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월절과 사단이 들어감 (22: 1-23)

 

(22:1, 개역) 유월절이라 하는 무교절이 가까우매

(22:2, 개역)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를 무슨 방책으로 죽일꼬 연구하니 이는 저희가 백성을 두려워함이더라

(22:3, 개역) 열둘 중에 하나인 가룟인이라 부르는 유다에게 사단이 들어가니

(22:4, 개역) 이에 유다가 대제사장들과 군관들에게 가서 예수를 넘겨 줄 방책을 의논하매

(22:5, 개역) 저희가 기뻐하여 돈을 주기로 언약하는지라

(22:6, 개역) 유다가 허락하고 예수를 무리가 없을 때에 넘겨 줄 기회를 찾더라

(22:7, 개역) 유월절 양을 잡을 무교절일이 이른지라

(22:8, 개역) 예수께서 베드로와 요한을 보내시며 가라사대 가서 우리를 위하여 유월절을 예비하여 우리로 먹게 하라

(22:9, 개역) 여짜오되 어디서 예비하기를 원하시나이까

(22:10, 개역) 이르시되 보라 너희가 성내로 들어가면 물 한 동이를 가지고 가는 사람을 만나리니 그의 들어가는 집으로 따라 들어가서

(22:11, 개역) 그 집 주인에게 이르되 선생님이 네게 하는 말씀이 내가 내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을 먹을 객실이 어디 있느뇨 하시더라 하라

(22:12, 개역) 그리하면 저가 자리를 베푼 큰 다락방을 보이리니 거기서 예비하라 하신대

(22:13, 개역) 저희가 나가 그 하시던 말씀대로 만나 유월절을 예비하니라

(22:14, 개역) 때가 이르매 예수께서 사도들과 함께 앉으사

(22:15, 개역) 이르시되 내가 고난을 받기 전에 너희와 함께 이 유월절 먹기를 원하고 원하였노라

(22:16, 개역)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유월절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이루기까지 다시 먹지 아니하리라 하시고

(22:17, 개역) 이에 잔을 받으사 사례하시고 가라사대 이것을 갖다가 너희끼리 나누라

(22:18, 개역)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이제부터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때까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다시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고

(22:19, 개역) 또 떡을 가져 사례하시고 떼어 저희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22:20, 개역) 저녁 먹은 후에 잔도 이와 같이 하여 가라사대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

(22:21, 개역) 그러나 보라 나를 파는 자의 손이 나와 함께 상 위에 있도다

(22:22, 개역) 인자는 이미 작정된 대로 가거니와 그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하시니

(22:23, 개역) 저희가 서로 묻되 우리 중에서 이 일을 행할 자가 누구일까 하더라

 

 

유월절이라는 무교절에 대제사장이 어떻게 예수를 죽일까 라는 고민을 하고 있습니다.

즉 유월절 이라는 절기에 맞추어서 대제사장이 그런 생각을 했다는 것은

결국 인간은 단 한번도 유월절의 의미를 모른다는 겁니다.

 

지금 당장 미운 놈을 어떻게 죽이느냐가 관심이지

과연 절기라는 것이 의미가 있느냐 하는 겁니다.

 

교회를 다닌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정작 미운 놈이 있으면 그 놈이 어떻게든 망하는 것을 바라고 있지

교회가 무슨 의미가 있냐 하는 겁니다.

 

결국 유월절기를 지키는 것과 교회 다니는 것

곧 예수님을 믿는 것 자체가

미운 놈 좀 제발 죽으라 라는 취지이다는 겁니다.

 

저 세리와 같지 않음을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라고

하나님이라는 존재는 결국 저 세리와 같지 않도록 하기 위해 동원이 되는 시다바리였던 거죠.

 

그런데 정작 세리라는 존재는

곧 유월절이나 또는 교회라는 것들은

 

정작 남이 아닌 너가 바로 사단이 씌여졌기에

하나님을 믿고 유월절을 지키고 교회를 다니고

세리와 같지 않게 행동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는 겁니다.

 

다 누워서 침뱉기를 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럼 진짜 유월절은 뭐냐?

진짜 교회는 뭐냐?

진짜 하나님은 뭐냐?

진짜 예수님은 뭐냐?

 

바로 이런 인간의 속내를 들추어내는 것이 진짜다 라는 겁니다.

무엇을 들추어내는데요?

 

유월절 지킴으로써 미운놈 죽기를 바라는 마음

교회 다니면서 미운놈 죽기를 바라는 마음

저 세리와 같지 않음을 하나님께 감사하다면서 저 세리가 저주 받기를 바라는 마음

 

이것을 들추어내는 것이 유월절이다는 겁니다.

