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잡고자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게 옳은가?” (20:19-26)

 

(20:19, 개역) 서기관들과 대제사장들이 예수의 이 비유는 자기들을 가리켜 말씀하심인 줄 알고 즉시 잡고자 하되 백성을 두려워하더라

(20:20, 개역) 이에 저희가 엿보다가 예수를 총독의 치리와 권세 아래 붙이려 하여 정탐들을 보내어 그들로 스스로 의인인 체하며 예수의 말을 책잡게 하니

(20:21, 개역) 그들이 물어 가로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아노니 당신은 바로 말씀하시고 가르치시며 사람을 외모로 취치 아니하시고 오직 참으로써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시나이다

(20:22, 개역) 우리가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가하니이까 불가하니이까 하니

(20:23, 개역) 예수께서 그 간계를 아시고 가라사대

(20:24, 개역) 데나리온 하나를 내게 보이라 뉘 화상과 글이 여기 있느냐 대답하되 가이사의 것이니이다

(20:25, 개역) 가라사대 그런즉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하시니

(20:26, 개역) 저희가 백성 앞에서 그의 말을 능히 책잡지 못하고 그의 대답을 기이히 여겨 잠잠하니라

 

 

누가 당신에게 그런 권한을 주었는가 라는 권세에 대한 논쟁을

더욱더 초과잉적인 증상으로 나타나게 한 비유로 인해

그 차이로 갈라놓는 것이 포도원 농부의 비유였습니다.

그러니 저들은 화가 끝까지 났습니다.

어떻게 하면 죽일까?

 

바로 이것이 그들의 모든 관심사였습니다.

 

그러니 차라리 처음부터 질문을

예수 당신이 주 되심을 원치 않습니다 라는 질문만 하라 말이죠

그런 질문에 대한 답변만을 예수님은 일관적으로 하시는데
(질문 속에는 듣고픈 답을 미리 깔고 있는 겁니다. 당신은 주가 되면 안되는거 알지?)

 

대제사장 바리새인 서기관 율법사들은 자꾸 질문을 뱅뱅 돌려서 말하고 있습니다.

즉 대중을 의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강도의 소굴이라는 철통밥그릇을 놓치고 싶지 않고

(모든 종교직분은 이런 강도체제 수호입니다. 종교 뿐만이 아닌 모든 조직도 동일하게)

동시에 예수라는 작자가 주가 되는 꼴은 보기도 싫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입장에서

그들은 놀랍게도 권력과 손잡게 됩니다.

 

자신들이 저들은 악마라고 주장하면서 그들로부터 독립투쟁을 벌렸으면서도

예수님이 주가 되는 그 사건(십자가사건)만은 막고자

(저들 악마)과 손을 잡고 예수님을 죽이고자 책잡는 일을 벌리는

극단적인 상황까지 내몰리고 있었던 겁니다.

 

책을 잡을 정도면 그 정도로 불안하다는 것이고, 많이 아니 엄청나게 흔들리고 있다는 겁니다.

늘 꼬투리 잡기가 아니면 안될 정도이니까 말입니다.

 

즉 저들이 에수님을 극단적으로 몰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로 예수님이 저들의 극단적인 위기로 몰아가서 나올수 있는 속내를 다 드러내도록 하시는 겁니다.

(현장에서 간음하다 잡힌 여인 이야기가 그 대표입니다. 너무 너무 우연적으로(비필연=필연의 초과잉성) 간음하다 잡은 여인 근처를 예수님이 지나가고 있으니 예수님을 시험하고픈 마음이 안들래야 안들수가 없습니다. 또 하필이면 일만달란트 탕감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백데나리온 띠먹고 도망친 친구가 하필이면 우연히 아주 아주 우연히 옆을 지나가고 있으니 안붙잡고는 못배기는 겁니다. 이런 두 이야기를 통해서도 예수님을 올무쳐서 시험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자기 꾀에 자기가 쳐놓은 올무에 자신들이 걸려 넘어지는 실족케 하기의 달인을 괜히 만난 겁니다. 괜히~~~~)

 

그것이 바로 가이사에게 세금내어야 하느냐 하나님께 세금을 내어야 하느냐 라는 질문입니다.

