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청과 성령 (10:38-42)

 

 

(11:1, 개역) 예수께서 한 곳에서 기도하시고 마치시매 제자 중 하나가 여짜오되 주여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친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가르쳐 주옵소서

(11:2, 개역)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렇게 하라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11:3, 개역) 우리에게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11:4, 개역)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 우리 죄도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소서 하라

(11:5, 개역) 또 이르시되 너희 중에 누가 벗이 있는데 밤중에 그에게 가서 말하기를 벗이여 떡 세 덩이를 내게 빌리라

(11:6, 개역) 내 벗이 여행 중에 내게 왔으나 내가 먹일 것이 없노라 하면

(11:7, 개역) 저가 안에서 대답하여 이르되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문이 이미 닫혔고 아이들이 함께 나와 침소에 누웠으니 일어나 네게 줄 수가 없노라 하겠느냐

(11:8, 개역)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비록 벗됨을 인하여서는 일어나 주지 아니할지라도 그 강청함을 인하여 일어나 그 소용대로 주리라

(11:9, 개역) 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11:10, 개역)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11:11, 개역) 너희 중에 아비 된 자 누가 아들이 생선을 달라 하면 생선 대신에 뱀을 주며

(11:12, 개역) 알을 달라 하면 전갈을 주겠느냐

(11:13, 개역)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

 

 

오늘 본문이 이런 내용인줄 모르고

어제까지 며칠전에 듣게 된 낙낙 낙킨 해븐 도어 라는 팝송을 듣고

머리를 흔들어 좋아라 했습니다.

 

Guns_N_Roses - Knocking on Heaven's Door

 

학창시절 뜻도 모르면서 멜로디가 좋아서 그냥 흥얼 거리면서 따라하곤 했는데

다시 들어보니 저절로 흥얼거리길래 찾아보기도 했지요

 

그런데 그때는 음악만 들었지 가수가 누구인지도 뭐 관심도 없었고 해서

지금에서야 살펴 봤는데

 

제가 본 동영상 유튜브는 다른 가수였는데

거의 마약 먹은 듯한 분위기로 가수의 모습이
뭐에? 요구르트에 잔뜩 취해 있는 듯 했습니다
.

 

밥 딜런의 곡이 여러 가수들이 불렀으니

이 곡 자체가 반전 전쟁 반대의 성향이라서 그런가 싶었습니다.

 

뜻을 가만히 보니

다른 가사는 몰라도 제목 곧 수 없이 반복 되는 이 가사

 

Knocking on Heaven's Door 뜻은 천국 문을 두드리라입니다.

 

어 이거 성경에 있는 오늘 본문 내용이잖아 라고 했지요

 

그런데 전혀 달랐습니다.

 

전체 가사는

 

전쟁을 반대하는 입장에서 총을 들고서 왜 지옥을 만들고 있냐?

차라리 총 내려 놓고 천국을 두드리자

세상은 지금 다 총 땜에 지옥이잖나

 

라는 내용입니다.

종교는 마약입니다. 아프면 마약 찾도록 되어 있는 겁니다.

 

즉 전쟁 반대가 곧 천국 문 두드리는 것이다 라는 셈이지요.


 

그런데 오늘 본문은 그 반대입니다.

 

먼저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제자들이 요청합니다.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쳤듯이 우리에게도 예수님이 기도를 어떻게 하는지를 가르쳐 달라고 합니다.

 

그럼 세례요한이 가르친 기도가 뭡니까?

 

제가 검색해 보니 내용은 없습니다.

다만 그 당시 바리새인이나 기타 여러 파들이

 

하나님 나라가 오기를 기도하면서 그 메시아 도래에 걸맞는 태도인 회개를

 

모두 다 가르치고 있었던 겁니다.

 

즉 메시아와 부합 되기 위해서

하나님 나라와 부합 되기 위해서, 일치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그것 때문에 그 어떤 파로 유대인들이 나누어졌든 간에

독립운동을 펼칠 수 밖에 없는 겁니다.

 

오늘 3 1절 이듯이

메시아를 맞이할려면 나라가 독립해야 하는데

빼앗긴 상태에서 메시아가 내려 오면

어 내 땅 아니네

발을 어디다 두지?

이래 되면 낭패가 되잖아요?