 

결국 저 세가지 의미를 합치면 결국 누구에게로 모아집니까?

 

바로 예수님입니다.

 

우리가 예수 예수 믿는다고 하지만 그 예수 믿는다는 것이

결국 누가 죽기를 바라고 있다는 겁니다.

 

누구? 예수님이지요

 

미운 놈은 딱 한 놈 뿐입니다.

오로지 예수 뿐입니다.

 

왜 교회 다닐까요? 결과론적으로 예수 죽이고 싶어서입니다.

? 유월절을 지킬까요? 결과론적으로 예수 죽이고 싶어서입니다.

성경은 노골적으로 확 까발립니다.

그런데 인간들이 성경을 해석해 들어가면 그것을 자꾸 감춥니다.

 

우리는 왜 예수님을 믿을려고 할까요?

예수님을 죽이고 싶어서 이다는 겁니다.

 

미운 놈이 저주 받기를 바라는 마음은 그때나 지금이나 동일하다는 겁니다.

 

그럼 예수 안 믿지 뭐

교회 안 다니지 뭐

세리와 같이 되지 뭐

 

이렇게 나오면 과연 안미워할까요?

인간의 모든 행동은 결국 예수님이라는 한 인물과 맞딱드리게 되어 있습니다.

 

베드로가 세 번 예수님을 부인한 것이 베드로 만의 문제일까요?

모든 인간의 모습을 대변하는 겁니다.

 

남의 일이 아니라 내 문제라니깐요

 

내가 그래요 내가

 

베드로에게만 해당 되는 사항이 절대로 아닌 겁니다.

 

그렇다면 유월절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절기도 동일한 겁니다.

매 시간 매 순간 매 공간

그 어디서나 어떤 때나 늘 그러하다는 겁니다.

 

이것이 갇혀 있음입니다.

 

그렇다면 진짜 유월절은 바로 이 갇혀있음을 인지시키고

빼내이는 탈출을 보여주는 겁니다.

 

자력적인 탈출은 소용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모든 인간은 배제 되었습니다.

절대로 인간은 유월절에 동참 못합니다. 배제입니다.

그 어떤 절기에도 동참 못합니다.

배제입니다.

교회에도 결국 못 동참합니다. 배제입니다.

 

성령의 전이란 결국 배제 라는 단절을 깔고서 보여주는 주님이 찾아오심으로써만 연합하는 겁니다.

 

그 연합에 인간이 하는 것은 모조리 배제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배제 당하지 않고 기여이 개방과 개입을 주장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이것을 사단이 들어갔다 라고 합니다.

 

사단이 들어가면 첫째로 배제가 되지 않습니다.

기여이 단절이 아닌 개방과 개입으로 일관하게 됩니다.

 

그것이 원인 있는 결과라는 악마성이라고 했습니다.

 

원인에 대한 동참을 기여이 하겠다는 겁니다.

 

원인 없는 결과는 배제입니다.

그런데 그에 반해 원인 있는 결과는 기여이 참예하겠다는 겁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 홀로 하셨습니다.

인간은 도와 준 적 없습니다.

12제자도 다 양같이 도망쳤습니다.

 

창조때에 인간이 보탬이 된 적이 있던가요?

아예 제일 마지막날에 창조하신 겁니다.

 

즉 배제입니다.

 

그런데 유월절의 의미가 배제로부터 출발함에도 불구하고(너희는 가만히 서서)

기여이 인간들은 의미있음을 집어넣겠다고 나서는 겁니다.

 

이 의미있음이 바로 이들의 진리라는 겁니다.

 

진리란 의미없음인데

자꾸 진리를 의미 있음으로 둘려고 하다 보니

배제가 아닌 개입이 되는 겁니다.

 

단절이 아닌 연결, 관계맺기, 소통, 계승, 전달 이 되는 겁니다.

 

쉽게 말해

죽음이 아닌 생명이다는 겁니다.

 

유월절은 어린양의 죽음을 기념하는 겁니다.

 

어린양의 생명을 기념하는게 아니라 말입니다.

 

그런데 이 죽음이라는 단절을 인간들의 개입은 어떻게 해서든 생명으로 돌변시킴으로써

자신들의 생명의 정당성을 추구하겠다는 겁니다.

 

어린양의 죽음으로 패쓰 넘어가는 날입니다.

그런데 어린양의 죽음을 거치지 않고 넘어서보겠다는 것이

 

드디어 예수님 덕분에 오늘 인간들의 유월절 지키기가 얼마나 엉터리인가를 보여주는 겁니다.

