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자와 므나 비유(천국) 그리고 잉여싸움

 

(19:10, 개역)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19:11, 개역) 저희가 이 말씀을 듣고 있을 때에 비유를 더하여 말씀하시니 이는 자기가 예루살렘에 가까이 오셨고 저희는 하나님의 나라가 당장에 나타날 줄로 생각함이러라

(19:12, 개역) 가라사대 어떤 귀인이 왕위를 받아 가지고 오려고 먼 나라로 갈 때에

(19:13, 개역) 그 종 열을 불러 은 열 므나를 주며 이르되 내가 돌아오기까지 장사하라 하니라

(19:14, 개역) 그런데 그 백성이 저를 미워하여 사자를 뒤로 보내어 가로되 우리는 이 사람이 우리의 왕 됨을 원치 아니하노이다 하였더라

(19:15, 개역) 귀인이 왕위를 받아 가지고 돌아와서 은 준 종들의 각각 어떻게 장사한 것을 알고자 하여 저희를 부르니

(19:16, 개역) 그 첫째가 나아와 가로되 주여 주의 한 므나로 열 므나를 남겼나이다

(19:17, 개역) 주인이 이르되 잘 하였다 착한 종이여 네가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하였으니 열 고을 권세를 차지하라 하고

(19:18, 개역) 그 둘째가 와서 가로되 주여 주의 한 므나로 다섯 므나를 만들었나이다

(19:19, 개역) 주인이 그에게도 이르되 너도 다섯 고을을 차지하라 하고

(19:20, 개역) 또 한 사람이 와서 가로되 주여 보소서 주의 한 므나가 여기 있나이다 내가 수건으로 싸 두었었나이다

(19:21, 개역) 이는 당신이 엄한 사람인 것을 내가 무서워함이라 당신은 두지 않은 것을 취하고 심지 않은 것을 거두나이다

(19:22, 개역) 주인이 이르되 악한 종아 내가 네 말로 너를 판단하노니 너는 내가 두지 않은 것을 취하고 심지 않은 것을 거두는 엄한 사람인 줄을 알았느냐

(19:23, 개역) 그러면 어찌하여 내 은을 은행에 두지 아니하였느냐 그리하였으면 내가 와서 그 변리까지 찾았으리라 하고

(19:24, 개역) 곁에 섰는 자들에게 이르되 그 한 므나를 빼앗아 열 므나 있는 자에게 주라 하니

(19:25, 개역) 저희가 가로되 주여 저에게 이미 열 므나가 있나이다

(19:26, 개역) 주인이 가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릇 있는 자는 받겠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19:27, 개역) 그리고 나의 왕 됨을 원치 아니하던 저 원수들을 이리로 끌어다가 내 앞에서 죽이라 하였느니라

(19:28, 개역)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앞서서 가시더라

 

 

 

바리새인이 하나님 나라가 언제 오냐라고 질문한 부분에서

주님은 반드시 거치는 것이 있다고 했습니다.

 

(17:20, 개역)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17:21, 개역)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즉 이 말은 저들은 거치지 않고 하나님나라를 또는 부활을 근접하고자 하는 거죠.

 

주님이 먼저 거치시는 것을 거치면 망에 걸려져서 차단과 단절이 가시화 됨을 보게 됩니다.

 

(17:25, 개역) 그러나 그가 먼저 많은 고난을 받으며 이 세대에게 버린 바 되어야 할지니라

(17:26, 개역) 노아의 때에 된 것과 같이 인자의 때에도 그러하리라

 

(17:37, 개역) 저희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어디오니이까 가라사대 주검 있는 곳에는 독수리가 모이느니라 하시니라

 

 

누가 봐도 취하셨어요처럼

누가 봐도 저 사람은 천국 당연히 갈 사람이다 라고 한 자들이

그 차단망에 걸려져서 검열당해 단절당하고

 

누가 봐도 저 사람은 절대로 천국 갈 자가 아니다고 여겼던 자들이(소문난 악인 삭개오)

주님이 거치신 그 공로로 인해 (인자의 고난, 간격벌리기)

나중 된 자가 먼저 되고

창기 세리 강도가 천국에 먼저 들어가게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멀쩡한 베드로 조차도 세번 부인케 만들어 죄인이 되게 하심으로서 

그 간극을 통해
주님이 찾아오심으로써, 악인 만들어 용서 하시는 겁니다. 

베드로 쪽에서는 이런 주님의 일하심에 일방적으로 당할 뿐입니다.

 

이것을 잉여 라고 합니다.

잉여란 무의미한 겁니다.

가치가 없는 무가치 한 것입니다.

찌끄레기 쓰레기 부스러기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하나님 나라를 설명하는데 기가막히다입니다.

환자야 말로 의사를 제대로 설명하는데 기가막힌 재료가 되는 겁니다.
건강한 자를 가지고서는 의사가 어떤자인지를 설명할 길이 없는 겁니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는 누룩과 같다고 한 말씀을 살펴봤습니다
.

 

(13:20, 개역) 또 가라사대 내가 하나님의 나라를 무엇으로 비할꼬

(13:21, 개역) 마치 여자가 가루 서 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 하셨더라

 

누룩이 보잘 것 없는 아주 미약한 수에 칠 가치도 없을 정도로 아주 작은 겁니다.

그런데 이 아주 보잘 것 없는 작은 것이

엄청나게 발효가 되어서 갑자기 큰 것을 이루는 그 확장력 증폭성 잉여성이 엄청나다는 겁니다.


갑자기 그 간극이 극과 극으로 벌려졌다는 겁니다.


