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로의 대성통곡

 

왜 닭이 세 번 울어야만 하는 것일까? (22:54-62)

 

(22:54, 개역) 예수를 잡아 끌고 대제사장의 집으로 들어갈새 베드로가 멀찍이 따라가니라

(22:55, 개역) 사람들이 뜰 가운데 불을 피우고 함께 앉았는지라 베드로도 그 가운데 앉았더니

(22:56, 개역) 한 비자가 베드로의 불빛을 향하여 앉은 것을 보고 주목하여 가로되 이 사람도 그와 함께 있었느니라 하니

(22:57, 개역) 베드로가 부인하여 가로되 이 여자여 내가 저를 알지 못하노라 하더라

(22:58, 개역) 조금 후에 다른 사람이 보고 가로되 너도 그 당이라 하거늘 베드로가 가로되 이 사람아 나는 아니로라 하더라

(22:59, 개역) 한 시쯤 있다가 또 한 사람이 장담하여 가로되 이는 갈릴리 사람이니 참으로 그와 함께 있었느니라

(22:60, 개역) 베드로가 가로되 이 사람아 나는 너 하는 말을 알지 못하노라고 방금 말할 때에 닭이 곧 울더라

(22:61, 개역) 주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시니 베드로가 주의 말씀 곧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22:62, 개역)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왜 닭이 울어야만 하는 것일까요?

베드로는 누구보다 예수님을 사랑하고 싶어 했습니다.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베풀어 준 것들을 생각해 보면

베드로는 그야말로 자신의 목숨을 바치겠다는 말이 빈 말이 아니였다는 겁니다.

그 정도로 베드로는 인간다움을 갖추고자 노력도 하고

베푸신 은혜에 보답하고픈 마음이 누구 보다 더 강했을것입니다.

 

베드로를 한 번 상상해 보니까

지붕위의 바이올린 이라는 영화가 생각납니다.

그 영화에 나오는 아주 평범한 세 딸의 아버지?

그런 농부와 같은 지극히 평범한 자의 모습이 떠 오릅니다.

 

그런 것은 특이성 곧 변별성이 없다 라는 겁니다.

뭔가 그에게서 나와야 하는 차이성이

그런 모습에서는 없다 라는 겁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철저하게 예수님에게 말려들어야 합니다.

즉 반드시 닭이 울어야한 하는 변별적 존재로써 특이한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어떻게 이 숙제를 예수님은 시행을 하실까요?

 

예수님은 먼저 베드로가 가룟유다로부터 예수님이 팔리는 그 상황에서

예수님이 팔리지 않도록 강도잡듯이 잡을려는 자들로부터 구하고자

그들 중 한 사람의 오른쪽 귀를 짤라버릴 정도로

예수님을 이 상황에서 빼내고자 하는 그 상황을

아무것도 아닌 하나 마나 한 짖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마치 7번 용서 했다는 그 용서를 허튼짖으로 만들어 버리시는 일을 먼저 하십니다.

 

즉 베드로가 예수님을 지키고자 하는 그 열심을 실패케 만드시는 일이

예수님의 먼저 된 숙제완성이다는 겁니다.

 

그럼 실패케 만들어 보란 듯이 쭐꾸덕 미끄러져서

웃사스럽게 베드로가 한 일을 수포로 돌아가게 만들어 버려서

무엇을 하시고자 하시느냐?

 

앞서 예언하셨던 일들이, 그 원치 않던 일들이 벌어지도록 하신다는 겁니다.

이것이 예정된 창세전에 준비된 일이지

예수님을 자신의 힘으로 지키겠다는 것이 예정된 일이 아니다 라는 겁니다.

 

(22:31, 개역)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단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 너희를 청구하였으나

(22:32, 개역)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22:33, 개역) 저가 말하되 주여 내가 주와 함께 옥에도, 죽는 데도 가기를 준비하였나이다

(22:34, 개역) 가라사대 베드로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모른다고 부인하리라 하시니라

 

 

즉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 오늘 닭 울기전에 부인하는 일을 그 예정된 일을 해야 한다는 겁니다.

 

베드로가 과연 수긍하고 아멘하며 동의할까요?

 

동의하면 큰일나죠? 당장 자신부터 그것이 용납이 되지 않고

주변의 사람 특히 다른제자들이 과연 가만히 있을까요?

 

모순되는 사람이라고 공격할거 아니겠습니까?

아니 본인 입으로 예수님으로부터 받은 것이 얼마나 많았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장모의 병든 것을 고쳐주시고

주변의 많은 이웃들을 고쳐주는 그 은혜를 누구 보다 가장 가까이 목격한 자가

베드로 아닙니다.

 

그런 자가 배신을 한다면

과연 누가 손가락질 하지 않고 배기느냐 말이죠.

 

베드로 너 너야말로 가장 가까이서 예수님으로부터 받은 은혜가

다른 제자들과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많지 않았느냐?

 

너가 배신 하면 우리는 뭐가 되느냐?

 

얼마나 큰 부담 아닙니까? 보통 책임이 아닙니다.

