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끗함(거룩)에 대한 논쟁 (11:37-54)

 

 

(11:37, 개역) 예수께서 말씀하실 때에 한 바리새인이 자기와 함께 점심 잡수시기를 청하므로 들어가 앉으셨더니

(11:38, 개역) 잡수시기 전에 손 씻지 아니하심을 이 바리새인이 보고 이상히 여기는지라

(11:39, 개역) 주께서 이르시되 너희 바리새인은 지금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나 너희 속인즉 탐욕과 악독이 가득하도다

(11:40, 개역) 어리석은 자들아 밖을 만드신 이가 속도 만들지 아니하셨느냐

(11:41, 개역) 오직 그 안에 있는 것으로 구제하라 그리하면 모든 것이 너희에게 깨끗하리라

(11:42, 개역) 화 있을진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의 십일조를 드리되 공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버리는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아니하여야 할지니라

(11:43, 개역) 화 있을진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회당의 높은 자리와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을 기뻐하는도다

(11:44, 개역) 화 있을진저 너희여 너희는 평토장한 무덤 같아서 그 위를 밟는 사람이 알지 못하느니라

(11:45, 개역) 한 율법사가 예수께 대답하여 가로되 선생님 이렇게 말씀하시니 우리까지 모욕하심이니이다

(11:46, 개역) 가라사대 화 있을진저 또 너희 율법사여 지기 어려운 짐을 사람에게 지우고 너희는 한 손가락도 이 짐에 대지 않는도다

(11:47, 개역) 화 있을진저 너희는 선지자들의 무덤을 쌓는도다 저희를 죽인 자도 너희 조상들이로다

(11:48, 개역) 이와 같이 저희는 죽이고 너희는 쌓으니 너희가 너희 조상의 행한 일에 증인이 되어 옳게 여기는도다

(11:49, 개역) 이러므로 하나님의 지혜가 일렀으되 내가 선지자와 사도들을 저희에게 보내리니 그 중에 더러는 죽이며 또 핍박하리라 하였으니

(11:50, 개역) 창세 이후로 흘린 모든 선지자의 피를 이 세대가 담당하되

(11:51, 개역) 곧 아벨의 피로부터 제단과 성전 사이에서 죽임을 당한 사가랴의 피까지 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과연 이 세대가 담당하리라

(11:52, 개역) 화 있을진저 너희 율법사여 너희가 지식의 열쇠를 가져 가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또 들어가고자 하는 자도 막았느니라 하시니라

(11:53, 개역) 거기서 나오실 때에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맹렬히 달라붙어 여러가지 일로 힐문하고

(11:54, 개역) 그 입에서 나오는 것을 잡고자 하여 목을 지키더라

 

 

빛 곧 등불을 등경 위에 두지 등경 아래에 두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 부분을 어떤 교수님이 저에게 물었는데

오히려 저보다 더 잘 아실텐데

도로 물으시니 이해가 안 갔습니다.

등경 곧 등잔에 대한 이해 문제였는데

형광등처럼 위에서 아래로 비추여야 하는데

 

왜 아래에서 위로 비추냐 라는 오해였습니다.

 

그냥 쉽게 생각 하면 됩니다.

 

위냐 아래냐 라는 위치 문제가 아니라

빛의 기능인 어두움을 드러내느냐, 어두움을 들추어내지 못하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그래서 등잔 위에 꼿이가 있다면 거기에 꼿아서 고정 시켜서

그 다음인 즉 빛의 기능인 어두운 곳을 비추이는 의미입니다.

 

등잔 아래에 둔다면 빛의 기능을 발휘치 못하게 하는 것이니
등불을 꺼뜨리는 것이니 불빛을 끄지 않기 위해

위에 둔다는 것이죠.

결국 빛이 기능이 다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는 겁니다.

 

동일하게 소금도 짠 맛의 기능입니다.

만약 짜다 라는 기능이 없다면(즉 상하지 않게, 부패, 더 이상 썩지 않게)

의미가 없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좀더 더 나아가

예수님이 구원자 라는 기능

즉 이름처럼 구원자라면

그 구원의 기능 때문에

 

우리는 졸지에

갇혀 있어야 하고

포로 되어야 하고

억눌려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기능 때문입니다.

 

누구의 기능?

 

예수님이라는 구원자의 기능 말입니다.

 

의사의 기능은 환자가 없다면 설명 자체가 불가능 합니다.

건강한 자 뿐이고 아픈자가 없다면

의사 라는 기능은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방금 신이 보낸 사람 이라는 영화를 봤는데

예수님이 사랑이다면 그 사랑의 기능 때문에

우리는 예수님을 사랑하는게 아니라

배신 때릴 수 밖에 없는

 

베드로처럼 3번씩이나 부인하는 상황을 우리는 격게 되는 겁니다.

 

결국 가까이 가는 것은 우리가 아니라

도리어 멀고 먼 간격만 벌어지는데 (성 관계란 없다)

그 간격을 도저히 좁힐수 없는 상황에서야

주님 쪽에서 넘어오심

즉 사랑이 될 때

 

 

너희가 날 사랑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사랑하여 화목제를 보냈다는 의미가 비로소 이루어 지는 겁니다.

 

내 쪽에서 이루어 지는 법이 하나도 없다는 겁니다.
아무 것도 한 것이 없다는 겁니다. (4)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인 없는 결과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도 용서를 받았을 때

 

우리는 비로소 뻔뻔스럽게

 

너가 나를 사랑하느냐 라고 묻는 그 물음에

내가 주님을 사랑한다고 주님이 더 잘 아시잖습니까 라고

뻔뻔스럽게 대답할 수 있는 겁니다.

 

창조주의 물음에 우리는 화답할 뿐입니다.

아무도 힐문할 자가 없기 때문입니다.

 

즉 간격을 구지 좁힐 필요가 없이

그냥 그 모습 그대로 만남의 동행이 성사가 되는 겁니다.

 

사귐이 이루어지고

사랑이 펼쳐지는 겁니다.

 

우리 쪽에서 다가가서 사랑하겠습니다.

남들은 다 버려도 나는 절대로 버리지 않겠습니다.

나는 누구 보다더 주를 사랑하겠습니다 라는 것을 단절 시키는 것이

주님의 십자가 사랑입니다.

 

그것 자체가 우상입니다. 자기를 위하여

자기 쪽에서 출발하는 것은

결국 자기 사랑을 과시하는 것인데

이것을 반드시 십자가는 꺽어버리고 단절 시키는 겁니다.

