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자와 종말의 징조 (눅 20:45 - 21:28)

 

(20:45, 개역) 모든 백성이 들을 때에 예수께서 그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20:46, 개역) 긴 옷을 입고 다니는 것을 원하며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회당의 상좌와 잔치의 상석을 좋아하는 서기관들을 삼가라

(20:47, 개역) 저희는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니 그 받는 판결이 더욱 중하리라 하시니라

 

(21:1, 개역) 예수께서 눈을 들어 부자들이 연보궤에 헌금 넣는 것을 보시고

(21:2, 개역) 또 어떤 가난한 과부의 두 렙돈 넣는 것을 보시고

(21:3, 개역) 가라사대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가난한 과부가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21:4, 개역) 저들은 그 풍족한 중에서 헌금을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구차한 중에서 자기의 있는 바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하시니라

(21:5, 개역) 어떤 사람들이 성전을 가리켜 그 미석과 헌물로 꾸민 것을 말하매 예수께서 가라사대

(21:6, 개역) 너희 보는 이것들이 날이 이르면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리우리라

(21:7, 개역) 저희가 물어 가로되 선생님이여 그러면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이런 일이 이루려 할 때에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

(21:8, 개역) 가라사대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내가 그로라 하며 때가 가까웠다 하겠으나 저희를 좇지 말라

(21:9, 개역) 난리와 소란의 소문을 들을 때에 두려워 말라 이 일이 먼저 있어야 하되 끝은 곧 되지 아니하니라

(21:10, 개역) 또 이르시되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21:11, 개역) 처처에 큰 지진과 기근과 온역이 있겠고 또 무서운 일과 하늘로서 큰 징조들이 있으리라

(21:12, 개역) 이 모든 일 전에 내 이름을 인하여 너희에게 손을 대어 핍박하며 회당과 옥에 넘겨주며 임금들과 관장들 앞에 끌어 가려니와

(21:13, 개역) 이 일이 도리어 너희에게 증거가 되리라

(21:14, 개역) 그러므로 너희는 변명할 것을 미리 연구치 않기로 결심하라

(21:15, 개역) 내가 너희의 모든 대적이 능히 대항하거나 변박할 수 없는 구재와 지혜를 너희에게 주리라

(21:16, 개역) 심지어 부모와 형제와 친척과 벗이 너희를 넘겨주어 너희 중에 몇을 죽이게 하겠고

(21:17, 개역) 또 너희가 내 이름을 인하여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21:18, 개역) 너희 머리털 하나도 상치 아니하리라

(21:19, 개역) 너희의 인내로 너희 영혼을 얻으리라

(21:20, 개역) 너희가 예루살렘이 군대들에게 에워싸이는 것을 보거든 그 멸망이 가까운 줄을 알라

(21:21, 개역) 그 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할지며 성내에 있는 자들은 나갈지며 촌에 있는 자들은 그리로 들어가지 말지어다

(21:22, 개역) 이 날들은 기록된 모든 것을 이루는 형벌의 날이니라

(21:23, 개역) 그 날에는 아이 밴 자들과 젖먹이는 자들에게 화가 있으리니 이는 땅에 큰 환난과 이 백성에게 진노가 있겠음이로다

(21:24, 개역) 저희가 칼날에 죽임을 당하며 모든 이방에 사로잡혀 가겠고 예루살렘은 이방인의 때가 차기까지 이방인들에게 밟히리라

(21:25, 개역) 일월 성신에는 징조가 있겠고 땅에서는 민족들이 바다와 파도의 우는 소리를 인하여 혼란한 중에 곤고하리라

(21:26, 개역) 사람들이 세상에 임할 일을 생각하고 무서워하므로 기절하리니 이는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겠음이라

(21:27, 개역) 그 때에 사람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21:28, 개역) 이런 일이 되기를 시작하거든 일어나 머리를 들라 너희 구속이 가까웠느니라 하시더라

 

 

예수님께서 지금 예루살렘 중심으로 펼쳐지는 유대인의 삶을 하나 하나씩 끄집어서 지적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마치 약속의 땅에서의 이스라엘의 모습이 과연 약속의 땅에 부합되느냐 라는 구약에서의 지적과 동일합니다.

 

약속의 땅의 가장 기본적인 이스라엘의 삶의 모습은 바로

제사나 번제를 원치 않는 인애와 자비의 모습입니다.

 

이것이 사실상 이스라엘의 처음자리 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가장 기본적인 처음자리 자체가 일만달란트의 긍휼을 받아놓고도

그들 스스로가 이를 거부하는 모습으로써

긴 옷을 입고 시장에서 문안 받기를 바라며

회당 곧 성전 곧 교회의 가장 높은 좋은 자리 상좌에 앉아 있고

잔치집에서도 가장 좋은 자리를 앉는다는 겁니다.

 

이들의 행동은 결국 상대적인 가난한자의 착취나 무시를 통한 것이라고

예수님이 일방적인 편파해석을 통해 그런 행동이 나온다는 것입니다.

 

맞습니다

인간이 어떤 행동을 자랑하고 과시한다는 것은 그것이 특출나기 때문입니다.

별로 특출나지 않고 보통 일반적인 것이면 자랑할 이유가 없는 거죠.

