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험에 들지 않기를 기도하라 (22:35-46)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22:35, 개역)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를 전대와 주머니와 신도 없이 보내었을 때에 부족한 것이 있더냐 가로되 없었나이다

(22:36, 개역) 이르시되 이제는 전대 있는 자는 가질 것이요 주머니도 그리하고 검 없는 자는 겉옷을 팔아 살지어다

(22:37, 개역)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기록된 바 저는 불법자의 동류로 여김을 받았다 한 말이 내게 이루어져야 하리니 내게 관한 일이 이루어 감이니라

(22:38, 개역) 저희가 여짜오되 주여 보소서 여기 검 둘이 있나이다 대답하시되 족하다 하시니라

(22:39, 개역) 예수께서 나가사 습관을 좇아 감람 산에 가시매 제자들도 좇았더니

(22:40, 개역) 그곳에 이르러 저희에게 이르시되 시험에 들지 않기를 기도하라 하시고

(22:41, 개역) 저희를 떠나 돌 던질 만큼 가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여

(22:42, 개역) 가라사대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어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니

(22:43, 개역) 사자가 하늘로부터 예수께 나타나 힘을 돕더라

(22:44, 개역)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더라

(22:45, 개역) 기도 후에 일어나 제자들에게 가서 슬픔을 인하여 잠든 것을 보시고

(22:46, 개역) 이르시되 어찌하여 자느냐 시험에 들지 않게 일어나 기도하라 하시니라

 

 

진리는 의미가 없기 때문에 진리입니다.

만약 진리가 의미가 있으면 그것은 진리가 아닙니다.

 

아주 역설적인 표현이지요

 

즉 의미란 나에게 유익과 가치가 된다는 겁니다.

 

의미 있다 없다의 기준이 항상 [] 를 기준으로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진리는 나의 유익과 나의 가치에는 의미가 없다 라는 겁니다.

자기를 위한 진리란 진리가 아니라 우상입니다.

 

자기를 위한 예수님, 하나님, 십자가도 우상인 겁니다.

 

자 그런 의미에서

시험에 든다 라는 말은 무슨 말일까요?

 

시험은 나에게 의미 없다 라는 것이 인간의 생각입니다.

 

시험은 테스트 또는 유혹이라고 볼 수 있는데

 

그러나 오늘 본문에는

테스트 안 당하도록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기도하라 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이것이 말이 안됩니다.

우와 제가 지금 성경에 정면 도전하고 있지 않나요?

 

성경은 하나 마나 한 소리만 골라 합니다.

 

위에서 전제를 깔고 간 것이 진리란 의미가 없기에 진리라고 했습니다.

의미가 있으면 진리가 아니다 라고 했습니다.

 

시험도 마찬가지입니다. 시험이 의미가 없습니다.

의미가 있으면 시험이 아닌 거죠.

 

왜 나 라는 것에 기준을 삼아서 보면 그렇다 라는 겁니다.

 

즉 하나 마나 한 소리. 아무 의미 없는 소리가 진리라는 겁니다.

 

유혹에 시험에 빠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 기도하라 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말이 안되는 소리입니다.

 

즉 하나 마나 한 소리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 마나 한 소리를 성경말씀은 외쳐야 합니다.

 

의미가 없기 때문에 말입니다.

 

이런 아무것도 아닌 것을 우리는 원해야 합니다.

성령을 원해야 합니다.

성령은 아무것도 아닌 하나 마나 한 의미 없는 진리의 영이기 때문입니다.

 

왜 말이 안된다고 했냐 하면

왜 하나 마나 한 소리 라고 했냐 하면

 

유혹과 시험을 사방에 깔아 놓았기 때문에

유혹에 안 빠진다?

시험에 들지 않는다? 라는 것이 말이 안된다는 겁니다.

 

그것도 누가 깔아 놓았는가? 마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 시험과 유혹을 양 사방에 깔아놓아서

우겨삼을 당할 수 밖에 없도록 하신 겁니다.

 

즉 갇혔다 라는 겁니다.

인간은 갇혔습니다.

 

시험에 갇혀 버렸고

유혹에 갇혀 버렸고

마귀에게 갇혀 버렸다 라는 겁니다.