 

책 잡고자 하는 질문 곧 시험 테스트 문제가 고작 이겁니다.

가이사에게 바친다고 하면 종교꾼들이 가만히 두질 않을것이고 그런 유대인 대중들은 자신들의 편이 되고 자신들의 정당성은 확보가 될 것이며

하나님께 바쳐야 한다고 하면 가이사 정권에 대한 도전을 드러내는 것으로써 정치적으로 매장시키기 좋은 겁니다.

 

이거 어디서 많이 보던 장면 아닙니까? 맞어 맞어 맞어 어디서 많이 본 장면 같애

 

맞습니다.

 

세례요한의 세례 주는 권한이 하늘에서 왔는가? 사람으로부터 왔는가? 라는 질문을

 

그대로 모방해서 역으로 예수님께 한 방 날려 보겠다는 거죠

 

자신들도 답변을 못했거든요

하늘에서 왔다고 하면 세례요한을 그들은 거부했으니 믿지 않는다고 할것이고

사람에게로 왔다고 하면 선지자로 인정하는 백성들로부터 역시나 거부당할 것이고

 

(20:4, 개역) 요한의 침례가 하늘로서냐 사람에게로서냐

(20:5, 개역) 저희가 서로 의논하여 가로되 만일 하늘로서라 하면 어찌하여 저를 믿지 아니하였느냐 할 것이요

(20:6, 개역) 만일 사람에게로서라 하면 백성이 요한을 선지자로 인정하니 저희가 다 우리를 돌로 칠 것이라 하고

 

이래나 저래나 당할 수 밖에 없는 질문을 받았으니

이제는 예수 너 차례다 한번 당해 보라는 식으로

똑같이 답변을 못할 줄 알고 책잡고자 질문했는데

 

그 답변이 너무 쉽고 간단합니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얼마나 쉽고 간단 명료합니까? 또렷하고 모호하지 않고

의문의 미흡함이 없지 않습니까?

 

결국 저들은 양쪽 다 걸칠려고 하기 때문에 힘이 드는 겁니다.

 

예수님은 처음부터 간단했습니다. 나는 너희들이 나의 백성이 되는 것을 원치 않는다 라고 나오시는 겁니다.

 

이것을 고대로 따라서 모방한 것이죠.

 

즉 이것은 결국 예수님이 주가 되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라는 질문이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어떤 나라의 독립투쟁도 다 동일합니다.

적 보다 독립후의 정권은 남이 아닌 내가 잡아야 한다는 식입니다.

 

이것이 인간은 갇혀있다는 증거입니다. 포로된 겁니다.

정치인들이 이것을 모릅니다.

그래놓고 정치 곧 남을 위해 바른정치를 하겠다고 나서는 겁니다.

결국 남을 돕기는커녕 등쳐먹고 있다는 것을

그래서 악에 갇혀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는 마치 지옥간 부자와 똑같습니다.

차라리 아예 노골적으로 나는 남을 등쳐먹기 위해 정치합니다 라고 나오면 되는 거죠.

(소문난 악인 삭개오 집에 들어가 대접을 받는 이유입니다. 갇혀있음을 인정하는 자는 죄인 밖에 없습니다. 다른 자들은 너무 너무 건강해빠져서 의사따위를 필요없다고 거부합니다.)

 

그러니 로마라는 외부의 적(악마) 보다 예수 라는 내부의 적인 경쟁자를 빨리 제거하는 것이

로마와 손잡아서라도 반드시 제거 해야한다는 점인 겁니다.

 

이것이 모든 인간의 속성입니다. 대표성으로 보여주는 겁니다.

 

즉 왕은 하나님도 예수도 되면 안된다.

어디까지나 왕은 내가 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부담은 싫고 허수아비 하나 세워서 뒤에서 조종하는 그 맛

호구 하나 만나서 눈탱이 치는 그 맛, 그 짜릿한 맛을 못하면 미쳐버릴 것이다고 어떤 광고문구를 한번 적어봤는데

부담가고 골치 아픈 것을 싫고

호구 왕 하나 허수아비로 세워서 뒤에서 조종하는 그 맛만 누리고 싶은 겁니다.