 

그런데 그것이 바로 7번 용서와 같은 입장인 겁니다.

인간들 끼리에서는 뭔가가 특별한 것이 맞을수 있겠지만

정작 770번 앞에서는 뻔데기 앞에서 주름잡은 격이 된다는 겁니다.

 

왜 이런 차이성의 간극 곧 단절을 못 보고

왜 자꾸 자기 보다 못한 자를 꼭 앞장세워서 자신을 자랑할 수 밖에 없는가?

 

이것이 지난 시간에 말한 바로 자기죽음을 바탕에 깔지 않고 행동하기 때문이다고 했습니다.

 

즉 종말을 미리 앞당겨 깔아버리는 것이 바로 믿음이라는 겁니다. 곧 간극 단절입니다.

 

그런데 예수님 앞에서는 답변도 못하는 인간들이

자기 보다 못한 자들 앞에서는 되도 않는 자랑질을 한다는 것은

바로 자기 바탕을 죽음 곧 심판 곧 종말이 아닌 자기생존을 깔기 때문에

그것이 바로 죽은자의 하나님이지 산 자의 하나님이 아니다 라고

예수님이 지적하시는 겁니다.

약속의 하나님이 아닌 우상의 하나님을 믿는 거죠.

 

그런데 그런 행동이 더군다나 어디서?

바로 약속의 땅 예루살렘에서 벌어지고 있고

더 더군다나 이제는 보편화 되었다는 겁니다.

그러니 강도의 소굴이지 하나님의 집인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 아니다는 겁니다.

 

종말의 집이

졸지에 인간의 우상으로 가득한 집이 되어버렸다는 겁니다.

 

심판을 보고 긍휼을 바래야 할 입장이

도리어 남의 것을 약탈한 것을 자랑하고 과시하는 강도의 집이

오늘날 교회가 되었다는 겁니다.

 

약속의 땅은 어디까지나 자신의 끝인 종말의 심판을 미리 앞당겨서 나오는

불가능한 행동들만이 나와야 하는 곳인데

 

인간의 우상을 믿는 그 버릇들만이 교회에 가득차 버린

가능성의 행함들만이 가득차버린

그런 예루살렘이기에

 

예수님은 그들의 처음자리 곧 종말을 미리 앞당겨서 상기시키시는 겁니다.

 

종말이라는 처음자리가 뭔가?

21장부터 나옵니다.

 

부자가 큰 금액을 헌금으로 내는 것은 그들의 아주 작은 일부분일 뿐이다는

아주 냉혹한 해석을 하십니다.

 

그런데 가난한자의 얼마 안되는 푼돈은

정작 가난한자의 전부 전재산이다는 것이다는 해석을 일방적으로 하시는 겁니다.

 

이렇게 가난한자와 부자의 차이성을 갈라놓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누가 더 차이가 나는고 하니

부자가 더 나은 제사를 드렸다고 해석을 하는 보편적 해석이

예루살렘에 보편화 되었다는 겁니다.

 

그럼 이 예루살렘은 부자의 헌금만을 필요로 하는 것일까요?

아니지요

바로 가난한자의 전재산 바치는 것 자체가

예루살렘의 종말적 기능을 제대로 말하고 있다는 겁니다.

 

교회란 바로 종말적 단체인 겁니다.

끝을 미리 앞당겨서 누리는 곳입니다.

 

이 심판이라는 죽음을 누리는 곳으로서의 교회가 아니다면

그냥 종교동아리 단체일 뿐이며

그곳은 그야말로 자랑질만 하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것 못 보시겠다는 겁니다.

보편화 되어버렸고

예루살렘은 이제 더 이상 종말의 기능을 하지 못하는

강도의 소굴로 변해버렸지만

 

즉 인간들은 포기해 버렸지만

예수님은 장소가 아닌 예루살렘에 대한 예언의 성취로써의 기능을

절대로 포기하지 않으시고

직접 그 처음자리의 기능을 발휘케 하시는 겁니다.

 

그렇다면 죽어야 하겠지요

베드로는 죽으신다는 예수님의 결심을 끝까지 막고자 했습니다.

그런 베드로는 말씀의 예언의 취지를 몰랐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않고 사람의 일을 생각한 사탄이라고 욕먹은 이유입니다.

 

교회란 이런 종말적 기능을 잃어버렸다면

더 이상 교회가 아닌 장사하는 곳일 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는 수시로 깨고 깨어야 합니다.

깨고 깨면 깰수록 망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종말성이 초과잉적으로 나오는 겁니다.

7번 용서 라는 되도 않는 것이 교회에서 자랑질로 보편화 될 때

7번 용서를 깨뜨리는 770 이라는 종말성인 처음자리가 나오는 겁니다.

 

늘 새롭다 라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아름다움과 숭고의 차이입니다.

아름다움은 누구든지 다 감탄하는 겁니다. 그래서 자랑합니다.

회당에서 상좌에 앉고 잔치집에서 가장 좋은 자리에 앉는 것은 아름다움을 뽐내는 겁니다.

 

그런데 숭고란 거룩한 아름다움으로써 불쾌한 아름다움입니다.

7번을 확 찢어버리는 770의 초과잉적 용서입니다.