 

이런 상황이 전제로 깔린 상태인데?

~~~~ 시험에 들지 않도록,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하라?????

 

말이 안되지요?

 

이렇게 말이 안되는, 하나 마나 한 소리, 아무 것도 아닌. 의미 없는

 

바로 이 상태가 단절의 의미인 겁니다.

 

단절 차단 배제 소외

 

그렇다면 답은 간단합니다.

시험에 빠지십시오

유혹에 빠지십시오

 

즉 시험에 안 드는 것 실패하십시오

유록에 안 빠지는 것 실패 하십시오

 

실패로 돌아갑시다. 성령으로 돌아갑시다.

 

성령과 무관한 자는 시험이 의미가 없습니다.

유혹이 의미가 없습니다.

갇혀 있다 라고 전제를 까는 복음 희년 기쁜소식이 의미가 없습니다.

 

왜 이런 소리를 하는가 하면

갇혔다 라는 단절에서 인간은 자기자신에게서 그 어떤 해결점이 없다 라는 겁니다.

 

그럼 예수님의 입장에서는 시험과 유혹은 오로지 예수님 자신만이 넉넉히 이긴다는 겁니다.

즉 다른 사람은 그 어떤 입장에서도 시험과 유혹을 이길수 없다 라는 차이성

 

그 간극을 말하고 있는 겁니다.

 

예수님 자신 만이 갇혀있지 않은 분이다 라는 겁니다.

 

예수님과 함께 할 때는 아무것도 챙길 것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과 떨어져 있게 되는 상황이 되면

전대 곧 지갑을 가지고

검 칼을 가지라고 합니다.

 

그 차이성의 갭이 그 정도로 크다 라는 겁니다.

함께 할 때와 떨어져 단절 되었을때의 차이 말입니다.

 

나를 내가 챙겨야 할 입장일 정도로 말입니다.

그러니 철저하게 갇힌 거죠.

 

그런데 이해가 안되는 것이

제자들을 데리고 기도하러 가셨는데

 

정작 제자들이 갇혀있다는 것을 전혀 의식하지 않는 자들 같고

 

오로지 예수님만이 유혹에 빠지지 않을려고 애쓰고

시험에 들지 않고자 심지어 천사까지 동원이 되어서 그 애씀에 도움을 주더라 하는 겁니다.

 

이상하지 않나요?

 

갇혀 있지 않는 분이 오히려 더 철저하게 갇혀있음을 직시하고

긴박하게 지나칠정도로 예민하게 갇혔다 라는 것을 과잉되게 표현하고

 

정작 진짜 갇혀있는 제자들은 전혀 갇혀있는 것 자체도 모를 정도로

자유롭게 잠을 자고 있는 모습을 보인다는 겁니다.

 

자 그렇다면

 

갇혀있다

시험든다

유혹에 빠진다

 

라는 의미는

 

인간에게서는 의미가 없는 소리입니다.

 

오로지 그것을 의식하는 분은 예수님 뿐이며

예수님만 그 긴박성을 직시할 뿐입니다.

 

이것은 지난시간에 살펴본 내용을 통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믿음이 떨어지지 않도록 기도했다 라고 합니다.

 

아 우리는 베드로가 믿음이 부족해서 믿음을 배터리 충전하듯이 기도하셨구나

그래 베드로 실수 했었지 세 번씩이나 부인했으니까 말이야 라고 생각합니다.

 

아닙니다. 예수님은 배터리 충전시킬려고 믿음을 부어주시는게 아닙니다.

베드로가 아무리 믿음이 있어도

도저히 볼 수 없는 존재가 바로 마귀입니다.

 

그 마귀를 보는 유일한 분이 예수님입니다.

 

그리고 그 마귀가 활동할 수 있도록 허용하신 분도 예수님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만이 마귀가 어떤 일을 한다는 것을 아신다는 겁니다.

 

시험이 시험들지 않으면 시험이 아니지요

유혹이 빠져들지 않을 것 같으면 유혹이 아닙니다.

유혹은 못 이긴다는 의미에서 유혹입니다.

 

즉 갇혔다 라는 의미처럼

갇히도록

시험에 들도록

유혹에 빠지도록

양사방으로 우겨삼 당하도록 한다는 겁니다.

 

그럼 그 원인이 되는 마귀를 제거하시는게 아니라

오히려 마귀를 아주 아주 적극적으로 활용하신다는 겁니다.

주의 주 되심을 위해서 말입니다.

 

갇혔다 라는 것을 해결할 수 있는 분은 예수님 자신 뿐이다 라는 것을 말입니다.

 

포로된 자에게만 자유케 하시는 희년이 복음이 의미가 있듯이 말입니다.

 

그러니 나에게는 의미가 없는 진리입니다.

오로지 예수님 자신의 주의 주 되심만을 위한 진리 뿐이다는 겁니다.

 

베드로가 세 번 닭 울기 전에 예수님을 부인하는 것은

예수님의 주 의 주 되심을 위한 일이다는 겁니다.

 

그렇다고 베드로 개인이 예수님을 부인한 것이 정당화 된다는 것이 아닙니다.

또 그렇다고 베드로 개인이 예수님 부인한 것에 죄책감을 가져야 하고 부끄러워야 한다는 것도 아닙니다.

 

이 둘은 선악적입니다. 원인이 있어야 그런 결과가 왔다 라는 겁니다.

 

