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희의 소리가 이긴지라 (23:13-25)

 

(23:13, 개역) 빌라도가 대제사장들과 관원들과 백성을 불러 모으고

(23:14, 개역) 이르되 너희가 이 사람을 백성을 미혹하는 자라 하여 내게 끌어왔도다 보라 내가 너희 앞에서 사실하였으되 너희의 고소하는 일에 대하여 이 사람에게 죄를 찾지 못하였고

(23:15, 개역) 헤롯이 또한 그렇게 하여 저를 우리에게 도로 보내었도다 보라 저의 행한 것은 죽일 일이 없느니라

(23:16, 개역) 그러므로 때려서 놓겠노라

(23:17, 개역) (없음)

(23:18, 개역) 무리가 일제히 소리질러 가로되 이 사람을 없이하고 바라바를 우리에게 놓아 주소서 하니

(23:19, 개역) 이 바라바는 성중에서 일어난 민란과 살인을 인하여 옥에 갇힌 자러라

(23:20, 개역) 빌라도는 예수를 놓고자 하여 다시 저희에게 말하되

(23:21, 개역) 저희는 소리질러 가로되 저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하는지라

(23:22, 개역) 빌라도가 세 번째 말하되 이 사람이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나는 그 죽일 죄를 찾지 못하였나니 때려서 놓으리라 한대

(23:23, 개역) 저희가 큰 소리로 재촉하여 십자가에 못 박기를 구하니 저희의 소리가 이긴지라

(23:24, 개역) 이에 빌라도가 저희의 구하는 대로 하기를 언도하고

(23:25, 개역) 저희의 구하는 자 곧 민란과 살인을 인하여 옥에 갇힌 자를 놓고 예수를 넘겨주어 저희 뜻대로 하게 하니라

 

 

인간이란 남을 이기는 재미로 살도록 되어 있습니다.

선악과를 따먹어서

문턱을 넘어서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역시나 이기지 못하고 지게 되면 평생을 한풀이하게 되는 거죠

이래나 저래나 인간은 갇혀 버렸습니다.

 

(4:7, 개역)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죄라는 문턱도 못넘어서면서

놀랍게도 죄를 집행하는 그 위치에서 남을 판단하는 의로움을 추구하고픈 겁니다.

이것이 모순이 되지 않습니까?

죄의 문턱에는 못 넘어서는데

남의 죄악을 집행하는 의롭고 거룩한 자리를 차지하고픈

 

그럼 모세나 판관들 곧 사사 구원자들

이들은요?

그래서 은사는 소모품으로써 잠시 잠깐 앉는 거지

그 자체를 영원히 소유확보하는 차원이 아닌 겁니다.

모세가 힘이드니까 팔을 받쳐주는 임시방편의 재판하는 자들이

70명이나 또는 백부장 십부장 등등으로 세움받게 되지

기능이 중요하지 그들 인간 자체는 여전히 죄일 뿐입니다.

그러니 임시성입니다. 우연이요 우발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거기서 끝나지 않는 겁니다.

반드시 그 자리를 장악하는데 있어서 그 소유성을 끝까지 주장하게 되니까 필연을 주장하니 말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 사사들처럼 사건이 발생했을 때 동원이 되고

사건이 종결되면 다들 다시 원래 자리로 되돌아 가는 겁니다.

그러니 교회란 누락성을 보여주는 겁니다.

배제 소외입니다.

 

하나님의 일에 인간은 주체자가 될 수 없다는 겁니다. 그럼 보조자는? 보조자도 될수 없습니다.
그 어떤 보탬이 되지 못하는 겁니다. 마귀를 잡는 소모품 미끼일 뿐이지
보탬이 되면 마귀 돕는 격입니다.

오히려 누락시키는 하나님의 일을 당함에 있어서

그 배제와 소외와 누락성이 

바로 눈에 보이지 않는 마귀가 개입함으로써 걸려드는 식이 되는 겁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하나님으로부터 버림 받았다는 그 누락성을 가지고서

인간들과 마귀는 이때다 라고 절대 이 기회를 놓치지 않습니다.

 

그 동안의 예수님의 사역으로 인해 얼마나 많은 모욕을 당했습니까?

이스라엘 선생들이면서 이것도 모르냐 라고 말이죠.