 

그래서 도리어 아예 우리 쪽에서 사랑을 못하도록

소금을 쳐 버리고 (즉 우리를 영원히 죄인 중의 괴수가 되도록, 비린내 나는 인간으로 만드심)
빛을 눈 부시도록 비춰 버리고 (즉 영원히 어두움으로 취급해 빛을 비추어 주지 않으면 한발짝도 못 움직이도록 죄인을 일부러 만들어 버리고)

 

거룩으로 다가오시는 겁니다. 오늘 살펴볼 거룩 논쟁은

바로 우리를 영원히 얼룩으로 취급해 버리겠다는 겁니다.

얼룩은 미치도록 제거하고픈 더러움입니다.

청소의 목적이 뭡니까?

깨끗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 기능에 얼룩은 반드시 제거해야만 하는 겁니다.

 

유리 같이 맑은 창문에 얼룩이 묻어있으면 얼마나 그 얼룩 자국을 지워버리고 싶겠습니까?

하얀 옷에 커피를 마시다 쏟은 커피얼룩이 묻어 있으면 당장 빨아버리고 싶어 하듯이 말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나사로가 죽었으니 빨리 오라는 재촉장에

일부러 3일이라는 간격을 마련하십니다.

 

3일이 지나서야 이제야 가자 라고 합니다.

 

3일 이라는 간격이 필요합니까?

 

인간 쪽에서의 사랑을 모조리 차단 하기 위함입니다.

인간 쪽에서 생길수 있는 기쁨을 모조리 차단하기 위함입니다.

 

바로 이 3일 이라는 간격을 시비거는 자들을 일부러 발생 시키기 위함입니다.

 

그들이 얼마나 이 간격을 매꾸어 볼려고 노력하는 자들입니까?

성화론자들이 그 대표적인 겁니다. 선악과를 따먹은 모든 인간을 대표하는 겁니다.

 

그래서 그 노력이 곧 행함이 오늘 본문에도 나옵니다.

 

왜 예수 당신은 깨끗하지 않냐 시비입니다.

 

이 시비를 걸어준 바리새인에게 우리는 감사를 해야 합니다.

 

가장 상식적이고 이성적인 질문이자

이것을 하나님의 거룩과 연관 시켜서

바리새인은 예수님께 따집니다.

왜 식사 전에 손 씻지 않습니까?

 

더럽다는 겁니다.

 

자 여기서 예수님은 자신을 드러내는 기능으로써

거룩이라는 의미를 증거하십니다.

 

그렇기 위해서는 엉터리 거룩이 등장해야 하는 겁니다.

모든 인간을 대표해서 바리새인이

왜 당신은 깨끗하게 손 씻지 않고 더럽게 그런 식사를 할려고 하느냐 라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깨끗함에 더 나은 깨끗함을 말하기 위해서

거룩의 과잉을 증거하십니다.

 

즉 깨끗함을 목적으로 하는 청소에서

안 과 밖이 있는데

 

과연 밖이 깨끗하다고 해서 안이 자동적으로 깨끗하냐 라는 질문을 던지시는 겁니다.

 

여기에 인간은 얼마나 반칙을 벌리는지

마치 내가 예수님을 사랑하면

자동적으로 예수님도 나를 사랑한다 라는 말도 안되는 전제를 깔아버리는 겁니다.

 

이것이 우상이다고 했습니다.

 

바로 이것을 예수님은 지적하시는 겁니다.

 

밖이 깨끗하면 안이 자동적으로 깨끗하냐 라는 겁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역설적으로 안이 깨끗하면

밖이 자동적으로 깨끗하다는 식으로

저들에게 반대를 위한 반대의 논리로 거룩의 의미를 드러내시는 겁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예수님 자신이 더러움이 되어야 합니다.

즉 얼룩이 되어야 합니다.

밖을 늘 깨끗하게 하는 자들에게 미치도록 제거하고싶어 환장게 만드는 얼룩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거룩입니다.

 

 

제가 이런말 하면 교회에서 당장 쫏겨나도 마땅하겠지요?

 

아니 거룩이 얼룩이라니? 거룩이 더러움이라니?

 

 

그래서 바리새인의 지적질에

주님은 옳타구나 요놈 제대로 걸려들었군

미끼를 덥석 물어주니 고맙구나

 

이 기회를 통해 또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전하는 구실로 삼는 겁니다.

이거 좋은 뜻 아닙니다. 즉 심판의 구실로 삼는 겁니다.
단절의 단절이지

부정의 부정이지

긍정이 아닌 겁니다.

즉 십자가의 사랑 말입니다.

 

주님은 다짜고짜 손 깨끗하게 씻는 것 보다

정작 더러운 너희 속내는 왜 그렇게 씻을 마음이 없냐 라고 돌직구를 날리십니다.

 

바리새인은

얼마나 상식적으로 지극히 이성적으로 식사전에 위생적인 계보학적으로

손을 깨끗이 씻지 않고 식사를 할려고 하느냐 하는 겁니다.

 

그것도 꼬투리 잡을려고 하는 바리새인이 아니라

예수님께 호의적인 태도를 보이는 바리새인이 말입니다.

부자청년도 얼마나 호의적입니까?

 

삐딱한 자는 예수님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도저히 더러워서 못 참겠다고 그냥 못 넘을수 없는 거룩에 대한 문제를

 

에수님을 통해서 발견했을 때

그냥 넘어갈수가 있냐 말이죠.

 

그래서 바린새인은 따집니다

좀 씻지?

 

어쩔?

 

그러면 예수님은 호의적인 태도이지만

이미 몸 자체가 그런 바리새인에게

아 그건 너희가 오해를 해서 그런거야 라고

살살 타이르듯이 가르치면 될 것을

 

예수님은 엄청난 실수를 해버리십니다.

 

이 조그마한 거룩에 대한 식사전 손 씻는 문제는

 

마귀와의 전쟁으로 확대 하시는 겁니다.

 

이 무슨 오바냐 말입니다.

과잉 제스쳐인가 말이죠.

 

즉 가능성으로써의 거룩이 아닌
손을 물로 씻어서 깨끗이 하면 끝날 문제를

 

상상도 못할 정도의 불가능성으로써의 거룩을 제시했을 때
우주의 전쟁으로 확대를 했을때

 

자 이렇게 되면

인간의 눈에는 마귀가 보이지도 않는데

예수님은 이 문제를 마귀와의 싸움으로 확대 시켜버리기 때문에

 

누가 봐도 예수님은 미친놈으로 밖에 보이지 않게 됩니다.

마치 허공에다 대고 손시레 치면서 싸움하듯이 말입니다.

 

아무것도 아닌 것에 목숨을 거는 식이다는 겁니다.

 

실지로 예수님은 이 문제를 호의적인 바리새인이든

꼬투리 잡을려는 바리새인이든 상관 없이

 

유대인 전체의 문제로 확장 시켜서

 

도리어 예수님 자신의 죽음으로까지 직결시켜 버리는 문제로 확대 시키게 됩니다.