그러니 빨리 전쟁을 종식시키기 위해서라고

독립운동을 펼쳐야 하는 겁니다.

하나님 나라를 맞이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하나님 나라 운동입니다.

 

세상을 복음화 시키자 라는 식입니다.

 

너무 믿음 좋아 ~~~~

 

그런데 세례요한이 가르친 기도는 나와 있지 않으나

세례요한 계통으로 예수님이 오셨듯이

예수님을 통해서 그 기도 내용이 뭔지를 파악할 수 있습니다.

 

세례요한은 천국이 가까이 왔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입니다.

 

그럼 바리새인이 외친 기도 내용인 회개와

세례요한 곧 예수님이 외치는 기도내용인 회개와 무슨 차이가 있습니까?

 

 

바리새인이 외치는 회개 즉 바리새인 뿐만 아니라 그 당시 모든 유대인의 대표성이듯이

그들의 회개는 일치성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든지 율법을 지키고 일치할려고 하는

동질성 추구 이다는 겁니다.

 

저 세리와 같지 않음을 감사합니다 저는 이레에 두 번 금식, 십의 이조

이런 모습들이 그들의 기도 생활입니다. 곧 일치성입니다.

 

이것은 갈멜산에서 기도 싸움으로 제단에 불 붙이는 전쟁을 통해서도 나타납니다.

누가 일치하느냐 로 기도 응답으로써 불이 붙는 겁니다.

 

엘리야는 기도 할 생각 조차도 안하고 저쪽 바알제사장 아세라 제사장 850명의 기도를 비아냥 거립니다.

 

그렇게 기도해가 듣끼겠냐? 아이고 목소리 봐라 목소리 봐? 개미 소리넹 라고

 

자기들 따나 열심히 기도하는 그 속에

기도 근처도 못 간다고 놀려 먹습니다.

 

세례요한 곧 예수님의 기도와 저들 바리새인과의 기도의 차이는

 

바로 동질성이 아닌 그 반대인 차이성입니다.

곧 단절성입니다.

 

 

엘리야 니는 우찌 기도하나 보자? 어 물 붓고 있네? 아이고 바보야 그래가 불 붙겠나?

 

불 붙도록 하기 위한게 아니라 너거들 단절 되었단다 라는 뜻입니다.

 

 

기도하면 기도할수록 더더욱 단절성을 느끼는 것이 바로 회개입니다.

 

그런데 바리새인의 회개는 그 반대입니다.

기도 하면 할수록 동질성입니다.

충성 하면 할수록 동질성입니다.

사랑 하면 할수록 동질성입니다.

말씀실천하면 할수록 동질성입니다.

 

아니 맞잖아요?

 

말씀실천 하면 할수록 동질성이 되어야지

오히려 말씀 실천 하면 할수록 더더욱 단절 되어버리면

말라꼬 말씀을 실천 하며

단절 될라꼬 말씀을 실천하는 자도 없게 되는 겁니다.

 

부자 청년이 그래서 당당했다는 겁니다.

어릴적부터 그 동질성에 자부감을 가지고 있었던 겁니다.

? 어릴 적부터 몸에 아예 말씀을 박아 넣었으니 말입니다.

보통 습관화 된게 아닙니다.

 

그런 부자청년을 등돌려 보내버리는 예수님이라면

도대체 뭐가 잘못이 되어서 부자청년은 아무리 기도 해도 안되었던 것일까요?

 

부자청년이 그런 상황이면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본문처럼 문을 두드리라 라고 자꾸 나오는데

 

아무리 두드려도 안된다는 겁니다.

 

김 새는 거죠.

 

누가 십자가마을 수련회때 제 룸메이트로 있었던 분이

기도에 대해서 자꾸 물었습니다.

 

즉 처음부터 막혀 버린 겁니다.

 

기도 하지 말라는 말이냐?

 

아니 그럼 기도의 본능을 가진 인간이 기도 하지 말라고 해서 안 할 인간이냐 말이죠?

 

! 기도는 대화다 숨쉬기 이다 이거 다 들었던 소리 아닙니까?

 

그때 제가 무슨 답을 했는지 기억에 안 남는데

하여튼 무슨 소리인줄 몰라서 끝까지 답을 못 찾더군요.

 

기도하지 마시고 기도의 사람 되세요 라는 말을 한 것 같은데 말입니다.