 

가장 많이 접촉한 자가 수제자 베드로입니다.

가장 가까이 근접했던 겁니다.

 

누구 보다 더 말입니다.

 

그러니 그런 근심 걱정을 일소에 말소시키는 것은 오로지 실천

실천만 하면, 모든 염려를 떨쳐버리는 직접 행동에 옮기면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미리 말씀한 예언에 신경쓸 필요가 없이 말이죠.

 

그런데 예정된 것은 그 가까이 함이 무색해 질 정도로

가장 멀리 떨어지는 간극을

그것도 불가능한 간극 꼬끼오 꼬끼오 꼬끼오를

그 간극 벌림당하는 것을 격어야 한다는 겁니다.

 

한 번도 아닌 세 번 씩이나 부정 부정 부정 해야 한다는

 

나 저 사람 모릅니다.

나는 절대 저 사랑 알지 못합니다.

나는 죽어도 저 사람과 상관 없는 자입니다. 라는 세 번 부인 말입니다.

 

이 한 순간으로 그 동안의 공든탑이 다 와르르 무너지는

예수님과의 모든 관계가 다 삭제가 되는 겁니다.

평생 배신자 라는 딱지에 고개를 들 수 없게 되는 겁니다.

 

철저하게 배제요 소외요

그 간극은 이루 말로 할 수 없는 간극이 되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 부인했다 라는 것 보다

 

왜 예수님은 베드로를 세 번 씩이나 모른다고 하게 하시느냐 하는 점이 더 궁금합니다.

어느 정도 베드로의 잘못이 아니다 라는 것을 눈치챈 겁니다.

그럼 예수님 잘못?

 

누구 잘못이냐 라는 시시비비가 아니라

 

내용입니다.

왜 그런 일을 반드시 예수님은 벌리시느냐 하는 점입니다.

 

당연히 베드로는 말려든 겁니다.

 

예정이 그렇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예정이라고 하면 종교 교리에서 예정이나 운명 숙명 등으로 보는데

그런 것들은 결국 하나 마나 한 소리가 되는 겁니다.

운명이란 결국 자기 스스로가 극복하고 헤쳐나가는 것이다 라는 결론 즉 운명 뿐이다 라는 것이

모든 운명에 대한 해석입니다.

 

그런 예정 말고요

인간과 인간 끼리의 관계 속에서의 예정 따위가 아닌

 

예수님은 시공간 자체가 창조 되기 이전의

창세전에 생명책에 기록된 베드로라는 이름을

어떻게 자신이 지금 건지느냐 하는 점에서의 [기록된 말씀대로] 라는 겁니다.

 

결국 그 창세전의 생명책에 기록된 이름을

어떻게 기록하셨는지 지금 이 순간 그 두루마리를 펼치는 겁니다.

생명책을 펼치는 겁니다.

 

어떻게? 꼬끼오 꼬끼오 꼬끼오로 펼치시는 겁니다.

 

베드로 스스로를 변별성이 있는 존재로 베드로 스스로가 만들어 낼 수 없습니다.

 

다윗도 여느 왕과 다를바 없는

결국 율법 뒤에 숨어서

교회 뒤에 숨어서

성전 뒤에 숨어서

자신의 정당성을 추구하면서 자신의 죄악을 감출 뿐이지

이 죄악을 해결하고자

예수님께 나아오지도 않는다는 겁니다.

 

알게모르게 어느정도 동등한 관계인 겁니다.

나도 물위를 걷고, 예수님도 물 위를 걷고

같이 동일하게 물 위를 걷는 관계.

 

이런 관계를 우리를 꿈 꿔 왔기에

소외 배제 단절 차단은 먼 나라 이야기인 줄 알았던 겁니다.

그러니 자기자신을 봐도 전혀 예수님을 배신할 그 어떤 근거도 없다는 겁니다.

설마 내가? 배신을? 에이 그럴 리가?????????

 

이상하죠?

성화론이든

바리새인이든

말씀을 지켰다 라는 둥

7번 용서 했다 라는 둥

 

그럴 때는 자신만만하게 예수님(여호와 하나님)께 잘도 나아옵니다.

 

그 어떤 간극도 없습니다. 갭도 없이 촘촘히 빼곡하게 잘 짜여진 관계입니다.

 

그런데 죄만 지었다 하면 인간들은 마치 피할 곳이 있는마냥

피할 곳을 찾았다고 다들 숨어버리는 겁니다.

과연 피할 수나 있을까요?

피해지던가요?

도망가 지더냐 말이죠.

 

아담아 어디 있느냐?

이 음성이

피해 숨어있는 곳에도 찾아와서

그 어떤 곳도 숨을 곳이 없다는 것을 인식시켜

내가 여기 있나이다 라고 실토케 만듭니다.