 

그리고 말씀을 더 잘 가르치고

구약의 본래의 취지를 예수님의 해석으로 인해 듣게 되니 백성들이 더 기뻐하고


많은 병자에 대한 무관심과 정죄함과 방치에

예수님은 오히려 반대를 위한 반대로써 적극적인 치료와 불쌍히 여겨주심과

특별나게 편파적으로 사랑해 주심과 사려와 배려를 가장 비천한 자에게까지 아낌없이 긍휼을 베풀어 주심 앞에

 

외면받았던 바리새인과 그들 무리들은 그야말로 벼르고 별렀던 기회가 오게 된 겁니다.

 

어떤 가수의 죽음을 보면서 다른 가수가 

대신 복수하겠다는 기사내용을 보니

그 어떤 인간도 예외없이 다 한결같이 평생을 복수심으로만 산다 라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 복수심 하나만으로 버티고 버텼던 겁니다. 그래서 벼르고 사는 겁니다.

 

누가 옳았는지 과연 두고보자 라고~~~~

나는 절대 틀리면 안되고
예수 너는 절대 옳으면 안된다는 것이 모든 인간의 복수심 뿐인 허망한 마음입니다.

 

이것이 역사적인 행함의 기준인 거죠 당연히 원인 있는 결과로써의 행함이니

어쩔수 없이 그것은 선악의 기준인 겁니다.

 

그러나 묵시적인 믿음의 기준은 오로지 나의 복수심으로 벼르고 있는 것 보다

과연 누가 하나님의 영광의 우편의 자리에 앉는가 라는 것만을 소망하는 겁니다.

역사적인 경험의 행함과 vs 묵시적인 믿음의 대립이 오늘 본문에도 그대로 나옵니다.
결국 눈에 보이는 역사적 행함(원인 있는 결과)가 반드시 이기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눈에 보이지 않는 묵시적인 믿음은(원인 없는 결과)는 저들이 이긴 것에 비해 초극대의 간극으로 더 더 더 이긴것으로 이미 확정되어버렸다 라는 것이 오늘 내용의 취지 입니다.

 

오늘 본문 구절을 지나 뒤에, 몇몇 뒷부분에

평생 강도짖만 하던 두 사람이 예수님과 함께 사형대에서 죽게 되는데

한 쪽 강도는 그래도 자기 잘낫다고 복수심에 불타서 벼르고 있는 겁니다.

유전무죄 무전유죄 라고 외치면서 말입니다.

즉 억울하다는 겁니다.
 

그러나 한 쪽 강도는 어!! 우편에 앉으실 분이 왜 여기에 있지!!

당신은 죄가 없으신 분입니다 라고 외치는 겁니다.

 

설마 우편에 앉으실 분이 내 옆에 계실줄이야???

이 마지막 순간에 나를 건지기 위해

나의 죽음의 자리에 같이 죽고자 뛰어드실 줄이야????

 

한 쪽 강도는 복수심 뿐이고 즉 필연성이고, 다른 한 쪽 강도는 우편에 앉는 예수님을 본 겁니다. 정말 우연의 우연입니다.

우연이기에 잉여적이라서 보통 자극을 넘어서는 자극이라 차이의 무한반복성의 세계를 정말 정말 우연히 접하게 되니

뿅하고 가 버리는 겁니다. 잉여(선물)적이다는 겁니다.


선물이란 아무댓가적인 행동을 한것이 없는데 원인 없이 오는 결과물입니다.

원인 있으면 선물이 아니라 그냥 보상물입니다.

 


자 이렇게 달라도 너무 다른 초극대의 간극입니다.

 

이것은 두 강도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성전에 기도하러 들어간 두 사람에게도 해당되고

쌍둥이로 태어난 두 형제 곧 에서와 야곱에게도 해당되고

이스라엘 내부에 있는 두 왕 사울왕과 다윗왕에게도 해당되고

심지어 누구다나 안전빵이다고 여겼던 예수님의 제자 속에서 가룟유다와 베드로에게도 해당된다는 겁니다.

 

갈라서게 할려면 적어도 이 정도로 초극대로 갈라서게 하는 거룩이 진짜 거룩이지
쪼매 도토리 키재기하듯이 몇센치 몇미터 몇 킬로 갈라진 것은 갈라진 축에도 끼이지 않는 겁니다.