7번 용서는 간극이 생기질 않지만

770은 단절이 그만 생겨 버립니다. 균열도 생기고 그래서 분열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갈라지고 그 갈라짐으로 인해 불쾌감이 생기는 겁니다.

그 불쾌감이 생겼다는 자체가 숭고가 제대로 나타났다는 겁니다.

 

부자의 헌금은 금액 때문에 아름답게 보일지 모르지만

그래서 사람들이 다들 좋아라 하겠지만

 

가난한자의 헌금은 숭고함 그 자체이다는 겁니다.

쥐뿔도 없으면서 왜 전재산을 바쳐버리느냐 말이죠

남들은 그럼 뭐가 됩니까? 불편해지잖아요?

 

그때 누가 이렇게 자랑질을 눈치 없이 또 합니다.

 

(21:5, 개역) 어떤 사람들이 성전을 가리켜 그 미석과 헌물로 꾸민 것을 말하매 예수께서 가라사대

 

즉 성전을 아름답게 꾸미고 그런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 사람은

당연히 부자와 같은 상좌를 앉고자 하고 좋은자리를 앉는 그런 자이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런 것이 사람들에게 무지 무지 인기는 있어도

전혀 불편하고 불쾌감을 주지를 않는다는 겁니다.

 

그럼 가난한자의 헌물은 그럼 뭐냐?

전부를 건다는 것은 괜히 전부를 걸어서 도박처럼 배팅을 해서

두 배로 세배로 복달라는 것이 아니라

 

이 성전 곧 예루살렘의 취지가 바로 처음자리라는 종말성이다는 겁니다.

 

가난한자가 전부를 걸었다는 것은 이제 미래는 없다는 겁니다.

끝을 미리 다 앞당겨 버렸기에

즉 자기 목숨 곧 죽음을 바탕으로 깔아버렸다는 겁니다,

 

그렇게해서라도 뭐는 유지가 되어야 한다?

약속 이다는 겁니다.

 

이런 행동의 차이가 있으니 극과 극이겠지요

 

앞시간에서 말한 다룬 바리새인과 예수님의 충돌

그리고 예루살렘에 들어와서 대제사장 무리들과 예수님의 충돌이

 

바로 이 두 극의 극단적인 차이의 간극을 말해주고 있다는 겁니다.

 

이것은 주님은 대조적으로 부자와 가난한자의 헌물의 극과 극을 보여주고 있다는 겁니다.

 

누가 예루살렘의 기능을 말해주고 있는 겁니다.

 

성전을 곧 예루살렘을 아름답게 꾸미는 돈으로 처발라서 교회를 꾸미는 부자의 행동입니까?

아니면 예루살렘의 처음자리라는 종말의 기능을 자기목숨걸어서 바탕에 까는 가난한자의 행동입니까?

 

이런식으로 예수님은 드디어 종말의 기능 곧 성전의 참된 종말의 기능을 증거하십니다.

 

실제로 제가 일했던 공장의 주변에 어떤 교회가

성전의 새로 건축하면서 건축헌금을 모았는데 어떻게 꼬시는고 하니

벽돌 하나 하나에 건축헌금 낸 사람의 이름을 새겨준다는 겁니다.

그리고서는 그 오래된 건물이 허물어 지고 새롭게 깔끔하게

다들 건물이 보기 좋다고 입소문이 나면서 다들 칭찬들을 한다는 겁니다.

 

그것을 말하던 어느 장로님에 부럽다고 저에게 말을 하더라 말이죠.

 

예수님이 왜 눈물 흘리시는지 이제야 알 것 같습니다.

 

참 돋 뜯어내는 방법 참 쉽죠잉~~~~~~

그게 바로 강도의 소굴입니다.

 

이런 수법이 어디 한 두 교회가 써먹은게 아니거든요.

 

물론 예루살렘 성전의 공간 개념은 다 날라가 버리고

예수님 자신의 참성전 되심의 종말의 기능은 완성이 되어서

다 이루었도다 라는 성취가

곧 약속의 성취가 넉넉하게 이루어집니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교회의 종말기능을 기대할 필요는 없습니다.

어차피 교회는 다 가짜입니다. 기대 자체를 안하는게 낫습니다.

 

오로지 예수님의 십자가 상에서 다 이루심만을 기뻐하면서

그 넉넉한 다 이루심의 승리를 누리시면 됩니다.

 

바로 긍휼의 완성이요 나의 종말의 완성입니다.

언제든지 죽어도 상관이 없는 그 종말이라는 처음자리를 주님은 완성하신 겁니다.

 

뭘해도 다 죄 뿐임에도 불구하고

뭘해도 다 용서 뿐입니다.

 

(21:5, 개역) 어떤 사람들이 성전을 가리켜 그 미석과 헌물로 꾸민 것을 말하매 예수께서 가라사대

(21:6, 개역) 너희 보는 이것들이 날이 이르면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리우리라

(21:7, 개역) 저희가 물어 가로되 선생님이여 그러면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이런 일이 이루려 할 때에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

 

정작 예루살렘 성전의 종말이 코 앞에 있는 줄도 모르고

아름답게 꾸몄다고 지금 착각들을 하고 있는 겁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종말의 기능을 말하고 바로 바로 뒤로 빠지는 누락성을 보여주도록 되어 있을 뿐입니다.

