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논쟁과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뇨] (20:27-44)

 

죽은자의 하나님이 아닌 산자의 하나님 

 

(20:26, 개역) 저희가 백성 앞에서 그의 말을 능히 책잡지 못하고 그의 대답을 기이히 여겨 잠잠하니라

(20:27, 개역) 부활이 없다 주장하는 사두개인 중 어떤 이들이 와서

(20:28, 개역) 물어 가로되 선생님이여 모세가 우리에게 써 주기를 사람의 형이 만일 아내를 두고 자식이 없이 죽거든 그 동생이 그 아내를 취하여 형을 위하여 후사를 세울지니라 하였나이다

(20:29, 개역) 그런데 칠 형제가 있었는데 맏이 아내를 취하였다가 자식이 없이 죽고

(20:30, 개역) 그 둘째와 셋째가 저를 취하고

(20:31, 개역) 일곱이 다 그와 같이 자식이 없이 죽고

(20:32, 개역) 그 후에 여자도 죽었나이다

(20:33, 개역) 일곱이 다 저를 아내로 취하였으니 부활 때에 그 중에 뉘 아내가 되리이까

(20:34, 개역)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세상의 자녀들은 장가도 가고 시집도 가되

(20:35, 개역) 저 세상과 및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함을 얻기에 합당히 여김을 입은 자들은 장가가고 시집가는 일이 없으며

(20:36, 개역) 저희는 다시 죽을 수도 없나니 이는 천사와 동등이요 부활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자녀임이니라

(20:37, 개역) 죽은 자의 살아난다는 것은 모세도 가시나무 떨기에 관한 글에 보였으되 주를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시라 칭하였나니

(20:38, 개역)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에게는 모든 사람이 살았느니라 하시니

(20:39, 개역) 서기관 중 어떤 이들이 말하되 선생이여 말씀이 옳으니이다 하니

(20:40, 개역) 저희는 아무 것도 감히 더 물을 수 없음이더라

(20:41, 개역)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사람들이 어찌하여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이라 하느냐

(20:42, 개역) 시편에 다윗이 친히 말하였으되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20:43, 개역) 내가 네 원수를 네 발의 발등상으로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니라

(20:44, 개역) 그런즉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였으니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뇨 하시니라

 

 

지난 시간에 책잡고자 한 질문에 예수님의 답변은 전혀 책잡을 것이 없고

도리어 기이히 여길 정도였다고 했습니다.

 

왜 기이할 까요? 책잡히지 않아서????

 

아닙니다.

 

예상 답변이 나오지 않았고

그 답변 자체가 차원이 다른 차이성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대제사장 무리들처럼 예수님이 어떻게든 답변을 하게 되면 빼도박도 못하는 곤란한 상황이 닥칠테니

세례요한의 세례가 하늘에서인지 사람에게서인지? 어디서 왔는지? 에 대한 답변을

자신들 처럼 그냥 모르겠다 하면 되는데

 

답변을 오히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라는 답변이

뭔가 차이성을 보여주고 있다는 겁니다.
그 차이는 예수님의 답변은 이미 자신의 죽음을 깔았고, 즉 단절이고,
저들은 정반대로 자신들의 생존을 깐 겁니다. 그들의 부활 천국 또한 생존의 연장선 곧 개방입니다.

 

네 맞습니다. 바로 그겁니다.

눈치 채셨겠지만

바로 죽은자의 하나님이냐 아니면 산자의 하나님이냐 라는 제목처럼

 

결국 저들은 죽은자의 하나님을 믿고 있다는 겁니다.

 

산 자의 하나님은 예수님 뿐이고 말입니다.

 

오늘 본문이 너무 너무 중요한 이유는

 

죽은자의 하나님과 산자의 하나님의 대립인데

그것이 바로 오늘 본문에서 나타납니다.

 

산 자의 하나님이 뭔가를 알려면 죽은자의 하나님이 대조적으로 나와 줘야만 합니다.

 

그리고 죽은자의 하나님이 뭔가?를 알려면 산 자의 하나님도 대조적으로 나와 줘야 하듯이 말이죠.

 

지난 시간에도 말했듯이

저들의 답변은 질문에 대한 회피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회피하지 않습니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다른말로 할까요?

죽은자는 죽은자에게

산 자는 산 자에게

 

입니다.

 

또 다른 말로 할까요?

 

너희들의 하나님은 죽은자의 하나님이다는 겁니다.

나의 하나님은 산자의 하나님이다는 겁니다.

 

또 다른 말로 할까요?

 

너희는 나 예수가 주가 되는 것을 원치 않는다 라는 겁니다.
하나님의 왕 됨을 원치 않는다는 겁니다.

그런데 사실은 그 이유가 내가 너희의 주가 되는 것을 원치 않기 때문이다는 겁니다.

그러니 너희는 이유없이 나를 주가 되지 않도록 할려고 한다 라는 겁니다.

 

저들의 말과 행동과 생각등이 자기가 주체가 되어서 예수님을 거부하는 줄 알았는데

사실상 예수님께서 자신의 주 되심 때문에 그렇게 그런 마음을 심었다는 겁니다.

 

그 연장 선상에서 오늘 본문에 부활논쟁이 벌어지고

그 다음 예수님의 질문에 저들이 또 답변을 못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답변을 못할 수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이 자신을 저들의 주가 되지 웒기 않기 때문에 저들의 주가 되지 못하도록 예수님께서 심어버렸기 때문에

저들은 능히 답을 할 수 조차도 없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의 주장이 옳다 라고 추임새를 누가 삑사리 실수로 말할 수 밖에 없도록 하십니다. 서기관이였던가요?

 

자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은

포도원 농부 비유에서 미리 자신의 죽음을 미리 깔아버렸습니다.

 

이것이 바로 큰 차이성을 우리가 볼 수 있는 기준이 됩니다.

왜 저들과 차이가 나느냐?

저들의 답변은 왜 흐지부지하고 모호하며 의문과 미흡할 뿐인가?

그런데 왜 예수님의 답변은 또렷한가?

 

바로 자신의 죽음을 미리 깔아 버렸고

저들은 그 반대로 자신의 생존을 깔아 버렸기 때문에 늘 모호합니다. 의문의 증서처럼 말입니다.

 

자 그래서 부활 논쟁에서 죽음을 깔아 버린 입장에서 보면 사두개인의 질문에 쉽게 답을 할 수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죽은자의 하나님이 아니고 산 자의 하나님이다는 겁니다.

 

그런데 저들은 자신의 생존을 깔아놓고서 논쟁을 벌리기 때문에 늘 모호하며

산자라고 우기나 죽은자의 하나님이다는 겁니다.

 

하나님과 동일시 일치 동질성을 추구하는 것이 도리어 모호하고

하나님과 거리두기인 차이성을 추구하는 것이 도리어 또렷하다는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죽은자도 살리시는 모세가 본 가시떨기 라고 했습니다.

