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편에 앉을 인자를 막아야만 하는 인간 (눅 22:63-71)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냐? 내가 그니라!!

 

인자가 우편에 앉아 있으리라

 

(22:63, 개역) 지키는 사람들이 예수를 희롱하고 때리며

(22:64, 개역) 그의 눈을 가리우고 물어 가로되 선지자 노릇 하라 너를 친 자가 누구냐 하고

(22:65, 개역) 이 외에도 많은 말로 욕하더라

(22:66, 개역) 날이 새매 백성의 장로들 곧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모이어 예수를 그 공회로 끌어들여

(22:67, 개역) 가로되 네가 그리스도여든 우리에게 말하라 대답하시되 내가 말할지라도 너희가 믿지 아니할 것이요

(22:68, 개역) 내가 물어도 너희가 대답지 아니할 것이니라

(22:69, 개역) 그러나 이제 후로는 인자가 하나님의 권능의 우편에 앉아 있으리라 하시니

(22:70, 개역) 다 가로되 그러면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냐 대답하시되 너희 말과 같이 내가 그니라

(22:71, 개역) 저희가 가로되 어찌 더 증거를 요구하리요 우리가 친히 그 입에서 들었노라 하더라

 

베드로가 예수님의 말씀하신 대로 닭 울기 전 세 번 예수님을 부인한다고 하신 말씀이

실제적으로 이루어지니까

베드로는 대성통곡을 합니다.

 

예수님의 그 말씀만은 제발 틀리도록 절대로 맞지 않도록 하고자

베드로는 자신의 모든 역량을 발휘했지만

오히려 그러면 그럴수록 더욱더 말려들어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닭 울기 전 세 번 예수님을 절대 모른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닭이 꼬끼오 하고 세 번을 우니까

베드로는 통곡을 합니다.

 

후회해서? 죄책감? 아닙니다.

그는 먼저 예수님이 이렇게 나를 위해 대성통곡처럼 놀라운 탄식을 하셨다라는 것을

비로소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 눈물의 탄식을 베드로는 무시했던 겁니다.

이제야 자신도 그 무능한 울음에 동참케 됩니다.

아무것도 아닌 것인 그 눈물에 말입니다.

 

나는 늘 틀렸고 주님은 옳았습니다 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붙잡혀서 많은 사람들로부터 능욕을 받습니다.

이것도 구약에 예언된 바 대로입니다.

 

즉 기록된 말씀대로가 아니면 아니하신다 라는 겁니다.

 

(53:3, 개역)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버린 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53:4, 개역)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53:5, 개역)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53:6, 개역)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심지어 예수님의 눈을 가리우고 때림으로써 누가 때렸게 라고 맞추어 보라고

너가 선지자 맞다메? 누가 때렸는지 맞춰 보라가 희롱하며 놀려댑니다.

 

자 여기서 이들 놀려대고 희롱하는 자만이 과연 나쁠까요?

사실상 모든 인간은 예수님을 평생 이렇게 희롱하는 재미로만 살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들 희롱하는 자를 모든 인간의 대표자로써 보여준 것이기에

나와 무관한 모습이 아니다 라는 겁니다.

어떻게 그럼 연관되어 있느냐?

바로 우편에 앉는 인자를 막고자 함이다는 겁니다.

 

(22:16, 개역) 개들이 나를 에워쌌으며 악한 무리가 나를 둘러 내 수족을 찔렀나이다

(22:17, 개역) 내가 내 모든 뼈를 셀 수 있나이다 저희가 나를 주목하여 보고

(22:18, 개역) 내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뽑나이다

(22:19, 개역) 여호와여 멀리하지 마옵소서 나의 힘이시여 속히 나를 도우소서

(22:20, 개역) 내 영혼을 칼에서 건지시며 내 유일한 것을 개의 세력에서 구하소서

 

지난시간에 나는 가룟유다처럼 예수님을 팔지 않았어 라고

증명해 보이겠다는 식으로 칼로 말고의 귀를 짤랐는데

예수님은 그것을 무용지물로 만들어 버리는 귀를 도로 붙여버리는 겁니다.

 

우리는 결국 모두다 예수님을 팔아버린 입장과 같습니다.

베드로를 그렇게 만드시는 겁니다.

 

그것 팔아넘기는 것 뿐만 아니라

세 번씩이나 모른다고 부인하게 만들어 버리는 겁니다.

 

베드로에게 덮쳐진 상황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인간은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씩이나 장지진다고 한 겁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예수님은 희롱당하고 능욕을 받게 되는 겁니다.

모든 인간으로부터 말입니다.

시대를 초월해서 그 어떤 인간도 예외가 없이

다들 희롱하고 능욕하는 겁니다.

 

?

 

뭣 때문에 희롱하느냐?

 

네 맞습니다. 본문에 나온 그대로입니다.