 

 

이것을 정치적이다 라고 합니다.

 

즉 정치적이다는 말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그 정치 말고요

 

더 강한 것이 누구이냐 라는 것을 드러내는 것을 정치 라고 합니다.

 

즉 인물을 드러내는 것이 정치이다는 겁니다.

 

여기에 인간은 자기를 위하여 자꾸 우상을 드러내는 겁니다.

내가 주님을 사랑했다는 증거물들을 나열한다는 겁니다.

 

 

여기에 예수님의 정치는 그 정치를 무참히 밟아버리는 식입니다.

인간의 정치술을 거부하는 정치를 펼칩니다.

 

그 드러내야 할 것은 예수님 자신이지

너가 아니다는 겁니다.

 

안식일은 안식일을 누가 지켰냐 라는 인간을 드러내는 우상을

예수님은 안식의 정치성으로 예수님 자신을 드러내는 겁니다.

그것이 안식의 참 뜻이다는 겁니다.

 

그러니 안식일 백날 지켜도 소용이 없다는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모든 것에 적용해 보면

거룩은 결국 예수님 자신을 드러내기 위한 인물 개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깨끗이 손 씻었다는 행위를 지키면 그것이 거룩하다

또는 깨끗하다 라고 은근슬쩍 능구렁이 같이 넘어가버린다는 겁니다.

그 꼴을 예수님은 못 보겠다는 겁니다.

그러면 과연 그렇게 밖이 깨끗한 너희가 안은 과연 깨끗하냐 라고

예수님이 건드리시는 겁니다.

 

그러니까 인물입니다. 내 안을 건드리시는 분 그 인물이 거룩이다는 겁니다.

행함의 문제가 아니라 믿음의 문제이다는 겁니다.

 

할례를 백날 손으로 해 보세요

마음의 할례는 손이 닿지 않는데 어떻게 하냐 말이죠.

그렇다면 이 할례는 인물의 의미였다는 겁니다.

 

십자가도 마찬가지 인물 개념입니다.

그러니 요즘 십자가를 주장하는 자들이 다 엉터리인 겁니다.

왜냐? 인물 개념으로 못 보는 자들이 십자가를 행함의 문제로 취급하기 때문에

자꾸 동일시 할려는 짖을 펼치는 겁니다.

그거 우상입니다.

 

쉽게 말해서 자꾸 대상물로 삼아버렸다는 겁니다.

 

십자가는 대상물이 아닙니다.

그렇게 되면 보고싶은 것만 보고

믿고픈것만 믿는 식이 되는 거죠.

 

그 반대입니다. 십자가의 대상물이 우리가 되는 식입니다.

이렇게 되면 아무런 연고 없이 무조건적인 거룩이 입혀진 겁니다.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거룩이 되어 버린 겁니다. 원인 없는 결과죠.

 

거룩한지 아닌지 어떻게 아느냐?

거룩을 대상화 한 바리새인의 또는 성화론자의 사고가 아니라

거룩이 대상물로 삼아버린 거룩이 입혀진자가 되면

오늘 본문처럼

예수님을 얼룩으로 취급해서 제거대상 1호가 된다는 겁니다.
즉 거룩을 지키는 자들에 의해서 거룩이 입혀진 자는 제거 대상 1호 입니다.

 

누가 봐도 최고로 강한 자가 느부갓네살 왕인데

그런 느부갓네살 왕 보다 더 강한 자가 있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

 

다니엘이라는 얼룩이 그들의 눈앞에 자꾸 아른거리는 겁니다.

얼마나 제거하고 싶은지 그 얼룩만 아니면

그림이 끝내주는데

그 얼룩 땜에 그림을 다 망칠 판국이다는 겁니다.

 

 

그래서

일부러 모조리 느부갓네살 왕의 포로가 되도록 하고

갇히도록 하고

억눌리도록 한다는 겁니다.

 

 

일부러

 

그래서 희망 단절

기쁨 단절

웃음 단절

부활 단절이 되었을때에

 

비로소 강한 자가 등장 합니다.

곧 보이지 않는 마귀입니다.

 

돌을 떡덩이 되게 해서 고아를 배불리 먹여야 하지 않느냐? 굶어 죽지 않느냐?

메시야의 기능은 그게 아니고 뭐냐?

미움 받아서 거룩한 성전에서 떨어져 죽게 된자를 손으로 받쳐줘야 하지 않느냐?

메시야의 기능이 그거 말고 뭐있냐?

부조리한 천하만국을 정의로 다스려 모든 영광이 되어야 하지 않느냐?

왜 방관하며 내버려두느냐? 그런 메시야 아니면 뭐하러 왔니?

 

마귀가 이렇게 외칩니다.

 

3일 이라는 간격이 없으면

그 빈 공백이 생기지 않으면

그 무능함이 생기지 않으면

절대로 나타나지 않는 마귀가

비로소 꽁꽁꽁 숨어있다가

자신 만만하게 나타납니다.

 

그리고 따집니다.

그게 무슨 메시야냐?

그게 무슨 사랑하는 자냐?

 

너 예수가 재내 오빠인 나사로를 그렇게 끔찍이도 사랑했다메?

 

그런데 이게 뭐니 ~~~~~~

 

사랑 한 것 맞니 ~~~~~~

야 시니비(신입)!! 
이 고참 마귀가 하는 사랑 잘 봐라 ~~~~~~

 

깨끗하게 손 씻고 식사자리에 앉는 겁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바로 이 3일 이라는 간격(단절)으로 인해서 나타나는 겁니다.

얼룩이라는 구멍으로 인해 숨어있던 마귀가 등장해서 손을 깨끗하게 씻는 겁니다.

손 싯지 않는 것이 어리석고 미련하고 바보 멍청이 짖이거든요.

 

즉 예수님의 배신 때리기(부정한 3 간격)를 마귀는 문제 삼고자 등장해야만 하는 겁니다.

 

여기에 마리아 마르다 조차도 함께 그 3일이라는 간격에 첨가 시켜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도 동일합니다.

 

바로 예수님의 배신에 대한 원망입니다.

아니 예수님 마저 손 씻지 않고 밥 먹으면 되냐 말이죠 라고 따지는 겁니다.

 

예수님을 믿었는데 그 믿는 도끼에 발등 찍혀 버렸다 라는 그 상실감을 토하게 되는 상황 말입니다.

 

이 상실감 ~~~~~~~~

바로 이 상실감 ~~~ (괜히 기대 했어! 괜히 믿었어! 괜히 전 재산 버리고 따라왔어 ! 라는 이 상실감 !1 간격, 단절, 단절의 단절)

 

자 이 3가지 명료한 물증이 이 빈터(구멍, 얼룩)에 담겨야 합니다.