 

가시떨기가 뭘까요?

그 사건은 바로 모세가 하나님을 직접 대면하는 장면에서

가시떨기의 불로 나타났다는 겁니다.

그냥 가시떨기 나무가 없이 그냥 여호와의 불로 나타나면 안되는 것일까요?

나타나도 전혀 무방합니다. 아무 문제 없습니다.

그런데 왜 구지 가시떨기에 붙은 여호와의 불로써만 나타나느냐 하는 문제 입니다.

 

사물에 나타났는데 그럼 가시떨기 나무를 우상숭배하듯이 할까요?

바로 그것이 핵심입니다.

 

가시떨기 나무는 아무것도 아닌 찌끄래기 무용지물인 아무것도 아닌 것입니다.

 

그런데 불이 붙었는데 여호와의 불이다는 겁니다.

 

그럼 불이 붙었으면 가시떨기 나무에 붙어서 타 들어가면

가시떨기 나무는 소멸이 되고 사라지게 되고

불꽃도 가시떨기나무의 소진으로 인해 다 타버려서 더 이상 불이 남아있지 않아야 합니다.

 

그런데 예상하기를 여호와의 불이니까 문제는 불은 계속 남는다고 칩시다. 가시떨기 나무는 사라져도 무방하니까.

여호와의 불이니까 뭔가 특별하겠지요

 

그런데 가시떨기 나무가 소진 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이것을 모세는 죽은자도 살리신다는 의미로 봤다 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겁니다.

그것은 하나의 현상이고 약속 자체의 기능을 말하고자 하는 겁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다는 것은

그들이 분명 가시떨기나무와 같은 불에 붙으면 금방 발화되어 바로 소진되어버리는

그야말로 죽은자와 같음에도 불구하고 산 자 인 것은 여호와의 약속 때문이다는 겁니다.

그러니 그들은 약속의 증상이다는 것이죠. 

여호와의 불이 뭔가를 말하기 위한 증상이 바로 가시떨기나무다는 겁니다.

 

이들 인물 외에는 전부다

그 반대로써 우상의 증상이다는 겁니다. 죽은자의 하나님이다는 겁니다.

 

참 기이하죠?

분명 누가 봐도 취하셨어요 아니 누가 봐도 죽은자와 같이 태가 끊어진 죽은 태인데 (여기서 태란 아기 생명 곧 생명이 끊어진자인데) 
더 이상 자손도 번성치 못하는 할례 즉 육이 차단이 되었다면 죽은자인데 고자인데 불임여성인데

 

일부러 고자 만들어서 일부러 불임여성 죽은태 만들어서

죽은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산자의 하나님이다 라고 사건을 통해서 약속을 증거하셨다 라는 겁니다.

(일부러 죄인 중의 괴수 만들어서 자신의 주 되심을 증거하더라 말입니다.)

 

또 반드시 반대인 순풍순풍 잘 놓는 할례받지 않은 자(애굽족장의 여자들)와의 대립속에서 말이죠.

 

아브라함이 그랬고 이삭은 본인 자체가 육의 통로가 아니였고

야곱은 12을 낳았는데 정작 10명의 형제들로 인해 죽은 요셉이 나머지 형제를 살리는 거리두기 차이성으로써

죽은자가 산 자를 도리어 살리는 그

래서 알고보니 죽은자가 산자였고 산자는 죽었는데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요셉의 뺑뺑이 거리두기 단절을 통해서 

다시 살게 되는 그 차이를 누림으로써 이 약속에 참예, 부활(3번의 뺑뺑이 단절)에 참예가 되었다는 겁니다.

 

 

이것이 죽은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자의 하나님이다는 겁니다. 곧 십자가의 사건이 개입 되어 있다는 겁니다.

이것은 엘리야 사건도 동일합니다.

내 열심이 특심인데 나만 남았다고 하는 것은 죽은자의 하나님과의 일치성입니다.

그래서 똑똑한 너무 똑똑한 엘리야를 실패케 만들어서

죽은자로 만들어서

 

그것도 꼴에 숫자 라고 우기냐?

그것도 꼴에 용서 라고 우기냐? 7번 용서도 용서냐?


7번 용서와 vs 770번 용서의 초과잉적 대조

딸랑 한 명 vs 칠천명 남은자

백데나리온 vs 일만 달란트 탕감을 통해서


간극이 없는(도토리 키재기) 죽은자의 하나님이 아닌, 그것도 용서냐 라고 초과잉의 간극을 보여주는 산 자의 하나님이다는 겁니다.
 

죽은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산 자의 하나님이다고 하시는 겁니다.

 

우리가 기껏 믿어대는 하나님은 죽은자의 하나님이다는 것을 지적하시고

초과잉의 번데기 주름으로 옮기도록 하신다는 겁니다.

 

참 소박한 하나님은 하나님이 아닌 죽은자의 하나님이다는 겁니다.

적어도 억수르 하나님이 산 자의 하나님이다는 겁니다.

그 억수르가 넉넉히 이기시는 바로 예수님의 하나님이다는 겁니다.

(롬 8:32, 개역)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롬 8:33, 개역)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롬 8:34, 개역)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롬 8:35, 개역)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협이나 칼이랴』

(롬 8:36, 개역)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롬 8:37, 개역)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롬 8:38, 개역)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롬 8:39, 개역)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자 그런 의미에서 부활논쟁에 들어가 봅시다.

부활 조차도 인간은 자신의 생존을 깔고 들어가기에

지금 생존이라는 살아있다의 연장선을 꿈꾸는 자기불멸 영생불멸을 기준으로 삼은 겁니다.

그러니 더러우면 안되는 거죠.

계보학처럼 위생학처럼 깨끗하고 깔끔해야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시형제 결혼법에 의하면 맏며느리인 큰 형수가 과부가 되었을때에

일곱 형제의 아내가 되었는데

죽어서는 과연 누구의 아내가 되겠느냐 라는 도저히 풀수 없는 문제로인해

결국 부활 이라는 개념을 없애 버리는 겁니다.

 

사실상 부활이 아닌 천국을 없애버린 거죠.

 

합리적인 논리에 의해 천국이 있으면 이 문제가 골치 아파 지니까 말입니다.

 

그러니 이들은 여전히 예수님의 주 되심을 원치 않는 겁니다.

더럽다는 겁니다.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비유가 그래서 싫은 거죠.

벼르고 벼루어서 드디어 터트린 겁니다.

부활 없다. 천국 없다 라는 겁니다.

 

그러니 사두개인은 바리새인의 하나님나라 운동도 못마땅해 했던 겁니다.

 

이것이 죽은자의 하나님 이다는 겁니다.

그럼 바리새인은 그럼 산 자의 하나님일까요?

바리새인은 부활을 보상적차원으로 본 겁니다. 천국운동도 그렇게 한 겁니다.

그래서 내세에서 참고 참아서 천국에서는 보상 받는 다는 겁니다.

