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까지 참으라] [이제는 너희 때요 어두움의 권세로다] (22:47-53)

 

(22:47, 개역) 말씀하실 때에 한 무리가 오는데 열둘 중에 하나인 유다라 하는 자가 그들의 앞에 서서 와서

(22:48, 개역) 예수께 입을 맞추려고 가까이 하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유다야 네가 입맞춤으로 인자를 파느냐 하시니

(22:49, 개역) 좌우가 그 될 일을 보고 여짜오되 주여 우리가 검으로 치리이까 하고

(22:50, 개역) 그 중에 한 사람이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오른편 귀를 떨어뜨린지라

(22:51, 개역) 예수께서 일러 가라사대 이것까지 참으라 하시고 그 귀를 만져 낫게 하시더라

(22:52, 개역) 예수께서 그 잡으러 온 대제사장들과 성전의 군관들과 장로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강도를 잡는 것 같이 검과 몽치를 가지고 나왔느냐

(22:53, 개역) 내가 날마다 너희와 함께 성전에 있을 때에 내게 손을 대지 아니하였도다 그러나 이제는 너희 때요 어두움의 권세로다 하시더라

 


복음은 정말이 이해 불가의 내용들 뿐입니다
.

 

명령어 스타일의 내용들은 하나 마나 한 소리로 일관되고

행동이나 사건이 벌어지는 내용들은

피할려고 하는 것이 아닌 괜히 건드려서 역으로 피해당하는

마치 함정수사나 아니면 자해공갈단 같은 느낌이 들 정도입니다.

그래놓고 자신이 피해 당했다고 우기는 식입니다.

마치 범죄 현장의 알리바이를 형성을 할려고 하듯이 말입니다.

 

거기에 대한 반작용으로 현장에서 간음하다 잡힌 여인을 가지고 미끼 삼아

예수님을 시험하는 것은 결국 자신들이 먼저 당한 것들을 뒷북치듯이 한다는 것에서

 

동기부여를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누가 먼저 시작한 것인지 모호하게 되는

너무나 많이도 주고 받고 하는 식으로 하다보니

닭이 먼저인지 달걀이 먼지인지

수시로 변하게 만들어 버린 겁니다.

 

그 중간에 갑자기 낑겨서 난데 없이 삽입이 되어 판단하라고 하면

그 어떤 천하의 셜록탐정도 풀수 없는 문제가 되는 셈입니다.

 

원인 자체가 없는 식의 사건이 될 테니까 말입니다.

 

그 정도로 어렵습니다.

 

그러니 복음을 이해한다고 하는 자들이 있다면

일단 의심부터 해야 함이 당연하다고 봅니다.

 

특히 목사는 대책이 없습니다.

 

과연 정말로 복음을 이해 해서 증거하는지

아니면 자기 밥벌이로 증거하는지

 

차라리 자신은 밥벌이로 예수님을 이용만 할 뿐인 죄인이라고 하면

이해라도 하지

 

온갖 의로움을 갖추면서

의로움이 권력이 되어버리는 것을 많이 봅이다.

 

의로움이 오히려 무능력함이 되는 것이 아니라

건드릴수 없을 정도로 권력이 된다는 것이

회칠한 무덤과 같습니다.

그것도 자기 스스로가 그렇게 권력화 하니 말입니다.

 

부자가 진짜 부자인지를 알려면 쫄딱 망해 보면 안다고 했습니다.

많이 사랑받는자가 모든 것을 잃어버려도 상관이 없는 그런자가 사랑받는자입니다.

의인도 진짜 의인인지 알려면 죽여보면 압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다시 살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스라엘이라는 특이성은 잃어버림에 있다고 했습니다. 즉 처음사랑입니다. 무조건적인

 

그렇다면 이스라엘인지 아닌지를 알려면 잃어버림을 통해서 알수 있습니다.

되찾는 분이 나타나는지를 통해서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단 복음을 이해하는 자는 없다고 단정하고

기대할 필요가 없다고 여기시고

과연 그 내용이 맞는지를 파악해야 합니다.

 

즉 끝까지 의심해 봐야 한다는 말입니다.

