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하는 집과 강도의 굴혈 (19:41-48)

 

(19:41, 개역)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19:42, 개역) 가라사대 너도 오늘날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기웠도다

(19:43, 개역) 날이 이를지라 네 원수들이 토성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19:44, 개역)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권고 받는 날을 네가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 하시니라

(19:45, 개역) 성전에 들어가사 장사하는 자들을 내어 쫓으시며

(19:46, 개역) 저희에게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 되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들었도다 하시니라

(19:47, 개역) 예수께서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치시니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백성의 두목들이 그를 죽이려고 꾀하되

(19:48, 개역) 백성이 다 그에게 귀를 기울여 들으므로 어찌할 방침을 찾지 못하였더라

 

 

분명 하나가 눈에 보이는데, 하나만 보이는데,

칭하기를 즉 이름을 부르기를 두 가지로 부릅니다.

 

그것도 비슷한 이름으로 부르는게 아니라

아예 극과 극의 간극으로써 이름을 부르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그 하나는 두 가지 속성을 그대로 지니게 된 것일까요?

아니면 최종적인 결과로써 부르게 될까요? 원인 없는 결과?

아니면 과정을 거쳐서 나오는 결과인 것일까요?

 

지난시간에 살펴봤듯이 예루살렘을 일종의 교회의 대표성으로 본다고 하면

교회를 부르는 이름이 두 가지가 있는 셈입니다.

즉 예루살렘을 부르는 이름이 두 가지인 겁니다.

 

하나는 만민이 기도하는 하나님의 집, 기도하는 집

그리고 또 하나는 강도의 굴혈입니다.

 

(19:46, 공동) "성서에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지 않으냐? 그런데 너희는 성전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었다." 하고 나무라셨다. / 이사 56:7. 예레 7:11.

(19:46, 현대인) `내 성전은 기도하는 집이다.' 라고 성경에 쓰여 있는데 너희는 이 집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었다.' 하고 말씀하셨다.

(19:46, 현대어) 말씀하셨다. `성경에 ) `내 성전은 세계 만민이 다 와서 나에게 기도할 수 있는 곳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너희는 성전을 강도의 소굴로 만드는구나.' (. 56:7,7:11)

 

분명 하나의 장소임을 예수님이 증명하십니다. 그런데 그 장소를 너희는 다르게 만들었다는 겁니다. 한 장소가 말입니다.

 

이것은 한 장소 즉 공간만 해당되는게 아닙니다.

시간도 동일하게 해당 됩니다.

심지어 인물도 동일하게 적용하십니다.

 

사물이 다 이렇게 적용이 됩니다.

 

한 입에서 찬송과 저주가 동일하게 난다고 합니다.

 

(3:10, 개역) 한 입으로 찬송과 저주가 나는도다 내 형제들아 이것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왜 이렇게 흑백 논리로 몰아가는 궤변을 벌리느냐 라고 따질게 아니라

성경 자체가 그렇게 몰아갑니다. 안 그런 적이 없습니다. 성경 전체가 다 이런 식입니다.

 

즉 우리는 전제로 깔기를 하나님도 예수님도 성경도 결국 내가 동의만 하면

나의 편이 되는 줄 알았는데

그렇게 되면 분절이 없고, 헷갈리는 것도 없고, 흑백논리 싸울 필요도 없는 겁니다.

그러나 그 정반대이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집이라고 인식하는 자들은 다름 아닌 유대인들 자신들입니다.

바로 하나님 집이라고 인식 한다는 자체가 강도의 소굴로 만들고 있다는 겁니다.

 

이것은 인정하기 싫어도 인정할 수 밖에 없는 밝혀진 바입니다.

물론 예수님이 등장하기 전까지는 죽어도 몰랐던 겁니다.
즉 약속하신 성령이 주어지기 전까지도 몰랐다는 겁니다.
그 이전에는 당연히 하나님의 집인줄 알았습니다.
아무도 의심할수가 없는 하나님 본인이 증명하신 겁니다.
문제는 주님 쪽에서 변경시킨겁니다. 두 갈래로 갈려져서 분절이 발생한 겁니다.
예수님의 등장으로 말입니다.