 

그럼 대제사장의 유월절 지키기와 예수님의 유월절 지키기 라는 두 유월절 지키기가 대립 됩니다.

 

대제사장의 유월절 지키기는 곧 인간들의 대표성이고 예수님은 딸랑 혼자만이 유월절성취입니다.

 

대제사장 곧 마귀죠

사단이 들어간 유월절 지키기입니다.

 

이 두 대립을 통해서

나는 이 쪽 안하고 저 쪽을 지킬 거야 라고 할게 아니라

 

배제 당하시면 됩니다.

 

차이를 보라는 취지이지 이 쪽이 아닌 것 밝혀지면 이 쪽을 행할 거야 라는 취지가 아닙니다.

 

아무리 인간이 올바른 것을 뒤늦게 알아서 해 본들

어차피 배제입니다.

어차피 더럽다 라는 겁니다.

 

인간 자체가 안 바뀌는 이상

인간이 손 대면 무조건 다 더럽습니다.

 

그럼 인간 바뀌면 되겠네

 

어허 그러니까 인간 바뀌는 것이 배제 당하기 라니깐요

 

인간 바뀌어서 참예하고 개입하는게 아니라

올바른 것을 하는게 아니라

 

배제 이다는 겁니다.

 

배제 당하면 그 빈자리에 반드시 사단이 들어간 자가 개입해서 들어오도록 되어 있다는 겁니다.

 

빈자리 그대로를 가만히 두고 볼수 없어서 반드시 그 자리에 앉도록 되어 있다는 거죠.

 

배제 당하는 자는 얼룩이고

빈자리를 반드시 앉고자 하는 자는 그 얼룩을 제거하고 싶어서 안달이 나 있기 때문입니다.

 

즉 유월절을 유월절 답게 하고자 유월절에 개입하는 자가 사단이 들어간 자이고

 

유월절을 통해서 철저하게 배제 단절 당하는 자가

예수님에게 그 어떤 보탬이 되지 않는 각기 제 길로 가는 양 같은 자들인 겁니다.

 

그저 예수님 앞에서까지 유월절이 되든 말든 그저 누가 크냐 라는 싸움 밖에 못하는 자일 뿐이다는 겁니다.

 

(22:24, 개역) 또 저희 사이에 그 중 누가 크냐 하는 다툼이 난지라

 

일단 유월절은 잔치날입니다.

잔치날의 특징은 먹고 마심입니다.

 

그런데 유월절을 예수님은 둘로 나누십니다.

먹는 유월절과 다시는 먹지 않겠다는 유월절로 말입니다.

마시는 유월절과 다시는 먹지 않겠다는 유월절 말입니다.

 

즉 유월절을 하나님 나라와 연관 시키면서 그 사이의 간극을 벌리십니다.

유월절에는 먹지만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질때까지는 절대로 먹지 않겠다

유월절에는 마시지만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질때까지는 절대로 마시지 않겠다.

 

왜 이 둘 사이의 간극이 필요한 것일까요?

하나님 나라의 증상 징후로써 유월절이다는 겁니다.

하나님 나라의 완성으로써의 유월절인 겁니다.

 

그런데 이 유월절과 하나님 나라가 단절되어 있습니다.

그 사이의 간극이라는 단절이 왜 필요하냐 라는 겁니다.

 

이 둘 사이에 간극이 바로 미끄러지는 자빠지는 기능을 하기 때문입니다.

 

빈자리에 누가 덮썩 앉으니까 쭐꾸덩 미끄러지더라 말이죠.

그래서 간극이 곧 단절이 필요하다는 겁니다.

 

누가 미끄러질까요? 사단이 들어간 자 말입니다.

 

유월절은 누구든지 다 지킬려고 하고 있다는 것을 오늘 본문에 그대로 나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유월절을 둘로 나누어서 분절 시킵니다.

그리고 간극을 벌립니다.

먹는 유월절, 다시는 먹지 않겠다는 유월절

마시는 유월절, 다시는 먹지 않겠다는 유월절

 

다들 왜 이런 말씀을 하시는 줄 아는 자가 없습니다.

 

(22:19, 개역) 또 떡을 가져 사례하시고 떼어 저희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22:20, 개역) 저녁 먹은 후에 잔도 이와 같이 하여 가라사대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

 

유월절이 존재한다 고로 나는 그 유월절을 지킨다 라는 식은

천재나 유대인이나 다 하는 것입니다.