 

겨우 7번 용서처럼 저 세리와 같지 않음을 감사합니다 라고 우기는 모습은

그것도 꼴에 필연화 시키는 모습 속에서 우연의 우연의 몰라도 너무 모르는 겁니다.

바로 그런 필연성 동질성 합일 일체성 동일성 개방성 등등이

오늘 본문에 나오는 예수를 반드시 회개 시키고야 말겠다 라는

한마디로 정죄하겠다는 정당성을 확보하겠다는 복수심인 겁니다.

이들이 하나님의 백성이요 신앙인이라고 자칭 자녀라는 자들

그것도 거룩한 성전 종사자요 율법을 사수하는 자들이다는 이 역설은

 

결국 인간의 신앙은 복수심 뿐이다 라는 겁니다.

 

오늘날이라고 해서 예외가 아닌 겁니다.

제발 예수 믿지 마세요

신앙을 포기하는 신앙을 하세요


오늘 본문에도 나옵니다만

인간의 회개와 예수님의 회개가 대립하는 양상입니다.

 

인간들은 교회를 다니면 다닐수록

신앙생활을 많이 하면 많이 할수록

성경지식이 남들 보다 더 많은 7번 용서 할 정도로 7배나 많아서 

인간 중에 최고이면 최고일수록


한 율법사처럼 율법 계명 그것도 하나님의 큰 계명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라는 말씀을 지키면 지킬수록


선한 사마리아인이 아닌 강도만난자를 보고도 지나가버리는 대제사장과 레위인과 다를바가 없게 된다는 겁니다.

그것들이 다 부질없는 똥떵어리 인줄 모른다는 자체가

바로 복수심을 신앙심으로 키우고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처음사랑을 저들은 버렸다 라고 하시는 이유가

우연이요 우발이요 원인 없는 결과로써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용서 받은 처음사랑인데


그것을 무시하고 과시나 자랑꺼리가 될수가 없어서 바꿔치기 하는 겁니다.

새롭게 손질을 해버리는 겁니다.

 

자꾸 원인 있음으로 바꾸고 싶어하는 악마성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복수심을 키우고 있는 줄을 전혀 모르고 있는 겁니다.

 

복수심을 키우는지 신앙심을 키우는지 어떻게 아느냐?

신앙을 키우겠다는 발상 자체가 복수심입니다.

신앙이란 키우는게 아닙니다.

 

진짜 신앙이라면 마귀보란 듯이 주어지는 선물이기에

제대로된 미끼가 되어서

마귀가 잡아먹을려고 환장해 미친 듯이 발악하게 된다는 겁니다.

진짜 선물을 받은자는 주변에 그 선물받은자를 어떻게 해서든 넘어뜨릴려고 마귀가 부글 부글 끓는다는 겁니다.


그렇다보니 그 어떤 인간에게도 그 주변에는 마귀가 부글 부글 끓지 않는데

이상하게 예수님 주변에서는 가시는 곳 마다 마귀가 바글 바글 발악하듯이 달려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전혀 동요되지 않습니다.

그러니 마귀는 요지부동한 예수님의 모습에 

자기가 자신을 주인공으로 설정한 악마를 만들어 냅니다. 예수님을 악마로 몰아버리는 겁니다.

바로 오늘 본문의 예수님을 보고서 


옷을 찢으면서 회개하는 대제사장 무리들이 고소하는 마귀로 취급당하시는 분이 곧 예수님이듯이 말입니다.

 

예수님을 마귀로 만들지 못하면 오히려 역으로 자신들이 마귀가 될 판국입니다.

죽기 살기로 이들은 빌라도의 이성적 판단을 넘어서야만 하는 겁니다.


빌라도는 이런 정치적인 우열싸움에 끼여 말려들기 싫어서 자꾸 빠져나올려고 합니다만

그러면 그럴수록 저들 유대인들이 가만히 두질 않는 겁니다.


큰소리를 치면서 절대 그렇게 예수를 그냥 풀어줄수 없다 라는 겁니다.

 

자신들이 마귀가 될 판국인데 예수님께 모든 것을 뒤짚어 씌워야

모든 것이 정상적으로 돌아가게 되는 겁니다.

 

왜 갑자기 역사속에 예수가 불쑥 나타나서

몇 년간, 수십년간의 공든탑을 그야말로 하나님의 모든 것을 다 뒤짚어 엎어버리는 짖을 했냐 말이죠.