 

너가 선지자 이다메?

그럼 누가 널 때렸는지 맞춰봐?

너가 너 자신을 구원해 봐!!

 

희롱하는 이유는 바로 구원자이기 때문입니다.

진짜 구원자 말입니다.

 

즉 이 말은 모든 인간은 악마가 씌여져 있는 겁니다.

그래서 가짜 메시아가 있는 입장에서

왜 구원자가 필요하느냐 하는

마귀의 주장에 대한 징후로써

 

구원자에 대한 거부 인 겁니다.

이 몸이라는 육체가 발악을 합니다.

나의 구원자는 딴 사람은 몰라도

딴 하나님 곧 신은 몰라도

 

예수 당신 만큼은 절대 구원자가 될 수가 없다 라는

이 몸의 반응을 우리는 느끼게 되는 겁니다.

몸이 요동을 치는 겁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보호자 싸움입니다.

인간이라는 종 노예는 그 보호자들의 배치물일 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희롱과 멸시 이 후에 인자가 우편에 앉게 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라고 대답을 하시는 겁니다.

 

이 말 귀를 악마가 씌여진 자들이 말귀를 알아 먹습니다.

 

뭐 너가 그럼 구원자 라는 말이냐?

하나님의 우편에 앉는 분은 하나님의 아들 뿐인데

니가 하나님의 아들이단 말이냐?

 

내가 그 로다.

 

예수님이 저들의 약을 바짝 올립니다.

간따나 열받아 있는 저들을

제발 구원자 라는 소리만은 하지 말라는 겁니다.

구원자 라는 소리만 안하면 모든 것을 다 용서 해주겠다는 입장이

저들의 입장인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절대 굽히지 않습니다.

반드시 인자는 우편에 앉게 된다는 겁니다.

 

뭘 믿고 이렇게 저들은 까부는 것일까요?

 

저들은 압니다.

 

말도 안되는 귀신 시나락 까먹는 소리이다는 것을

 

그런데도 불구하고 저들은 불안해 합니다.

하나님의 아들 되심을 부정함과 동시에 불안해 합니다.

유대인들 만큼은 불안해 하는 겁니다.

 

지금 저 말과 행동이 자신들도 보았던 구약의 구절을 의식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는 겁니다.

 

그래서 끝까지 테스트에 테스트를 반복해도

부인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자신들도 빼도박도 못할 정도로

너무 깊게 예수님과 맞물려서

예수님의 구원자 되심을 적극적으로 막아야 하는 역할을 톡톡히 할 수 밖에 없음을 말입니다.

 

빼도박도 못하니 갈 때 까지 가보는 것 밖에 달리 할 일이 없는 겁니다.

 

오죽하면 자신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이는데 성공한 후에

끝난줄 알았는데 다시 사도행전에 예수가 살아났다 라는 소문에

예민하게 반응할 수 밖에 없는 공포로 작용이 되니까

 

가말리엘 문하의 어떤 자가 이런 일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왔다면

아무리 해도 막을 수 없고

하나님으로부터 오지 않았다면 자멸할 것이다 라고

 

자기들끼리도 자중하자 라는 식으로 민감하게 반응할 필요가 없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게 과연 그렇게 될까요?

 

예수님은 오히려 더욱더 수셔대는 겁니다.

죽임을 당하는 쪽은 예수님이고

죽이는 칼을 쥔 쪽은 저들인데

오히려 당당하게 수셔대는 쪽은 예수님이고

저들은 당황해 하면서 예수님의 말씀 한마디 한마디에 예민하게 반응하며 불안해 하는 겁니다.

 

누가 더 공포에 사로잡힌 겁니까?

그러니 이 공포와 불안을 빨리 제거하고픈 쪽이 인간이고

더더욱 공포로써 자리매김하는 것이 예수님 쪽이 되는 겁니다.

 

이 모든 연유는 구원자 되는 것을 막아라입니다.

 

예수님이 오히려 단정 지어버린 겁니다.

 

인자가 하나님의 영광의 우편에 앉게 된다고

 

그럼 이것을 적극적으로 저지하면서 막아서야만 하는 것이

저들이 반드시 해야만 하는 역할이다는 겁니다.

 

이미 가짜 메시아가 구원자로 아비로 자리 잡고 있는 이상

어디까지나 예수 당신만큼은 안 된다는 겁니다.

다른 메시아 다른 구원자는 다 되어도

십자가로만 향하는 예수 당신 만큼은 절대로 될 수 없다 라는 겁니다.

 

이미 우리에게는 구원자가 있다는 겁니다.

마귀가 심은 구원자로써의 메시아 말이죠.

그러니 그 메시아를 기다리지

예수 당신은 때려 죽어도 안된다 라는 겁니다.

 

참 희한하지요

얼마나 구체적입니까?

