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녀를 위해 울라 (얼마나 심한 종말이였으면) (23:26-31)

 

(23:26, 개역) 저희가 예수를 끌고 갈 때에 시몬이라는 구레네 사람이 시골로서 오는 것을 잡아 그에게 십자가를 지워 예수를 좇게 하더라

(23:27, 개역) 또 백성과 및 그를 위하여 가슴을 치며 슬피 우는 여자의 큰 무리가 따라 오는지라

(23:28, 개역) 예수께서 돌이켜 그들을 향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23:29, 개역) 보라 날이 이르면 사람이 말하기를 수태 못하는 이와 해산하지 못한 배와 먹이지 못한 젖이 복이 있다 하리라

(23:30, 개역) 그 때에 사람이 산들을 대하여 우리 위에 무너지라 하며 작은 산들을 대하여 우리를 덮으라 하리라

(23:31, 개역) 푸른 나무에도 이같이 하거든 마른 나무에는 어떻게 되리요 하시니라

 

 

얼마나 심각한 상황인줄 모르기에 예수님을 위해 울겠다는 것이 바로 인간의 회개입니다.

인간의 회개는 예수님이 잘못을 시인하면 언제든지 회개해 주고 눈물흘려주고

예수를 위해서 제사를 드릴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다는 악마성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눈물은 그것이 아닙니다.

바로 그런 자들을 위해 우시는 눈물입니다.

예수님을 위해 울겠다는 자들을 위해 우시는 눈물입니다.

엉터리로 우는 자들을 위해 말입니다.

 

이 세상은 심각한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심각할 때마다 눈물을 흘립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 자녀를 위해 울지는 않습니다.

울기는 우는데 자기 자녀를 위해 울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 이유는 자기 자녀가 그렇게까지 심판받아 마땅한 존재가 아니다는 겁니다.

고로 자기자신도 자기 자녀처럼 마땅히 심판받아 마땅한 존재가 아니다는 겁니다.

그래서 자기에게 위험한 상황이 닥치면 그 상황에서 벗어나게 해 달라고 눈물 회개할 뿐이지

원천적으로 날 때부터 심판받아 마땅한 자라고 여길수 없는 겁니다.

 

아니 그 상황을 위해 눈물 흘리는 것이 아니라

그 상황 속에 있는 나 자신을 위해 벗어나게 해 달라고 회개기도한다는 겁니다.

 

그 상황을 의인화 해서 그 상황을 위해 우는 것이 아니라 말이죠.

 

당연하죠 누가 그 상황을 위해 울겠습니까?

그 상황에 갇혀버린 자신을 위해 우는 거죠.

 

그런데 예수님만이 그 상황은 심각한 것이 아니다 라는 겁니다.

 

진짜 눈물의 공포는 종말을 곧 끝이 미리 앞당겨져서 닥치는 그 상황이 감사해서 우는 것이 아니라

 

진짜 마지막으로 닥쳐버린 입장에서 이제 다시는 종말이 없다 라는 것에서 눈물을 흘려야 한다는 점입니다.

 

그때 자기자녀를 위해서 미리 눈물 흘릴수 있느냐 하는 점입니다.

 

자기자녀가 미리 마땅히 죽어야 함이 당연함을 아는 자는 없습니다.

그렇기에 자녀를 위해서 울 수가 없습니다.

고로 자신을 위해서도 우는 자도 없는 겁니다.

자신의 분신인 자녀를 위해서도 울 줄도 모르는데 어떻게 자신을 위해서 울겠습니까?

오로지 지금 심각할게 전혀 없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심각하지 않는 것으로 우는 겁니다.

종말을 보고서가 아니라

어려운 상황이 닥쳐서 거기서 벗어나게 해 달라고 말입니다.

 

종말은 끝에 가서야 오지

지금은 아니 오니까 말이죠.

 

이런 눈물이 바로

대제사장들과 그 무리들이 예수님을 위해서 울겠다고

제발 회개하라고 그러면 용서해주겠다고 하는

법정에 고소하는 자들의 눈물과 같다는 겁니다.

 

정작 자신의 종말을 보고 우는 것이 아니라

남을 위해 울겠다?

뭐 예수님을 위해 울겠다?

 

너 자신을 위해서나 울어라 말이죠.

 

지금 예수님은 자신의 종말을 미리 확 끌어 당겨도 너무 빨리 끌어 당겨버리는 겁니다.

종말을 끌어당겨서 끝에서 살아남으면

즉 인자가 우편에 앉으면 다 좋은 겁니다.

끝이 좋으면 다 좋은 겁니다.

 

그런 입장에서 끝을 당겨 버리는데

인간은 종말 근처도 못가는 주제에

회개(종말)를 하겠다고요?

종말신학을 펼치겠다고?