참다 참다 벼르고 벼루어서 이제야 기회가 온 겁니다.

 

하나님도 예수를 버렸다고 예수 지 입으로 지 스스로가 말하고 있으니

 

이거 다 차려놓은 밥상에 숟가락만 얹어 놓으면 되는 것이니

 

이 유혹을 누가 과연 이길수 있겠습니까?

 

그 동안의 모욕감 굴욕감 수모를

한 순간에 한 방으로 다 해결할수 있는 철호의 기회인데 말입니다.

 

예수님이 우편에 앉아서 다 넉넉히 승리하셨다 라는 것을 보기를 원하는게 아니라

따로 나의 승리가 따로 챙겨져야만 한다는 겁니다.

저 예수의 승리는 예수의 승리일 뿐 나의 승리가 아니니

내 승리는 내가 따로 챙겨야 하는 거죠.

 

그러니 목사들이 이런 인간의 심리를 잘 알고서

예수님의 넉넉한 승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서로 싸움을 붙이는 겁니다.

 

예수님의 승리만으로 만족한다굽쇼? 어딜 거짓말을

자신의 승리를 따로 챙겨야 한다고 외치는 겁니다.

그러니 교회는 한마디로 권력의 암시장입니다. ㅋㅋㅋ

 

갱스터 무비에 나오는 힘있는 자가 다 가진다는 원리를 그대로 표출하는 곳. 즉 강도의 소굴입니다.

 

그래서 알아서 기고 알아서 굽신 굽신 거리는 곳이 교회인데

이미 서열을 다 확정지었고 그 속에서 질서를 유지하고 있는 판국에

예수라는 작자가 그 서열을 개판으로 만들어 버리니까

얼마나 소동이 심각해 지겠습니까?

질서를 다 깨버리는 겁니다.

 

지도자는 이 소동이 싫은 겁니다.

말 잘듣고 고분고분하게 노예처럼 시키는대로 하면 얼마나 좋냐 말이죠

 

역시나 마찬가지로 마귀가 이런식으로 하나님께 반란을 일으켜서

자신들만의 독자적인 세계를 만들었던 겁니다. 그래놓고 소동을 싫어하는 거죠.

 

소동 자체를 두고 문제 삼는게 아닙니다.

진짜 문제는 소동 축에도 끼이지 못하는 소동을 가지고 소동이라고 하느냐 하는 점입니다.

 

제대로된 소동의 소동

이중 소동, 소동의 무한분절,

무한반복의 초극대 소동을 일으키지 못한다는 점에서 마귀의 한계는 드러난다는 겁니다.

7번 소동은 소동 축에도 안듭니다. 우리 예수님나라에서는 만오쳔년 묵은 소동을 일으켜야 아 소동이 벌어졌구나 합네다.

즉 십자가의 용서가 하루종일 매 시간 매초를 쉬지 않고 해서 만오천년 정도 소동을 벌려야 진짜 소동이라는 겁니다.

즉 사랑이지요. 사랑보다 더 나은 소동있으면 나와보라 그래요???

 

제가 저번에도 언급했듯이

한국교회가 다 이단인 이유가 예외 없이 다 이단인 이유가

타락해서 이단이 되어서가 아니라

 

이단 수준 밖에 못 되기 때문에 이단에 머물러 버리니 이단이다는 겁니다.

 

더 나아가야죠

 

이단 중의 이단이 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렇지 않으면 다 이단인 겁니다.

 

신생그룹의 이단이든

역사적 정통교회라고 우기는 이단이든

좀 오래된 이단이든

개혁주의 라는 이단이든

 

또 그 틈새시장을 노리고 설치는 신이단이든 신정통이든 개혁주의이든


무슨 파를 들고 오든 간에

 

이들의 한계는 겨우 7번 용서 이다는 겁니다.

인간 중에서 최고의 용서로 도토리 키 재기 라는 겁니다.

 

이왕 탕감할려면 일만달란트 정도 해야 용서이지

겨우 내 돈 띠먹은 놈 300 곱하기 3, 천 만원 정도 띠 먹은 놈을 용서하는 것이

무슨 용서이냐 말이죠


손모모 목사가 한국이단교회의 우상이 되버리니까
다른 종파 카톨릭에서도 자기자식 죽인 살인마를 용서하는 것을 조심 조심 조용하게 내세우더라 말이죠

그러니 오히려 경쟁이 되는 겁니다.