 

워낙 귀에 솔깃한 소리를 많이들 가지고와서

속이기 때문입니다.

그것만 공부하는 것 같습니다.

아니 그것 뿐입니다.

 

속이 없기 때문에 겉 껍데기가 화려할 뿐입니다.

 

안 그러면 교회 운영이 안된다고 여기는 자들이니

일단은 믿음이 없는 자들이다고 보시면 됩니다.

 

저도 복음을 제대로 아는 것 하나 없이

트릭만 여지껏 배웠구나 하는 생각 뿐입니다.

 

수 많은 교회와 목사들과 교인들을 대하면서

그들이 말하는 복음의 내용을 들어보면

결국 인간 없이는 예수님도 별수 없는 인물이다는 느낌 뿐이다 라는 겁니다.

성화론은 특히 더하죠.

 

예수님은 그저 인간이 떠먹여주는 죽만 받아먹기만 하면 되는

손발 짤린 우상조각과 같은 느낌을 어떤 교회도 예외없이 느끼면서

도리어 출애굽 출예루살렘 출교회 탈출해야할 입장일 뿐입니다.

탈출해 봐야 맨 그 자리일 뿐이지만 말입니다.

 

그런 환경에서 저도 예외가 될 수 없다 라는 것을

철저하게 갇혀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곤고함 뿐이다는 거죠.

 

이와 연관되게 오늘 본문은 가룟유다가 예수님을 파는 장면입니다.

검과 몽치 곧 망치를 들고 예수님을 때려잡기 위해서

먼저 이 사람이 예수다 라는 싸인으로

가룟유다는 예수님에게 입맞춤을 인사치레로 합니다.

 

이 사람을 잡아 가라 라는 싸인인 거죠.

 

예수님은 유다야 너가 인자를 입맞춤으로 팔려고 하느냐 라고 하십니다.

 

(22:48, 공동) 예수께서는 "유다야, 입을 맞추어 사람의 아들을 잡아 넘기려느냐?" 하고 말씀하셨다.

(22:49, 공동) 예수와 함께 있던 제자들은 일이 어떻게 벌어질 것인가를 알고 "주님, 저희가 칼로 쳐버릴까요?" 하고는

 

제자들은 즉각적인 반응으로 예수님을 지키기 위해서 칼이라는 무기로 대응을 합니다.

 

분위기가 심각해 지고 상황이 극박한 긴장감 속에서

까딱 예민해진 상태이다 보니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인 대제사장의 종의 오른쪽 귀를 짤라버린 겁니다.

 

(18:10, 개역) 이에 시몬 베드로가 검을 가졌는데 이것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서 오른편 귀를 베어버리니 그 종의 이름은 말고라

그 사람이 이름이 말고인 것을 요한복음에서는 나타내고 있습니다.

 

성경말씀이 이해가 안되는 점이 바로 이런 부분입니다.

 

베드로는 역시나 죽는데 까지 따라가겠다는 것처럼

예수님을 잡으러 온 무리에 대해서 적극적인 대항을 합니다.

그러다 보니 검을 꺼낸 겁니다.

 

겉옷까지 팔아서 검을 사라고 했듯이

검이 있는 것을 이런 데에 활용하는 겁니다.

자신이 어떻게 되든 말든

예수님을 사수하겠다는 마음 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런 베드로의 마음을 안 받아줍니다.

 

받아주면 안되는 겁니다.

 

이런 것이 어렵다는 이유입니다.

 

만약에 받아주면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주시고자 하는 초과잉의 770번의 용서가 무의미해지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오신 목적

곧 이 땅에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이

바로 피 흘리심으로써 죄 사하고자 함인데

그 피 흘리심이 무효화 되는 것을 막고자 하시는 겁니다.

 

그렇기 위해서는 베드로는 자신이 어떻게 되든말든 예수님을 사수하겠다는 마음을

예수님은 그런 베드로의 마음을 바꾸어 버려야 하는 겁니다.

 

오히려 나 몰라라 하고 냅따 도망치는 베드로로 만들어야 한다는 겁니다.

 

예수님이 죽든 말든 나만 살고 보자 라고

도망치는 그런 베드로 만들기가 예수님이 하실 일이요

예수님의 믿음이다는 겁니다.

