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룩의 확장일까? 단절(걸림돌,불가능성)의 확장일까?

 

마땅히 할 말 (12:1-12)

 

 

(12:1, 개역) 그 동안에 무리 수만 명이 모여 서로 밟힐 만큼 되었더니 예수께서 먼저 제자들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바리새인들의 누룩 곧 외식을 주의하라

(12:2, 개역)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은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나니

(12:3, 개역) 이러므로 너희가 어두운 데서 말한 모든 것이 광명한 데서 들리고 너희가 골방에서 귀에 대고 말한 것이 집 위에서 전파되리라

(12:4, 개역) 내가 내 친구 너희에게 말하노니 몸을 죽이고 그 후에는 능히 더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12:5, 개역) 마땅히 두려워할 자를 내가 너희에게 보이리니 곧 죽인 후에 또한 지옥에 던져 넣는 권세 있는 그를 두려워하라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를 두려워하라

(12:6, 개역) 참새 다섯이 앗사리온 둘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하나님 앞에는 그 하나라도 잊어버리시는 바 되지 아니하는도다

(12:7, 개역) 너희에게는 오히려 머리털까지도 다 세신 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

(12:8, 개역) 내가 또한 너희에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인자도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

(12:9, 개역)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는 자는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부인함을 받으리라

(12:10, 개역)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받으려니와 성령을 거역하는 자는 사하심을 받지 못하리라

(12:11, 개역) 사람이 너희를 회당과 정사 잡은 이와 권세 있는 이 앞에 끌고 가거든 어떻게 무엇으로 대답하며 무엇으로 말할 것을 염려치 말라

(12:12, 개역) 마땅히 할 말을 성령이 곧 그 때에 너희에게 가르치시리라 하시니라

 

 

지난 시간에 거룩에 대한 논쟁으로 예수님은 저들 바리새인의 외식을 들추어내고자
거룩이 아닌 얼룩(단절)으로써, 더러움으로써 다가와 접근합니다.

그 당시 가장 거룩한 자들에게 거룩으로 다가가면 그 차이성이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럼 그 차이 곧 분리성, 구별성, 삭제성, 단절성, 차단성으로써

또렷하게 차이가 날려면 예수님은 거룩으로 다가가는 것이 아니라

얼룩으로써 다가가야

거룩이라고 우기는 자들이 말려들도록 되어 있는 겁니다.
그래야 가짜 거룩을 홀라당 발가벗겨 버릴수 있는 겁니다.

 

그래서 이쪽과 저쪽이 또렷하게 구별이 되는 겁니다.
발가벗겨보니 예수님의 더러움 보다 더 더러운 것이 안에 가득차 있었던 겁니다.

이렇게 되면 자동적으로 예수님이 훨씬 더 깨끗함이 드러나는 겁니다.
결국 거룩은 상대적인 의미로써 나타나는 사건의 의미이지

인간의 손 씻는 개인적인 의미로써의 거룩이 아닙니다.

다윗 홀로 다윗언약이 설명 불가능합니다.

반드시 사울이 대립이 되어 주어야 합니다.
사울 개인이 죽었다고 끝나는게 아니라
반드시 사울의 사고방식이 확장된 이스라엘 전체가 이 다윗과 대조를 이루어야 하는 겁니다.
바울 개인만 홀로 기록되어야 하는게 아니라

반드시 바울이라는 인물에 대립되는 모든 육들의 활동이 대조를 이루어야
바울이 말하는 복음이 이해가 되는 겁니다.

 

이 구별이, 이 절대로 연합될수 없는 차단의 간격이, 바로 거룩인 겁니다.

 

그러나 인간 곧 모든 인간의 대표성으로써의 바리새인은

거룩을 소위 예수님께 호의적인 태도로써 예수님께 다가가는 것을 실천하는 식입니다.

이것을 거룩이라고 우기는 겁니다.

 

이런 모습은 오늘날까지도 동일합니다.

예수님께 호의적인 태도를 보이겠다고
자신이 예수님을 식사대접하듯이 대접 영접하는 것이 거룩한 삶이라고 우깁니다만

그거 거룩 아닙니다.

 

바로 이것이 누룩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누룩의 특징은 확장성입니다.

이 확장성을 누구나 다들 부러워 하는 판국인데 오히려 조심하라 라고 합니다.

아니 그것이 당연한 것이고 마땅한 것인데 아니야 그거 조심해야 할거야 위험한거야 라고 하시는 겁니다.

 

그럼 이 누룩과 반대 되는 개념 즉 대조되는 그 차이가 뭔가를 봐야 합니다.

그런데 그 차이나는 것 또한 확장성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누가 누가 더 나은 확장성인가?

 

바리새인의 누룩의 확장성인가?

아니면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그 무엇의 확장성인가? 라는 것이 오늘 본문의 요지입니다.

 

진짜 거룩이면 나의 어두운 내면까지 다 도려낼정도로 다 들통내는 것이 거룩입니다.

마음판의 할례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 어떤 누구도 아닌 예수님 본인이

이 불의한 사물에 충성하셔야 합니다.

재물이 일종의 잉여성인데

잉여란 무조건적인 원인 없는 이유 없는 감사를 말합니다.

왜냐하면 인간 보다 더 먼저 있었기 때문입니다.

 

왜 자꾸 인간 보다 먼저 있었다 라는 먼저있음에 의미를 두느냐?

 

그것은 인간을 기점으로써 선악이 퍼져버렸습니다.

죽음이 퍼져 버렸습니다. 죄가 퍼져버렸습니다.

 

그래서 모든 인간의 모든 사고방식은 선악적입니다.

예수님을 호의적인 태도로써 식사를 대접하는 의도 조차도

사실상 선악으로써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영접하는 내 자신의 선함에 의미를 두기 때문에

 

여기에 예수님은 악하다 더럽다 라고 지적하십니다.

그런데 인간들이 화를 내지 않을려면

나 보다 더 나은 거룩 곧 깨끗함을 보이면

그 깨끗함의 감응에 뿅가서 아 맞다 역시 예수님이구나 라고 나오게 됩니다.

 

즉 지난 시간의 본문을 각색하면

 

예수님은 손을 씻지 않고 식사하시는게 아니라

바리새인 중에 어떤 이가 가장 많이 씻은 3번을 씻은 사람이 있다면

예수님은 오히려 3721번 손을 씻었다면

거기에 있던 바리새인들이 이 예수님의 깨끗한 손씻기 21번에 뿅가서

감동 감화를 받아

예수님을 식사 대접하기를 참 잘했다고 여길 정도로

바리새인의 기를 팍 눌러버리는 행함의 달인에

자기반성과 회개와 새롭게 마음을 다짐하고

예수님과 같이 될려고 무지 애를 쓰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일은 전혀 창세전의 약속 곧 십자가의 죽음과 무관합니다.