 

자 그렇다면 주여 저는 뭘 해도 이 성전을 강도의 소굴로 만드는 짖 밖에 할 수 없군요 라고 나와야 합니다.
그런데 그런 인식 자체가 없다는 자체가 강도의 소굴로 만들고 있다는 증거죠.
즉 성령 받지 않으면 무조건 이유없이 그런 인식에서 벗어날수가 없도록 되어 있다는 겁니다
.

 

왜냐하면 이 고백을 누가 했느냐 하면

성전 집착에 아주 아주 집착적이였던 다윗이 그렇게 고백했습니다. 

주를 위하여 성전을 짖겠다고 나머지 인생을 바칩니다. 


그런데 주님은 반대 합니다. 너의 손에 피가 가득하다고 

즉 성전중심의 신앙이 피가 가득한 짖만 골라 할 수 밖에 없다는 겁니다. 

주의 전을 향한 열심이 주를 삼키는 그래서 성전밖에서 죽임을 당하시는 겁니다. 

성령이 오기 전까지는 강도의 소굴인줄 꿈에도 모르는 겁니다..

율법도 동일합니다. 율법의 목적은 사랑입니다.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룬 겁니다. 

그런데 사랑은 빠지고 행함이라는 법지키기만 남아버리니 주객이 뒤바뀌게 된 겁니다. 

번제를 지키기 위해서 인애와 자비는 버린 겁니다..

(마 23:23, 개역)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롬 13:8, 개역)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롬 13:10, 개역)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성전 하면 성전 대표자 다윗이라고 보면 됩니다. 곧 왕의 대표자입니다.

 

율법 대표하면 모세죠


율법에 집착만 하지 율법 단 한 개도 못 지키는 당사자가 바로 모세 본인입니다.


그러다가 하나 지키면 난리 납니다.


그 하나 지킨 것으로 나는 저 세리와 같지 않음을 감사합니다 라고 간극을 벌리다가

도리어 모세 본인이 초과잉의 간극벌림을 당합니다. 바로 가나안 입성 탈락입니다.

 

약속의 땅에 들어가 보지 못하고 

남들 즉 자기가 율법 하나 지켰고 딴 사람은 율법 단 하나도 지킨 것이 없는 자들이 다 들어가는 것을 보는 

그 위치에 서서 바라만 봐야만 하는 입장에 놓여진

도리어 초과잉의 간극벌리기에 의해 단절을 당하는 입장에 놓여지는 겁니다.


사랑이 없다 라는 겁니다. 즉 율법은 남을 사랑하는 것인데 이제는 사랑하면 되지 않느냐?

아닙니다. 없기 때문에 긍휼의 대상이지 모세가 사랑을 실천할 주체자로 남을 대상삼을수 없다는 겁니다.
예수님이 오실때까지 기다릴 수 밖에 없는 겁니다. 그래서 변화산에서 주여 죽어주시옵소서 라고 합니다.

죄의 심각성을 안 겁니다. 긍휼을 소유할려고 한게 아니라 모세 자신은 긍휼의 대상물이다는 겁니다.
 

율법의 대표자도 저런 판국에 우리는 즉 현대의 우리는 오죽하겠습니까?

성화론자들은 말합니다. 모세는 성경 역사 초기에 해당 되니까

성경의 지식을 그 뒤의 사건들을 많이 모르고 있고

우리는 더 많은 교육을 받았으니

그런 것으로 핑계나 정당화 삼을 수 없다 라고 합니다.


그럼 바리새인 특히 사도바울을 볼까요?

 

성경 지식이 있으면 달라집니까? 교육을 받으면 달라지냐 말이죠

모세의 상황에서 한 발치도 벗어난 적이 없다는 겁니다.

강도의 소굴 만들기에 매진할 뿐이다는 겁니다.

성령을 받기 전까지는 바울은 스스로도 말씀에 완벽했다고 자부했던 겁니다.

그것이 쓰레기 배설물이였다는 것을 성령을 받고 안 겁니다.

그 전 까지는 열심이 특심이였을 뿐이였습니다.