죽은태가 어떻게 만국의 어미가 될까요? 그것도 엄청난 간극으로써 말입니다.

마치 겨자씨 만한 조그마한 씨앗이 큰 나무가 되어서 많은 열매를 맺고

또 많은 새들이 둥지를 틀수 있는 보금자리를 형성해 주더라 라는 겁니다.

이렇듯 하나님 나라는 처음에는 무가치한 모습으로 취급받는

철저한 단절성을 보이다가

그 이후에는 엄청나게 큰 유익을 주는 모습을 하나님나라가 이와 같다는 겁니다.


간극이다는 겁니다.

 

이런 의미에서 오늘 본문을 살펴보면

유명한 비유죠

마치 마태복음의 달란트 비유와 동일합니다.

누가복음과의 차이는 역전입니다. 종말의 상황에서는 유대인이 구원이 아닌 유대인이 정죄한 이방인이 잉여물 전리품이 된다는 겁니다.

오히려 유대인은 주님의 전쟁의 전리품이 되길 싫어했고 오히려 정면 도전하는 애굽과 같은 모습이였다는 겁니다.


누가복음에서는 이 잉여성으로써 간극을 말함으로서 희년의 대상물로 작용한다는 겁니다.

처음부터 이방인을 희년의 대상으로 삼았다는 겁니다.

마태복음은 유대인을 의도적으로 건드리는 식이고 말입니다.

 

있는 자는 더 받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긴다 라는 결론으로 하나님나라를 므나비유로 설명합니다.

 

자 그런데 먼저 이 비유를 하신 이유가 나옵니다.

예수님의 활동을 지켜보는 자들이

예루살렘 근처에서 이루어지고 있고

예루살렘을 향하고 있으니

그로인한 하나님 나라가 당장 임할 것 같다는 생각들이 많기에

이런 비유를 하고 있다는 겁니다.

 

즉 이런 생각이 잘못 되었다는 취지에서 므나비유를 드시는 겁니다.

 

왜냐하면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한 사고방식으로 저들은 하나님나라를 생각한 겁니다.

오늘날로 치면 교회 중심으로 한 사고방식으로 우리들은 천국을 생각한 겁니다.

 

인간 중심의 천국이지

예수님 중심의 천국이 아니였던 겁니다.

그래서 간격을 벌리는 비유가 바로 므나 비유입니다.

마치 먼저 인자의 고난이 있어야 한다는 것처럼 간격을 벌리는 겁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그 사고방식을 거부하는 천국비유로써 므나비유를 드시는 겁니다.

 

그러니 정반대죠

 

므나 비유 곧 달란트 비유가 누구에게 가장 적합한고 하니

성화론자들이 이 비유에 대해서 아주 아주 자신만만해 합니다.

그 정반대 인데 말입니다.

 

참 고맙게도 저들은 그 생각을 고칠 의향이 없습니다. 절대 안고쳐집니다.

제발 그냥 그 생각 그대로 계속 하세요 라는 취지입니다.

 

니캉 내캉 우리끼리만 므나비유 알제잉 라는 식입니다. 그러니 수수께끼 비밀입니다.

 

므나비유는 정작 잃어버린 자에게만 해당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또 오해하기를 잃어버림자 되자, 거지 나사로 되자 라고 나올 수밖에 없지요.

잃어버림은 교리 플러스 실천 개념이 아닙니다.

그냥 그렇게 태어난 겁니다. [그 자체]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어려우면

제가 20년 전 쯤에 들었던 유명한 설교 독수리로 태어났다던 이근호목사 친구의 설교였습니다.

훨씬 몇 배나 더 뛰어난 설교 였음에도 불구하고

지금은 완전 거꾸로 되어서 그 반대가 되어버렸습니다.

그 정도로 접근불가입니다.

 

잃어버림을 인간이 구성해 낼 수가 없습니다.

제가 지금 지젝 책을 읽고 있는데

애네들 쪽 애들이 이 잃어버림을 구성해 볼려고 무지 애를 쓰고 있는데도 안됩니다.

성화론쪽이기 때문에 백날해도 안 됩니다.

 

그 자체인데 무슨 수로 합니까? 그 자체 인 척 하는 것이 최선의 모습 밖에 안되는거죠.

심지어 사도바울처럼 되자 까지 할 정도로 의미를 파악했습니다.

 

이정우 쪽(니체 계열)도 마찬가지입니다. 성화론쪽인데

잃어버림 즉 소수자 되기(들뢰즈) 뭐 어린아이 되기 백날 해도 안됩니다.

오로지 근처에 한 번 가보겠다는 심뽀인데 안되는 거죠.

니체는 아예 자기가 예수 이다 라고 할 정도인데도 역시나 안 되는 겁니다.

 

즉 잃어버린 자 만이 유일한 천국비유에 합당한 천국백성에 합당한

잉여성이기 때문입니다.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말이죠.

 

잉여성은 남겼다 라는 겁니다.

무조건 이유 없이

원인 없이 무조건 남겼다 라는 겁니다.

 

(19:26, 개역) 주인이 가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릇 있는 자는 받겠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19:27, 개역) 그리고 나의 왕 됨을 원치 아니하던 저 원수들을 이리로 끌어다가 내 앞에서 죽이라 하였느니라

 

그렇다면 상대적으로 못 남겼다 라는 쪽이 있고

그들은 원인을 반드시 이유 있음으로 찾고 있는 셈이지요.

 

이 잉여성을 가장 잘 보여주는 자들이 바로 이스라엘입니다.

 

육에서 나지 않았다는 겁니다.

육적인 통로가 아니다는 겁니다.