더더욱 천국 운동을 할 수 밖에 없는 거죠.

그런데 그 천국이 예수님의 주 되심을 위한 천국은 아니다는 겁니다.

오히려 바리새인의 천국은 놀랍게도 예수님이 절대로 천국의 주 지옥의 주 심판의 주 긍휼의 주가 되는 것을 원치 않는 겁니다.
그런 천국을 꿈꾸니까 예수님은 자꾸 심판의 주로써 인자의 죽음을 자꾸 까니까 자꾸 부딧히는 겁니다.

천국이 언제 임하느냐 라는 바리새인의 질문이
언제 인자의 죽음 곧 심판이 어디서 임합니까 라고 제자들의 질문으로 바뀌니까
예수님의 주 되심을 원치 않는 겁니다. 예수님의 답변은 시체가 있는 곳에 독수리가 있다고 하십니다.

 

그러니 천국이 언제 옵니까 라는 겁니다.

그것 하나 믿고 모든 것을 참았다는 겁니다.

천국은 자신들의 투사요 유일한 희망인 거죠. 

이것이 죽은자의 하나님이요 희망인인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답변은 천국이 너희 가운데 있으면서 그 천국은 바로 언제 천국옵니까 라고 묻는 너희들에게 핍박받고 고난 받아서 죽임을 당하고 3일 만에 다시 살아난다고 합니다.

 

이 무슨 끔찍한 ?????

 

오히려 소경이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고쳐주소서 라고

죽어서 가는 천국 그런 배부른 신앙이 아닌

지금 당장 내 눈을 고쳐주는 천국이 이 땅에 임한 천국이요

우리의 죄악을 공격하고 침노하는 그래서 우리를 포로됨에서 탈출케 하는

실재적 하나님나라 라는 겁니다.

 

그러니 이 땅은 전시가 되어야 하는데

 

다들 죽어서 가는 천국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지금 힘든 것 참아서 보상받는 차원으로 부활을 꿈꾸고 있다는 겁니다.
배부른 소리 입니다. 현실의 천국은 전쟁중인데 말입니다.


그것이 세상이 일으킨 전쟁이 아닌 천국이 전쟁을 일으켰다면

저런 반대편에서의 배부른 생각이 보상적 천국관 곧 예수님이 주가 되는 것을 원치 않는다라는 것만 나열하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오병이어오 오천명을 먹이고 12광주리가 남았을때 도망치십니다. 임금 삼고자 하니 말입니다.

먹고 배부른 까닭이다는 겁니다.

 

그것은 지금 당장 보기를 원하나이다 라는 소경의 입장에서는 완전 배부른 소리인 겁니다.

 

지금 땅에서 꿈뜰거리는 살아 움직이는 천국은 외면한채

죽어서 만나는 천국만을 인식한다는 자체가

죽은자의 하나님이다는 겁니다. 곧 우상이 된 천국이지요.

천국은 인간의 대상물이 되지 않습니다. 죽은자의 하나님입니다.
정반대로 천국이 인간을 대상으로 쳐들어 옵니다, 산 자의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건강한자에게는 필요없는 산 자의 하나님이다는 겁니다.

 

갇힌바도 없고, 포로된 바도 없으니

희년의 소식은 남들 소식이 되는 겁니다.

 

오로지 두 소경에게만 기쁜소식인 희년이다는 겁니다.

산 자의 하나님 곧 약속의 하나님이요

 

배부른 자들에게는 우상의 하나님이다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또 역으로 질문을 합니다.

과연 산 자의 하나님인지 죽은자의 하나님인지?를 가려내는 차이성을 드러내는 겁니다.

곧 단절입니다.

 

사람들이 어찌하여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이라고 칭하느냐

 

곧 다윗은 다윗의 자손 그리스도에게 주라고 칭했으니 어찌하여 그의 자손이 되었으냐 라는 겁니다.

 

감히 아무도 답을 못합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자기 생존을 깔고 있습니다.

자신의 죽음을 깔아 버리면 아주 쉬운 답변입니다.
(물론 죽음도 나의 대상물로써의 죽음이 아닌
예수님의 죽음을 봄으로써 나도 결국 죽은 것으로써 그 죽음을 보면 말입니다.)

 

예수님처럼 자기 죽음을 깔아버리면 답이 아주 간단해 지는데 말입니다.

 

그럼 제가 말한대로 자기의 죽음을 깔아 봅시다 과연 답이 쉬워질까요?

 

죽은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산 자의 하나님이다고 했습니다.

 

자기죽음을 밑바닥에 깐다고(예수님을 흉내내어서) 다시 산 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흉내 내지 마세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라고 했습니다.

결국 다시 사는 자의 하나님이다는 겁니다.

죽었다가 다시 사는 그 간극이 있는 자의 하나님이다는 겁니다.

그것을 과연 자력으로 이룰자가 있겠습니까?
간극은 성령으로만 십자가의 영으로만 이루어질 뿐입니다.

그래서 약속을 한 자에게만 해당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죽었다가 삼일 만에 다시 사는 자에게만 약속하신 하나님이다는 겁니다.

 

가시떨기와 산 자의 하나님이다는 그 간극을 누린자가 모세였습니다.
그 정도로 볼수 없는 것을 보이도록 주님께서 낮아지셨고 끝까지 섬겼다는 겁니다. 
억수로 억수로 불쌍해서 긍휼히 여기셨다는 겁니다.

그것을 통해서 약속이 일방적으로 쳐들어 온 겁니다.

쌍방 언약이 아닙니다. 성화론쪽에서 유행하는 쌍방언약은 말도 안되는 거죠.

그것은 우상숭배조약입니다.

 

가시떨기는 죽은자입니다. 그런데 불이 붙었다는 겁니다.

여호와 자신의 약속이 오히려 죽은자 죽은태 고자 불임여성에게서 나타나

자신의 믿음을 과시했다는 겁니다.

의인은 오직 믿음으로 살리라 했으니

우리가 의인이 아닌 예수님 자신이 믿음으로 죽은 우리까지 살리시는 방식이

바로 이 믿음이라는 간극이다는 겁니다.

 

인간들이 기껏 믿어대봤자 사두개인과 같습니다.

자기 머리로 생각 해 보면 더러우면 안되니까 말입니다.

더러운 요소를 다 제거하는 겁니다.

그럼 성경 책도 다 삭제 되겠군요 ㅋㅋㅋㅋ
예수님의 족보 보다 더 더러운 족보가 어디있겠습니까? 그런데 사실은 간극입니다. 
그렇게 보는 너가 더 더럽다 라는 겁니다. 간극을 못 보는 죽은자의 하나님이니까 말입니다.

논리에, 이치에, 합리성에 부합 되지 못하면 언제든지 인간들은 거부를 하는 겁니다. 선악기준 때문입니다.

 

주의 주 되심을 거부하는 식입니다.

자기 믿음에도 안 맞으면 거부하는 거죠.