 

엑스트라다가 장렬히 죽은 다음 무대뒤로 빠져야할 그림자 역할인데

이게 그만 주인공처럼 몇발의 총알을 맞고도 안죽고 뒤로 빠질 생각 조차도 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이것이 부자와 가난한자의 헌물 차이성입니다.

 

종말의 기능을 말하고 빠져야 하는데 말입니다.

 

오늘 어머니와 식사를 하다가 인간극장의 어느 노부부 특히 할머니의 고생을 보시면서

어머니가 이렇게 말씀하시는 겁니다.

 

저 할머니가 얼마나 고생을 많이 했는지

남편도 고생을 너무 많이 한 아내라고 오죽하면 말을 잘 안한다고

그래도 다들 고생한 것을 너무 잘 알정도로 말도 못할 고생을 했다고 하시는 겁니다.

 

그때 아! 바로 이거다 하면서 제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어머니 다윗이 왜 자기 후손에게 주여 라고 했습니까?

조상이 주여 라고 해야지

왜 자손에게 주인이시오 라고 했냐 말이죠,

 

어제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은 있어도

요셉의 하나님이 없다고 말씀을 나누었잖아요?

왜 일까요?

 

야야 가만히 있어 봐라 이거 다 보고 이야기 하자?

아니 어차피 재방송이고 어무이께서 보셨다면

방금 제가 저 장면을 보고 생각났기 때문에

이것과 연관되니까 지금 물어보는 겁니다.

한번 답변해 보세요

바리새인 또는 대제사장과 그 무리들은 답변을 못했잖아요

 

그래 그럼 가만히 있어보자 라고 하시다가

장면을 보니 거기에 푹 빠져서 에구 에구 저 할머니 봐라

동변상련의 마음으로 웃으시면서 그저 자식들 생각 뿐인 모습을 보고서는

난 이런 시골 농사의 장면을 보면 너무 너무 좋더라 라고 하십니다. ㅋㅋㅋ

 

그래서 기다리지 못하는 성질급한 마음에 제가 미리 답을 말해 버렸습니다.

어제 말했듯이 어머니

 

보통 부모가 또는 조상이 고생을 많이 해서 후손이 혜택을 받지 않습니까?

부모 덕에 말이죠.

 

그런데 이것은 정반대입니다. 그것을 저 장면을 보고 제가 힌트 삼은 겁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되도않는 모습을 즉 저들의 허물을

요셉이 다 이루는 겁니다.

그래서 간극좀 누리라고 뺑뺑이 일부러 돌리고

기여이 절대로 안 오겠다는 쩔뚝거리는 야곱을 이끌어 와서야 비로소

애굽에 탁란 시킬수 있었다 라는 겁니다.

유다가 그래서 자기자식을 담보로 잡았듯이 말입니다.

 

즉 후손 때문에 구원받았다 라는 겁니다.

 

조상 덕 분에 구원받은게 아니라

후손 덕 분에 구원받았다는 겁니다.

 

다윗은 자신의 죄악을 누가 대신 피흘리는 것을 봤는고 하니

예수님께서 대신 그 죄악을 담당하는 것을 봐 버리고서는

주께서 내 주께 라는 고백을 했다는 거죠.

 

3일 동안 형들에 의해서 땅에 파묻혀 죽은자로 취급당하는 것이

바로 요셉으로 인한 간극이였듯이

 

이들의 약속이 요셉에게서 이루어지는 겁니다.

딸란 70명이 무슨 수로 바다의 모래와 같이 하늘의 별과 같이 부풀려 지는 누룩처럼

또는 하나님나라 비유처럼 한 알의 작은 겨자씨만한 씨앗이 큰 나무가 되는

그 종말성의 이스라엘이라는 특이한 족속을 이룰수가 있었겠냐 말이죠.

 

하나님 나라는 결국 악마의 나라 속에서 펼쳐지는 그 간극을 그 차이성을 보여주는 겁니다.

 

마귀가 없다면 예수님이 누구인지를 알지 못하듯이 말입니다.

 

그리고서는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로운 왕들이 세워지니까

강퍅케 해서

단물 다 빨아먹고 출애굽 나오는 겁니다.

 

후손은 단순히 숫자나 순서 서열의 끝부분이 아닌

종말성을 지닌 것이다는 겁니다. 후손이란 그런 의미 곧 종말성이다는 겁니다.

끝을 땡기는 겁니다.

 

존재 이전의 당위이다는 겁니다. 기능이라는 존재 이전의 기능

먼저 있었다 라는 겁니다. 존배 보다 먼저.

베드로의 존재 보다 먼저 닭이 먼저 있었고 닭 울음이 먼저 있어야 했듯이 말입니다.

 

아브라함이 예수님의 때를 보고 기뻐했다 라는 것은

그 종말성이 바로 자신의 처음자리이다 라는 겁니다.

 

(1:1, 개역)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

 

모든 역사적인 사물이나 장치들의 바닥을 다 뜯어보자 말이죠

과연 무엇이 남겠냐 말이죠

그것이 바로 처음자리만 남게 되는 겁니다.

뜯어도 뜯어도 더 이상 뜯겨지지 않는 최종바닥은 바로

 

예수만 보이더라 라는 것처럼 말입니다.