 

기도하는 자는 기도 라는 조건이 하나 생겼기에 지키는 사람이 되는 겁니다.

기도도 하나의 지키는 문제가 된다는 겁니다.

 

그러나 기도의 사람은

상대적인 기도하는 자와의 차이성을 둠으로써 그 반대를 위한 반대인

누리게 되는 겁니다.

 

즉 하나도 지킬 것이 없게 되는 상황인 누려 ~~~~~입니다.

 

결국 기도하기는 지킬수가 있지만

기도의 사람으로 태어남은 지키는 문제를 떠나 버린 겁니다.

 

그러니 기도 안 지키는 거죠. 막 사는 겁니다.

 

다른 말로 기도로써 주의 이름으로 지금 막 사탄아 물러가라 했더니만 하늘에서 사탄이 막 떨어집디다 아 그래서 예수님의 이름이 중요하군요 라고 이것이 하나의 경험화 되어버리니

 

전에는 불가능했던 것이 이제는 가능성 속으로 들어오게 되어버린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일치된 기쁨을 확 깨뜨려 버리고

창세전에 생명책에 기록 된 것을 더 기뻐 하라고 합니다.

 

즉 자신의 경험과 감각과 시공간과 그것을 인식하는 나 라는 존재 속에

전혀 포착 될 수 없는 붕 뜨는 소리인 창세전

 

내가 태어나기도 전

아니 인간들 자체가 아예 없었던 때

아니 피조물 조차도 없었던 때

지구 태양도 없었던 때

 

그 때의 예정인 십자가를 기뻐하라고 합니다.

 

즉 상대적인 반대를 위한 반대가 되어버린 겁니다.

 

도저히 감각화 할 수 없는 것을 기뻐하라는 겁니다.

 

기도하기는 감각화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도의 사람으로 태어났다는 것은

창세전에 결정된 도저히 감각화 할 수 없는 것을 기뻐하라고 합니다.

 

과연 기쁠까요?

 

그래서 기도는 조건도 아닌

바로 단절성입니다.

 

 

그 단절성을 제대로 보여주는 것이 바로

회개입니다.

회개 조차도 바래새인들이 말하는 회개가 있으니

이런 회개를 비꼬아야 하는 겁니다.

 

회개 하지 마시고 회개의 사람 되세요 라고 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세례요한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 라는 것은

저들이 말하는 회개하자 천국운동 벌리자와 다른 겁니다.

 

자신들이 메시야를 영접할 수 있는 조건, 일치성, 동질성 추구이고

반면에 세례요한의 회개하라 라는 말은

 

너거들 때려죽어도 회개 해 봐라 안된다 라는 겁니다.

 

조건? 갖추었다 치자!! 과연 영접 할수 있을까? 도로 죽일껄?

 

안 죽이면 내 손에 장 지진다 라는 식으로

예수님은 이렇게 죽지롱 이라고 자신도 막 죽어나가버리는 겁니다.

 

? 예수님이 왔으니 이제 퇴장하는 겁니다.

 

손 털어버리는 겁니다.

더 남아서 회개하라 라고 회개케 하지 않고

 

그 동안 깨작 깨작 건드리기만 했지

제대로 건드리지 않았던 정치꾼들을 제대로 심기를 건드려

일부러 죽음을 빨리 재촉 하듯이

뒤로 퍼뜩 퍼뜩 빠져 누락 되는 식으로

꼭 저들의 죄악과 역어서 죽어버리는 겁니다.

 

이 노선에 예수님도 오신 겁니다.

 

곧 성령의 노선입니다.

 

참선지자의 노선입니다.

 

이것이 창세전에 생명책에 기록된 예수님의 이름이 있다는 것으로 만족하니

죽어도 상관 없는

 

기도의 사람으로 태어난 자들의 특징인 겁니다.

 

그 반대는 기도를 지켜야 하는 겁니다.

회개도 지켜야 하고

십일조도 지켜야 하고

율법도 지켜야 하고

안식일도 지켜야 하고

금식도 지켜야 하는 겁니다.

 

지키는 말든 내버려 둬도 상관 없겠으나

 

오히려 이런 지킨자들과 정면 충돌 하는 자가 바로 누리는 자 이다는 겁니다.