전혀 다른 사고방식 즉 아무것도 아닌. 하나 마나 한. 의미 없는 진리의 영인

성령의 사고방식이 있는데 이것이 바로 초과잉적 감사입니다.

원인 없는 결과로써의 감사 말입니다.

 

나 만 남았 나이다 라는 것은 선악의 한계성입니다.

마음은 원 이로데 육은 따라가지 못한다는 겁니다.

 

(7:15, 개역) 나의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원하는 이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그것을 함이라

(7:16, 개역)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내가 이로 율법의 선한 것을 시인하노니

(7:17, 개역) 이제는 이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7:18, 개역)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7:19, 개역)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

(7:20, 개역)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7:21, 개역)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7:22, 개역)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7:23, 개역)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7:24, 개역)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전혀 다른 사고방식은 이런 곤고함을 원인 없이 결과적으로 용서 받았다 라는 간극이 있는 사고방식이다는 겁니다.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예수 안에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 라는 겁니다.

 

이 간극을 매우거나 채울수 없습니다.

 

그냥 그 간극 그대로 지니고 갈 뿐입니다.

 

즉 나에게는 의미 없는 진리이다는 겁니다. 전혀 유익이 없다 라는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간극 그대로

예수님 자신에게서는 주의 주 되심 곧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이 아무것도 아닌, 의미 없는, 하나 마나 한 것이

의미가 있다 라는 겁니다. 오직 예수님에게만 말입니다.

 

갇혀 있다.

시험에 들었다

유혹에 빠졌다 라는 것은 예수님에게만 의미있다 라는 겁니다.

 

그렇다고 또 잔머리 굴려서 은혜를 더할려고 죄를 더 할 수는 없겠지요

 

이미 갇혔는데 뭘 또 새삼스럽게 갇힐려고 하느냐 말이죠

이미 막 살고 있는데 뭘 또 새삼스럽게 막살려고 할 필요가 없다 라는 겁니다.

 

자 유혹에 이미 빠졌고

시험에 이미 들어버렸습니다.

 

그것이 바로 베드로입니다.

 

그럼 이 시험에 들고

유혹에 빠진자를 어떻게 구하는가 라는 분이 누구인가 라는 점입니다.

 

예수님 자신이 자기사랑을 쟁취할려고

밤에 깡패를 일부러 깔아서

그 여인 신부 베드로를 깡패들로부터 건지시는 겁니다.

 

어떻게

 

기도 외에는 구하는 법이 없다 라는 겁니다.

 

즉 기도란

 

이미 갇혀있다 라는 것을 전제로 한다는 겁니다.

 

출애굽기에서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로운 왕들의 등장으로

학대가 심해지는 겁니다.

(요셉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은혜가 아닌 자력으로 국가를 다스릴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강함을 갖추고자 더더욱 학대가 심해지는 겁니다. 백성을 섬김이 아닌 힘으로 ...)

 

(1:8, 개역)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이 일어나서 애굽을 다스리더니

(1:9, 개역) 그가 그 신민에게 이르되 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이 우리보다 많고 강하도다

(1:10, 개역) 자 우리가 그들에게 대하여 지혜롭게 하자 두렵건대 그들이 더 많게 되면 전쟁이 일어날 때에 우리 대적과 합하여 우리와 싸우고 이 땅에서 갈까 하노라 하고

