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박한 파국 (21:29-38)

 

(21:29, 개역) 이에 비유로 이르시되 무화과나무와 모든 나무를 보라

(21:30, 개역) 싹이 나면 너희가 보고 여름이 가까운 줄을 자연히 아나니

(21:31, 개역) 이와 같이 너희가 이런 일이 나는 것을 보거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운 줄을 알라

(21:32, 개역)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모든 일이 다 이루리라

(21:33, 개역)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21:34, 개역)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 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

(21:35, 개역) 이 날은 온 지구상에 거하는 모든 사람에게 임하리라

(21:36, 개역) 이러므로 너희는 장차 올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 하시니라

(21:37, 개역) 예수께서 낮이면 성전에서 가르치시고 밤이면 나가 감람원이라 하는 산에서 쉬시니

(21:38, 개역) 모든 백성이 그 말씀을 들으려고 이른 아침에 성전에 나아가더라

 

 

이미 종말 속에서 살고 있는 자가 바로 이스라엘입니다.

이스라엘이라는 비존재는 종말 속에서만 그 기능을 발휘하는 존재들

곧 종말의 징후들입니다.

종말의 존재이다는 거죠

 

그런데 이스라엘 속에서 즉 예루살렘 속에서 지금 종말을 예수님께서 이야기 하고 계십니다.

즉 이 말은 이들 유대인 곧 이스라엘이 종말의 존재들이면서

전혀 종말과 무관한 존재와 같은 자들과 같다 라는 겁니다.

 

(1:11, 개역)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1:12, 개역)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1:13, 개역)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오늘 본문이 무섭게 느껴지는 것은

우리 일상이 종말하고 무관하게 살고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비정상적으로 오늘 본문이 기쁘게 느껴지는 자는

종말의 영을 받아서 아주 신나고 기쁜 소식으로 느껴지게 된다는 겁니다.

 

왜 이런 차이가 날까요?

 

더군다나 이방인은 그렇다 치더라도

정작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이 유대인들은

이 예수님의 말씀이 기쁜소식의 희년으로 느껴져야 할 텐데

 

오히려 가장 거부와 반발로써 맞서는 심판의 소리로 들리니까

예수님에 대한 미움이 극심해 질 수 밖에 없게 되는 겁니다.

 

그런다고 예수님이 낙심하시거나 후회하시거나 당황해 하시지 않습니다.

오히려 당연하다는 듯이

이미 눈물을 흘리셨기에

이들의 이런 행동이 반드시 나와주어야 한다 라는 듯이

오히려 자신의 주 되심을 증거하십니다.

 

임박한 종말은 오히려 더 더욱 예수님의 주 되심 주 다우심 을 만개시키는 것으로써

더욱더 또렷하고 명료하게 주의 주 되심을 증거 합니다.

 

마침 어머니께서 종말에 대한 질문을 했습니다.

 

(21:23, 개역) 그 날에는 아이 밴 자들과 젖먹이는 자들에게 화가 있으리니 이는 땅에 큰 환난과 이 백성에게 진노가 있겠음이로다

 

이 부분과 연관된 심판날에 왜 아이 밴 자들 곧 임신한 여자들은 화가 있다는 것에 대해서 질문을 하신 겁니다.

 

일본 화산 분화에 대한 뉴스를 보고 나눈 이야기였습니다.

 

여자가 원해서 한 임신이든 원치 않아서 한 임신이든 심판날에 얼마나 억울하겠는가 하는 점입니다.

 

저는 거기에다가 덧붙어서 산으로 도망가라 그날에

 

(24:16, 개역) 그 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할지어다

 

또 추운 겨울이 되지 않도록 기도하라 라고 합니다.

 

(24:20, 개역) 너희의 도망하는 일이 겨울에나 안식일에 되지 않도록 기도하라

 

제가 두 가지를 덧 붙이니 얼마나 기가막힌 날이 심판 날이겠습니까

 

그래서 제가 이렇게 설명을 했습니다.