 

즉 반드시 기도하는 사람은 기도의 사람을 죽이도록 되어 있다는 겁니다.

반드시 말씀을 지키는 자는 말씀을 누리는 자를 죽이도록 되어 있습니다.
반드시 안식일을 지키는 자는 안식을 누리는 자를 죽이도록 되어 있는 겁니다.

 

믿는자가 믿음의 사람을 죽이도록 되어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믿지 마시라니깐요 ㅋㅋㅋㅋㅋ

 

제발 믿지 마세요

제발 기도 하지 마세요

율법 지키지 마세요

이웃사랑 하지 마세요

말씀 제발 지키지 마시라니깐요

 

이런 말이 음파로써 누구 귀에 꼿혀 버리겠습니까?

당연히 지키는 자들에게 꼿혀 버리는 겁니다.

 

미워 죽습니다 미워 죽어

 

가인이 제사를 아예 안 드렸으면 아벨을 죽일 일이 없습니다.

그런데 괜히 제사를 지켜서 아벨을 안 죽이고서는 못 배기는 상황이 되는 겁니다.

 

그렇다고 가인이 제사 안 드릴 재간이 본인에게 있겠습니까?

없잖아요

 

그러니 십자가에 말려든 겁니다.

 

자 그러면 우리도 가인처럼 말려듭시다.

 

자꾸 아벨이라고 우기지 말고

 

가인이니까 가인처럼 말려들어 봅시다.

 

자 기도하지 마세요 라는 말에

이미 명령어가 들어가 있는 겁니다.

 

하기 싫어도 할 수 밖에 없도록 상황을 만들어 버리면

기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자 기도 했다는 이유는 우리는 지옥 가게 됩니다.

가인 꼴 난 거죠.

 

이게 무슨 억측이냐 말이죠.

 

기도의 사람이 아니다는 이유인 겁니다.

 

이 단절성을 무슨 수로 봉합하시겠습니까?

 

 

창세전의 생명책에 기록된 대로 이미 결정이 나 버렸는데???

 

그러니 기도 백날 해도 소용이 없다니깐요

하지 마세요

 

제가 이래 말해도 때려 죽어도 할 수 밖에 없다니깐요

본능입니다. 본능

 

몸이 그러니 어쩔수 없다니깐요

 

a. 그럼 기도 하라는 말이냐 하지 말라는 말이냐?

b. 하지 말라고 분명히 말했잖아요

 

a. 그럼 안하면 되지?

b. 안하면 되긴 뭘 돼? 어차피 하게 되어 있는데!!! ㅋㅋㅋ

 

a. 제발 하지 말라메?

b. 몸이 그러니 어쩔수 없다니깐?

 

하라는 소리인지 말라는 소리인지

 

막살아라 라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막살면 되는 것처럼 말했다가

정작 몸은 거부 반응을 일으킵니다.

 

생각한 대로 안 됩니다.

몸이 거부해요 몸이

 

몸이 선악을 기억하기 때문에

때려죽어도 법을 지킬려고 하고

양심대로 살려고 무지 무지 노력을 하도록 되어 있다는 겁니다.

그것! 그런 기억 모조리 다 지워도

소용이 없습니다.

다시 법을 그림그리기 시작하는 겁니다.

 

몸이 선악을 기억해요~~~

 

바로 그런 몸을 발견하는 자가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구나 누가 나를 이 사망의 몸에서 건져내랴 라는
성령의 탄식이 임하는 겁니다.

바로 기도를 지키는 자가 아닌 기도의 사람으로 태어난 자입니다.

 

다윗이 그것을 알았던 겁니다.

뭘 해도 죄 밖에 안 나온다는 것을

주의 목전에 항상 죄 뿐이다는 것을

 

해결책은 내 쪽에서는 단절 되었다는 겁니다.

 

내 속에 정직한 영이 없다 라는

 

[없음]의 단절성을

비로소 다윗은 누리게 됩니다.

 

누려~~~

 

기도 할 필요가 없습니다.

기도 하지 마시고

그냥 기도의 사람 되었음을 누리세요

 

막 마시고 막 춤추고 막 노래부르고 막 술취하고

오죽하면 예수님의 별명이 마귀들로부터

술꾼에 먹기를 탐하고 죄인의 친구이겠습니까?