(1:11, 개역) 감독들을 그들 위에 세우고 그들에게 무거운 짐을 지워 괴롭게 하여 그들로 바로를 위하여 국고성 비돔과 라암셋을 건축하게 하니라

(1:12, 개역) 그러나 학대를 받을수록 더욱 번식하고 창성하니 애굽 사람이 이스라엘 자손을 인하여 근심하여

(1:13, 개역) 이스라엘 자손의 역사를 엄하게 하여

(1:14, 개역) 고역으로 그들의 생활을 괴롭게 하니 곧 흙 이기기와 벽돌 굽기와 농사의 여러가지 일이라 그 시키는 역사가 다 엄하였더라

 

여기에다 엎친데 덮친격으로 애굽왕 파라오왕을 강퍅케 하심으로써

부르짖지 않고서는 못 배기도록 하시는 겁니다.

 

자 강퍅케 하신 분이 여호와 하나님 이십니다.

즉 갇혔다 라는 것을 기정사실화 하시는 겁니다.

 

여기에 부르짖음이 자연발생합니다.

즉 강하면 쿠테타를 일으키든지

맞짱을 뜬다든지

지금 본문의 시대상황처럼 유대인들의 독립운동을 펼친다든지 할 것입니다.

 

그런데 단순히 하나 마나 한, 아무것도 아닌, 참 의미 없다 라는

부르짖기만 한다는 것은

제대로 갇혀버린

즉 무능한 최저의 무능 상태이다는 겁니다.

 

그저 할 수 있는 것은 기도 뿐이다는 겁니다.

아니 할 수 있어서가 아닌

그 어떤 것도 할 수 없다 라는 것이 기도 라는 부르짖음이다는 겁니다.

 

 

베드로야 사단이 밀까부듯이 초정밀조사 카톡조사까지 다 하여서

너는 빼도 박도 못하는 상황이 되었구나

너의 죄가 도저히 구원 받을 수 없는 상황이구나

그러나 나는 너를 넘기지 않도록 했단다.

마귀가 자꾸 소송을 거는데

나는 결제 도장을 안 찍었단다.

 

나는 너를 위해 기도했단다.

나는 너를 위해

하나 마나 한 짖 즉 기도를 했단다.

아무 의미 없는 짖 기도를 했단다.

 

이것이 우편에 앉은 분의 기능이다는 겁니다.

이 기능 때문에 우리는 유혹에 시험에 빠져들 수 밖에 없는 갇힌 상황인 겁니다.

 

그 갇혀있는 상황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

 

너희들은 자꾸 의미 있는 짖

누가 크냐?

남들은 다 버려도 나는 절대로 안 버릴겁니다?

죽는 곳 까지 따라가겠습니다 라고

나만 남았나이다.

7번 용서 했는데 몇 번 더 용서 할까요? 라고

 

자꾸 의미 있음을 추구하고 있는 겁니다. 원인 있음을 추구한다는 겁니다.

 

기도 자체가 [참 의미 없다] 라는 겁니다.

 

땡 탈락 마이너스 100

 

유후 ~~~~

 

진리란 나에게 전혀 의미가 없습니다.

의미 없는 것이 진리입니다.

 

기도란 의미 없습니다.

그 의미 없는 것에 예수님은 충성하신 겁니다.

무익한 종으로써

섬기는(의미 있어서 섬기는게 아니라, 누가 크냐 라는 크기 위해서 섬기는게 아니라)

크다 라는 것이 의미가 없다 라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 무능한(의미없음에 충성하시는)

섬기시는 모습이

 

예수님의 모습이다는 겁니다.

 

예수님이 베드로가 믿음이 떨어지지 않도록 기도하셨다 라는 겁니다.

 

무능해 지셨다 라는 겁니다.

 

하늘 영광 다 버리고 하나님의 저주인 십자가를 지실 필요가 없는데

그 의미 없는 십자가에 충성하신 겁니다.

 

(2:5, 개역)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2:6, 개역)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2:7, 개역)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2:8, 개역)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우리는 늘 시도때도 없이 시험에 듭니다.

늘 유혹에 빠집니다.

성공하고 싶고

자랑하고 싶고

승리하고 싶고

 

즉 사방으로 갇혀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런데 갇힌자를 빼내시는 기도가 있다 라는 겁니다.

주님께서 다른 세계가 있다고 나를 위해 기도하신다는 겁니다.

 

대신 부르짖고 있다는 겁니다.

 

주여 대식이가 갇혔습니다.

시험에 갇혔고

유혹에 빠졌습니다.

시험에 들지 않기는커녕 푹 시험에 들었고

유혹에 빠지지 않기는커녕 푹 유혹에 빠졌습니다.

 

갇혔으니 포로되었으니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주여 전쟁을 벌려 주옵소서

출애굽하듯이 탈출 시켜주옵소서

 

이 세상에서

이 땅에서 탈출 시켜주옵소서

