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를 깨뜨리는 소동케 하는 복음 (19:28-40)

 

(19:28, 개역)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앞서서 가시더라

(19:29, 개역) 감람원이라는 산의 벳바게와 베다니에 가까이 왔을 때에 제자 중 둘을 보내시며

(19:30, 개역) 이르시되 너희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아직 아무 사람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의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너라

(19:31, 개역) 만일 누가 너희에게 어찌하여 푸느냐 묻거든 이렇게 말하되 주가 쓰시겠다 하라 하시매

(19:32, 개역) 보내심을 받은 자들이 가서 그 말씀하신 대로 만난지라

(19:33, 개역) 나귀 새끼를 풀 때에 그 임자들이 이르되 어찌하여 나귀 새끼를 푸느냐

(19:34, 개역) 대답하되 주께서 쓰시겠다 하고

(19:35, 개역) 그것을 예수께로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나귀 새끼 위에 걸쳐 놓고 예수를 태우니

(19:36, 개역) 가실 때에 저희가 자기의 겉옷을 길에 펴더라

(19:37, 개역) 이미 감람 산에서 내려가는 편까지 가까이 오시매 제자의 온 무리가 자기의 본 바 모든 능한 일을 인하여 기뻐하며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여

(19:38, 개역) 가로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 하니

(19:39, 개역) 무리 중 어떤 바리새인들이 말하되 선생이여 당신의 제자들을 책망하소서 하거늘

(19:40, 개역)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이 사람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지르리라 하시니라

 

 

평화는 조용하고 평안하고 쉼이 있고 안정감이 있고 다들 좋아라 하는 그런 의미입니다.

그런데 이 평화를 깨는 것이 뭔고 하니 바로 평화 그 자체입니다.

 

평화가 평화를 깨뜨리는 겁니다.

 
인간의 평화는 어떻게 이루어졌는고 하니

평화 라는 이상, 교리, 법을 실천으로 달성한 교리 플러스 실천입니다. 법 실천입니다. 곶 질서죠.

그러나 진짜 평화는 바로 그런 가짜 평화를 깨뜨리는 전쟁 그 자체로써

평화 그 자체는 실천이 필요가 없는 그 자체로써 평화를 깨뜨리는 평화 입니다.

질서를 깨뜨리는 새로운 질서입니다.


그렇다면 잉여 곧 간극은 더욱더 벌어지는 겁니다.

제사 보다 더 나은 [더 나은 제사]. 곧 제사 보다 [순종]이듯이 말입니다.
번제를 원치 않고 [인애와 자비]를 원하듯이 말입니다.

(호 6:6, 개역)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막 12:33, 개역) 『또 마음을 다하고 지혜를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또 이웃을 제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전체로 드리는 모든 번제물과 기타 제물보다 나으니이다』

(히 10:1, 개역) 『율법은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요 참 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 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든지 온전케 할 수 없느니라』


(히 10:5, 개역) 『그러므로 세상에 임하실 때에 가라사대 하나님이 제사와 예물을 원치 아니하시고 오직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하셨도다』

(히 10:6, 개역) 『전체로 번제함과 속죄제는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히 10:8, 개역) 『위에 말씀하시기를 제사와 예물과 전체로 번제함과 속죄제는 원치도 아니하고 기뻐하지도 아니하신다 하셨고 (이는 다 율법을 따라 드리는 것이라)』


왜 자꾸 가짜 평화와 진짜 평화로 둘로 갈라서 헷갈리게 하느냐? 라고 말하는 자가 많습니다.

놀랍게 가짜 평화가 하는 짖들이 바로 

나만 남았나이다. 내 열심이 특심인데 나만 남았나이다 라고 우깁니다.(엘리야)

용서 7번 했는데 몇 번 더 할까요?(베드로)

어릴적 부터 율법 지켰는데 무엇을 더 하여야 영생을 얻겠습니까?(부자청년)
저 실로암 소경은 날때 부터 소경인데 자기 죄입니까? 부모 죄 입니까?(죄를 연구하는 신학박사)

즉 되도 않는 도토리 키 재가의 간극벌리기 입니다. 악한세대가 요구하는 표적이요 지혜입니다.
인간의 제사 입니다. 율법 지켰다는 거죠. 

여기에 복음은 요나의 표적과 어리석은 지혜 입니다.
사랑은 더 나은 제사 곧 순종입니다.
초과잉적 간격 벌리기 입니다. 번제가 아닌 인애와 자비 입니다.

곧 초과잉의 쓰레기 취급으로써 찌끄래기에서 무한반복의 잉여를 창출하는 겁니다.


나만 남았다에 7천명을 대립 시키는 겁니다.

백데라니온에 일만달란트를 대조 시키는 겁니다.

7번 용서에 7에 70을 대조 시킵니다.

남들은 다 버려도 나는 절대로 안버립니다 에 닭 울기전에 세 번 부인을 대조시킵니다.

이것이 바로 3일의 간극 입니다.


이 꼬끼오 꼬끼오 꼬끼오 라는 간극 속에서 진짜 잉여 곧 무한반복의 초과잉이 나오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이스라엘의 처음자리 곧 무조건적인 이유없는 용서, 원인 없는 결과의 피흘리심입니다.

이것이 자기부인이다는 겁니다.