 

그래서 자기 믿고픈 것만 골라 믿고

자기 알고픈 것만 아는 겁니다.

 

사두개인은 그래서 배불러서 못 믿는 겁니다.
너무 너무 똑똑해서. 너무 천재라서 말입니다.

거기에 비해 바리새인은 더욱더 서민적으로 대중적입니다.

얼마나 이 세상의 삶이 고달픈 삶인데 죽어서 그 어떤 보상이 없다면 얼마나 피폐해지겠냐 말이죠.

천국은 그야말로 풍요한데 ...

 

그러니 풍요로운 겁니다. 지금은 가난하게 살아도 죽어서는 풍요를 누린다는 겁니다.

그래서 참아라 라는 겁니다. 부활이 있다는 겁니다.

 

사두개인 보다 한 발짝 더 들어간 겁니다.


얼마나 똑똑하고 천재적입니까? 즉 죽은자의 하나님입니까?

성령이 필요없는 사고방식입니다.

인간의 마리로써도 충분하니까 말이죠.
 

바로 이것이 다 인간의 생존을 바탕으로 깐 것이지

어린양 예수님의 죽음을 바탕으로 깐 사고방식이 아니다는 겁니다.

 

겨우 7번 용서인거죠

 

770번을 못 누리느냐 말이죠. 참소박한 것인가요?

 

백데나리온이라는 3개월 월급 띠먹고 도망친 자를 드디어 잡은 것이 천국이다는 겁니다.

백데나리온을 되찾았다는 것이 인간의 천국관이요 부활관입니다.

그 따위 영생불멸을 외치는 겁니다.

이것은 죽은자의 하나님입니다.

 

산 자의 하나님은 스케일이 엄청납니다.

겨우 3개월 월급 잃어버린 보상찾는 천국이 아닙니다.

 

일만달란트 용서의 천국입니다. 16만년의 월급으로도 못 갚는 빚 입니다.

그러니 누리는 것도 완전 다른 겁니다. 도대체 몇번을 죽었다 다시 살아나야 다 갚을까요?

그러니 누린다는 것은 빚 갚지 말고 그냥 누려라 그것도 아주 뻔뻔스럽게 누려라 라는 겁니다.

성화론자들은 꼴에 양심있는척 쪽팔린다 라고 합니다. 얼마나 예수님의 주 되심을 원치 않았으면 쪽팔릴까요?

 

왜 다윗의 자손에게 다윗은 자손인데도 불구하고 주여 라고 그리스도 라고

구원자 라고 했을까요?

 

답은 아주 간단합니다.

 

문제는 우리가 내 생존을 미리 깔고 있기 때문에 자꾸 어려워 지는 겁니다.

 

그렇다고 답 내는 것이 중요한게 아닙니다.

 

주의 주 되심 때문에 벌어진 겁니다.

 

주가 다윗의 자손으로 오시기 때문에

다윗은 예수님의 그리스도 되심을 봐 버렸기 때문입니다.


간극을 봐 버렸기 때문입니다.
 

이 보다 더 간단한 답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적어도 다윗은 자신이 주가 맞다 아니다?

아니였다 라는 바로 자기부인 회개가 벌어졌다 아니 덮쳐졌다 라고 해야 정확한 표현이겠지요

즉 성령을 받아서 이다는 겁니다.


다윗 자신의 왕 됨을 꼬라지를 보니 겨우 4배나 갚으라 라는 판결입니다.
그것을 율법대로 했다고 한 겁니다.

그런데 다윗의 자손 예수님은 바로 그런 다윗을 자신의 피흘리심으로 죽기까지 복종하심으로써 용서하신 겁니다.

뭘 용서해요? 나단 선지자가 말한 그 범죄인이 바로 다윗 너야 너
너의 입으로 말한 그 악독한 놈을 당장 쳐 넣어라 율법대로 행할지어다 라고 집행한 판관의 심판을 당할자가

판관인 바로 너가 범인이야 라는 겁니다. 그 범인을 용서하시고자 죽기까지 복종한 십자가를 봐 버렸다는 겁니다.

십자가가 왜 밝히 보인다고 할까요?

밝히 라고 강조하는 것은 남이 아닌 바로 내가 다윗과 같은 꼼수를 노린 것이 맞물려 있기 때문이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 원수가 발등상이라는 재판의 현장 심판의 현장에 심판받아야 한다는 겁니다.

시체가 있는 곳에 독수리가 있는 법 처럼 말입니다.

그 속에서 유일한 우편의 변호사는 너 다윗이 아니라 너를 구원할 자는 너가 아닌 바로 나 예수 뿐이다는 겁니다.
예수님이 유일한 구원자로 보인다는 것은 나는 매일 매일 가짜임이 재판장에서 발등상에서 심판대에서 늘 들추어져야만

변호가를 볼게 아니냐 라는 겁니다.

 

다윗은 성령을 받아 보니 주 예수 그리스도가 다윗의 자손으로 온다는 것을 봐 버렸다 라는 겁니다.

 

그것을 미리 맛배기로 본 것이 바로 여디디야 였고

 

그래서 다윗은 아브라함이 격은 그 믿음이 뭔가를 또 보게 된 겁니다.

다 알아버린 거지요 뭐!! 다 봐버렸으니까

 

아브라함이 왜 믿음의 조상이 되었는가?

이삭이 믿음으로 왔다 라는 봐 버렸다는 것을 다윗이 봐 버렸기 때문에

그 약속이 세상에나 그 수 천년전에 벌어졌던 사실을

자기에게도 세상에나 벌어졌다 라는 겁니다.

 

그러니 이것은 죄책감이고 뭐고 약속 앞에 지금 당장 엎드려서

다윗의 자손 그리스도여 나를 불쌍히 여겨주옵소서 라고 다윗 본인도 외친다는 겁니다.


아주 뻔뻔스럽고 당당하게 말입니다.


죽어서 가는 천국이 아닌
지금 나에게 닥친 지옥을 해결해 주지 않는 천국은 천국이 아니다는 겁니다.

지금 당장 포로된 것을 갇힌 것을 해결해 주는 살아있는 천국의 침노가

바로 다윗의 자손으로 벌어졌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자신의 원수 됨이 바로 갇혔다는 것에서

빼내시는 주께서 주께의

원수를 발등상 위에 놓는다는 사건을 그는 격게 되는 겁니다.

 

(20:42, 개역) 시편에 다윗이 친히 말하였으되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20:43, 개역) 내가 네 원수를 네 발의 발등상으로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니라

(20:44, 개역) 그런즉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였으니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뇨 하시니라

 

나를 지옥 보낼줄 모르는 예수는 가짜다 라고 했습니다.

나를 심판 할 줄 모르는 주는 가까 주 인 겁니다.

다윗은 봐 버렸습니다.

다윗의 원수를 다윗의 발의 발등상에 둘때까지 우편에 앉아 계신 주를 말입니다.

 

그 원수가 다윗 본인이다는 겁니다.