그건 용서가 아니라 빨리 잊어야 자기자신이 살기 때문인 겁니다.

그야 말로 이단 축에도 못 끼이면서 이단짖을 하는 겁니다.

그게 무슨 이단이냐 말이죠??

 

일만달란트를 모독하는 것 밖에 안되는 거죠

나사렛 이단 예수를 모독하는 것 밖에 안되는 겁니다.


죄인 중의 괴수, 이단 중의 이단이 되어야 하는 겁니다.

 

그러니 용서하겠다고 하지 말고

그 자를 반드시 고소해서 띠먹은 돈 다 받아내세요

괜히 성경말씀 지키겠다고 배아파서 잠 안오는 짖 하지 말고 말입니다.

 

남 용서할 생각 말고 도리어 용서받아야만 하는 입장 뿐이다는 것만 알면 된다는 겁니다.

 

제가 지금 성경말씀과 완전 정반대로 말하고 있잖아요 그렇죠

그런데 성경말씀 지킨다는 목사들을 한 번 생각해 봅시다.

과연 지들은 단 한 개라도 지킬줄 알까요?

못 지키니까 딸랑 한 명 손목사를 내세우는 겁니다.

베드로 7번 보다 못해?

카톨릭은 신부 곧 사제가 자식이 없다 보니

교인 중에 그런 자를 내세우기 시작하니까

기독교가 거기에 대해 경쟁을 해야 하는데

아직 손목사 말고는 없어


이게 장난하는 거죠.

그래서 뮤지컬로 연극으로 영화로 막 만들어 내는 겁니다.
 

그런 점에서 무거운 연자맷돌을 남에게 매는 격이 되는 겁니다.

자기도 안 들어가고 남도 못들어가게 가로막는 겁니다.

(마 23:13, 개역)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

(눅 11:52, 개역) 『화 있을진저 너희 율법사여 너희가 지식의 열쇠를 가져 가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또 들어가고자 하는 자도 막았느니라 하시니라』

 

분명히 말합니다.

성경말씀은 단 한 개도 지킬 말씀이 없습니다.

제발 지키지 마세요

억지로 어길 필요가 없이 저절로 어기도록 되어 있습니다.

 

즉 어기라고 준 말씀입니다.

제발 어기세요

감사하게도 억지로 어길 필요가 없이 늘 수시로 어기고 있다는 사실에 감사드리면 됩니다.

 

괜히 새삼스럽게 어겼다고 자랑할 필요가 없이

이미 갇혔다 라는 것을 보여주시는 겁니다.

 

갇혔기에

포로되었기에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이다 라는 것을 알게 하시는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인 없는 결과로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불쌍히 여겨주심 때문에

은혜로

 

예수 안에는 결코 정죄함이 없어

이전 것을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라는 창조를 누리게 되는 겁니다.

 

창조에 그 어떤 보탬이 없다는 뜻에서 은혜이다는 겁니다.


은혜를 더할려고 죄를 더하는 보탬을 할 수가 없다 라는 겁니다.

창조는 전적인 예수님의 소관이니

 

아무도 예수님이 십자가로 가실때에 주와 함께 지옥끝까지라고 가겠다 라는 그 장담을

보기좋게 허물어 버려서 반드시 세 번 부인케 만드시는 겁니다.


세번 부인케 만드시는 그 배려와 섬김

이것이 바로 베드로가 마귀에게 넘어가지 않도록 하신 원인 없는 결과이다는 겁니다.

 

인간은 창조에 개입을 못한다는 것입니다. 반드시 배제 소외 시키겠다는 겁니다.

그래야 창조를 누릴것 아니겠습니까? 안식을 말입니다.


창조를 못 누리고 개입하겠다는 악마들이 꼭

안식일을 지키겠다고 하니 안식의 주인을 죽여버리는 겁니다.

성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주를 삼키는 겁니다.

 

지금 예수님을 죽이는데 있어서

예수님을 빼고

모든 인간들이, 물론 저도 예외 없이 모두다 다 동원이 되어서

예수님을 죽이는 겁니다.

못박아라 못박아라

 

그런 분위기를 빌라도라는 권력가 라고 해서 이길수 있을까요?

쿠테타를 벌리겠다는데?