 

어머니 만화 영화에 고양이가 하늘 위를 걷고 있습니다.

목을 쳐들고 꼬리를 곳세우면서 살랑 살랑 흔들면서 걷고 있으니

구름이 옆으로 지나갑니다.

고양이의 발걸음이 사뿐사뿐 거리면서 얼마나 신나게 잘도 걷는지!!!

 

이해 되시나요 어머니???

 

제가 모션을 취하면서 신나게 보여드립니다.

 

그런데 한 참을 그렇게 잘도 하늘 위를 걷고 있던 고양이가 그만

눈을 떠서 아래를 보니 그만 자기가 하늘위에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더니 확 떨어지면서 고양이의 모든 신체기관이 쭈삣쭈삣 거리면서

마구 마구 떨어지더라 말이죠.

 

어머니께서 그래 맞아 그런 장면 애들 만화 볼 때 그런거 나오더라

고양이 맞제 ~~~~

 

네 네 바로 그겁니다

 

아니 분명 아까전만 해도 그렇게 잘도 걷고 있는데

왜 지금은 확 떨어질까요?

 

혼자 또 빵 터지셔서 제가 말하는 취지를 잘 몰라서

몇 번을 제가 물으면서

어머니! 그만 웃으시고 ㅋㅋㅋ 제 질문에 답해보세요

 

아니 좀 전만 해도 잘도 걸었잖아요

그랬지

그런데 왜 지금은 왜 못 걷고 땅으로 떨어지면서 한 번에 훅 하고 떨어질까요?

 

글쎄 ~~~

 

어머니!! 이것이 종말 곧 파국의 의미인데요

 

자기를 잊어버릴 정도로 누리고 있을 때에는 전혀 몰랐다가

자기를 챙겨야 한다는 생각이 들때는

그렇게도 잘 걷던 하늘 위에서 확 하고 막떨어지는 겁니다.

 

사실은 우리가 앞에서 나왔던 성경 모든 부분들

특히 예수님의 비유들이 다 이런 의미입니다.

 

죽음을 곧 심판 곧 종말을 미리 깔아버린 입장에서는

예수님의 비유가 무슨 소리인줄 아주 쉽게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종말이 바탕으로 깔려 있지 않으면

예수님의 비유가 무슨 소리인줄 도저히 알 수가 없고

알 수 없는 것에서 끝나는게 아니라

예수님과의 충돌을 멈출수가 없게 된다는 피할수 없게 된다는 겁니다.

종말은 생존을 건드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가장 쉬운 예로 두 가지 들었습니다.

누구다나 쉽게 이해 할 수 있는

베드로가 물 위를 걸었던 사건과,

 

실로암 소경은 눈 떳는데

정작 본다고 하는 자들은 고침을 받지 못하는 그 내용을 말입니다.

 

먼저 실로암 소경 눈뜬 사건인데

 

(9:39, 개역)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소경 되게 하려 함이라 하시니

(9:40, 개역) 바리새인 중에 예수와 함께 있던 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가로되 우리도 소경인가

(9:41, 개역)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소경 되었더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저 있느니라

 

어떤 사람이 귀신을 보고서는 귀신으로부터 도망쳐 다니는데

알고보니 자기가 결국 귀신이였다는 겁니다.

식스센스와 디 아더스 라는 영화를 생각 하면 쉽게 이해가 되겠지요.

 

이미 우리는 죽은자입니다. 죽은자 인데 소경인데 개같은 이방인인데

예수님께서 자신의 주 되심 때문에 나의 소경됨을 심판하시는데

보지 못하는 자를 보게 하시는 심판

그리고 동시에 본다고 하는 자를 못보게 소경으로 만드시는 심판을 부으시겠다는

주의 주 되심을 펼치겠다고 하니

바리새인이 그럼 당신은 우리를 소경이라고 취급하겠구만 이라고 비꼬는 겁니다.