 

나를 심판 다윗을 심판하는 주가 바로 다윗의 자손 그리스도 예수 라는 겁니다.

지금 이 말씀을 예루살렘에서 하시는 겁니다.

예루살렘이 바로 원수들이다는 겁니다.

 

나를 나의 원수인 나를 발등상에 놓을 때 까지
주님은 우편(오른편 변호사)에서 나를 심판하심과 동시에

우편의 역할인 빼내시는 구원자이시다는 겁니다.

 

즉 구원자가 떳다 하면

나는 죽었구나 라고 복창해야할 마땅히 심판받아야할 원수임을 지적받는 겁니다.

즉 오른편 변호사가 있다면 반드시 검사 왼편 좌편에 있는 겁니다.

마귀는 검사 경찰로써 베드로 범인을 잡았으니 주님 기쁘시지

그 동안 이 범인 베드로 때문에 힘드셨지요 제가 잡아왔습니다. 자 결제 도장 찍으세요.

그런데 변호사 주님은 마귀야 고맙다 너가 드디어 좌편에 앉았구나

그래야 내가 변호사 기능을 발휘하지 않니

이 범인을 내가 죽기까지 변호했단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죽으심 피흘리심이 나의 죄악 때문임을 봄으로써

나를 내 안에 갇혀버린 나를 건지시는 십자가의 지혜를 펼치신다는 겁니다.

7번 용서에 빠져있는 갇혀버린 나의 지혜에서

십자가의 지혜는 용서 안해도 마땅한데 770번 용서를 하신가는 겁니다.

 

7번 용서와 770번 간의 간극을 벌리시는 그 간극이 바로

약속 곧 믿음

바로 산자의 하나님이다는 겁니다.

 

되도 않는 똥폼의 잉여가 아니라

그것도 잉여 축에 끼이냐 라고 아예 초극대의 간극을 벌리는 초과잉적 용서

일만달란트를 퍼붓는 십자가의 피가 바로 제대로 된 간극이다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산자의 하나님이고

그것 때문에 우리는 불임여성으로 죽은자로 환자로 죄인 중의 괴수로

세리 창기 창녀로

무익한종으로

어린아이로

무능한 자로

고아 과부 나그네로 부르심을 입은바 된 것이다는 겁니다.

 

바로 산자의 하나님 때문에 말입니다.

 

그 간극을 보여주는 간극 그 자체가 된 겁니다.

 

그러니 지금 예수님이 묻는 질문은 간극을 보여주는 겁니다.

그런데 자신들이 바로 아브라하 자손이다는 둥

모세의 제자들이다는 둥

하나님의 자녀이다는 둥 등등의

죽음이 아닌 살아있는 생존을 깔아버리니까?

 

그들의 성경 지식들이 전혀 전혀 남을 살리는데 전혀 쓰여지질 않고

더군다나 끝까지 믿고 있는 자기믿음에서조차도 자기를 살리는데 무용지물이다는 겁니다.

 

간극이 없는 죽은자의 하나님이니까 말이죠

 

자기도 천국 갈려고 하지 않고 남도 천국 못가게 막는

자기도 살리지도 못하는 주제에 남도 살리지 못하는 남 죽이는 꼴이다는 겁니다.

 

(23:13, 개역)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

 

산자의 하나님은 오히려 자신의 주 되심이라는 영광을 위해

나를 철저하게 무익한 종으로 만드는 세상의 찌끄래기 구경꺼리로 만든다는 겁니다.

 

(고전 4:9, 개역) 내가 생각건대 하나님이 사도인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한 자 같이 미말에 두셨으매 우리는 세계 곧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노라

 

그는 흥하고 나는 망해야 한다는 그 간극을 보여주도록 되어 있다는 겁니다.

 

(3:16, 개역) 요한이 모든 사람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물로 너희에게 침례를 주거니와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오시나니 나는 그 신들메를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침례를 주실 것이요

 

(3:30, 개역)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

 

주 되심 때문에 말입니다.

 

그래서 요셉은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을 성취하기 위해 은 30냥에 팔려야 하고 죽었다가 살아나

 

애굽 온 집의 주 바로의 아비가 되어야 했던 겁니다.

 

(45:8, 개역)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자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로 바로의 아비를 삼으시며 그 온 집의 주를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치리자를 삼으셨나이다

 

그리고 형제들을 데리고 올때에 그 간극을 벌리면서 죽음 속에서 만나는 겁니다.

 

살리기 위해서 십자가 속에서 만나듯이 말입니다.

 

피를 발라주지 않으면 안된다는 겁니다.

이 피라는 간극

 

이 약속

 

이 믿음

 

뺑뺑이 돌려 간첩만들어서 용서하는 피 말입니다.

 

안그러면 자꾹 약속의 하나님이 아닌

죽은자의 하나님을 믿는다는 겁니다.

자기 투사의 하나님 말이지요.

자기 지혜와 자기 기적으로 믿는 그런 가짜 하나님을 믿는다는 겁니다.

 

산자의 하나님은 그래서 간극을 벌린다는 특징 곧 차이점이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일부러 죽입니다. 고자 만들고 불임여성 죽은태 만들고

죄인 중의 괴수 만들고

고아 과부 나그네 만들고

 

그래서 그 간극을 통한 의사 곧 구원자를 살아계신 하나님을

 

주로써 산자의 하나님으로써 만나게 하신다는 겁니다.

그러니 나를 자꾸 원수 만드시는 것입니다. 준비하신 피 바를려고

 

자꾸 죽이십니다. 준비하신 다시 살려줌 바를려고

 

우리는 그 간극 이 어쨌든 저쨋든 싫은 겁니다.

 

나의 지혜 나의 기적(신앙)으로 충분이 그 간극이 없이

선지자만 보내주면 된다는 겁니다.

이것이 지옥에 간 부자의 시선인데

어쩌면 유대인들 대제사장과 그의 관계된자들

모든 인간들 다들 그렇다 라는 겁니다.

모조리 다 죽은자의 하나님이지

 

예수님의 산자의 하나님은 단 한 명도 없는 겁니다.

 

약속을 안 믿는 겁니다.

아니 믿을수가 없는 거죠. 배신 당할까봐 ~~~~~

 

그것보다 더 위험한 짖이 어디있겠습니까?

배팅을 할려면 믿을만한 구석에 해야 합니다.

자기 믿음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믿음은 행함입니다.

자기 외에는 믿을 구석이 있는 자가 없기 때문입니다.

사실은 그것이 가장 모호한 짖인데 말이죠.

 

그래서 원금 그대로 땅에 파 묻어서 원금 그대로 내어놓는 겁니다.

미련하게 한 므나를 받아서 장사를 한다는 것은 얼마나 위험한 짖인지 모르는 거죠.

 

그런데 므나 자체가 잉여적이여서 간극을 두고 있다 라는 것을 모르는 겁니다.