21번 손 깨끗하게 씻는다고 죽음과 직결하게 될까요?

 

문제는 우리는 아무리 깨끗하고 거룩하게 행해도

그것이 십자가의 죽음과 연결 되는 법이 없다는 겁니다.

 

거룩을 행하는 것이 거룩과 연결은커녕 더더욱 단절의 갭만 더욱더 커진다는 겁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그 단절성이 더욱더 커지니까 그 결핍이 자신의 신체를 제대로 보게 한다는 겁니다.

그렇다고 해결책도 없고 말입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중간에 낑겨버렸다는 겁니다.

 

(7:24, 개역)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7:25, 개역)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하나님의 법 곧 율법과 육신의 죄의 법 그 사이에 낑겨버린 현실을

말씀이라는 현실이 비로소 보여주니 보게 된 겁니다.

 

즉 예수님이 오시기 전 까지는 이 곤고함 즉 중간에 낑긴줄도 모르고

남보고 손 씻지 않는다고 더럽다고 손씻으라고 했으니

얼마나 웃기는 짖이냐 라는 겁니다.

 

자기는 손 씻지 않으면서

남 보고 손 씻으라고 했으니 말입니다.

 

자기가 열쇠를 쥐고서 안들어가고

남들도 못 들어가도록 막아서는 모습이

 

소위 우리 인간들의 거룩에 대한 의식이다는 겁니다.

제발 성화 되지 마세요

제발 거룩한 행동 하지 마세요

우리가 하는 거룩은 다 엉터리입니다.

왜냐? 백날 해도 바깥은 깨끗하게 했다고 우겨도 안은 거룩은커녕 더 더러움만 쌓이는 겁니다.

이것을 누룩이라고 합니다. 얼마나 확장성이 강한지 확 퍼져버리는 겁니다.

 

그렇다고 그 어떤 인간의 지혜에서 이 문제에 대한 해결책이 있느냐?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 거룩문제를 해결하시고자

가짜 거룩이 말려들도록 더러움으로 오신 겁니다.

즉 불의한 십자가로 오신 겁니다.

 

이것이 누룩의 상대적인 의미로써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거룩입니다.

즉 전혀 거룩스럽지도 않고 더군다나 절대로 절대로 확퍼지는 확장성은 꿈도 꿀수 없는 철저한 단절성입니다.

 

왜냐? 불의 하기 때문입니다.
빛의 자녀 보다 더 지혜로운 것이 불의한 청지기의 모습이다는 겁니다.

어떻게 빛 보다 더 밝게 빛나는 것이 불의한 청지기의 지혜일까요?

왜 이것을 더 나은 확장성이라고 할까요?

 

얼마나 불의하고 불의했으면 즉 부조리 했으면

비로소 안과 밖이라는 그 안의 더러움이 비로소 드러납니다.

 

바로 때려죽어도 가인은 이 선악에서 벗어날수가 없듯이

가인의 제사는 때려죽어도 거룩할 수가 없는 이유가

아벨의 편파적인 제사 곧 부조리한 제사에 걸림돌을 제거할 수가 없게 되는 겁니다.

 

걸림돌! 남을 다리 걸어 넘어뜨리게 하는 시험들게 하는 겁니다.

그 반대는 유익성입니다. 개방성입니다. 걸림돌을 오히려 제거하는 겁니다.

 

그런데 가인은 이 아벨이라는 장애물을 이 얼룩을 지워버리듯이 제거했습니다.

걸림돌을 제거 했으니

이 아벨의 제사만 아니면 자신이 유일한 거룩한 제사가 되는 겁니다.

 

똑같이 예수님이 말씀하신 거룩이 아니면

바리새인의 거룩이 최고의 거룩이 되는 겁니다.

 

그러니 맞물리는 겁니다.

인간의 거룩은 이 맞물리는 짖을 못합니다.

즉 전쟁을 못합니다.
그렇다고 바리새인이 간격을 벌리는 짖을 안하느냐?

지 보다 못한 자에 옆에 가서 간격을 벌리는 겁니다.
그러니 거룩은커녕 이미 그 자체가 반칙이요 부조리죠
그런 부조리에 예수님은 더 큰 부조리로 다가오니

옳타쿠나 예수 너 딱 걸렸어

너와 우리를 대조하면 그 간격은 더 잘벌어지겠지? 라고

지가 알아서 미끼를 넙쭉 무는 겁니다.

그러니 예수님은 더러움으로 오셔야만 하는 겁니다.
그래야 가짜 거룩이 말려드니까 말입니다.

이것이 누룩과 단절의 차이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예수님을 죽이느냐 라는 마음이 새롭게 형성이 됩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심으시는 겁니다.

죄란 인간 스스로가 새롭게 다짐하는 마음이 아닙니다.

오늘은 반드시 죄를 짖고 말 거야? 다짐하고 다짐해야지?

나는 누구를 오늘 반드시 죽이고 말 거야 ? 다짐하고 다짐해야지 복수하고 말꺼야!

이것은 죄 축에도 끼지 못합니다.

 

예수님이 오늘 새롭게 심지 않으면 그거 죄가 아닙니다.

그러니 죄책감이 든다는 것은 다 거짓입니다. 오히려 죄책감이 아니라 누룩입니다. 원한입니다. 억울하다고 분하다고 한풀이를 하는 것이지 죄책감으로 포장할 뿐입니다.

 

죄란 이게 죄 맞구나 라고 의식이 될 정도로 멍청하게 다가오는 죄는 죄가 아닙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게 무슨 죄냐 라는 의식이 들어야 죄 답지요

 

즉 죄란 인간에게 다루어지지 않고

오히려 죄가 인간을 다루는 겁니다.

 

죄가 나보다 강하다는 겁니다.

 

(7:24, 개역)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7:25, 개역)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그렇다면 정작 곤고함에 빠져야 합니다.

곤고함이라는 단절을 느끼는게 아니라

너는 죄 뭔지 모르지? 나는 알거든!! 한 수 가르쳐 줄테니 날 선생취급해라!

이런 식이지

 

거기에 동의하지 않으면 소위 살인의지가 발현케 되는 겁니다.

그 살인의지가 바로 죄입니다.