 

첫 번째 예수님의 배신, 속임수

 

두 번째 그 배신감에 대한 상실감, 원망, 닭 울기 전에 3번 부인

 

세 번째 여기서 하이라이트 마귀의 등장, 강한 자의 등장

사랑한다메? 사랑한다면서 저렇게 망하도록 했니? 라는 숨은 자의 등장 말입니다.

라캉의 L 도식 처럼 왕의 무능함, 여왕의 코너에 몰린 죽으면 죽으리라, 장관의 여왕 추궁
편지가 이들을 수시로 배치하는 겁니다.

 

비로소 숨은 인물의 등장입니다.

이 인물이 등장하지 않고서는

예수님이라는 인물이 누구인지 모르도록 되어 있습니다.

 

 

즉 사랑 보다 가장 정치적인게 없습니다.

이것을 고문이라고 합니다.

 

아주 아주 불합리하고 부조리한 잔인한 고문 말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예수님께서 주시는 유일한 선물입니다.

선물이란 결국 도착적인 사랑인 빼앗을자 없도록 하기 위한

자기고리 채우기입니다. 십자가로 말입니다.

그러니 벗어나고파도 못 벗어나도록

 

먼저 느부갓네살 왕에게 포로 억눌림 갇힘 으로 만들어서

그 속에서 그 강한 자 보다 더 강한 자로써

 

자신의 사랑을 짠 하고 구원자로 등장하시는 겁니다.

 

이 얼마나 도착적입니까? 얼마나 짜고치는 고스톱인 자기 자작극이냐 말이죠.

거룩을 온 몸에 입혔다는 말은 결국 그 정도로 밖이 더럽고 더럽다는 겁니다.

온 몸에 거룩을 입혀주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더럽다는 겁니다.

온 몸에 소금을 뿌리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악취와 비린내가 진동한다는 겁니다.

온 몸에 빛을 비추어주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어둡고 어둡다는 겁니다.

항상 단어 문자는 이중적입니다. 반복적이다는 겁니다. 어둡고 어두워 너무 너무 캄캄해 아무것도 못 보고 있다는 겁니다.

 

어느 정도로 심각하냐? 우리라고 해서 바리새인과 다릅니까?

바리새인처럼 식사 전에 손 씻었다고 안과 밖이 깨끗하다고 여길정도로

이 말도 안되는 거룩에 대한 해석을

 

역으로 예수님이 손을 씻지 않는 얼룩이 됨으로써 비로소 밝혀지는 겁니다.

안그러면 걸려들지가 않습니다.

 

예수님의 자작극인데

다들 자기를 위한 자기만의 지숨 지숨 자작극을 펼치는 겁니다.

그 대표성이 성화론 아닙니까? 바리새인 아닙니까?

 

그래서 아가서는 뭐뭐 보다 강한 사랑이라고

 

가장 강한 죽음 보다

더 강하다고 하는 겁니다.

 

아니 죽음보다 더 강한게 어디있겠습니까?

 

맞습니다 죽음 보다 더 강한 것은 이 세상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모든 인간은 죽기를 무서워 노예가 되었다고 합니다. 죽음의 노예입니다.

 

(2:15, 개역)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 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려 하심이니

 

아니 어떤 누가 자기 목숨을 헌신짝처럼 버릴려고 하는 자가 어디있냐 말이죠?

그 정도로 죽음이 모든 것 위에 군림하는 최고의 강한 것이다는 겁니다.

 

어 그런데

무모하게 예수님은 자신만이 내가 죽음 보다 더 강한자다 라고 혼자 뻔뻔스럽게

있자나 자나 자나 내가 있잖나

 

라고 다들 죽음 앞에서 벌벌벌 떨고 있는데

그 죽음 앞에서 당당하게 피식 하고 웃으면서 등장하는 겁니다.

 

남들은 하나도 안 기쁜데 혼자 희년을 외치고 있는 겁니다.

 

사망아 너 이제 끝났어 라고 말이죠.

 

(고전 15:53, 개역) 이 썩을 것이 불가불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

(고전 15:54, 개역)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이 이김의 삼킨 바 되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응하리라

(고전 15:55, 개역)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고전 15:56, 개역)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고전 15:57, 개역)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결국 깨끗하다는 거룩 문제를 사망아 라고 인물로 표현하듯이

이 사망과 연결 짖지 못하는 거룩은 그거 거룩 아냐 라고 하시는 겁니다.

 

손 백날 깨끗하게 씻어보세요

그거 깨끗한거 아냐 라고 하시는 겁니다.

 

안이 더러운데 밖이 깨끗해서 뭐하냐 라는 겁니다.

 

 

마치 신들의 세계에서 신은 죽었다 라고 외치는 의미처럼

 

죽음아 너 이제 죽었어 라고 외치듯이 말입니다.

 

다들 웃다고 배꼽잡다가 죽습니다.

아니 신들이 죽어요?

결국 그들 말 마따나 죽지 않는 것이 신인데

하도 하도 어이가 없어서 웃다가 너무 너무 웃겨서 비웃다 죽습니다.

이 역설

그들이 신들이라고 해 놓고서는

불멸불사라고 해 놓고서는 죽어버렸으니

그게 신 입니까? 신이 아닌 거죠.

 

그래서 신은 죽었다는 겁니다.

결국 선악과를 따먹은 인간은 다 죽었다는 겁니다.

사망 아래에 갇혀 버렸다는 겁니다.

 

그 정도로 사망이 강하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런 사망 보다 더 강한 인물이

 

이 사망을 동원시켜서 등장하는 겁니다.

사망이 사망해 버리면 사망의 의미는 무의미해져 버리는 겁니다.

바로 그런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는 깨끗함은

깨끗함 축에도 끼이지 못하니

 

차라리 더럽다고 선언하는게 나은 겁니다.

적어도 내 속에 정결한 영이 없다는 것을 알고

한 인물을 기다리고 쳐다보고자 할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 입장에서 예수님이 다가왔는데

그 앞에서 주여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나를 떠나소서

나는 더러운 인간입니다 라고 해도 시원찮을 입장에

 

예수님 손 씻고 오세요 더러워서 같이 밥 못 먹겠네요 라고 나오니

적반하장인 겁니다.

 

그런데 아무리 봐도 바리새인이 오히려 이런 말을 외치는 겁니다.

적반하장이라고 예수님을 향해서 따지는 겁니다.

 

그 정도로 예수님은 얼룩이 된 겁니다.