 

각 종교마다의 구원관 속에 있었던 결정적인 사건을 기념하는 것이

유월절 지키기와 같은 교리 플러스 행함이 되는 겁니다.

불교가 이런 식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유월절을 비틉니다.

유월절 지키는 자가 없어도 유월절이 덮쳐지는

한마디로 말해서 유월절의 실패로 돌아가자

유월절이 아닌 성령으로 돌아가자 라고 말입니다.

 

자꾸 그림자를 지키는데 실체로 돌아가자 라고 말입니다.

 

7번 용서를 하지 말고 초과잉적 간극인 770으로 돌아가자

그렇다면 7번 용서는 실패해야 한다는 겁니다.

유월절은 실패해야 한다는 거죠

 

그 어떤 인간도 지킬수 없는 유월절로 돌아가자 라는 겁니다.

즉 예수님 자신이 유월절 어린양이 되는

그래서 유월절을 인간이 지킬 필요 없이 그냥 유월절 어린양 되신 예수님이 우리에게 덮쳐지는 것

단 한번도 유월절을 지킨 적이 없어도 말입니다.

 

그래서 이는 내 살이나 떡이니 내 살을 먹어라 라고 하시는 겁니다.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지기 전 까지 다시는 먹지 않겠다 라고 하신 예수님 본인이

먹는 유월절이 아닌 먹히는 유월절 떡이다 라는 겁니다.

예수님 자신이 떡이다 라는 겁니다.

 

즉 관계가 이렇게 형성이 되는 겁니다.

 

내가 예수님 쪽으로 다가가서 관계를 형성하는 방식 곧 교리 플러스 실천 행함이 아닌

예수님 쪽에서 나에게로 다가와서 관계를 형성하는데 지킬필요가 없는 유월절이다는 겁니다.

 

먹는 것을 행하는 차원이 아닌 내어주심의 관계성이다는 겁니다.

내가 내 살을 떡으로써 안 먹여주면 너는 나와 상관이 없다 라는 겁니다.

 

내가 유월절 교리 지킬께요 라고 유월절이 지켜지는 것이 아니라

내가(예수님) 하나님 나라를 완성하지 않으면 유월절 백날 지켜본들 의미 없다 라는 겁니다.

 

 

그 하나님 나라의 완성이 뭔고 하니 [다시는 먹지 않는 유월절] 이다는 겁니다.

즉 안 먹으면 되겠네 가 아니라

먹히는 유월절이다는 겁니다. 예수님 자신의 살과 피를 내어주시는 유월절이다는 겁니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완성이다는 겁니다.

주여 당신의 나라에 저를 기억하소서 라고 한 쪽 강도가 말합니다.

얼마나 뻔뻔합니까? 오죽하면 부끄러운 구원이라고 한국교회가 사단이 씌여서 그런 표현을 섰겠습니까?

주여! 당신의 나라에 저를 기억하소서 라고 한 것은

먹냐 안먹냐에 달려있는 행함에 달려있는 유월절이 아니라

먹히는 내어주심에 달려 있다 라는 겁니다. 이것은 안먹겠다는 거부가 안통합니다.

무조건 먹히시는 주체에 달려있기에 우리는 그저 대상물일 뿐입니다.

주의 주 되심이라는 영광에 우리는 대상물이지

먹겠다 안 먹겠다 라는 권한이 우리에게는 없습니다.

 

그래서 내 살과 피를 먹고 마시지 않는 자는 나와 상관이 없다 라고 하십니다.

유월절 떡과 포도주는 잘도 먹고 또 안먹는 권한이 인간에게 있을지 모르나

주의 살과 피는 먹냐 안먹냐의 행함이 아닌

믿음의 문제로써 실로암 소경이 소경이 된 것이 하나님의 영광 때문이다고

 

원인 없는 결과이다는 겁니다.

 

원인 있음을 인간 쪽에서 만들어낼수 있는 차원이 아니다 라는 겁니다.

먹고 안먹고에 따라 달라지지 않는다는 겁니다.

 

결과로써만 통보할 뿐입니다.

 

그래서 인간들의 유월절 지키기의 실패의 현장이

각기 제 길로 가는 양 같은 실패의 현장에서

다시는 먹지 않는 유월절이

먹히심을 당하는 유월절로써 완성이 되는 겁니다.

 

곧 내 살과 피로써 새롭게 맺은 새언약으로써 말입니다.

 

그렇다면 인간들의 행함 실천 유무의 교리실천이라는 옛언약은 깨어지는 겁니다.

 

이제는 지키는 것과 무관하게 아무것도 한 것이 완성이 되는 것이 새언약입니다.

