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 인듯 우연 아닌 우연 같은 예언 (23:50-56)

 

(23:50, 개역) 공회 의원으로 선하고 의로운 요셉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23:51, 개역) (저희의 결의와 행사에 가타 하지 아니한 자라) 그는 유대인의 동네 아리마대 사람이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러니

(23:52, 개역)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의 시체를 달라 하여

(23:53, 개역) 이를 내려 세마포로 싸고 아직 사람을 장사한 일이 없는 바위에 판 무덤에 넣어 두니

(23:54, 개역) 이 날은 예비일이요 안식일이 거의 되었더라

(23:55, 개역) 갈릴리에서 예수와 함께 온 여자들이 뒤를 좇아 그 무덤과 그의 시체를 어떻게 둔 것을 보고

(23:56, 개역) 돌아가 향품과 향유를 예비하더라 계명을 좇아 안식일에 쉬더라

 

 

부자 아리마대 요셉에 대한 부분이 우발적으로 나옵니다.

즉 필연 하면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유대인에게 있어서 더욱더 제대로 실현이 되어야 하는데

정작 그들은 이런 십자가의 일을 우연으로 취급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정작 필연은 하나님 말씀에 대한 사수를 자신들의 일이라고 본 겁니다.

 

그러나 정작 그런 인간들의 필연성을 피하면서 우연으로써 예언이 성취가 됩니다.

그 증거가 아리마대 요셉의 돌발적인 행동입니다.

학자들은 이 행동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전혀 예상할 수 없는 행동이기 때문이다는 겁니다.

그러니 원인 없는 결과인 거죠.

 

필연 곧 예언은 누구보다 유대인들이 달달달 외우고 있는 바입니다.

그들의 모든 행동은 다 필연적입니다.

 

즉 오늘날 성화론자들이 하는 말과 같습니다. 다 필연적이다는 겁니다.

 

그런데 정작 그런 필연성을 피하면서 우연적으로 벌어지는 말씀성취라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이것이 바로 제사를 안 드린게 아니라

제사 보다 더 나은 제사 라는 의미이다는 겁니다.

 

즉 필연 보다 더 나은 필연으로써의 우연이다는 겁니다.

비필연성은 곧 필연 보다 더 필연적이다는 의미에서 비필연성 곧 우연이다는 겁니다.

 

그러니 아리마대 요셉의 돌발적인 행동

아무도 예상 못한 우연적인 행동이

정작 구약의 이사야 539절에 나온 말씀의 성취로써

예언된 대로 벌어졌다는 겁니다.

 

(53:9, 개역) 그는 강포를 행치 아니하였고 그 입에 궤사가 없었으나 그 무덤이 악인과 함께 되었으며 그 묘실이 부자와 함께 되었도다

 

 

즉 이 말은 요셉 개인의 구약말씀 성취가 아니라

예수님의 모든 활동이 바로 구약의 기록된 대로 이루신바이다는 겁니다.

여기에 아리마대 요셉이 동원이 되어 배치된 겁니다.

 

그렇다면 정작 예수님을 죽이는 유대인들이 자신들의 행동이 구약의 말씀 성취로써 이루어졌다 라는 것이 틀리게 된 것이다는 겁니다.

 

두 쪽다 서로가 필연적이다 라고 우기지만

정작 예수님 중심으로 모든 사람이 배치가 되는데

예수님만이 말씀 성취였다는 것을 증거로

아리마대 요셉이 구약의 말씀 성취로 동원이 된 겁니다.

 

빌라도에게 예수님의 시체를 달라고 하는 모습에서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죽이는 것에 목표를 두다 보니

구약의 그 뒤의 말씀 성취까지는 놓쳐 버렸기에

여기에는 유대인이 나오지 않습니다.

 

자 이런 의미에서 필연성을 성취한 유대인 보다

예수님의 죽음은 우연성으로써 필연 보다 더 필연적이기에

아리마대 요셉이 예수님이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요셉은

예수님의 주 되심을 위해서 동원이 되는 자였다는 겁니다.