 

그런 입장에서 예수님이 어떻게 종말을 확 미리 끌어당기는지를 봐야할 입장에서

우리는 마땅히 심판을 받아 마땅한 자임을 보게 되어야 할 입장인데

 

정반대로 예수라는 한 인간의 종말을 맞이하게 해 주겠다고

꼴에 죽음이라는 무기로 기껏 그 죽음이라는 살인의지로

예수를 찔러 죽이면 예수는 종말 곧 끝날꺼라 생각한 겁니다.

 

맞습니다.

그 어떤 인간도 죽음을 당하면 더 이상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찔러 죽여 버리면 다시는 그 사람은 일어나는 법이 없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다시 산다고 했습니다.

 

즉 의인이란 바로 인간의 악마성 곧 살인의지를 맞물려서 담고 있는 그릇인 셈입니다.

 

그냥 지 혼자 깨끗한 짖만 해서 죽으면 천국가는 자가 아니라

그것은 모든 종교의 강요된 선함이고요

 

진짜 의인이란 이 세상의 어두움을 들추어내는데 맞물리는 미끼로서

하나님의 영광의 우편의 기능과 연관된 행함이 있는 믿음을 펼친다는 점입니다.

 

아니 어떻게 아주 작은 마을에 인터넷도 안되고 경제적으로 후져서

그 어떤 정보적인 소통도 없이 고립된 마을에

 

두 창녀 곧 아주 비천한 신분의 사람이 아무도 돌아봐 주지 않는

저들의 신분이 그러하다 보니 억울한 일이 벌어져도 지팔자 라려니 하고

들어주지도 않는 겁니다. 괜히 저들의 신분과 어울리면 오해받을까 싶어서 말입니다.

 

그러니 두 창녀 사이에서 벌어진 사건

즉 각각의 자녀 두 아기 중에 한 아기가 잠자는 중에 한 어미로부터 깔려 죽게 되자

살아있는 아기를 가지고 서로 자기 아들이라고 쟁론이 벌어졌던 겁니다.

 

(왕상 3:16, 개역) 때에 창기 두 계집이 왕에게 와서 그 앞에 서며

(왕상 3:17, 개역) 한 계집은 말하되 내 주여 나와 이 계집이 한 집에서 사는데 내가 저와 함께 집에 있으며 아이를 낳았더니

(왕상 3:18, 개역) 나의 해산한 지 삼일에 이 계집도 해산하고 우리가 함께 있었고 우리 둘 외에는 집에 다른 사람이 없었나이다

(왕상 3:19, 개역) 그런데 밤에 저 계집이 그 아들 위에 누우므로 그 아들이 죽으니

(왕상 3:20, 개역) 저가 밤중에 일어나서 계집종 나의 잠든 사이에 내 아들을 내 곁에서 가져다가 자기의 품에 누이고 자기의 죽은 아들을 내 품에 뉘었나이다

(왕상 3:21, 개역) 미명에 내가 내 아들을 젖 먹이려고 일어나 본즉 죽었기로 내가 아침에 자세히 보니 내가 낳은 아들이 아니더이다 하매

(왕상 3:22, 개역) 다른 계집은 이르되 아니라 산 것은 내 아들이요 죽은 것은 네 아들이라 하고 이 계집은 이르되 아니라 죽은 것이 네 아들이요 산 것이 내 아들이라 하매 왕 앞에서 그와 같이 쟁론하는지라

(왕상 3:23, 개역) 왕이 가로되 이는 말하기를 산 것은 내 아들이요 죽은 것은 네 아들이라 하고 저는 말하기를 아니라 죽은 것이 네 아들이요 산 것이 내 아들이라 하는도다 하고

(왕상 3:24, 개역) 또 가로되 칼을 내게로 가져오라 하니 칼을 왕의 앞으로 가져온지라

 

아무도 맡을수가 없기에

그 아무것도 아닌 마을

아무것도 아닌 천한 신분의 자들이

가장 최고의 자리의 재판까지 올라가는 겁니다.

 

풀수 없으니 오로지 지혜 밖에 없는 겁니다.

 

종말이란 바로 이런 겁니다.

 

도저히 살수 없는 마땅한 당연한 심판의 죽음입니다.

그 죽음 속에서 어떻게 살수 있느냐 말입니다.

 

물론 긍휼이라고 말하겠지요

그런데 아무도 긍휼을 베풀수가 없습니다.

다들 자기 발등에 불이 떨어지는 입장인데

누가 살아 남기나 해야 긍휼을 베풀수나 있던가 하던지 말이죠

 

아무도 못 푸는 겁니다.

베풀고 싶어도 목구멍이 포도청이라서

남 도와줄 입장이 못 됩니다.

 

그러니 더 천한 신분에서는 더더욱 꽉꽉 양사방으로 막혀 버린 겁니다.

 

이 때 누가 자기자녀를 위해서 울겠습니까?

 

자기 자신을 위해서 울고 싶어도 그럴 겨를도 없을 정도로

긴박한 종말이요 다들 기절을 할 정도이다고 합니다.