 

역설적이지 않습니까?

 

모든 교회 모든 목사들은 정반대로 가르쳐야 하지 않습니까?

심지어 가정의 가정교육도 정반대입니다.

희생을 강요해서 끝까지 지켜야 할 것을 지킬수 있는 책임있는 자로 만들고자 함이지

무책임하게 냅따 도망치는 자로 만들고 싶어 하지는 않습니다.

모든 교육은 정반대입니다.

외세의 침략에 국가는 나라를 지키라고 외치지

나라를 버리고 냅따 도망치세요 라고 하지는 않는다는 겁니다.

 

분명 지난 시간에 시험에 들지 않게 기도하라 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3초도 안 지나서 사건이 빵 터지니까

시험에 들지 않도록 기도할 틈 간격도 없이 바로 바로 시험에 훅 빠져서

낭떠러지로 훅 한방에 떨어지는 겁니다.

이런 추락이 긴장케 만드는 겁니다. 불안케 만드는 겁니다.

 

물 위를 걸은지 몇걸음도 되지 않아

바로 훅 한 방에 빠져버리니까

그 추락의 강도가 시험에 들지 않도록 기도하라 라는 것보다 더 크게 작용하여서

변별력을 가지게 되는 겁니다. (칸트의 강도이론)

 

이런 긴박한 상황으로 만드시는 이유가 뭘까요?

 

인간이 지금 하나님을 칼과 망치로 도둑 잡듯이 잡고 있다는

이 말도 안되는 일이 벌어집니다.

(성경말씀만 비정상적인 내용을 보여주는게 아니라

그에 대응하는 인간들의 모습 또한 만만치 않게 대부분 전체가 비정상적임이

오히려 더 잘 드러납니다. 복음이 증거되는 곳에서는 특히 더 합니다.

멀쩡하던 인간들이 이 말도 안되는 짖을 하는데 있어서 거의 미친 듯이 발악합니다.)

 

그런데 그것과 만만치 않게 그런 상황에

 

하나님을 사수 하고자 하나님이 안 잡히도록

칼로서 저들 중의 한 사람의 귀를 짤라내는

그런 대항을 하고 있다는 것 조차도

말도 안되는 일이다 라는 겁니다.

(~~~ 인간이 하나님을 사수해? 뭐 인간이 복음을 사수해? 복음이나 훼방하지나 말지!!

소는 누가 키워???? 모든 종교 특히 개신교의 각 파들이 다 나름대로 좋은 문자로 사람들을 속입니다. 자신들이 하나님과 예수님과 복음을 진정으로 사수하는 정통성이 있다고 말입니다.

그것이 말도 안되는 겁니다.)

 

자 이런 점에서 어려운 겁니다.

일단 인간의 모든 행동은 죄아래에서 나오는 죄의 성향입니다.

그러니 꽁꽁꽁 묵여있는 입장에서

뭔가가 튀어나온 행동이다면

그것이 의로움인줄 착각한다는 점입니다.

 

더 어려운 것은

하나님이 인간이 되니까 이런 일들이 벌어지는 겁니다.

 

참 어려운 말이지요

하나님이 인간이 되니까 말입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의 영광 곧 하늘 보좌를 버리지 않고

그 자리 그대로 앉아 있으면 이런 일들은 벌어지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런데 하늘 영광 다 버리고 이 땅에 내려와 인간이 되셨다.

그것도 가장 비천한 제일 밑바닥의 밑바닥인 죄인이 되셨다?

 

이렇게 된다면 인간은 다 속을 수밖에 없습니다.

속는다는 표현이 매우 거슬리고 기분나쁘겠죠

맞습니다. 속이시는 하나님이 되어버리면

인간은 도리어 자신들의 속임수가 정당화가 되는 겁니다.

하나님도 속이는데 나는 왜 속이느냐 라고 말입니다.

즉 그 정도로 알 수 없게 되는

인간 쪽에서의 다가옴이 다 차단되는 방식이 되는 겁니다.

 

그야말로 하나님의 추락입니다. 이것이 변별력 차이입니다.