 

결국 지 혼자 죄가 형성 되는게 아닙니다

반드시 맞물려야 하는 편애가 있어야 합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 이다 라는 하나님의 편파적인 독생자 사랑이 있어야

 

비로소 그 죄가 발현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인간끼리 죄에 대한 지식이 있냐 없냐

너는 모르고 나는 알고 라는 것들이

 

얼마나 웃기는 짖이냐 말이죠

 

그것이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데 꾀게 하는 것 아닙니까?

예수님 보다 인간 쳐다 보라는 소리 아닙니까?

 

이것이 누룩이다는 겁니다. 확장의 기능이 강합니다.

즉 그 어떤 이유로도 모든 인간을 다 장악할 정도이다는 겁니다.

인간에게 아무리 조심하라고 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이미 장악한 상태이니까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심하라 라고 하신 이유는

예수님 자신이 그 속에서 끄집어 내시겠다는 겁니다.

 

 

누룩이 이미 확 퍼져버렸는데 어떻게? 어떻게?

 

~~~~ 떻게?

 

알려드려요?

 

누룩 보다 더 강한 더 확퍼지는 것을 퍼트리면 되는 겁니다.

 

결국 그 모든 것을 다 장악한 그 누룩 위에

더 강한 확장력의 단절을 퍼트리는 겁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오늘 본문에서는 그것이 그 바리새인의 누룩의 확장성 보다 더 강한 확장력이 무엇인고 하니

바로

골방에서 기도하는 겁니다.

그런데 골방에서 기도하며는 소리가 밖에서 듣기질 않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일방적으로 편파적인 해석을 해 버립니다.

골방에서 소리가 나지 않는 소리는 지붕 위에서 온 동네 외치는 소리처럼 전파되는 확장성이다 라고 오늘 본문에 해석을 일방적으로 붙여버리시는 겁니다.

 

감추었는데 들추어진다는 겁니다.

꽁꽁꽁 숨겨서 모르도록 했는데 그것이 오히려 더더욱 알려지는 것이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보니 예수님의 비유 즉 예수님나라의 비유는 다 이런식으로 모르도록 단절시켰는데

그것이 누룩 보다 더 확장력이 빠른 전파력이 강하게 퍼져나간다는 겁니다.

 

도대체 뭘 믿고 이렇게 뻥을 치는 것일까요?

 

이 부분을 어머니랑 나누니까 어머니께서 하시는 말씀이
세미한 음성으로 오신 여호와의 영광 곧 거룩이다는 겁니다.

~~ 아멘 아멘

 

듣낄라 말라 한 소리가

천둥 번개 지진으로 오는 음성 보다 더 명료한 더 확장적인 또렷함 음성이다는 겁니다.

이것이 골방에서의 비밀로써의 기도입니다.

즉 비밀은 단절성입니다.

고끼오 꼬끼오 꼬끼오 차단 차단 차단이 비밀이다는 겁니다.

 

바리새인의 누룩은 이것이 없습니다.

인간의 기도 안 받습니다. 이 단절의 비밀성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넓은 길로 가지 말고 좁은길로 가라고 합니다.

왜 단절의 비밀이기에 그 좁은 길이 없는데 길 자체가 없는 길인데

그 없는 길이 유일한 길이다는 겁니다.

 

회개란 바로 이런 단절성입니다.

인간의 회개 안 받습니다.

회개 지키기 마시고 회개 누리세요 라는 말은

이 단절성이 있냐 없냐 로 누룩이냐 비밀이냐 라는 겁니다.

 

즉 믿음의 개입입니다. 구체적인 인물이 믿음입니다.

믿음이 예수님이다 라고 하니 비밀이 되는데

믿음은 인간인 나도 할 수 있다 라고 여겨버리면 그것은 더 이상 비밀이 아니라 누룩인 겁니다.

전혀 국어문법에 틀리지도 않는데 무슨 비밀이 되겠습니까?

 

그런데 이 말도 안되는 것이 더 확장력이 뛰어나고 전파력이 더 훨씬 크다는 겁니다.

이미 장악한 누룩 보다 더 나은 비누룩이다는 겁니다.

 

이 단절 때문에, 이 비밀 때문에, 이 비누룩 때문에, 이 부정보다 더 부정의 부정 때문에,

 

비로소 안에 있던 것이 바깥으로 확 나와버리게 되는 겁니다.

 

바로 이것이 거룩입니다.

안에 있는 것을 바깥으로
끄집어 낼 줄 모르는 것은 거룩 아닙니다.

 

그렇다고 그 어떤 누구도 이 거룩을 펼칠수 있는 자도 없습니다.

 

아무도 나의 죄를 지적해 줄자가 없다는 겁니다.

 

그러니 곤고한 거죠.

 

 

오호라 오호라

 

비로소 탄식이 나오는 겁니다.

나의 존재 보다 먼저 있었던 탄식 말입니다.

 

탄식은 비밀의 의미입니다.

어떤 다큐를 봤는데 뇌의 신? 이라고 제목 붙이고픈데

신의 뇌 라는 다큐인데

 

골방에서 기도 한다는 의미가

비밀이라는 의미로써 골방인데

비밀은커녕 나 골방에서 기도 했~!!(김국진버전) 라고 오히려 더 더 더 떠벌리게 되니

그게 무슨 비밀이냐 말이죠

 

그렇다고 이 비밀이라는 단절성을 인간의 행함에서 나올수 있으냐?

불가능합니다.

마음판의 할례가 불가능 하듯이 말입니다.

 

이 얼마나 절망입니까?

할례는 영원한 언약인데 이거 행하지 못하면 다 지옥입니다.

그래서 마음 놓고 손할례를 완벽하게 다 했는데

이거 조금이라도 단 한명이라도 빠지면

구약에서 무조건 전쟁에서 졌는데

이제는 완벽하게 했는데 그 손할례 다 쓸데 없다는 겁니다.

마음판의 할례를 하라는 겁니다.

큰일났습니다. 이제 다 지옥입니다.

할례 못하면 다 지옥이니

이 영원한 언약을 무시했으니 말입니다.

어떻게 하실 건가요?

절망이지요 절망

 

그러니 곤고함에 빠지는 겁니다.

죽으라고 율법 지켰는데

율법은커녕 육신의 법만 대따 키웠던 것을 바울이 발견한 겁니다.

이제 우짜지?

 

그런데 반칙처럼 갑자기 8장에서는 결코 예수안에는 정죄함이 없다고 일방적으로 앞뒤 모순적으로 그냥 합격되었다고 선언해 버리는 겁니다.

 

7장끝 부분과 81~ 그 어떤 연결 고리가 없습니다.

오히려 단절 단절 단절만 더 크게 부각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바로 거룩이 입혀졌다는 일방적인 선언이