어떻게 자기부인이 무조건적인 승리가 되는 겁니까?

무능함이(젖먹이, 어린아이) 무조건적인 승리가 됩니까?


진짜 초과잉의 간극이기 때문입니다. 잉여싸움이다고 했습니다.

천쟁 나가기 전에 힘을 일부러 뺍니다. 할례 합니다. 육을 단절시키는 겁니다.

그러면 칼의 전쟁이 아닌 죽어도 상관 없는 이름전쟁이 되는 겁니다.

이름이 무슨 전쟁의 도구가 됩니까? 이름을 백날 칼로 찔러 보세요

이름이 지워지나? 이 떠도는 기표인 이름을 무슨 수로 죽입니까?

그런에 이 이름 하나만 앞장세우는 전쟁입니다.

어린아이가 이 이름만을 앞장세우고 전쟁 벌리는 겁니다.

젖먹이는 아예 이름 자체를 발설 할 수 없는 구강입니다.

그저 젖먹이는 아앙앙 우는 것 밖에 없습니다.

그런에 이 젖먹이 전쟁이 무조건 이유없이 이기는 겁니다.

이유 있으면 무조건 지는 전쟁이 바로 구약의 거룩한 여호와 전쟁입니다.

이 전쟁이 취소 되었을까요?

신약에는 오히려 더 초과잉이 되어서 벌어지는 전쟁입니다.

 

지난 시간에 말한 잉여 개념이 바로 이런 의미입니다.

 

잉여가 잉여를 깨뜨리니까 그 잉여가 더욱더 [배가]가 되는 겁니다. 무한반복이 되는 겁니다.

 

마치 얼마나 전의 뉴스에 영생불멸의 해파리처럼

노화를 뒤로 돌려서 병을 치유하다 못해 아예 아기처럼 새로 태어나더라 말이죠

그러니 과학계가 가만히 있겠습니까

과학이란 중세에서의 신앙이 근대에 넘어와서는 과학으로 바뀌는 겁니다.

안 믿고는 못배기듯이 믿고파 안달이 난 인간이

근대에 넘어와서는 그것을 자기 쪽으로 안끌어들이고는 못배기는 겁니다.

신앙이 과학으로 바뀐 것이 근대 이후 입니다.

그래서 인간에게 적용시키고자 연구에 돌입하는 겁니다.

그런 물질만 있다면 그것이 원인이 되어 결과를 도출하는 방식입니다.

 

원인만 있으면 인간은 희망적입니다. 시간문제이니 미래에는 반드시 해결가능할 테니 말이죠.

그런데 문제는 그 잉여(7번 용서)를 누가 깨뜨리는 고 하니 초과잉여(7에 70번)이 깨뜨리는 겁니다.

시간이 지나는 반드시 타임머신이 만들어집니다. 그런데 그것이 이루어지기 전에 종말이라는 단절이 벌어집니다.

지구멸망 인종멸종이 된다는 겁니다. 초과잉이 잉여를 깨뜨리면서 더더더 초과잉의 반복을 벌리는 겁니다.

 

그런데 잉여란 원인이 없이 그냥 그 자체의 결과입니다.

그렇다면 잉여로만 계속 남을려면 원인 자체가 없어야 합니다.

 

이유 없는 용서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용서 조차도 원인을 파악해서

어떻게 하면 용서 받는가

어떻게 하면 구원 받는가가 되어 버린 겁니다.

 

과학 시대도 아니였던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의 사고방식이 이미 그런 조상의 유전에 따라

훨씬 이전부터 원인에 따른 결과를 도출한 겁니다.

즉 선악과 사고방식인 거죠.

 

무엇을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합니까 라는 질문에 (6)

하나님이 보내신 자를 믿으라 라는 예수님이 답변이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것이 문제가 보통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자를 믿는다면

그 하나님이 보내신 자가 말하는 하나님과

 

하나님이 보내신 자를 거치지 않고

그 이전부터 그냥 하나님을 믿는 자들의 하나님과

 

졸지에 차이가 발생하게 됩니다.

 

그럼 더욱더 문제 되는 것이

하나님이 보내신 자를 믿을 재량이

그 이전의 믿음을 가지고서 과연 예수님을 믿을수 있냐 하는 문제입니다.

 

사도바울 조차도 불가능했다는 것을 우리는 원인이 아닌 결과적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사도바울도 안 되는 판국에 우리인들 어떻게 되겠냐 말이죠.

 

결과적으로 말하면 바울의 주장처럼

우연이 되었다는 겁니다.

 

원인 없는 결과이다는 겁니다.

이것을 바울은 우연임에도 불구하고 필연이다고 빡빡 우기듯이 그 어떤 연결고리 없이

믿음으로 되었다고 합니다.

즉 상대적인 행함을 억수로 공격하면서 말이죠.

 

엄청난 억지 아닙니까?

 

억지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들 조차도 원인 없는 결과로 그 억지 때문에

예수님 안을 누리고 있는 겁니다.

 

불의한 십자가가 옳았다는 겁니다. 상대적으로 나는 무조건 틀렸고 말입니다.

 

그러니 이것은 그야말로 설명 자체가 불가능 합니다.

 

그냥 이 불가능성을 그대로 계속 주장할 뿐인 셈입니다.