 

자기살기 바쁘다 보니 자기자녀를 다 놓쳐버릴 정도의 종말이다는 겁니다.

 

(21:20, 개역) 너희가 예루살렘이 군대들에게 에워싸이는 것을 보거든 그 멸망이 가까운 줄을 알라

(21:21, 개역) 그 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할지며 성내에 있는 자들은 나갈지며 촌에 있는 자들은 그리로 들어가지 말지어다

(21:22, 개역) 이 날들은 기록된 모든 것을 이루는 형벌의 날이니라

(21:23, 개역) 그 날에는 아이 밴 자들과 젖먹이는 자들에게 화가 있으리니 이는 땅에 큰 환난과 이 백성에게 진노가 있겠음이로다

(21:24, 개역) 저희가 칼날에 죽임을 당하며 모든 이방에 사로잡혀 가겠고 예루살렘은 이방인의 때가 차기까지 이방인들에게 밟히리라

(21:25, 개역) 일월 성신에는 징조가 있겠고 땅에서는 민족들이 바다와 파도의 우는 소리를 인하여 혼란한 중에 곤고하리라

(21:26, 개역) 사람들이 세상에 임할 일을 생각하고 무서워하므로 기절하리니 이는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겠음이라

(21:27, 개역) 그 때에 사람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21:28, 개역) 이런 일이 되기를 시작하거든 일어나 머리를 들라 너희 구속이 가까웠느니라 하시더라

(21:29, 개역) 이에 비유로 이르시되 무화과나무와 모든 나무를 보라

 

하늘의 권능이 흔들린다는 것은 인간이 아무리 에상하고 준비해도

그것이 무용지물이 될 정도로 그 예비를 뛰어넘어버리니

정신이 빠져버리는 기절해 버리는 상황만이 펼쳐진다는 겁니다.

 

하늘이 유일한 소망인데 하늘 마저도 절망으로만 가득차 버리니

땅은 언급할 가치도 없을 정도이다는 겁니다.

 

이런 상황이 실상인데

그 실상이 미리 앞당겨져서

자기자녀를 위해 울수 있는 상황이 닥친다면

그것은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이지 않느냐 말이죠

 

제가 지금 비아냥 거리는 것이 아닙니다.

 

이 기생이 자기 자녀가 두 조각나야할 입장이 되니

울기 싫어도 울 수 밖에 없는 상황이다는 겁니다.

 

한 쪽 기생은 솔로몬 지혜에 박수를 치면서 그럼요 그럼요 역시 지헤롭습니다.

두 조각으로 갈라서 저도 가지지 말고 나도 가지지 말도록 하소서

 

라고 박수를 치는 겁니다. 솔로몬의 지혜를 찬양합니다.

 

진짜 어미는 그 지혜를 원망합니다.

 

말이 안되는 판결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지혜가 사실은

 

진짜 눈물을 흘리는 자를 찾는 겁니다.

 

도저히 빠져 나올수 없는 갇혀 있는 자를 찾는 겁니다.

울 수밖에 없는 자

 

유일하게 자녀를 위해 우는 종말이 임한 자를 말입니다.

 

그 우는 자를 찾는 겁니다.

 

지혜가 말입니다.

 

그래서 우는 찾는 종말의 지혜이기 때문에

아무도 못 푸는 수수께끼를

저 비천한 동네의 아무도 관심없는 자가

최고의 법정인 하늘의 법정에 까지 올라가서

우편의 기능을 말할 수밖에 없는

목격자 증인으로 세움 받게 되는 겁니다.

 

종말의 자작극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자신들의 자작극을

요셉을 흉내내면서 서로가 서로에게 요셉노릇 하고자

헤롯에게 보내고 빌라도에게 보내고

빌라도도 저들에게 보내고 이들에게 보내고

헤롯도 저들에게 보내고 이들에게 보내고

 

저마다 자신들의 지혜를 가지고서 경합을 벌리듯이

누가 누가 주가 되느냐? 주인 답냐 라는 식입니다.

 

우편에 서로 앉고자 말입니다.

 

재판 장에서 서로 서로가 자신의 의로움을 펼치는 겁니다.

 

빌라도는 올바른 재판에 민란까지 않도록 하는

헤롯은 자신의 호기심처럼 저들의 호기심으로 볼 뿐이고

유대인들은 거룩을 사수하고자 하는 의를 펼치고자 말입니다.

 

저마다 다들 의로움을 펼치는 겁니다.

더군다나 법을 자신의 편으로 만들어 가면서 말입니다.

 

진짜 억울하게 눈물을 흘리는 자는 누가 되느냐 말이죠.

 

아무도 우는 자가 없습니다.

그저 자신의 눈물로 남을 꺽고자 하는 그런 누가 누가 회개의 달인이냐는 눈물이지

 

설마 자기자녀가 마땅히 죽어야 하는 눈물을? 라고 아무도 전혀 예상한 적이 없는 겁니다.

 

원인도 없이 자녀가 죽어야 하는 상황이 종말입니다.

