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세와 포도원 농부 비유 (20: 1-19)

 

누가 권한을 줬는가와 악한 포도원 농부의 비유

 

(20:1, 개역) 하루는 예수께서 성전에서 백성을 가르치시며 복음을 전하실새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장로들과 함께 가까이 와서

(20:2, 개역) 말하여 가로되 당신이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지 이 권세를 준 이가 누구인지 우리에게 말하라

(20:3, 개역)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도 한 말을 너희에게 물으리니 내게 말하라

(20:4, 개역) 요한의 침례가 하늘로서냐 사람에게로서냐

(20:5, 개역) 저희가 서로 의논하여 가로되 만일 하늘로서라 하면 어찌하여 저를 믿지 아니하였느냐 할 것이요

(20:6, 개역) 만일 사람에게로서라 하면 백성이 요한을 선지자로 인정하니 저희가 다 우리를 돌로 칠 것이라 하고

(20:7, 개역) 대답하되 어디로서인지 알지 못하노라 하니

(20:8, 개역)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20:9, 개역) 이 비유로 백성에게 말씀하시되 한 사람이 포도원을 만들어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가서 오래 있다가

(20:10, 개역) 때가 이르매 포도원 소출 얼마를 바치게 하려고 한 종을 농부들에게 보내니 농부들이 종을 심히 때리고 거저 보내었거늘

(20:11, 개역) 다시 다른 종을 보내니 그도 심히 때리고 능욕하고 거저 보내었거늘

(20:12, 개역) 다시 세번째 종을 보내니 이도 상하게 하고 내어 쫓은지라

(20:13, 개역) 포도원 주인이 가로되 어찌할꼬 내 사랑하는 아들을 보내리니 저희가 혹 그는 공경하리라 하였더니

(20:14, 개역) 농부들이 그를 보고 서로 의논하여 가로되 이는 상속자니 죽이고 그 유업을 우리의 것으로 만들자 하고

(20:15, 개역) 포도원 밖에 내어 쫓아 죽였느니라 그런즉 포도원 주인이 이 사람들을 어떻게 하겠느뇨

(20:16, 개역) 와서 그 농부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을 다른 사람들에게 주리라 하시니 사람들이 듣고 가로되 그렇게 되지 말아지이다 하거늘

(20:17, 개역) 저희를 보시며 가라사대 그러면 기록된 바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함이 어찜이뇨

(20:18, 개역) 무릇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어지겠고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저를 가루로 만들어 흩으리라 하시니라

(20:19, 개역) 서기관들과 대제사장들이 예수의 이 비유는 자기들을 가리켜 말씀하심인 줄 알고 즉시 잡고자 하되 백성을 두려워하더라

 

 

불의한 소작농의 비유는 (21:33-36, 12:1-5, 20:9-12)에도 나와있습니다.

누가복음에서는 예루살렘 입성으로 평화가 깨어진다고 했습니다.

평화를 깨뜨리는 새로운 평화 때문입니다.

더 나은 평화가 오면 기존의 평화를 폐기 처분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니 당연히 저들의 반격 반발이 나옵니다.

당신은 도대체 무슨 권한으로 이런 행동을 하십니까?

성전에서 가르치기를 뭣대로 하질 않나

나귀새끼 타고 예루살렘에 들어와 어린아이 찬양으로 소동을 일으키질 않나
성전에 바칠 제물을 바꾸는 환전상을 엎어버리질 않나

 

왜 이런 무질서한 짖을 벌리는 겁니까?

 

과연 이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옳은 일입니까?

 

정 하고싶으면 이 나라가 지금 일본압제에 시달리고 있으니

로마 압제에 시달리고 있으니

독립군 운동자들처럼(엣세네 파 등등 무수한 유대독립운동 곧 하나님나라운동)

로마로부터의 해방 운동을 해야지(당신의 제자들도 그런 출신들 아닙니까?)

당신은 오히려 거꾸로 우리 유대인들로부터 해방운동을 펼쳐

유대인 속에서 새로운 공동체 운동을 펼치면

내부분열 분절만 일어날 뿐이지

이것이 무슨 유익이 되는 겁니까?

 

라는 식으로 무슨 권세로 가르치냐고 묻습니다. 누구 빽 믿고 설치냐 라는 거죠.

누가 그런 권한을 줬니?

 

그런데 예수님은 이런 유대인(대제사장, 서기관 장로들)의 질문에 도리어 역질문 하십니다.