 

(3:7, 개역)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 자기들의 몸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 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하였더라

(3:8, 개역) 그들이 날이 서늘할 때에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아담과 그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3:9, 개역)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3:10, 개역) 가로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3:11, 개역) 가라사대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고하였느냐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실과를 네가 먹었느냐

 

그래서 말씀을 지켰다고 착각하면

뭔가를 입었는냥 당당히 자진해서 알아서 나서게 되지만

 

말씀을 어겼다고 생각하면

여지없이 발가벗은냥 알아서 기어들어서 피해 숨어버리는 겁니다.

가리운다고 가려지느냐 말이죠.

 

숨는다고 피할수 있는 문제냐 말이죠.

 

그래서 예수님은

말려들어라 말려들어라 말려들어라 라고

커져라 커져라 커져라 궁민(바비킴)처럼 노래는 부릅니다.

 

주님이 준비하신 것이 있다는 겁니다.

 

잠깐만 잠깐만 잠깐 천천히 들어와 천천히

내가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천천히 그래야 내가 할께 있으니까

 

천천히

 

베드로야 참아라 참아라 참아라 그래야 내가 보여 줄게 있으니까

당황하지 않고 꼬끼오 꼬끼오 꼬끼오 베드로를 팍 끝 ~~~~

 

예수님께서 준비하신 것이 바로 창세전에 생명책에 베드로라는 이름을 기록한 것인데

그것이 지금 이 순간에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말하기 직전에 닭이 세 번 운다 라는 것으로 표현이 된다는 겁니다.

 

창세전에 생명책 기록됨과

닭이 세 번 우는 것과 무슨 상관이 있냐 말이죠.

 

왜 이것을 예수님은 베드로를 막으시면서 단절시키시면서 소외 배제 시키시면서

이 닭 울음 세 번을 준비하신 것이라고 하시는 것일까요?

 

그것도 지금 팔려가 잡히시는 상황에서 말입니다.

 

안 이상합니까?

무지 무지 이상하지 않습니까?

 

마치 저는 이 부분의 힌트를

구약의 요셉 뺑뺑이 사건에서 힌트를 봅니다.

 

요셉이 형들로부터 은 이십냥에 팔리는 장면에서

구덩이 속에 있다가 은 이십개에 팔려 애굽으로 팔려가는 장면이 떠오릅니다.

 

(37:28, 개역) 때에 미디안 사람 상고들이 지나는지라 그들이 요셉을 구덩이에서 끌어 올리고 은 이십 개에 그를 이스마엘 사람들에게 팔매 그 상고들이 요셉을 데리고 애굽으로 갔더라

 

그런데 요셉이 꿈 해석자 이신 여호와의 도움으로

온 애굽의 주가 되며 바로의 아비가 됩니다.

 

(45:8, 개역)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자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로 바로의 아비를 삼으시며 그 온 집의 주를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치리자를 삼으셨나이다

 

그런데 요셉의 형제들은 바로 애굽 온 땅의 주요, 바로의 아비를 바로 만날수가 없습니다.

 

반드시 거쳐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 거쳐야 할 것 때문에

요셉의 형제들은 요셉이 펼치는 뺑뺑이 돌리기에 반드시 말려들어야 합니다.

 

그 무능한 아비 야곱을 끌어들이기 위해서는

반드시 형들을 간첩으로 몰아

베냐민을 볼모로 잡아야 한다는 겁니다.

 

졸지에 죄인이 되는 거죠. 죄인 만들기입니다.

즉 죄인이란 새로운 사건 속에서 죄인되는 것이지

골프 치는 것이 죄인 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건 속에서 죄인이 되는 겁니다.

전혀 상상도 못한 사건입니다.

 

베드로는 자신이 전혀 감당할 수 없는 불감당 속에서의 사건에서

죄인이 되어야만 하는 겁니다.

 

의인 되면 안됩니다.

반드시 죄인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도 새로운 사건 속에서 말입니다.

감당이 불감당인 거죠.

 

그래서 형제들은 극심한 기근 가뭄 속에서 가족의 생존을 위해 애굽으로 내려가

곡식을 구하러 갑니다.

 

(42:1, 개역) 때에 야곱이 애굽에 곡식이 있음을 보고 아들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어찌하여 서로 관망 만하느냐

(42:2, 개역) 야곱이 또 이르되 내가 들은즉 저 애굽에 곡식이 있다 하니 너희는 그리로 가서 거기서 우리를 위하여 사오라 그리하면 우리가 살고 죽지 아니하리라 하매

(42:3, 개역) 요셉의 형 십 인이 애굽에서 곡식을 사려고 내려 갔으나

(42:4, 개역) 야곱이 요셉의 아우 베냐민을 그 형들과 함께 보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그의 말이 재난이 그에게 미칠까 두렵다 함이었더라

 

얼마나 평범합니다. 그 어떤 특이성도 사건(변별성)도 없습니다.

 

그런데 야곱의 우려가 현실로 나타나는 겁니다.

동생 요셉을 죽인 형제들을 믿지 않았기에

베냐민을 보내지 않았는데

 

여호와 하나님은 그 요셉의 죽음을 다시 끄집어 내는 겁니다.