잘못한 것도 없는데 마땅한 죽음이 종말입니다.

 

지금 솔로몬 재판에 누가 원망합니까?

진짜 어미 아닙니까

 

그런데 진짜 지혜만이 진짜 어미의 눈물을 유발케 하는 겁니다.

 

진짜 하나님만이 원수들에게 독생자를 내어줌으로써

진짜 눈물의 공포를 형성하는 겁니다. 종말입니다.

 

하나님만이 우시는 겁니다.

모든 인간은 단 한 명도 예외 없이 하나님이 우실 때 비웃었고 조롱했습니다.

하나님이 인간도 아닌데 왜 우냐 라는 겁니다. 뭐가 아쉬워서?

하나님인데 신인데 울 리가 있냐 라는 겁니다.

 

그래서 마음껏 조롱했습니다.

 

이런 악마성을 끌어들이기 위해

지혜 뒤에 숨어서 옳습니다 라고 박수를 치면서

저 아기가 두 동강 남으로써 나도 가지지 말고 저도 가지지 말라는

이런 긍휼의 정반대를 드러내는 겁니다.

 

종말은 이렇게 눈물과 두 동강내는데 아멘 하는 그 두 상황을 드러내는 겁니다.

 

이때 이 종말 때 우는 자가 구원받는 자고

웃고 박수치면서 지혜 뒤에 숨는 자가 지옥가는 자가 된다는 겁니다.

 

진짜 눈물을 흘려야 할 종말때를 미리 앞당겨서 우는 자가 되라고

 

자녀를 위해 울라고 하시는 겁니다.

 

예상치 못한 고소로 인해 자기자녀가 두 동강 당해야 할 판국이다는 겁니다.

자기자식을 죽인 마귀들이 다른사람의 자녀를 빼앗고자 고소하는 그 고소를

당할 길이 없다 라는 겁니다.

 

어떻게 그 상황을 풀려고 하느냐 라는 겁니다.

 

그래서 나 예수는 우편에 앉으러 간다 라는 겁니다.

 

그 상황인 종말때에 우편에 앉는 지혜가 되기 위해서 말입니다.

지혜만을 바라보고 우는 자로 만들기 위해서 말입니다.

 

그러니 나를 위해 울지 말고 너와 너의 자녀를 위해 울어라 라는 겁니다.

예수님이 앉는 우편을 봐야 할 입장인

종말이 오니까 말입니다.

 

제가 이 부분을 힌트로 삼아서 마리아의 싸가지 없는 행동을 왜 칭찬했는지를 보게 되었습니다.

 

누가 봐도 언니 마르다가 예수님을 대접하고자 바쁘게 움직이는 가운데 일손이 딸려서

동생 마리아에게 도와달라고 하는데

정작 동생 마리아는 예수님 발 아래 앉아 말씀만 듣는 겁니다,

그래서 동생을 꾸짖어 달라고 선생 다움을 보여달라고 하니

정작 마르다를 꾸짖듯이 하고 동생 마리아는 칭찬을 하는 겁니다.

마음이 분주하니 여럿일을 하지 말고 줄이든지

정 안되면 한가지만 하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좋은 것을 택했으니 빼앗기지 않는다고 하시는 겁니다.

 

왜 이런 인간과 정반대의 해석을 하시는 겁니까?

또 도대체 좋은 것을 택했고 빼앗기지 않는다는 말은 무슨 말일까요?

 

종말 속에서 보면

즉 불 바깥에서 보면 우리가 정상이고 마르다가 정상이지만

불 속 심판속에서 보면 우리가 비정상이고 마리아가 칭찬받고 절대로 빼앗기지 않음을 보게 된다는 겁니다.

 

역사적 시선에서 보느냐

아니면 묵시적 시선에서 보느냐 하는 점입니다.

 

완전 정반대의 극과 극이지 않습니까?

 

마리아는 말씀을 택했고 마르다는 말씀을 택하지 않고 분주히 예수님을 대접하는 것을 택했다?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둘 다 말씀을 듣는데 있어서 차이성을 예수님께서 일부러 벌리셔서

대접할 꺼리를 준비한 후에 말씀을 듣고자 했고

지금 당장 말씀을 듣는데 있어서

예수님은 일부러 차이를 벌려서 그 간극의 틈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겁니다.

기여이 자신의 종말성의 의미를 부여하시는 겁니다.

 

종말성이 뭡니까

저는 신학을 몰라서 종말과 종말성과 종말적 등등의 차이성을 잘 모릅니다.

그냥 종말성의 성향 성격이라는 의미에서 제 생각을 말해보면

종말성은 끝의 상황이라고 미리 [끝이다] 라고 단정 지어서만 생각하지 말고

 

지금 당장 주님께서 어떤 차이성의 틈새를 벌려서

뭐는 통과가 안되고 뭐는 통과가 되는

그 차이를 말해주고자 하는 섬김 배려 알려주심을 종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원인 없는 결과인 겁니다.