남녀의 성교로 인해 태어나지 않은 인간이면

 

그것이 인간입니까? 비인간 입니까?

 

그런데 이스라엘이 스스로 육을 택하고 이스라엘을 버림으로써

인간이 되어 버렸습니다.

 

여기에 그냥 끝나버리면 참으로 좋을련만

이스라엘과의 언약 곧 약속의 역사

역사 라고 표현하면 또 성화론자들이 좋아라 하니까

아예 단절의 용어 약속의 묵시를

주님은 안 포기하기 때문에

인자로 이 땅에 오십니다. 즉 비인간입니다.

 

이스라엘 스스로가 포기해 버린 비인간 말입니다.

그러니 인자의 고난을 반드시 필수입니다.

 

비인간이기 때문에 졸지에 얼룩으로써 표가

티가 나도, 너무 너무 티가 나 버리기 때문에

얼룩을 제거하고자 하는 주변의 역사가

이 비인간을 가만히 두지 않기 때문입니다.

할례도 그런 의미입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악마의 세계는 이 미끼를 물게 되는 겁니다.

욥은 미끼였습니다.

 

예수님을 드러내는 도구로써 반드시 그 이전의 악마의 속성을 같이 드러내는 미끼였던 겁니다.

 

왜 미련한 복음입니까? 무의미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에

반드시 의미가 있고 가치가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욥을 너무 너무 똑똑한 자리에서 미련한 자리로 곧 십자가의 자리로 끌어내려놓는 겁니다.

 

마치 인간 자체가 육덩어리 자체가 할례 당하니까? 여기 저기서 덤벼드는 겁니다.

 

 

그래서 잃어버린 자를 찾으러 오신 겁니다.

의사만이 찾는 자 말입니다.

 

잃어버림이란 짝꿍이라는 기능을 들추어내도록 되어 있습니다.

공명인데 죄인에게만이 구원자가 의미가 있듯이

건강한 자에게는 무의미 합니다. 미련 합니다. 어리석습니다.

 

결국 잃어버림이란 상대방의 되찾음의 기능을 말해줍니다.

되찾음의 대상물이 잃어버린 자입니다.

되찾는 자는 그럼 누구입니까?

 

 

그런데 졸지에 천국도 하나님도 뭐뭐도 다 인간의 대상물이 되어버렸고

인간이 그만 주체가 되어 버렸기에

 

욥을 간격벌리게 하는 겁니다.

 

결국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이스라엘 된 자들입니다.

 

결국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음은 무엇과 공명을 이루는 겁니다.

네 맞습니다. 미련한 십자가의 공로와 공명 짝꿍을 이루는 겁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이 아무것도 한 것이 없는 이스라엘 개념을

본인들 스스로가 차버리듯이 하는 행동이 바로

 

믿음의 정반대인 행함으로 자신들을 철저하게 방어막으로 쳐 버렸다는 겁니다.

온 몸에 칭칭 감아서 말이죠.

 

어리석은 십자가의 지혜와 졸지에 원수가 되어버린 겁니다.

 

그래서 에수님이 이스라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보냄을 받지 않았다 라는 이 말씀에

유대인들 본인들이 부합이 될 줄 알았는데

전혀 안 맞고

(오히려 십자가를 거부합니다. 실족, 거리끼게 하고 걸림돌이 되니까 말입니다.)

 

(10:6, 개역) 차라리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

 

(15:24, 개역)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신대

 

(10:5, 개역) 예수께서 이 열둘을 내어 보내시며 명하여 가라사대 이방인의 길로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말고

(10:6, 개역) 차라리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

(10:7, 개역) 가면서 전파하여 말하되 천국이 가까웠다 하고

(10:8, 개역) 병든 자를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리며 문둥이를 깨끗하게 하며 귀신을 쫓아내되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10:9, 개역) 너희 전대에 금이나 은이나 동이나 가지지 말고

(10:10, 개역) 여행을 위하여 주머니나 두 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 이는 일꾼이 저 먹을 것 받는 것이 마땅함이니라

(10:11, 개역) 아무 성이나 촌에 들어가든지 그 중에 합당한 자를 찾아내어 너희 떠나기까지 거기서 머물라

(10:12, 개역) 또 그 집에 들어가면서 평안하기를 빌라

(10:13, 개역) 그 집이 이에 합당하면 너희 빈 평안이 거기 임할 것이요 만일 합당치 아니하면 그 평안이 너희에게 돌아올 것이니라

(10:14, 개역) 누구든지 너희를 영접도 아니하고 너희 말을 듣지도 아니하거든 그 집이나 성에서 나가 너희 발의 먼지를 떨어 버리라

(10:15, 개역)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날에 소돔과 고모라 땅이 그 성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10:16, 개역)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

 

(15:21, 개역) 예수께서 거기서 나가사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들어가시니

(15:22, 개역) 가나안 여자 하나가 그 지경에서 나와서 소리질러 가로되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히 귀신들렸나이다 하되

(15:23, 개역) 예수는 한 말씀도 대답지 아니하시니 제자들이 와서 청하여 말하되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보내소서

(15:24, 개역)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신대

(15:25, 개역) 여자가 와서 예수께 절하며 가로되 주여 저를 도우소서

(15:26, 개역) 대답하여 가라사대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15:27, 개역) 여자가 가로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니

(15:28, 개역)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시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

(15:29, 개역) 예수께서 거기서 떠나사 갈릴리 호숫가에 이르러 산에 올라가 거기 앉으시니

(15:30, 개역) 큰 무리가 절뚝발이와 불구자와 소경과 벙어리와 기타 여럿을 데리고 와서 예수의 발 앞에 두매 고쳐 주시니

(15:31, 개역) 벙어리가 말하고 불구자가 건전하고 절뚝발이가 걸으며 소경이 보는 것을 무리가 보고 기이히 여겨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라