 

인간의 하나님(자아투사) 다 들통나게 되는 겁니다.

 

마치 타국에 멀리 떠난 밭주인이 종을 보내니까 농부들이 죽이니까

아들을 보내면 그러지 않겠지 하고 보내니

오히려 아들을 죽이면 그 기업이 자신들의 차지가 되니

오히려 더 더 더 적극적으로 죽이는 꼴이 된다는 겁니다.

 

(21:33, 개역) 다시 한 비유를 들으라 한 집 주인이 포도원을 만들고 산울로 두르고 거기 즙 짜는 구유를 파고 망대를 짓고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갔더니

 

낮아지시고 추락하게 되고 잃어버리게 되니까

더욱더 또렷한 변별력을 갖추게 되더라 라는 겁니다.

 

누가 미련하고 누가 더 지혜롭습니까?

 

하나님의 미련함이 인간의 지혜 보다 더 뛰어난 것 맡긴 맞나요?

 

(고전 1:25, 개역)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우리 눈에는 절대 그렇게 보이지 않습니다.

 

저도 이런 비슷한 상황이 닥치다 보니 역시나 별수 없었습니다.

말고의 귀를 짜르듯이 짤라서 예수님을 사수한 마냥

복음을 사수했다고 여겼는데

오히려 복음을 훼손하는 자가 그들이 아니라 저 자신이였다는 겁니다.

 

아뿔사 ~~~~~~~~~

 

복음은 인간의 손에서 사수 되지 않습니다.

개혁주의이니 복음주의이니 하면서 복음을 사수하겠다는 것 자체가

다 거짓이다는 겁니다.

 

적그리스도가 남이 아닌 우리들이 좋아했던 교회환경들이였습니다. 종교환경

 

? 예수님이 말고의 귀를 붙이심으로써

복음 스스로가 인간의 손에 사수 될 수 없도록

 

저들의 때요 어두움의 권세를 허용하시느냐 말입니다.

 

남도 아닌 예수님 본인이 말입니다.

 

그러니 복음을 사수하겠다는 둥 예수님을 사수하겠다는 둥 하는 행동들이 무용지물이 되도록

 

예수님께서 알아서 잡혀 가더라 말이죠.

 

당연히 이렇게 되면 제자들은 뿔뿔히 흩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자 이런 상황이면 이게 뭐가 됩니까?

죽도 밥도 안되는 하나 마나 한

아무 의미 없는

참 의미 없다 땡 탈락 마이너스 백점

 

유후 ~~~

 

이게 뭐냐 말이죠. ~~~~~~~~~~~~

 

시험에 들지 않도록 기도하라 라고 말이 떨어지자 마자

벌어진 상황입니다.

 

기도하라는 말인지

기도 하지 말라는 말인지?

 

0.3초도 안 지나서 시험이 닥쳐 오니

다들 실패하는 겁니다.

 

추락합니다.

그 긴장으로 인해서

강도(자극)가 보통을 넘어서는 초과잉적 초월적으로 되는 겁니다.

 

냅따 도망칠 수밖에 없는 각기 제 길로 가는 양 같이 될 수 밖에 없는 겁니다.

 

이렇게 교회는 해체 되는 겁니다.

 

인간의 그 어떤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해도 그 해체 됨을 막을 길이 없습니다.

 

오직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써 약속하신 성령으로만 된다는 것을 맡길 수밖에 없는

과연 맡길수가 있겠냐 말이죠.

 

그러니 이스라엘의 특이성은 잃어버림을 통해서

되찾는 자의 개입이 있냐 없냐 라는 여부

곧 처음사랑에 달려있다 라는 겁니다.

 

결국 교회라는 의미를 얼마나 우리가 얕잡아 봤다는 겁니다.

동일하게 예수님을 우리는 그 정도로 무시했던 겁니다.

 

인간의 손에 의해 보호함을 받는 예수님이 아니다 라는 겁니다.

오히려 정반대로 저들의 어두움때에 악한 권세로부터 보호하시는 보호자 이시다는 겁니다.

 

그 보호하심의 방법이

바로 시험에 빠지도록

실패케 하도록

말고의 귀를 짤랐는 것을 도리어 붙이도록 하시는 겁니다.