혁명 내란을 일으키겠다는데?

민란이 벌어지면 누구책임인데? 빌라도 책임인데!!!!

그 어떤 권력자도 이길수 없습니다.

협박 공갈에 다 넘어갈수 밖에 없습니다.

 

다들 이렇게 마귀에게 무릎 꿇습니다.

우리도 어쩔수 없습니다. 베드로도 안됩니다. 세 번 부인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자 그래서 마귀의 세가지 시험이 왜 복음의 시작을 하기 바로 직전에 나타나는 이유가 바로 이런 이유 입니다.


세번째 시험을 주님은 통과 하신 겁니다.

온 천하 만국을 주겠다 무릎 꿇어라 라는 시험 말입니다.

 

오로지 이런 분위기에서 권력 보다 더 우세한 권력을 엎어버릴수 있는 분은

예수님 혼자 뿐인 겁니다.

유일하게 안 갇힌 분이다는 겁니다.

마귀의 시험을 이미 이기고 통과 하셨기에 말입니다.

 

모든 인간은 갇혀버렸지만

안 갇힌 분이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불가능합니다.

그 분위기를 대변해서 대신 나서야 할 판국 뿐입니다.

조직 속에서 누구하나 얼룩이 된다면 그 얼룩을 서로 서로가 없애버려야

그 조직 속에서 살아남을수 있게 된다는 겁니다.

세리가 바로 우리 모습 아닙니까?

매국노 세리

 

그래서 사도바울이 열심히였던 겁니다.

백성을 대변해서

하나님을 대변해서

평생을 이단 척결하는데 목숨을 아예 걸었습니다.

 

아 그런데 이 이단척결자 바울이

도리어 이단 중의 이단

죄인 중의 괴수가 되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의 우편에 앉음을 봐버렸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예수님을 우편에 앉힌것도 아닌데

주님이 우편에 앉으신 자신을 보여주시는 바람에

 

그런 자도 용서 받는데

아무리 악한 우리인들 용서 못하는 피인가 보냐 말이죠

 

피를 모독하지 맙시다.

그 어떤 죄를 지어도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는 모든 허물을 다 덮고도 남습니다.

 

지금 본문에서 빌라도든 헤롯이든 이들이 악마짖을 해서 지옥가는게 아닙니다.

그것 때문이면 마귀안에 갇혀 버린 자는 다 가야 합니다.

한 사람도 예외가 없을 정도로 다 지옥보내고도 남을 우편에 앉아계심입니다.

 

그것이 기준이 아니라

그 이후 사도행전에서 주의 주 되심을 증거하는 성령을 훼방하는 것이 기준이 되는 겁니다.

 

그거나 저거나 같다 라고 할지 모르지만

예외가 많았습니다.

 

그러니 진짜 기준을 알자 말이죠

우리는 모두다 군중의 밀집된 상태를 사랑하다 보니

너도 나도 다 따라서 대중의 욕망에 의해

예수님을 죽여라 죽여라 라고 외친자들입니다.

예외 없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마찬가지였구요

 

그것이 심판의 기준이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주의 주 되심

곧 하나님의 영광의 우편의 자리에 앉았다 라는 이것

이 주의 주 되심을 거부하는 성령을 훼방하는 것이 바로 기준이 된다는 겁니다.

 

정작 지옥갈 이유는 딴데 있었습니다.

 

그럼 중고등부 학생들이 묻지요

그럼 이순신 장군 같은 단 한번도 예수님에 대해서 들어본 적이 없는 자는 어떻게 합니까

억울하잖아요

 

그런데 질문의 내막은 이겁니다.

하나님은 불공평하면 안된다 라는 겁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걱정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투사했기 때문입니다.

그런 입장에서 더더욱 불공평한 하나님이시다는 겁니다.

 

학생들 식으로 따지만 물론 이것으로 시비거는 어른들이 거의 대부분입니다.

교인들도 다 이것만 따지더군요.

장로도 나에게 이것 따지고

심지어 저도 한계에 부딧히면 다 따지게 되는 겁니다.

 

불공평 하기에 지옥과 천국을 만드신 겁니다.

그래서 더더욱 불공평하기 위해

그 간극을 더욱더 벌려서 지옥과 천국을 꽉꽉 채우시는 겁니다.

얼마나 불공평하십니까?