 

(9:36, 개역) 소리가 그치매 오직 예수만 보이시더라 제자들이 잠잠하여 그 본 것을 무엇이든지 그 때에는 아무에게도 이르지 아니하니라

 

변화산에 모세가 나타나 별세해 주세요 라는 취지가 바로

 

예수님만 남게 해 주세요 라는 겁니다.

 

 

(9:29, 개역) 기도하실 때에 용모가 변화되고 그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나더라

(9:30, 개역) 문득 두 사람이 예수와 함께 말하니 이는 모세와 엘리야라

(9:31, 개역) 영광 중에 나타나서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씀할새

(9:32, 개역) 베드로와 및 함께 있는 자들이 곤하여 졸다가 아주 깨어 예수의 영광과 및 함께 선 두 사람을 보더니

(9:33, 개역) 두 사람이 떠날 때에 베드로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 하되 자기의 하는 말을 자기도 알지 못하더라

(9:34, 개역) 이 말 할 즈음에 구름이 와서 저희를 덮는지라 구름 속으로 들어갈 때에 저희가 무서워하더니

(9:35, 개역)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이는 나의 아들 곧 택함을 받은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하고

 

 

이것이 이스라엘의 처음자리입니다.

곧 처음자리의 증상이 이스라엘이요

종말의 단체로써

 

처음자리는 바로 사랑은 바로 예수님 이다는 겁니다.

 

다른 것은 다 거짓이다는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가난한자가 무모하게 뒷날도 생각도 않고

전부를 걸듯이 자기 전 재산을 걸어버리면

이것은 부자들의 아름답다 라고 떠들며서 자랑하는 그 속에서

졸지에 종말이 툭 하고 튀어나오는 불편하고 불쾌한 숭고인 종말이 튀어나온 것이다는 겁니다.

 

바로 예수님이 바로 그런 행동을 지금 하시고 있다 라는 겁니다.

 

그러면 이제는 질문이 반대로 바뀌게 됩니다.

 

(21:7, 개역) 저희가 물어 가로되 선생님이여 그러면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이런 일이 이루려 할 때에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

 

주여 언제 어디서 그런 일들이 벌어집니까 라고 말입니다.

 

이것이 갈라놓는 종말이다는 겁니다.

 

이스라엘은 바로 종말로써 두 패로 갈라놓는 그런 기능이어야 하는데

도리어 엉터리로 되도 않는 7번 용서로 간격벌리기를 하질 않나

 

저 세리와 같지 않음을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라고

이레에 두 번 금식 십의 이조를 드린다고

그딴거로 거리두기를 한다는 겁니다.

 

그것도 간극입니까? 간극 축에도 못 끼입니다.

적어도 770번 용서라는 간극

칠천명 남았다는 간극

일만달란트 라는 16만년의 간극 이 간극 다운 간극이지

제대로 된 단절 말입니다.

 

바로 이것이 숫자 개념이 아닌 인물 개념으로써 바로 종말이다는 겁니다.

끝판왕처럼 끝을 보여주는 초과잉적 종말을 보여주어야 할 자가 바로

이스라엘인데

도리어 이스라엘이 간극 벌림을 당하고 있는 겁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지금 이 이스라엘의 기능

곧 예루살렘의 기능을 상기시키는 겁니다.

너희는 이 종말의 기능을 잊어버렸다고 할지 모르나

주님은 포기 없으십니다.

 

돌 위에 돌 하나도 남기지 않고 종말의 기능을 구체적으로 실현 시키십니다.

 

마치 이럴 때 보면 예루살렘이 하나의 의인화 되어서

삼손과 같은 모습처럼 보입니다.

 

삼손이 두 눈이 뽑히고 머리카락이 짤려서

더 이상의 종말의 기능을 하지 못한채로

본인이 도리어 갇혀 버리고 포로되었을 때

 

삼손을 주님께서 포기하시느냐?

 

아닙니다.

 

그의 기능인 사사의 기능으로 처음자리 곧 수수께끼의 정답인 사랑을 완성하시는 겁니다.

 

예루살렘이 그런 식으로 무너져 버립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예루살렘에서 다 이루었도다 라고 약속을 성취하시고 말이죠.

 

결국 종말성은 발등상에 남을 올리거나 타인의 죄악을 운운할게 아니라

내가 바로 이런 예루살렘의 원수성을 그대로 보여주듯이

내 자신을 이 재판대 심판대 라는 발등상에 놓이게 하시는

주님의 우편의 기능을 드러내고자 하시는 주의 주 되심의 초과잉적 실현이다는 겁니다.

 

이 주의 주 되심을 매일 매일 사건으로 터트려서 준비하신 용서를

그 피를 매일 매일 발라주시는 겁니다.

매일 매일 불쌍히 여겨주시는

일용할 양식처럼 말입니다.

매일 매일의 만나가

매일 매일의 종말적 만나라는 음식이 더더더 초과잉적 종말인 주님의 살과 피로써

매일 매일의 주의 살과 피가 되는 겁니다.

 

그러니 이 말씀을 듣고서는 그렇게 기적을 보고 많이 따라왔던 자들이 다 돌아서는 겁니다.

나는 식인종이 아니다 라고 말이죠.