성전이 당연히 하나님의 집 곧 만민의 집이지 어떻게 강도의 소굴이 되느냐 에 대해 바울은 의심이 없었습니다.

얼마나 믿음이 좋으냐 말이죠. 그래서 이단 예수쟁이를 척결하러 간 겁니다. 스데반집사님도 죽이고 말입니다.

 

물론 놀라운 점은 예수님의 등장으로 말미암아 성전의 이런 분절이 일어난다는 점입니다.

예수님의 등장이 아니면 이런 분절은 없습니다.

 

즉 지난 시간에 평화는 평화인데

가짜 평화와 진짜 평화가 졸지에 생기니까 헷갈리게 한다고 불평하는 자들이 많다고 했습니다.

어떻게 한 개의 의미가 두 개로 분절이 일어나느냐 말이죠.


그런데 모든 것은 다 이렇게 분절 되기 위해서 등장한 겁니다.

마치 아브람이 아브라함으로 분절이 되는 것이 사람 이름에만 해당되는게 아니라

모든 피조물이 예수님을 위해 분절해야만 한다는 겁니다.

 

맞습니다. 예수님이 나귀새끼 타고 예루살렘 입성 하기 전 까지는

인간들에게는 평화는 딱 하나 뿐이였습니다.

 

그런데 졸지에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니까

졸지에 평화가 둘로 나누어 지는 겁니다.

진짜 평화와 가짜 평화로

예수님만 아니였다면 이런 분절은 벌어지지 않습니다.

평화 뿐일까요?

예루살렘도 두 개로 분절됩니다.

하나님도 졸지에 두 개의 하나님이 됩니다.

인간의 하나님 즉 유대인의 하나님과

예수님의 하나님으로 둘로 나뉘어 지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그 한 개의 평화

하나 였던 평화가 그것도 졸지에 극과 극의 간극으로써 벌이지는

두 개의 평화가 되어버렸다고

 

이것이 바로 표적을 바라는 유대인과 지혜를 구하는 이방인에게

대조적인 요나의 표적과 어리석고 미련한 십자가의 지혜라고

 

십자가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의 버룻 어딜 가지 않습니다.

현대의 십자가는 인간 구원해 줄려고 안달이 난 십자가입니다.

구원용 십자가죠

모든 교회도 여기에 매진 합니다.

 

그런데 십자가가 둘로 나누어 집니다.

이미 사도바울이 언급했습니다.

사람을 좋게 하는 십자가복음과

하나님을 좋게 하는 십자가복음

 

사람을 좋게 하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다고 합니다.

 

(1:10, 개역)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더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1:11, 개역)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내가 전한 복음이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라

(1:12, 개역)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

 

(살전 2:4, 개역) 오직 하나님의 옳게 여기심을 입어 복음 전할 부탁을 받았으니 우리가 이와 같이 말함은 사람을 기쁘게 하려 함이 아니요 오직 우리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 함이라

 

이 말은 즉 사람을 좋게하는 십자가의 복음 즉 다른 복음이 활동한다고

성경 스스로가 밝히고 있습니다.

아니 성경 말씀 자체가 그런 자들을 발생케 하겠다는 취지인 겁니다.

 

?

 

네 맞습니다. 분절 곧 간극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복음 조차도 기도하는 집으로써의 십자가 복음과

십자가의 복음 조차도 강도의 굴혈로써의 십자가 복음 즉 다른 복음으로

 

둘 로 나누어지고 있다는 겁니다.


그럼 교회도 성도도 둘로 갈라집니다.

마치 선지자가 예수님 때문에 미리 앞당겨져서 거짓선지자와 참선지자가 등장하듯이 말입니다.
그들 자체적으로는 참과 거짓의 구분이 의미 없습니다.

뒤에 오실 예수님 때문에 이유 없이 거짓선지자 노릇을 즉 인간구원에 매진할 수 밖에 없고

또 이유 없이 참선지자의 노릇을 즉 종말의 심판 퍼붓기에 매진 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들 자체적인 원인으로는 거짓과 참의 분절은 벌어지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오해 합니다. 아 그럼 당신이 말한 대로 이렇게 둘로 나누어지니까

그럼 그렇게 하지 않도록 나누어지지 않도록 노력하면 되겠군요 라고 말합니다.