 

 

참으로 뻔뻔스럽게도 마땅하게 마땅히 당연스럽게 빌어야 할 바도

전혀 모르는

 

그 기도를 아에 성령님께 일임 전가 시키는 것이

 

바로 기도 누리는 겁니다.

 

해 봤자 엉터리 이거든요

더 나은 기도에 맡기세요

 

얼마나 제대로 기도를 하시는지

내 기도를 다 지워버릴 정도이니 얼마나 감사하냐 말입니다.

 

 

자 그럼 기도 내용이 달라집니다.

 

기도내용의 차이를 발견케 됩니다.

 

나도 옛날에 바리새인처럼 기도 달인이였어 라고 자부했던 그 기도와

 

전혀 다른 기도인 성령의 탄식의 내용의 차이를

 

더 나은 성령의 탄식

마땅히 빌바를 모르는 인간과 달리

마땅히 빌바를 제대로 아시는 그 성령의 탄식을 듣고서

 

다시는 저런 기도 하지 말아야 겠구나 라는

 

그 차이를

 

그 단절성을 비로소 알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 다시는 기도 하지 않게 됩니다.

 

해도 안한척 합니다.

 

이것이 회개입니다.

 

회개 하지 않는 회개

회개를 포기하는 회개

복음을 포기하는 복음

믿음을 포기하는 믿음입니다.

안식을 거부하는 안식

주의 주 되심 입니다.

 

즉 앞의 것과 차이나는 뒤의 것이다는 겁니다.

 

같은 단어라고 해서 내용을 같은 내용을 담는게 아니라

오히려 같은 단어를 의도적으로 쓰면서 내용은 전혀 다른 겁니다.

 

예수님의 산상수훈이 그런 식입니. (쌍둥이 권법=계류기술)

 

인간이 기존에 알던 최고의 해석을 가지고 와서

그 믿음은 가짜 믿음의 대표성이라고 이야기 하면서

전혀 다른 해석으로 믿음을 해석하게 되니

 

얼마나 제대로 된 해석인지 기존의 최고의 해석들이

이 새로운 해석을 죽일려고 달려들게 된다는 겁니다.

 

반드시 맞물리도록 하시는 겁니다.

 

즉 죽일려고 달려들도록 하지 못하는 해석은 가짜이다는 겁니다.

 

그러니 새로운 해석으로 칭찬 받겠다는 차원이 아닌 겁니다.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겁니다.

 

기도를 지키거나

안식일 지킨다고

금식 한다고

회개 한다고

 

목숨이 왔다 갔다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기도를 누리면

안식을 누리면

금식을 누리면

회개를 누리면

 

목숨이 왔다 갔다 하게 됩니다.

이것이 거룩입니다. 거룩 = 단절 = 쌍둥이 권법 = 계류기술

 


왜일까요
? 저들의 심기를 건드렸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더 나은 것]입니다.

 

그냥 제사가 아닌 더 나은 제사입니다.

 

의도적인 정치성입니다.

 

그냥 회개가 아닌 [더 나은 회개]입니다.

 

바리새인이 가르치는 회개와 세례요한의 회개의 차이입니다.

바리새인의 회개는 목숨이 전혀 왔다갔다 안합니다.

즉 마귀가 전혀 시기하지도 않는 회개 입니다.
마귀가 전혀 시기하지도 않는 안식일 지키는 자들이

안식의 주인을 죽여버립니다.
그 안식을 누리는 꼴을 못 봅니다.
왜 하필이면 안식일날 고치냐 말이죠.

안식일을 지키면 지킬수록 더더욱 안식을 누리는 꼴을 못 보는 겁니다.

왜 하필이면 안식일날 일하냐 말이죠.

의도적인 정치성입니다.

[더 나은 것]이 아니면 살인의지를 표출 못 시킵니다.
시기케 못하는 겁니다. 그래서 쌍둥이 권법입니다. 거룩 이요 분리작업이요 단절입니다.

에서는 미워하기로 작정 되었고, 야곱은 사랑하기로 작정 된 겁니다.
행함의 문제는 떠나 버린 겁니다. 믿음의 숙제만이 남아버린 겁니다.

 

세례요한의 회개는 목숨을 잃어요 목숨을

마귀들이 세례요한이 죽기를 얼마나 바랬냐 말이죠.