즉 예수님은 죽었으니까 유대인 생각처럼 끝나버린게 아니라

오히려 예수님의 활동은 더욱더 가속화 되듯이

아리마대 요셉까지 기록된 말씀의 성취를 위해 동원이 되어야 하는

그렇게 요셉까지 예수님은 다루신다는 겁니다.

 

왜 필연성과 우연성을 제가 언급하는고 하니

예수님의 죽음 뒤에

아리마대 요셉까지 예수님은 부지런히 쉬지도 않으시고 그를 움직이게 하셔서

말씀 성취에 분주하게 활약하신다는 명료성 때문입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정반대입니다. 예수님의 죽음 뒤에

더욱더 자신들이 예수님의 죽음을 헛되이 하게 하면 안된다는 이유로

자꾸 필연적으로 만들려고 하는데 힘쏟는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것이 결국은 육의 자랑이 되어버렸기에

모호하고 흐릿하게 되어 버리는 겁니다.

즉 살아있기에 활동을 했는데

정작 죽은 예수님의 활동에 비해서 전혀 과잉적이지 않다 라는 겁니다.

 

오히려 움직인 만큼의 보상을 육 스스로가 자꾸 요구하기에

거기에 주저 앉아 버릴 수밖에 없는 겁니다.

 

이것을 곤고하다 라고 지난시간에 말했습니다.

 

즉 자신이 주님의 일하심에 보탬이 되고자 나섰는데

그 결과는 엉뚱하게 육의 자랑 외에는 되지를 않더라 라는 겁니다.

그것은 남도 자기도 구원 못할뿐더러 오히려 더욱더 예수님을 훼방할 뿐이다 라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런 문제 때문에 늘 책망받았던 겁니다.

 

특히 베드로는 그런 책망의 대표자로써

우리들의 모습을 대변해 주고 있는 겁니다.

 

늘 베드로는 7번 용서했는데 몇 번 더 용서할까요 라는 모습을 대변해 줍니다.

부자청년이 가난한자들에게 전 재산을 나누어 주지 못하고 등돌리고 돌아서니까

정작 베드로 자신은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라고

 

자기 스스로가 자신의 차이성을 주장하게 됩니다.

 

바로 이겁니다. 성화론자들이 잘못된 이유는

차이성을 자기 스스로가 어떻게 해서든 나타낸다는 겁니다.

 

그런데 정작 차이성은 자기 스스로도 인지 못할 정도로

오직 성령의 숙제로써만 나타난다는 점이다는 겁니다.

그것이 차이가 되고 그 차이가 우발적이면서

제대로된 간극을 보여주게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성화를 인간 스스로가 해 버리니까

그 차이는 결국 바리새인처럼 저 세리와 같지 않음을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라는 것 밖에 안된다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더 큰 차이성을 가진자가 나타나면 어떻게 되겠느냐 라는 거죠?

 

그렇게 되면 살인의지로 돌변하는 상황이 순간적으로 발생하게 된다는 겁니다.

 

범죄학에서는 0.5초만에 멀쩡하던 인간이 살인자로 변할수 있다 라고 합니다.

그 이론에 예외적인 인간은 없다 라는 겁니다.

 

누구든지 성질 건드리면

그것도 참을수 없는 상황으로 몰리면

0.5초 만에 모든 인간은 살인자로 돌변한다 라고 범죄심리학자가 자신있게 말하는 겁니다.

 

제가 라쇼몽 이라는 영화를 본다 본다 해놓고서 앞부분이 하도 지루해 보이고

재미없어 보여서 그 동안 미루고 있다가

역시나 앞부분 심지어 2/3까지 지루해서 겨우 그 부분을 넘기니 그제서야 흥미진진하게

이야기가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아주 낡은 가옥의 문패에 라쇼몽이라고 적혀 있는데

라쇼몽의 뜻이 나생문 그물에서, 태어난, , 라고 검색이 되던데

정작 제가 이 영화를 보니까 지옥문이라는 느낌이였습니다.