내 쪽에서가 아닌 예수님 쪽에서 반칙을 벌려서 완료달성 되었다는 것을

바울은 믿음으로 외치고 있습니다.

바울의 믿음이 아니라 바울은 예수님이라는 믿음으로 보고 외치고 있는 겁니다. 비밀입니다.

 

그러니 일찌감치 예수님의 하신 일만 쳐다볼것이지

내 쪽에서 그 어떤 것도 할게 없다는

이 뻔뻔스러움을 드러내도록 되어 있는 겁니다.(4장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이것이 누룩과의 차이입니다.

누륵은 뭐 라도 하긴 해야 한다는 겁니다.

근육도 키우고 근육을 사용해야 하고 개방도 해야하고 그것이 확장이다고 말입니다.

 

누가 확장 아니라고 했습니까? 확장은 확장인데 조심해야할 확장인 거죠.

그거는 모든 사람들이 이미 이 확장된 누룩에 장악이 되었기에

비밀이 될 수가 없습니다. 어렵지도 않고 다 이해할수 있고

다 설득할 수 있는 말입니다.

 

그러나 마땅히 해야 할 말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조심해야 할 것입니다.

조심해야 한다고 해서 우리가 조심할수도 없지만

이미 누룩에 동참이 된 이상 전혀 불가능하지도 않습니다.

 

문제는 누룩과 차이나는 단절이 아니다 라고 주님이 직접 개입하셔서 처음으로 그것이 아니다 라고 말씀해 주신 새로운 거룩이 나타났다는 겁니다, 곧 인물이 비밀이다는 겁니다.

그럼 나 라는 존재는 이제 누락 되어도 상관이 없는 거죠.

이 인물만 비밀이기에 이 분만 드러나면 되는 겁니다.

 

아무것도 할게 없습니다.

 

그러니 자꾸 그럼 이래도 안된다 저래도 안된다 우짜란 말이냐 라고 따지는데

관계성은 행함으로써 형성 되는게 아니라

외부에서의 이런 지적이 바로 감사 즉 사랑 때문이다는 겁니다.

 

아무도 나에게 알려주지 않던 것을 지적해 준 겁니다.
(지적 때문에 곤고함이 비로소 오게 된 겁니다. 바울 뼝 갔죠 뭐)

그렇다면 나에게 없는 거룩을 외부가 홀로 다 이루어서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고조 고조 공짜로 입혀진다는 겁니다.

 

그러니 그 지적을 통해 그 차이를 그 구별를 그 단절을 누리게 되었다는 그 자체가

은혜이다는 겁니다.

 

은혜는 단절입니다.

 

그 둘의 차이를 구별짖는 외부의 작업이 없으면

은혜는 없는 겁니다.

 

그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 라고 선언하신 겁니다.

얼마나 이 비밀이 전파력이 강한지?

하늘에 닿는 소리는 이 소리 밖에 없습니다.

 

벙어리가 찬양하고

소경이 이 비밀되신 예수님을 아무도 못 보는 가운데 유일하게 보고

어린아이가 아무도 찬양하지 않는 가운데 호산나 호산나 주의 이름으로 오신 이여 라고

어른들의 귀를 거스릴정도로 귀에 속속 들어가게 외치는 소리로 소동이 벌어졌다고 하는 겁니다.

 

 

그러니 이 대립된 둘의 충돌 사건을

그것도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

아무것도 모르는 이방인에게

유대인의 낱낱을 까발리는 것은

같이 지적받으면서 이 둘의 차이를 보라는 겁니다.

누가복음의 특징인 거죠.

 

이런 섬기는 모습을 어떤 누가 보여주겠습니까?

 

3번 손 씻기에서 더 나은 과잉인 21번 손 씻기가 섬김입니까?

아니면 백날 손 씻어봐라 깨끗한가? 더러운 안은 누가 씻을래?

아무도 아무도 아무도 없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는 이것이 감사한 겁니다.

그렇게 지적해 주신 주님 말고는 없습니다 라고

 

비로소 내 눈을 뜨게 하신 분은 예수님이라고 말할수 있는 겁니다.

 

이것이 마땅히 할 말입니다.

 

다윗은 정직한 영이 아예 아예 없다고 비로소 곤고함에 빠진 겁니다.

아니 주님이 빠뜨린 겁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곤고함 빠진게 구원의 조건이 아니라

누가 라는 인물의 개입이다는 겁니다.

그 인물 때문에 곤고함에 빠진겁니다. 그가 하셨다는 겁니다.
곤고함 조차도 비밀이 된 겁니다.

그러니 감추어져서 드러나게 되고

숨겨져서 알려지게 되고

세미한 음성으로써 기도하는데 온 우주 하늘에 닿아 다 들리도록 전파되는 겁니다.

 

누룩 보다 더 누룩의 과잉으로써 말입니다.

 

부조리 보다 더 부조리의 과잉으로써 말입니다.

 

 

바깥을 열심히 딱고 있는 다윗을 홀라당 발가벗겨 버리고

안 좀 딱으라 라고 사건에 말려들도록 했습니다.

비로소 곤고함에 빠진 다윗은

내 속에 정직한 영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벙어리가 되어야 비로소 외칠수 있고

소경이 되어야 비로소 볼수 있고

귀머거리가 되어야 비로소 그 세미한 음성이 또렷하게 온 몸과 영과 혼을 떨리도록 생생하게 들리는 겁니다.

벙어리의 외침이 더 확장력이 빨라 하늘에 닿는다는 겁니다.
아니 소리가 단절된 자인데?

소경이 보는 예수님이 그 어떤 시력 좋은 눈 보다 더 나은 눈이다는 겁니다.
아니 어떻게 단절된 눈이, 볼수 없는 눈이 더욱더 마땅히 봐야 할 분을 제대로 보았다는 겁니다.
오히려 눈 있다고? 본다고 하는 자는 못 보는 이것이 단절의 확장 증폭 잉여 곧 은혜성 거룩성이다는 겁니다.

 

주님이 그렇게 하신 겁니다.

 

비로소 뻔뻔스럽게 주님 책임 지세요 라고

그동안 꽁꽁꽁 쥐고 있던 것 다 손 놓아버립니다.

손 놓으니 다 이미 완료된 것을 비로소 보게 되는 겁니다. 지킬것 없이 다 누리는 겁니다.
벙어리가 되는 호사를 누려!! 소경이 되는 호사를 누려!!
죽음을 단절을 누리는 것 뿐입니다. 곤고함을 누리는 겁니다. 이미 감사 속에 놓여져 버렸기에

 

주님이 곤고케 하신, 얼마나 제대로 곤고케 하신 결과로써 나타나는 모습입니다.

 

우물가의 여인이 뻔뻔스럽게 다시는 물 길러 오지 않도록 해 달라고 합니다.

그럼 손 놓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남편 다섯에 여섯 지금 있는 자도 남편 아니니 남편 없다는 말이 맞다고 합니다.

지금 있는 자가 그럼 남편 맞다는 말입니까? 아니면 남편 아니다는 말입니까?

