표적을 증거하실수가 있는 겁니다.

 

즉 이 표현이 안 나오면 요나희 표적을 설명할 방법이 없습니다.

모든 예수님의 비유가 다 이런 식입니다. 쌍둥이 권법, 양발차기 말입니다.

 

그래야 맞물리는 겁니다.

 

참 고맙죠 바리새인이 말입니다.

 

도저히 바알 세불 즉 마귀 중의 마귀인 마귀의 대마왕의 힘을 받지 않으면

저런 일이 벌어질수가 없다 라는 겁니다.

 

나타난 결과는 부정은 못하겠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정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출처를 운운하는 겁니다.

 

그런데 그것이 바로 예수님이 하시고자 하는 방법입니다.

 

진작 좀 출처 운운해 주지 말이죠.

 

 

그래서 기가막히게 강한 논리를 펼침으로써 반박 못할 것이다 라고 자부를 했는데

오히려 그 강한 논리에 더 강한 논리로 아주 가볍게 사뿐히

 

더 나은 강한 논리를 펼치니까 비로소 속내를 드러내게 되는 겁니다.

 

인간은 겨우 겨우 알아낸 강한 논리입니다.

그것도 필연화 시키면서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것 보다 더 나은 강한 논리를 무한하게 누리고 있습니다.

그것도 아주 아주 우연히 말입니다.

 

필연은 이 우연을 이길수가 없는 겁니다.

아킬레스가 거북이를 이길수가 없듯이

편파적인 정치성 앞에서

마르다는 더 좋은 것을 택한 마리아를 이길수가 없는 겁니다.

 

물론 이 둘 다 부활 되신 예수님 앞에서 또 지적 당하는 섬김을 받아야 하겠지만요.

 

부자청년, 성전의 두사람 세리와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

이들이 더 나은 우연을 못 보고 자꾸 필연화 시켰던 겁니다.

 

기도하지 마시고 기도의 사람 되세요 라는 말이 그런 의미입니다.

 

자꾸 자살 시위를 하는 엘리야 요나 는 자꾸 필연화 할려고 한 겁니다.

 

다 우연인데 말입니다. 우연을 자꾸 강하지 못하다 라고 취급해 버린 겁니다.

 

바로 그겁니다. 더 나은 강함이기에 우연인데

필연은 되도않는 강함을 가지고서 우연을 무능으로 취급한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우연의 더 강한 이유입니다.

닭이 베드로 보다 먼저 있었던 이유인 겁니다.

 

그러니 베드로는 닭과 맞물려야 합니다.

 

어떻게? 약할때에 강함이 됩니까

어떻게~~~~ ~~~ 떠케 ~~~~~~~~~

 

 

약하면 약해지지 어떻게 강함이 되느냐 말이지요.

그것도 강함 보다 더 나은 강함이 되느냐 말입니다.

 

어떻게 ~~~~~~~~~~ ~~~~~떠 케

 

알려드려요?

 

 

그것이 오늘 예수님이 저들의 주장에 반박하는 내용에서 나옵니다.

 

어떻게

 

(11:17, 개역) 예수께서 저희 생각을 아시고 이르시되 스스로 분쟁하는 나라마다 황폐하여지며 스스로 분쟁하는 집은 무너지느니라

(11:18, 개역) 너희 말이 내가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 하니 만일 사단이 스스로 분쟁하면 저의 나라가 어떻게 서겠느냐

(11:19, 개역) 내가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면 너희 아들들은 누구를 힘입어 쫓아내느냐 그러므로 저희가 너희 재판장이 되리라

 

 

여기서 분쟁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즉 결속의 반대말입니다. 일치성 동질성이라는 결속 합해짐 즉 계보학 출처 말입니다.

 

출처가 예수 너는 마귀에게서 나온 것이다 라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반박은 오호 필연성을 주장하는데 있어서

그 필연성이 얼마나 엉터리인가를 반박하니

 

도리어 반박을 할 수가 없는 겁니다.

즉 반박을 할 수가 없다는 말은

비로소 속내가 나온다는 것이요

그 속내를 최종 출처 즉 살해, 살인, 죽이기 가 나오는 겁니다.

 

 

즉 필연은 때려죽어도 이런 속내를 들추어 내질 못합니다.

오로지 우연만이 이런 속내인 살인의지를 돌출시키는 겁니다.

 

개방은 살인의지를 돌출 못 시켜요~~~~~

단절만이 살인의지를 돌출시키는 겁니다.

 

이 얼마나 편파적인 정치적 복음입니까?

 

인간이 먼저 출처를 따졌는데

도리어 더 강한 출처에 말려들어서

괜히 낚여버리게 되었다는 겁니다.

 

우리도 미리 미리 미리

미리 낚여버립니다. 말려듭시다.

 

악한 세대가 요구하는 표적은 목숨이 왔다리 갔다리 하지 않습니다.

요나의 표적은 목숨이 왔다 갔다 수시로 무한반복합니다.

 

무엇이 편하겠습니까?

어느것이 더 살벌합니까? 불편하겠습니까? 거리끼는 걸림돌이겠습니까?

 

그러니 빨리 뽑을려고 하는 겁니다.

그러니 그래서 말려드는 겁니다.

 

뽑아내고 싶어 죽습니다. ㅋㅋㅋㅋㅋ 죽어요 죽어.

 

자신의 강함이 필연화 될려면, 개방이 될려면

이 더 나은 강함인 우연을 뽑아버려야 하는 겁니다.