 

저들을 향한 답변이자 동시에 질문입니다.

 

그럼 과연 세례요한의 세례는 하늘로부터 권한을 받아서 이냐? 아니면 사람으로부터 온 권한이냐? 라고 묻습니다.

 

~~~ 너무 너무 정통을 찌르고, 찔러도 너무 너무 깊숙이 찔러 버려서 반드시 말 못하도록 하시는 겁니다. 유구무언

입이 있어도 절대로 입이 있다라는 것을 티 낼 수 없도록 말입니다.

입을 무가치하게 만드는 질문이요 답입니다.

 

저들 말 마따나 독립군은 아니지만 세례요한은 저들이 말하는 악한 세력 헤롯에 의해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누가 반역을 해서 죽임을 당한 겁니까?

독립군(은 아니지만)을 누가 죽였나요? 독립군을 독립군이 죽입니다.

여기에는 정치성이 깔려 있습니다. 누가 누가 더 잘 하나? 누가 크냐?

평화를 누가 죽입니까? 평화를 평화가 죽이도록 되어 있습니다.

이게 바로 진실입니다.

 

무의미한, 의미 없는 진리입니다. 즉 의미의 초과잉성이다는 겁니다.

적은 외부에 있는게 아닙니다. 그러면 고맙죠. 누구나다 인식하는 눈에 보이는 겁니다.

그러나 진실은 즉 의미 없는 진리는 이겁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적은 항상 내부에 있다는 겁니다.

독립군? 분명 독립군은 아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하도 독립군 의식에 배여있는 인간의식이라 아주 좋은 예로써 들고 있습니다.

독립군은 누가 죽이는고 하니 결국 독립군이 죽입니다.

이것이 불변의 진리입니다. 참 의미 없다.

진리와 합일 동일 일치 할려는 자가 진리를 죽입니다.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히 주를 삼킨다고 했거든요

 

(2:17, 개역) 제자들이 성경 말씀에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 한 것을 기억하더라

 

(69:7, 개역) 내가 주를 위하여 훼방을 받았사오니 수치가 내 얼굴에 덮였나이다

(69:8, 개역) 내가 내 형제에게는 객이 되고 내 모친의 자녀에게는 외인이 되었나이다

(69:9, 개역) 주의 집을 위하는 열성이 나를 삼키고 주를 훼방하는 훼방이 내게 미쳤나이다

(69:10, 개역) 내가 곡하고 금식함으로 내 영혼을 경계하였더니 그것이 도리어 나의 욕이 되었으며

(69:11, 개역) 내가 굵은 베로 내 옷을 삼았더니 내가 저희의 말거리가 되었나이다

(69:12, 개역) 성문에 앉은 자가 나를 말하며 취한 무리가 나를 가져 노래하나이다

(69:13, 개역) 여호와여 열납하시는 때에 나는 주께 기도하오니 하나님이여 많은 인자와 구원의 진리로 내게 응답하소서

(69:14, 개역) 나를 수렁에서 건지사 빠지지 말게 하시고 나를 미워하는 자에게서와 깊은 물에서 건지소서

(69:15, 개역) 큰 물이 나를 엄몰하거나 깊음이 나를 삼키지 못하게 하시며 웅덩이로 내 위에 그 입을 닫지 못하게 하소서

(69:16, 개역) 여호와여 주의 인자하심이 선하시오니 내게 응답하시며 주의 많은 긍휼을 따라 내게로 돌이키소서

(69:17, 개역) 주의 얼굴을 주의 종에게서 숨기지 마소서 내가 환난 중에 있사오니 속히 내게 응답하소서

(69:18, 개역) 내 영혼에게 가까이 하사 구속하시며 내 원수를 인하여 나를 속량 하소서

(69:19, 개역) 주께서 나의 훼방과 수치와 능욕을 아시나이다 내 대적이 다 주의 앞에 있나이다

(69:20, 개역) 훼방이 내 마음을 상하여 근심이 충만하니 긍휼히 여길 자를 바라나 없고 안위할 자를 바라나 찾지 못하였나이다

 

저들의 서로 의논한 바의 심적발언은 이렇습니다.

 

(20:4, 개역) 요한의 침례가 하늘로서냐 사람에게로서냐

(20:5, 개역) 저희가 서로 의논하여 가로되 만일 하늘로서라 하면 어찌하여 저를 믿지 아니하였느냐 할 것이요

(20:6, 개역) 만일 사람에게로서라 하면 백성이 요한을 선지자로 인정하니 저희가 다 우리를 돌로 칠 것이라 하고

(20:7, 개역) 대답하되 어디로서인지 알지 못하노라 하니

 

이것이 인간 신학의 최선방책입니다.

사도와 천재의 차이에서