원인 있는 결과는 그렇다면 차이성이 없는 거죠

종말은 원인 없는 결과가 그냥 닥치는

마치 역사가 아닌 묵시가 덮쳐지는 상황?

역사적 시선은 누구다나 다 이해가 가능하지만

묵시적 시선은 아무리 설명을 가장 잘하는 자도 납득을 시킬수가 없는 불가능성인 겁니다.

 

그래서 행함과 믿음의 차이는 역사와 묵시의 차이요

묵시는 역사를 침략하는 폭력성으로써 다가올 수밖에 없는 겁니다.

 

그리고 그 반작용으로써 역사는 비로소 묵시에 대항할 수 밖에 없고 말이죠

 

묵시가 역사를 침략하는데는 이유가 없습니다. 그냥 원인 없는 결과인데

반대로 역사는 묵시가 침략함에 있어서 비로소 그것에 대한 뒤늦은 반응인 겁니다.

그러니 원인이 있는 결과로써 원인에 따른 행동일 수밖에 없다는 거죠.

 

그러니 마르다를 일방적으로 칭찬하는 것이나

나를 위해 울지 말고 너와 너 자식을 위해 울어라 라는 말씀은

 

그야말로 불 속에 있어야만 비로소 듣을 귀 있는 소리가 되지

불 바깥의 역사 속에서는 무슨 소리인지 알길이 없는 소리가 되는 겁니다.

 

자녀를 위해 우는 자가 누구겠습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독생자 예수를 원수들에게 넘겨주는 하나님만의 눈물입니다.

 

그런데 이 눈물에 참예하고픈 자는 자발적으로 발생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자원하는 영을 심어버리니까

성령의 자작극이 벌어지는데

지혜의 자작극이 벌어지는데

 

바로 솔로몬 재판 앞에서 두 동강 나야할 자식을 보고 우는 한 어미인 기생이다는 겁니다.

 

그런 천한 신분의 여인이 이 지혜의 긍휼에 당첨이 되는 겁니다.

 

아무리 높은 신분의 여인도 이 긍휼에 참여되지 않는 판국에 말입니다.

 

자녀를 울 수 밖에 없는

그 울음이 지혜자의 지혜를 더욱더 높이는데 활용이 되는

자신은 그저 자녀를 우는 것 밖에 없는

지혜자의 재판에 원망만을 했을 뿐인데

지혜자는 자신의 지혜를 더욱더 높이고자

일부러 소경되게 하셔서 하나님의 영광을 높이고자 소경되게 하시듯

이 아이의 운명이 지혜자의 판결의 칼에 두 동강 곧 종말이요 심판이지요

그 심판을 받는 겁니다.

 

정작 심판은 딴데로 가야함에도 불구하고 이 아기가 받아야 하는

 

원수에게 내어주시는 아낌없이 자녀를 내어주신 하나님의 눈물로써 말입니다.

 

이런 묵시적인 행동

지혜자의 행동이 바로 믿음이라는 종말때에만 나타나는 마음이다는 겁니다.

믿음이란 종말때에만 나타나는 묵시적인 차이행동입니다.

차이만이 무한반복이 되니까 말이죠.

 

같은 의미로 막살아라 라는 표현 자체가 묵시적인 표현으로 나타나면

반드시 역사는 반대로 대항하게 됩니다.

역사는 역사만이 전부이기에 이 막살아라 라는 실재계의 용어를 무시해야만

역사를 지킬수가 있는 겁니다.

 

그러니 막살아도 막살지 않아도 이미 문자에 얽매이게 되는 겁니다.

그러나 묵시적인 존재 곧 종말의 사람은

막살아라 라는 용어가 전혀 이상하거나

거부감이 들거나 그렇다고 이 명령어를 지킬려고 하는 부담을 가지거나 하는 것이 없이

원래 그대로 누리도록 되어 있다는 겁니다.

 

모든 것이 불 속에서는 누리는 것 뿐입니다.

어차피 통과 못하거든요

불을 통과할 것들은 아무것도 없으니 말입니다.

그러니 불 속에서의 유일한 가치는 오로지 예수님 뿐입니다.

그 분과 함께 춤출 일 뿐인 겁니다.

그러나 막춤춰야할 것 뿐인 거죠.

 

아니 어떤 놈이 불속에서 막춤추면 안된다 점잖하게 건전한 춤을 춰야 한다 라고 할 놈이 어디 있겠습니까?

 

불을 얼마나 모독하고 무시했으면 그런 소리를 하느냐 말이죠.

 

불도 통과못할 소리를 하는 겁니다.

역사 속에서 하던 버릇대로 말입니다.

 

그러니 막살아라 라는 용어가 괜히 공포로 작용하게 되니

반대의 성향으로 거리두기를 하는 겁니다.

당해야 할 자들이 오히려 간격두기를 자신들이 주체가 될려고 하니까

말려드는 것입니다.