이 또렷하고 구체적인 명료한 반응이 나타나도록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이 저들에게 제대로 작용했다 라는 겁니다.

 

이미 구원의 장치가 다 마련이 되어있고

모든 것을 다 구비한 상태에서

율법도 있고 성전도 있고 성전 종사자

율법 종사자 다 있고

최종적인 메시아만 자신들이 마련한 그 자리에 오면 되는데

 

왜 우리들이 원치도 않는 예수라는 자가 메시아로써 자리잡아야 하느냐 라는 겁니다.

 

아무리 성경말씀을 들따 봐도 예수님과 말씀은 전혀 안 맞다 라는 결론인 겁니다.

 

맞습니다. 구약에 절대로 예수님이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니 유대인들의 말이 맞는 겁니다.

지금도 그 메시야를 현대 이 시점에도 기다리고 있는 이유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감히 참람한 말을 하시는 겁니다.

 

내가 그 니라

 

무슨 근거로요?

 

이것은 일방적인은 선언인 겁니다.

확인할 방법이 없습니다.

믿음의 영역입니다.

자 이렇다 보니 더 더 더 많은 내가 그리스도다 라고 하면서 등장하는 자들이 더욱더 많아지는 겁니다.

예수님이 그 출발점이니 예수님이 촉발시킨 것이나 마찬가지이지요 일까요 ~~~? ㅋㅋ

 

그런데 무슨 근거로 예수님만 빼고 다 가짜인가 하는 점이냐 라는 거죠.

 

우리는 답을 성령이라고 했습니다.

맞습니다. 성령입니다.

 

그런데 성령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악령 또한

내가 그리스도 다 라고 주장하는 자를 믿도록 강요케 한다는 겁니다.

 

우편에 앉지도 않을 것들을 그리스도다 라고 주장하는 악령이 씌인 자들이 등장한다는 겁니다.

 

그것도 후가 아닌 이미 유대인을 장악한 모습이다는 겁니다.

 

오죽하면 지금 예수님이 아닌 예수님 보다 누가 더 회개의 달인인고 하니

 

(14:62, 개역)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니라 인자가 권능자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하시니

(14:63, 개역) 대제사장이 자기 옷을 찢으며 가로되 우리가 어찌 더 증인을 요구하리요

 

대제사장이 참람한 말을 듣고 대신 회개할 정도입니다.

하나님이여 못 들으신 것으로 하세요 라고

책임자 다운 모습을 갖추고자 대신 회개하는 모습이다는 겁니다.

과연 그게 회개냐 말이죠.

 

우편에 앉지도 않을 것들이

가장 가까운 모습의 티를 팍팍 내는데

그것이 가장 잘 속이는 모습이 아니냐 말이죠.

다들 넘어갔다는 증거이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것은 인간의 영역을 떠난

성령의 소욕과 육의 소욕의 싸움이 되는

보호자 싸움이 되는 셈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 보호자 싸움이 벌어졌습니다.

 

바로 마태복음 4장에 나옵니다.

 

마귀에게 시험 받으심입니다.

 

왜 마귀는 예수님을 시험할수 있는 가능성이나 자격을 가진 것일까요?

왜 또 예수님은 마귀에게 시험을 받아야 합니까?

오히려 그것이 더 수상하지 않습니까?

마귀에게 시험 받도록 허용을 하시니 말입니다.

 

그것은 마귀의 목적을 드러내기 위함입니다.

동시에 인간들 즉 인간의 대표성이 유대인입니다.

모든 유대인이 이 마귀가 씌여있어서

마귀의 목적대로 움직이는 꼭두각시이다는 겁니다.

그럼 그런 유대인을 피해서 다른 민족에게 나타나면 될 것인데

다른 민족에게 나타나봤자 맨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의미를 아무리 인간들 즉 유대인이 장악했다손 치더라도

예수님은 이 이스라엘의 의미를 포기하지 않으시는 겁니다.

 

오로지 진리되신 예수님 자신을 이 이스라엘만을 통해서만 표출시키신 겁니다.

 

자 그런데 모두 마귀에게 장악당했습니다.

갇혀 버린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희년이 의미가 있는 겁니다.

 

구원자란 결국 포로된 자를 얽매여 눌린 자를 눈먼자를 자유케 하는 복음(희년)의 완성자 이기 때문입니다.

 

(4:18, 개역)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그러니 유대인이야 말로 가장 적절하게 구원자의 기능을 말해주는 죄인 환자들인 겁니다.

 

그러니 모르는 거죠.

 

그런데 예수님의 활동이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바로 직전에

 

마치 출애굽의 십계명의 전문처럼

예수님의 천국 복음의 전문과 같이

 

(4:23, 개역)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에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마귀의 목적성을 드러내시는 겁니다.