그럴 정도로 나는 나쁜놈이 아니다 라고 말이죠.

다 돌아서는 겁니다.

 

남아 있는 제자들에게까지 왜 너희도 가지 왜 있니 라고

얼마나 투박하고 냉소적인 차가운 말투로 왜 남았니 저들을 따라 가렴 왜 안따라가?

남아 있으면 그것이 비정상 아니냐 라고 다구치듯이 말이죠.

 

(6:65, 개역) 또 가라사대 이러하므로 전에 너희에게 말하기를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 하였노라 하시니라

(6:66, 개역) 이러므로 제자 중에 많이 물러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

(6:67, 개역) 예수께서 열두 제자에게 이르시되 너희도 가려느냐

 

만나를 통해 먹고 살았다 라는 기적으로 본 이스라엘을

예수님은 만나는 바로 예수님의 살과 피를 말하기 위한 그림자였다고

본격적인 만나의 종말적 기능인 예수님의 살과 피를 구체화 시킵니다.

 

그럴 때 많은 사람들이 기적보고 따라왔다가 깜짝 놀래서 다 되돌아 가버립니다.

실망한 겁니다.

기대한 자가 아니였다 라는 겁니다.

종말과 나는 상관이 없다 라고 다 돌아서 버리는 겁니다.

 

이것이 종말의 기능이요 징조입니다.

되돌려 버리게 하는 것

부자청년을 등돌려 되돌아 가도록 만들어 버리는 것

곧 갈라짐입니다.

 

분열 간극 차단 단절입니다. 이것이 불쾌한 거룩 곧 숭고입니다.

 

자 그럼 예수님은

 

(21:5, 개역) 어떤 사람들이 성전을 가리켜 그 미석과 헌물로 꾸민 것을 말하매 예수께서 가라사대

(21:6, 개역) 너희 보는 이것들이 날이 이르면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리우리라

(21:7, 개역) 저희가 물어 가로되 선생님이여 그러면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이런 일이 이루려 할 때에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

 

아름다운 성전과 무너지는 성전의 대조로써 종말의 징조를 설명하시고 계십니다.

마치 부자의 헌물과 가난한자의 헌물을 대조하듯이 말입니다.

 

종말에는 이런 일들이 벌어진다고 하셔놓고

그야말로 처참한 상황입니다.

 

그런데 그 일 이전에 반드시 이런 일이 먼저 일어난다고 하십니다.

종말 이전의 일은 먼저 일어나야 할 일이 뭘까요?

 

(21:9, 개역) 난리와 소란의 소문을 들을 때에 두려워 말라 이 일이 먼저 있어야 하되 끝은 곧 되지 아니하니라

(21:10, 개역) 또 이르시되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21:11, 개역) 처처에 큰 지진과 기근과 온역이 있겠고 또 무서운 일과 하늘로서 큰 징조들이 있으리라

(21:12, 개역) 이 모든 일 전에 내 이름을 인하여 너희에게 손을 대어 핍박하며 회당과 옥에 넘겨주며 임금들과 관장들 앞에 끌어 가려니와

(21:13, 개역) 이 일이 도리어 너희에게 증거가 되리라

(21:14, 개역) 그러므로 너희는 변명할 것을 미리 연구치 않기로 결심하라

(21:15, 개역) 내가 너희의 모든 대적이 능히 대항하거나 변박할 수 없는 구재와 지혜를 너희에게 주리라

 

예수님의 이름 때문에 세상임금에게 끌려간다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것이 증거가 된다는 겁니다.

즉 미끼로 놓여져야 심판의 근거로 삼게 된다는 증거가 되는 겁니다.

그러니 미리 법정에서 무슨 말을 할지를 미리 구상하지 말라는 겁니다.

 

이래나 저래나 어차피 미끼일 뿐이다는 겁니다.

 

또 그것은 어차피 나만 남았나이다 라는 되도않는 잉여일 뿐이다는 겁니다.

초과잉적 잉여가 따로 있는데

 

(21:15, 개역) 내가 너희의 모든 대적이 능히 대항하거나 변박할 수 없는 구재와 지혜를 너희에게 주리라

 

바로 모든 대적이 능히 대항하거나 변박할 수 없는 구재와 지혜가

외부에서 주어진다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죽으면 죽으리라 라는 에스더의 모습이 바로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그저 각기 제 길로 가는 양 같기만 할 뿐이지

죽으면 죽으리라 라는 제대로 된 초과잉적 간극을 벌리지 못합니다.

괜히 해 버리면 자랑질만 할 뿐이지

불쾌한 숭고인 간극을 극과 극으로 만들어 낼 줄 모릅니다.

그저 주님의 배려의 혜택만 받을 뿐입니다.

 

그래서 별세해 주세요 라고 모세가 요청하듯이

예수만 남더라 가 되는 겁니다.

 

예수님만 남기시고 다 누락시켜 주세요 라는 겁니다.

 

이것이 종말 이전에 반드시 나타나야할 징조입니다.

 

이렇게 약속의 땅을 깨끗이 청소를 하십니다.

이스라엘 보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곧

약속이 더 중요하기 때문에 그 땅을 청소하시는 겁니다.