(15:32, 개역)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 가라사대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 저희가 나와 함께 있은지 이미 사흘이매 먹을 것이 없도다 길에서 기진할까 하여 굶겨 보내지 못하겠노라

(15:33, 개역) 제자들이 가로되 광야에 있어 우리가 어디서 이런 무리의 배부를 만큼 떡을 얻으리이까

(15:34, 개역)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떡이 몇 개나 있느냐 가로되 일곱 개와 작은 생선 두어 마리가 있나이다 하거늘

 

전혀 안맞을 것이다 라고 단정내린 개같은 이방인들이

잃어버린 양 유대인과 부합이 되더라 말입니다.

 

그런데 성화론자들이 괜히 성화론자들이겠습니까?

맞다 싶으면 바로 실행에 옮깁니다.

 

그런데 행함이 불가능한 영역이 있습니다.

바로 이것을 주님은 건드리십니다.

부자청년에게 어릴적부터 행하여 온 그 율법 지킴을 다 버려 보라고 합니다.

못하죠 그것 버리면 자기는 무의미한 존재가 되어버리는 겁니다.

바로 그겁니다. 무의미

의미 없음이 될 수 없다 라는 겁니다.

 

잃어버림 조차도 인간은 행함으로 반드시 실천할려고 합니다.

그것이 대표적인 것이 불교 곧 종교 중의 최고의 종교 불교입니다.

교리 플러스 실천입니다.

무를 실천하는 종교입니다.

무 의미없음 무가치 무의미 조차도 교리로 만들고 그 교리를 다시 실천화 하는

 

그런데 잃어버림은 실천 자체가 필요가 없음 그 자체입니다.

버림받음은 되 찾음과의 짝꿍을 이룹니다.

 

고아 과부 나그네 는 희년과 짝꿍을 이루는 겁니다.

 

자 이러면 더더욱 고아 과부 나그네를 더더욱 교리화 하고 그 교리에 따르는 실천을 이룰려고 합니다.

 

그런데 잃어버림 자체가 바로 십자가입니다.

 

하나님의 저주입니다.

 

엘리 엘리 라마사박다니 어찌하여 나를 버리십니까 라는 겁니다.

 

이것은 모든 인간의 구원 단절입니다.

하나님의 저주 이니까 말입니다.

 

나는 손에 가시 찔려 온 몸을 떨고 있는데

정작 그는 나의 죄악 때문에 온 몸이 갈기 갈기 찢기는 창과 못에 박히는 모습이다는 겁니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각기 제 길로 가는데

우리의 허물을 그에게 감당시키는 겁니다.

 

왜 저주 받아야 하느냐입니다.

나야 백날 저주 받아 천부당 만부당하지만

왜 죄 없으신 분이 왜 저주를 그것도 남의 허물 때문에 받아야 하느냐 하는 점입니다.

 

이것이 얼룩입니다.

모든 시선을 다 뻬앗아 버리는 겁니다.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 겁니다.

그 앞에서 나 조차도 잊어버릴 정도입니다.

 

어느정도로 응시적이냐 하면

내가 가장 사랑하는 나 조차도 잊어버릴 정도로 응시물로 작용하는 겁니다.

 

비로소 간극이 벌어지는 겁니다.

 

(15:24, 개역)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신대

 

우리의 잃어버림은 그야말로 의미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다고 하시는가?

 

그것은 예수님 자신의 기능 때문입니다.

잃어버림이란 되찾음과 짝을 이루는 겁니다.

즉 예수님 자신의 의미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자체는 의미 없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과 약속한 하나님 자신이 자신이 한 약속에 의미를 두시기 때문입니다.

 

일만달란트 탕감 받은 자는 그 정도로 무가치하고 의미없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많이 탕감받은자가 많이 사랑하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관계성입니다. 짝꿍이라는 공명 때문입니다.

울림입니다. 퍼져나가는 잉여성입니다. 무한반복의 잉여입니다.

 

잉여는 의미 없음 만이 반복 됩니다. 그것도 무한반복입니다.

 

가치 있음은 고정화 되어버려서 더 이상 반복이 되지 않습니다.

 

진리란 변하지 않기 때문에 불변하기 때문에 진리가 아니라

진리란 변하는 것이다 라는 겁니다.

진리란 변하는 것으로써 불변하다 라는 것입니다.

 

인간 중심의 진리는 불변하다입니다. 영생불멸

그래야 인간 자신이 불멸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배신을 때리고 진리가 수시로 요랬다 조랬다 하면

인간의 투사성은 다 망하지는 겁니다.

중세신학의 신중심은 사실상 사제중심이며

그 사제중심을 위한 신을 차용한 인간중심인 셈입니다.

그런 중세철학이 바로 근대철학(인간중심)의 토대가 되는 겁니다.

 

진리가 얼마나 비인간적인지

인간의 불멸성을 완전 단절시켜 버리는 겁니다.

 

그럼 잉여성은 뭐냐?

죄인이 계속 죄만 양성하기에 죄만 남는 겁니다.

죄인은 죄만을 낳을 뿐이다는 겁니다.

이것이 잉여성입니다.

 

죄인이 의를 양산할 수 없다 라는 단절이 그 간격이 바로 잉여성이다 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죄인은 죄인 스스로가 낳는게 아니라

바로 구원자 의사가 이 죄인을 낳는다 라는 겁니다.