 

에수님의 답변이 이러합니다.

너희가 차라리 소경이였더면 죄가 없을텐데

소경이 아닌 본다고 우기니 죄가 있다 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너희들이야 말로 나의 주 되심에 가장 합당한 심판을 받아 마땅하다 라는 겁니다.

 

주님이 몰고온 종말이란 결국 모든 인간은 심판 받아 마땅한 이미 심판 속에 있다는 겁니다.

그런 심판 속에서 지금까지 살아가고 있다는 것은

주님의 배려라는 동앗줄로 위에서 떨어지지 않도록 붙잡고 배려했다는 것인데

 

그것을 못 보는 순간 즉 자기를 봐버리는 순간

자아라는 것이 없는데 없는 자아를 챙겨들려고 하는 순간

그만 확 떨어져 버린다는 겁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물 위를 너무 너무 잘 걸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일부러 풍랑을 일으키니까

그만 챙겨야 할 나를 갑자기 만들어내는 겁니다.

 

물 위를 걸을때는 주님의 배려로 나를 챙길 필요가 없이

나를 잊어버렸는데 갑자기 나를 챙기는 풍랑으로 인해

닥치지도 않았는데 눈으로 봐버리고서는 미리 물에 빠져 버리는 겁니다.

(자아란 바로 그 경계선에서 없었던 자아가 생겨서 갑자기 챙길 필요 없는 자아를

자아가 생겼다는 이유로 챙기기 위해서 빠져버리는 겁니다.

챙길수 있을 줄 알았는데 허상이니 챙길려다가

뜬구름잡듯이 손아귀에서 다 빠져버리는 겁니다.

소유가 안되니 포착이 안되니 말입니다.

원인 없는 결과인데 그 원인을 만들려고 하다가 허상임을 알게 되는 겁니다.)

 

이미 죽은자 인데 이미 심판 속에서

이미 불 속에서 다니엘처럼 살고 있는 존재가

이스라엘이라는 종말의 존재인데

 

불 속에서만 사는 존재이고

불 바깥에서는 도저히 살 수 없는 존재인데

 

졸지에 자아라는 것이 심판 곧 종말을 걷어내자

갑자기 자아가 생겨버려서 확 하염없이 떨어지는 겁니다.

(이스라엘이라는 원인을 찾을래야 찾을수 없는데

그 원인을 소유할려다 하다 보니

손아귀에 잡은 줄 알았는데 아무리 해도 안 잡히더라 라는 겁니다.

그래서 후손(결과, 원인 없는 결과)에 있는 겁니다. 약속 곧 믿음이 말입니다.)

 

그러다가 주님이 하도 불쌍해서 다시 동앗줄로 연결해서 붙잡아 주니까

또 까불까불 거리면서 하늘 위를 걷다가

또 자기를 쳐다보는 순간 제명이 되듯이 확 하고 떨어지다가

다시 주님께서 불쌍히 여겨주니까 또 하늘 위를 걷게 되는 겁니다.

 

되는 놈은 되고 안 될 놈은 뭘 해도 안되도록 되어 있지만

 

오직 주님의 불쌍히 여겨주심 하나면 확 떨어지다가도 다시 하늘 위를 걷게 되는 겁니다.

(우리는 이 양쪽을 누리게 되는 겁니다. 주의 주 되심 때문에 말입니다.

소경이였다가 다시 보게 되는 그 관계성을 말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이것이 앞에서 나온 모든 비유의 내용 이었습니다.

즉 종말 곧 심판

이미 너희는 심판이 깔려있는 채로 그 동안 살아왔다 라는 겁니다.

 

그런데 종말을 말하니 종말을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가장 두려워 하는 자들이

졸지에 유대인이 종말을 가장 거부하는 자들이 되고 말았다 라는 겁니다.