 

저 세리와 같지 않음을 감사합니다.

 

캬 성경말씀은 인간의 숨어있는 마음을 정곡을 찌르고 있는 겁니다.

 

이것이 인간 행함의 최종 목표입니다.

 

저 세리와 같지 않음을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라는 이 마음이

인간이 보여줄 수 있는 전부요 한계입니다.

 

더 이상 없습니다.

 

제사를 안드려서 지옥이 아니라

제사를 드렸는데 더 나은 제사가 되지 못한다는 점에서 지옥행입니다.

초과잉의 제사를 못 드리는 겁니다.

 

그야 당연하죠 싸가지 없는 마리아처럼

제사드릴께 아니라 초과잉의 제사를 누가 드렸는가를 보면 단번에 끝

 

단번의 제사입니다.

 

단 번

 

단 한 번

 

이 단 한번의 초과잉의 제사로 다 끝난 게임 오바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제사를 아무리 드려도 끝나질 않습니다.

계속 계속 시치프스의 신화처럼 저주 받은 것처럼

오히려 그것을 복받았다고 우기는 식입니다.

그러니 제사를 드려도 종말이 되지를 않는 겁니다.

끝나지 않고 찜찜하게 뭔가 남아있어서 계속 유보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니 모호한 입장에서 종말이 아닌 겁니다.

 

그럼 종말이 뭐냐? 모호하지 않고 당황하지 않고 끝

얼마나 깔끔합니까 빨래 끝 ~~~~ 속이 다 후련합니다.

 

끝나면 얼마나 속이 후련한지 남아있는 여운이 없다는 겁니다.

모호하지 않고 의문스러운 것도 없고 미흡하거나 미완료적인게 없다는 뜻이 종말인 겁니다.

 

그 분이 바로 예수님이다는 거죠.

 

그런데 인간은 계속 미련과 여운이 남아서 뒤돌아 봐야 합니다.

가만히 있어 보자! 내가 가스불 끄고 나왔나?

자꾸 뒤돌아 보면서 다시 점검할려고 돌아설 수밖에 없는 발걸음이 되는 겁니다.

건망증 때문인지 아니면 진짜로 안 끄고 나온 것인지

 

이것이 역사성 곧 종말성과 반대되는 역사성이다는 겁니다.

 

그래서 마리아는 이 종말성을 보여주는데 있어서 마리아를 일방적으로 칭찬했을 뿐이고

마르다는 평상시 한 행동을 이 종말성과 대립되는 역사성으로써 말한 것 뿐이지

 

이 둘을 고정시켜 버린 것이 아닙니다. 언제나 수시로 자리가 뒤바뀌게 되는 겁니다.

그 순간의 찰나를 예수님은 차이의 틈새로써 자신의 종말성을 증거하는데 활용하신 겁니다.

 

지난 시간에 말했지요 이순신이 지금 걱정 되어서가 아니라

자신들도 지금 현재에 살면서도 불안한 겁니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이순신 때나 지금의 때나 마찬가지인 겁니다.

그런 입장에서 찾아오심 자체가 불가능성이지

 

이순신 걱정할 입장이 못된다고

예수님 당시의 사람들은 그럼 그렇게도 복음 들어도 안되는데

이순신 걱정보다

지금 나와 내 자식을 더 걱정해야 할 판국이 아니겠습니까?

 

이 글을 보는 분들의 자기자녀를 생각해 보세요

아무리 성경에 적혀 있다고 한들

과연 울겠습니까?

 

안 웁니다.

 

그럼 울면 과연 종말을 제대로 본 것일까요?

울었다는 행함만이 여운으로 남아서 계속 더 더 더 뒤돌아 보게 될걸요?

 

그 어떤 누구도 나는 지금 심판받아 마땅한 천하의 죄인 중의 괴수이다 라는 시선

곧 종말의 시선을 가진자는 없습니다.

 

원인도 없이 그냥 심판받아 두 동강 나야 마땅한 자신을 쳐다볼수가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두 동강 나시는 겁니다.

아무도 없기에

울수 있는 자가 아무도 없기에

제발 좀 울어라 라고

 

비로소 욥은 예수님의 이유 없는 십자가의 죽으심 앞에서

자신에게 닥친 모호한 재앙으로 밤새도록 벽돌로 끓어대는 그 고통이

예수님의 고난 앞에서는 뻔데기 앞에 주름잡는 격임을 알고

고쳐달라고 낫게해달라고 다시는 외치지 않는 겁니다.

 

자신의 아픔은 그에 비하면 세발의 피 였음을

얼마나 충격적인지 초과잉의 또렷함을 비로소 보게 된 겁니다.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데 내 아픔이 나를 꾀더라 말이죠

 

입이 쑥 들어가는 겁니다.

부끄 부끄 부끄 머리에 숯불을 얹은것처럼

그렇게 솔로몬의 재판에 원망을 했는데

사실은 그것이 마귀를 끌어들이는 지혜로써

오히려 너무 너무 또렷하고 명료한

단번의 제사였다는 겁니다.