 

닭이 울기전에 닭 잡아먹어야 합니다.

 

이 닭이 대신 울어지지 않으면 구원은 없다 라는 것을 없애버려야만 하는 겁니다.

닭이 운다고 구원되나? 말이지요.

 

말씀은 내가 지켜야지 누가 대신 해 준다면 그게 말이 되냐 말이지요.

 

그런 필연성을 지금 예수님을 죽일려는 속내로써 바리새인은 주장합니다.

그래야 우연이 그 차별성으로써 예수님이 더 나은

더 강한 하나님 나라를 말씀하시는 겁니다.

 

이것이 거룩입니다. 거룩은 반드시 비거룩 취급하는 저들의 거룩과 맞물려서 등장하는 겁니다.

 

귀신이 귀신을 쫏아내면 어떻게 저들 귀신 나라가 제대로 설수 있겠냐 말이지요.

 

귀신을 쫏아낸 것은 너희들도 인정했지만

누구의 힘을 얻어서인가? 바알세불?

 

그렇다면 너희 자녀들이 귀신을 쫏아내면

너희 자녀들도 바알세불에게 힘 입어 쫏아내었다고 하면

 

과연 귀신나라가 제대로 설수 있겠니?

결속이 될 수 있겠니?

필연이 될 수 있겠니?

개방이 될 수 있겠니?

 

아주 가지고 놀고 있습니다. 가지고 놀면서 비아냥 거립니다.

 

그러니 더욱더 성질이 나겠지요.

 

성질이 나야만

 

더 큰 이가 비로소 왜 더 큰 지가 드러나는 겁니다.

아주 아주 약을 바짝 올리고 있습니다.

 

그러니 바리새인이야 말로 필연적입니다. 반드시 개방적이어야만 합니다.

필연적으로 더 큰 이 되신 예수님을 말하기 위해서 반드시 필연적으로 개방적으로 동원이 되어야 합니다.

 

여기에 주님의 철저하게 우연적입니다.

그래서 포착이 안됩니다.

 

아무리 더 큰 이가 이런 식으로 말을 해도

무슨 소리인지를 모르는 겁니다.

 

그래서 성령을 받아야 하고

그 성령은 좋은 것을 주시는데

 

그것이 바로 우연

 

곧 더 나은 것

 

더 강한 것인 약함을 주기 위해

 

늘 수시로 사단의 가시를 주변에 배치해 주십니다.

 

예수님은 필연적으로 오늘 본문처럼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합니다.

 

그러나 우연적으로 전혀 개의치 않고 은혜를 누리시고 계십니다.

 

이것이 맞물리는 것이 바로 요나의 표적입니다.

 

 

 

 

 

 

 

 

 

 

 

 

 

 

 

 

 

 

 

 

 

 

김 새는 기도 (10:38-42)

2014/03/01 21:05 in 성령행전(피활동,인간극복)

간청과 성령 (10:38-42)

(11:1, 개역) 예수께서 한 곳에서 기도하시고 마치시매 제자 중 하나가 여짜오되 주여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친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가르쳐 주옵소서

(11:2, 개역)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렇게 하라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11:3, 개역) 우리에게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11:4, 개역)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 우리 죄도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소서 하라

(11:5, 개역) 또 이르시되 너희 중에 누가 벗이 있는데 밤중에 그에게 가서 말하기를 벗이여 떡 세 덩이를 내게 빌리라

(11:6, 개역) 내 벗이 여행 중에 내게 왔으나 내가 먹일 것이 없노라 하면

(11:7, 개역) 저가 안에서 대답하여 이르되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문이 이미 닫혔고 아이들이 함께 나와 침소에 누웠으니 일어나 네게 줄 수가 없노라 하겠느냐

(11:8, 개역)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비록 벗됨을 인하여서는 일어나 주지 아니할지라도 그 강청함을 인하여 일어나 그 소용대로 주리라

(11:9, 개역) 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11:10, 개역)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11:11, 개역) 너희 중에 아비 된 자 누가 아들이 생선을 달라 하면 생선 대신에 뱀을 주며

(11:12, 개역) 알을 달라 하면 전갈을 주겠느냐

(11:13, 개역)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



오늘 본문이 이런 내용인줄 모르고

어제까지 며칠전에 듣게 된 낙낙 낙킨 해븐 도어 라는 팝송을 듣고

머리를 흔들어 좋아라 했습니다.

Guns_N_Roses - Knocking on Heaven's Door

학창시절 뜻도 모르면서 멜로디가 좋아서 그냥 흥얼 거리면서 따라하곤 했는데

다시 들어보니 저절로 흥얼거리길래 찾아보기도 했지요


그런데 그때는 음악만 들었지 가수가 누구인지도 뭐 관심도 없었고 해서

지금에서야 살펴 봤는데

제가 본 동영상 유튜브는 다른 가수였는데

거의 마약 먹은 듯한 분위기로 가수의 모습이

뭐에? 요구르트에 잔뜩 취해 있는 듯 했습니다.


밥 딜런의 곡이 여러 가수들이 불렀으니

이 곡 자체가 반전 전쟁 반대의 성향이라서 그런가 싶었습니다.


뜻을 가만히 보니

다른 가사는 몰라도 제목 곧 수 없이 반복 되는 이 가사

Knocking on Heaven's Door 뜻은 천국 문을 두드리라입니다.


어 이거 성경에 있는 오늘 본문 내용이잖아 라고 했지요

그런데 전혀 달랐습니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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