즉 베드로의 장담이 실패케 되어

예수님을 세 번 부인케 만드시는 것이

예수님이 베드로를 다만 악에서 구하시는 보호자 이시다 라는 겁니다.

베드로로부터 보호 받는 분이 아니라 말이죠.

 

이것이 사랑입니다.

 

이 사랑을 나타내시고자

이 일방적인 용서를 말씀하시고자

차이로 가룟유다가 동원이 되는 겁니다.

 

지금 사건진행이 가룟유다의 파는 장면이 먼저 나오고

뒤에 베드로의 오바액션이 나오는 식으로 사건을 볼게 아니라

거꾸로 베드로의 편애 때문에 가룟유다의 편파적인 미움이 배경으로 깔린다고 봅시다.

 

자 이렇게 되면

무조건 적인 동생 야곱을 사랑하신다는 것을 말씀하시고자

형 에서는 무조건적인 미움에 놓이게 되는 겁니다.

 

형 에서는 동생 야곱을 잘못 만난 겁니다.

그것도 모르고 그저 시간적인 동생으로만 취급했다는 거죠.

자신의 목숨이 걸려있는 묵시적인 자로 못 보는 겁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이스라엘이라는 묵시성을 이스라엘 스스로 조차도 못보는 겁니다.

괜히 유대인으로 태어난 겁니다.

그러니 잃어버린 유대인을 찾는 예수님이라는 걸림돌에 툭 하고 걸려넘어지는 겁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잘 못 만난 겁니다.

잘못된 만남입니다.

자신들의 잃어버린 처음사랑 곧 잃어버림을 예수님이 보여주시는데 있어서

유대인들이 말려드는 겁니다.

 

이 특이성의 변별성을 인간이 괜히 손을 댄 겁니다. 잘못 손 댄 거죠.

 

그럼 이 부분 이렇게 어려운 부분을 어떻게 이해를 해야 할까요?

 

저는 갑자기 이런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글을 쭈욱 쓰다 보니

 

구약의 아브라함이 아내 사래를 애굽족장에서 파는 장면이 생각났습니다.

 

가룟유다만 예수님을 팔았다고 생각하지 맙시다.

 

예수님을 파는 자는 12제자들 또한 동일합니다.

또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님 스스로 버린다고 하신다는 겁니다.

 

(10:14, 개역)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10:15, 개역)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10:16, 개역) 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 터이니 저희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

(10:17, 개역)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 내가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림이라

(10:18, 개역)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하시니라

(10:19, 개역) 이 말씀을 인하여 유대인 중에 다시 분쟁이 일어나니

(10:20, 개역) 그 중에 많은 사람이 말하되 저가 귀신 들려 미쳤거늘 어찌하여 그 말을 듣느냐 하며

 

즉 누가 예수님의 목숨을 빼앗아서 빼앗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버리는 모습이다는 겁니다.

실패로 돌아가시고자 하시는 모습이다는 겁니다.

 

예수님이 팔려가는 그 순간에

다른 제자들은 철저하게 무능 속에 있어서

그 팔려감에 그 어떤 대책을 할 수가 없는 입장입니다.

 

물론 베드로는 저항해서 말고의 귀를 짤랐지만

그것 조차도 무용지물로 만들어 버리는 귀를 도리어 붙여버렸기 때문에

하나 마나 한 짖이 되고 말았습니다.

베드로 너도 무능함에 그냥 있어라 나서지 말고 라는 식이 되어 버린 겁니다.

 

자 이것이 단절입니다.

도리어 예수님을 팔아 먹는 입장이 우리의 입장입니다.

 

각기 제 길로 도망쳐서

나는 저 사람 모른다고 해야 할 입장 뿐인

예수님을 지키기는커녕

남들은 다 버려도 나는 절대로 안 버린다 라는 장담이 무용지물이 되게

죽는데까지 끝까지 따라가겠다 라는

 

그 어떤 연합 합치 일치를 다 차단하는 그 단절을

예수님은 끝까지 그 어떤 연결 고리가 없도록 짤라버리는 겁니다.

 

그래야 예수님쪽에서 다가오심만이 의미가 있는 겁니다.