천재들의 최고의 답변입니다. 변증법적인 논의 내용인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그래서 모른다고 합니다.

안다고 하면 자기 얼굴에 침 뱉는 격이니까 말입니다.


소크라테스는 인간은 아는 것이 쥐뿔도 없다 라는 겁니다.

아는 것도 없으면서 왜 아는 척을 하느냐 라고 등에 처럼 수시고 돌아다니는 겁니다.

그것을 본 제자 플라톤은 스승을 향해서 웁니다.

선생님 제발 그만 수시고 돌아다니세요 그러다가 죽습니다.

플라톤의 눈물은 이렇게 마음이 아파서

왜 죽을 짖만 골라 하느냐에 대한 안타까움이였습니다.

즉 변증법이 인간 최선의 답변이요 이론입니다. 성화론입니다.

아는 척 하지 말고 겸손하자 위버멘쉬 초인 지혜자 되기입니다.

 

모른다고 해야 살아남는 지혜가 되는 겁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답변은 전혀 다릅니다.

 

그렇다면 나도 너희들에게 답변할 이유가 없다고 저들의 무슨권세로 이런일을 하느냐

누가 나에게 그런 권한을 줬느냐 에 대한 답변을 알려주지 않는 겁니다.

 

그리고서는 이런 충돌을 전제로 삼아서 포도원 농부 비유를 하십니다.

권세의 증상으로 나타난 비유이다는 겁니다.
무슨 권리로? 누가 준 권세냐? 라는 충돌의 증상으로써의 비유 입니다.

 

누가 이 권세를 줬느냐에 대한 답변으로써의 증상인 비유입니다.

 

결국 저들은 마치 거지 이몽룡의 시를 읊으니까
변사또 집
(예루살렘성전=강도의 소굴)에 있던 권세자들이 벌벌벌 떨면서 하나 둘 씩 빠져나가는 모습처럼

 

시를 읊듯이 비유를 외치시는 겁니다.

 

이 비유는 곧 암행어사 출도요 라는 소리의 징후이였던 겁니다.

이 외침은 누가 싫어하고 또 당연히 누가 좋아라 하겠습니까?

 

자력으로 도저히 빠져나올수 없는 갇혀버린자 포로된자 억눌린자인

춘향이만이 곧 죄인 중의 괴수인 춘향이에게만 희년 곧 기쁜 소식이 되고

 

나머지 인간들에게는 벌벌벌 떠는 소리 음성이 되는 겁니다.

 

소리는 공명(짝꿍)을 찾고 있는 겁니다.

 

갑자기 느닷없이 세례요한이 주는 세례가 하늘로부터 왔는가? 아니면 사람에게서인가? 라는 역질문은
뚱딴지 같이 갑자기 들이대는 것 같지만

 

사실상 포도원 농부 비유를 말하기 위함입니다.

 

포도원 주인이 타국에 갈때에 농부들에게 포도원을 세(도지, 소작농)로 주어서 소출로 인한 세를 바치도록 하게 한 겁니다.
고리대업 곧 이자놀이와 같습니다. 잉여가 잉여를 낳습니다.

(잉여 [그 자체]가 잉여를 생산합니다. - 고리대업의 달인 요셉)

 

이것은 앞의 열므나 비유와 동일합니다. 그런데 결론 부분에서는 더 깊게 들어갑니다.

달란트 비유였죠. 악한 종과 충성된 종의 비유죠.

 

각각 한 므나 씩 받아서 그 잉여분을 남겼는데

악한 종은 땅 속에 파 묻어서 원금 그대로 주었다는 겁니다.

 

잉여 자체가 잉여분을 생산하도록 되어 있는데

잉여를 무시해서 곧 무능함(한 알의 겨자씨 만한 씨앗이 큰 나무를 이루는 천국비유)을 무시해 버렸기 때문에

원금을 잃어버리지 않고 그대로 주었으니 종 자신이 옳았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것은 주인의 마음과 전혀 다른 마음이다는 겁니다.

즉 관계성이 아닌 독자적인 사고방식이였던 것이 들통난 겁니다.

 

(19:12, 개역) 가라사대 어떤 귀인이 왕위를 받아 가지고 오려고 먼 나라로 갈 때에

(19:13, 개역) 그 종 열을 불러 은 열 므나를 주며 이르되 내가 돌아오기까지 장사하라 하니라

 

(19:18, 개역) 그 둘째가 와서 가로되 주여 주의 한 므나로 다섯 므나를 만들었나이다

(19:19, 개역) 주인이 그에게도 이르되 너도 다섯 고을을 차지하라 하고

(19:20, 개역) 또 한 사람이 와서 가로되 주여 보소서 주의 한 므나가 여기 있나이다 내가 수건으로 싸 두었었나이다

(19:21, 개역) 이는 당신이 엄한 사람인 것을 내가 무서워함이라 당신은 두지 않은 것을 취하고 심지 않은 것을 거두나이다

(19:22, 개역) 주인이 이르되 악한 종아 내가 네 말로 너를 판단하노니 너는 내가 두지 않은 것을 취하고 심지 않은 것을 거두는 엄한 사람인 줄을 알았느냐

(19:23, 개역) 그러면 어찌하여 내 은을 은행에 두지 아니하였느냐 그리하였으면 내가 와서 그 변리까지 찾았으리라 하고