 

(6:10, 개역) 그의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의 살으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으심이니

(7:27, 개역) 저가 저 대제사장들이 먼저 자기 죄를 위하고 다음에 백성의 죄를 위하여 날마다 제사 드리는 것과 같이 할 필요가 없으니 이는 저가 단번에 자기를 드려 이루셨음이니라

(9:12, 개역)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9:26, 개역) 그리하면 그가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자주 고난을 받았어야 할 것이로되 이제 자기를 단번에 제사로 드려 죄를 없게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셨느니라

(9:28, 개역)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 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 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

(10:2, 개역) 그렇지 아니하면 섬기는 자들이 단번에 정결케 되어 다시 죄를 깨닫는 일이 없으리니 어찌 드리는 일을 그치지 아니하였으리요

(10:10, 개역)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1:3, 개역)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우리의 일반으로 얻은 구원을 들어 너희에게 편지하려는 뜻이 간절하던 차에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는 편지로 너희를 권하여야 할 필요를 느꼈노니

 

 

인간 중에는 이런 단 번의 지혜는 없는 겁니다.

쌓고 쌓아서 연습과 단련과 복슴을 통해서

비로소 지혜를 펼쳐도 역시나 부족해서 다시 쌓고 쌓아서

달인이 되어도 늘 모호하고 미흡할 뿐인데

 

이런 단번의 제사로 마귀도 잡고 아이도 살려내고 어미의 원망도 용서하는

일타 쌍피 삼피 한번에 세 마리의 난제를 다 해결해 버리는

꼬끼오 꼬끼오 꼬끼오가 되는 겁니다.

 

단 번에 죄용서 하는 곳 있으면 나와보라 하세요

얼마나 구찮게 이거해라 저거해라 그래야 죄를 사함받는다고

오히려 사기를 치잖아요

모든 종교가 말입니다. 그것도 기독교가 제일 심해요 카톨릭하고

완전 사기집단입니다. 강도의 소굴입니다.

광명한 천사의 얼굴을 한 양의 탈을 쓴 늑대소굴입니다.

 

의에 대하여 죄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따로 따로 한 개를 해결할려고 해도

수십 수천 아니 불가능하죠 단 한 개도 안되는 판국인데

이것을 단번에 다 해결했다는 겁니다. 남겨진 여운도 없이 깔끔하게 또렷하고 명료하게 완전하게 다 말입니다. 미흡함이 없습니다.

 

성화론자들이 왜 악마적인고 하니 오히려 성령을 더더욱 모호하게 만들어서

계속적인 반복을 강요한다는 점입니다.

이건 성령이 아니라 마귀 악령이지요.

 

백날 해보세요 과연 단번에 하심과 족히 비교가 되는가?

오히려 근심만 더 늘어날 겁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지심을 다들 그런식으로 걱정한 겁니다.

 

(16:5, 개역) 지금 내가 나를 보내신 이에게로 가는데 너희 중에서 나더러 어디로 가느냐 묻는 자가 없고

(16:6, 개역) 도리어 내가 이 말을 하므로 너희 마음에 근심이 가득하였도다

(16:7, 개역) 그러하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16:8, 개역)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16:9, 개역) 죄에 대하여라 함은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16:10, 개역)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

(16:11, 개역)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니라

(16:12, 개역)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치 못하리라

(16:13, 개역)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종말을 그렇게 근심꺼리로 생각한 겁니다.

기쁨이 전혀 안된다는 겁니다.

 

과연 내 자식을 위해서 우는 그 종말적 행위가 기쁨으로써 자발적으로 자동적으로

나타날까요?

 

아니면 억지로 하라고 해서 해야만 하는 울음인 겁니까?

 

예수님이 지금 억지로 십자가를 지고 억지로 십자가에 죽으시러 가시는 겁니까?

아닙니다.

 

그런 예수님 앞에서 우는 자들은 억지로 우는 겁니다.

팔자 더럽다고 괜히 정치권력에 까불다가 죽는구나

내가 보기엔 참 괜찮은 청년인 것 같은데 개죽음이라네 참 안타깝네

다들 그런 근심인 겁니다. 더 이상 기적도

멋들어진 성경해석도

난치병을 고쳐주는 배려도 없게 될테니

저들은 고쳐주지 않았지만

예수라는 청년은 참으로 고맙게도 고쳐주더니 말이죠.

 

그런데 이런 의식도 종말의 불을 못 통과하는 겁니다.

 

인간의 한계요 단번에 될수 없는 역사성만을 나열하는 행함의 눈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것 교체시키고자

묵시적인 존재로 새창조하시고자

기쁨마음으로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고 즐겁게 가시는 겁니다.

 

마치 진짜 창조때와 똑같습니다.

다들 무질서 카오스 자체인 겁니다.

즉 어두움 그 자체입니다.