마치 연극을 영화화 한 느낌이 들었는데

그래서 인지 라쇼몽의 뜻이 보고 싶은 것만 본다 라는 의미도 있더군요

네 사람이 사건에 휘말리게 되는데

정작 네 사람의 사건에 대한 진술이 다 다르다 라는 겁니다.

그 사건 속에 있었으면서도 불구하고 저 마다 자신만이 믿고픈 것만 진술을 하니

거짓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진실이 하나로 엮어지지가 않는 겁니다.

그래서 모르겠다 모르겠다 라고만 말하는 대사가 자주 나옵니다.

인간은 쥐 뿔도 아무것도 모른다.

너 자신을 알라 라는 신탁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기라는 생명을 미래의 희망으로 보고

살아있음이라는 의미를 둔다 라는 그런 의미로 보였습니다.

 

비로 절망적이라도 말이죠. 지옥의 문에 태어났어도 말이죠.

 

오늘 제목과 연관시켜 보면

결국 인간은 예수님이 필연성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는 자신이 결국은 필연이다는 겁니다. 성화론도 그런 식이지요.

 

그런 입장에서 결국은 예수님은 우연인 겁니다.

자신의 7번 용서라는 필연에 예수님은 770이라는 우연일 뿐이다는 겁니다.

 

주여 주여 제가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쫏아내었습니다 라는 것보다 더 필연적인 것이 어디있겠습니까? 최고의 경험인 주이상스죠.

 

 

저런것은 전혀 필연이 될 수가 없는 겁니다.

필연 인듯 필연 아닌 필연 같은 우연

 

이라는 이 혼란성 그물 무질서 곤고함 뿐이다는 겁니다.

 

그런데 더 큰 기쁨이 있다는 겁니다.

제대로 된 간극이 있다는 겁니다.

오히려 우연 인 듯 우연 아닌 우연 같은 필연

 

바로 창세전에 생명책에 기록된 이름을 더 기뻐하라 라는 겁니다.

 

전혀 필연같지도 않은 붕뜨는 소리 아닙니까?

 

오늘 본문에 나온 아리마대 요셉이라는 부자가 예수님의 묘를 산다 라는

이 본문을 보고

기쁨이 샘 쏟던가요?

 

(53:9, 개역) 그는 강포를 행치 아니하였고 그 입에 궤사가 없었으나 그 무덤이 악인과 함께 되었으며 그 묘실이 부자와 함께 되었도다

 

이 구약의 말씀이 성취되는 구나 라고

구약을 달달 외우는 유대인들은 전혀 기뻐하라 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과연 이 본문을 구약의 이사야 말씀이 성취되는 것을 보고 기뻐하느냐 말이죠.

 

즉 필연화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7번 용서라는 체험도 안되고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어떻게 770번 용서는 오죽하겠습니까?

 

분명히 본문 하나 하나가 철저하게 구약의 예언된 대로

기록된 대로 이루어짐에도 불구하고

필연은커녕 우연으로도 체험이 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저 우리는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믿고픈 것만 믿고

기뻐할만한 것만 기뻐할 뿐이다는 겁니다.

 

즉 단절이다는 겁니다.

그것도 단절의 단절 이중단절이다는 겁니다.

 

완전히 별나라 이야기요

나와 무관한 딴 세계의 이야기요

그런 상황이

지금 예수님의 말씀 성취가 유대인 속에서 그렇게 펼쳐지니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이런 모습이 딴나라 모습이다는 겁니다.

분명 같은 성경을 보고서도 전혀 다른 겁니다.

 

지난 시간에도 말했듯이 해골 언덕을 서로 올라갈려고 하는 자는 아무도 없다고 했습니다.

이런 낯설음을 서로 누릴려고 하는 자는 없습니다.