(19:24, 개역) 곁에 섰는 자들에게 이르되 그 한 므나를 빼앗아 열 므나 있는 자에게 주라 하니

(19:25, 개역) 저희가 가로되 주여 저에게 이미 열 므나가 있나이다

(19:26, 개역) 주인이 가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릇 있는 자는 받겠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19:27, 개역) 그리고 나의 왕 됨을 원치 아니하던 저 원수들을 이리로 끌어다가 내 앞에서 죽이라 하였느니라

(19:28, 개역)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앞서서 가시더라

 

이제는 그 비유가 더 깊게 더 노골적으로 들어가는 겁니다.

나의 왕 됨을 원치 않는 그 속내를 들추어내는데 더 깊게 들어간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되면 저들도 더 깊게 그 속내를 드러냅니다.

포크레인으로 깊게 파내니까

흙들도 더 많이 나오게 되듯이 말입니다.

 

이제는 아예 노골적으로 주인이 보낸 종들을 죽여버리는 겁니다.

이것은 곧 구약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여주는 겁니다.

열므나 비유에서 구약 이스라엘의 역사는 곧 여호와 하나님이 왕 됨을 원치 않았던 역사 라는 겁니다.

맞습니다. 비유가 그냥 비유가 아니였던 것이였던 것이였습니다.

구약의 육적 이스라엘의 모습을 그대로 담아서 보여주는 징후였습니다.

역시나 지금 이스라엘(유대인)이 예수님을 거부하는 것이 그들만 그런 것이 아니라 너희도 동일하다는 겁니다.
이것은 오늘날 교회사람들도 동일합니다. 주의 주 되심을 원치 않는 강도의 소굴이다는 겁니다.

 

그 유전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곁으로는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

정작 속내는 하나님이 왕 되심을 원치 않는 모습이다는 겁니다.

 

이것을 예수님은 반드시 둘 로 나누어야 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간극이 벌어지고 그 간극을 극과 극으로 벌림으로써 입이 있어도 할 말 없도록 하시는 겁니다.

 

대제사장이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느냐 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은

뜬구름 잡듯 동문서답하는 것 같지만

예수님의 제대로 된 답변은

 

너희들은 여호와 하나님이 왕 되심을 원치 않는다 라는 것을 답변하시는 겁니다.

 

결국 저들이 엉터리로 질문한 겁니다.

 

우리는 질문은 어떻게 되었든 답변이 똑바로 해야 한다고 봅니다만

주님은 반대이십니다. 질문이나 똑바로 하라 라는 겁니다.

 

당신의 왕 됨을 원치 않습니다 라고 질문하라 라는 겁니다.

 

이것은 오늘날도 동일합니다.

 

교회에서 찬양하고 기도하고 예배하고 충성 봉사하고 등등의 일들이 모두다

(저 세리와 같지 않음을 감사합니다 라고 십의 이조를 드리고 이레에 두 번 금식한다는 것은 / 번제를 원치 않고 인애와 자비를 원하심을 거부)

 

곧 예수님의 주 되심을 원치 않습니다 라는 것과 같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가능성으로써 행하고 있는 겁니다. 개방으로써 성령을 운운하는 장사하는 곳인 겁니다.

 

이 가능성의 짖이 바로 땅에 그대로 원금을 파묻어서 그대로 주인에게 돌려주면

자신은 잘못한게 없게 된다는 사고방식인 겁니다.

 

그럼 위험하게 장사 잘못해서 원금 조차도 잃어버릴수 있는 위험성을 감수한

장사한 사람들은 어떻게 합니까?

 

그들이 오히려 더 멍청하고 미련하지 않습니까?

 

누가 똑똑한 사람입니까?

 

원금 그대로 땅에 파 묻은 사람 아닙니까?

 

오히려 미련한 사람은 위험을 감수하고 장사한 사람이구요

마치 열처녀 비유처럼 미련한 다섯 처녀가 장사한 종이고