? 우리 인간의 회개를 무시하거든요

인간의 기도를 엘리야처럼 백날 회개 해 봐라 되는가? 라고 무시하거든요

 

그럼 우짜라꼬? 넘어오는 회개가 따로 있다는 겁니다.

내 회개 말고 주의 회개 말입니다.

 

주님의 기도 말입니다.

 

그것을 성전 곧 하나님의 집 곧 만민이 기도하는 집에

두 사람이 있는 데 한 쪽 사람인 세리가 주님의 기도에 일임하다가 졸지에 미움 당한 겁니다.

 

내 기도 말라꼬 드립니까? 하지 마세요

주님의 기도 받기만 하면 됩니다. 주의 기도만 누리면 됩니다. 참 쉽지요잉

 

쉬워도 너무 쉬워서 너무 너무 어렵게 되는 겁니다.

지키는 자는 누리지 못하도록 태어났고,
누리는 자는 지키지 못하도록 태어난 겁니다.

 

그것도 모르고 바리새인은 평생을 기도하다가 지옥가고

반대로 바리새인이 저 세리와 같지 않음을 하나님께 감사 기도드린

 

저 세리는 단 한번도 기도 한번 한 적도 없이 천국 가게 되는 겁니다.

 

바보 같이 두 사람의 행위에서 결정난게 아니라

 

주님의 기도에 좌우 되었다는 겁니다.

베드로의 타락 보다 먼저 앞서 있엇던 것이
예수님의 기도가 베드로를 넘어지지 않게 하는 겁니다.

이미 넘어졌는데도
예수님이 안 넘어지도록 기도했다고 말입니다.

 

이 처럼 더 나은 기도를 오히려 세리가 눈치 챈 겁니다.

 

괜히 기도 한 내가 존재해 버렸기 때문에 주님의 기도를 못 보는 겁니다.

 

기도 지키기 때문에 기도한 나 라는 존재가 졸지에 새로 생겨버렸던 겁니다.

아니 예수님의 자리에 왜 인간이 떡 하니 그 빈자리를 차지 하느냐 말입니다.

 

빈자리는 빈자리로써의 기능을 하는 빈터인데

빈자리의 역할기능을 무색케 만들어 버릴 정도로 빈자리를 다 채워버리니까

 

괜히 앉아버려서 졸지에 쭐꾸덕 하고 미끄러져 지는 겁니다.

창세전에 있지도 않았으면서
피조물 중에 제일 늦게 창조된 주제에
왜 자꾸 빈터를 앉느냐 말이죠.

 

 

평생 기도 한 번 하지 않아도 천국 갑니다. 걱정 하 덜덜 마세요.

 

평생을 단 한 번도 빠지지 않고 기도 해 본들 지옥 갑니다.

 

 

 

자 이런 입장에서 이제야 본문 들어갑니다. 그리고 결론 맺습니다.

오늘 본문에 간청이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문제는 지난 번 시간에도 살펴 봤듯이

강도 만난 자가 없다고 했습니다.

강도 만난 자가 없기에 이웃도 없고

이웃도 없기에 선한사마리아인도 없다고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웃을 자기 마음대로 설정해 놓고 삽니다.

참으로 기가막히고 코가막힌다 그죠.

 

저거들끼리 자기 마음대로 이웃을 설정해 버리고서는

단 한명의 환자가 없이도 의사만이 넘쳐 납니다.
강도만난자는 없이 이웃들만 넘쳐납니다.

어느 누구도 환자가 될려고도 하지 않을뿐더러

될 수도 없습니다.

 

즉 강도 만난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다들 건강한 자라고 자부하면서 살아갈 뿐입니다.

의사가 필요가 없습니다.

 

아픈 환자가 없어서가 아니라

모조리 다 의사들 뿐이라서 말입니다.

 

즉 오늘 본문에 간청하는 자가 없다는 겁니다.

 

친구 또는 벗 또는 이웃으로써는 들어줄 수는 없어도

간곡하게 간청함으로써는 들어준다고 했습니다.

 

이 말이 어패가 있지 않나요?

그 반대 아닙니까?

아무리 간청해도 안 들어주는데

친구이거나 즉 벗이거나 이웃이라면 들어준다고 해야 하는데

 

반대 아닙니까?