그 간격 속에서 무한 반복의 잉여성이 반복이 된다는 겁니다.

 

즉 단절인데 계속적으로 단절의 단절을 낳는다는 겁니다.

점점 그 간격은 극과 극으로 벌어지는 겁니다.

 

잉여란 결국 점점 그 간격을 극과 극으로 무한대로 벌리는 겁니다.

 

왜 이런 하나 마나 한 짖을 하시는 것일까요?

얼마나 무의미 합니까?

 

이유는 자살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이 엉뚱한 답변 ㅋㅋㅋ

 

인간은 성공해 버리면 자살합니다.

너무 근접해 버렸기 때문입니다.

 

 

실패로 돌아가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그 간격만이 잉여 곧 오늘 본문의 충성된 종입니다.

 

남겼다 라는 잉여는

임금과의 관계성인 그 자체입니다.

 

뭘 해도 잉여는 그 관계성의 불변함입니다.

즉 잉여는 한 므나를 열 사람에게 각각 한 므나 씩 주었다 하더라도

그 관계성 때문에 잉여적이다는 겁니다.

설사 남기지 못했다 하더라도 말입니다.

관계성 때문에 말입니다.

즉 편파해석으로 무조건 남겼다고 취급해 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임금이기를 원치 않는 자는

절대로 남기지 못하는 겁니다.

관계성이란 예수님 쪽에서 임금 되심 곧 주 되심이지

우리가 주로 삼고자 해도 주님이 임금되어 주지 않겠다고 도망쳐 버리면 소용이 없습니다.

 

자 그런 의미에서 이 본문이 중요합니다.

잉여성 곧 부스러기는 무조건 남겨질 수밖에 없는 것이 쓰레기 찌끄래기입니다.

간격이 보통 벌어져도 벌어진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나만 홀로 남았나이다 내 열심히 특심이라서 라고

나 혼자가 졸지에 칠 천명이 되었습니다.

어딜 감히 번데기 앞에서 주름 잡냐 말이죠

 

이 잉여성이 간극입니다. 보통 간극이 아닙니다.

인간 도토리 키 재기 하듯이

십의 이조 드렸고 이레에 두 번 금식했고 저 세리와 같지 않았나이다 라는 간극이 아닙니다.

 

세리는 정작 고개도 못 들고 주여 불쌍히 여겨주옵소서 라고 그 보이지도 않는 간극을

하나 마나 한 간극을 실감했습니다. 직시 했습니다.

 

인간 도토리 키 재기의 십의 이조 이레에 두 번 금식은

나는 전혀 심판하질 못합니다.

나를 지옥으로 보낼수 없는 것들은 나를 구원할 수도 없는 것들입니다.

나를 위해 대신 십자가를 진 적도 없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일만달란트의 간극은 비로소 나를 지옥고 천국도 보내는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의 잉여 곧 잃어버림과 되찾음의 간극이다는 겁니다.

 

이 본문을 가지고 얼마나 사기를 치는지

달란트 비유를 통해서 할수 있다 라는 가능성을 부어주고 있습니다.

이것이 사제중심 곧 인간중심의 천국비유가 되는 겁니다.

성화론은 결국 인간중심사상입니다. 인간 자신의 구원

남 구원은 안되고 자기는 그 어떤 이유도 없이 무조건 구원이 되어야 한다는 식입니다.

 

그런데 이것들은 나를 지옥에 보낼수 없는 간극들입니다.

단절 정도가 될려면 적어도 7번 용서로는 안되는 겁니다.

7번 용서는 용서 축에도 끼이질 못한다고 연변총각이 말합.

 

초과잉성의 간극이 되어야 적어도 간극이라고 붙일수 있다는 겁니다.

 

잃어버림과 되찾음의 간극은 초과잉적으로 크면 클수록

많이 탕감받은자가 많이 사랑합니다.

자 그런 의미에서 서로 서로 크게 할려고 또 인간들은 싸움을 할 것이 번하기에

실제로 제자들이 서로 크다 라고 했듯이

아예 간극 그 자체가 되도록

십자가의 피 흘리심으로 결과를 못 박아버렸습니다.

원인 없는 결과입니다.

우리는 이유 없이 초과잉의 간격을 누가 크냐 할 것 없이

모조리 다 그 피 흘리심 앞에서 감히 입을 띨 수 없도록 되어 있습니다.

욥이 그래서 재를 뿌리고 자기생일을 저주한 겁니다.

 

http://www.youtube.com/watch?v=iew0mahxrUU

 

억수르 라는 개그 코너에서 퀴즈왕 상금이 천만원이라고 하니까

출연자 한 사람당? 아니죠 1등이 천만원이다고 하니

참 소박하다 라는 겁니다. 즉 상금 축에도 끼이질 못하다 라는 겁니다.

그래서 정말 웃끼는 개그 프로 보다 더 웃끼는 퀴즈프로그램이다는 겁니다.

 

우리 연변에서는 상금 축에서 끼이질 못한다 라는 겁니다.

백데나리온은 빚 축에도 끼일질 못하는 겁니다. 그것 가지고 신경 쓰면 우을증으로 자살하도록 되어있습니다. 화병 돋죠.

적어도 일만달란트 16만년 일에도 못 갚는 빚 정도가 되어야 빚이라고 할 수 있습네다.

 

부끄러운 구원이라고 롯을 한국교회가 비아냥거리는데

얼마나 구원을 얍잡아 봤으면 그럴까요?

마치 백데나리온 띠먹고 도망친자를 옥에 가두는 자의 모습이

한국교회의 모습 같습니다.