똑똑한 다섯처녀가 원금 그대로 땅에 파묻어 원금 그대로 주인에게 준 종 아닙니까?

 

그런데 종말은 그 반대이다는 겁니다.

 

열므나 비유에서는 이것이 곧 가나안땅 약속의 땅 점령 땅따먹기와 같습니다.

전쟁 하기도 전에 미리 갈라먹기를 하는 겁니다.

중고등부 세례식에 빵 한 덩어리를 놓고 누가 더 많이 먹습니까?

누가 땅을 더 많이 차지하게 됩니까?

 

여호와의 전쟁 개념은 많이 탕감받은 자가 많이 사랑한다고 했습니다.

 

(7:41, 개역) 가라사대 빚 주는 사람에게 빚진 자가 둘이 있어 하나는 오백 데나리온을 졌고 하나는 오십 데나리온을 졌는데

(7:42, 개역) 갚을 것이 없으므로 둘 다 탕감하여 주었으니 둘 중에 누가 저를 더 사랑하겠느냐

 

(7:43, 개역) 시몬이 대답하여 가로되 제 생각에는 많이 탕감함을 받은 자니이다 가라사대 네 판단이 옳다 하시고

 

(7:44, 개역) 여자를 돌아보시며 시몬에게 이르시되 이 여자를 보느냐 내가 네 집에 들어오매 너는 내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아니하였으되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그 머리털로 씻었으며

(7:45, 개역) 너는 내게 입맞추지 아니하였으되 저는 내가 들어올 때로부터 내 발에 입맞추기를 그치지 아니하였으며

(7:46, 개역) 너는 내 머리에 감람유도 붓지 아니하였으되 저는 향유를 내 발에 부었느니라

(7:47, 개역)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저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저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

 

 

곧 여호와의 전쟁 즉 종말의 의식은 자기를 부인하는 자가 많이 사랑받는 겁니다.

무능 그 자체이다는 겁니다.

 

무능을 흉내 내거나 행하기를 한다거나 거지나사로 되기 가 아니라

 

무능 그 자체인 자가 말입니다.

 

이 잉여가 잉여를 생산하는 겁니다. 즉 긍휼과 은혜 곧 죄사함입니다.

 

그런데 악한 종은 죄사함 받을 이유가 없다 라는 겁니다.

자신의 옳은 것만 챙기면 그만이다는 겁니다.

 

이 의식이 주의 주 되심

곧 하나님의 왕 되심을 거부하는 구약의 이스라엘을 따르는 입장과 같다는 겁니다.

 

그것으로 끝날까요? 끊임없이 선지자를 보내면 보낼수록 죽여버리는 겁니다.

 

? 끊임없이 소출을 요구하고 있거든요? 즉 약속을 심은 그 약속의 결과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곧 사랑입니다.

 

그런데 받은 사랑이 없기에

이유 없이 용서 받은 그 원인 없는 결과를 내어 놓지를 못하기에

그 용서하신 주의 주 되심을 찬양하는 마음이 없기에

선지자를 죽여버리고 심지어 거짓 선지자와 손 잡고

주의 주 되심을 거부하는데 일심동체이다는 겁니다.

 

오늘날에도 어쩌면 똑같은지 말입니다.

 

그럼 저들의 원금 그대로 땅에 파 묻고 이자를 만들지 못하고

그냥 그대로 원금을 주인에게 주는 행동이 바로 교회에서 장사하는 짖이다는 겁니다.

 

그래서 상을 뒤엎어버리는 겁니다. 강도의 소굴로 만들지 말라고

 

그런데 그것이 화가나서 죽여버리는 겁니다.

참선지자들은 이스라엘 밖, 교회 밖에서 죽는 법이 없습니다.

 

즉 권세 싸움은 이것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을 두고

한 쪽은 무능한 기도하는 집으로 만드느냐에 투입이 되는 참선지자 노선 곧 세례요한의 죽음입니다. 물론 그 성전은 예수님이라는 참성전을 말하기 위한 그림자로써 말입니다.

 

그리고 다른 한 쪽은 강도의 소굴로써 원금 그대로 바치겠다는 인간 자신의 옳음을 주장하는 (물론 이런 속내는 자신도 모를 정도로 겉으로는 오로지 하나님만 옳다고 평생을 하나님이 옳으심에 충성할 뿐이기에 자신도 자신의 그런 행위에 속아넘어가 버리는 겁니다.)

하나님의 왕 되심을 원치 않는 거짓선지자의 노선을 따르도록 되어 있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등장이 이제 그런 속성을 본격적으로 나타나도록 하시는 일 곧