 

(20:1, 개역) 하나님이 이 모든 말씀으로 일러 가라사대

(20:2, 개역)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너의 하나님 여호와로라

(20:3, 개역)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

 

3절부터 제 일 계명이 시작이 되지만

그 전문은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너의 하나님 여호와로라 라고 전문이 그 십계명 전체를 말해주는 겁니다.

 

예수님이 누구인가를 알려면 바로 마귀의 정체를 드러내고

그 마귀의 손에서 건져내시는 분이다는 겁니다.

 

그런데 마귀는 이미 유대인을 장악해서 유대인들은 갇힌바 된 포로된 입장입니다.

그럼 예수님은 이미 갇혀버린 유대인을 상대하시는게 아니라

그 마귀의 기능과 상대하심으로써 유대인 속에서 그 마귀에게 속한 내용과

끝까지 선을 분명하게 경계선을 긋는 말씀을 하시는 겁니다.

 

자 그런 입장에서 마귀의 목적성은 바로

 

인자가 우편에 앉는 것을 막는 것입니다.

 

우편에 앉는다는 말이 무슨 의미일까요?

 

주의 주 되심입니다.

 

이미 주 라고 해 놓고서는 주가 그럼 주이지 또 다시 주가 되어야 하느냐 말입니다.

주라는 표현이 왜 두 번 나오느냐 말입니다.

왜 두 개의 주가 필요하냐 말입니다.

 

주의 주 되심이란

예수님이 주가 되심인데

예수님이 주가 되신다는 것이 뭔고 하니

우편에 앉는 겁니다.

누구 우편? 하나님의 권능의 자리인 우편 말입니다.

 

(22:69, 개역) 그러나 이제 후로는 인자가 하나님의 권능의 우편에 앉아 있으리라 하시니

(22:70, 개역) 다 가로되 그러면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냐 대답하시되 너희 말과 같이 내가 그니라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신학박사들인 대제사장들과 그 무리들이 알기 때문에

그럼 너가 하나님의 아들이다는 말이냐 라고 되묻는 거죠.

 

하나님의 아들만이 앉는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예수님은 왜 저들이 다 아는 것을

비밀로써 아니면 숨기면서 하지 않고 왜 대 놓고 하시느냐 말이죠

그거야 이미 마귀가 다 알고 있기 때문에 숨길필요가 없는 겁니다.

숨겨질 리가 없으니 말입니다.

 

정작 숨겨진 것은 예수님의 주 되심 곧 우편에 앉으심 때문에

우리들이 그 주의 주 되심 때문에 배제 소외 단절 당한다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앞에서 나온 베드로입니다.

베드로는 주의 주 되심 때문에 배제 당해야 합니다.

배제 당하기 위해서 세 번 예수님을 부인해야만 하는 겁니다.

이거 교회가 가르치는 것과 정반대죠 ㅋㅋㅋ

세 번 부인한 것이 심각한게 아니라

주의 주 되심이 더 심각한 겁니다.

주의 주 되심 때문에 세 번 부인이라는 배제를 당하는 겁니다.

베드로 뿐만 아니라 모든 제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주의 주 되심을 위해 보탬이 되면 안된다는 겁니다.

오히려 소외 배제 단절 당함으로써

그 간극을 누려야 할 판국이지

 

예수님이 우편에 앉도록 우리가 보탬이 되었다고 나서게 된다면

그 우편의 기능 곧 원수가 발 아래에 놓여지게 하는 일이 무의미하게 되어버리는 기능이 되는 겁니다.

 

그러니 갇혀 있어 주어야지

왜 포로된 자가 마치 자유한냥 나서냐 말이죠

눈먼 자가 마치 소경아닌 듯 본다고 나서게 되면(차라리 소경이면 고쳐줄 텐데 본다고 하니)

억눌린자가 귀신 쫏겠다고 나서게 되면

 

도대체 구원자가 왜 필요하냐 말입니다.

애굽의 종 되었다는 십계명의 전문처럼

이미 갇혀 있다는

마귀에게 사로잡혀 있다는

원수가 있다는 뜻인데

포로되지 않았고

눈멀지 않았고

억눌리지 않았는데

원수가 무슨 의미가 있느냐 말이죠

그 원수 때문에 우편의 기능이 상대적인 대조로써 나타나는 기능이 우편인데 말입니다.

 

그럼 원수 된 마귀는 간단합니다. 예수님이 우편에 못 앉도록 하는게 목적인 겁니다.

 

(110:1, 개역) [다윗의 시]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으라 하셨도다

(110:2, 개역) 여호와께서 시온에서부터 주의 권능의 홀을 내어 보내시리니 주는 원수 중에서 다스리소서

 

(22:44, 개역)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냐

(22:45, 개역)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 하시니

 

(12:36, 개역) 다윗이 성령에 감동하여 친히 말하되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발 아래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니라

(12:37, 개역)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 하시더라 백성이 즐겁게 듣더라

 

(20:42, 개역) 시편에 다윗이 친히 말하였으되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20:43, 개역) 내가 네 원수를 네 발의 발등상으로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니라

(20:44, 개역) 그런즉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였으니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뇨 하시니라

 

이미 그런 마귀의 정체를 예수님은 천국복음 증거 개시 시작 전에

밝혀버렸습니다.