 

우리의 믿음은 원금 그대로 땅에 파묻는 것이고

약속은 곧 약속의 믿음은 잉여적이여서 무조건 남기도록 되어 있다는 겁니다.

 

문제는 할례입니다. 할례를 하지 않으면 무조건 지도록 되어 있다는 겁니다.

그 할례가 뭔가? 신약에서는 마음판의 할례인데

할례를 거부하는 할례 라고 했습니다.

거세 당한 할례

할례를 거세 당한 할례가 마음판의 할례라고 했는데

 

바로 무조건 이기도록 되어 있는 넉넉한 승리에

나는 아무것도 기여한 바가 없다 라는 자기부인이 바로 마음판의 할례이다는 겁니다.

 

주님의 무조건적인 승리에

곧 십자가의 피흘리심으로 다 이루었도다 라는 완료에

 

나는 그 어떤 보탬이 된 것이 없다

나는 무조건 틀렸다

뭘해도 다 죄다

아무것도 행한 것도 없다 라는 사고방식인 바로

 

거리두기 라는 겁니다.

 

그것은 상대적으로 십자가의 완료성 때문에 입이 떡 하고 벌어져 허걱 거리며

 

오히려 화로다 화로다 나는 망하게 되었도다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데 누가 꾀더냐?

 

그 영광을 보니 나는 백번만번 죽어 마땅하다 라는 겁니다.

 

그 간극이 십자가의 영광 때문에 저절로 누리게 되면서

간극 그 자체를 누리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간극 인간은 모순 덩어리 그 자체입니다.

 

십자가가 낳았기 때문입니다.

 

 

왜 모순입니까?

 

죽을 짖만 골라서 했는데 도리어 살게 되고

그 사람 때문에 주변은 더더욱 살려고 하는 짖 밖에 안했는데

도리어 죽게 되더라 라는

 

그 간극 인간 곧 저는 십자가 인간이라고 부르고 싶은데

십자가가 낳은 인간 때문에

 

졸지에 두 패거리로 갈라지게 되더라 말이죠.

 

아브라함이 가는 곳 마다 너를 축복하면 내가 축복하고

너를 저주하면 내가 저주한다는 식으로

축복과 저주의 기준이 되듯이

 

예수님이 지금 그 모습을 그대로 오늘 본문에 보여주고 있습니다.

저들은 어떻게 해서든 자기생존을 하나님을 끌여서 라도

살아있다는 것을 주장하는데

 

정작 죽은자 의 하나님이라는 겁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정반대로 자꾸 죽일 짖만 골라서 하는데 정작 자기 죽음을 깔고서 주님의 말씀을 증거하니 산자의 하나님이다는 겁니다.

 

자 그런데 여기에 만만치 않게 작용하는 것이 나도 죽음을 각오하고 했다는 것을 자꾸 끼어넣고 싶어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남들은 다 버려도 나는 절대로 주님 안 버리고 주와 함께 죽겠습니다 라고 자꾸 주장하는 겁니다.

 

주님은 넌 안돼 라고 단절 시키는 겁니다.

 

이것이 가시떨기에도 그대로 나타납니다.

내가 내 자신을 붙태워 죽기까지 복종하고자 했을 때 그때 왜 안 나타나고

지금 다 늙어빠져 지팡이를 의지해야만 겨우 걸을 수 있는 늙은이에게 무슨 일을 맡긴다고 하십니까? 라고 따지는 그 상황이 가시떨기 라는 겁니다.

 

가시떨기 나무처럼 나약하고 톡 하고 건드리면 바로 부러져 버리고

햇빛에 드러나면 자연발화가 될 정도로 그 정도로 무능한 것인데

 

왜 하필이면 내 젊음을 다 쏟을때는 안 나타나더니만 도와주지도 않더니만

왜 이제야 나타나 쓰시겠다고 합니까? 딴 사람 시키세요~~~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이 바로 이렇습니다.

그카이 너는 죽은자의 하나님을 자꾸 주장한다는 겁니다.

니 말대로 누가 너 자신을 불태워 버리라고 하디?

누가 시켰니?

니가 니 스스로 불태워 다 소진시켜 버려놓고

나만 남았나이다 내 열심히 특심이오니 나만 남았다고 우기지 않니

 

그것이 죽은자의 하나님이지 무슨 약속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

 

이 세명의 인물의 완성인 요셉이 빠진 이유가 바로 보이지 않는 간극이 있다는 겁니다.

이들의 약속은 결국 요셉이 완성하는 겁니다.

 

보이지도 않았던 간극으로써 엄청난 극과 극의 초극대의 간극으로써 요셉에 와서는 비로소

원수의 발등상에 놓이게 되는 겁니다. 그래야 오른편이 드러나는 거지요.

포로되지 않는데 갇혀 있지 않는데 어떻게 오른편 우편이 작용하겠습니까?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

이미 산자의 하나님으로써

이미 승리한 넉넉한 승리로써

 

애굽이라는 원수 속에 탁란 되는 겁니다.

그래야 우편이 어떻게 작용하는지 보게 되는 겁니다.

 

다윗의 시대의 원수는 누구입니까?

다윗 본인입니다.

이스라엘의 원수가 누구 입니까?

이스라엘 본인입니다.

 

성도의 원수는 누구 입니까?

우리 자신들입니다.

 

그럴 때 우편이 작용하는 겁니다.

아 나는 나에게 포로 당했구나

나는 나에게서 못벗어나는 갇혀버린 자구나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

누가 나를 이 사망의 몸에서 건져내랴?

 

주께서 주께 하신 약속 때문에 벌어진다는 겁니다.

여기에 나는 누락 되어있다는 겁니다.

 

갇혀있음에 빼내임을 당해야 할 입장이지

남 빼낼 입장이 못된다는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무능하고 무익하다는 겁니다.

 

어딜 감히 가시떨기 나무인 무능하기 짝이 없는 나무를 스스로 불태워 구원에 한 몫을 하겠다고 나서냐 말이죠..

 

간극을 보여줘야 할 자가 도리어 구원자로 나서겠다고 하니

주께서 내 주께 라는 것을 못 보는 겁니다.

내가 개입이 되었다고 여기니 간극을 못 보는 겁니다.

소외된 입장이요 배제된 입장이니

어디까지나 갇혀 있다는 겁니다.

 

 

갇혀 있는 환자인데 어떻게 자꾸 개입해서 나설려고 하느냐 말이죠

소외 되었고 배제 되었다는 것 곧 단절을 철저하게 격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서도 참으로 은혜로운 것은 주님께서 어떻게 이 갇혀있는자를

빼내시는 것을 볼 수 있는 시선이 주었졌다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빼내임을 당하면서 나의 무력함을 무능함을 철저하게 보는 것과 동시에

그런 자를 어떻게 끝까지 섬기시는가를 보게 되는 두 시선을 지니게 되는 겁니다.