(우리가 귀신 곧 괴물인데 괴물이 괴물을 보고 놀라는 식스센스의 대반전처럼

종말의 존재가 종말을 싫어하는 기이현상이 발생한다는 겁니다.

거기서 갭 간극이 발생하는 겁니다.

남들과 비교를 해서 간극 벌리기를 하다가 도리어 간격 벌림을 당하게 되더라 말이죠.)

그 동안 종말을 바닥에 깔고 살아왔던 자들인데 왜?

 

그러니 주님의 때는 더더욱 만개가 되는데

그 만개의 기쁨에 전혀 종말과 무관하던 이방인은 정작 동참케 되고

특히 누가복음에서는 더더욱 기뻐하면서 적극적으로 참예가 되는 종말인이 되고

 

도리어 종말인이어야 마땅한 유대인은 이방인 보다 더 적극적으로 거부를 하고 있다는 겁니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라는 사고방식은 종말을 깔지 않으면 나올수 없는 답변인데

 

오히려 예수님에게 종말을 깔아버리겠다고 종말을 심판을 퍼부어 버리겠다고

대제사장의 무리들이 자신들이 못한 답변을 예수님을 따라 흉내내는 공격을 하다가

도리어 말려들게 되더라 말이죠.

 

그러니 간극이 더더욱 벌어지게 되는 겁니다.

뭘해도 종말을 깔고서 나오는 행동이 예수님의 믿음이고 (행함이 있는 믿음)

뭘해도 자신의 생존을 깔고서 나오는 행동이 간극 조차도 못 벌리는 인간의 믿음이요 행함이다는 겁니다.

 

가인의 제사와 아벨의 제사의 차이입니다.

아벨의 제사는 죽음이라는 종말이 깔려 있습니다. 제사를 드리니 졸지에 죽임 당합니다.

종말이 깔려 있으니 말입니다.

 

종말이를 의인화 해서 인물로 표현해 볼까요? 바로 예수님의 죽음이 깔려 있다는 겁니다.

자기 죽음 말고요 지난 시간에 말한 후손 개념입니다.

자기 죽음은 죽은자의 하나님이고 예수님 죽음만이 산 자의 하나님이다는 겁니다.

 

그러나 가인의 제사는 생존이 깔려 있습니다. 아무리 자살을 해도 생존이 깔려있지

종말이 깔려 있지가 않습니다.

 

주님의 주 되심을 드러내는 십자가의 심판이 깔려있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이 깔려 있지 않습니다.

원수된 너희들을 죄사하고 화목케 하고자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않고 내어주신

그 죽음이 깔려 있지가 않고

자신의 제사 행위와 그 행위의 보상 댓가라는 생존만이 깔려 있는 겁니다.

 

이 간극이 예수님과 유대인의 충돌에서 계속적으로 그 간극이 나타나는 겁니다.

 

결국 종말은 죽임을 당해도 다시 사는 것이고

곧 산 자의 하나님이고

 

저들은 그 3일의 간극도 없이 살고자 하는 생존

곧 종말이 깔려있지 않기에

성령이 깔려 있지 않기에

3일의 간극이 깔려 있지 않기에

산 자 같으나 사실상 죽은자의 하나님이다는 겁니다.

 

우리는 베드로처럼 늘 실패하면서 물 위를 걷다가

다시 매일 매일 물에 빠지기를 반복하지만

 

주님의 끝까지 사랑하심 때문에

나를 잊을수 있는 그 배려에

그 간극 벌리심에 다시 물 위를 하늘 위를 마음껏 걸을수 있게 되는 겁니다..

 

어머니! 우리가 그 동안 살아온 것이 내가 뭔가를 잘해서 살아온 것입니까?

뭘해도 엉터리였고

뭘해도 다 죄였지 않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모두다 주님의 은혜로써 누리게 된 것들이 아닙니까?

 

주의 주 되심 때문에 종말이라는 심판이 깔려 있는 겁니다.