 

그것이 바로 주객이 뒤바뀐 겁니다.

사물이 먼저 있고 인간은 그 배경물로 깔리는 겁니다.

즉 강도의 소굴이 먼저있고 그 강도의 소굴에 충실하는 자들이 배치가 되고

또 기도하는 집이 먼저 있고 그 만민이 기도하는 집을 말하기 위한 자들이 배치물로써 깔리는 겁니다.

 

인간은 이 두 잉여를 말하기 위한 그저 도구일 뿐이지

그 어떤 인간의 믿음도 노력도 이 두 잉여를 변경시킬수 있는 자질이 없는

소외된 입장일 뿐입니다. 즉 단절되었다는 겁니다.

 

우리가 살펴봤던

지옥간 부자와 거지나사로의 비유에서의 대조가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성경 전체가 그러합니다. 에서는 미워하기로 작정되었고 야곱은 사랑받기로 작정되었다고.

 

야곱은 아무리 나쁜짖 그야말로 극악무도한 짖을 해도 사랑받기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에서는 아무리 착한 짖을 그야말로 누가봐도 천국갈 행동을 했다고 자부해도 미워하기로 작정되었다는 겁니다.

 

왜냐하면에서 야곱 이라는 인물 때문이 아니라

천국은 천국 자신의 잉여성을 말하기 위해서 야곱이라는 배치물을 기가막히게 활용한 겁니다.

즉 의사는 의사 자신의 기능을 말하기 위해서 환자라는 

죄인이라는 기기막힌 재료로 자신의 천국 다움을 증거하듯이 말입니다. 거지나사로가 그랬습니다.

 

또 상대적인 지옥은 지옥 자신의 잉여성을 말하기 위해서 

에서라는 기가막힌 배치물로서 활용한 겁니다

즉 지옥 곧 지옥간 부자는 왜 지옥에 갈 수 밖에 없었는가를 말하기 위해서

탕자의 형은 단 한번도 아버지의 말씀을 어긴적이 없는

의사에게 필요없는 건강한자의 역할을 제대로 하고 있다는 겁니다.

의사와의 관계성이 없는 독자적인 역할을 기가막히게 한다는 겁니다.

지옥간 부자가 이 간극을 무시했듯이 선지자도 자기식으로 해석했습니다.

탕자의 형 맏아들은 아버지의 긍휼을 무시하고

일만달란트의 탕감을 거부하면서

자신의 잉여성만 고집했습니다.

족히 비교도 할 수 없는 자신만의 독자적인 7번 용서

남들과의 독보적인 간극을 자랑했습니다.

 

그런데 남들과의 비교가 아닌 예수님과의 비교인 770번과는 비교하지 못했고

그 간극은 무시했고 전혀 실감하지 못했습니다.

지옥간 부자는 그저 땅에 있을때의 거지나사로와의 비교간극만 생각했지

아브라함 선지자가 보여주는 천국과 지옥 간의 그 초과잉적 간극은 전혀 전혀 볼 수도 없었고

오로지 내 돈 띠 먹고 간 거지로만 살던 주제에 천국가 있다는 거지나사로만 눈에 보여 비교할 뿐이였습니다.

 

 

예수님과의 간극을 보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는 겁니다.

 

그것이 오늘 본문 과 무슨 상관이냐 말이죠

 

바로 예수님이 참성전으로 보이는 자는

자신이 지금껏 성전에서 하는 짖들이 다 똥떵어리로 배설물 취급해야 할 판국에 놓였다는 겁니다.

 

욥은 그 섬김 때문에 자신의 똑똑함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뭘 해도 다 죄 밖에 안 나옴을

예수님의 믿음을 보고 알게 됩니다.

 

그런데 에수님이 하나의 조력자로 밖에 보이지 않는 자는

성화론자처럼 즉 우리의 본능은

예루살렘 성을 강도의 굴혈로 밖에 만들 수 밖에 없는 자임을 고백할 수가 없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성령으로 외부의 의로 인한 불쌍히 여겨주심으로

사도바울은 거기서 빠져나올수 있었습니다.