이스라엘이 하지 못한 약속의 땅의 기능을

약속의 땅 스스로가 그 기능을 발현하고자

이스라엘을 포로당하게 하는 겁니다.

 

(21:17, 개역) 또 너희가 내 이름을 인하여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21:18, 개역) 너희 머리털 하나도 상치 아니하리라

(21:19, 개역) 너희의 인내로 너희 영혼을 얻으리라

(21:20, 개역) 너희가 예루살렘이 군대들에게 에워싸이는 것을 보거든 그 멸망이 가까운 줄을 알라

 

 

이스라엘은 결국 실패하고 멸망합니다.

그러나 실패해도 상관없고

오직 예수님만 남으면 된 겁니다.

원래 예루살렘의 기능은 그런 기능이였던 겁니다.

멸망하도록 되어 있는 기능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원받기로 작정된 자들은 다 받기로 되는

머리털 하나도 상치 않더라 라는 겁니다.

다니엘을 아무리 불에 넣어도 또 사자 굴에도 넣어도 머리털 하나도 상치 않았듯이 말입니다.


저들로 인해 간격 벌림 당하는게 아니라
그들이 도리어 간격 벌림 당하게 되는 겁니다.

 

당연히 종말의 기능 때문입니다.

 

그래서 실패로 돌아가자 라는 취지인 겁니다.

성공해 버리면 누가 종말의 기능을 쳐다보겠습니까?

그래서 부자와 가난한자의 헌물을 자꾸 대조 시키는 겁니다.

부자에게서는 즉 천재에게서는 그 간극이 전혀 보이질 않는다는 겁니다.


그럼 가난한자는 나은가?

그들의 무능함에 주님의 개입이 간극을 설명하는데 적절하게 사용하시더라 라는 겁니다.

가난한자가 조건이 아니라 말이죠.

거지나사로가 되자 라는 것은 불교라고 했습니다.

이미 거지나사로인데 뭘 따로 새삼스럽게 거지나사로 되기를 할 필요가 뭐 있냐 말이죠.

 

불교는 악마의 적극적인 개입이 없는 겁니다.

가룟유다가 없으면 그리스도는 그냥 부처일 뿐입니다. 예언자 점쟁이 뿐입니다.

악마의 되도않는 부조리와 모순과 죽음(사망권셰)

굴복하지 않는 사랑이어야(참고 견디며 끝까지 순종하시는) 그 계시의 완성이 되는 겁니다.

 

그러니 부처는 마귀를 만들어 낼줄 모르고

예수님은 마귀를 만들어 낼줄 아시는 겁니다.

 

이렇게 말입니다.

 

에서를 미워하기로 작정하셨고

야곱은 사랑하기로 작정하셨다처럼 말입니다.

 

(9:13, 개역)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바로 이것이 주의 선하심 곧 주의 주 되심 왕되심이다는 겁니다.

 

여기에 반드시 마귀가 등장해 줘서 반발을 해 줘야 한다는 겁니다.

 

주의 주 되심이 뭔가 주의 왕되심이 뭔가를 말하기 위해서는

주의 왕 되심을 거부하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용서를 거부하는 그런 존재들의 등장이 반드시 배경 바탕으로 깔려 줘야 한다는 겁니다.

 

그것이 종말 곧 심판의 근거가 되는 겁니다.

 

종말 이전에 나타나야할 먼저 있어야 할 사건과

그리고 그 미끼를 덥석무는 숨어있는 바다에서 나오는 악마들

그리고 그 근거로 세상 심판이라는 마땅한 당위

? 이것이 바로 주의 주 되심을 드러내는 영광이기 때문입니다.

 

그 종말 속에서 우리는 구원받도록 되어 있기에

악에 갇혀있는 겁니다.

 

이 주의 주 되심을 바로 다윗이 외친 겁니다.

후손 곧 종말의 주체를 본 겁니다.

 

주께서 내 주께

 

(22:44, 개역)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냐

(12:36, 개역) 다윗이 성령에 감동하여 친히 말하되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발 아래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니라

(20:42, 개역) 시편에 다윗이 친히 말하였으되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20:43, 개역) 내가 네 원수를 네 발의 발등상으로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니라

 

(2:34, 개역) 다윗은 하늘에 올라가지 못하였으나 친히 말하여 가로되 주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2:35, 개역)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으니

(2:36, 개역)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이 정녕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

 

종말의 주체

희년 완성의 주체를 보기 위해

종말 속에서 우리는 악에게 포로잡힐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주의 이름 때문에 말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낙망할 일이 전혀 아니다는 겁니다.

 

비로소 예루살렘의 기능을 제대로 보는 것이며

동시에 주의 주 되심을 제대로 보는 것인 겁니다.

 

우리는 그저 열심히 다 양같아서 각기 제길로 가는 양같은 짖

막살기를 할 수 밖에 없는 겁니다.

 

오로지 주의 주 되심을 보기를 소망하면서 말입니다.

 

얼마나 곤고함이 극심하면 사람들이 기절을 할 정도이다는 겁니다.

사람만 그런 것이 아니라 하늘의 권능들도 흔들린다는 겁니다.

진노가 상상을 초월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견고한 것은 바로 인자의 오심이다는 겁니다,

가장 극심할때에 오시는 인자의 영광이다는 겁니다.