 

철저한 무능 곧 죽은자(가시떨기)와 초과잉의 잉여인 여호와의 불의

도저히 만날 수 없는 만남이 그 불가능한 만남이 만나는 조우입니다.

한쪽이 소멸되어 사라져야 함에도 불구하고 남겨지는 이유는

억수로 억수로 참고 참아서 많이 봐줘서 살려주시는 불쌍히 여겨주심 뿐이다는 겁니다.

 

너도 내가 불쌍히 여겨주지 않으면 안되는 도저히 빠져 나올수 없다는 입장인데

자꾸 자기를 불태우겠다고 하니

 

어딜 감히 7번 용서 주제에 770번 용서 앞에서 주름을 잡느냐

그것도 숫자냐 라는 겁니다.

 

숫자 세는 손가락 부러뜨리겠다는 겁니다.

수에 칠 가치도 없다는 겁니다.

 

바로 그런 사고방식이 원수이다는 겁니다. 죽은자의 하나님으로 만든다는 겁니다.

뭘 해도 우리에게서 나오는 하나님은 다 가짜, 죽은자의 하나님이다는 겁니다.

 

거리두기를 할 줄 모르고 그저 일체 일치 동일 동질성을 추구하니 말입니다.

 

거리가 있어야 우편을 볼게 아닙니까?

우편에 누가 있는지를 말입니다.

그런 거리도 없으니 자기가 자기를 구원해야 하니까 자꾸 행함을 추구한다는 겁니다.

 

우리가 각기 제 길로 가는 양 같은 자로써

원수의 자리에 놓이는 것은

우편에 누가 있는가를 말하기 위한 배치인 겁니다.

십자가의 반대편에 놓이는 이유입니다.

그 간극의 거리에서 누가 넘어오시느냐 라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그런데 간극을 무시하고 자기를 붙태워 버리겠다는 것은

자기도 못구하고 남도 못구하면서 천국 길을 가로막기나 한다는 겁니다.

우리가 하는 짖, 우리가 믿는다는 신앙이 다 이런 식이다는 겁니다.

 

손때라 제발 믿지 말라는 겁니다.

너의 믿음 조차도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주의 믿음으로 충분하다는 겁니다.

믿음은 나의 대상물이 될 수 없습니다.

도리어 믿음으로부터 대상물로 당해야 할 판국인 겁니다.

 

원수도 만들줄 모르는 주제에 무슨 우편을 볼 수 있다는 말입니까?

원수를 발등상 위에 놓을 수 있나요?

나 지신을 원수로써 발등상 위에 놓을수 있냐 말이죠

남도 아닌 나 자신을 말입니다.

성령이 그래서 하신다는 겁니다.
 

오직 주께서 내 주께 만이 하실수 있다는 겁니다.

다윗 본인도 소외 배제 되었다는 겁니다.

우리는 그저 갇혀있는 포로된 입장일 뿐입니다.

 

죄인이니 환자이니 구원자를 바래야 할 판국 뿐이다는 겁니다.

 

그런 입장에서 다윗의 자손이다는 겁니다.

왜 자손이 그리스도일까요?

 

간극이라는 거리두기를 제대로 보여주는 의미입니다.

 

즉 조상들은 다 실패 했다는 겁니다.

 

다 실패해도 끝이 좋으면 다 좋은 겁니다.

일방적인 편파 해석이라고 한 이유입니다.

 

그러니 이들은 의인이 아니라 죄인이다는 겁니다.

다윗의 자손만이 의인이다는 겁니다.

이 의인만 살명 다 산 겁니다.

즉 다윗의 계보에 예수님이 접붙임 당한게 아니라

정반대로 예수님이라는 후손에 앞의 사람들 즉 실패한 자들

즉 죄인들이 접붙임 당하는 겁니다.

 

건강한 자는 필요가 없습니다.

 

죄인들만이 이 예수님의 족부에 접붙임 당하는 겁니다.

믿음이 육의 계보를 깨뜨리는 식이다는 겁니다.

 

육적인 순서도 거부당하면서 말이죠

(다윗의 후손이 다윗의 주가 되듯이)

심지어 여자가 유대족보에는 언급되지도 않는데

정반대로 여자에게서 남자들이 빌이붙어서 여자 때문에 맥을 잇게 된다는 겁니다.

 

당연하다고 여긴 모든 틀이 다 전복이 되어 깨어지는 겁니다.

그리고 그 차이의 간극을 확 벌려 버리는 겁니다.

그러니 너무 너무 어리석고 너무 너무 미련스러운 겁니다.

그리고 악한 세대가 구하는 표적과 정반대의 요나의 표적인 겁니다.

 

즉 인간의 믿음과 족보 계보를 다 거부하는

 

뱀의 자손 뱀의 후손 남자의 후손을 의식하는 계보로써 그 차이로

그 간극의 거리두기로 증거되는 족보이듯이 말입니다.

 

뱀의 후손 남자의 후손의 방식이 곧 힘을 추구하는 하나님이 다 죽은자의 하나님입니다.

그 반대로 여자의 후손 마치 죽은자 같은 무능한 자인데 오히려 산 자의 하나님입니다.

 

할례 곧 힘의 단절을 보여주지 않으면 죽은자의 하나님입니다.

힘인데 힘을 차단하지 않으면 죽은자의 하나님이다는 겁니다.

우리는 오히려 그게 죽은 것 아니냐 라는 겁니다.

 

정반대로 누가 봐도 죽은자 무능한자로써

할례 곧 힘의 단절을 당한자가 누가 봐도 죽은자인데 이것이 바로 산자의 하나님입니다.

또 이렇게 말하니까 자꾸 인간이 흉내내는데 흉내낼 힘이 있다는 것 자체가 힘추구죠.

힘의 단절을 당한자 곧 누구 봐도 죽은자, 무능한 도살장에 끌려자는 자는

딱 한 사람 뿐이였습니다. 바로 예수님입니다.

우리는 그저 힘으로 예수야 죽어라 십자가에 못박으라 라고 고래 고래 외친자였습니다.

누가 봐도 죽었고 심지어 힘없다고 우기는 내가 죽으라고 외친

그 예수님만이 유일한 죽은자인데 이 분이 바로 산 자의 하나님을 보여주는 겁니다.

 

인간은 자기투사로써의 하나님을 살았다고 우깁니다.

그런데 나오는 모습은 약속을 지킬수 없는 그저 우상이였을 뿐입니다.

 

죽은자로 만들어서 때려 죽어도 산 자의 하나님을 외칠수 없도록 만든 것이

십자가에 못 박으라 라고 우리가 외친 그 예수님의 하나님이

유일한 산 자의 하나님입니다.

 

당연히 그 산자의 하나님으로 인한 간극과 거리두기로

우리는 뭘 해도 죽은자의 하나님만을 나타낼려고

산 자의 하나님이 왕 되기를 원치 않는다는 것을

 

십자가로 지적받는 겁니다.

 

이 지적과 간섭을 감사하시면 됩니다.