즉 예수님의 770번의 용서만이 의미가 되도록 말입니다.

 

그래서 [이것까지 참으라] 라고 하신 겁니다.

즉 참으라는 말입니까? 도저히 너는 참지 못할걸 이라는 말씀입니까?

너는 못 참는다는 말입니다.

 

즉 또 하나 마나 한 소리인 겁니다.

못 참을걸 아시면서 하시는 소리입니다.

 

이런 아무 의미 없는

하나 마나 한 소리를 해야만 하시는 이유는

바로 영의 부르짖음이지 사람의 말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성경말씀은 사람의 말이 아니기 때문에

하나 마나 한 소리 밖에 없습니다.

이 아무 것도 아닌 것에 예수님은 충성하시는 겁니다.

 

시험에 들지 않도록 기도하라 라고 하셔놓고

기도할 틈도 주지 않고 바로 쳐들어 오도록 허용하심으로써 시험에 들게 하십니다.

 

예수님만 생각하도록 유도해 놓고 그런 예수님을 지키고파 말고의 귀를 짤라버렸건만

그 귀를 도로 붙여버림으로써

예수님의 팔림이 기정사실화 되도록

너희들도 그 팔림에 그 어떤 대항도 못하도록 무능케 만들어 버린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것까지 참으라] 라는 말씀은 인간은 못 참는다는 겁니다.

결국 [참는 분은 딴 분이다]는 것입니다.

 

뭐야 내 보고 하라는 말이야 하지 말라는 말이야

하나 마나 한 소리를 하고

의미 없는 진리만 외치고 있으니

도통 인간은 터치(공유나 소통, 연합)이 되지를 않는 것만 확인되더라 말이죠.

안해보고 그것을 아닌게 아니라

만져보니 만지자 말자 바로 손 떼도록 전기가 통하도록 감전시켜버린다는 겁니다.

 

그러니 그 단절성은 더 극심하게 그 간격이 벌어지는 겁니다.

 

간극은 곤고함만을 느끼도록 합니다. 무능함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라는 그 절망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라는 겁니다.

소외요 배제입니다.

 

이것이 주님이 우리를 죄인되게 만드시는 작업입니다.

베드로를 죄인되게

 

남들은 다 버려도 나는 절대로 버리지 않겠다 !!

죽는데 까지라도 따라가겠다 !!

라는 것을 실패케 만드는

 

베드로를 의인되지 못하게 하시는 작업이다는 겁니다.

 

오로자 여자의 후손만이 [저들의 때]에 저들의 [어두움 권세] 속에 들어가서

그 사망의 권세를 깨드리는데 있어서

 

베드로는 그 어떤 보탬이 없도록 단절케 하시는 겁니다.

 

이것이 창조입니다. 은혜입니다.

 

은혜란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마지막날 다 이룬 것을 누리기만 하는 안식을 누리는 겁니다.

그래서 마지막날 창조하신 겁니다.

 

아브라함은 아내 사래를 빼앗기는데 있어서

그 어떤 능력으로도 지켜낼수가 없는 겁니다.

 

상대가 어떤 자들이다는 것을 아브라함은 잘 아니까 말입니다.

자기 목숨만을 사수하고자 냅따 도망칩니다.

아내는 졸지에 팔려가는 거죠 뭐

 

오히려 대따 선물만 받고 도망칠 뿐입니다.

 

사라 혼자서 저들 애굽족속의 여인네들의 태를 다 닫아버리는

공포로 작용케 하는 겁니다.

 

여자 홀로 말입니다.

 

애굽 족속 보다 더 나은 초과잉의 공포가 바로 사라 였습니다.

 

자유하는 여자, 만민의 어머니가 말입니다.

 

남자의 보탬이 일체 없이 말입니다.

 

전쟁의 본격적인 양상은 이렇게 시작하는 겁니다.

일부러 할례를 다 해놓고서 시작하는 겁니다.

단 한명이라도 할례하지 않으면 지는 전쟁이고

할례를 다 하면 힘과 무기와 능력과 전혀 무관하게

이미 승리한 전쟁이 되는 겁니다.