아니 갇혀 있음도 몰랐고

빠져나와야 한다는 의식 조차도 없었는데

그야말로 사도바울은 대박 맞은 겁니다.

 

이것이 우발성입니다. 원인 없는 결과 라는 겁니다.

 

욥도 그랬고

엘리야도 그랬고

특히 베드로 또한 그랬습니다.

아니 안그랬던 믿음의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성령을 받지 못한자는

자신의 독자적인 믿음의 간극 때문에

그것을 깨뜨리는, 잉여를 깨뜨리는 초과잉적 잉여가 없어서

그만 강퍅함에 머물고 말아버립니다.

 

긍휼이 필요 없이 거지나사로 되자 라는 운동을 펼치는 겁니다.

긍휼을 자신을 행함으로 자신의 신앙으로 소유할려고 한 겁니다.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습니까?

저는 어릴적부터 율법을 지켰으니까 말씀만 하옵소서 행하겠습니다.

최고의 예의와 최고의 자세를 갖추어도

초과잉적 간극 때문에 근심하고 돌아서 버리는 겁니다.

 

주님 마음대로입니다.

주님이 마음만 먹으면 우리는 백부당 만부당 지옥가도 할 말이 없는 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 자신의 잉여를 더욱더 벌리는데 예수님의 긍휼마저도 이용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것이 육의 자랑이 되고

그것이 저 세리와 같지 않다고 하나님께 감사 하다고 하면서 말이죠

 

도통 자신이 갇혀있는지를 모르고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예수님도 그런 시선에서 보니까?

 

구원은 따 놓은 당상이고 예수님은 오히려 나의 구원을 자랑질 할 수 있는

하나의 잉여 증폭기로만 이용하는 겁니다.

 

내 구원의 정당성을 더더욱 보편화 할 수 있는 도구로써 활용한다는 겁니다.

 

바로 이 모습이 저나 오늘날 교회다니는 자들이

단 한 순간도 빼먹지 않고 하는 짖들입니다.

1초도 안 그런적이 없이 이 짖만 하고 있습니다.

지옥갈 짖만 골라 골라서 말입니다.

안그런자들이 없습니다.

그러니 철저하게 철저하게 철저하게 갇혀버린 겁니다.

 

여기서 빠져나올수 있는 것은 예수님의 개입사건 뿐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예수님은 우십니다.

 

예루살렘 성을 보시고 우십니다.

 

 

아무도 예루살렘 성을 보고 우는 자들이 없었습니다.

그 속에 들어가서 하나님의 집으로써 만민이 기도해야 하니까

그 성전 안에 들어가 우는 자들은 많아도

 

예루살렘 성 밖에서 예루살렘 성전 안에 들어가 울고 있는 자들을 향해서

성 밖에서 우는 자는 예수님 뿐이다는 겁니다.

 

울음도 졸지에 두 개로 분절이 되는 거죠,

 

성전 안에서 우는 울음과 성전 밖에서 성전 안에서 울고있는 자를 보고 우는 자의 울음

 

두 울음으로 나뉘어 분절이 되는 겁니다.

 

간극입니다.

 

마치 좀 더 응용을 해 보면

성전 안에서 충성하는 자와 성전 밖에서 성전 안의 충성하는 자를 보고 충성하는 충성으로

두 개의 충성이 분절 되듯이 말입니다.

 

성전 안에서 죽는 자와 성전 밖에서 죽는 자로 말입니다.

 

하나는 인간의 결과 물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결과 물이고

 

이 정도로 극과 극인데

우리는 아무리 봐도 일치성이니 동일성이니 라고

아예 아주 아주 밀착했다고 착각하는 겁니다.

 

결국 성령의 시선은 극과 극입니다.

인간 끼리의 도토리 키재기가 아닌

뻔데기 근처도 못가는 초과잉적 간극을 보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심판입니다. 종말의 시선입니다.