 

교회를 가만히 보면 이 [왕 싸움]이 장난 아닙니다.

공도의 소굴이니 당연합니다.

 

목사와 장로간의 다툼은 늘 이런 식입니다.

중간에 낑긴 고래등 싸움에 새우등 터지는 것이 교인들입니다.

그런 교인이 나중에는 권력을 잡게 되면 그 동안 당한 것 또 복수하듯이 펼칩니다.

그러니 교회는 복수의 터전입니다.

 

솔로몬 황금 성전 이후의 이스라엘의 왕 싸움은 성전을 중심으로 한 복수혈전입니다.

 

이런 왕게임 때문에 상대방을 책잡고자

가이사 라는 동전에 세겨진 인물이 동원이 되는 겁니다.

 

가이사를 왕으로 여기느냐 하는 점입니다.

 

즉 예수님이 곧 하나님이 왕 되는 것을 원치 않기 떄문에

예수님의 주 되심을 원치 않기 떄문에

 

다른 시시콜콜한 것들이 늘 사건으로 터지는 곳이 교회이다는 겁니다.

강도의 소굴입니다.

 

어쩌면 예수님은 예루살렘이 왜 망해야 하는 그 알리바이를 모으시고 있는듯합니다.

이런 복수심이 가득한 원수의 문을

 

뚜껑 열 께 ~~~~~~~ 라고 하시는 겁니다.

 

안 튀길께 ~~~~~~~~

 

우리는 빨리 이런 지적을 당해야 할 입장에 놓인 겁니다.

우리 속에는 늘 복수심이 부글 부글 끓고있는

우리 마음 자체가 지옥불구덩이입니다.

 

그런 입장에서 너희 가운데 너희 안에 천국이 있다 라는 답변은

(천국이 언제 임합니까 라는 잘못된 질문에 대한 답변)

진짜 천국만이 우리 마음이 늘 지옥 불처럼 부글 부글 끓고 있다고 지적해 주는 천국입니다.

 

세상 왕을 끌여들여서 라도 하나님이 왕 되는 것을 막겠다는 것이 같은 원리로 작용합니다.

(지옥간 부자가 선지자를 보내서 라도 저 거지나사로를 꺽고야 말겠다는 심뽀입니다.)

 

그러나 이미 악한 농부 비유에서 예수님 자신의 죽음을 언급하셨습니다.

문제는 저들이 이 포도원 농부의 비유를 얼마나 대충 대충 들었으면

자신들이 올무를 친다고 여기겠지만

정작 예수님이 올무를 치는 것에 점점 더 말려들고 있다는 겁니다.

 

즉 자신들의 천재됨 의인됨 왕 됨을 때려죽어도 포기 못한다는 점이

정말 정말 신비롭다 라는 사실입니다.

 

안 신기합니까?

 

예수님 자신의 죽음을 자신의 입으로 비유로 증거했습니다.

그런데 저들은 예수님을 어떻게 하면 죽이겠는가에 대한 뒷 북 대책을 마련하는 것이

겨우 책잡기 라는 모습입니다.

 

자기 목숨을 내어주심에 대해서 전혀 무슨 말인지를 모르고 있는 겁니다.

그래놓고 죽이겠다고 하는 겁니다.

 

그래 그래 내가 죽어주마 내 목숨을 내어줄게 라고 해도

막무가내로 기여이 자신들의 손에 피를 묻히고야 말겠다는 것입니다.

 

? 왜 일까요?

그것은 성전 때문입니다. 인간의 손으로 세우는 성전은 반드시 피가 묻어야만 세워지고 유지가 되는 겁니다.

 

그것을 예수님은 들추어내시는 겁니다.

사람의 손으로 짖지 않는 성전이 있다는 겁니다.

 

금시초문의 성전인 거죠.

 

이 모습이 전형적인 이미 지옥에 간 부자를 보면 어쩜 그리 똑같은지를 재차 확인케 됩니다.

 

정말 신기하죠

 

지옥간 부자가 선지자를 보내달라는 요청에 대해

아브라함은 계속 너와 나 사이의 간극이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말하는 말은 귀에도 들어오지 않고

그저 땅에 있었던 버릇대로 저 나사로와의 차이 그것도 과거의 땅에 있을 적의 차이만을 주장하는 겁니다.