 

이것을 철학자들은 공부해서인지 몰라도

말귀를 요부분만큼은 알아먹는척 하더군요

어떻게? 불공평하기에 너무 너무 공평하다고 ㅋㅋㅋㅋ

 

말 되지요

무지 머리 굴려서 나온 저들의 말입니다.

저들이 먼저 오히려 먼저 저렇게 이야기 합니다.

 

학생들이 이해 못하는 것이

개인 구원이라는 것이 없다 라는 것을 모르는 겁니다.

개인 구원은 없고 집단 구원 뿐입니다.

그렇다면 베드로도 지옥 간다고 묻겠죠 학생들이!

 

네 맞습니다. 베드로도 지옥 갑니다.

예수 안의 베드로만 천국 갑니다.

 

예수 안 이라는 집단성은 베드로 라는 개인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오로지 예수 안만 인정하는 거죠

 

즉 구약으로 치면

학생들이 모세의 홍해 사건을 다룬 영화나 만화

좀 있으면 나오는 영화도 보게 될 것인데

그들이 유월절 어린양의 살과 피를 먹고 발라서

구원을 받는데

이스라엘이라는 이유 만으로 그 살과 피를 안 발랐다?

그럼 천사들이 패쓰 안하고 죽여서 심판 합니다.

 

이스라엘을 개인의 성향으로 안 본다는 겁니다.

이스라엘 속에 있어도 피 안 바르면 다 죽습니다.

 

또 역시나 똑같이

이스라엘 속에 애굽인이 영화에 보니까(영화 십계) 모세의 어머니? 였던가요?

애굽 공주가 따라오던데(성경에는 안나오지 싶은데)

얼마나 개인적입니까?

 

그런데 그 공주는 피 발림 당하니까 유월절 어린양 때문에 삽니다.

 

개인은 사라지고 이스라엘 속에 복속이 되니까 말이죠

 

이 원리가 똑같이

주의 이름을 부른적도 없는 주가 뭔가도 모르는 자에게 부르심바 되었다고

이방인을 구원한다는 이사야 내용이 있습니다.

실제로 예수님으로 인해 이방인이 구원받게 됩니다.

성령을 받은 사도바울은 심지어 이방인의 사도가 되는 겁니다.

 

이런 입장에서 인간 구원은 없고요

예수 안 만 구원이 되는 겁니다.

즉 예수님만 구원하십니다.

예수라는 머리로 인해 그의 몸 곧 그리스도의 몸이 구원되지

몸에서 개인을 주장할 수가 없는 겁니다.

 

그러니 이순신만 억울하게 불공평한게 아니라

더 더 더 불공평의 불공평이 지금 현재에도 더 심하게 우리들 속에서 펼쳐지는 겁니다.

자 그러면 질문을 반대로 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순신처럼 지옥가야 마땅한데 왜 저희들에게 용서를 베푸시는 거죠? 라고 말입니다.

원인이 없는데
아무리 봐도
아무 것도 한 것이 없는데
이런 질문 조차 할 수 있도록
주님의 편파적인 은혜를 왜 벌레 만도 못한 자들에게 베푸시느냐 말이죠?

이런 질문을 할 줄 안다면

사랑이 얼마나 편파적인 것을 안다는 겁니다.

지독한 불공평임을 말입니다.

 

누군 지옥 누군 천국은 원인 없는 결과이지

이것 보다 더 나은 불공평 있으면 나와보라 그래요?

세상에서 가장 불공평한 것은 바로 사랑입니다.

 

사랑 보다 불공평한 것이 없거든요

 

그 불공평한 사랑을 완성하시고자

지금 인간들이 예수님을 뺑뺑이 돌리듯이

이쪽 빌라도에게 갔다가

저쪽 헤롯에게로 갔다가

다시 이쪽 빌라도에게 갔다가

결국 빌라도가 도저히 거부할 수 없는 이성적 판단을 넘어서는

쿠테타로 협박을 해서 이기게 되는 이 상황이


얼마나 힘겹게 얻어낸 승리요 이기는 기쁨이냐 말이죠.
그런데 그런 원인 있는 결과가 사실은 강요된 선택이다는 겁니다.
 

지금 인간들 자신들의 힘으로 이루어진줄 착각하는데

이것이 다 예수님의 자작극 이다 라는 겁니다.

불공평함인 사랑을 이루시고자 말입니다.