그러기 위해서

 

그 죽음이 의미가 있을려면

베드로 조차도 예수님을 팔아넘긴 그 요셉의 형제와 동류가 되는 겁니다.

베드로 본인도 뺑뺑이 돌아야 합니다.

 

그거 안하겠다고 예수님을 잡지못하도록 귀를 짤라버리는 겁니다.

 

예수님이 할게 있다는데

자신이 할게 더 많은 겁니다.

 

예수님이 준비한 가죽 옷 입혀줄게 따로 있는데

베드로 자신이 그 어설픈 무화과 나뭇잎으로 자신도 가리우고 예수님도 가리우겠다는 겁니다.

 

그 겨우 7번 용서로 말입니다.

 

되도 않는 7번 용서

되도 않는 나뭇잎 팬티로 말입니다.

 

그거 바로 찢어버려야 합니다.

찢겨지지 않는 준비된 가죽팬티를 무시하는 격이기 때문입니다.

770번 준비된 용서 당하기를 무시하는 격이기 때문입니다.

 

즉 누가 꾀더냐?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데 !!! 십자가를 무시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간극을 벌리는 겁니다.

 

세 번 뺑뺑이 돌리는 겁니다.

 

죄인 만들어 간첩을 만들어

그 감추어둔 그 원인을 그 원인 야곱을 끄집어 내는 겁니다.

 

그래서 야곱이 얍복강가에서 하나씩 둘씩 앞서 보내듯이

최후의 보루까지 다 내어보내듯

 

막내 베냐민을 빼앗기도록 하는 요셉의 지략에 말려들어야 하는 겁니다.

 

 

(42:12, 개역)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아니라 너희가 이 나라의 틈을 엿보러 왔느니라

(42:13, 개역) 그들이 가로되 주의 종 우리들은 십이 형제로서 가나안 땅 한 사람의 아들들이라 말째 아들은 오늘 아버지와 함께 있고 또 하나는 없어졌나이다

(42:14, 개역)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정탐들이라 한 말이 이것이니라

(42:15, 개역) 너희는 이같이 하여 너희 진실함을 증명할 것이라 바로의 생명으로 맹세하노니 너희 말째 아우가 여기 오지 아니하면 너희가 여기서 나가지 못하리라

(42:16, 개역) 너희 중 하나를 보내어 너희 아우를 데려오게 하고 너희는 갇히어 있으라 내가 너희의 말을 시험하여 너희 중에 진실이 있는지 보리라 바로의 생명으로 맹세하노니 그리하지 아니하면 너희는 과연 정탐이니라 하고

(42:17, 개역) 그들을 다 함께 삼일을 가두었더라

(42:18, 개역) 삼일만에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나는 하나님을 경외하노니 너희는 이같이 하여 생명을 보전하라

(42:19, 개역) 너희가 독실한 자이면 너희 형제 중 한 사람만 그 옥에 갇히게 하고 너희는 곡식을 가지고 가서 너희 집들의 주림을 구하고

(42:20, 개역) 너희 말째 아우를 내게로 데리고 오라 그리하면 너희 말이 진실함이 되고 너희가 죽지 아니하리라 그들이 그대로 하니라

(42:21, 개역) 그들이 서로 말하되 우리가 아우의 일로 인하여 범죄하였도다 그가 우리에게 애걸할 때에 그 마음의 괴로움을 보고도 듣지 아니하였으므로 이 괴로움이 우리에게 임하도다

(42:22, 개역) 르우벤이 그들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내가 너희더러 그 아이에게 득죄하지 말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래도 너희가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러므로 그의 피 값을 내게 되었도다 하니

(42:23, 개역) 피차간에 통변을 세웠으므로 그들은 요셉이 그 말을 알아 들은 줄을 알지 못하였더라

(42:24, 개역) 요셉이 그들을 떠나 가서 울고 다시 돌아와서 그들과 말하다가 그들 중에서 시므온을 취하여 그들의 목전에서 결박하고

 

 

! 요셉은 우는 겁니까? 꼬끼오 ~~~~~~~

 

! 닭은 왜 울어야만 하는 겁니까?

 

형님 당신들은 내가 이렇게 구원받았듯이

당신네들도 똑같이 이렇게 구원받아야 한다는 겁니다.

 

이것이 주의 주 되심을 보는 것이다는 겁니다.

 

베드로는 자신이 예수님을 지키고자 칼로써 말고의 귀를 짤라내는 그런 일에 정신팔려 있고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하는 그런 일에 또 정신팔려 있지만

 

정작 예수님이 준비하신 것은 그딴거 안 보신다는 겁니다.

예수님이 보여주시고자 준비한 그것 보라 라는 겁니다.

 

내가 이렇게 탈출 할게 너도 이렇게 탈출해야돼 라는 겁니다.

 

그것이 뭔고 하니

구덩이에 파묻혀 은 삼십냥에 팔려서 3일 만에 다시 살아나는 겁니다.

 

요셉은 자기가 그렇게 구원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서는 그것을 형제들에게 적용시키는 겁니다.