 

그런데 간청의 의미를 무게를 두는 겁니다.

불의한 재판관에게 간청하는 과부 비유도 이 간청함에 의미를 두는 겁니다.
진짜 제대로 강도 만나면
불에 디이면
상대방이 불의하든 정의롭든 물 불 가릴 여유가 없을 정도로
그 간청함이 졸지에 주인공이 되는 겁니다.
기도하는 사람이 주인공이 아니라 기도가 주인공이 되어서
사람에게 덮치면 기도 안하고는 못 배기는 겁니다.
그런 [간청함]이 주인공이다는 겁니다.

 

즉 인간의 간청은 다 구라 곧 사기치는 것 밖에 안되는 겁니다.

 
간청함 자체가 애초부터 없었던 겁니다.

그래서 베드로 보다 닭이 먼저 있었던 겁니다.
간청함 곧 울음이 먼저 있었던 겁니다.

닭이 울어주지 않으면 베드로 별거 아니다 라는 무시 입니다.

진짜 간청은 바로 성령 뿐입니다.

성령의 탄식입니다.

 

진짜 간청하는 자를 간청하라 라는 이중단절입니다.

 

구하라 왜?

두드리라 왜?

찾으라 왜?

 

낫 낫 낫킹 해븐 도어 왜?

 

성령 줄게 라는 겁니다.

 

딴거 안 준다는 겁니다.

 

성령만을 주겠다는 겁니다.

 

아니 왜 바로 직통하면 되는데

 

왜? 거슬리게 성령을 거쳐야만 한다는 거냐 말입니다.

 

성령 안 거치면 그 엉터리가 엉터리인줄도 모른다는 겁니다.

 

성령을 주시겠다는 말은

단절을 주시겠다는 말입니다.

기도 해도 안 생겨요 ~~~~

회개 해도 안 생겨요 ~~~~
용서 해도 안 생겨요 ~~~~

안 생겨 ~~~


뭐가? 왜? 뭘 해도 죄 밖에 안나오기 때문에

성령 곧 정직한 영이 안 생겨요 ~~~~


그래서 그 불가능한 성령을 주시기겠다고 하시는 겁니다.

구한 적도 없는 것을 구해주겠다.
두드린적도 없는 것을 두드려 주겠다.
찾은 적도 없는 것을 찾아 주겠다는 겁니다.

아니 구한 적도 없는데? 주겠다고?

그것을 다윗은 비로소 구하게 됩니다.

정직한 영 성령 곧 단절 곧 거룩 곧 쌍둥이 권법을 말입니다.

선지자도 왕들도 보고 싶어도 못 봤던 그 비밀 말입니다.

 

쉽게 말해 거름망입니다.

 

거름망인 성령으로 걸러 보자 말이지요

단 한 개도 올라갈 기도가 없다는 겁니다.

 

올라 갈 수도 없는 기도 왜 하냐 말이지요.

 

그래서 성령을 주시겠다는 겁니다.

단절을 거친 기도는 성령만이 하시는 기도입니다.

기도해도 죄 밖에 안나오는 겁니다.
뭘 해도 죄 밖에 안나옵니다.
이것이 성령이라는 거름망을 거쳐오라는 겁니다.
마귀가 시기치도 않는 것을 왜 하냐 말이죠.

 

성령의 탄식에 뻔뻔스럽게 맡겨라 라는 겁니다.

 

문제는 그런 성령 조차도 간구할 간청함

 

간절히 청하는 마음이 우리에게는 추호도 없다는 겁니다.

강도 만난자가 없듯이 말입니다.

 

그래서 강도를 만나게 주님께서 치십니다.
즉 성령을 주시겠다는 겁니다.

치시면 간청 안하고는 못 배깁니다.

그러면 그 간청이 단절되었다는 것을 직시하도록 성령을 주십니다.

 

성령의 탄식을 들으니 내 기도가 순 엉터리 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욥처럼 비로소 재를 뿌리고 얼굴을 쳐박고 죽어 마땅하다는 것을 압니다.

왜? 내 기도 하기 바쁩니다.

내 온 몸이 아픈 것 밖에 모릅니다.

 

악한 마귀를 일부러 꼬셔서 내기를 걸어서

욥을 치게 합니다.

 

강도 만나게 합니다.