 

내가 뭘 해도 심판 받을 짖만 골라서 했구나 라는 것을

예수님이 하시는 일을 보면 직시하게 되는 것이

바로 성령의 시선인 겁니다.

 

자 그렇다면 지난 시간처럼 어린아이와 젖먹이 전쟁이 바로 그런 성령의 시선이다는 겁니다.

물론 누가복음 본문에는 없는 어린아이 젖먹이 이지만

누가복음에서는 무능한자로 일괄처리하면 같은 의미입니다.

 

이들이 외치지 않으면 더 나은 자들이 와서 외친다고 하시는게 아니라

 

더 더 더 무능한 돌들이 외친다고 하시는 겁니다.

 

? 너희들이 아브라함 자손이라고?

에라이 돌들을 취해 아브라함 자손 만들겠다 라고 한 세례요한의 말이 생각날 정도로

단순히 저들을 비아냥 거리기 위한 목적이 아닌

 

저들의 뿌리 자체가 거짓임을 밝히는 것이 바로 돌들입니다.

 

돌이야 말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능 그 자체

아니 [없음] [그 자체]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처음자리 이다는 겁니다.

즉 아브라함이 무능한 자로, 죽은 자로써 이스라엘의 조상 곧 믿음의 조상이다는 겁니다.

더군다나 아내 사래도 불임여성입니다.

죽은 태의 꼽배기 이중성인데 태어난 이삭은 그야말로 육의 단절 곧 할례에서 비롯되었다는 겁니다.

 

성기가 없다는 겁니다. 성관계도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 태어났다는 겁니다.

 

이것은 그 어떤 논리나 과학이나 심지어 신학을 동원해도 절대로 풀 수 없는 겁니다.

 

그런데 아브라함 자손이라고?

그래서 돌들로도 아브라함 자손 만들겠다고 하는 겁니다.

 

즉 이들이 외치지 않으면 돌들을 통해서라도 외치지 않고는 못배기도록 하겠다는 겁니다.

 

?

 

아브라함 보다 먼저 있었던 것이 바로 [없음]입니다. [의미 없는 진리]입니다.

베드로 보다 먼저 있었던 것이 바로 닭의 울음입니다. 의미 없는 진리입니다.

 

인간의 존재 보다 먼저 있었던 것이 바로 돌들의 외침입니다.

 

(19:38, 개역) 가로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 하니

(19:39, 개역) 무리 중 어떤 바리새인들이 말하되 선생이여 당신의 제자들을 책망하소서 하거늘

(19:40, 개역)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이 사람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지르리라 하시니라

 

저들의 시선은 구지 안 떠들어도 되는데 떠들고 있고

장소와 시간이 안 맞다는 겁니다. 다른데서 해도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것이 먼저 있지 않았다는 겁니다.

만약 이 사람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지른다는 것은

 

(3:9, 개역)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3:8, 개역)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 말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돌들로도 아브라함 자손 만들겠다 라는 것처럼

마땅히 지금 이 순간 터져나와야하는 당위의 기능이다는 겁니다.

즉 예수님과의 관계성을 그들은 간과하고 있는 겁니다.

 

예수님 때문에 마땅히 벌어져야만 하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하늘의 영광입니다.

죄인 하나 돌아오게 하기 위한 영광이 벌리는 평화전쟁입니다.

그렇다면 땅에서의 가짜 평화들은 다 깨어지는 겁니다.

 

하늘의 영광 때문에 땅은 그 배경물이 되는 겁니다.

그 차이를 보여줄 수밖에 없는 묵시의 마당터입니다.

역사는 그 묵시를 차이로써 드러내는 동원물이고 말입니다.

 

(19:42, 개역) 가라사대 너도 오늘날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기웠도다

 

예수님의 죽음 이후 곧 성전 밖에서의 죽음이 성전 안에서 결의된 사항으로써 집행 됨으로써

정작 예루살렘 성전 본인의 운명은 돌 위에 돌도 하나도 남겨지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러니 눈을 못 뜨고 있는 소경이다는 겁니다.

예루살렘을 하나의 의인화 해서 예루살렘과 연관된 모든 것들을 다 아울러서 대표성으로써 지적하고 있습니다.