그 간격을 좁힐 생각도 없이 말입니다.

 

즉 철학계에서도 이렇게 말합니다.

제가 말하고자 하는 이유가 바로 이겁니다.

 

필연이 사실상 우연이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 우연 곧 우발성이 바로 운명과 같은 필연이다는 거죠.

 

꼭 말장난 같죠 !!!

 

저도 이 부분을 보고 많이 놀랐습니다.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용서 받았다니

바울이 깜짝 놀란 겁니다 다윗의 고백을 보고 말이죠.

다윗은 또 아브라함을 보고 깜작 놀란 겁니다.

 

아브라함은 또 이삭을 보고 깜짝 놀란 겁니다.

 

앞의 원인들을 그렇게 자신의 종교성으로(우상조각가) 깔아놓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원인들을 다 무시하고 오히려 뒤로 소급해서

전혀 무능한 어린아이 이삭이

그것도 육체의 성기를 통한 태어남도 없이 결과로써만 믿음의 조상이 되었으니

낯설은 결과 앞에서 자신의 습관들은 다 날라가 버리는 겁니다.

 

그것도 모르고 미리 앞당겨서 만인의 아버지 라고 축복을 욕먹듯이 먹었던 거죠.

자식 한명도 없는데 무슨 열국의 아버지이냐 말이죠

 

 

(17:1, 개역) 아브람의 구십구 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17:2, 개역)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사이에 세워 너로 심히 번성케 하리라 하시니

(17:3, 개역) 아브람이 엎드린대 하나님이 또 그에게 일러 가라사대

(17:4, 개역) 내가 너와 내 언약을 세우니 너는 열국의 아비가 될지라

(17:5, 개역) 이제 후로는 네 이름을 아브람이라 하지 아니하고 아브라함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너로 열국의 아비가 되게 함이니라

(17:6, 개역) 내가 너로 심히 번성케 하리니 나라들이 네게로 좇아 일어나며 열왕이 네게로 좇아 나리라

(17:7, 개역)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와 네 대대 후손의 사이에 세워서 영원한 언약을 삼고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

(17:8, 개역) 내가 너와 네 후손에게 너의 우거하는 이 땅 곧 가나안 일경으로 주어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17:9, 개역) 하나님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그런즉 너는 내 언약을 지키고 네 후손도 대대로 지키라

(17:10, 개역)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 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

(17:11, 개역) 너희는 양피를 베어라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의 언약의 표징이니라

(17:12, 개역) 대대로 남자는 집에서 난 자나 혹 너희 자손이 아니요 이방 사람에게서 돈으로 산 자를 무론하고 난 지 팔 일 만에 할례를 받을 것이라

(17:13, 개역) 너희 집에서 난 자든지 너희 돈으로 산 자든지 할례를 받아야 하리니 이에 내 언약이 너희 살에 있어 영원한 언약이 되려니와

(17:14, 개역) 할례를 받지 아니한 남자 곧 그 양피를 베지 아니한 자는 백성 중에서 끊어지리니 그가 내 언약을 배반하였음이니라

(17:15, 개역) 하나님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네 아내 사래는 이름을 사래라 하지 말고 그 이름을 사라라 하라

(17:16, 개역)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로 네게 아들을 낳아 주게 하며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로 열국의 어미가 되게 하리니 민족의 열왕이 그에게서 나리라

(17:17, 개역) 아브라함이 엎드리어 웃으며 심중에 이르되 백 세 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까 사라는 구십 세니 어찌 생산하리요 하고

(17:18, 개역) 아브라함이 이에 하나님께 고하되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 살기를 원하나이다

(17:19, 개역) 하나님이 가라사대 아니라 네 아내 사라가 정녕 네게 아들을 낳으리니 너는 그 이름을 이삭이라 하라 내가 그와 내 언약을 세우리니 그의 후손에게 영원한 언약이 되리라

 

여기서 개입하는 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약속이 침투하는 겁니다.

하나님 나라가 무능한 모습 그 자체로써 침노 하듯이 말입니다.

 

약속은 곧 할례라는 영원한 언약으로 맺어지는데

아브라함은 정작 반대입장이 분명히 드러났습니다.

99세 이며

후손은 없으니까 열국의 아버지는 안된다는 것이며

나만 그런 것이 아니라 아내 조차도 불임여성이다는 겁니다.

 

그러니 약속을 반드시 비웃을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왜냐? 저도 비웃겠습니다.

가능성이 제로 이기 때문입니다.

 

이 단절성을 무슨 수로 극복하느냐 말이죠. 불가능한데 안되는 거죠.

 

아브라함이 얼마나 똑똑합니까?

약속이 오히려 미련합니다.

불임여성과 고자를 가지고

무슨 열국의 아비니 열국의 어미니 하는 그런 이상한 소리를 하느냐 말이죠.

 

믿음?

 

오히려 믿겠습니다 라고 하는 쪽은 다 종교성인 사기입니다.

 

악한세대가 기적을 바라는 겁니다.

그래야 그 기적을 자기 쪽으로 끌어들여서

자신을 원인으로 삼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원인이 되지 않는 기적은 싫다 라는 거죠,

그것이 거리끼는 걸림돌로써의 십자가 라는 요나의 표적입니다.