일만달란트 탕감을 무시하니까 말입니다.

쪽팔리는 구원이 되지 않게 하기 위해 성화론을 펼치겠다는 고집입니다.
쪽팔리는 것이나 부끄러운 것이나.
막살면 안된다는 것이나.
그래서 거지나사로 되기를 해야 한다고 하는 것이나,

모조리 다 십자가를 모독 하는 겁니다.

 

즉 의미 없다 라는 겁니다. 가치있는 것을 하겠다. 의미있는 것을 하겠다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악한 세대가 요구하는 표적 곧 유대인들에게는 거리낌이 없는 의미 있는 거죠.
그리고 헬라인 이방인에게는 의미 있는 지혜 똑똑함 슬기로움이다는 겁니다.

나만 남았나이다 (표적) 라는 것이 의미 있다 라고 주장하고 픈 겁니다.

그러나 요나의 표적은 그것 조차도 [의미 없다] 라는 겁니다
.

의미 없게 만들어 버린 것이 진리입니다.

 

참 의미 없다 마이너스 땡 탈락입니다.

 

즉 정반대의 [의미 있다] 라는 것을 붙잡겠다고 나서는 것이

인간 중심의 교회입니다.

의미있고 가치있고 무능하지 않고 수준높고 그런 것들을 챙기겠다는 겁니다.

배설물로 똥칠하겠다고 아예 선포하는 셈이지요.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 식입니다.

 

잃어버림과 되찾음의 간극이 아예 없습니다.

초과잉적으로 벌어져야할 간극이 없는채

십자가의 죽음 뒤에는 바로 부활이다는 식이니까

십자가는 지나갔으니 이제 그만 죄인 죄인 죄인 카고

부활의 성도 답게 살아야 한다는 사기를 치는 겁니다.

 

그것이 기껏 도토리 키 재기하듯이

나는 저 세리와 같지 않음을 감사합니다.

그 증거로 십의 이조 드리고 이레에 두 번 금식하고

그딴거를 내세우는 겁니다.

 

의미없는 똥떵어리 배설물인데

자꾸 의미 있다고 내세우는 겁니다.

 

(1:12, 개역)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그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뇨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1:13, 개역)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나의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1:14, 개역) 내 마음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하나니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하였느니라

(1:15, 개역)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눈을 가리우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니라

 

자 이렇게 단절되었기에

갇혀 버렸기에

 

잃어버린 자는 주님 쪽에서 새롭게 만드시고

또 되찾음으로써 그 간격을 실감케 하심으로써

그 잉여성을 크게 하는 겁니다.

 

갚을수 있는 빚은 빚이 아니듯이

보답할수 있는 사랑은 사랑이 아닙니다.

그냥 일방적으로 퍼부을 뿐입니다.

 

주는 것이나 잘 받아 누리면 될 뿐입니다.

 

그리고 이 므나 비유는 구약의 여호와의 전쟁과 연관됩니다.

거룩한 여호와 전쟁은 무조건 이유없이 이기도록 되어 있습니다.

즉 잉여입니다. 무조건 남기도록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어려운게 아니라 너무 너무 쉽습니다.

너무 쉽기 때문에 불가능성입니다.

 

마치 쓰레기 곧 찌끄래기를 남기는 것은

구지 쓰레기 될테야 라고 해서 남기는 쓰레기가 아닌

쓰레기 자체가 쓰레기를 양산하는 식으로

누룩처럼 퍼진다는 겁니다.

죄악보다 더 크게 퍼지는 것이 용서의 은혜입니다.

 

 

가만히 두면 됩니다.

그런데 인간은 그 빈자리 빈공백을 견디지 못합니다.

반드시 얼룩을 제거 하고 싶어서

쓰레기 치울려고 나서다 보니

방해꾼 노릇을 하는 겁니다.

결국 본인이 그렇게 치울려고 나서다가 본인이 그 쓰레기 자체

찌끄래기 자체가 되면 됩니다.

실천할 필요가 없이 그 자체로써 말입니다.

 

구약의 거룩한 여호와의 전쟁이 바로 그런 식입니다.

전쟁은 여호와께 속했습니다.

여기에 유일하게 동참 참예케 된 이스라엘은

그 전쟁의 결과를 원인 없이 그냥 누리는 증상 징후물로써 나타나는 겁니다.

 

어떻게? 바로 전리품으로써 말입니다.

 

이것이 잉여물입니다.

무조건 남도록 되어 있습니다.

 

본인이 죄인으로써 포로되었고 갇혔고 억눌린 자로써

불쌍히 여겨달라고 요청함으로써

구원자가 의미가 있는 겁니다.

 

그렇다면 항상 전리품으로써 잉여를 누리도록 되어 있다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전쟁에 자동적으로 참예함으로써

여호와의 솜씨를 보고 누리고 박수치고 찬양할 뿐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악한 종은

이 여호와의 솜씨를 자랑하기 싫어서

그냥 땅에 묻습니다. 그리고 그냥 한 므나 그대로 남겼다고 주는 겁니다.

얼마나 똑똑합니까?

장사해서 망할리도 없고

그렇다고 남겨서 이윤을 남기지도 못했지만

안전빵으로 손해 보지는 않았고

 

그런데 이런 사고방식이

전리품에서 나오는 사고방식이 아니다 라는 겁니다.

잉여의 사고방식

무조건 은혜

이유없는 은혜

원인 없는 결과로써의 은혜가 아닌 사고방식이기 때문에

 

이 종은 왕의 임금 됨에 관심이 없다는 겁니다.

 

종은 왕의 주 되심

왕의 왕 다움에만 신경 쓸 뿐입니다.