심지어 절뚝 절뚝 지팡이만 의지하는 아버지 야곱에게까지 말입니다.

이래야 구원이 된다는 겁니다.

 

(42:36, 개역) 그 아비 야곱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나로 나의 자식들을 잃게 하도다 요셉도 없어졌고 시므온도 없어졌거늘 베냐민을 또 빼앗아 가고자 하니 이는 다 나를 해롭게 함이로다

 

(42:36, 공동) 아버지 야곱이 그들에게 말하였다. "너희는 나에게서 자식을 하나하나 빼앗아가는구나. 요셉도 없어졌고 시므온도 없어졌는데 이제 와서 베냐민마저 데려가겠다는 거냐?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부정의 부정으로 ~~~~

 

다시 기근이 심해서 애굽에서 값을 치르고 산 양식이 다 떨어지니까

다시 애굽에 갈 수밖에 없는데 이제는 베냐민을 반드시 데려가야만 한다고 합니다.

 

설득과 설득 끝에 베냐민을 데리고 가게 됩니다.

 

야곱은 이미 포기 체념해 버립니다.

 

(43:14, 개역)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그 사람 앞에서 너희에게 은혜를 베푸사 그사람으로 너희 다른 형제와 베냐민을 돌려보내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내가 자식을 잃게 되면 잃으리로다

 

죽으면 죽으리라 뭐 어쩔수 없지 뭐

즉 모든 사건의 정황이 죽음 잃어버림 빼앗김 등의 부정성으로만 이어집니다.

 

그 어떤 인간도 해결할 수 없는 문제이다는 겁니다.

손 떼라 라는 거죠. 손 놔, 손 놔, 손 놔 ~~~

 

살자루 속에 돈이 있었는 것으로 또 간첩으로 몰까봐싶어서 열심히 자초지정으로 설명합니다.

 

(43:20, 개역) 가로되 내 주여 우리가 전일에 내려와서 양식을 사가지고

(43:21, 개역) 객점에 이르러 자루를 풀어본즉 각인의 돈이 본수대로 자루 아구에 있기로 우리가 도로 가져왔고

(43:22, 개역) 양식 살 다른 돈도 우리가 가지고 내려왔나이다 우리의 돈을 우리 자루에 넣은 자는 누구인지 우리가 알지 못하나이다

(43:23, 개역) 그가 이르되 너희는 안심하라 두려워 말라 너희 하나님 너희 아버지의 하나님이 재물을 너희 자루에 넣어 너희에게 주신 것이니라 너희 돈은 내가 이미 받았느니라 하고 시므온을 그들에게로 이끌어 내고

(43:24, 개역) 그들을 요셉의 집으로 인도하고 물을 주어 발을 씻게 하며 그 나귀에게 먹이를 주더라

(43:25, 개역) 그들이 여기서 먹겠다 함을 들으므로 예물을 정돈하고 요셉이 오정에 오기를 기다리더니

(43:26, 개역) 요셉이 집으로 오매 그들이 그 집으로 들어가서 그 예물을 그에게 드리고 땅에 엎드리어 절하니

(43:27, 개역) 요셉이 그들의 안부를 물으며 가로되 너희 아버지 너희가 말하던 그 노인이 안녕하시냐 지금까지 생존하셨느냐

(43:28, 개역) 그들이 대답하되 주의 종 우리 아비가 평안하고 지금까지 생존하였나이다 하고 머리 숙여 절하더라

(43:29, 개역) 요셉이 눈을 들어 자기 어머니의 아들 자기 동생 베냐민을 보고 가로되 너희가 내게 말하던 너희 작은 동생이 이냐 그가 또 가로되 소자여 하나님이 네게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노라

(43:30, 개역) 요셉이 아우를 인하여 마음이 타는듯 하므로 급히 울 곳을 찾아 안방으로 들어가서 울고

(43:31, 개역) 얼굴을 씻고 나와서 그 정을 억제하고 음식을 차리라 하매

 

 

요셉을 베냐민을 보고 또 웁니다. 꼬끼오 ~~~~~~~~~~~~~

 

자 이렇게 분위기 좋고 다 좋은게 좋은거다고 잘 풀려갔습니다.

아 그런데 언제는 간첩으로 몰더니 또 이제는 도둑놈으로 몰아버리는 사건을 벌리는 겁니다.

 

(44:1, 공동) 그런 뒤에 요셉은 자기 집안 관리인에게 시켰다. "저 사람들 자루에다 양식을 가져갈 수 있을 만큼 채워주어라. 그리고 자루마다 그 아귀에 자기들이 가져온 돈을 도로 집어넣어 주는데

(44:2, 공동) 막내의 자루에는 그가 가져왔던 양식 값과 함께 내 술잔도 함께 넣어라. 이 은잔 말이다." 그는 요셉의 분부대로 하였다.

(44:3, 공동) 다음날 아침이 되자 그들은 나귀를 이끌고 길을 떠났다.