 

마귀로부터 3가지 시험을 받음으로써

마귀가 예수님의 우편에 앉는 것을 막고자 한다는 것을 말입니다.

 

돌이 떡덩이 되게 하라 라는 시험

 

배고픈 자에게 배고픔을 해결해 주고

경제적인 가난한 빈민에게 가난을 해결하라 라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가난이 마귀가 생각하는 그런 불공평이 아니라

유전 무죄, 무전 유죄 가 아니라, 그런 선악 의식이 아닌

오히려 마음이 가난한 자는 천국이 저희 것이다 라고

천국을 소망케 한다는 겁니다.

 

(5:3, 개역)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6:20, 개역) 예수께서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고 가라사대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

 

그러니까 예수님 자신이 그 천국을 주러 왔다는 겁니다.

배고픔을 해결해 주는게 아니라 말이죠

 

그런데 저는 참 놀라운 것을 발견했습니다.

아무것도 아닌 것인데 오히려 더 감사했습니다.

아무리 부자가 부요해도

하루에 밥을 45끼 여섯끼를 먹지 않고

한끼에 밥을 아무리 많이 먹어도 3그릇 4그릇 5 그릇을 먹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이것이 신기하지 않나요?

 

마치 아무리 부자여도

아무리 가난해도

 

하루에 마시는 공기양이 부자는 몇천배를 더 마시고 물을 몇천그릇을 벌컥 벌컥 마시지 않는다는 겁니다.

 

물론 저의 말에 모순이 있다고 하는 자가 있을 겁니다. 당연합니다.

굶는 자가 많다는 거죠

또 물도 못 마시는 자들도 많고요

그럼 여기서도 감사한 것이 뭔고하니

 

한 번 죽지 두 번 죽지 않는다는 겁니다.

얼마나 공평하냐 말이죠

 

문제는 이 땅이 악마의 세계이다 보니

반드시 불공평하게 만들어서 반박케 한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가난한자의 양을 빼앗아 놓고서는

공평하게 율법의 4배나 갚으라 라고 하니 말입니다.

 

여기서 모든 인간은 곧 다윗이 그 대표성이죠

다윗은 인간은 갇혔다 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겁니다.

 

갇혔기에 율법을 지키면 지킬수록 모순이 되고 죄를 더하게 되어 있지

죄가 사라지지 않는 겁니다.

법을 지키면 지킬수록 말씀을 지키면 지킬수록

죄가 사로잡아 온다 라는 것을 더욱더 절실하게 직시하게 되는 겁니다.

 

(7:23, 개역)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7:24, 개역)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그래서 곤고하다는 겁니다. 즉 갇혔다 라는 겁니다.

 

사로잡아 즉 꽁꽁꽁 묵였다는 겁니다.

 

곤고 困苦 피곤 할 때 곤, 졸리다 곤, 고생 고 어려움 고,

 

예로 무거운 짐을 이중적으로 즉 무한반복적으로 지고 있는 셈이다는 거죠.

철저하게 갇혔다 라는 겁니다.

 

 

그 지켜야할 율법

그 불가능한 율법

지키면 지킬수록 더욱더 수렁에 빠지는 올무와 같은 율법

 

내가 지킬께 라고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아 (수고와 무거운 짐 = 이중분절, 중첩)

즉 너는 사망이 주는 그 무게에서 못 빠져나온다는 겁니다.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를 편히 쉬게 하리라

 

(11:27, 개역)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11:28, 개역)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11:29, 개역)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11:30, 개역)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평안을 주겠다는 겁니다. 안식을 주겠다는 겁니다.

희년 기쁜소식 자유를 주겠다는 겁니다.

 

결박당하는 그 꽁꽁꽁 묶인 포승줄(죄인을 묶어 결박시키는 줄)에서

자유케 하도록 그 줄을 끊어주겠다는 겁니다.

 

그러기 위해서 먼저 주인을 결박시켜야 한다는 겁니다.

유대인들의 주인인 마귀를 말입니다.

 

유대인들은 꿈에도 모릅니다.

그러니 자꾸 나서는 겁니다.

성경을 괜히 알아버린 바람에 예수님이 하신 말씀에 더더욱 반박할 수 밖에 없는 겁니다.

차라리 모른다고 하면 알려주심에 받아 먹을텐데 말입니다.

안다고 하니 더 모르는 겁니다.

본다고 하니 소경인 겁니다.