 

그래야 제거 가 실행이 됨으로써

사망이 그 배후로써 등장하니 말입니다.

 

다니엘서 라는 영화를 봤는데

어떻게 해서든 다니엘을 죽이고파서

제거하고 싶어 미치도록 모든 환경이 작동하는 겁니다.

 

이것을 이 얼룩을

중간에 낑김이라고 표현합니다.

 

누가 봐도 다니엘은 죽은자 맞습니다.

살 가망이 없습니다.

왕이 죽이라고 자신들이 판결해 놓고서는

도리어 다니엘을 다시 살려낼려고 아무리 애를 써도 못 살려냅니다.

살려내면 안되지요

숨어있는 인물이 나타나지 않거든요

그 인물이 등장하기 위해서는

법으로도 구제할수 없는 사망 속에 진짜로 들어가도록 되어 있습니다.

 

모든 것이 단절 되고 절망이 되었을때에

죽었을 때에

 

3일 이라는 간격이 제대로 벌어져

제대로 죽었을때에

 

불가능한 즉 그 어떤 가능성이 모두다 차단 되었을때에

불 속에서 다니엘이 살아 있는 겁니다.

다니엘이 거룩해서?

아니지요? 4의 인물 때문이다는 겁니다.

 

그것을 입었다 라고 표현합니다. 그리스도의 옷처럼

거룩을 입었기에

입었다는 의미를 부각하기 위해서

사망을 더더욱 퍼 부어버리는 겁니다.

 

이제는 사자 굴 속에 집어 넣는 겁니다.

쫄쫄 굶은 사자가 다니엘을 잡아 먹는 것이 마땅하고

그 속에서 살아남는 것은 불가능한데

살아나게 됨은

오히려 밖의 죽음이 이 사자들에게 잡아먹혀 죽게 되는 겁니다.

 

오히려 더럽다고 얼룩이라고 제거해야 한다고 했던

그 다니엘은

안에서 멀쩡히 살아있는 겁니다.

불 속에서도 멀쩡히 살아 있는 겁니다.

 

오히려 밖이 막 죽어나가는 겁니다. 바깥이 말입니다.

 

아니 생각해 보세요

죽음이 죽어버리면 죽음을 왜 두려워 하겠습니까?

죽음이라는 기능이 무색해 저버리는데?

그러니 죽음이 죽는다는 것 조차 말이 안되는 겁니다.

죽음이 죽어버리면 그 죽어버린 그 의미는 죽음 아니냐 말이죠.

 

사망권세를 이겼다는 이 부활의 의미가

 

사실상 인간 쪽에서는 믿을 수 있는 문제가 될 수가 없는데

믿는다고 하니 그거 한번 수셔 봐야 하는 겁니다.

과연 맞는지 틀리는지

 

그래서 유대인 전체의 부활의 의미를

시비 걸기 위해서

 

예수님은 단절이라는 3일을 나사로의 죽음을 통해서 벌리시는 겁니다.

 

과연 부활이 누구인지?

어떤 인물로 귀결 되느냐 말이죠?

 

이스라엘 전체의 안식 문제를

시비 걸기 위해서

 

예수님은 일부러 안식을 어기도록 해서 안식을 건드리는 겁니다.

 

결국 바리새인 율법사 사두개인 유대인들

안걸려드는 자들이 없을 정도로 다 걸려드는 겁니다.

 

(고전 15:56, 개역)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결국 자기들이 다 죄아래에 있으면서 정작 남의 죄를 지적질 하고 있다는 겁니다.

가장 깨끗함을 추구하면 추구할수록 말이죠. 육의 자랑이, 율법 지키기가

 

예수님을 시비 걸지 않고 배기겠습니까? 얼룩을 미치도록 제거하고 싶어서 안나서겠습니까?

 

예수님은 이렇게 인간들이 개인적인 자질의 문제로 따지는 것을 확대 시켜서

마귀에게 까지 이 기쁜(단절) 소식이 들어가도록 하시는 겁니다.

 

바리새인만이 찔리는게 아닙니다. 더 깊이 우리도 찔리고

모든 인간이 찔리고 더 더 더 깊이 마귀의 세계에 까지

사망의 권세까지 더 더 더 깊이 깊이 들어가는 겁니다.

 

그런 깨끗함이 아니면 가짜죠.

결국 예수님의 얼룩이 진짜 거룩입니다.

그 진짜 거룩을 얼마나 제거하고 싶어 환장해 있는 것이

우리 인간입니다.

 

얼마나 걸리끼는 것이면

유대인들은 이 십자가를 제거하고 싶어 환장해 있는 겁니다.

이방인은 이 십자가를 별거 아니네 라고 무의미하게 취급해 버리는 겁니다.

 

유일하게 성령 받은 자만 이 얼룩을 오히려 가장 귀한 보물로 취급하는 겁니다.

 

빛이라고

이 빛이 밝히 비추이는데 누가 꾀냐고 오히려 따집니다.

 

소금이라고

이 소금이 썩지 않음을 당치 않도록 팍팍 치는데 엉뚱한 정결함을 찾는다고 따집니다.

 

거룩이라고

이 거룩이 더 이상 더럽지 않게 할려고 얼룩 속에 집어넣어버렸는데 엉뚱한 깨끗하다고 자부하는 자들이 이 얼룩을 제거할려고 달려 들 정도로 그 정도로 깨끗한 거룩이다는 겁니다.

 

느부갓네살 왕이 움직일 수밖에 없고

숨어 있던 눈에 보이지도 않는 마귀가 등장하지 않고는 못 배길 정도이고

최고의 의인 욥을 치시는 것에 마귀가 내기에 걸려들지 않을 수 밖에 없을 정도로

 

철저하게 정치적인 겁니다.

 

욥 보세요

 

잔인한 불합리한 고문을 받지 않습니까?

 

이것이 바로 성령의 선물이라고 합니다.

 

자기 목숨을 냅따 헌신짝처럼 버릴 정도로 무가치 하게 여길자가 아무도 없는데

예수님은 냅따 버리시는 겁니다.

 

죽음 보다 더 강한 것이 있다고 말입니다.

 

결국 성령의 선물인 사랑을 받으면

은사를 받으면

자기 목숨 보다 더 아까운 것이 없는데

은사 때문에 졸지에 헌신짝처럼 냅따 버리는 식이 되니

이게 무슨 가능성의 영역입니까?

불가능한 영역인 겁니다.

아예 시도할 생각 조차도 하지 마세요

당첨 될 때만 우발적으로 나올 뿐입니다.

육의 자랑 자체가 되지 않는 겁니다.

 

오늘 밥 먹고 티비를 이래 저래 틀다가 2012 라는 지구종말에 대한 영화가 나오길래

영화관에서 봤지만 또 한번 쪼매 봤습니다.