뻔뻔한 우물가의 여인의 거짓말에 예수님은 얼쑤 라고 오히려 추임새를 넣는 겁니다. 옳타쿠나 ~~ ~

 

여인의 입장에서는 그 어떤 남자도 남편이 될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인의 삶이란 남편의 사랑에 좌우된다고 목매이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 우물을 길러 오지 않도록 하게 해 달라는 겁니다.

 

목매이지 않게

목마르지 않게

 

여자가 더 이상 사랑을 갈구 하지 않게

남자 쪽에서 좀 제대로 날 사랑해 줄 수 있느냐 없냐 라는 겁니다.

끝까지 책임져줄 남자는 이 세상에 없구나 라는 곤고함인 겁니다.

오히려 다 저 여자 때문에 선악과를 따먹게 되었다고 도로 뒤짚어

씌우는 것을 이 여인은 격게 된 겁니다.

뭐 율법지킨다고? 오히려 모세에게 이혼을 요구하는 것이 남자라는 겁니다.

더러운 여자라고

그것도 율법 지킨다는 놈들이 다 한결같이 이혼을 요구하는 것이 결국 여자 더럽다고 이혼을 하는 겁니다. 누구 땜에 더러워 진 줄도 모르고 말이죠.

 

예수님은 오히려 더 황당하게 미리 추임새를 넣었습니다.

 

(4:13, 개역)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4:14, 개역)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그래 그렇지? 늘 그렇지?

그카이 내가 목마르지 않게 해 주겠다.

다시는 물 길러 오지 않도록 해 주겠다

 

너가 만난 남자 다 그랬지?

사랑한다 해 놓고서는 다 도망쳤지?

 

그래 내가 너 책임지마 라고 하는 겁니다.

 

그들은 다 누룩이다는 겁니다.

그러나 나는 단절 곧 단절이다 라는 겁니다. 목마름 단절 되었다는 겁니다.

목마름 없음 이다는 겁니다. 목마름 앙대요 라는 겁니다.

 

여자란 결국 남자의 징후물입니다.

사물로 표현해서 기분 나쁘겠지만

어쩔수 없습니다.

성도 곧 교회란 예수님의 징후물입니다.

 

그런데 그 남편이 하나같이 다 시원찮은 놈들 뿐이다는 겁니다.

등쳐먹고 도망치고

이용해 먹고 쓸모없어지면 뱉어버리는 자들이다는 겁니다.

이혼이나 청구하고 그것도 모세에게 말입니다.

 

그런데 약하다 보니

부정하다 보니

그런 놈이라도 아니면 하루 하루를 버틸수가 없는 철처하게 갇힌자 이다는 겁니다.

 

이런 배경으로 깔아놓고

예수님 자신을 드러내시는 겁니다.

 

비로소 자유요 포로됨에서 쇠사슬이 풀리는 겁니다.

 

즉 목마르지 않으면 예수님이 왜 영생수 인줄 알 길이 없도록 하는 겁니다.

 

그런데 유대인은 목마르냐? 전혀요

 

그래서 여인이 의아한 것이 맞습니다. 어찌 유대인인 당신이 사마리아인인 우리에게 물을 달라고 하느냐 말이죠? 그것이 예수님이 누룩이 아니다는 증거입니다.

예수님은 단절이다는 겁니다.

 

그러니 유대인 보다 더 유대인인 예수님이기에

잃어버린 양을 찾으러 오신 겁니다.

유대인 외에는 보냄을 받지 않았다는 겁니다.

 

분명 사마리아인 이잖아요?

유대인 아니잖아요

그렇다고 예수님의 시선에서 유대인은 유대인 맞나요? 누룩인데?

그렇다면 예수님은 이 기록된 말씀도 이루어야 하고 누룩도 조심하고

이 두 가지를 어떻게 해결할까요?

예수님의 숙제는 새로운 유대인 곧 새 이스라엘을 만드시면 되는 겁니다.

결국 예수님과의 새로운 관계에서 새롭게 정립이 되는 겁니다.

 

모세에게 이혼청구해서 율법 지키는 누룩과 차이나는 단절로써

저들의 부조리 보다 더 나은 부조리인 단절로써 이스라엘은 아예 바꿔버리면

저들이 말씀을 지키는 것 보다 더 잘 잘 완료하시는 겁니다.

율법은 남을 사랑함으로써 이루어 지니까 말이죠.

 

(13:8, 개역)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놀랍게도 곤고함이란, 율법을 지키면 지킬수록,

곧 남을 사랑하면 할수록 더욱더 미워한다는 사실입니다. 육신의 법이 그래서 강하다는 겁니다.

 

 

그것을 십자가가 못 박겠다고 오신 겁니다.

나 먼저 박힐께 너도 박힐걸 라고 ㅋㅋㅋㅋ

 

예수님 자신이 영생수면 목마른 자에게만 그 영생수가 의미가 되니 말입니다.

그러니 예수님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서 죄인이 갇힌자가 포로된자가 맞물리지

 

건강한자 의인 자유로운자 율법 잘 지키는자 전혀 필요가 없는 겁니다.

 

그 자유? 다 강요된 선택일 뿐인 겁니다.


이제 본문으로 들어가서 다시 정리해 봅시다.

예수님의 섬김은 나의 누룩을 차단하시는 겁니다. 그것이 나의 누룩과 차이나는 단절입니다. 곧 거룩입니다.

즉 어떻게 나와 차이가 나는지 그 어떤 누구도 지적하지 않는 그 지적이 뭔지 봅시다.

 

거룩 곧 깨끗함에 대한 논쟁이 이제는 확장이 되어서

아예 노골적으로 바리새인에 대한 인물을 공격하십니다.

그들의 외식을 조심하라 라고 그들의 코 앞에서 외칩니다.

 

빨리 죽여라 빨리 죽여 라고 죽음을 아예 보채는 짖만 골라서 하십니다.

만약 우리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예수님의 입을 막아야만 합니다.

? 예수님 살릴려고? 아니지요

나의 목숨까지 위태로워 지니까 말입니다.

제자들의 그런 모습이 우리들도 동일합니다.

 

그런데 이것보다 더 마땅히 할 말도 없습니다.

 

인간은 거룩을 행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게 아니라

성화론자 말 마따나 예수님을 믿고 성령을 받으면 성화 될수 있다 가 아니라

아무리 말씀을 지키고 행해도

죽을때까지 머리부터 발끝까지 우리는 외식함 뿐이다는 겁니다.

 

평생을 살아도 외식에서 벗어날수가 없습니다. 누룩이 온 몸에 퍼져있고 온 세게에 퍼져 가정 사회 국가에 퍼져 잠식당한 상태에 있다는 겁니다.

아무리 새끼를 까고 해도 그들 또한 누룩에 잠식당한채로 태어나는 겁니다.

 

바리새인의 누룩을 조심하라 라고 조심할 필요가 없이 우리 자체가 외식 덩어리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마치 너희는 내가 따로 꿈쳐 놓고서는