 

(12:29, 개역)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야 어떻게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그 세간을 늑탈하겠느냐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늑탈하리라

(12:30, 개역) 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헤치는 자니라

(12:31, 개역)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모든 죄와 훼방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훼방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12:32, 개역)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

 

그러니 에수님은 세간과는 상대 안하십니다.

집주인만을 상대하시는 거죠.

 

여기에 인간은 철저하게 배제된 겁니다.

그저 꽁꽁꽁 묶여 있다는 것에 주님이 도둑놈으로써 왔다는 자체가 감사할 뿐이다는 겁니다.

 

그러니 배고픔을 해결하라 라는 집주인의 말에, 마귀의 말에

도둑이, 예수님이 수긍하게 되면

그게 말이 안된다는 겁니다.

 

 

(4:1, 개역)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

(4:2, 개역) 사십 일을 밤낮으로 금식하신 후에 주리신지라

(4:3, 개역) 시험하는 자가 예수께 나아가서 가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이 떡덩이가 되게 하라

(4:4, 개역)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이것이 하나님의 아들이 마귀로부터 받는 첫 번째 시험 문제인 겁니다.

 

예수님의 답안지는 사람이 떡으로 사는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산다고 기록되어있다고 합니다.

 

인간은 먹고 마시고 하고자 이 땅에 인간으로 태어난게 아닙니다.

그렇게 되면 짐승과의 차별성이 없습니다.

 

개만도 못하다는 짐승을 욕하는게 아니라

차이성이 없다 라는 겁니다.

 

사람이 사람다운 창조자의 창조성을 담은 내용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산다는 겁니다.

떡이 아니라 말이죠. 존재적 가치는 떡으로 인한 떡의 원인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이 원인인 존재적 가치이다는 겁니다.

그러니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담은 그릇인 겁니다.

이 말을 자꾸 성화론자는 행해야 한다는 실천으로 보는데

다윗을 언급한 이유가 실천이 아니라 그냥 담는 그릇입니다.

실천과 무관한 그릇

에서는 미워하기로 작정된 진노의 그릇

야곱은 사랑하기로 작정된 긍휼의 그릇 말입니다.

 

실천과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행함과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행함과 연관 시킨다면 무조건 종교라고 보시면 됩니다. 마약 말입니다.

 

지금 마귀가 장악한 유대인들의 한결같은 예수님에 대한 공격성은

한마디로 행함 때문입니다.

차라리 행하지 않았더라면

예수님의 행함을 받을텐데 그것이 믿음이지요 믿음의 주 이시니까요

행해버리니까

 

맏아들은 탕자를 받아주시는 아버지의 긍휼에 반박하는 적개심 살인의지를 드러내는 겁니다.

 

행함이란 나는 절대로 배제되면 안된다는 것이지요

나를 소외 시키지 말아라 나도 법 지켰다 라는 거죠. 나도 말씀 지켰잖아 라는 겁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말씀을 안게 아니라 오히려 더 몰랐던 겁니다.

 

그 다음 두 번째 시험문제가 뭔고 하니

 

(4:5, 개역) 이에 마귀가 예수를 거룩한 성으로 데려다가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4:6, 개역) 가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 기록하였으되 저가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저희가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리로다 하였느니라

 

기적을 보여라 그 기적을 통해서 너가 사랑받는다 라는 증거를 대어라

유대교란 한마디로 기적의 종교입니다.

기적으로만 이루어진 겁니다.

다른 민족에게는 없는 특이한 성향입니다.

기적 없이는 하나도 이루어진 것이 없는 것이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 기적을 기념하는 것이 유대교입니다.

한 마리도 사건 사건인 거죠.

사건의 증상 징후로써의 그 기적들을

눈으로 목격한 바를 말할 수가 있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 기적을 다 모아보니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말하기 위한 것이다는 겁니다.

 

십자가로 증거되지 않는 기적은 악한세대가 요구하는 기적인 것이다는 겁니다.

 

기적을 보고 예수님을 따라갈려는 자를 예수님은 피해서 도망치십니다.

왜 도망치십니까? 너가 기적을 보고 나를 임금 삼고자 하는 것은

오병이어의 기적으로 먹고 배부른 까닭에 임금삼고자 하는 것이다.

나 너의 임금 되기 싫다 내가 보여주고자 하는 표적은 요나의 표적이다.

 

요나의 표적이 뭔데요?

 

십자가에 죽으셨다가 3일 만에 부활하는 바로 십자가의 피 용서이다.

 

난 배가 고파 임금삼고자 함이지 피 용서는 필요가 없는데요?

그러니까 나는 너의 임금이 되기 싫단다

그럼 다시는 오병이어 기적 안할 건가요?

그래 안 할 거다.

그럼 나에게 필요가 없군요.