비로소 강도 만난자가 생깁니다.

강도 만난자가 생기면 저절로 이웃이 생깁니다.

 

내 몸 아픈 것 밖에 모르다가

성령의 탄식을 통해 내 몸 보다 더 아픈 예수님의 몸을 보여줍니다.

 

그 성령의 탄식은 예수님의 몸이 찢겨지는 십자가의 사건을 보여줍니다.

 

그 십자가를 보고서는 내 생일도 저주하고

감히 그 앞에서 내 아픔을 토해 내었다는 것이 건방짐을 알게 됩니다.

 

욥은 아마 다시는 내 피부병 고쳐 달라는 기도 다시는 하지 않았을 겁니다.

성령의 탄식이 덮쳤기 때문입니다.

 

기도 하지 마시고 기도의 사람 곧 십자가로 다시 태어나십시오

 

라고 성령은 탄식하는 겁니다.

 

우리는 마땅히 당연히 빌바를 알지 못합니다.

겨우 겨우 알아내서 기도 해 본들 역시나

검열 당해서 단절 됩니다.

 

기도가 올라가기는커녕 택도 없이 바닥으로 떨어질 것들만 나열합니다.

 

그 단절을 통해서 성령의 탄식을 덮치게 하십니다.

 

그 기도는 마땅히 빌바를 아는 기도입니다.

누구의 아픔만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나랑 전혀 다른 몸입니다.

 

내 몸은 당연히 아파도 싼 몸이지만

그 분의 몸은 거룩한 죄 없는 몸입니다.

 

내 죄악 때문에

내 기도 반드시 지키겠다는 그 죄악 때문에 대신 죄 값을 치르시는

예수님의 죽음을 보여줍니다.

 

그 뻔데기를 보고 내 주름을 포기하는 겁니다.

 

기도를 포기하는 기도를 봤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포기하는 복음이 덮쳤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하늘 영광 포기하고

주를 포기하는 주가 되셨기 때문입니다.
빈자리 회복입니다.

 

곧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는 믿음의 대상도 아닙니다.

도리어 십자가의 믿음이 나를 대상물로 삼아서

기도의 사람 되게 하십니다.

너는 아플 자격도 없다고
너는 기도할 자격도 없다고

이 단절성으로
기도의 사람 될 자격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비로소 기도의 사람 되게 하십니다.

이 모순의 간격을 무슨 수로 증명하겠습니까?

일방적인 선포인데?

 

예수님의 숙제

십자가의 숙제이지

내 숙제가 아닙니다.

 

고조 고조 내 기도는 주님의 기도에 박살이 나야만 하는

 

성령의 탄식인 숙제에 달린 고조.

 

 

 

 

 

 

 

 

 

 

 

 

 

정치적인 편파 복음 (10:38-42)

2014/02/23 10:25 in 성령행전(피활동,인간극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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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적인 편파 복음

(10:38, 개역) 저희가 길 갈 때에 예수께서 한 촌에 들어가시매 마르다라 이름하는 한 여자가 자기 집으로 영접하더라

(10:39, 개역) 그에게 마리아라 하는 동생이 있어 주의 발 아래 앉아 그의 말씀을 듣더니

(10:40, 개역) 마르다는 준비하는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한지라 예수께 나아가 가로되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지 아니하시나이까 저를 명하사 나를 도와주라 하소서

(10:41, 개역) 주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10:42, 개역) 그러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지난 시간에 잘못된 이웃을 설정함으로써

이웃을 통한 단절성을 살펴봤습니다.

 

사람이 이웃을 설정한다는 자체가 정치적입니다.

정치란 유익성을 따지는 것입니다.

정치 하지 말라는 말이 아니라

어느 것이 더 유익하냐 라는 더 나은 정치를 하라는 겁니다.

 

즉 너희들이 백날 이웃을 설정해 본들 고만 고만 하다는 겁니다.

진짜 더 나은 정치란

끝내주게 정치를 잘하는 분에게 정치를 맡기면 된다는 겁니다.

오늘 본문도 정치성에 관한 내용이라고 저는 봅니다.

즉 정치란 편파성입니다.

누가복음 10장 전체가 아니 성경 전체가 이 정치 곧 줄을 잘 서는 겁니다.

줄을 서시오 ~~~~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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