 

즉 먹히심은 당하는 유월절입니다.

 

안 먹으면 되지?

안먹는 인간이 100%라고 해도 먹히심을 당하는 유월절은 이미 완성된 결과로써 누리게 되는 겁니다.

 

여기에 사단이 들어가는 자는 바로 새언약의 유월절을 거부하는 겁니다.

주님의 살과 피의 거부입니다.

유월절의 떡과 포도주는 지키지만

다시는 먹지 않는 마시지 않는 유월절 곧 먹히심을 당하는 유월절인

예수님 자신의 살과 피 되심을 거부하는 자들의 등장이 바로

사단이 들어가는 자의 개입으로써

그들은 옛언약인 유월절 떡과 포도주를 먹고 마시는 것을 사수하는 자입니다.

 

즉 유월절의 떡과 포도주 먹기는 실패하면 안된다 라는 겁니다.

 

이것을 지키기 위해서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이상하고 거북스러운 인신제사와 같은

인육 식인종 행사를 거부하는 겁니다.

걸림돌을 거부하는 겁니다.

우리는 더럽지 않다 라는 겁니다.

식인종이냐? 인간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게?

이것이 사단이 들어간 자들이 새언약 거부입니다.

 

이것은 오늘날도 동일합니다.

나는 더럽지 않다. 말씀을 지키는 자인데

왜 내가 살과 피를 먹어야 하느냐 라는 겁니다.

 

구약에 너는 너의 자식을 뜯어먹고 삶아 먹는다 라고 하니까

나는 절대로 그런 일을 하는 나쁜부모가 아니다 라고 반박합니다.

절대로 그런일이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라고 합니다.

그런데 전쟁의 폐허 속에 배가 고프니까 결국은 자식을 잡아먹습니다.

 

자신이 그렇게 악한자인줄 몰랐다 라는 겁니다.

 

자식을 잡아먹는 것이 악한게 아니라

악한자임을 거부하는 것이 악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는 것이 악하고 나쁜 것이 아니라

악하고 나쁜자임을 거부하는 것이 사단이 들어간 자이다 라는 겁니다.

즉 예수님의 살과 피를 거부하는 것이 사단이 들어간 자이다 라는 겁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팔 수밖에 없는 겁니다.

팔지 않으면 먹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먹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먹는다는 것은 예수님이 먹힘을 당해야 한다는 것은

곧 내가 악인 중의 악인이다는 겁니다.

 

인간은 악인이 된다는 것을 인정 못 합니다.

 

간따나 악인이 되는 것을 거부하는 판국에

더더욱 악인이 되는 것은 더더더욱 거부할 수 밖에 없는 거죠.

 

7번 용서 했다는 것이 악인이다는 것으로 판명난 가운데

너는 그것으로 모잘라 너가 오히려 770번을 용서 받아야 할 정도로 악인 중의 악인

 

죄인 중의 괴수야 라고 했을때에 인간의 거부감을 이루 말로 다할 수가 없습니다.

걸림돌을 만난 겁니다.

 

그 정도로 제가 나쁜 놈입니까? 아니 아니 엄청나게 나쁜놈 중에서 가장 나쁜놈입니까?

 

그래 내가 너에게 내 살과 피를 먹이면 안 될 정도로 너는 나쁜 놈 중에서 가짱 나쁜놈이다는 겁니다.

 

그래서 자신의 살과 피의 위력을 보라는 겁니다. 어느 정도인가 말입니다.

이것이 유월절이 덮치는 겁니다. 거룩이 덮치는 겁니다.

 

거룩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유월절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남을 7번 용서 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용서 받아야 할 판국

어느 정도로??? 770번 용서 받아야 할 정도로 죄인 중의 괴수이다는 겁니다.

 

이것이 새언약의 시선에서만 볼수 있는 예수님의 살과 피입니다.

새언약의 시선에서의 유월절은 다시는 먹지 않는 유월절입니다.

누가? 예수님이

? 예수님 자신이 먹는 유월절의 동참이 아닌

먹힘을 당하는 유월절로써의 하나님 나라가 완성 되어야 하기에

 

이 두 유월절의 갈라짐이 여기 뿐만 아니라

만나 논쟁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납니다.

요한복음에서 하늘에서 떨어진 만나를 먹고도 죽지만

죽지 않는 만나가 있다 라는 겁니다.

 

 

즉 만나가 두 개로 갈라집니다.

새언약의 시선에서의 만나와

옛언약 시선에서의 만나

 

옛언약의 시선에서의 만나는 먹고도 죽는 만나입니다.