단 하나도 어둡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빛을 대조적으로 창조하심으로써

생명을 처음 창조해야만 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얼마나 제대로 된 지적이십니까?

나를 위해 울지 말고 너와 너 자식을 위해 울라

 

물론 지킬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항상 하나 마나 한 소리입니다.

막살아라 라는 표현도 결국 하나 마나 한 소리입니다.

그냥 단번에 덮쳐져서

선악과 무관한 은혜가 덮쳐진 단번에 덮쳐진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덮쳐진 은혜만을 누리는 삶이다 라는 겁니다.

 

그것을 주시고자

주님은 십자가로 돌진하시는 겁니다.

 

행진 앞으로 ~~~ 행진 앞으로 ~~~ 가는 거야 ~~~~~

 

그 와중에 여인들의 울음이 거슬려서

왜 누가 죽었니 울게?

 

예수님이 죽잖아요????

 

아이고 참나 참의미없다.

나는 안죽어

그런데 너와 너 자녀들이 죽네

 

야야 야들아 지금 정작 죽어야 할 자를 위해 울어야지

살자를 위해 우는 자가 누가 있냐?

 

엥 무슨 소리입니까?

우리는 안 죽어요

예수님 너무 힘들어서 정신을 못차리시나 보네요

우리는 안 죽고요

지금 예수님이 죽는다니깐요

그 증거가 예수님이 지시는 십자가잖아요

 

야들아 정신은 내가 멀쩡하고

너희들이 오히려 정신을 못차리는 구나

여러개로 근심하지 말고 하나만 하든지 아니면 아예 근심을 하지 말든지 하라

나는 안 죽고 너희들은 저 불속에서 어떻게 나올래????

 

 

유대인이 구약을 모를 리가 없습니다.

 

그렇게 다니엘 다니엘 심지어 묵시운동 묵시적 하나님나라 운동을 펼쳐도

역시나 모호한 역사적 행함이였지 믿음이 아니였습니다.

왜냐? 믿음은 예수님이 주시니까 말입니다.

예수님과 연관된 마음이 믿음이지 즉 예수의 마음이지(2:5)

준적도 없는데 백날 묵시운동을 해봤자 소용없고 모호하고 수시로 반복해야지

단번에 되지를 않는 겁니다.

그럼 예수님 오기 전의 참선지자들은

그들은 예수의 마음인 성령이 미리 와서 예수님을 위해 카페트를 깐겁니다.

역시나 예수님을 위해서 말입니다.

그러니 유대인이라고 해서 하나님을 믿는다고 예수님의 영을 받은게 아니다는 거죠.

 

그런 다니엘서를 보면서도

불 속의 시선과 불 바깥의 시선이 달랐다는 것을

그 차이성을 불 속에서 보여준 다니엘서를 유대인들이 모를 리가 없잖습니까?

그런데 아무리 간극두리고 저 세리와 같지 않음을 하나님께 감사해본들

역시나 불 속에서의 차이성이 아니라

모호한 불 바깥에서의 도토리 키재기로 간극을 벌렸던 겁니다.

단번의 제사이기는커녕 오히려 더더욱 모호한 짖만 골라서 했던 겁니다.

의문의 짖을 해놓고서 말입니다.

 

정작 세리는 자신에게서는 그 어떤 의도 나오지 않음을 고백하고

고쳐달라고 불쌍히 여겨달라고 우는 겁니다.

 

두 동강 나야할 자녀를 위해서 그 어떤 방법도 통하지 않음을 알고 울 수 밖에 없듯이

무능하고 체념하고 도저히 이 갇힌 상황

포로된 상황에서 벗어날 길이 없다는 겁니다.

 

더 이상의 권력이 없는 왕이 그 솔로몬 왕이

그 지혜의 왕이 자기자식을 두 동강 내라고 하니

더 이상의 해결 방법이 없는 겁니다.

 

왕이 왕 스스로가 판결을 뒤짚어버리지 않는 이상

 

지혜가 지혜 스스로를 배반하지 않는 이상

 

이 단 번의 일타 삼피를 잡을 수 없는 겁니다.

 

다른 자들 또는 다른 것들은 그저 모호함만 더욱더 더할 뿐이다는 겁니다.

 

그것이 지혜자가 지혜 스스로 어리석은 지혜인 십자가로 향하는 길 밖에 없는 겁니다.

 

이것이 가장 또렷하고 명료한 단번의 제사입니다.

 

이런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데 누가 꾀더냐 말이죠

 

오늘날 교회입니다. 오늘날 기독교입니다.

이 세대에 우리는 그들과 피할수 없는 상황에 놓여져 있습니다.

울 수밖에 없습니다.

모호한 것들 속에서 구해달라고 ~~~~

 

또렷한 십자가가 밝히 보이니까 말입니다.

 

이 종말 때에만 십자가가 밝히 또렷하게 보이는 십자가를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

 

울어야만 하는 어미의 심정처럼 말입니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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