십자가의 지혜를 펼치시는 일입니다.

 

그리고 예수님 자신의 주 되심을 십자가 상에서 이루시는 겁니다.

 

여기에 그 어떤 인간도 다 단절 됩니다.

심지어 제자들도 예수님의 주 되심에 일체 보탬이 없이 다 도망칩니다. 심지어 저주도 합니다.

 

오로지 약속하신 성령 곧 철저한 무능한 성령의 지혜로써 이룬

하나님의 집 곧 참성전 되신 예수님의 몸을 이루심에

인간은 보탬이 없었다는 것

주의 주 되심에 인간은 원치 않았다는 것을

분명하고 또렷하고 명료하게 하시고서

무상으로 은혜를 베푸신 그 은혜에

그 은혜를 더하게 하는 잉여를 생산케 하는 겁니다.

곧 긍휼의 사랑입니다. 십자가의 용서입니다.

아무리 막을려고 해도 막을수 없는 사랑입니다.

저절로 잉여가 잉여를 생산하는 겁니다.

 

이것이 주의 주 되심입니다.

십자가의 용서가 사랑을 낳고 은혜를 낳고 긍휼을 낳는데

어떻게 남겨지지 않겠습니까?

 

충분히 남고도 남는 오천명을 넘게 먹이고도 남는 12 광주리로 남는 초과잉 잉여이다는 겁니다.

 

12이 바로 잉여분 찌끄래기 남겨진 여분인 이스라엘의 처음자리 처음사랑입니다.

 

그러니 남길려고 의도적으로 약한척 할게 아니라

거지나사로 되기 할 필요가 없이

 

이미 12 이스라엘 그 자체이다는 겁니다.

교회 되기 성도 되기 기도하기 회개하기 안식일 지키기 할 필요 없이

이미 그 자체 로써의 잉여분들이다는 겁니다. 전리품들입니다.

악에서 건져낸 전리품입니다.

거짓평화를 깨뜨려서 빼앗아 온 전리품 잉여물입니다.

 

그런데 주의 왕 되심을 원치 않는 원래 마귀자식들은

이 이스라엘의 처음자리 자체가 없기 때문에

긍휼이 뭔지도 모르고

그 자체로써의 잉여물이 뭔지 모르기 때문에

힘을 추구할 수 밖에 없는 육을 따르는 겁니다.

 

육을 따를 수 밖에 없으니

질문하는 것 자체가 어쩌면 당연하게 이런 질문을 하는 겁니다.

 

너 누구 빽 믿고, 누구 힘으로 상을 뒤엎고 성전에서 가르치냐?

 

바로 주의 주 되심을 원치 않는 자들이 성전을 장악해서 강도의 소굴로 만들었기에 나오는 질문입니다.

 

이들은 곧 타국으로 멀리간 포도원 주인이 종을 보내어 소출의 세를 받을려고 할 때

종을 죽이는 자들이고

마지막엔 주인의 아들이 오면 죽이지 않겠지 라는 주인의 어리석은 마음에

오히려 옳타구나 주인의 아들이 오면 이제 더 이상 상속자가 없으니

이 땅들은 우리 차지가 되겠구나 라는 오히려 탐욕을 더 부추기는 상황으로 몰고가서

이들의 속내를 들추어내시는 겁니다.

 

얼마나 죄악을 싫어했으면 죽으시면서 까지 이런 속내를 들추어내실까요?

선지자의 죽음은 그냥 죽음이 아닌

 

죽음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들추어지지 않는다 라는 겁니다.

 

사랑은 죽음보다 강하다 라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아들은 죽습니다.

 

이것이 놀랍게도 이미 존재들 이전에

포도원의 악한 농부가 존재하기 이전에

심지어 구약 참선지자의 죽음이 있기도 이전에

먼저 있었던

창세전에 생명책에 기록된 말씀이다는 겁니다.

 

그러니 악한 농부는 포도원 주인의 계획대로 말려든 것이지

독자적인 자신의 계획에 따라 주인의 아들을 죽인게 아니다는 겁니다.

 

바로 이렇게 보이지 않는 간극들이 사람과 사람 사이에 금이 그어져서

극과 극으로 나뉘어져 있는 겁니다.

 

그것도 모르고 자기가 생각한 줄로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 행했다고 자부한 것이죠.

 

이미 창세전의 기록된 말씀이다는 겁니다.

이것을 또 오해를 해서 예정론이다고 하는데

예정론을 결국 인간 자신의 운명으로 놓고 있지

예수님의 운명에 놓는 인간들은 없습니다.

예정론도 세상에나 자본주의 앞에서 무너지는 판국을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측을 보면 잘 알수 있잖습니까?

처음부터 예정론도 아니면서 예정론으로 장사를 했던 거죠.

강도의 소굴입니다.

이들 뿐이겠습니까?

눈에 보이는 교회 치고 강도의 소굴이 아닌게 없습니다.

 