(44:4, 공동) 그러나 그들이 그 도시에서 나와 멀리 가기 전에 요셉은 자기 집안 관리인에게 명령을 내렸다. "빨리 그들의 뒤를 쫓아가라. 그리고 그들을 따라잡거든 이렇게 호통을 쳐라. '너희는 왜 배은망덕하느냐?

(44:5, 공동) 『㉠어쩌자고 은잔을 훔쳐왔느냐? 그것은 바로 내 주인께서 따라 마시는 잔이요 점을 치시는 잔이다. 어찌하여 이렇게 사람으로선 못할 짓을 했단 말이냐!'" / 칠십인역을 따라 "어쩌자고 은잔을 훔쳐 왔느냐?"를 삽입한다.

 

막내 베냐민의 자루에 은잔을 몰래 숨겨놓고서는 도둑놈으로 만드는 겁니다.

 

제가 왜 베드로의 잘못이 아닌

그렇다고 예수님의 잘못도 아닌

잘잘못의 시시비비가 아니다 라고 했습니까?

내용이다 라고 했습니다. 숨어있는 내용입니다.

왜 이런 일을 반드시 예수님은 벌리시느냐 하는 점입니다.

왜 이런 일을 반드시 요셉은 벌리느냐 하는 점입니다. 바로의 아비이며 애굽의 주가 왜?

 

결국 요셉의 자작극으로

베냐민 자루에서 은 잔이 나옴으로써

형제들은 이래도 죄 저래도 죄인되는 입장만 놓여지게 되니

다 같이 요셉의 종이 되겠다고 자포자기 하게 됩니다.

그런데 안 받아 줍니다.

은잔이 나온 사람만 종으로 삼겠다는 겁니다.

 

(44:15, 공동) 요셉은 "이 따위 짓을 하다니! 나 같은 사람이 점도 못 칠 줄 알았느냐?" 하고 호통을 쳤다.

(44:16, 공동) "우리가 무슨 할 말이 있겠습니까? 어찌 입을 놀릴 수 있겠습니까? 변명할 여지도 없습니다." 하면서 유다가 아뢰었다. "하느님께서 소인들의 죄를 들추어내셨습니다. 그러니 이제 잔이 나온 이 아이나 우리나 할 것 없이 모두 어른의 종이 되는 길밖에는 다른 도리가 없습니다."

(44:17, 공동) "그렇게 할 수 없다." 하고 그가 대답하였다. "잔이 나온 사람만 내 종이 되고 너희 나머지는 아버지에게 평안히들 올라가거라."

 

그래서 유다가 나서서 요셉의 자작극에

이 저주의 상황에, 그 부정성에 뛰어들게 됩니다.

 

(44:30, 개역) 아비의 생명과 아이의 생명이 서로 결탁되었거늘 이제 내가 주의 종 우리 아비에게 돌아갈 때에 아이가 우리와 함께 하지 아니하면

(44:31, 개역) 아비가 아이의 없음을 보고 죽으리니 이같이 되면 종들이 주의 종 우리 아비의 흰 머리로 슬피 음부로 내려가게 함이니이다

(44:32, 개역) 주의 종이 내 아비에게 아이를 담보하기를 내가 이를 아버지께로 데리고 돌아오지 아니하면 영영히 아버지께 죄를 지리이다 하였사오니

(44:33, 개역) 청컨대 주의 종으로 아이를 대신하여 있어서 주의 종이 되게 하시고 아이는 형제와 함께 도로 올려 보내소서

 

유다는 야곱의 생명과 베냐민의 생명이 서로 결탁되었다고

그래서 유다 자신의 아이를 담보하면서 까지

반드시 데려 오겠다고

그러니 베냐민을 죄인으로 만들지 말고

나 유다를 죄인 만들어 달라고 합니다.

 

그야 말로 요셉의 죄인 만들기 작전입니다.

? 은혜를 베풀고자 말입니다.

준비해 놓은 것이 뭘까요?

 

(45:1, 개역) 요셉이 시종하는 자들 앞에서 그 정을 억제하지 못하여 소리질러 모든 사람을 자기에게서 물러가라 하고 그 형제에게 자기를 알리니 때에 그와 함께 한 자가 없었더라

(45:2, 개역) 요셉이 방성대곡하니 애굽 사람에게 들리며 바로의 궁중에 들리더라

(45:3, 개역) 요셉이 그 형들에게 이르되 나는 요셉이라 내 아버지께서 아직 살아 계시니이까 형들이 그 앞에서 놀라서 능히 대답하지 못하는지라

(45:4, 개역) 요셉이 형들에게 이르되 내게로 가까이 오소서 그들이 가까이 가니 가로되 나는 당신들의 아우 요셉이니 당신들이 애굽에 판 자라

(45:5, 개역)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으므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이다

 

요셉은 펑펑 울었습니다. 온 애굽 사람이 다 듣도록, 꼬끼오 ~~~~~~~~


요셉의 방성대곡입니다.

성령의 놀라운 탄식은

바로 예수님 쪽에서 준비한 것이 따로 있기에

내 쪽에서 가지고 오는 것 다 삭제 당해야 하기 때문에 우시는 겁니다.