 

그저 익숙한 기쁨을 누릴려고 하는 겁니다.

그것은 결국 나의 기쁨이 되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나의 기쁨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주님이 주시는 기쁨 뿐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낯설은 용서입니다.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용서 하시는 그 용서입니다.

얼마나 낯설었으면 다윗이 아브라함이라는 믿음의 조상

곧 처음자리를 비로소 인용하겠습니까?

 

즉 이 말은 익숙한 것

자신에게 믿고픈 것 보고픈 것 기쁜것만 골라 골라 즐겼다는 겁니다.

그것은 오히려 모호합니다.

 

사도바울도 똑같이 인용합니다.

로마서 4장에서 말이죠

믿음의 대가가 믿음과 행함을 대조하면서

자신이 그 동안 믿었던 믿음은 행함이였고

오히려 도저히 믿겨지지 않는 낯설음 믿음이

자신에게 쳐들어 왔다 라고 로마서 4장에서 행함과의 대조로써 낯설은 믿음을 언급하고 있는 겁니다.

 

아리마대 요셉의 등장은 그야말로 낯설어야 합니다.

이 사람의 뚱딴지 같은 등장이 우리가 익히 잘 안다고 잘 믿는다고 여기는

그 익숙한 것들을 위협하는 자극이 되는 믿음으로써 작용하지 않나요?

왜 예수님은 죽으시면서까지도

이 요셉의 등장을 반드시 구약의 성취 곧 기록된 예언된 말씀 성취로써 이 인물을 등장시켜야만 하셔야 하느냐 말이죠.

 

물론 앞에서도 나옵니다.

나귀를 달라고 하니 주인이 아무런 거부반응 없이 주는 것도 그렇고요

 

다 낯설고 우연적이다 라는 겁니다.

 

뭐 하나 익숙한 것이 없다 라는 겁니다.

 

오히려 낯설지 않고 익숙해야 하지 않냐 말이죠.

구약에 예언된 대로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유대인들이 느끼는 것처럼

구약에 예언된 말씀을 잘 안다고 하지만

정작 예수님과 관련된 모든 사건 하나 하나가 낯설기 짝이 없다 라는 겁니다.

 

그런점에서 인간과의 차이점이 제대로 그 간극으로써 벌어진다는 겁니다.

7번 용서에 대조된 770번처럼

백데나리온에 대조되는 일만달란트처럼

나만 남았나이다 에 대조되는 7천명처럼 말입니다.

 

우리는 아무리 날고 뛰어봐야 7번 용서 쪽의 익숙함 필연성을 주장하지만

예수님은 그 반대의 반대, 단절의 단절로써 770번 용서의 낯설음 우연성이다는 겁니다.

 

이 간극 만이 제대로 된 명령어 이다는 겁니다.

성경에 나오는 명령어를 우리는 필연적으로 취급했는데

알고보니 그 필연을 취급하는 나를 결국 필연화 시키다 보니

 

정작 명령어는 우연성으로 작용케 되는 겁니다.

그러니 다들 비웃습니다.

다들 고만 고만하게 7번 용서냐 8번 용서냐 라고 도토리 키 재기 할 때

770번 용서하는 자가 나타나니까

비로소 살인의지가 드러나는 겁니다.

770번 용서자가 나타나버리면 재미가 없어지는 겁니다.

단번에 제사를 드려 버리면

 

계속해서 드리는 제사가 무용지물이 되어버리니가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히 주를 삼키게 되는 겁니다.

 

너무 월등한 것이 나타나버리면 라쇼몽 곧 혼란과 무질서가 되어버리니가

자신들이 도둑놈이라는 것이 드러나 버리니까 말이죠.

 

아는 것이 쥐뿔도 없었다 라는 것이 들통나 버리니까 말이죠.

 

라쇼몽은 악인의 장소 라는 뜻이거든요.

 

너무 너무 극적인 차이의 초과잉적 간극의 인간이 나타나면 안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예언은 정작 그 분만을 위해서 기록된 겁니다.