 

자꾸 누워서 침 뱉고 있다는 겁니다.

가이사 까지 끌여들여서

예수님의 주 되심

하나님의 왕 되심을 거부하는 것이

누워서 침 뱉기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가이사를 끌여들어서 까지 나는 저 예수와 같지 않음을 감사합니다.

저는 이레에 두 번 금식, 십의 이조를 드리고 라고

예수와의 간극을 벌리고 있는 겁니다.

 

도리어 예수님으로부터 간극벌림 당하고 있는 줄도 모르고 말이죠.

 

므나 비유도 동일하다고 했습니다.

주의 왕 되심을 원치 않는다는 겁니다.

 

그러니 대제사장과 그의 무리들이

무슨 짖을 하든 어떤 대책을 세우든

도리어 남 좋은 일

곧 예수님의 주 되심을 더더욱 드러내는 짖만 골라서 할 수 밖에 없다는 겁니다.

 

유대인이 율법 지키기가 나에게는 사랑이 없다 라는 단절성을 느끼는 회개가 아니라

도리어 이방인 곧 자기 보다 못한 이방인과의 거리두기라는 재미에 빠져버린 겁니다.

나는 의인이요 건강하고 성화된 거룩한 자이고

저들은 더러운 토색하고 뭘해도 죄만 짖는 자들이다 라고 말이죠

저들과 달라서 하나님께 너무 너무 감사드립니다 라고 거리두기에 빠진 겁니다.

이방인이 더더욱 더러운 짖만 하니 자신들은 더 좋은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율법도 못 지키는 이런 이방인을

사도바울을 통해서 다시 율법 속으로 집어 넣는 이유는

오히려 저들 유대인과의 거리두기를 위함이다고 했습니다.

 

거리두기 하는 재미로 살다가 도리어 자기 보다 못한 이방인으로부터 거리두기를 당해야 할 판국에 놓여버리니

 

약을 바짝 올려도 보통 올리는게 아닙니다.

결국 이들 이방인도 예수님의 운명 속에 놓이게 하기 위함에

유대인이 반드시 마귀 역할을 톡톡히 해 주는 셈입니다.

 

동시에 유대인은 하나님의 왕 되심을 더더욱 거부하는 강퍅케 만드시는 겁니다.

 

(9:7, 개역) 또한 아브라함의 씨가 다 그 자녀가 아니라 오직 이삭으로부터 난 자라야 네 씨라 칭하리라 하셨으니

(9:8, 개역) 곧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 오직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기심을 받느니라

(9:9, 개역) 약속의 말씀은 이것이라 명년 이 때에 내가 이르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시니라

(9:10, 개역) 이뿐 아니라 또한 리브가가 우리 조상 이삭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잉태하였는데

(9:11, 개역)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9:12, 개역)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9:13, 개역)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9:14, 개역)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9:15, 개역)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9:16, 개역)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9:17, 개역) 성경이 바로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일을 위하여 너를 세웠으니 곧 너로 말미암아 내 능력을 보이고 내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려 함이로라 하셨으니

(9:18, 개역)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 하시느니라

 

인간은 자기 스스로가 강퍅해 질 수 있다고 여깁니다.

완전 웃기는 소리죠

 

숨도 자신이 쉰다고 여깁니다.

절대로 아닙니다.

숨쉬기 싫어도 자동적으로 숨 쉴 수 밖에 없도록 조치하시는 배려가 보이지 않게 작용합니다.

 

결국 주님이 강퍅케 하셔야 인간은 비로소 강퍅해 질 수 밖에 없는 겁니다.

그것도 예수님의 주 되심을 위해서 반드시 강퍅함이 그 대조로써 배경으로 카페트 깔리듯이 깔리는 겁니다.

 

아무나 강퍅해 지는 것이 아닙니다.