주의 주 되심을 원치 않는 강도들입니다.

 

이런 배경 아래에서 복음은 활동하시는 겁니다. 그것도 홀로 말입니다.

인간은 보탬이 되기는커녕 원수짖만 할 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서하시는 그 피만 바라볼 뿐입니다.

 

주님의 권세는 그 자체로써 그 차이를 우리의 어두운 눈은 의식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주님의 권세는 악한권세를 옆에 배치시키심으로써 우리에게 설명하십니다.

 

그런데 그 악한 권세가 바로 우리가 원하고 우리가 마음껏 누리고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하다고 고마워하면서 즐기고 있었던 것들이였습니다.

 

십자가라는 어리석고 미련하고 무능한 지혜가

우리의 그 어떤 허물도 다 덮고도 남는 유일한 잉여라는 것을

 

주님은 이 십자가의 용서를 고리대업으로써 하십니다.

이 고리대업의 왕 중의 왕으로써 모조리 십자가의 사랑에 빚진자 만들기 하시는 겁니다.

 

이 왕 되심을

이 주 되심을 원치 않는 자는

 

오늘도 독자적인 행함으로 추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강도의 소굴로 만들고 있습니다.

 

분명이 우리의 눈에 가시화 시키면서도 우리 또한 저들과 함께 물들어 가고 있는 무능함을 보여주십니다.

 

역시나 모든 사물이 이렇게 작용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멀리 볼 것도 없이 우리 자신의 신체도 동일합니다.

 

내 몸을 내가 스스로 자꾸 강도의 소굴로 만들려고 하고 있습니다.

 

저 세리의 더러운 몸과 같지 않음을 감사합니다 라고 말이죠.

 

내 몸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만드시는 성령의 권세와

내 몸을 내 스스로가 성화된 몸으로 만들고자 하는 강도의 소굴만들기 권세와의 싸움입니다.

 

이 정도로 우리는 무능할 정도로 갇혀버린 춘향이입니다.

변사또를 이길 재간이 우리에게는 없습니다.

 

오로지 내 사랑 짝꿍(거지 이도령)만이 암행어사(주의 주 되심)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겁니다.

 

그러니 모세가 변화산에서 나타나서 주여 빨리 죽어주시옵소서 라고

모세 자신도 갇혀버림 속에서 빠져나올수 없는 단절을 외치고 있습니다.

어서 주께서 주가 되시옵소서 라고 외치는 겁니다.

 

주님의 불쌍히 여겨주심이 매일 매일 새롭게 다가와 주지 않으면

모든 것은 다 헛될 뿐입니다.

 

오직 십자가의 피흘리심 만이 유일한 길입니다.

 

 

주여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예수님의 눈물과 예루살렘(하나님의 집인가? 강도의 소굴인가?) (19:41-48)

 

2014/09/19 09:43 in 성령행전(피활동,인간극복)

 

기도하는 집과 강도의 굴혈 (19:41-48)

 

(19:41, 개역)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19:42, 개역) 가라사대 너도 오늘날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기웠도다

(19:43, 개역) 날이 이를지라 네 원수들이 토성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19:44, 개역)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권고 받는 날을 네가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 하시니라

(19:45, 개역) 성전에 들어가사 장사하는 자들을 내어 쫓으시며

(19:46, 개역) 저희에게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 되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들었도다 하시니라