 

자 이렇게 믿음은 단절성이 분명할 때 발휘되지

즉 어두움 뿐일 때 빛의 차이성이 드러나지

그래서 대 낮이 아닌 아주 컴컴한 칠흙같은 어두움 속에서 빛이 의미있듯이

심판 속에서 구원

심판 속에서 인자의 날

시체가 있는 곳에 독수리가 있다는 겁니다.

 

내가 믿는 믿음은 다 행함일 뿐인 겁니다.

 

즉 주의 이름으로 마귀도 항복하나이다 라는 기쁨에

정작 예수님은 그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생명책에 기록됨을 기뻐하라 라는

붕뜨는 소리와 같은 의미로써의 단절성으로써의 믿음인 겁니다.

 

참 의미 없다 라는 겁니다. 진리란 의미없는 모습으로써의 진리입니다.

의미 있다 라는 것은 악한세대가 요구하는 기적과 같은 겁니다.

 

결국 믿음이란 전혀 실감이 나지 않는다는 겁니다.

나에게 떨어질 이윤도 없는 겁니다.

무의미하고 무가치 하고 무능합니다.

 

이 눈에 아무 증거 안 보이고

믿음만을 가지고서 간다 라는 찬송가처럼

 

아무 증거 없다 라는 것은 전혀 전혀 실감이 안난다

즉 어리석고 미련한 의미없음이다는 겁니다.

 

표적과 지혜를 피해가는 십자가믿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정작 이 할례언약은 이삭이라는 무조건적인 잉여라는 결과를 통해서만 알 뿐이지

성사될 뿐이지

 

아브라함 쪽에서 나올수 있는 모든 것을 다 동원해도 나올수 없다는 전제성과

맞물리면서 할례

 

곧 성기의 단절 육의 통로의 단절성을 분명히 하고서 나오는 겁니다.

 

즉 할례언약의 입장에서는 오히려 기가막힌 재료가 아브라함과 사라 라는

고자와 불임여성이다는 겁니다.

 

거기서 나오는 자식만이 약속의 성사로써의 자식인 이삭인 겁니다.

 

죽은태에서 나온 자 라야

이삭이라는 약속의 자녀 곧 산 자의 하나님이다는 것은

이 방식이 아닌 것은 다 죽은 자의 하나님이다는 거죠

 

하나님 본인이 자신의 명예를 걸고 자신의 숙제를 펼치는 겁니다.

여기에 우리는 들러리로 동원되는 배치물일 뿐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은 예수님 본인이 어떻게 약속을 성취하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모든 인간은 단절된 자로써 그저 예수님의 방해꾼 노릇 밖에 없음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예수님은 이 문제를 해결하시느냐 하는 점입니다.

어떻게 희년 곧 복음을 이루느냐?

 

 

바로 평화를 깨뜨리는 소동 곧 전쟁으로써 평화를 이루는 복음이다는 겁니다.

 

결국 기존의 거짓평안이 인간들을 장악하고 있다는 전제가 깔려있는 것이 바로 예루살렘이다는 겁니다.

 

예루살렘이 가까이 왔으니 구원이 임할것이고 하나님 나라가 당장 임할 것이다 라고 다들 생각하는 가운데

그것이 아니다 라고 므나 비유(천국비유)를 들었다 라고 했습니다.

 

오히려 예루살렘은 포로되었고 갇혔고 흑망의 백성처험 억눌려 있는 상태이기에

누가 가서 꺼내주지 않으면 자유케 해 주지 않으면 안되는

 

갇혀 있는 모습으로써의 예루살렘이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므나비유였습니다.

 

즉 천국은 침노하듯이

예루살렘을 공격하고 있다 라는 겁니다.

그래야 예루살렘에 포로되었고 갇힌자들이 자유를 누리는 평화가 이루어지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그런 전쟁이 없이

심판이 없이

 

외부에서 쳐들어 오는 침노가 없이

 

(11:12, 개역) 침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11:12, 공동) "침례자 요한 때부터 지금까지 하늘 나라는 폭행을 당해 왔다. 그리고 폭행을 쓰는 사람들이 하늘 나라를 빼앗으려고 한다. / 어떤 사본에는 12, 13절에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12]침례자 요한 때부터 지금까지 하늘 나라는 줄기차게 다가오고 있다. 그리고 애써 힘쓰는 사람들이 하늘 나라를 차지한다. [13]그 나라에 대하여는 요한까지의 모든 예언자와 율법이 이미 예언했던 것이다."

(11:12, 쉬운) 침례자 요한 때로부터 지금까지 하늘 나라는 힘있게 성장하고 있다. 힘있는 사람들이 하늘 나라를 차지할 것이다.

(11:12, 한글킹) 침례인 요한의 때로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폭력으로 탈취되고, 폭력을 쓰는 자들이 힘으로 그것을 차지하느니라.

(11:12, 현대인)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하늘 나라는 침략을 당하고 있다. 그리고 침략하는 사람이 그 나라를 빼앗는다.

(11:12, 현대어) 침례 요한이 설교하고 침례를 주던 때부터 지금까지 하늘나라는 공격 받아왔고 공격하는 자들이 힘으로 지배하려고 하였다.