곧 간극이 제대로 벌려짐으로서 초과잉적 주의 주 되심을 보게 된다는 겁니다.

 

아직 나만의 거지나사로 되기를 마일리지로 쌓고 있다면

간극이 보일 리가 없겠지요

그래서 자살 시위를 하는 겁니다. 엘리야처럼 말입니다.


그것 마저도 탈탈 털어버려서 완전 빈주머니를 만들어야

머리를 들어 인자를 볼게 아닙니까?

이제 나에게서는 더 이상 나를 쳐다볼 꺼리가 없어야

인자를 본다는 겁니다.

 

7번 용서 등등이 나에게 남아 있다면 770번의 인자의 영광을 볼 리가 없잖습니까?

 

(21:22, 개역) 이 날들은 기록된 모든 것을 이루는 형벌의 날이니라

(21:23, 개역) 그 날에는 아이 밴 자들과 젖먹이는 자들에게 화가 있으리니 이는 땅에 큰 환난과 이 백성에게 진노가 있겠음이로다

(21:24, 개역) 저희가 칼날에 죽임을 당하며 모든 이방에 사로잡혀 가겠고 예루살렘은 이방인의 때가 차기까지 이방인들에게 밟히리라

(21:25, 개역) 일월 성신에는 징조가 있겠고 땅에서는 민족들이 바다와 파도의 우는 소리를 인하여 혼란한 중에 곤고하리라

(21:26, 개역) 사람들이 세상에 임할 일을 생각하고 무서워하므로 기절하리니 이는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겠음이라

(21:27, 개역) 그 때에 사람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21:28, 개역) 이런 일이 되기를 시작하거든 일어나 머리를 들라 너희 구속이 가까웠느니라 하시더라

 

이것이 종말의 징조로써

인자와 마귀와의 대조의 간극

인자와 사람과의 대조 간극

인자와 부자와의 대조 간극이다는 겁니다.

 

산 자의 하나님과 죽은 자의 하나님의 간극인 겁니다.

 

일체 의지 할게 없도록 탈탈탈 다 털어서 비로소 오시는 인자의 영광입니다.

 

우리는 이미 종말 속에 살고 있습니다.

매일 매일이 살려주심의 은혜 뿐입니다.

그 간극을 새록 새록 누리면서 말입니다.

 

이렇게 무시무시한 말씀을 해 놓고서는

다시 저주받은 무화과 나무 이야기를 하십니다.

 

이미 들었던 저주받은 무화과 나무 비유를 다시 하시면서

때가 되지도 않았는데 열매를 내지 않는다고 저주 받았던 무화과 나무


이제는 때가 되면 무화과 나무에 열매가 맺히듯이

종말의 때가 곧 임한다 라는 겁니다.

 

즉 주의 주 되심이 다 이루어졌다가 곧 성취 된다는 겁니다.

 

그 끝 곧 종말을 미리 앞당겨 누린다면

그것이 슬픈소식이 아니라 기쁜소식이다는 겁니다.

 

어차피 예수님만 남기도록 하시는 주의 주 되심

예수님의 왕 되심을 이루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남아본들 내가 구원받아본들 어차피 또 모호한 의문의 짖입니다.


주님의 구원되심

에수님의 주 되심만이 벌어지는 것이 바로 종말입니다.

 

무화과 나무 잎이 마르고 포도 나무에 열매가 없어도 

감람나무 열매 그치고 외양간 송아지 없어도 

우리에 양떼가 없으며 논밭에 식물이 없어도

 

난 여호와로 즐거워하리 난 여호와로 즐거워 하리

난 구원의 하나님으로 인해 기뻐하리라

 

(3:16, 개역) 내가 들었으므로 내 창자가 흔들렸고 그 목소리로 인하여 내 입술이 떨렸도다 무리가 우리를 치러 올라오는 환난 날을 내가 기다리므로 내 뼈에 썩이는 것이 들어왔으며 내 몸은 내 처소에서 떨리는도다

(3:17, 개역)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3:18, 개역)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주 예수님만 남고 다 누락 되는

주의 주 되심만 보이더라 라는 겁니다.

 

이것이 종말 때에만 벌어지는 종말의 단체 이스라엘만 누리는 영광입니다.

주의 주 되심만을 보고 기뻐하며 찬양하는 유일하게 누리는 존재들의 영광입니다.

 

제대로 된 간극이기에

자신들도 만들어 내지도 못한 간극임에도 불구하고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그저 불쌍히 여겨주심만으로 누리는 행복입니다.

 

 

(4:1, 개역) 그런즉 육신으로 우리 조상된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 하리요

(4:2, 개역)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4:3, 개역)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이 저에게 의로 여기신 바 되었느니라

(4:4, 개역)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빚으로 여기거니와

(4:5, 개역)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4:6, 개역)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행복에 대하여 다윗의 말한 바

(4:7, 개역)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4:8, 개역)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

(4:9, 개역) 그런즉 이 행복이 할례자에게뇨 혹 무할례자에게도뇨 대저 우리가 말하기를 아브라함에게는 그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 하노라

(4:10, 개역) 그런즉 이를 어떻게 여기셨느뇨 할례시냐 무할례시냐 할례시가 아니라 무할례시니라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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