(19:47, 개역) 예수께서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치시니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백성의 두목들이 그를 죽이려고 꾀하되

(19:48, 개역) 백성이 다 그에게 귀를 기울여 들으므로 어찌할 방침을 찾지 못하였더라

 

 

분명 하나가 눈에 보이는데, 하나만 보이는데,

칭하기를 즉 이름을 부르기를 두 가지로 부릅니다.

 

그것도 비슷한 이름으로 부르는게 아니라

아예 극과 극의 간극으로써 이름을 부르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그 하나는 두 가지 속성을 그대로 지니게 된 것일까요?

아니면 최종적인 결과로써 부르게 될까요? 원인 없는 결과?

아니면 과정을 거쳐서 나오는 결과인 것일까요?

 

지난시간에 살펴봤듯이 예루살렘을 일종의 교회의 대표성으로 본다고 하면

교회를 부르는 이름이 두 가지가 있는 셈입니다.

즉 예루살렘을 부르는 이름이 두 가지인 겁니다.

 

하나는 만민이 기도하는 하나님의 집, 기도하는 집

그리고 또 하나는 강도의 굴혈입니다.

 

(19:46, 공동) "성서에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지 않으냐? 그런데 너희는 성전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었다." 하고 나무라셨다. / 이사 56:7. 예레 7:11.

(19:46, 현대인) `내 성전은 기도하는 집이다.' 라고 성경에 쓰여 있는데 너희는 이 집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었다.' 하고 말씀하셨다.

(19:46, 현대어) 말씀하셨다. `성경에 ) `내 성전은 세계 만민이 다 와서 나에게 기도할 수 있는 곳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너희는 성전을 강도의 소굴로 만드는구나.' (. 56:7,7:11)

 

분명 하나의 장소임을 예수님이 증명하십니다. 그런데 그 장소를 너희는 다르게 만들었다는 겁니다. 한 장소가 말입니다.

 

이것은 한 장소 즉 공간만 해당되는게 아닙니다.

시간도 동일하게 해당 됩니다.

심지어 인물도 동일하게 적용하십니다.

 

사물이 다 이렇게 적용이 됩니다.

 

한 입에서 찬송과 저주가 동일하게 난다고 합니다.

 

(3:10, 개역) 한 입으로 찬송과 저주가 나는도다 내 형제들아 이것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왜 이렇게 흑백 논리로 몰아가는 궤변을 벌리느냐 라고 따질게 아니라

성경 자체가 그렇게 몰아갑니다. 안 그런 적이 없습니다. 성경 전체가 다 이런 식입니다.

 

즉 우리는 전제로 깔기를 하나님도 예수님도 성경도 결국 내가 동의만 하면

나의 편이 되는 줄 알았는데

그렇게 되면 분절이 없고, 헷갈리는 것도 없고, 흑백논리 싸울 필요도 없는 겁니다.

그러나 그 정반대이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집이라고 인식하는 자들은 다름 아닌 유대인들 자신들입니다.

바로 하나님 집이라고 인식 한다는 자체가 강도의 소굴로 만들고 있다는 겁니다.

 

이것은 인정하기 싫어도 인정할 수 밖에 없는 밝혀진 바입니다.

 

물론 예수님이 등장하기 전까지는 죽어도 몰랐던 겁니다.

즉 약속하신 성령이 주어지기 전까지도 몰랐다는 겁니다.

그 이전에는 당연히 하나님의 집인줄 알았습니다.

아무도 의심할수가 없는 하나님 본인이 증명하신 겁니다.

문제는 주님 쪽에서 변경시킨겁니다. 두 갈래로 갈려져서 분절이 발생한 겁니다.

예수님의 등장으로 말입니다.

 

자 그렇다면 주여 저는 뭘 해도 이 성전을 강도의 소굴로 만드는 짖 밖에 할 수 없군요 라고 나와야 합니다.

 

그런데 그런 인식 자체가 없다는 자체가 강도의 소굴로 만들고 있다는 증거죠.

즉 성령 받지 않으면 무조건 이유없이 그런 인식에서 벗어날수가 없도록 되어 있다는 겁니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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