 

많이 용서 받은 자가 많이 사랑하는 자인데

정작 용서 보다는 사랑받았다라는 그 티로써 기적을 요구하는 겁니다.

 

그래서 부자청년이라든지 성전 안에 두 사람 중 한 바리새인이라든지

자꾸 자신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사랑받았다는 티를 내었지만

정작 주님의 용서는 도저히 용서받을 가치가 없는 자들

특히 탕자에게 가니까

그 용서를 거부하고 방해하고 악하다 라고 등돌리고 돌아서는 모습을 보이더라 라는 겁니다.

 

그 거부와 방해와 등돌림과 악하다 라고 하는 것에

 

예수님의 답안지는

 

(4:7, 개역) 예수께서 이르시되 또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 하였느니라 하신대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고 적으시는 겁니다.

 

첫 번째 문제는 경제 사회 문제

두 번째 문제는 종교 문제

세 번째 문제는 정치 문제입니다.

 

(4:8, 개역) 마귀가 또 그를 데리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

(4:9, 개역) 가로되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

 

이 세가지 문제를 보니 솔로몬에게 금도끼 줄까 은도끼 줄까 라는

이야기가 생각 납니다.

 

(왕상 3:5, 개역) 기브온에서 밤에 여호와께서 솔로몬의 꿈에 나타나시니라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네게 무엇을 줄꼬 너는 구하라

(왕상 3:6, 개역) 솔로몬이 가로되 주의 종 내 아비 다윗이 성실과 공의와 정직한 마음으로 주와 함께 주의 앞에서 행하므로 주께서 저에게 큰 은혜를 베푸셨고 주께서 또 저를 위하여 이 큰 은혜를 예비하시고 오늘날과 같이 저의 위에 앉을 아들을 저에게 주셨나이다

(왕상 3:7, 개역)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종으로 종의 아비 다윗을 대신하여 왕이 되게 하셨사오나 종은 작은 아이라 출입할 줄을 알지 못하고

(왕상 3:8, 개역) 주의 빼신 백성 가운데 있나이다 저희는 큰 백성이라 수효가 많아서 셀 수도 없고 기록할 수도 없사오니

(왕상 3:9, 개역) 누가 주의 이 많은 백성을 재판할 수 있사오리이까 지혜로운 마음을 종에게 주사 주의 백성을 재판하여 선악을 분별하게 하옵소서

(왕상 3:10, 개역) 솔로몬이 이것을 구하매 그 말씀이 주의 마음에 맞은지라

(왕상 3:11, 개역) 이에 하나님이 저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것을 구하도다 자기를 위하여 수도 구하지 아니하며 부도 구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원수의 생명 멸하기도 구하지 아니하고 오직 송사를 듣고 분별하는 지혜를 구하였은즉

(왕상 3:12, 개역) 내가 네 말대로 하여 네게 지혜롭고 총명한 마음을 주노니 너의 전에도 너와 같은 자가 없었거니와 너의 후에도 너와 같은 자가 일어남이 없으리라

(왕상 3:13, 개역) 내가 또 너의 구하지 아니한 부와 영광도 네게 주노니 네 평생에 열왕 중에 너와 같은 자가 없을 것이라

(왕상 3:14, 개역) 네가 만일 네 아비 다윗의 행함 같이 내 길로 행하며 내 법도와 명령을 지키면 내가 또 네 날을 길게 하리라

(왕상 3:15, 개역) 솔로몬이 깨어보니 꿈이더라 이에 예루살렘에 이르러 여호와의 언약궤 앞에 서서 번제와 수은제를 드리고 모든 신복을 위하여 잔치하였더라

(왕상 3:16, 개역) 때에 창기 두 계집이 왕에게 와서 그 앞에 서며

 

 

또 이것을 흉내내겠다고 정신나간자들이 일천번제를 유행시켰죠

 

(왕상 3:4, 개역) 이에 왕이 제사하러 기브온으로 가니 거기는 산당이 큼이라 솔로몬이 그 단에 일천 번제를 드렸더니

 

두 번째 시험에서 땡 탈락 한 겁니다.

 

이 지혜는 결국 그 유명한 솔로몬 재판 아기를 두 동강 내어서 이쪽에도 주고 저쪽에도 주라 라는 판결과 연관되는 겁니다.

 

(왕상 3:9, 개역) 누가 주의 이 많은 백성을 재판할 수 있사오리이까 지혜로운 마음을 종에게 주사 주의 백성을 재판하여 선악을 분별하게 하옵소서

 

이것이 바로 우편에 앉은 지혜이다는 겁니다.

 

(왕상 3:10, 개역) 솔로몬이 이것을 구하매 그 말씀이 주의 마음에 맞은지라

(왕상 3:11, 개역) 이에 하나님이 저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것을 구하도다 자기를 위하여 수도 구하지 아니하며 부도 구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원수의 생명 멸하기도 구하지 아니하고 오직 송사를 듣고 분별하는 지혜를 구하였은즉

 

우편에 앉은 자는 자기 원수의 생명 멸하기를 구하지 않습니다.