오히려 가장 거룩한 자들을 가장 더러운 세균맨들이라고 구별시켰다는 겁니다.

 

그리고서는 일방적으로 무조건적으로 너희는 깨끗하다 라고

안깨끗한데 자꾸 깨끗하다 라고 일방적으로 선언하시는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들과 차별이 내시는 말씀이 저들의 누룩을 조심하라 라는 겁니다.

 

이 말을 또 엉뚱하게 성화론자들이 외식하지 말자

위선적이지 말자 라고 주장합니다.

 

그 말 자체가 위선적인데?

 

차라리 위선자가 되는게 낳습니다.

제 말은 뭘해도 다 죄요 다 위선입니다.

이미 위선적인데 새삼스럽게 위선자 될 필요는 없습니다.

의미는 이겁니다.

저들과의 구별성입니다.

단절성입니다.

예수님의 일방적인 조치로 저들과의 차이성이 바로 바리새인의 누룩을 조심하라 라고 하신 겁니다.

 

아니 우리도 바리새인과 뭐가 다릅니까?

 

그런데 다릅니다. 우리 자신을 인간과 인간끼리의 비교에서는 전혀 다른 것이 단 하나도 없지만

 

주님쪽에서 다르게 구별시킨 작업이 바로 믿음이라고 합니다.

 

분명 출애굽기에서 성경 본인이 모세는 도망쳤다고 라고 기록해 놓고서는

히브리서에서는 성경 본인이 모세는 도망치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 간격 무슨 수로 좁히겠습니까?

 

이게 비밀이라니깐요

간격 좁히면 안됩니다.

단절을 개방하면 앙~~대요~~

 

왜 주님의 흔적을 왜 지웁니까?

얼룩을 왜 지우냐 말이죠?

얼룩 자체가 그림인데

완벽한 완료된 그림인데

 

그림을 배리는 얼룩이라굽쇼? 아닙니다.

얼룩이 진짜 그림이고

전체그림은 이 얼룩을 드러내기 위한 배경일 뿐입니다.

 

그러니 바리새인의 거룩이 이 얼룩을 제거하게 위한 배경으로 활동을 해 줘야

이 얼룩이라는 그림이 제대로 된 그림으로써 드러내는 겁니다.

 

그러니 백날 쳐다봐도 십자가가 밝히 보이지

바리새인의 거룩이 아무리 큰 지면으로 차지해 본들

이 얼룩을 쳐다보는 시선을 빼앗을수가 없는 겁니다.

 

누가 꾀더냐 말이죠?

 

그러니 얼룩이 더욱더 잘 보이기 위해서는

바리새인의 외식이 배경으로 깔려야 하는 겁니다.

 

그 정도로 바리새인의 외식이 배경의 그림으로써 끝내주게 잘 그렸음에도 불구하고

이 얼룩 하나 보다 못하다 라는 겁니다.

 

십자가가 모든 시선을 몰입시킬정도로 눈을 장악해 버리는 겁니다.

 

그러니 바리새인은 더더욱 미쳐 날뛰는 겁니다.

이 얼룩을 어떻게 하면 제거하느냐?

 

오늘 본문에 그런 바리새인의 마음에, 불 난 집에 기름 붓듯이

더더욱 살기를 심어넣고자

예수님은 그 간격을 더욱더 벌려 버리는 겁니다.

 

누가 멘붕일까요?

 

바리새인이 멘붕이 됩니다.

 

(12:2, 개역)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은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나니

(12:3, 개역) 이러므로 너희가 어두운 데서 말한 모든 것이 광명한 데서 들리고 너희가 골방에서 귀에 대고 말한 것이 집 위에서 전파되리라

 

감추는 비밀은 감추기 위함이 아니라 드러내기 위함이요
숨은 것은 알려지지 않기 위함이 아니라 알려주기 위함이다는 겁니다.

 

그래서 어두운데서 말한 골방의 기도는

결국 집 위에서 동네방네 떠들어대고 전파하는 것과 같다는 겁니다.

 

반대 급부가 도리어 과잉성이다는 겁니다.

본다고 하니 더욱더 못보는 소경이고

소경은 오히려 또렷하게 예수님이 누구인가를 제대로 보는

제논역설처럼 토끼는 절대로 거북이를 이길수 없다는 겁니다.

누룩은 이 단절을 이길수 없다는 거죠.

큰소리기도 울부짖고 눈물 회개 금식은 여호와의 불(거룩)을 붙이는게 아니라

도리어 제단에 물 뿌리고 불이 도저히 붙을수 없도록 단절 시킨 것이 여호와의 불이 붙게 되었다는 겁니다.

 

존재의 필연성 보다 비존재의 비필연성이 존재의 존재보다 더 과잉존재요 필연보다 더 필연적인 과잉 필연이다는 겁니다.

 

단절도 그런 의미인 겁니더.

 

그러기 위해서 반드시 어설픈 거룩과 되도 않는 의로움등이 맞물려야 그 배경으로 깔리면서

반드시 대조의 간격이 확연하게 차이남으로써 드러나는 겁니다.

 

고만 고만 한 것 끼리 비교해서는 선명하게 또렷해지지 않습니다. 명료해야 하는 겁니다.

 

그래서 바리새인은 예수님이 가는 곳 마다 시비를 걸어 주어야만 합니다.

바리새인이 그러고 싶어서 태어난게 아니라

예수님을 드러내기 위해서 그 짖을 할 수 밖에 없도록 예수님이 그렇게 조치하신 겁니다.

 

 

결국 비밀이란 마치 보잘 것 없고 비천하고 더러운 것을 뻥튀기 기계 안에 집어넣어서

과잉품으로 만들어 버리면

그 간격이 인간이 손 댈 수 없는 영역으로 완전제품이 되는 겁니다.

그리기 위해서 비교제품들이 나열되는데 그것이 바리새인인 겁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피로 이룬 완전제품입니다. 손 댈게 더 이상 없습니다.

그러나 누룩은 퍼트려도 퍼트려도 더욱더 결핍이 생겨 더 완벽하게 지켜야 한다고 좀처럼 만족할수 없는 밑빠진 독에 물붓기 라는 배설물 채우기 짖을 하고 있는 겁니다.
백날 동일성 동질 일치성을 추구해도 헛짖입니다.

 

(12:2, 개역)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은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나니

(12:3, 개역) 이러므로 너희가 어두운 데서 말한 모든 것이 광명한 데서 들리고 너희가 골방에서 귀에 대고 말한 것이 집 위에서 전파되리라

 

여기서 바리새인의 제사와 예수님 제사의 차이점입니다. 즉 거룩 대결입니다.

바알 아세라 제단과 엘리야의 제사와 같습니다.

 

크게 부르짖고 자신을 희생하는 제사에 대립된 엘리야는 반대로 물을 부어서 불을 붙이겠다는 겁니다.

 

이 단절성 불을 붙일려면 물을 붓는게 아니라 그 반대로 기름을 부어야 하기에

정성과 전심으로 기도드려야 할 것 아닙니까?

 

그런데 그렇게 되면 그게 무슨 비밀이냐 말이죠,

 