 

어 그런데 갑자기 이런 생각이 났습니다.

 

진짜로 저런 상황이 언젠가는 닥친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성경에도 기록되있구요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마치 그 일을 이미 격었다는냥 영화관에서

안방에서 티비를 보듯이 아주 편안하고 웃으면서 감탄을 하면서 보고 있다는 겁니다.

 

이런 호사를 누리다니요?

 

심판을 누리고

종말을 누리고

 

블랙버스터한 장면에서 감탄사를 연발하면서

정작 그 당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겁먹고 울고 불며 하는 자들이 단 한명도 없이 말입니다.

 

신이 보낸 사람을 보니까

감동이나 마음을 움직여서 공감함에 있어서 눈물을 흘릴지언정

정작 그들의 마음에 단 1%로의 근처도 갈 수가 없다는 겁니다.

 

불가능 합니다. 그저 영화이기에 구경만 할 뿐입니다.

아무리 실화이고

또 지구 곳곳에서 실재로 벌어진다고 해도

지금 당장 닥치지 않은 이상

구경만 하는 호사를 누릴 뿐입니다.

 

즉 명백한 경계선이 있기에

그 영화의 속의 장면이 바깥의 나 있는 곳으로 오지 않는다는 겁니다.

 

안과 밖이라는 경계선이 선명하게 그어져 있다는 겁니다.

 

 

결국 우리는 그런 영화를 보며 재미와 감동과 지혜와 또는 미래에 격게 될 일을

미리 간접체험하듯이 하나의 교훈으로 잡아서 영화평을 쓰던 어찌했던

 

그 영화 속의 내용물이 바깥에 있는 나에게로 넘어오지 않는 이상

전혀 전혀 걱정할 필요가 없게 되는 겁니다.

 

그리고서는 일상으로 돌아와서

 

아 그 영화 참 재미있더라 라고 호사를 누릴 뿐인 겁니다.

 

 

자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이 마귀에게까지 확대 시키는 것은

그 경계선을 확 무너뜨려서

 

이제 인간은 다 죽었다 라고 선언해 버리면

인간은 바보 같이 안말려들고는 못배기는 겁니다.

 

마치 신은 죽었다 라는 말에 신들이 말도 안된다고

어떻게 신이 죽냐? 신은 죽음 자체가 없는데 라고

말려들어서 하도 하도 웃겨서 배꼽잡다 죽게 되듯이

 

인간은 다 죽었다 라는 말에

인간들은 말려들어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임으로써

자신들의 정체를 들통나게 된 셈이 되는 겁니다.

 

얼마나 그들의 아비인 마귀가 예수님을 죽이지 말라고 말렸는데

아무리 말리고 말려도 결국 말려드는 것이죠.

 

 

자 그런 입장에서

예수님은 시비를 거시는 겁니다.

분명 바리새인들이 먼저 시비 걸었지만

예수님이 던지는 미끼에 걸려든 겁니다.

얼룩이 되시는 겁니다. 시비 안 걸고는 못 배기도록 말입니다.

 

그리고 실재계인 묵시를 이 역사라는 상징계(우상계)

중간에 낑긴 경계인이 되어서

그 경계를 허물어 버립니다. 휘장을 찢어버리는 겁니다.

 

결국 역사는 묵시가 쏟아내는 것을 담는 그릇 항아리일 뿐입니다.

인간은 그릇일 뿐입니다. 진노인지? 긍휼인지?

증상, 징후일 뿐입니다.

 

사망과 함께 의문의 증서도 함께 찢어버립니다.

경계선이 무너진 이상

하늘의 완료가 와르르 쏟아져 내리는 것 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뭘 해도 다 죄 뿐이다는 겁니다.

not all 낫 올 뿐입니다.

 

심각할게 아무것도 없다는 겁니다.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데 누가 꾀더냐 말이죠.

칠천명을 남겨 놓으니까

채널이 휙 가로질러 모든 상황을 전복시키는 겁니다.

 

당황하지 않고 심각한 것이 다 사라져 ~~~~ 끝 완료 짝 짝 짝

 

손뼉 칠 뿐인 겁니다. 찬송 뿐입니다. 신나게 노래 부를 뿐입니다.

 

결국 이 사건이 배후를 드러내는데 목적이였던 겁니다.

곧 한 인물로 모든 것이 귀결 되는 겁니다.

 

그러니 안식

거룩

이웃사랑

 

또 뭐였죠 앞에서 했던 것

 

기도

 

표적

 

기적

 

시비 걸지 않는 게 없을 정도로 다 시비 거시는 겁니다.

 

누가? 한 인물 !!

 

 

오늘은 깨끗함 곧 거룩에 대해서 시비를 거시는 겁니다.

 

여기에 은사 곧 선물의 영역까지 갈려면

 

이 자그마한 파장이 나중에는 살기가 흘러넘치는 죽음으로까지 감으로써

 

주님의 끝까지 섬기시는 사랑

곧 도착적인 사랑 (정치)

 

배후의 세력까지 다 끌어들임으로써

 

우주의 문제로

창세전의 문제로 확대시키는 겁니다.

 

그것을 약속이라고 하는 겁니다.

 

 

저번에 말했지요

솔로몬 재판

 

한 국가의 넓은 땅에서

이름도 없는 조그마한 동네에서 벌어진 사건이

그것도 비천한 기생들끼리의 싸움이

밑의 선에서 끝나지 않고

최고봉의 윗 선? 왕의 자리에 까지

우주까지

하늘의 보좌까지

그 무능한 아기의 죽음이 올라간다고

 

말이 안되잖습니까?

 

그런데 올라간다면

그것은 바로 왕 자신의 지혜를 발현코자 함이다 라고

 

자작극

 

일만달란트 용서는 결국 용서받은 놈은 없었다 로 끝나지만

 

오히려 용서의 왕 중의 왕이라는 의미로 용서가 과잉용서로 증거되는 겁니다.

정작 철저한 비용서인데 그것이 용서의 과잉이니 말입니다.

 

용서 받은 자 조차도 사라져 버릴 정도로 용서의 왕만 남아버리는

자작극

용서라는 인물의 자작극

 

과연 감당할수 있으면 감당해 보라는 겁니다.

따라 올수 있으면 따라와봐 라고

얼마나 당당한지???

 

우연 곧 비필연이 우연인데,

그 짤막한 0.3초가 천년이 하루같이 천년보다 더 강한 사랑으로써 자리잡는

비필연(필연의 과잉으로써 우연)으로 정치화 된다는 겁니다. 약속화 된다는 겁니다.