 

(14:4, 개역) 내가 바로의 마음을 강퍅케 한즉 바로가 그들의 뒤를 따르리니 내가 그와 그 온 군대를 인하여 영광을 얻어 애굽 사람으로 나를 여호와인 줄 알게 하리라 하시매 무리가 그대로 행하니라

 

(14:8, 개역) 여호와께서 애굽 왕 바로의 마음을 강퍅케 하셨으므로 그가 이스라엘 자손의 뒤를 따르니 이스라엘 자손이 담대히 나갔음이라

 

(14:14, 개역)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

 

(14:17, 개역) 내가 애굽 사람들의 마음을 강퍅케 할 것인즉 그들이 그 뒤를 따라 들어갈 것이라 내가 바로와 그 모든 군대와 그 병거와 마병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리니

(14:18, 개역) 내가 바로와 그 병거와 마병으로 인하여 영광을 얻을 때에야 애굽 사람들이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하시더니

 

즉 누군가 강퍅케 된다는 것은 결국 누구는 반대로 영광을 받는다는 겁니다.

곧 하나님 자신의 왕 되심을 영광으로 나타낸다는 겁니다.

 

여기에 이스라엘이라는 새로운 존재는 이 영광에 아무것도 한 것이 가만히 서서 누리게 되는 겁니다.

 

물론 그 강퍅함도 같이 격으면서 말이죠.

즉 강퍅한 자가 있다면 상대적으로 포로된 자만이 이 영광을 가만히 서서 누리게 되는 겁니다.

그 포로됨 즉 고아 과부 나그네 라는 죄인 중의 괴수들만이 누리는 영광이

강퍅을 거쳐서 누리는 영광참예입니다.

 

아 이것이 여호와의 왕 되심이구나 라고 말이죠.

 

지금 똑같이 예루살렘에 포로당하게 하시고서는

그 예루살렘을 강퍅케 해서 바짝 바짝 약을 올려서

 

예수님의 주 되심을 펼치시는 영광을 이루시는 겁니다.

맞습니다. 출 애굽처럼 출 예루살렘을 하시는 겁니다.

 

이제 더 이상 인간의 손으로 짖지 않은

의문의 성전이 아닌

 

참사랑의 성전인 예수님의 몸 곧 그리스도의 몸으로 이행되기 위해

인간이 지은 손으로부터 탈출케 하시고자

인간의 손으로 지은 성전을 강퍅케 하시는 겁니다.

 

주님은 주시는 분이지

교회를 인간 손으로 지어서 삥 뜯는 강도의 소굴과 같지 않다는 겁니다.

 

어떻게 하면 십일조 감사헌금 건축헌금 추수감사 개혁주일 등등으로

어떻게 해서든 등쳐먹을려고 ㅋㅋㅋㅋ

 

주님은 주시는 분입니다. 받는 분이 아닙니다.

드리겠다고 서원하는 놈 치고 드린 적이 없다는 것을 알기에 안 속습니다.

아예 드릴 생각 하지 마시길

 

실제로 제가 이런 말들 글들을 올리고 말하니까

목사 사모들과 전도사 사모들이 벌떼 같이 달려들어서

마귀라고 얼마나 몰아세우는지 ㅋㅋㅋ

정신병자들입니다.

교회에 덕 될 생각 아예 하시지 마시길

 

주님이 오늘은 나에게 무엇을 주셨는가만을 세면서 신나게 누리시면 됩니다.

 

(20:23, 개역) 예수께서 그 간계를 아시고 가라사대

(20:24, 개역) 데나리온 하나를 내게 보이라 뉘 화상과 글이 여기 있느냐 대답하되 가이사의 것이니이다

(20:25, 개역) 가라사대 그런즉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하시니

(20:26, 개역) 저희가 백성 앞에서 그의 말을 능히 책잡지 못하고 그의 대답을 기이히 여겨 잠잠하니라

 

주시는 것은 딱 하나 밖에 없습니다.

나의 지혜를 깨뜨리시는 십자가의 지혜를 주십니다.

 

나는 늘 유대인처럼 기적을 원하고 헬라인처럼 지혜를 구하는데

이것이 힘이 되기 때문입니다.

 

나를 나 답게 만든다고 여기는 겁니다.

저들 대제사장 사두개인 서기관들을 욕할 입장이 못되는 거죠.

우리도 동일하니까 말입니다.

그래서 포로된 겁니다.