그러나 새언약 시선에서의 만나는 먹고도 죽지 않는 만나입니다.

 

곧 먹힘을 당하는 만나 곧 예수님 자신의 살과 피입니다.

이것을 먹지 않으면 나와 상관이 없다고 했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보고 또 여러기적을 보고 따르던 많은 사람들이

 

이 결정적인 한방인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라 라는 말에

 

다들 걸림이 되어서 다들 등 돌리고 돌아서는 겁니다.

나는 그 정도로는 나쁜놈이 아니다 라는 겁니다.

 

하늘에서 떨어진 만나를 먹을때는 양심이나 선악등등이 전혀 걸림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는 것에는 그만 탁 걸려 버렸습니다.

 

분명 오병이어의 기적으로 12 광주리가 남는 그 기적에 동참이 되었지만

그것의 실체는 결국 예수님의 살과 피 였다는 십자가 사건에서 그만

도저히 넘어설수 없는 것에 탁 하고 걸려 버린 겁니다.

 

양심상 도덕상 선악적인 의미에서 도저히 먹지 못하겠다는 겁니다.

아니 이제껏 실컷 먹어와 놓고도 말이죠.

 

이제껏 마음대로 막 살아 놓고도

문자 즉 막살아라 라는 표현의 문자 그 기표에 그만 턱 하고 걸려넘어서질 못하는 겁니다.

분명 마음대로 막 살아놓고도

막살아라 라고 하니까 도저히 막살지 못하겠다고 거부하는 겁니다.

 

이 문자가 도대체 뭔데?????????

 

 

뭔데????

 

 

교리 플러스 실천(행함)으로 지켜왔던 겁니다.

그러니 더 큰 초과잉을 만나니 기쁜게 아니라

등 돌리고 돌아서는 겁니다.

 

어릴적부터 지켜온 율법인데

전 재산을 가난한자에게 나누어 주라 라는 초과잉에 부딧히니까

기쁜 것이 아니라 등 돌리고 돌아서는 겁니다.

 

어릴적부터 지켜온 율법이라면 율법은 남을 사랑하는 마음이거든요

그런데 왜 전 재산을 못 바칠까요?

사랑하는 마음이 없었다 라는 겁니다.

그러면 저는 사랑하는 마음이 없고

예수님만 사랑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라고

진짜 실체

진짜배기 사랑의 실체를 만났다는 것의 기쁨에 감격할 것인데

도리어 등 돌리고 돌아서는 겁니다.

 

그래서 거룩한 부자청년과 소문난 악인 삭개오는 졸지에 대조의 간극을 제대로 보여주는 겁니다.

 

보세요 삭개오는 악인 중의 악인입니다.

전 재산 안 바칩니다. 재산의 반을 바칩니다.

율법 지킬려고 아니지요

너무 기뻐서

나 같은 죄인에게도 감히 예수님 같은 거룩한 분이 오셨다는 것에서

한턱 쏘는 것이 재산 반이지

율법 지킬려고 가난한자에게 줄려고 바친게 아닌 겁니다.

한 턱 쏴 가 재산 반입니다.

얼마나 소박하지 않고 통큰 억수르 한 턱 쏴 입니까?

그 정도로 기분이 째졌다 라는 겁니다.

 

유월절을 일종의 인물로 의인화 해 봅시다

두 유월절이 있다고 했습니다.

두 인물이지요

하나는 거룩한 율법을 어릴적부터 지켜온 부자청년 관원

또 하나는 율법 아예 모르는 악인 중의 악인 세리 삭개오

 

하나는 관원 유대인 선생 vs 또 하나는 국가와 민족과 하나님까지 팔아먹은 매국노 세리 삭개오

 

유월절이 둘로 나누어 집니다.

대제사장을 대표성으로 한 인간들의 지키는 유월절

 

예수님 딸랑 한 명의 유월절

 

먹는 유월절 vs 먹히는 유월절

 

전혀 거부감 없는 유월절 vs 불편하기 짝이 없는 걸림돌이 되는 유월절

 

교회라는 단어를 유월절 대신 넣어도 되구요

하나님 예수님 십자가 성령 등등의 단어를 넣어도 동일한 결과입니다.

 

결국 유월절이란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인간은 갇혔다 라는 겁니다.

 

? 여호와하나님께서 강퍅케 했기 때문에

저들의 강퍅함으로 인한 부르짖음에 응답하시는 것이 바로 유월절입니다.

 

여호와 전쟁 전에 반드시 하는 것이 할례입니다.

단 한명이라도 하지 않으면 지도록 되어 있는 전쟁입니다.