 

필연이 말입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예언을 기다린다고 하면서도 정작 그 예언을 비웃어 버리는 짖을

예언을 믿는 자들에 의해서 자행이 되는 겁니다.

필연을 추구하는 자들이 필연을 죽이더라 말이죠.

 

?

 

왜 일까요?

 

진짜 필연 되신 예수님은 나 라는 존재를 소외 배제 단절 시켜 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죽여 버리는 겁니다. 우연 취급해 버립니다.

 

그런데 나를 우연 취급해 버리는 그 소외 배제성의 예수님이

우연이 되심으로써

 

우리의 우연에 뛰어드시는 겁니다.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용서 하시는 그 기쁨만을 주실 뿐이다는 겁니다.

다른 것 주시지 않습니다.

돈도 안 주십니다.

금도 안 주십니다.

은도 안 주십니다.

 

아무것도 주지 않습니다.

오직 주시는 것은 딱 하나

 

이름 뿐입니다.

 

(3:6, 개역) 베드로가 가로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하고

 

(2:19, 개역) 나무더러 깨라 하며 말하지 못하는 돌더러 일어나라 하는 자에게 화 있을진저 그것이 교훈을 베풀겠느냐 보라 이는 금과 은으로 입힌 것인즉 그 속에는 생기가 도무지 없느니라

 

금과 은으로 포장된 것은 생명이 없다 라는 겁니다.

 

생명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다는 겁니다.

죽은자도 살리는 영, 생명의 이름으로써 유일한 이름이다는 겁니다.

 

(고전 15:45, 개역) 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주는 영이 되었나니

 

이 이름 만이 용서의 이름이요

나의 이름을 삭제 하는 이름이다는 겁니다.

새이름이다는 겁니다.

새롭다 즉 낯설다 라는 겁니다.

헌 것은 익숙한 것을 버리게

이전 것은 지나가게 하는 이름이다는 겁니다.

 

아리마대 요셉은 일종의 예수님의 또렷한 말씀성취의 증상으로써 동원이 되는

하나의 증거물로 보시면

요셉은 아주 아주 낯설은 존재이어야 한다는 겁니다.

익숙한 것들과 차이나는 대조나는 간극으로써 증상물 징후물이다는 겁니다.

 

십자가의 용서가 하나님나라가 투입시킨 낯선인물인 겁니다.

 

그래서 주의 주 되심을 위해 동원이 되는 겁니다.

은사도 결국 낯선 우발적인 우연적인 겁니다.

그러면 반드시 필연적인 것들과 차이 또는 충돌 대립에 놓이게 되겠지요.

 

이렇게 철저하게 기록된 예언대로 즉 다른 말로 성령의 인도로써만

말씀이 성취되지

인간의 개입은 일체 없다 라는 겁니다.

 

이 본문을 가지고 요셉의 실천으로 해석하는데 정반대입니다.

오히려 배제성 소외성을 제대로 보여주는 겁니다.

 

모든 것이 성령의 일하심으로만 일괄 처리 된다는 점에서

우리는 이 낯설음을 누릴 뿐입니다.

 

아무리 익숙하게 만들고자 해도 소용없습니다.

 

주님의 사랑은 포착되지 않고 먼저 앞서서 벌어지니까 말이죠.

우리는 그저 당위 곧 마땅히 아니 하고서는 못배기는 그 누림 속에서

 

세상이 주지 못하는 기쁨을 누리는 겁니다.

주님이 창세전에 생명책에 기록된 그 낯설은 기쁨대로 말입니다.

 

 

바로 십자가의 피흘리심으로써 단번에 죄를 용서하신 그 용서의 사랑말입니다.

 

 

(벧전 4:8, 개역) 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10:12, 개역) 미움은 다툼을 일으켜도 사랑은 모든 허물을 가리우느니라

 

(1:18, 개역)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되리라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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