 

아니 건물 집 돌덩어리를 지적해서 뭐하게요?

사물을 지적한다고 그와 연관된 인간들이 지적받을까요?

인간들 눈하나 깜짝 하지 않잖아요

 

역시나 그런 간섭 지적을 모르는 겁니다. 숨겨졌거든요.

 

(19:43, 개역) 날이 이를지라 네 원수들이 토성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19:44, 개역)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권고 받는 날을 네가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 하시니라

 

결국은 성전은 없습니다.

성전이 있으면 인간들은 그 성전을 놓고 솔로몬 때와 같이

피 튀기는 목숨을 거는 전쟁을 펼칠 뿐입니다.

겨우 모든 경쟁자를 다 이겼다고 숨 좀 돌릴만 하면

외부의 권세자들이 성전 돌 위에 돌 하나도 남김없이 다 허물어 버립니다.

그렇게도 솔로몬 이후에 제대로 된 성전을 하나 만날 수 없어서

결핍의 결핍이 그렇게도 컸는데

이제 좀 제대로 된 성전 하나 건립했나 싶었는데

예수님이 자신이 참성전이다고 허물어 버리라고 하질 않다

그 예수도 성전 모독죄로 죽여버리니까

이제는 ad 70년에 티투스가 예루살렘을 멸망시키는 겁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시선은 결국 종말의 시선

끝을 미리 앞당기는 시선이였던 겁니다.

왜 하나님의 집입니까? 왜 만민이 기도하는 집입니까?

자신의 끝을 미리 봐 버렸기 때문에 기도하는 겁니다.

그 끝이라는 종말 곧 심판 앞에서 자신은 그야말로 아무 쓰잘데기도 없는 무능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강도 13 정도의 지진 앞에 놓여졌다고 봅시다.

끝을 미리 앞당겨 봅시다.

큰 파도 20미터의 쓰나미 헤일 파도 앞에 서 있다고 봅시다.

종말을 미리 앞당겨 봅시다.

큰 파도도 아니요 큰 지진도 아니요

이제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도 않는 세미한 음성을 들었다고 해 봅시다.

곧 심판을 미리 앞당겨 봅시다.

 

과연 살수 있는 방법이 있냐 말이죠.

 

예수님은 바로 심판 그 자체로써 예루살렘 성 밖에서 우시는 겁니다.

정작 울어야 할 자는 안 울고

울지 말아야할 예수님은 우시는 겁니다.

뭔가 뒤 바뀐 것 같습니다.

 

아무도 자신이 딛고 있는 그 든든한 땅이 자신을 삼키는 무시무시한 지진이 나서

둘로 갈라지는 땅으로 나를 삼킬것이라고 아무도 여기지 않습니다.

 

오히려 구원의 땅이요 평화의 땅이요 구원의 문에서 살고 있다고 여기지

예수님 자체가 구원의 문이라고 여기지 않고

오히려 이 구원의 문을 허물려고 하는 바알세불 걸린자로 몰아버리는 겁니다.

 

한 인물이 구원자 임과 동시에 바알세불 걸린 악마의 대왕이다는 겁니다.

 

이 둘 중에 하나를 골라야 할 판국입니다.

 

선지자, 예수님 그리고 성도는 바로 간극 그 자체라고 했습니다.

둘 중에 하나를 골라야 할 판국처럼 말입니다.

 

어느것을 선택해야 할까요?

물론 우리에게는 선택권 자체가 있을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안 할 인간이 없듯이

 

성령의 시선에서는 바로 종말을 미리 앞당겨주는 자를 선지자로 보면 됩니다.

끝을 미리 앞 당겨 보여주는 자 말입니다.

 

예루살렘을 구원의 문이라고 생각한 자들은 다 예수님을 죽이는데 동원이 됩니다.

정작 예수님 곧 구원의 문은 성전 밖에서 죽는데 말입니다.

 

이상하게 맞물립니다.

 

우리는 말려들 수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을 구원의 문이라고 볼 재간이 없습니다.

우리는 갇혔습니다.

 

즉 이 말은 예루살렘 성전을 구원의 문이 아니다고 포기 할 자들이 없다는 겁니다.