포로되었으면 살려주세요 해야 할 입장인데

전혀 예수님이 그렇게 보이질 않고 도리어 책잡고자 하는 우리의 어두운 눈을 지적하시는 겁니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이 대답이 얼마나 쉽고 간단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저들은 기이히 여겼다고 했습니다.

 

즉 전혀 기이히 여길 답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기이히 여기는 것은

결과적으로 우리 또한 그 답변이 기이하다고 여기는 것과 같습니다.

 

즉 듣고픈 대답이 아니니까 기이할 뿐입니다.

듣고픈 대답이 따로 챙겨져 있기 때문에

그 답이 안나오니까 그저 기이할 뿐이다는 겁니다.

예상을 미리 했은데 그 예상을 빗나갔기 때문에 기이하게 여기는 겁니다.

 

예상한 대로 답변을 하면 전혀 전혀 기이하지 않겠지요.

 

그러니 답변을 하니까 기이해서

역시나 세례요한의 세례가 하늘로서이냐? 사람에게서이냐? 라는 질문에

답변을 못해 잠잠했듯이

 

지금도 동일하게 잠잠해 질 수 밖에 없기에 기이하다고 여기는 겁니다.

그럼 입 다물어야지요.

 

한 마디로 끝까지 예수님의 주 되심을 원치 않는다는 겁니다.

 

그렇게 나오면 예수님의 주 되심이 취소 됩니까?

 

더 좋죠 뭐 결국 더 더 더 예수님 좋으라고 하게 됩니다.

어 내 팔이 나의 명령도 없이 자기 마음대로 움직일까?처럼

점 점 더 남 좋으라고 하는 짖만 골라 골라 하게 되는 겁니다.

 

이것은 우리가 사도행전을 보면서 살펴봤듯이

끝까지 유대인들은 강퍅합니다. 그러면 그럴수록

주의 주 되심이라는 사도행전의 취지와 목적을 더더욱 미흡함없이 또렷이 드러내고 있습니다.

 

마치 애굽왕 바로왕이 강퍅해 지면 질수록 여호와의 영광은 더더욱 넘치듯이 말입니다.

 

이렇게 복음은 인간의 완악함을 가지고서 그 배경으로 깔고 증거됩니다.

 

뭐든지 주 안에서는 예가 되지 아니오 함이 없습니다.

 

뭘해도 우리는 죄 밖에 안되지만

예수님은 뭘 해도 은혜 밖에 안 나옵니다.

 

우리도 예루살렘처럼 빨리 들통나야 합니다.

우리의 완악함이 우리의 원수성이 빨리 들통나서

 

보이지 않는 참성전을 보고

그 간극을 누려야 합니다.

 

인간의 손으로 지은 성전에 빠져서 저 세리와 같지 않음을 감사합니다 라는 차이를 누리면 안됩니다.

 

그러다가 도리어 나 보다 못한 자로부터 간극벌림 당하는 꼴을 당하게 되면

어찌하겠습니까?

 

그것이 바로 닭입니다. 나 보다 못한 닭으로부터 지적 당했을 때

비로소 감사가 덮치는 것은 주님의 붙잡아 주심이지

주님이 붙잡아 주지 않는다면

인간의 완악함을 통해서 도리어 간격벌림 당하는 것을 격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모든 것이 주님의 자작극입니다.

 

이런 십자가의 지혜와 표적이 아니면

우리는 늘 수시로 허구를 쫏기 마련이기에

늘 간섭하시는 사건을 통해서

그의 섬김을 누리게 되는 겁니다.

 

주님이 왜 예루살렘을 보시고 우셨습니까?

바로 우리를 보고 우시는 겁니다.

포로 되었다는 겁니다.

갇혔다는 겁니다.

아무도 물에 빠져 있는 나를 건져줄 생각을 하고 있지 않다는 겁니다.

 

너무 너무 불쌍하다는 겁니다.

 

아무도 생명줄을 던져 줄 수가 없습니다.

 

다들 물에 빠져 있기 때문입니다.

 

물 밖에 있는 분이 유일한 희망입니다.

 

율법 외에 한 의 만이 유일한 희망입니다.

 

주여 이 악에서 구하옵소서

 

나를 나에게서 건져 주옵소서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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