비밀은 골방이 오히려 더 잘 들리고

감추어진 것이 더 또렷하게 드러나고

숨은 것은 더 잘 알려진다는 겁니다.

 

이게 말이 됩니까?

 

골방이 오히려 스피커 앰프를 얻은 것처럼 증폭기가 된다는 겁니다.

?

비밀성 단절성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비밀성을 다 상실한 자들이 바로 바리새인이고

그들의 누룩을 조심하라는 겁니다.

 

비밀이 없어요 비밀, 단절이 없어요 단절

 

이들에게는 비밀(단절)이 없기에 망한 겁니다.

 

(고후 4:18, 개역)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간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

 

(11:3, 개역)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아니 눈에 보이는 인간에게 미쳤다고 하니 얼마나 웃기는 소리입니까?

결국 눈에 보이는 인간은 자신에게만 미쳤다는 겁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예수님에게 미쳤다는 소리를 들어본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눈에 보이는 것에 두려워 하는 겁니다.

 

네 맞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이 두렵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바로

영원 이라는 보이지 않는 것으로써 나타난 바이다면

 

우리는 미리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더욱더 가져야 할 것입니다.

아니 저절로 그렇게 됩니다.

 

(12:4, 개역) 내가 내 친구 너희에게 말하노니 몸을 죽이고 그 후에는 능히 더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12:5, 개역) 마땅히 두려워할 자를 내가 너희에게 보이리니 곧 죽인 후에 또한 지옥에 던져 넣는 권세 있는 그를 두려워하라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를 두려워하라

 

네 목숨을 앗아갈 자를 두려워 할게 아니라

마땅히 지옥에 넣져 넣을 자를 두려워 하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골방에서의 기도가 지붕 위에서 스피커 메가폰을 들고 외치듯이 더 외치는 원리처럼

지옥에 던져 넣을 자를 두려워 한다면

눈에 보이는 내 목숨을 능히 충분히 넉넉히 죽이는 자를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내 목숨? 에라이 가져가라

그게 그렇게도 중요하니?

그렇게도 심각한 거니?

에라 가져가라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데
뭐가 심각한데?
뭘 꼬실려고? 목숨? 가져가 가져가!!

아니 십자가가 어떻게 보입니까? 보이지 않는 것인데 그것이 밝히 보인다고 합니다.

아니 누가 십자가가 밝히 보이지 않는다고 두려워 하는 자가 이 세상 천지에 누가 있겠습니까?
그 정도로 우리는 누룩에 장악 당한 겁니다.
그래서 그 죽음 보다 강한 사랑이 곧 단절입니다.
오죽하면 이 단절에 나는 동참했지요? 라고 엘리야 조차도 단절시켜 버리는 단절의 단절이 되어 버립니다.
왜냐? 7천명 이라는 남은자가 먼저 계획에 있었지
내 열심이 특심이오니 나만 남았나이다 가 먼저 있지 않았씁니다.
그것은 오히려 이 명료한 밝히보이는 십자가를 도로 흐릿하게 하고
자꾸 앞에서 아른거려서 못보도록 하는 가리우는 짖을 하는 겁니다.

밝히 보이는 것이 먼저 있었던 십자가의 용서 곧 원인 없는 결과로써의 7천명 남은자인데
자꾸 원인 있는 결과로 내 열심히 특심이라는 창세전에 생명책에 기록되지도 않은 것을 자꾸 들이대기에
엘리야 조차도 누락시켜 버리는 겁니다.
7천명이 와야만 엘리야는 거기에 후차적으로 덧붙여지는 겁니다.
그정도로 단절의 확장 증폭성 7천명성 이다는 겁니다. 원인 없는 결과의 확장성입니다.
 

정작 내 영혼을 지옥에 던지시는 분을 두려워 하라 라고

마땅히 외쳐야 할 말을 외치게 되는 겁니다.

 

갈바를 알지 못하는게 인생입니다.

마땅히 외쳐야 할 것도 뭔지 모르는게 인생입니다.
그 정도로 수에 칠 가치가 없는 것이 인생이기에
가치 있는 유일한 것만 남기고자 하는 비밀(단절)을 보라는 겁니다.
방언도 폐하고 예언도 폐하고 다 폐하고 최종적으로 남게 되는 7천명과  같은 의미의 남은자 남는 것은
사랑(단절) 뿐이다는 겁니다.(고전13장)
그래서 단절때문에 동원이 되는 것이 방언 예언 지식이라는 페하여질 것들입니다.
부분적인 것은 온전한 것이 오면 폐하여 지는 것들입니다.

(고전 13:8, 개역) 『사랑은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아니하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고전 13:9, 개역) 『우리가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고전 13:10, 개역)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고전 13:11, 개역)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고전 13:12, 개역)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고전 13:13, 개역)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엘리야도 요나도 다 부분적인 것으로써 온전한 비밀로써의 예수님이 오면
그는 흥하고 나는 폐해야만 하는 것이기에
심각할게 전혀 없습니다.
그러니 누가 꾀더냐 말이죠.
십자가라는 비밀이 그 단절의 삼일의 간격이 또렷한데 누가 그 빈터에 넙쭉 앉냐 말이죠?
빈터 그 자체로써 충분히 완료된 것인데

누가 그것을 자꾸 결핍이라고 부족하다고 꾀더냐 말이죠.