내 믿음도 삭제 당해야 하고

나의 행함도 다 삭제 당해야 하고

나는 뭘 해도 다 엉터리요 죄 뿐이다 임이

이 울음 덕분에 따로 준비한 것을 볼수 있도록

울음으로써 시선을 돌려주시는 겁니다.

나무 위에 달린 인자를 쳐다보라고 말입니다.

그 외에는 다 배제 입니다.


그것이 바로 앞서 보내심입니다.

이 앞서 보내심을 보라고 우시는 겁니다.

딴거 쳐다보지 말고 말이죠.

 

그래서 [앞서 보냈다고 합니다]. 자신의 신분을 밝히면서

형들이 나를 애굽 이곳에 판 것을 근심하지 마세요

하나님이 구원하실려고 먼저 형들을 앞서 보냈다고 합니다.

 

이것이 준비 된 것을 주시고자 한 것입니다.

그 예비된 것이 바로 [먼저 앞서서 보내심] 이다는 겁니다.

 

뭘 보내? 음부에서 건져내시고자 말이죠.

기근 극심한 가뭄에서 건져내심 곧 구원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구원이 아닙니다.

시시한 것들로 부터의 구원이 아닙니다.

 

병듬 배고픔 가난 기근 가뭄 죽음 사망이 아닙니다.

그것은 오히려 베드로가 각오하면서까지 따라오겠다는 다짐들

장담들이였습니다.

죽더라도 따라가겠습니다 라고

 

그런데 그것으로부터 의 구원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심각하게 본 것은

너희가 어디에 갇혀 있느냐 하면

마귀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밀까부듯이 까부는 소송에서 벗어날 수 없기에

우시고 우시고 우시는 겁니다.


요셉의 방성대곡

예수님의 세 번 꼬끼오 우시는 그 울음입니다.

 

예수님이 울지 않으면

사망의 권세를 쥔 마귀에서 벗어날수가 없다 라는 겁니다.

 

그래서 사망의 권세 속에서 도리어 집어넣습니다.

 

그저 가뭄으로 인해 곡식을 돈주고 사고자 내려간 애굽이

그저 시장처럼 마트처럼 물건 사고 팔고 하는 그런 곳이 아니다 라는 겁니다.

 

예수님을 팔아넘기는 그 매매의 장소인 예루살렘이

그저 마트처럼 팔고 사고 하는 곳이 아닌

이 땅 전체가 지금 사망의 권세에 사로잡혀 있는 마귀의 세계에 너희는 갇혀 있다 라는 겁니다.

 

아니 누가 그것을 심각하게 받아들이겠습니까?

그저 좋은 종교

착한 종교

착한 신 하나 믿어서 천국가면 됐지

왜 이렇게 예수님의 자작극에 말려서

꼬끼오를 세 번씩이나 닭이 울어야만 하고

왜 우리는 베드로처럼 예수님의 자작극에 말려들어서

간첩으로 몰리고 도둑놈으로 몰리고 아비 야곱을 죽이는 못난 자식으로 만드는

그 죄인 만들기에 말려들어야 하느냐 하는 겁니다.

왜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하고

예수님을 은 삼십냥에 팔아 넘기고

예수님을 남이 아닌 내 손으로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

그 일에 말려 들 수밖에 없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예수님만 의식하는 마귀 때문입니다.

그 권세에서 빼내시고자

이 세 번의 뺑뺑이가 있다는 겁니다.

왜 닭이 세 번 울어야만 하는 것일까요?

왜 요셉은 세 번 울어야만 하는 것일까요?

 

왜 예수님은 우서야만 하는 것일까요?

 

아무리 봐도 마귀의 손에서 벗어날수가 없기 때문에

아무 값없이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도

용서하시기 위해서

피 발라 줄려고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시러 오셨다는 겁니다.

 

(22:56, 개역) 한 비자가 베드로의 불빛을 향하여 앉은 것을 보고 주목하여 가로되 이 사람도 그와 함께 있었느니라 하니

 

(22:56, 공동) 베드로가 불을 쬐고 앉아 있을 때 어떤 여종이 베드로를 유심히 들여다보며 "이 사람도 예수와 함께 있었어요."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이 잡히시고 난 뒤

멀찍이 베드로는 따라갔는데

 

여자아이 하녀가 베드로를 고발합니다.

그러자 연쇄적으로 다른 사람도 베드로가 예수와 함께 있던 것을 봤다 라고 고발합니다.

또 다른 사람도 고자질합니다.

 

베드로는 절대 안 그렇다

나는 저 사람을 알지도 못한다

나는 당신들이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하겠다 라고 하니

그때 닭이 웁니다. 세 번 꼬끼오

 

그리고 베드로는 대성통곡합니다.

 

 

(22:60, 개역) 베드로가 가로되 이 사람아 나는 너 하는 말을 알지 못하노라고 방금 말할 때에 닭이 곧 울더라

(22:61, 개역) 주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시니 베드로가 주의 말씀 곧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22:62, 개역)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맞습니다, 우리는 울어야 합니다.