 

이게 이해가 됩니까?

아니 이해는커녕 말이나 되느냐 하는 소리냐 말이죠.

인간의 이해와 무관한 것이 성경전체의 말씀입니다.

 

구약때 말입니다.

 

이것이 신약에서는 지금 예수님의 십자가로 돌진하는 모습입니다.

 

흉내내지 맙시다. 구약도 지금의 현대전에는 통하지 않는 것이고

신약의 십자가도 지금의 현대전쟁에서는 안통하는 겁니다.

 

신약의 십자가 전쟁은 아니고

구약의 할례전쟁과 비슷한 그런 내용을 현대전에서 들어본적이 있습니다.

물론 개그 웃기는 코메디 이야기입니다.

 

방위가 있었던 시절에

방위가 일부러 포로로 잡혀 들어가서

저들의 식량을 축내고자

그래서 전쟁에서 승리하기에

방위를 양성한다고

 

그런 이야기가 유행했는데

 

실행 불가의 이야기인 거죠.

 

예수님이 지금 예수님 자신을 팔아버리는 가룟유다보다

예수님을 보호하고자 칼을 들고 말고의 오른편 귀를 짤라버리는

베드로를 건지시는데 정신이 없습니다.

어떻게 건지십니까?

베드로가 짤라버린 귀를 붙임으로써 베드로의 행동을 무의미 하게 삭제 시키고

방위처엄 적들의 어두움 권세 속에 들어가서

어두움 보다 더 어두움

그것도 저주냐?

저주 보다 더 저주인 십자가를 다 이루심으로써

저들의 어두움 권세 곧 식량을 다 축내 버림으로써 영적인 마귀와의 전쟁에서 승리하시는 겁니다.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의 연고로 인해 저들은 죽음과 생명을 체험하는 겁니다.

아브라함은 저들을 보고 공포로 두려움으로 떨었지만

정작 저들은 아내 사라의 연고로 인해 두려움과 공포에 떨었던 겁니다.

 

 

(12:10, 개역) 그 땅에 기근이 있으므로 아브람이 애굽에 우거하려 하여 그리로 내려갔으니 이는 그 땅에 기근이 심하였음이라

(12:11, 개역) 그가 애굽에 가까이 이를 때에 그 아내 사래더러 말하되 나 알기에 그대는 아리따운 여인이라

(12:12, 개역) 애굽 사람이 그대를 볼 때에 이르기를 이는 그의 아내라 하고 나는 죽이고 그대는 살리리니

(12:13, 개역) 원컨대 그대는 나의 누이라 하라 그리하면 내가 그대로 인하여 안전하고 내 목숨이 그대로 인하여 보존하겠노라 하니라

(12:14, 개역) 아브람이 애굽에 이르렀을 때에 애굽 사람들이 그 여인의 심히 아리따움을 보았고

(12:15, 개역) 바로의 대신들도 그를 보고 바로 앞에 칭찬하므로 그 여인을 바로의 궁으로 취하여 들인지라

(12:16, 개역) 이에 바로가 그를 인하여 아브람을 후대하므로 아브람이 양과 소와 노비와 암수 나귀와 약대를 얻었더라

(12:17, 개역) 여호와께서 아브람의 아내 사래의 연고로 바로와 그 집에 큰 재앙을 내리신지라

(12:18, 개역) 바로가 아브람을 불러서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이렇게 대접하였느냐 네가 어찌하여 그를 네 아내라고 내게 고하지 아니하였느냐

(12:19, 개역) 네가 어찌 그를 누이라 하여 나로 그를 취하여 아내를 삼게 하였느냐 네 아내가 여기 있으니 이제 데려가라 하고

(12:20, 개역) 바로가 사람들에게 그의 일을 명하매 그들이 그 아내와 그 모든 소유를 보내었더라

 

(20:1, 개역) 아브라함이 거기서 남방으로 이사하여 가데스와 술 사이 그랄에 우거하며

(20:2, 개역) 그 아내 사라를 자기 누이라 하였으므로 그랄 왕 아비멜렉이 보내어 사라를 취하였더니

(20:3, 개역) 그 밤에 하나님이 아비멜렉에게 현몽하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취한 이 여인을 인하여 네가 죽으리니 그가 남의 아내임이니라