 

그럼 할례한다면 무조건 이유없이 이기도록 되어 있다는 겁니다.

 

이 무슨 희한한 전쟁입니까? 칼과 힘과 무관하다는 겁니다.

 

오로지 단절 육의 차단인 할례의 유무로만 승리한다는 겁니다.

할례하면 힘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무능해져 버립니다.

쩔뚝쩔뚝 거리면서 무슨 승리를 하느냐 말이죠.

무능한 전쟁입니다. 칼과 힘의 전쟁이 아니라 말이죠.

 

유월절도 동일합니다.

갇혀있고 그렇게 강퍅케 했기에

마귀를 강퍅케 했기에 마귀에게 갇혀있는 상태에서

탈출하는데 힘으로 탈출하는게

희한한 의식을 한다는 겁니다. 할례처럼

단절의 의식입니다. 곧 거룩의 의식입니다.

 

바로 유월절 어린양에 대한 분리 분별 작업입니다.

인간이 생각하는 그런 거룩 아닙니다.

인간을 먼저 거룩게 하라가 아니라

먼저 인간 보다 먼저 창조된 먼저 있었던 양에 대한 분리작업입니다.

왜 이런 인간을 바로 거룩케 하는 작업 보다

인간 아닌 다른 짐슴을 먼저 분리작업을 해서

그들의 분리 분별 단절을 먼저 거치게 할까요?

 

이것이 바로 간극입니다.

베드로를 그냥 세 번 부인케 하는 것이 아니라

닭이 먼저 울게 함으로써

닭을 거쳐서 분리 단절 간극을 패쓰 넘어서보라 라는 겁니다.

못 넘어서는 겁니다.

닭은 없던 간극을 만들어주는 겁니다.

그 간극을 거치라고 말입니다.

 

어린양을 분별 분리 작업을 함으로써

갇혀있다는 것을 전제로 해서 그 갇혀있음을 인간이 바로 탈출할수 있도록 분별작업하는게 아니라

 

어린양을 거쳐서 그 어린양 덕분에

닭의 울음 덕분에

어린양의 살과 피 덕분에

분리 단절 분별 구별 거룩에 동참이 되는 겁니다.

복잡하지요?

그러나 알고 보면 이유는 간단합니다.

원인 없는 결과이다는 겁니다.

즉 원인이 있으면 안된다는 이유입니다.

더 쉽게 말해서 인간이 개입 할수 없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가만히 서서 구원을 바라볼 뿐이다는 겁니다.

 

맞습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을 소외 시키기 위해서

어린양을 분별 작업하는 겁니다.

그리고 닭의 울음으로 인한 간극에 의해 베드로가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혜택을 누렸듯이

이렇게 분별 구별 단절이 된 어린양의 살과 피로 인해서 구원의 혜택을 입었다는 겁니다.

탈출케 되었다는 겁니다.

 

아니 전쟁하기도 전에 이것 때문에 승리한다는 겁니다.

 

이스라엘이 참예케 됨을 당하는 여호와 전쟁의 특징이

먼저 전쟁도 하기 전에 갈라먹기를 해서

이미 승리했다 라고 선취를 누리면서 들어가는 전쟁이

여호와 전쟁의 특징입니다.

즉 인간에게서는 나올수 없는 전쟁이다는 겁니다.

인간은 전쟁은 어디까지나 힘의 우열입니다.

 

여호와 전쟁은 무능이라는 할례의 유무입니다.

즉 단절의 유무입니다.

어린양의 살과 피 발림의 유무인 겁니다.

 

왜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 지기 까지

먹고 마시지 않겠다 라고 하십니까?

 

먹고 마심이라는 행함에 있지 않고

오히려 그 배제 그 소외에 달려있다는 단절성입니다.

 

이것이 하나님나라 완성의 징후 전조 증상이다는 겁니다.

결국 구원은 그 간극으로 인한 겁니다.

닭의 울음의 세 번의 간극

 

부활은 결국 십자가 완성의 징후로써 나타나는 것이지

십자가로 인한 3일의 간극이 아니면 나타나지도 않는 겁니다.

그렇다면 누가 대신 닭처럼 울어야 합니까? 세 번 울어야 합니까?

 

이것이 이미 승리하고 들어가는 여호와의 전쟁처럼

그 간극이 바로 승리를 미리 앞당겨 보여주는 겁니다.

 

베드로에게는 이 간극 세 번의 울음이 있었습니다.

다윗에게도 마찬가지 여디디야 여디디야 여디디야 라는 쓰리 희생안타가 있었습니다.