 

결국 여자의 후손은 뱀의 머리를

뱀은 여자의 후손의 발꿈치를

 

서로가 서로를 상하게 하는 그 약속이

 

오늘 본문에서 그렇게도 예수님이 확장 확대 과잉 오바 증폭시키시는 이유가

 

정치성 때문이다는 겁니다. 그 정도로 잔인한 사랑이다는 겁니다.

 

죽음 보다 강한 사랑

 

 

(3:15, 개역)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사랑 하겠다는 겁니다.

반드시 건지겠다는 겁니다.

반드시 용서하겠다는 겁니다.

 

그래놓고 배신하고

건지기는커녕 구원은커녕 버리시고

용서는커녕 심판해 버리는 겁니다..

 

아바 아버지 어찌하여 버리시나이까

 

다들 하나님께 저주 받은자이고

? 십자가 나무에 처형 당하니까 저주 받은자 맞잖아!!

하나님께 심판받는다고 했던 겁니다.

 

이 간격을 이 공백을

 

마귀는 견디지 못하고

비로소 등장하고

 

우리는 비로소 피식 웃게 됩니다. 모든 심각성은 다 날라가는 겁니다.

슬픔 대신 희락을 입어서

입혀져서 완료를 보게 되는 겁니다.

 

자기 목숨을 헌신짝처럼 무가치하게 버린 예수님이라는 인물 때문에

진짜 거룩되신 인물의 얼룩 되심 때문에

비로소 안의 경계가 무너져 밖으로 표출 됨으로써

그 휘장이 찢어지심으로써 입혀짐을 겪게 됨으로 말입니다.

 

(7:55, 개역)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7:56, 개역)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대

(7:57, 개역) 저희가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심으로 그에게 달려들어

(7:58, 개역) 성 밖에 내치고 돌로 칠새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

(7:59, 개역) 저희가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가로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눈이 주님을 봐 버렸기 때문에

지금 돌비 던지는 자들을 보고서 하나도 심각하게 여기지 않게 됩니다.

오히려 죽음의 공포에 떠는 자들은

죽음을 집행하는 자들입니다.

 

이렇게 서로 서로가 맞물려서 정작 주님 자신만이 홀로 자신의 주인공만을 드러내고

둘 다 양쪽다 누락 시키시는 겁니다.

 

아무도 구원 받은자 없이도 떵떵거리면서 구원자요

아무도 용서 받은자 없이도 떵떵거리면서 자신 만만하게 용서의 왕 중의 왕이요

아무도 축복 받은자 없이도 떵떵 거리면서 기쁜 소식을 전하는 자 라는 겁니다.

 

심각할게 전혀 없는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데 누가 꾀냐고 합니다.

 

정작 심판주인데 구세주 라는 겁니다.

 

이 간격에 마귀가 시비를 거는 겁니다.

 

마귀만이 심각할 뿐입니다. 왜 벌써 오냐고? 반칙이다고?

인간만이 심각할 뿐입니다. 내만 남았다고?

 

엘리야도 시비 걸고

요나도 시비 걸고

 

나중에 뒤로 꼬불쳐 놓고서는 니 캉 내 캉만 알자 라고

그 수수께끼를 풀어주시는데

바로 사랑이라는 겁니다.

 

3일이라는 간격이 없으면 사랑 앙대요

마귀를 끌어들이지 않는 사랑 앙대요

가장 강하다는 것 보다 더 강한

즉 죽여놓고 다시 살리는 즉 죽음 저주 심판의 십자가가 아닌 사랑 앙대요

 

라는 겁니다.

 

그래야 죽음이 시기를 하고

사망이 시기를 하고

마귀가 시기를 하는 겁니다.

 

자기 목숨을 미워하지 않는 자들이 시기를 하는 겁니다.

 

그러니 이 땅에서는 얼마나 미움이라는 미움을 다 받겠습니까?

 

세상에서 사랑 받던 놈이 주님께도 사랑 받으면

마귀는 전혀 시기하지 않습니다.

 

 

마치 모세의 온유함이 진짜 온유함으로 드러날려면

정작 같은 가족 같은 피붙이로부터의 시기로 내부분열이 일어날 정도의 상황이 벌어져야

 

그것이 진짜 온유인 겁니다.

 

절대로 네버 네버 네버 사랑 받을 자격이 아예 없는 자가 사랑 받아야

회까닥 뒤로 넘어가고

화병이 걸리면

소화가 안되면서

온 오장육부가 뒤틀려

배가 아파와야

 

그것이 진정한 사랑인 겁니다. 죽음이 시기하지 않는데 무슨 사랑이냐 말이죠.

 

즉 철저하게 잔인한 고문으로써의 정치적인 편파 사랑입니다.

지독한 편애죠

 

반드시 지독한 이유없는 미움과 맞물려야 하듯이 말입니다.

 

 

그러니 스데반 집사가 괜히 성령 충만 받은게 아니죠

누구 배 아프라고 받은 겁니다.

 

그리고 다시 모세가 그런 미리암까지도 그 간격이라는 단절 속에 집어넣었다가 빼내니까

아기피부가 되어 뿌요 뿌요 45도 각도를 하고서는 셀카를 찍어대는 겁니다.

 

미리암의 찬송은 결국 그 뒤의 사건까지 다 포함하는 겁니다.

선취죠.

 

우리는 원인 있는 결과로써 찬송을 하는데

 

정작 새 노래는 원인 없는 결과로써 우발적으로 튀어나오록 한 것입니다.

 

요나도 찬송을 먼저 불러놓고 그 원인 있는 결과로써 해석한

더 나은 해석이 뒤의 사건으로써 이어짐으로써 우연 즉 필연 보다 더 필연적인

필연 보다 더 강한 우연으로써

사건의 흐름이 전복이 되는 겁니다.

그것을 창조라고 합니다.

 

창조란 결국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고치시는 것처럼

창조는 정작 뒤에서 누림으로써 먼저 있었다는 것을 알게 하는 겁니다.

 

창조가 제일 나중이어야 한다는 겁니다.
어법이 다 파괴되죠
끝이 종말인데

그 종말을 창조라고 하고 있으니 원

 

십자가가 우리의 최종 푯대가 되었기에 완료인 겁니다.

그렇다고 대상물로써가 아니라

도리어 우리가 대상물로 취급받음으로써

우리가 푯대를 향하는게 아니라

푯대가 갈바를 알지 못하는 우리를 막 땡기는 겁니다.

 

십자가는 가장 끝에 자리 잡고서 우리를 땡기는 겁니다.

 

제일 밑바닥에 말입니다. 그것이 영광 아닙니까?

 

끝이 좋으면 다 좋은 겁니다.

이런 호사를 누리는 겁니다.