이 육체의 장막에서 빼내어 주옵소서

 

십자가의 피 흘리심의 전쟁으로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라고 성령의 놀라운 탄식으로

마땅히 빌바를 알지 못하는 우리를 위해 기도하시는 겁니다.

 

기도는 전쟁 요청입니다. 브로큰 애로우

갇혔으니 이 전쟁 만이 유일한 기쁜소식입니다.

 

그가 전쟁을 벌리셨다는 겁니다.

 

(삼상 17:47, 개역) 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로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붙이시리라

 

왜 기도하라고 하실까요?

 

왜 부르짖도록 하시는 것일까요?

갇혔다 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고

그 갇혔음에 무능하기 때문에

여호와의 전쟁 곧 도움을 요청하는 겁니다.

(121:1, 개역)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121:2, 개역)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121:3, 개역) 여호와께서 너로 실족지 않게 하시며 너를 지키시는 자가 졸지 아니하시리로다

(121:4, 개역)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자는 졸지도 아니하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

(121:5, 개역) 여호와는 너를 지키시는 자라 여호와께서 네 우편에서 네 그늘이 되시나니

(121:6, 개역) 낮의 해가 너를 상치 아니하며 밤의 달도 너를 해치 아니하리로다

(121:7, 개역) 여호와께 너를 지켜 모든 환난을 면케 하시며 또 네 영혼을 지키시리로다

(121:8, 개역) 여호와께서 너의 출입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지키시리로다

 

곧 십자가의 전쟁을 요청하는 겁니다.

 

주의 주 되심을 위해

예수님의 영광을 위해

십자가의 영광을 위해

 

기도 곧 전쟁요청을 하는 겁니다.

 

우리는 곧 성도는 매일 매일 주의 기도로 전쟁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위해서 말입니다.

 

(6:8, 개역) 그러므로 저희를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6:9, 개역)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6:10, 개역)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6:11, 개역)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6:12, 개역)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6:13, 개역)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1:46, 개역) 마리아가 가로되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

(1:47, 개역) 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음은

(1:48, 개역) 그 계집종의 비천함을 돌아 보셨음이라 보라 이제 후로는 만세에 나를 복이 있다 일컬으리로다

(1:49, 개역) 능하신 이가 큰 일을 내게 행하셨으니 그 이름이 거룩하시며

(1:50, 개역) 긍휼하심이 두려워하는 자에게 대대로 이르는도다

(1:51, 개역) 그의 팔로 힘을 보이사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고

(1:52, 개역) 권세 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셨고

(1:53, 개역)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부자를 공수로 보내셨도다

(1:54, 개역) 그 종 이스라엘을 도우사 궁휼히 여기시고 기억하시되

(1:55, 개역) 우리 조상에게 말씀하신 것과 같이 아브라함과 및 그 자손에게 영원히 하시리로다 하니라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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