열심히 특심인데 뭔가 잘못된게 아니냐 라고 누가 꾀냐


그래서 정작 유대인 보다
 

처음부터 단절된 그런 이방인 곧 주의 이름이 뭔지도 모르는 이방인은

마치 골방에서의 외침이 전세계 전 우주에 퍼지듯이

주의 이름을 세계 만방에 외치게 되었고

 

유대인은 마땅히 할 말인 주의 이름을

아무리 고함 지르고 큰소리로 부르짖어도

하나도 들리지 않고

전파되지도 않으며

보이지도 알려지지도 않는 겁니다.
예수의 이름을 때려죽어도 부르지 못하는 겁니다.

 

이것이 거룩이 입혀진자와 거룩을 지키는자와의 차이입니다.

두 인간 끼리의 비교가 아닌

정작 둘은 도토리 키 재기일 뿐이지만

 

예수님의 개입으로 인해

이 간격은 벌어지는 겁니다.

이 단절이 바로 거룩입니다.

 

 

이 단절성이 아니면

우리는 예수님을 단지 영웅으로 이용하는

나 자신을 위한 우상일 뿐입니다.

 

그것이 우리를 대표해서 바리새인이 지적을 받는 겁니다.

이 누룩을 조심하라 라고 말입니다.

 

왜 죽음을 재촉하시는 겁니까?

 

사실은 그 반대입니다. 바리새인 곧 우리 인간이 스스로 지옥을 재촉하는 셈입니다.

왜 그렇게 지옥에 가고 싶어서 안달을 하는 인간인지!!

 

그 정도로 우리는 어두운 눈입니다.

 

그러니 대신 울어야 할 탄식

 

곧 마땅히 해야 할 말 곧 탄식이 없으면

마귀의 까부듯이 하는 송사를 넘어설 자는 아무도 없는 겁니다.

 

 

 

 

 

 

 

 

 

 

 

 

 

 

 

 

 

 

 

 

 

 

 

 

 

 

 

 

미치도록 제거하고픈 얼룩 되기 (11:37-54)

2014/04/06 12:05 in 성령행전(피활동,인간극복)


깨끗함(거룩)에 대한 논쟁 (11:37-54)


(11:37, 개역) 예수께서 말씀하실 때에 한 바리새인이 자기와 함께 점심 잡수시기를 청하므로 들어가 앉으셨더니

(11:38, 개역) 잡수시기 전에 손 씻지 아니하심을 이 바리새인이 보고 이상히 여기는지라

(11:39, 개역) 주께서 이르시되 너희 바리새인은 지금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나 너희 속인즉 탐욕과 악독이 가득하도다

(11:40, 개역) 어리석은 자들아 밖을 만드신 이가 속도 만들지 아니하셨느냐

(11:41, 개역) 오직 그 안에 있는 것으로 구제하라 그리하면 모든 것이 너희에게 깨끗하리라

(11:42, 개역) 화 있을진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의 십일조를 드리되 공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버리는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아니하여야 할지니라

(11:43, 개역) 화 있을진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회당의 높은 자리와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을 기뻐하는도다

(11:44, 개역) 화 있을진저 너희여 너희는 평토장한 무덤 같아서 그 위를 밟는 사람이 알지 못하느니라

(11:45, 개역) 한 율법사가 예수께 대답하여 가로되 선생님 이렇게 말씀하시니 우리까지 모욕하심이니이다

(11:46, 개역) 가라사대 화 있을진저 또 너희 율법사여 지기 어려운 짐을 사람에게 지우고 너희는 한 손가락도 이 짐에 대지 않는도다

(11:47, 개역) 화 있을진저 너희는 선지자들의 무덤을 쌓는도다 저희를 죽인 자도 너희 조상들이로다

(11:48, 개역) 이와 같이 저희는 죽이고 너희는 쌓으니 너희가 너희 조상의 행한 일에 증인이 되어 옳게 여기는도다

(11:49, 개역) 이러므로 하나님의 지혜가 일렀으되 내가 선지자와 사도들을 저희에게 보내리니 그 중에 더러는 죽이며 또 핍박하리라 하였으니

(11:50, 개역) 창세 이후로 흘린 모든 선지자의 피를 이 세대가 담당하되

(11:51, 개역) 곧 아벨의 피로부터 제단과 성전 사이에서 죽임을 당한 사가랴의 피까지 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과연 이 세대가 담당하리라

(11:52, 개역) 화 있을진저 너희 율법사여 너희가 지식의 열쇠를 가져 가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또 들어가고자 하는 자도 막았느니라 하시니라

(11:53, 개역) 거기서 나오실 때에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맹렬히 달라붙어 여러가지 일로 힐문하고

(11:54, 개역) 그 입에서 나오는 것을 잡고자 하여 목을 지키더라


빛 곧 등불을 등경 위에 두지 등경 아래에 두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 부분을 어떤 교수님이 저에게 물었는데

오히려 저보다 더 잘 아실텐데

도로 물으시니 이해가 안 갔습니다.

등경 곧 등잔에 대한 이해 문제였는데

형광등처럼 위에서 아래로 비추여야 하는데

왜 아래에서 위로 비추냐 라는 오해였습니다.

그냥 쉽게 생각 하면 됩니다.

위냐 아래냐 라는 위치 문제가 아니라

빛의 기능인 어두움을 드러내느냐, 어두움을 들추어내지 못하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그래서 등잔 위에 꼿이가 있다면 거기에 꼿아서 고정 시켜서

그 다음인 즉 빛의 기능인 어두운 곳을 비추이는 의미입니다.

등잔 아래에 둔다면 빛의 기능을 발휘치 못하게 하는 것이니

등불을 꺼뜨리는 것이니 불빛을 끄지 않기 위해

위에 둔다는 것이죠.

결국 빛이 기능이 다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는 겁니다.

동일하게 소금도 짠 맛의 기능입니다.

만약 짜다 라는 기능이 없다면(즉 상하지 않게, 부패, 더 이상 썩지 않게)

의미가 없다는 겁니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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