(11:12, 가톨릭) 침례자 요한 때부터 지금까지 하늘 나라는 폭행을 당하고 있다. 폭력을 쓰는 자들이 하늘 나라를 빼앗으려고 한다.

 

그냥 평화를 마치 다 이루었는냥 평화의 도시 라고 하니

 

주님이 기가막혀 우시는 겁니다.

 

갇혀있는데 평화라니?

 

차라리 천국 언제 임하느냐 라는 질문보다

지금 당장 갇혀있고 포로되어있으니 그것 풀어달라고 해야 하는데

 

다들 진짜로 갇혀있다 보니

갇혀있는 줄도 모르고 배부른 소리는 하는 겁니다.

 

아무도 잃어버린자가 아니다 라는 냥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겨 달라고 하는 자들이 없습니다.

 

악에서 구하여 주옵소서 라고 하는 자들이 없다는 겁니다.

 

그저 자기 하기 나름대로의 신앙과 말씀실천으로 천국 갈수 있는 티켓 자격증 따기 취미생활만 즐기고 있는 겁니다.

 

오로지 외치는 자는 지금 당장 보기를 원합니다 라고 요청하는

남들이 원치 않는 하나 마나 한 것을 구하는 자들입니다.

자신들은 눈을 볼 수 있기에 구지 안구해도 되는 것을

 

이들은 너무 너무 절실하기에 구하고 있는 겁니다.

 

왜 이런 소경을 배치시키는 것일까요?

 

예루살렘이 포로되었다는 큰 틀을 보여주고 있고

 

그 포로된 예루살렘을 꺼내고자

평화를 깨뜨리는 전쟁을 펼치러 왔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오늘 본문입니다.

 

그러니 기존의 예루살렘에서 기득권을 행사하는 자들에게서는

예수님의 출현은 마치 예루살렘 성을 사수하는 자들과 같고

예수님은 그 성을 빼앗으러 온 침노하는 자와 같은 겁니다.

 

마치 가나안 땅이 약속의 땅으로써

빼앗지 않으면 안되는 평화의 전쟁이 바로 여호와의 전쟁입니다.

그리고 그 원수의 성을 사수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

저들의 예루살렘 장악입니다.

 

그리고 포로된 자 갇힌자 억눌린자가 예루살렘에 포로되어 있다는 겁니다.

 

이 세가지 상황을 배경으로 깔고자

예수님 자신이 왜 하나님이 보내신 자를 드러내고 있는 겁니다.

 

예수님의 일이 이렇습니다.

 

먼저 예루살렘에 포로되고 갇힌자를 해방케 하셔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보내신 자에게 할당된 일입니다.

 

우리는 그 보내심을 받은자가 어떻게 그 일을 행하느냐를 참예하기 위해

우리가 그 속에 갇힌바 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래야 보내신자는 실감할 것 아닙니까?

다윗의 자손이여 불쌍히 여겨 달라는 소경의 외침이

나의 외침이 될 것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두 번째 첫 번째는 해방입니다.

두 번째는 그렇다면 해방케 하기 위해서는 공격해야 합니다.

즉 전쟁입니다. 소동케 하는 겁니다.

소동케 하고 끝나느냐

직접적인 충돌입니다.

 

이런 본격적인 활동이 나타난다는 것은

저들의 감추어진 속성이 드러나는 겁니다.

곧 살인의지입니다.

저들의 악마성입니다.

갇힌바 된 우리들도 포로되어 있다보니 물들여져서

저들과 똑같이 악마성을 드러냄으로써

우리는 각기 제 길로 가는 양처럼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라 라고 외치는 겁니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 약속의 성취입니다.

그런데 웃기게도 약속의 성취가 무엇인고 하니

마치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라는 그 명령에 결국 주님이 준비하신 제물로써 아브라함은 이삭을 바치지 않게 되지만

정작 믿음의 조상이라는 의미를 획득하게 됩니다.

 

제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뭘 하긴 했어야 그런 것을 획득하고 약속의 성취가 되어야 하는데

사실상 가만히 따져보면 아브라함은 아무것도 한 것이 없다 라는 겁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일방적으로 편파해석을 덧붙여서

너는 믿음의 조상이야 라고 약속성취가 되었다 라고 하니

얼마나 낯선 결과물로서의 나를 발견하게 되느냐 말이죠.

 

이번주 설교처럼

내가 봐도 내가 낯설은 겁니다.

설마 내 손으로 이삭이라는 자식을 바칠줄 꿈에도 몰랐고

그런 일로 일방적인 편파해석으로 믿음의 조상이 될 줄을 꿈에도 몰랐던 겁니다.

열국의 아버지 라는 소리가 듣기 싫어서

편법으로 이스마엘을 낳았으니

얼렁뚱땅 약속을 성취한 것 맞지요 라고 넘어갈려고 했는데

 

이것이 단절되고 먹혀들지가 않으니

 

주님이 하신일을 이제 보게 되니

이것은 더 편법 더 더 더 편법을 쓰고 있으니

에이 이런 반칙이 어디있냐 라고 따지고 싶은데

오히려 이것이 더 더 더 믿음직 스럽고 미쁘다 라는 겁니다.