 

그런데 종이 자기의 안위를 생각했다는 자체가

이미 종이 아닌 겁니다.

 

? 너무 너무 똑똑한 거죠.

얼마나 독자적입니까?

얼마나 똑똑합니까? 임금이 필요가 없이 알아서 혼자 다 하는 겁니다.

관계성이 뭐가 필요합니까? 어린아이같이 만져주심도 필요가 없고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겨주소서 라고 할 필요도 없이
혼자 다 알아서 하는데 무슨 관계성이 필요합니까?

의인들이지요.

죄인만이 관계성 곧 구원자가 필요하고
환자만이 의사가 필요한 관계성의 기능인 겁니다.

건강한 자에게는 필요가 없는 겁니다.

 

관계성으로서의 므나입니다. 잉여입니다. 
관계성으로서의 잃어버림 입니다. 왜? 되찾음의 간극이 있어서 말입니다.

어떤 관계인가를 말하는게 므나입니다.

그런데 이 악한 종은 므나가 일종의 실천 개념입니다.

교리 플러스 실천으로 본 겁니다. 바리새인과 똑같습니다.

 

어떤 관계인가를 말하는 잉여 곧 므나는

간격, 간극을 말하는 것이지

자신의 단도리를 위한 므나가 아닌 겁니다.

그러니 자기 단도리를 위해 일단은 잃어버리지는 않고

원금 그대로 주는 것이 현명하다는 겁니다.

그 위험한 장사를 할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얼마나 이 잉여를 무시했으면

이 관계를 무시했으면

잉여는 무조건 이유 없이 남기도록 되어 있는데

이것을

이 잉여를 하나의 교리로 보고 교리 플러스 실천으로 보고

실천 가능한 것은 과잉포장하고

실천 불가능한 것은 원금 그대로 남기겠다는 심뽀인 겁니다.

한국 교회가 모두 이단인 이유가 이런 이유입니다.

저나 한국교회나 이단 안되겠다는 심뽀인 거죠

오히려 이단 중의 이단이 되어야 하는데 말입니다.

정통이든 이단이든 이들로부터 마귀 소리를 들어야 마땅한데 말입니다.

 

쓰레기 찌끄래기는 그 자체로써 저절로 계속 잉여로 남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쓰레기가 이제는 유익이 되니까

갑자기 교리 플러스 실천화 시켜야겠다고

예수님을 임금 삼고자 따라 잡습니다.

예수님은 도망치십니다.

먹고 배부른 까닭이다고

너무 너무 똑똑하다고

 

잉여란 관계성인데

자신들이 임금 삼고자 스스로 백성이 되겠다는 겁니다.

여기서 무슨 잃어버림과 되찾음의 간극이 있습니까?

인간들만의 판단으로 충분히 임금이 세워지고도 남을텐데

 

이것이 바로 인간들이 바라는 표적과 지혜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런 악한세대가 요구하는 표적을 쳐버리고

이방인들이 구하는 너무 너무 똑독한 지혜를 쳐버리는

 

요나의 표적과 어리석은 십자가의 지혜 방식으로써

잉여라는 관계 곧 간극인 믿음을

 

저런 행함과 대조를 이루면서 하나님 나라는 증거되는 겁니다.

 

바로 이런 인간의 신앙 곧 인간의 믿음인 종교성을 깨뜨리면서

그 속에서 나오는 믿음으로써

그 차이를 드러내는 것이 므나 비유인 겁니다.

 

나의 믿음을 가짜로 규정하지 못하는 므나비유는 가짜인 거죠.

 

자 그래서 구약의 거룩한 여호와 전쟁은

신약에서는 잉여싸움으로 증거됩니다.

잉여란 어느 것이 더 초과잉적이냐 라는 겁니다.

 

너의 되도않는 믿음이 간극 답냐 (7번 용서, 나만 남았나이다. 악한세대가 요구하는 표적)

아니면 나의 어리석고 무의미한 십자가의 피흘림이 진자 제대로 된 간극이냐?

(770번 용서 일만달란트 탕감, 7천명 남은자, 요나의 표적)

 

누가 간극이냐 라는 간극 자체가 인물이 되는 겁니다.

잉여(남은 것) 찌끄래기 무가치하게 보이는 지혜 자체가 인물이 되는 겁니다.

 

다들 안식일 거룩하게 지키기 주일성수 하기 등으로

채플린 따라하기 대회를 하고 있는 겁니다.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켜서 뭐하게요?

자기 구원입니다.

탐욕이요 우상숭배죠

 

주일성수 해서 뭐하게요?

자기 구원이 목적인 겁니다.

탐욕이요 우상숭배입니다.

 

그런데 채플린 본인 그 자체가 채플린 따라하기 대회에 참여하니가

얼마나 무가치 했으면 땡 탈락 했습니다.

 

안식의 주인이 오니까 안식일 지키는 자들로부터 죽임을 당하는

참으로 어리석고 미련한 모습이 된 겁니다.

 

그런데 이것이 제대로 된 간극을 보여주는 겁니다.

 

우리의 어두운 눈이 그를 채찍질 한 것이였습니다.

 

주님은 그럴 줄 알고 다가오신 겁니다.

 

너희들 쪽에서 다가오는 것은 다가오는 축에서 못 끼인다고 말이죠.

주님 쪽에서 다 그럴 줄 알면서도 다가오신 겁니다.

 

므나 비유는 바로 인간의 악한 표적을 구하는 심뽀와 맞물리면서

남기는 전리품 만들기입니다.

 

너가 바로 나의 전리품이다 라고 말입니다.

