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장해도 안생겨요 ~~~~

 


화장을 한다는 것은 가면을 쓴다는 것인데

나의 민낯을 그대로 보여줄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남성언어인 시스템의 사고방식과는 다르게

여자들은 수시로 변하는 가면을 매일매일 쓰고 있다.

 

? 민낯이라는 자신의 얼굴이 원래 없기 때문이다.

 

아니 얼굴이 없다. 가면 자체가 얼굴이다

아니 여자란 없다.

 

시공간을 처음부터 상실당한 채로 태어난 잉여물이다.

얼굴 없는 미녀인 것이다.

 

마치 지혜로운 4가지 동물처럼

자신의 약함을 알기에 강한자에게 굽신거리기 때문이다.

자신의 부정함을 알기에 말이다.

 

이 모습이 지혜롭다고 우기는 자 보다 훨씬 더 지혜로운 모습니다.

 

그나 저나 다말은 어떻게 기생의 모습으로 0.03초만에 유다를 뿅가게 했을까?

~~~ 떻게 자신에게 약속(언약)이 없음을 알고 유다를 유혹할려고 했을까?

그 언약에 굽신거렸을까? 눈치 봤을까?

 

(18:1, 개역)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아야 될 것을 저희에게 비유로 하여

(18:2, 개역) 가라사대 어떤 도시에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고 사람을 무시하는 한 재판관이 있는데

(18:3, 개역) 그 도시에 한 과부가 있어 자주 그에게 가서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 주소서 하되

(18:4, 개역) 그가 얼마 동안 듣지 아니하다가 후에 속으로 생각하되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고 사람을 무시하나

(18:5, 개역) 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 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 하였느니라

(18:6, 개역) 주께서 또 가라사대 불의한 재판관의 말한 것을 들으라

(18:7, 개역)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저희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18:8, 개역)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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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조(종말) 속에서는 반드시 그냥 죽는 죽음이 없다

 


생명 자체가 자신의 생명을 드러내기 위한 도착성으로써

반드시 맞물리도록 하는 인간들이 애쓰며 숨기고자 했던 것을 드러낸다.

 

2살 밑으로 죽은 아기의 죽음 조차도

라헬이 위로받기를 거절했다는 것 조차도

 

철저한 생명의 자작극을 위한 것이였다.

 

죽음이 아니고서는 생명을 설명할 길이 없기에 ...

 

십자가 십자가 무한 영광일세 ~~~

(23:28, 개역) 예수께서 돌이켜 그들을 향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23:29, 개역) 보라 날이 이르면 사람이 말하기를 수태 못하는 이와 해산하지 못한 배와 먹이지 못한 젖이 복이 있다 하리라

(23:30, 개역) 그 때에 사람이 산들을 대하여 우리 위에 무너지라 하며 작은 산들을 대하여 우리를 덮으라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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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죄인이란 시공간을 상실당한 자이다
.

시공간이 주체를 형성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머리 둘 곳 없으신 예수님을 만난 순간

 

시공간은 사라져 버린다.

 

허걱

 

주여 저는 죄인 입니다.

 

나를 떠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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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의한 청지기는 정작 머리둘곳 없는 자의 눈치를 봅니다.

그러나 빛의 아들들은 그런 불의한 청지기를 정죄하기 바쁜거죠

 

욥은 비로소 머리둘곳 없는 자의 눈치를 보고서

비로소 시공간을 상실당한 죄인이 됩니다.(비로소 자유인이 됩니다.)

 

정작 눈치 볼 자에게는 눈치를 못보고

엉뚱한 관상쟁이의 눈치를 보듯이

우리는 생활합니다.

 

내 목숨을 빼앗을 자를 눈치보지 말고

내 영혼을 지옥불에 떨어뜨릴 자인 머리 둘곳 없던 분의 눈치를 볼 생각은 아예 없는 거죠

 

그렇게 굽신 굽신 거리는 목이 곧은 우리이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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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 둘 곳 없으심

 


시간과 공간이 주체를 형성한다

 

시공간이 없으면 주체가 없다.

 

시공간이 있는 자는 눈치를 본다.

 

그런데 시공간이 없으면서도 눈치를 보는 자가 있다.

 

 

예수님이다.

 

(14:36, 개역) 가라사대 아바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15:34, 개역) 제구시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지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를 번역하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그리고 지혜로운 4가지 동물

 

그리고 기생으로 화장한 다말이다.

 

불의한 청지기처럼

 

눈치볼 필요도 없는데 눈치를 보는 것은

너희들은 엉뚱한 곳에 눈치를 보고 있다는 상대적인 차이성이다.

 

어떻게 작은 것에 충성치 않는데 큰 것에 충성하며

어떻게 불의한 재물에 충성치 않는데 참재물에 충성하겠느냐 이다.

 

정작 예수님이 죄인으로써 십자가에 충성하셨듯이 말이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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