 

마치 자기 혼자만 알고 있는 수수께끼 답처럼(삼손)

사랑은 마치 자신만이 누리는 기쁨처럼

아무도 이 비밀을 알수 없는

철저한 관계성

 

너와 나만의 싸인 표적으로써

관계성을 본다는 겁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흔적입니다.

 

감히 제자들이 큰소리 치지 말라고 가로막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윗의 자손이여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라고

 

주님과 자신만이 알고 있는 표적인냥

외치고 있다는 겁니다.

이것이

 

거지나사로 되기 할 필요가 없이 그 자체

곧 양과 목자의 관계

곧 목소리 이다는 겁니다.

양은 목자의 음성을 알고

목자의 양의 음성을 아는

관계성 유일한 싸인인 겁니다.

 

즉 아무것도 내세울것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오로지 얼룩 하나로만 나의 목자임을 나의 양임을 안다는 겁니다.

 

그것이 십자가의 흔적 표식이다는 겁니다.

 

그것이 간극이요 바로 믿음이다는 겁니다.

 

믿음것도 없는데

행한 것도 없는데

일방적인 편파해석으로 믿음의 조상이라고 그냥 붙여버린 겁니다.

그 뒤에 믿음의 조상 다운 모습이 있느냐? 없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창세전에 생명책에 그렇게 적혀있다는

원인 없는 결과의 통보이다는 겁니다.

 

 

그러니 원인이 없는 것이 하나의 증거 징후 증상인 겁니다.

 

 

자 그럼 전쟁의 모습은 어떤 모습입니가

우와 총쏘고 활쏘고 창던지고 공성기로 성곽을 큰바위를 던져 깨부수고

 

그런에 일체 없이 나귀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해서

어린아이의 호산나 찬양에 시끄럽다고 소리치는 자들을 향해

이들이 소리 지르지 않으면 돌들이 소리 지른다 라는

 

이런 충돌 밖에 없습니다.

요즘의 데모 축에도 끼지 못하는 아주 잠깐의 소동 뿐입니다.

 

이게 무슨 전쟁입니까?

 

앞에서는 뭔가 대단한 전쟁이 벌어질 것 같이 제가 언급을 해 놓고서는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이게 무슨 전쟁이냐 말이죠

 

말다툼 정도로 끝난 정도인데

 

뭐니 뭐니 해도 싸움 구경보다 재미난게 없는데

구경할 꺼리도 없이 시시하게 끝나는 겁니다.

 

이게 전쟁 맞나요

 

그러나 저들의 정치적인 심기를 건드리는데

이보다 초과잉적인 충만한 충돌은 없었습니다.

 

무능한 어린아이의 찬양을 무시했다는 증거가 확보되었으니

연자맷돌을 씌워 아이들을 빠뜨려 죽인 결과라고

예수님 쪽에서 일방적인 해석으로 다가와 버리면

이것은 지옥 깜입니다.

 

그러니 충분하고도 남는 거죠.

 

 

아이듫의 인격이 있는데 아이들을 가지고 함정수사를 펼치는 미끼 총알받이로 삼는 것 아니냐 라고 따지겠지요?

 

그럼 너가 한 번 해 볼래?

역시나 안 할 것 아닙니까?

 

그 정도로 갇혀 있고 포로되었다는 그 심각성을 여전히 모르고 있는 겁니다.

어린아이가 찬양한다는 것은 간극을 말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그것의 심각성, 땅을 딛고 있는 발 아래로 지진의 전조를 보고

그 간극의 심각성을 볼 수 있는 짜는 인자의 날이 어디에 임하느냐 라고 묻는 자 라고 했습니다. 주검이 있는 곳에 독수리가 난다는 예수님의 답변입니다.

그 간극을 벌리는 것이 어린아이의 찬양입니다.

무능한 자의 기도입니다.(한 과부와 불의한 재판관 비유)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겨주옵소서 라고 외치는 소경만이

이 간극을 실감하는 자입니다.

부자청년 지옥간 부자 그리고 바리새인은 그 간극이 전혀 보이질 않습니다.

 

간극이 보이면 저절로 간극의 증상으로써 외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간극이 보이지 않는 자는 징후를 나타내는 말을 할 수가 없는 겁니다.

 

아무리 목소리가 제거 당하는 목소리가 거세 당해도

간극의 징후 그 자체로써 외치도록 되어 있습니다.

벙어리 라도 우주에 퍼진다고 했습니다.

 

결국 우리는 전쟁의 증상으로써의 징후물입니다.

어린아이는 그렇게 동원이 되는데

어른은 시끄럽다 라고

이 간극의 심각성을 전혀 모릅니다.

그저 천국이 언제 임하느냐 라는 배부른 소리를 하고

지옥간 부자처럼 선지자나 빵빵하게 보내달라고 배부른 소리를 하는 겁니다.

지금 당장 코 앞에 닥친 심판의 심각성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그 간극을 외칠수가 없는 겁니다.

 

자 본문으로 돌아가서

 

나귀새끼가 어떤 의미인가에 대해 많은 글들이 나옵니다.

나귀새끼는 결국 보내심을 받은자를 믿는 하나님의 일에 동원이 된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 초라한 입성은 결코 초라하지 않고

어린아이와 같은 젖먹이 전쟁과 같다는 겁니다.