이미 심판받았는데요 뭘 또 새삼스럽게 마귀 이겨서 뭐하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원수를 발등상 발아래로 둘때에

같이 딸려오는 자가 있는데 그 자가 바로 우편애 앉은 지혜의 배려 섬김 혜택을 보는 자이다 라는 겁니다.

 

즉 영광을 받고자 경배를 받고자 오신 것이 아니라

그래서 수도 부요함도 자기원수의 멸함을 구하는 자가 아니라

 

아버지의 영광의 권능에 우편에 앉은 지혜는

섬기고자 끝까지 사랑하고자 용서하시고자 왔다 라는 겁니다.

 

(4:8, 개역) 마귀가 또 그를 데리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

(4:9, 개역) 가로되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

(4:10, 개역) 이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사단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이것이 섬기는 자 라는 겁니다.

 

정치문제의 예수님의 답안지는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입니다.

 

받고자 착취하는 갈취하는 분이 아닌

섬기는 지혜가 바로 우편에 앉는 지혜 곧 하나님의 아들이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아들 되심에 합격 통과 하신 겁니다.

 

오늘 본문의 상황에서 누가 원수를 죽여버리겠다는 식으로 씩씩거리면서

분노에 가득차 있습니까?

마치 하나님의 대행자처럼

이단감별사 노릇을 하며

심판을 실행하고 있는 겁니까?

 

하나님의 권능의 우편에 앉지도 못할 자들이 오히려 거꾸로 그러고 있습니다.

 

마치 하나님의 권능의 우편을 사수하듯이 말입니다.

 

그런 입장에서 우리는 심판 백만번 천만번 받아 마땅한 자들입니다.

그저 우리의 소망은 예수님이 우편에 앉은 것을 보는 것 뿐입니다.

 

갇혀있고 포로된 주제에 하나님의 권능의 우편 자리를 사수할 입장이 못 되는 겁니다.

 

우리는 소경일 뿐이라서 그저 고쳐주심을 당해야할 입장이지

누가 우편에 앉을까봐 그 사람을 가려내어서 우편을 사수할 입장이 못되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오히려 역전된 모습처럼

하나님의 우편을 사수하는 자들로부터 배제 소외 단절 차단당하는 겁니다.

 

바로 그 자가 우편에 앉으실 분입니다.

 

우리가 다 그렇게 예수님을 우편에 앉지 못하도록 막아섰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제는 우리가 성령으로 인해

 

(7:54, 개역)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저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

(7:55, 개역)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7:56, 개역)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대

(7:57, 개역) 저희가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심으로 그에게 달려들어

(7:58, 개역) 성 밖에 내치고 돌로 칠새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

(7:59, 개역) 저희가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가로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7:60, 개역)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가로되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저희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말라고 (원수가 생명이 멸하는 것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님이 우편에 앉은 것을 보고 기뻐하면서 죽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우편에 서신 것을 보았다 라는 스데반의 고백이 오히려 더욱더

저들을 자극 제대로 마귀의 실체를 드러내는 표현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니 당연히 죽을 수 밖에 없는 거죠.

 

주의 주 되심을 위해서 말입니다.

 

스데반의 고백처럼

 

예수님이 우편에 앉는 것을 보고 기뻐하는 무리와 곧 긍휼을 원하는 자와,

 

절대로 절대로 예수 만큼은 절대로 우편에 앉으면 안된다는 무리

곧 예수가 흘리는 피는 싫다 라는

절대 절대 싫다 예수가 주가 되는 것은 도저히 용납못하겠다 라는

나의 원수도 멸절 못하는, 나의 원통함도 못해결해,

나의 고생함도 보상 못해주는 그런자가 무슨 우편에 앉겠는가?

 

이렇게 나약해 빠져서 무능하게 잡혀와

이 상황을 역전도 못시키는 주제에

 

자신도 구원하지 못하는 주제에 뭐 남을 구원해 ~~~

남을 구원해 ~~~~~

 

~~~ 우편에 앉아?

에라이 어느 손이 너의 뺨을 때렸게? 선지자라메? 맞춰봐????

 

이런 무리들로 나누어서

 

이렇게 두 패로 나누어 지는 것이 주의 주 되심으로 인해 나타나는 겁니다.

 

 

주님!! 주님께서 주 되심으로써

우편에 앉아서 나의 죄악을 도말하는 긍휼을 베풀어 주소서

예수님이 우편에 앉은 것을 보고 기뻐하게 하소서

비로소 나의 심판 주가 된 것을 감사하게 하소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지 말게 하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예수님이 우편에 앉은 것으로 주의 주 되심을 기뻐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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