종말을 누려

심판을 누려

단절을 누려 ~~~~~~~

 

 

아니 제일 밑바닥인데 무슨 영광이냐?
제일 높은 자리여야 영광이다고 하지 어떻게 제일 밑바닥이 되냐 말이죠.

위치가 아니라 기능 때문입니다.
기능이 바닥에서 십자가라는 영광이 땡기면 그것이 높다는 기능을 발휘하는 겁니다.

그것도 내가 그 푯대를 향하는게 아니라

그 최종적인 마지막 끝인 푯대가 나를 열심히 열심히 땅기고 작살 꼿고

칭칭감아서 땡기고 있다는 겁니다.

별에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서 말입니다.

 

우리는 그저 각기 제길로 가는 양 같을 뿐입니다.

오히려 알면 알수록 더더욱 도망치고자 할 뿐입니다.

 

지젝의 말처럼 그 끝이 좋으면 다 좋다는 것이

바로 끝이 처음이다는 겁니다.

 

아니 어떻게 끝이 처음이고 창조입니까?

 

우리는 제일 앞의 것이 창조인데?

아니 그렇게 제일 앞의 것이 창조인데 왜 창조 안 믿나요?

내가 부활이다니깐 아무리 알려줘도 부활이신 예수님은 안믿고

부활교리 부활지식 부활성경지식 부활절 이 딴 거로 가득채우냐 말이죠.

안식일 지키기로 가득 채우는 겁니다.

그러니 안식이라는 인물을 배제 시키는 겁니다.

안식일 지키는 나를 남기기 위해서 말이죠.

창조를 믿는 나를 남기기 위해서

뒤에 오신 창조자를 배제시켜버리듯이 말이죠.

 

예수님이 부활이십니다를 말하기 위한 소모품으로 우리가 배치된 것이지
우리가 부활믿습니다 라는 부활 신앙 지키기, 가지기 위해서 태어난게 아닌 겁니다.

 

바로 이런 우리의 더러운 속내를 들추어내지 못하는 거룩은 거룩이 아니다는 겁니다.

 

우리는 껍데기 거룩의 달인들입니다.

그런 달인에게 예수님의 더러움이 꼬투리 잡힌 겁니다.

 

과연 누가 잠자는 사자의 콧털을 건드린 것입니까?

 

(53:1, 개역)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 여호와의 팔이 뉘게 나타났느뇨

(53:2, 개역)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53:3, 개역)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버린 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53:4, 개역)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53:5, 개역)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53:6, 개역)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53:7, 개역)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 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53:8, 개역) 그가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 갔으니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산 자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을 인함이라 하였으리요

(53:9, 개역) 그는 강포를 행치 아니하였고 그 입에 궤사가 없었으나 그 무덤이 악인과 함께 되었으며 그 묘실이 부자와 함께 되었도다

(53:10, 개역) 여호와께서 그로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케 하셨은즉 그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그 씨를 보게 되며 그 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의 뜻을 성취하리로다

(53:11, 개역) 가라사대 그가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히 여길 것이라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또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라

 

 

얼마나 강했으면 모든 허물을 그에게 친히 담당케 했습니까?

 

철처한 잔인한 고문으로써의 편파적인 기쁜소식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전혀 기쁘지 않는 소식입니다. 주님 혼자만 기쁠 뿐인 기쁜소식입니다.

 

우리는 도리어 거룩은커녕 더러움 속에 놓여져야만 할 뿐입니다.

그래야 마귀가 바보같이 미끼를 무듯이

 

우리 또한 예수님을 그런 식으로 죽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또한 주님의 편파적인 원인 없는 결과로

이유 없는 무조건 사랑으로 인해

 

참으로 뻔뻔스럽게도

니가 나를 사랑하느냐 라는 질문에

 

방금 전 까지만 해도 믿은 적도 없으면서도

도리어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배신 때려놓고도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더 잘 아십니다 라고

입에 침도 안바르고

그 사랑의 확정에 녹아버리는 겁니다.

 

더 이상 나의 고백이 아닌

그의 도착적인 더 강한 사랑에 잠식 당해 도저히 빠져나올수가 없어서

 

그 에수에 그 예수쟁이라서

말 하나 하나가 저들에게 복장 터지도록 말입니다.

 

 

 

넌 날 사랑 하느냐?

오 주님 제가 예수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이 더 잘 아십니다. ㅋㅋㅋㅋ

 

내가 사랑하는게 아니라

예수님의 날 사랑하시는 완료된 숙제입니다.

 

다 완료된 숙제 !! 누려 ~~~~~~~~~~~~~

잉여쾌락(주이상스) !! 누려 ~~~ 향유 ~~~~~~~~~~~~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누려 ~~~~~~~~~~

(4:1, 개역) 그런즉 육신으로 우리 조상된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 하리요

(4:2, 개역)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4:3, 개역)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이 저에게 의로 여기신 바 되었느니라

(4:4, 개역)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빚으로 여기거니와

(4:5, 개역)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4:6, 개역)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행복에 대하여 다윗의 말한 바

(4:7, 개역)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4:8, 개역)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

(4:9, 개역) 그런즉 이 행복이 할례자에게뇨 혹 무할례자에게도뇨 대저 우리가 말하기를 아브라함에게는 그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 하노라

(4:10, 개역) 그런즉 이를 어떻게 여기셨느뇨 할례시냐 무할례시냐 할례시가 아니라 무할례시니라

(4:11, 개역) 저가 할례의 표를 받은 것은 무할례시에 믿음으로 된 의를 인친 것이니 이는 무할례자로서 믿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어 저희로 의로 여기심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다 이루었도다 !! 누려 ~~~~~~~~

 

(19:30, 개역)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 가라사대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시고 영혼이 돌아가시니라

 

(13:8, 개역)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온전한 밝은 빛 (11:33-36)

2014/03/25 12:51 in 성령행전(피활동,인간극복)

온전한 밝은 빛 (11:33-36)

 

(11:33, 개역) 누구든지 등불을 켜서 움 속에나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는 들어가는 자로 그 빛을 보게 하려 함이니라

(11:34, 개역) 네 몸의 등불은 눈이라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만일 나쁘면 네 몸도 어두우리라

(11:35, 개역) 그러므로 네 속에 있는 빛이 어둡지 아니한가 보라

(11:36, 개역) 네 온 몸이 밝아 조금도 어두운 데가 없으면 등불의 광선이 너를 비출 때와 같이 온전히 밝으리라 하시니라

이웃 기도 표적 에 이어서 오늘 본문은 빛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즉 뭔가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엉터리 이웃 엉터리 기도 엉터리 표적

오늘은 엉터리 빛


그리고 대조, 비교해 보라는 겁니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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