 

(21:16, 개역) 예수께 말하되 저희의 하는 말을 듣느뇨 예수께서 가라사대 그렇다 어린 아기와 젖먹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찬미를 온전케 하셨나이다 함을 너희가 읽어 본 일이 없느냐 하시고

 

(8:2, 개역) 주의 대적을 인하여 어린 아이와 젖먹이의 입으로 말미암아 권능을 세우심이여 이는 원수와 보수자로 잠잠케 하려 하심이니이다

 

전쟁 자체가 젖먹이 전쟁입니다.

?

가장 강하기 때문입니다.

 

젖먹이 보다 강한 자는 없기 때문입니다.

유일한 제대로 된 관계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유없는 피조물과 창조주의 관계가

바로 젖먹이로 표현된 겁니다.

종과 왕의 관계는 젖먹이가 제대로 보여주는 겁니다.

(므나 비유 = 이유없이 무조건 남도록 되어 있는 잉여관계)

 

즉 상대적인 어른의 전쟁 개념 또는 악한 종의 전쟁개념 잉여개념

바리새인과 부자청년 지옥간 부자 등등의 전쟁개념은

 

힘의 우열로 본다는 겁니다.

 

그것을 확 깨뜨리는 것이 나귀새끼 타고 예루살렘 입성입니다.

 

이게 무슨 전쟁입니까?

 

구약에 보면 횃불 항아리 그리고 뒷걸음질 하는 기드온 전쟁이

 

과연 전쟁 답냐 말이죠.

 

즉 상대적인 저들의 창과 칼의 힘의 전쟁에

무조건 반대를 위한 반대로써의 전쟁이다는 겁니다.

 

예루살렘을 허물어 버리는 것은

곧 포로된 자를 해방 자유케 하는 희년완성은

힘의 전쟁이 아니라

도리어 힘을 저들에게 깔고서

힘있는 자들이 의도적으로 비웃을 수밖에 없는 모습의 전쟁이다는 겁니다.

 

힘으로 유지되는 평화는 평화가 아니무이다.

 

그럼 주님이 몰고오는 평화를 사람들이 원할까요?

그런 자유를 원할까요?

그런 포로됨에서 해방케 되는 구원을 과연 원할까요?

 

구원 조차도 힘있는, 힘 되는 구원을 원하지

 

힘 안되는 구원은 원치 않는 겁니다.

 

그러니 부끄러운 구원이라는 용어가 한국교회가 뭔가를 막고자 방어하는 방어기제로 작동하는 것 자체가

 

주님이 참 제대로 일 하심이다는 겁니다.

 

 

돈 안되고 힘 안되는 구원은 싫다 라는 거죠.

 

그래서 돈 안되는 구원 힘 안되는 구원 자유 해방을 이루고자

주님은 나귀새끼 타고 초라하게 예루살렘을 입성하고

그 예루사렘을 겨냥해서 여호와의 거룩한 전쟁을 펼쳐서

잉여를 뽑아내는 겁니다.

자 그러면 예루살렘은 두 장소의 기능을 합니다.

마치 우리의 모습과 같습니다.

예루살렘이 마치 인간처럼 두 조각으로 쪼개져서

좌우로 갈라서 그 간극을 쭈욱 쭈욱 벌리듯이

 

예루살렘은 애굽으로 작용합니다. 주님의 자녀를 포로로 잡고 있는 사탄의 본부입니다.

그리고 동시에 그 애굽을 무너뜨림으로써 원수의 문을 여는 구원의 장소가 되는 겁니다.

 

심판 속에서 구원이다는 겁니다.

 

이 간극을 보여주도록 되어 있는 것이 예루살렘입니다.

 

언제 보여줍니까?

인자의 등장입니다.

 

우리가 상상한 메시아 그런 힘과 돈이 되는 권력을 지닌 메시아가 아닌

 

나귀새끼 타고 초라하게 입성하는 그 인자가 등장하면

예루살렘은 그 간극을 보여주는 장소가 되는 겁니다.

 

주여 어디서 인자의 날이 곧 심판이 어디서 벌어집니까?

바로 예루살렘이다는 겁니다.

오늘날 우리가 지금 딛고 있는 곳입니다.

 

그곳에서 애굽 곧 출애굽과 입약속의 땅이 그 간극으로써 작용하는 겁니다.

바로 우리 신체입니다.

 

?

하나님이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기에

그 일이 벌어지는 장소로써의 그 마당터가 바로 우리 신체인 겁니다.

 

그런 자 만이 간극의 징후를 보이는 겁니다.

 

얼마나 낯설겠습니까?

 

남들은 다 버려도 나는 절대로 예수님을 안 버리겠다는 자신이 봐도 자기가 기특한 그런 익숙한 나 베드로가

 

전혀 다른 인물 제일 먼저 예수님을 베신때리고 세 번씩이나 부인해도

주님의 찾아오심 때문에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이 더 잘아십니다 라고

뻔뻔스럽게 고백합니다.

 

자신이 봐도 너무 너무 뻔뻔스러울 정도로 전혀 낯설은 상상도 못했던 나 베드로를 보고 놀라는 겁니다.

 

이 간극을 실감하는 겁니다.

 

그 간극을 종말이라고 일종의 성령이라는 인물로 보시면 됩니다.