 

 

그것도 모르고 우리는 잃어버린 자리를 무시한채

나 보다 못 한 사람 붙들고 간극벌렸다고 자랑질 하는 도토리 키재기를 하는 겁니다.

 

이런 갇혀버림 속에서 빼내실 무조건 승리자는 예수님 뿐입니다.

 

주여 제발 우리를 다만 악에서 구하여 주옵소서 ~~~~~~~

 

이것이 종과 임금의 관계를 말하는 므나 비유입니다.

 

늘 시험 속으로 늘 악으로 집어넣어서 갇힌바 포로된 바 속에서

 

마땅히 구할 바를 구하게 하시는 겁니다.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 ~~~~~

 

 

 

 

 

 

 

 

 

 

 

 

 

 

 

 

 

 

 

 

 

 

 

소문난 악인(죄인) 삭개오 집에 들어가 대접받는구나 (19: 1-10)

 

(19:1, 개역) 예수께서 여리고로 들어 지나가시더라

(19:2, 개역) 삭개오라 이름하는 자가 있으니 세리장이요 또한 부자라

(19:3, 개역) 저가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되 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 할 수 없어

(19:4, 개역) 앞으로 달려가 보기 위하여 뽕나무에 올라가니 이는 예수께서 그리로 지나가시게 됨이러라

(19:5, 개역) 예수께서 그 곳에 이르사 우러러 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시니

(19:6, 개역)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거늘

(19:7, 개역) 뭇사람이 보고 수군거려 가로되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도다 하더라

(19:8, 개역)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 배나 갚겠나이다

(19:9, 개역)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19:10, 개역)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19:7, 개역) 뭇사람이 보고 수군거려 가로되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도다 하더라

(19:7, 공동) 이것을 보고 사람들은 모두 "저 사람이 죄인의 집에 들어가 묵는구나!" 하며 못마땅해 하였다.

(19:7, 쉬운) 사람들은 이것을 보고 모두 수군거렸습니다. “저 사람이 죄인의 집에 묵으려고 들어갔다.”

(19:7, 킹흠정) 그들이 그것을 보고 모두 수군거리며 이르되, 그가 죄인인 사람의 손님이 되려고 들어갔도다, 하더라.

(19:7, 한글킹) 무리가 그것을 보고 모두 수근거리며 말하기를 "그가 죄인과 더불어 손님이 되어 들어갔도다."라고 하더라.

(19:7, 현대인) 사람들은 이것을 보고 `저분이 죄인의 집에 들어가 대접을 받다니' 하며 모두 수군거렸다.

(19:7, 현대어) 그러나 군중은 `그분이 소문난 죄인의 집 손님이 되시다니' 하고 투덜거렸다.

(19:7, 가톨릭) 그것을 보고 사람들은 모두 저이가 죄인의 집에 들어가 묵는군.” 하고 투덜거렸다.

 

 

 

죄인 곧 율법에 근거한 악인은 경계 대상 1호가 되는 겁니다.

그들과 접촉 만남 사귐 대화를 한다는 것은

곧 거룩한 말씀인 율법을 거스리는 행동인 것과 동일한

결국 악인과 함께 하는 악인이 되는 것입니다.

율법이 그 근거가 되는 겁니다.

 

악인을 쫒지 말며

악인과 함께 하지 말며

악인과 갈라서라 라는 것이 율법입니다.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그 율법 곧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을

누가 아주 아주 본으로 누가 어기고 있는고 하니 바로 예수님입니다.

 

율법을 어기고 거스리는 예수님 이다는 겁니다.

? 악인과 함께 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바리새인이 놓칠 리가 있겠습니까?

 

? 하필이면 안식일날 당신의 제자들은 이삭을 잘라 먹느냐?

왜 율법을 어기느냐 라고

바리새인 바로 코 앞에서

아예 시비를 걸으라고

율법 어겼다는 그 증거를 아예 알리바이를 형성해 줄려고

오히려 예수님 쪽에서 더 노골적으로 제발 잡아라 잡아라 율법 어긴 증거 여기 있잖아

잡아라 잡아라 잡아라 ~~~~~~~(커져라 커져라 커져라) 궁민

 

(12:1, 개역) 그 때에 예수께서 안식일에 밀밭 사이로 가실새 제자들이 시장하여 이삭을 잘라 먹으니

(12:2, 개역) 바리새인들이 보고 예수께 고하되 보시오 당신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다

 

하지 말아야 할 일을 일부러 더 하고 있는 겁니다.

 

왜 이렇게 예수님은 하나 마나 한 아무 [의미 없는] 일을 일부러 하심으로써

저들의 [의미] 있다는 것에 상대적인 반대를 위한 반대를 펼치실까요?

 

결국 상대적으로 누가 율법과 자기자신을 동일시 하고 있습니까?

 

오늘 본문에는 뭇사람들 이라고 했습니다.

늘 제가 바리새인 곧 유대인의 대표성으로 표현한 바리새인이라고 했는데

오늘 본문은 뭇사람들 즉 대부분의 군중이라는 의미인데

좀더 세밀하게 말하면

 

아주 아주 적나라하게

이 소문난 악인 삭개오 빼고 모든 인간인 셈입니다.

 

x-1(삭개오)=뭇사람들

 

[의미 있음] 이라는 뭇사람들 곧 율법과 자신을 동일시 할려는 자들

[의미 없음] 이라는 삭개오의 대립으로써 예수님은 그 둘 사이 가운데서 자신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율법을 의도적으로 어기시면서 이 [의미없음]을 통해

간극을 만들고 있습니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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