이미 죽은자로써 심판이, 저주가, 종말이 깔려 있었는데

 

그것도 모르고 산 자라고 우기는 바람에 휙 떨어졌다가

다시 넌 이미 죽은자야 라고 주님이 다시 하늘 위를 걷도록 배려해주심 때문에

참 맞아 나는 불 속에서 그 동안 살아 왔었지

그런데 왜 갑자기 불이 뜨거울거다 라고 나를 챙길려고 하는지

 

주여 또 제가 엉터리 나를 붙들었습니다.

주여 불쌍히 여겨주시고 매일 매일 나 라는 가짜를 삭제해 주세요 라고

기도케 만드시는 겁니다.

내가 하는 기도가 아닌 기도가 주체가 된 난 기도의 대상물로써 말입니다.

 

이스라엘은 불 바깥에서는 살수 없는 존재입니다.

이스라엘은 종말 바깥에서는 숨을 쉴 수가 없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거꾸로 이스라엘과 이방인이 자리가 뒤 바뀌게 되는 것은

 

그것 조차도 주의 주 되심을 위해 변경 변형이 된다는 겁니다.

 

주의 주 되심만 변경되지 않으면 되는 겁니다.

주의 주 되심만 쳐다 보면 되듯이 말입니다.

 

예수님의 왕 되심을 원치 않는 자들과

예수님의 왕 되심을 원하는 자들로 둘로 나누심은

주의 주 되심이 의도적으로 만들어 낸다는 겁니다.

 

에서를 미워하기로 작정 하였고

야곱을 사랑하기로 작정 하셨듯이

 

그 간극 그 차이를 보라는 취지인 거죠.

이것이 종말 속에서만 살도록 배려하시는 주님의 일하심입니다.

 

다윗도 하늘 위를 걷다가 확 떨어진 것을

보이지 않는 동앗줄로 다시 붙잡아 다시 물 위로 하늘 위로 걷도록 배려하신 것이

 

바로 주께서 내 주께 라는 사건이였던 겁니다.

뭘 해도 나는 심판 받아 마땅한 죄인 중의 괴수인 이미 심판받은자였다는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동안 주님의 은혜를 누리게 된 것은

내가 잘 나서가 아니라

내가 4배나 갚으라 라는 율법을 지킬 줄 아는 왕이라서가 아니라

주님이 심판 속에 있는 나를 매일 매일 건져 주심이라는 겁니다.
(마귀 잡을려고 깔아놓은 올무로써의 율법을 엉뚱하게 지키고 앉았으니 원!!!!)

 

부자청년은 그 동안 주님의 배려 때문에 그 동안 부족함 없이 살아왔던 겁니다.

그것은 곧 이미 심판 속에서의 배려였고

이미 죽은 자로써 살려주심바 당함이였습니다.

 

늘 물 위를 걷고 있었다는 겁니다. 이미 파국 속에 놓여졌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그런데 전 재산을 바치라 라는 말에

그만 청천벽력과 같은 소리로 인해

[없는 자아]를 만들어내고 자아를 챙기는

풍랑 앞에서 없던 나를 챙겨버리게 됩니다.

그런 나를 가짜로 여기고 불쌍히 여겨 달라고 해야 할 판국에

그 나를 더더욱 챙기고자

예수님을 등져 버리고 돌아서게 되는 겁니다.

 

즉 에수님의 주 되심 때문에 예수님이 그를 붙잡아 주지 않고

상대적인 누가봐도 소문난 악인 삭개오를

예수님의 주 되심 때문에 원인 없는 결과로 삭개오를 붙잡아 주신 겁니다.

 

이 두 사람 속에서의 간극 곧 종말을 간극을 벌리신 겁니다.

주의 주 되심을 위해서 말입니다.

 

누가봐도 의인 선생 이 시대의 멘토 부자청년과 누가 봐도 딱 봐도 소문난 악인 중의 악인 삭개오 와의 대조를

 

주의 주 되심을 위해서 동원배치 시킨 갈라놓기 사건이였던 겁니다.