다 외부에서의 개입입니다.

 

유월절 완성은 예수님의 살과 피를 발림 당하는 그 간극 그 차이에 달린 겁니다.

먹고 마시는 유월절 대제사장도 할 줄 아는 그런 유월절이 아닌

 

예수님만의 유일한 유월절

곧 갇혀있는 자에게만 그 예수님 딸랑 한 명의 유월절이 의미가 있는 겁니다.

 

갇혀 있는 자에게서의 유월절은 사단이 들어간 유월절 지키기로써

정작 예수님을 미워해서 죽이는 행사로 삼는 절기가 되는 겁니다.

 

제 아이디가 유월절 passofday 패쓰 해서 넘어간 날 이다 라는 뜻인데

유월절을 우상화 하는 저 안산x인가? 하나x의 교회 쪽인가? 둘 다 같은 파겠죠

그 쪽에서 이 단어를 무지 쓰고 있는데

바로 예수님을 미워해서 죽이기로 작정한 자들의 모임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그럼 우리는 안 그렇습니까?

교회 다니는 이유

예수님을 믿는 이유

 

다 동일합니다.

 

예수님을 미워해서 십자가의 그 살과 피를 거부하고자 하는

걸림돌을 빼고 제거하기 위해서 믿는다고

 

에수님을 죽이고자 예수님을 믿는다고

 

참 아이러니 하지요?

 

사단이 들어간 가룟유다와 다를바 없는 자들이 우리인 겁니다.

 

그럼 어떻게 하면 되느냐?

우리의 손에 달려 있지 않고

 

예수님 자신이 자신의 살과 피를 발라서

간극을 보게 된다면

보이지도 않는 그 간극을 성령을 통해서 보게 된다면

이미 승리를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유월절 지키는 자는 유월절의 혜택을 못 받는 자입니다.

 

즉 어릴적부터 율법을 지켜온 자는

용서 받을 것이 없기에 사랑하지 않는 겁니다.

 

유월절의 혜택을 그럼 누가 누립니까?

단절된자

잃어버림 받은 자

차단된자.

그 간극의 갭이 극과 극으로 큰차이가 있는 자가 누리는 겁니다.

 

즉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필요없듯이

오직 죄인에게만 용서하시는 분이 의미가 있는 겁니다.

 

세상에서 누가 가장 저주받은자 인고 하니

유월절 잘 지키는 자입니다. 용서 받을 것이 없으니까 법을 절기를 지키는 거죠.

 

용서받을 것이 없는 것이 유월절 지키기(또는 어릴적부터 율법 지키기)로 표출하기 때문인 겁니다.

 

그러나 용서받을 것이 많은 자는

그 간극을 딱 한 명 예수니만의 유월절(먹힘 당하는 살과 피)을 통해서 예수님으로부터

간격 벌림을 당하게 되시는 겁니다.

 

많이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7:47, 개역)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저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저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

 

베드로가 부럽습니다.

닭으로부터 많은 울음을 당하고 있기에

꼬끼오 꼬끼오 꼬끼오 나의 죄를 위해 울어주는 그 세 번의 간극울음 때문입니다.

 

7번 용서에서 8번 용서 할까요 라고 묻는 베드로가 아닌

남들은 다 버려도 나는 절대로 안 버리겠다고 장담하는 베드로가 아닌

주님이 십자가에 지러 간다면 나도 따라서 십자가에 죽겠다고 하는 베드로가 아닌

 

닭이 벌리는 세 번의 그 간격을 누림을 당하는 그 베드로만이

 

각기 제 길로 가는 양 같이 된 저들에게

모든 허물을 예수님께 담당시킨 [존재 보다 먼저 있었던 새언약]만이

 

허물 많은 우리를 용서하시고 많이 사랑하시는 겁니다.

 

(53:6, 개역)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벧전 2:20, 개역)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오직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벧전 2:21, 개역)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벧전 2:22, 개역) 저는 죄를 범치 아니하시고 그 입에 궤사도 없으시며

(벧전 2:23, 개역) 욕을 받으시되 대신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받으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자에게 부탁하시며

(벧전 2:24, 개역)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벧전 2:25, 개역)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

 

 

왜 이 인자를 봐야만 하는 것일까요????

장대 높이 달리는 인자를 왜 봐야만 하는 것일까요?

무능하게 달린 저 분이 하나님의 진노를 실현하는 심판주 이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무능하기 짝이 없이 달려 죽은 인자가 심판주일까요?

 

보라! 세상 죄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을 보라!!!!

 

(1:29, 개역)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가로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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