 

예루살렘은 바로 이 두 극과 극의 간극을 보여주는 장소입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라고 인물로 표현하듯이

우리 자신이 이런 예루살렘처럼

출애굽과 입약속의 땅으로써 우리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는 겁니다.

간극의 징후로써 말입니다.

 

그럼 누가 이 일을 성취하고 이루고

누가 이 예루살렘을 장악하는 숙제인 겁니까?

 

바로 하나님이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듯이

하나님이 보내신분이 성취하실 믿음이라는 하나님의 일이다는 겁니다.

 

 

(6:25, 개역) 바다 건너편에서 만나 랍비여 어느 때에 여기 오셨나이까 하니

(6:26, 개역)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6:27, 개역)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의 인치신 자니라

(6:28, 개역) 저희가 묻되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

(6:29, 개역)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

(6:30, 개역) 저희가 묻되 그러면 우리로 보고 당신을 믿게 행하시는 표적이 무엇이니이까 하시는 일이 무엇이니이까

(6:31, 개역) 기록된 바 하늘에서 저희에게 떡을 주어 먹게 하였다 함과 같이 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나이다

(6:32, 개역)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에서 내린 떡은 모세가 준 것이 아니라 오직 내 아버지가 하늘에서 내린 참 떡을 너희에게 주시나니

(6:33, 개역)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게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

(6:34, 개역) 저희가 가로되 주여 이 떡을 항상 우리에게 주소서

(6:35, 개역)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6:36, 개역) 그러나 내가 너희더러 이르기를 너희는 나를 보고도 믿지 아니하는도다 하였느니라

(6:37, 개역)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 쫓지 아니하리라

(6:38, 개역)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6:39, 개역)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6:40, 개역)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

(6:41, 개역) 자기가 하늘로서 내려온 떡이라 하시므로 유대인들이 예수께 대하여 수군거려

(6:42, 개역) 가로되 이는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니냐 그 부모를 우리가 아는데 제가 지금 어찌하여 하늘로서 내려왔다 하느냐

(6:43, 개역)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는 서로 수군거리지 말라

(6:44, 개역)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의 믿음이 순 엉터리요 믿음 축에도 끼이지 못하는 그냥 가짜 그 자체임을

 

믿음 그 자체가 되신 예수님이 하시는 일을 통해서 보게 된다는 겁니다.

 

이것이 마지막 날에 사는 길이다는 겁니다.

 

그런데 문법 파괴 국어문법에도 맞지도 않는

 

내가 믿음이다

내가 떡이다 내 살과 피를 먹어라 라는 말 자체가

 

행함의 선악표현이 아닌

믿음의 은혜용어라는 이유로 졸지에 무슨 소리인줄 알수 없는 방언이 되는 겁니다.

 

즉 안 통한다는 겁니다. 단절이요 불통이다는 겁니다.

 

그 불통의 간극을 실감해야 할 처지에서 제발 보게 해 주소서 라는 것처럼

이 말씀이 무슨 의미인지 해석해 주옵소서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라고 자신이 지금 악마의 세게에 빠져있다는 것을 실감해야 하는데

도리어 본인이 못 알아먹었다는 이유로

 

온갖 잡탕의 말만 한다고 비아냥 거리고

문법 파괴라는 둥

동문서답이라는 둥

 

얼마나 제대로 증거했으면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고 = 단절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는 = 단절

 

 

단절의 이중성 무한반복이라는 그 간극을 제대로 보여주는 겁니다.

 

그러니 죽여버리는 거죠

그러면 소통 될까요?

 

소통 더 안됩니다.

돈이 될까요?

힘이 될까요?

 

더더욱 잉여적으로 돈도 안되고 힘도 안되는 겁니다.

오로지 주님과의 관계만이 더더욱 간극으로써 또렷해 지는 겁니다.

 

주님은 그래서 힘되고 돈되는 능력 권력 힘 등등의 방식을

 

일부러 일부러 피하는 방식으로써 전쟁의 승리를 이루시는 겁니다.

 

누가 봐도 승리아닌 예수님의 패배 요 예수님의 실패입니다.

십자가에서 개죽음 당했는데 그게 무슨 승리입니까?

 

그러나 다 이루었다 하십니다.

믿음의 표현이지 선악의 용법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의 심판을 더더욱 퍼트리는 겁니다.

 

희한한 전쟁이지요?

 

칼도 아니요 창도 아니요 마차 병거도 아닌

젖먹이 전쟁

 

그런데 그 어떤 강력한 군사 보다도 더 강한 승리의 전쟁이다는 겁니다.

 

십자가에 막 죽어 나가는데도 말입니다.

 

이 전쟁을 예수님 곧 보내심을 받은자가 완성하십니다.

 

힘으로 유지되는 엉터리 평화를 깨뜨리면서 말입니다.

 

오로지 잉여만을 이유없이 무조건 남기는 잉여전쟁을 다 이루었다는 완료로써

더 이상 미완료, 미흡함, 모호함, 의문이 찝찝하게 남겨지지 않은채

 

또렷하고 밝히 보이는 확정적인 십자가의 죽음의 사랑으로써 말입니다.

 

나의 먹보다 더 검은 죄를 덮고자

붉은 피로써 덮는 그 명료한 사건 보다 더 또렷한 것이 없듯이 말입니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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