 

이미 심판 속에서 살아 왔던 자는 정작 유대인의 관원 선생이였던 부자청년이 아닌

악인 삭개오 였던 겁니다. 종말인이 졸지에 삭개오 였다는 거죠.

 

그것도 모르고 사람들은 곧 유대인들은 이 진정한 종말인인 삭개오를 손가락질 하고 거부했던 겁니다.

 

덩달아 그 소문난 악인 삭개오 집에서 함께 먹는다고

악인 삭개오로부터 대접을 받는다고 예수님도 같은 악인으로 취급하는

원인 곧 증거물 알리바이를 형성하면서 말이죠. 범죄 증거 현장 포착 했다고 ,,,,

 

정작 종말인이어야 할 유대인이 손가락질 하면서 도리어 종말성을 거부하면서 말이죠.

 

현장에서 간음하다 잡힌 여인은 종말 속에서 살아왔던 겁니다.

원인 없는 결과입니다.

 

그런데 원인 없는 결과의 족속인 유대인이 그 여인을 잡아서 돌로 쳐서 죽일려고 할 때

마침 예수님이 지나가니까 잘 되었다

과연 저 사람은 어떻게 판결하나 보자 엉터리 이면 같이 죽여버리자 라고 했는데

돌을 든 유대인이라는 종말인이 단 하나도 남겨지질 않고

도리어 돌삐 맞을까봐 지레 겁먹고 다들 도망쳐 버리는 겁니다.

 

원인을 찾을려다가 졸지에 결과를 당할까봐 겁나서 말입니다.

 

행동 하나 하나가 종말 속에서 산 적도 없으면서 말이지요

 

예루살렘을 이렇게 지적하시는 것은

종말을 깔기 위함이며

예루살렘의 기능을 예수님은 결국은 완성하십니다.

 

끝까지 예루살렘은 이 종말을 바닥에 까는 것을 원치 않고 거부하지만 말입니다.

 

원인 없는 결과로써

결과가 이미 깔려있는 자는 은혜로만 살아갈 뿐입니다.

 

그 결과가 결국 원인이거든요

후손이 주 였던 겁니다.

나의 허물을 모두다 다 담은 결과물 이였습니다.

 

그런데 십자가가 걸림돌이 되는 자들에게는

이 결과에 도달하지 않고자

원인은 뒤짚어 씌우고자 난리도 아닙니다.

마귀는 그래서 등장하는 겁니다.

 

우편 곧 예수님의 주 의 주 되심을 더더욱 돋보이도록 하고자

좌편에 마귀는 앉도록 되어 있습니다.

 

변호사의 기능을 더더욱 극적인 효과를 더하게 하고자

마귀는 검사의 자리에 경찰 노릇을 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베드로가 결국은 잡혔습니다.

아니 이미 심판 속에 있었던 자요

이미 죽었던 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죽은 베드로를 살리고자 십자가로 직행 하십니다.

그런데 베드로를 안됩니다 죽으시면 안됩니다 라고

종말을 깔려고 가시는 주님을 막아섭니다.

사탕아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뜨리는 자구나 어딜 감히 사탕으로 나를 유혹해

사람의 일을 생각하고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않는구나

 

넌 이미 죽어 있어 내가 널 살리고자 죽음을 깔려고 가는거야

종말을 깔려고

그래야 심판 속에서도 사는

3일의 간극 속에서도 사는

다니엘이 불 속에 넣임을 당해도 살았듯이

그 불 속에서도 사는 종말인간 만들려고 간다 왜?????

 

마귀경찰은 드디어 물증을 잡았다고 그 원인을 확보했다고 도장 찍으라고 합니다.

 

한 두가지가 아닙니다. 밀까부듯이 다 조사해서 세밀한 것 까지 다 책잡았습니다.