 

(10:18, 개역)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하시니라

 

이 말씀은 개인구원이 없다 라는 겁니다.

즉 잃어버림을 당한자는 단 한명도 없다 라는 겁니다.

오직 예수님만 잃어버림 당한 누락 배제 소외된 자이기에

되찾는 기쁨도 예수님에게만 해당된다는 겁니다.

 

구원이란 포로됨이 전제가 되어야 하는데

잃어버린 적도 없는 데 어떻게 구원이 됩니까?

이 잃어버림을 이스라엘 조차도 소유할 수가 없어서

도리어 잃어버린 양을 유대인들이 더더욱 핍박하다 보니

개같은 이방인 여자가 자기 딸 귀신들린 딸을 고쳐달라고 예수님에게 말하니

나는 이스라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보내심을 받지 않았다 라고 하니

맞습니다. 그러나 개도 주님의 밥상에서 떨어진 긍휼을 먹지 않습니까 라고 하면서

잃어버린 양이 유대인이 아니라 바로 이 여자였던 것을

예수님의 자작극으로써 저들 유대인들 보란 듯이 펼치신 겁니다.

 

그렇다면 집단성 조차도 개인이 파악할 수 없을 정도로

유대인 또는 이스라엘이라는 안전빵도 전혀 안전한 구원보장이 안된다는 거죠

 

[예수 안]은 그때 그때 달라요 가 되니

이거 뭐 가장 불공평하니 구원하겠다는 말이가? 구원안하겠다는 말이가?

라는 반응 뿐인 거죠.

 

심지어 개인들 속에서의 한덩어리인 육체는 버리고 영혼만 구원한다고 하면

 

철저하게 단절 단절, 단절의 단절만을 추구하니까

인간이 상상한 구원은 애초부터 없는 것이다는 겁니다.

 

그런 망상의 구원을 해줘본들 망상이요 허구인데

구원 말라꼬 하냐 말이죠

 

그래서 그런 취지와 입장이 바로

예수님을 위해 울겠다고

회개하겠다고 제발 예수야 너의 잘못을 시인하라 라고 하는 겁니다.

얼마나 예수님을 구원해 줄려고 환장을 하는지?

 

그 뒤의 아낙네들의 눈물도 마찬가지

에수님을 위해 눈물 흘릴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겁니다.

 

그래봤자 불공평한 지옥과 천국을 만들어 내지 못한다는 겁니다.

즉 거룩을 이룰수 없고, 완성할 수 없다 라는 겁니다.

 

그런 우편에 앉지도 못할 것들을 내밀지 말고

주님이 어떻게 십자가를 감사하게 지시고 가는지

그래서 심판의 주요

종말을 완성하심과

구원의 주로써

 

어떻게 우편에 앉는 것을 완성하시는지를 보자 말입니다.

 

감사하게도 우리도 그 속에 예수님을 죽여라 라고 외치면서

빌라도의 이성적인 그 판단을 넘어서면서 까지

소리지르면서 빌라도를 이기고

 

그 승리를 착각하면서까지

어떻게 예수님의 불공평한 사랑을 이루시는데 우리가 말려드는지를 보자 말입니다.

 

이래놓고도 이 말도 안되는 이런 우리의 죄악을 그 모든 허물을 다 덮는

그야 말로 불공평해도 너무 너무 불공평한 불공평 중의 불공평인 십자가의 사랑을 이루시는지

 

우리가 찌른 창에 의해 우리가 이긴줄 알았건만

아뿔사 예수님의 승리의 독자 승리였다는 것을

승자독식으로 밀어주기라는 믿음의 초과잉성을 펼치시는 겁니다.

 

걱정마라 다 용서하시겠다 라는 겁니다.

우리의 큰소리가 아무리 빌라도를 이길 정도로 무릎 꿇게 만들어도

 

십자가의 사랑은 족히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게임이 안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하루 하루 십자가의 사랑에 찔려가면서

그 찔리는 기쁨에 감사하는 삶만을 누릴 수밖에 없도록 하신 겁니다.

 

우리의 죄악마저도 이기시는 넉넉한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8:1, 개역)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8:2, 개역)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8:34, 개역)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8:35, 개역)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협이나 칼이랴

(8:36, 개역)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8:37, 개역)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8:38, 개역)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8:39, 개역)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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