신앙을 포기하는 신앙을 펼칠 자는 아무도 없다는 겁니다.

갇혀버렸기 때문입니다.

 

안식일을 지키고 주일성수를 하는 내가

예수님이 안식의 주인이라고 여길수 없다 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안식일 지키는 것을 포기 할 줄 알아야 하거든요

그런데 그럴 재간이 없습니다.

 

갇혀 버렸기 때문입니다.

 

성화론자들 곧 우리들이

오히려 안식일 안지키고 주일성수 안하고 예수님을 안 믿는 것이

포로되었고 갇혔다고 그들을 자유케 할려고 복음을 전도 한다고 여기겠지만

 

정작 그 전도를 하는 자들이 갇혀버렸고 포로되었다는 식스센스의 반전이다는 겁니다.

 

우리 신체 자체가 철저하게 강도의 굴혈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기도하는 집으로써의 신체가 아닙니다.

 

늘 무능함을 원하고 있고

종말의 끝을 미리 앞 당기는 시선을 우리는 원치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나 깨나 우리의 기도는 그저 힘을 추구하는 겁니다.

내 구원 내 구원 뿐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제대로 갇혀있습니까?

이런 상황에서 십자가의 복음은 나를 십자가에 못 박는 겁니다.

 

끝을 미리 누려 보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했던 모든 것들이

 

참 의미 없다 라는 겁니다.

 

마이너스 100점 땡 탈락 짖만 해놓고도

그런 배설물만 쌓았을 뿐인데도

 

그 배설물 치워주시는 주님이 감사한게 아니라

내 배설물 건드렸다고

나 라는 똥차 건드렸다고

늘 수시로 살인의지를 불태우고 있는 우리의 몸을

 

주님은 눈물로써 지적하시고 있습니다.

 

우리는 나의 눈물로 주님의 눈물을 방어하고 있지만

그 간극은 이루 말 할 수 없는 눈물입니다.

 

주님의 눈물이 나를 무릎 꿇게 하기를 바래야 할 것입니다.

 

 

 

 

 

 

 

 

 

 

 

 

 

 

 

 

 

 

 

 

 

 

평화를 깨뜨리는 어린아이의 소동 (19:28-40)

 

2014/09/17 10:28 in 성령행전(피활동,인간극복)

 

평화를 깨뜨리는 소동케 하는 복음 (19:28-40)

 

 

(19:28, 개역)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앞서서 가시더라

(19:29, 개역) 감람원이라는 산의 벳바게와 베다니에 가까이 왔을 때에 제자 중 둘을 보내시며

(19:30, 개역) 이르시되 너희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아직 아무 사람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의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너라

(19:31, 개역) 만일 누가 너희에게 어찌하여 푸느냐 묻거든 이렇게 말하되 주가 쓰시겠다 하라 하시매

(19:32, 개역) 보내심을 받은 자들이 가서 그 말씀하신 대로 만난지라

(19:33, 개역) 나귀 새끼를 풀 때에 그 임자들이 이르되 어찌하여 나귀 새끼를 푸느냐

(19:34, 개역) 대답하되 주께서 쓰시겠다 하고

(19:35, 개역) 그것을 예수께로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나귀 새끼 위에 걸쳐 놓고 예수를 태우니

(19:36, 개역) 가실 때에 저희가 자기의 겉옷을 길에 펴더라

(19:37, 개역) 이미 감람 산에서 내려가는 편까지 가까이 오시매 제자의 온 무리가 자기의 본 바 모든 능한 일을 인하여 기뻐하며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여

(19:38, 개역) 가로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 하니

(19:39, 개역) 무리 중 어떤 바리새인들이 말하되 선생이여 당신의 제자들을 책망하소서 하거늘

(19:40, 개역)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이 사람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지르리라 하시니라

 

 

평화는 조용하고 평안하고 쉼이 있고 안정감이 있고 다들 좋아라 하는 그런 의미입니다.

그런데 이 평화를 깨는 것이 뭔고 하니 바로 평화 그 자체입니다.

Posted by 김 대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