빠져나올수 있는 그 어떤 근거도 이제는 없습니다.

 

자 이래서 예수님께서 단번에 도말 하실려고 십자가에 죽으시러 가신 겁니다.

종말을 깔아야 하는 이유입니다.

 

마귀는 검사검찰로써 카카오톡 대화방을 다 세밀하게 밀까부듯이 다 조사합니다.

주님이 부여한 권한이니 우리가 불평할 입장이 못 됩니다.

 

초등학교도 안 나온 고아이지

중 고등도 안 나온 배운 것 없는 무식한 자이지

대학 안 나왔지

시집 장가 못갔지

머리 나쁘지

아이큐 500도 안되지

(그런데 아이큐 500 넘어도 불이라는 종말을 못 통과 합니다. 단절입니다.)

재산도 9999억도 안되는 거지 이지

무식하니까 수준도 낮지
(그런데 수준이 엄청 높아도 불이라는 종말을 못 통과 합니다. 단절입니다.)

고집 세지

모세처럼 말 더듬 거리지

벙어리이지

소경이지

귀머거리이지

자존심 세지

만년백수지

토색하지

음탕하지

의로움이 없는 불의하지

교회에 덕이 안되지

간음하지

지식적이지

완벽주의자이지

돈을 사랑하지

외식하지

위선자이지

거짓말 밥 먹듯이 잘하지

교회 돈 훔치지

불효자이지

종교꾼이지

우상숭배자이지

악인 세리 매국노 이지

시기 다툼을 일삼는 자이지

술먹지

방탕하지

 

뭐 하나 안 걸리는 것이 없습니다.

이미 갇혀 버렸기 때문입니다. 막살기 할 필요없이 이미 막살고 있습니다.

 

이미 심판의 저주 속에 살고 있는 티를 팍팍 내면서 살고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런 것들을 다 넘어서는 아무리 좋은 것을 갖추어도 불이라는 종말을 못 통과 하는 것은 매 마찬가지입니다. 도토리 키 재기입니다. 단절이라고 했습니다. 초과잉적 간극입니다.

 

(18:11, 개역)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이미 마귀가 딱 잡고 원래 처음부터 빼도박도 못하도록 잡혀서

뭘해도 다 악할 뿐이다는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배려로 그 동안 은혜로 살아온 것은

내가 잘 나서가 아니라

 

주님의 피 자랑할려고

내가?

아니!! 주님의 피 스스로가 자신의 피를 발라서 스스로 자기 피를 자랑하고자

주의 주 되심을 드러낼려고

이런 악인도 용서하는 피의 능력이다는 것을

 

종말 속에서도

종말을 깔아서

주의 주 되심을 드러내신다 라는 겁니다.

 

이 피의 영광을 드러내어야 할 자들이

도리어 예수님의 피를 무효화 시키고자

예수님을 죽이고 거부하는

 

종말이 아닌 나의 정당성 나의 생존의 마땅함을 자꾸 우기다 보니

원인을 만들어서 뒤짚어 씌우는 겁니다.

 

실로암 소경의 눈먼 죄가 과연 날때부터 죄인 자기 죄인지

아니면 부모의 죄 때문에 빛 한 번 본적이 없게 되는지?

 

원인을 자꾸 찾는 악마성을 드러내는 겁니다.

 

예수님은 원인 없이 결과를 통보합니다.

이 사람이 소경이 된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려 함이라고

 

주님께서 우리를 죄인 만드시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자 함입니다.

 

죄인으로 만드셔야 그 죄인을 꽉 무는 경찰이 반드시 원인을 들어댈게 아니겠습니까?

 

이것이 임박한 종말에서 반드시 나타나는 사건들(징후)입니다.

(니체 계열은 이것을 사건이라고 하고 라캉 쪽에서는 응시물 얼룩 징후 대상 소문자 에이 라고 합니다.)

 

이미 이 종말의 징후를 즐기고 있는 겁니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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