(20:4, 개역) 아비멜렉이 그 여인을 가까이 아니한 고로 그가 대답하되 주여 주께서 의로운 백성도 멸하시나이까

(20:5, 개역) 그가 나더러 이는 내 누이라고 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 여인도 그는 내 오라비라 하였사오니 나는 온전한 마음과 깨끗한 손으로 이렇게 하였나이다

(20:6, 개역) 하나님이 꿈에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온전한 마음으로 이렇게 한 줄을 나도 알았으므로 너를 막아 내게 범죄하지 않게 하였나니 여인에게 가까이 못하게 함이 이 까닭이니라

(20:7, 개역) 이제 그 사람의 아내를 돌려 보내라 그는 선지자라 그가 너를 위하여 기도하리니 네가 살려니와 네가 돌려 보내지 않으면 너와 네게 속한 자가 다 정녕 죽을 줄 알지니라

(20:8, 개역) 아비멜렉이 그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모든 신복을 불러 그 일을 다 말하여 들리매 그 사람들이 심히 두려워하였더라

(20:9, 개역)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을 불러서 그에게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리 하느냐 내가 무슨 죄를 네게 범하였관대 네가 나와 내 나라로 큰 죄에 빠질 뻔하게 하였느냐 네가 합당치 않은 일을 내게 행하였도다 하고

(20:10, 개역) 아비멜렉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네가 무슨 의견으로 이렇게 하였느냐

(20:11, 개역) 아브라함이 가로되 이곳에서는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으니 내 아내를 인하여 사람이 나를 죽일까 생각하였음이요

(20:12, 개역) 또 그는 실로 나의 이복 누이로서 내 처가 되었음이니라

(20:13, 개역) 하나님이 나로 내 아비 집을 떠나 두루 다니게 하실 때에 내가 아내에게 말하기를 이후로 우리의 가는 곳마다 그대는 나를 그대의 오라비라 하라 이것이 그대가 내게 베풀 은혜라 하였었노라

(20:14, 개역) 아비멜렉이 양과 소와 노비를 취하여 아브라함에게 주고 그 아내 사라도 그에게 돌려보내고

(20:15, 개역)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내 땅이 네 앞에 있으니 너 보기에 좋은 대로 거하라 하고

(20:16, 개역) 사라에게 이르되 내가 은 천개를 네 오라비에게 주어서 그것으로 너와 함께 한 여러 사람 앞에서 네 수치를 풀게 하였노니 네 일이 다 선히 해결되었느니라

(20:17, 개역)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기도하매 하나님이 아비멜렉과 그 아내와 여종을 치료하사 생산케 하셨으니

(20:18, 개역) 여호와께서 이왕에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의 연고로 아비멜렉의 집 모든 태를 닫히셨음이더라

 

베드로는 예수님을 팔아버리는 이 환경을 이겨 낼수 없는 공포를 느낍니다.

그런데 팔려가시는 예수님이 저들의 식량(곧 생명)을 다 축냄으로써 저들에게 도리어 공포로

걸림돌로 자리잡은 것입니다.

 

죽음을 죽음으로 이기시는 겁니다.

공포를 공포로 이기시는 겁니다.

 

베드로는 이 십자가의 의미에 동참해야하지

자신의 행함이 성공하면 안되기에

예수님은 베드로가 한 행동 말고의 귀를 짤라낸 것을 도로 붙여서

자신의 의미 있던 행동을 삭제케 하십니다.

 

그래서 이것까지 참으라 라고 하시는 겁니다.

저희의 때요 어두움의 권세가 나타나도록 허용해 보자 라는 겁니다.

얼마나 센지? 얼마나 강한지?

인간은 못 이기지만

베드로는 실패 할 수 밖에 없지만

예수님은 넉넉히 이기신다는 겁니다.

 

이 십자가의 피의 승리가 이미 있기에

우리는 실패해도 상관 없는

삭제 당해도 상관 없는

 

주의 사랑의 넉넉하심에

그 끊어지지 않음을 체험하는 일만 누리도록 되어 있는 겁니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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