베드로의 모습이 남의 모습이 아닙니다.

우리 모습이어야 합니다.

 

후회해서? 죄책감에서? 절대 아닙니다.

 

요셉이 먼저 울어줬기에

닭이 먼저 울어줬기에

예수님이 먼저 울어줬기에

그 울음에 동참하기 위해서

 

왜 진작 울지 못했는지에 대해서 울어야 하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 울어주셔서 너무 너무 감사헤서 울어야 하는 겁니다.

나를 위해 닭이 대신 울어주어서

고마워서 울어야 하는 겁니다.

 

이 예수님의 자작극에 말려든 것이 너무 너무 기뻐서 대성통곡하는 겁니다.

나를 위해 우시는 분이 있어서 너무 너무 고맙고 감사해서 우는 겁니다.

 

되도 않는 우리의 눈물 보다 먼저 앞서서 우신 분의 눈물의 초과잉에

휩쓸려 떠내려가서 울 수밖에 없는 겁니다.

 

감사의 눈물이요 기쁨의 눈물입니다.

내 눈물이 770번의 눈물 앞에

소용이 없는 눈물임을 알게 되어서 우는 눈물인 겁니다.

 

요셉을 펑펑 울었습니다.

 

먼저 세 번씩이나 울었습니다.

 

먼저 말입니다.

 

그리고 형제들도 부등켜 안고 웁니다.

 

(45:13, 개역) 당신들은 나의 애굽에서의 영화와 당신들의 본 모든 것을 다 내 아버지께 고하고 속히 모시고 내려오소서 하며

(45:14, 개역) 자기 아우 베냐민의 목을 안고 우니 베냐민도 요셉의 목을 안고 우니라

(45:15, 개역) 요셉이 또 형들과 입맞추며 안고 우니 형들이 그제야 요셉과 말하니라

 

이제 베드로는 예수님을 물 위에서 만나는 것이 아닌

물 속에서

죽음속에서

십자가 속에서 만나야 합니다.

 

그래야 예수님이 구원자이고

구원자의 기능인, 의사의 기능인

죄인을 건지시는, 환자를 고치시는

 

그 솜씨를 보게 되는 겁니다.

 

베드로는 건강한자로써

의인으로써

 

예수님과 같은 동격으로써 이제껏 만나왔던 그 만남을

확 발가벗김 당하고

 

새로 준비된 절대로 찢겨지지 않는

썩지 않는 좀먹지 않는 새옷으로 갈아입힘 당해기 위해

 

지금의 것이 다 들통나야 하는 겁니다.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다 못박힘 당해야 하는 겁니다.

 

세 번 부인하지 않음 으로는 이 마귀의 권세를 통과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준비된 새옷으로써 우리는 발가벗김당해

갈아입힘 받을려고

예수님의 자작극

요셉의 자작극에 말려들게 되는 겁니다.

 

(61:1, 개역) 주 여호와의 신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전파하며

(61:2, 개역)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신원의 날을 전파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61:3, 개역)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희락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로 의의 나무 곧 여호와의 심으신 바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61:4, 개역) 그들은 오래 황폐하였던 곳을 다시 쌓을 것이며 예로부터 무너진 곳을 다시 일으킬 것이며 황폐한 성읍 곧 대대로 무너져 있던 것들을 중수할 것이며

(61:5, 개역) 외인은 서서 너희 양떼를 칠 것이요 이방 사람은 너희 농부와 포도원지기가 될 것이나

(61:6, 개역) 오직 너희는 여호와의 제사장이라 일컬음을 얻을 것이라 사람들이 너희를 우리 하나님의 봉사자라 할 것이며 너희가 열방의 재물을 먹으며 그들의 영광을 얻어 자랑할 것이며

(61:7, 개역) 너희가 수치 대신에 배나 얻으며 능욕 대신에 분깃을 인하여 즐거워할 것이라 그리하여 고토에서 배나 얻고 영영한 기쁨이 있으리라사모를 쓰며 신부가 자기 보물로 단장함 같게 하셨음이라

 

바로 약속하신 성령(예수님의 마음)이라는 옷을 말입니다.

 

(2:5, 개역)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2:6, 개역)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2:7, 개역)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2:8, 개역)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2:9, 개역)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2:10, 개역)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2:11, 개역)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2:12, 개역)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예수님은 우십니다.

예수님은 베드로를 위해서 울어야 하셔야 한다는 겁니다.

 

그 울음을 보고

베드로 또한 대성통곡케 하십니다.

 

내 울음은 틀렸고 예수님의 울음이 옳았다는 뜻에서

베드로는 대성통곡 합니다.

 

내가 한 모든 것이 다 삭제 당하고 배제 소외 당했기에 기뻐서 우는 울음입니다.

내 울음은 틀렸고 나의 모든 것을 배제 시키는 예수님의 울음이 옳았기에 ....

Posted by 김 대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