그 간섭이 아니면 우리는 갇혀 있는 줄도 모르고

예수님이 왜 이 땅에 다짜고짜 죽으실려고 십자가로 돌진하시는지를

왜 의문의 증서에서 벗어나도록 하시는가를 알지 못할 겁니다.

 

 

 

 

 

 

 

 

책잡고자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게 옳은가?” (20:19-26)

 

2014/09/24 20:38 in 성령행전(피활동,인간극복)

 

 

책잡고자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게 옳은가?” (20:19-26)

 

 

(20:19, 개역) 서기관들과 대제사장들이 예수의 이 비유는 자기들을 가리켜 말씀하심인 줄 알고 즉시 잡고자 하되 백성을 두려워하더라

(20:20, 개역) 이에 저희가 엿보다가 예수를 총독의 치리와 권세 아래 붙이려 하여 정탐들을 보내어 그들로 스스로 의인인 체하며 예수의 말을 책잡게 하니

(20:21, 개역) 그들이 물어 가로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아노니 당신은 바로 말씀하시고 가르치시며 사람을 외모로 취치 아니하시고 오직 참으로써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시나이다

(20:22, 개역) 우리가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가하니이까 불가하니이까 하니

(20:23, 개역) 예수께서 그 간계를 아시고 가라사대

(20:24, 개역) 데나리온 하나를 내게 보이라 뉘 화상과 글이 여기 있느냐 대답하되 가이사의 것이니이다

(20:25, 개역) 가라사대 그런즉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하시니

(20:26, 개역) 저희가 백성 앞에서 그의 말을 능히 책잡지 못하고 그의 대답을 기이히 여겨 잠잠하니라

 

 

누가 당신에게 그런 권한을 주었는가 라는 권세에 대한 논쟁을

더욱더 초과잉적인 증상으로 나타나게 한 비유로 인해

그 차이로 갈라놓는 것이 포도원 농부의 비유였습니다.

그러니 저들은 화가 끝까지 났습니다.

어떻게 하면 죽일까?

 

바로 이것이 그들의 모든 관심사였습니다.

 

그러니 차라리 처음부터 질문을

예수 당신이 주 되심을 원치 않습니다 라는 질문만 하라 말이죠

그런 질문에 대한 답변만을 예수님은 일관적으로 하시는데

(질문 속에는 듣고픈 답을 미리 깔고 있는 겁니다. 당신은 주가 되면 안되는거 알지?)

 

대제사장 바리새인 서기관 율법사들은 자꾸 질문을 뱅뱅 돌려서 말하고 있습니다.

즉 대중을 의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강도의 소굴이라는 철통밥그릇을 놓치고 싶지 않고

(모든 종교직분은 이런 강도체제 수호입니다. 종교 뿐만이 아닌 모든 조직도 동일하게)

동시에 예수라는 작자가 주가 되는 꼴은 보기도 싫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입장에서

그들은 놀랍게도 권력과 손잡게 됩니다.

 

자신들이 저들은 악마라고 주장하면서 그들로부터 독립투쟁을 벌렸으면서도

예수님이 주가 되는 그 사건(십자가사건)만은 막고자

(저들 악마)과 손을 잡고 예수님을 죽이고자 책잡는 일을 벌리는

극단적인 상황까지 내몰리고 있었던 겁니다.

 

책을 잡을 정도면 그 정도로 불안하다는 것이고, 많이 아니 엄청나게 흔들리고 있다는 겁니다.

늘 꼬투리 잡기가 아니면 안될 정도이니까 말입니다.

 

즉 저들이 에수님을 극단적으로 몰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로 예수님이 저들의 극단적인 위기로 몰아가서 나올수 있는 속내를 다 드러내도록 하시는 겁니다.

(현장에서 간음하다 잡힌 여인 이야기가 그 대표입니다. 너무 너무 우연적으로(비필연=필연의 초과잉성) 간음하다 잡은 여인 근처를 예수님이 지나가고 있으니 예수님을 시험하고픈 마음이 안들래야 안들수가 없습니다. 또 하필이면 일만달란트 탕감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백데나리온 띠먹고 도망친 친구가 하필이면 우연히 아주 아주 우연히 옆을 지나가고 있으니 안붙잡고는 못배기는 겁니다. 이런 두 이야기를 통해서도 예수님을 올무쳐서 시험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자기 꾀에 자기가 쳐놓은 올무에 자신들이 걸려 넘어지는 실족케 하기의 달인을 괜히 만난 겁니다. 괜히~~~~)

 

 

그것이 바로 가이사에게 세금내어야 하느냐 하나님께 세금을 내어야 하느냐 라는 질문입니다.

 

책 잡고자 하는 질문 곧 시험 테스트 문제가 고작 이겁니다.

가이사에게 바친다고 하면 종교꾼들이 가만히 두질 않을것이고 그런 유대인 대중들은 자신들의 편이 되고 자신들의 정당성은 확보가 될 것이며

 

하나님께 바쳐야 한다고 하면 가이사 정권에 대한 도전을 드러내는 것으로써 정치적으로 매장시키기 좋은 겁니다.

 

이거 어디서 많이 보던 장면 아닙니까? 맞어 맞어 맞어 어디서 많이 본 장면 같애

 

맞습니다.

 

세례요한의 세례 주는 권한이 하늘에서 왔는가? 사람으로부터 왔는가? 라는 질문을

 

그대로 모방해서 역으로 예수님께 한 방 날려 보겠다는 거죠

 

자신들도 답변을 못했거든요

하늘에서 왔다고 하면 세례요한을 그들은 거부했으니 믿지 않는다고 할것이고

사람에게로 왔다고 하면 선지자로 인정하는 백성들로부터 역시나 거부당할 것이고

 

(20:4, 개역) 요한의 침례가 하늘로서냐 사람에게로서냐

(20:5, 개역) 저희가 서로 의논하여 가로되 만일 하늘로서라 하면 어찌하여 저를 믿지 아니하였느냐 할 것이요

(20:6, 개역) 만일 사람에게로서라 하면 백성이 요한을 선지자로 인정하니 저희가 다 우리를 돌로 칠 것이라 하고

 

이래나 저래나 당할 수 밖에 없는 질문을 받았으니

이제는 예수 너 차례다 한번 당해 보라는 식으로

똑같이 답변을 못할 줄 알고 책잡고자 질문했는데

 

그 답변이 너무 쉽고 간단합니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얼마나 쉽고 간단 명료합니까? 또렷하고 모호하지 않고

의문의 미흡함이 없지 않습니까?

 

결국 저들은 양쪽 다 걸칠려고 하기 때문에 힘이 드는 겁니다.

 

예수님은 처음부터 간단했습니다. 나는 너희들이 나의 백성이 되는 것을 원치 않는다 라고 나오시는 겁니다.

 

이것을 고대로 따라서 모방한 것이죠.

 

즉 이것은 결국 예수님이 주가 되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라는 질문이다고 했습니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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