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탄한 말로 보이는 사도들 (24: 1-12)

 

처음에는 오독, 나중에는 정독

 

(24:1, 개역) 안식 후 첫날 새벽에 이 여자들이 그 예비한 향품을 가지고 무덤에 가서

(24:2, 개역) 돌이 무덤에서 굴려 옮기운 것을 보고

(24:3, 개역) 들어가니 주 예수의 시체가 뵈지 아니하더라

(24:4, 개역) 이를 인하여 근심할 때에 문득 찬란한 옷을 입은 두 사람이 곁에 섰는지라

(24:5, 개역) 여자들이 두려워 얼굴을 땅에 대니 두 사람이 이르되 어찌하여 산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24:6, 개역)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 갈릴리에 계실 때에 너희에게 어떻게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라

(24:7, 개역) 이르시기를 인자가 죄인의 손에 넘기워 십자가에 못 박히고 제삼일에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셨느니라 한대

(24:8, 개역) 저희가 예수의 말씀을 기억하고

(24:9, 개역) 무덤에서 돌아가 이 모든 것을 열한 사도와 모든 다른 이에게 고하니

(24:10, 개역) (이 여자들은 막달라 마리아와 요안나와 야고보의 모친 마리아라 또 저희와 함께한 다른 여자들도 이것을 사도들에게 고하니라)

(24:11, 개역) 사도들은 저희 말이 허탄한듯이 뵈어 믿지 아니하나

(24:12, 개역) 베드로는 일어나 무덤에 달려가서 구푸려 들여다 보니 세마포만 보이는지라 그 된 일을 기이히 여기며 집으로 돌아가니라

 

 

지난 시간에 아리마대 부자 요셉 이야기를 하면서 우발적인 배치라는 의미에서

필연성을 강조하는 인간의 믿음과 대조 된다고 했습니다.

 

즉 인간은 자신의 믿음을 필연화 할려고 합니다.

그런데 그 필연성의 믿음이 사실상 살인의지라고 했습니다.

 

오히려 그들의 필연적인 믿음에 의해 죽임을 당한

또는 소외 배제 무시 잉여로 취급당하는 우연성의 믿음이

 

이들의 필연성 보다 더 필연적인 의미에서

우연과 필연을 비교로 차이성을 말했습니다.

 

과연 누가 자신의 믿음을 우연으로 여기겠습니까?

그런데 유일한 진짜 믿음이 바로 십자가에서 나온 믿음입니다.

 

인간들은 십자가에서 나온 믿음이기에 더 필연적이다 라고 하지만

그 필연성이 결국 자기에게로 귀환하기 때문에

십자가도 결국 자기구원용으로만 취급할 뿐인 겁니다.

 

숨겨진 아리마대 요셉의 행동은 결국 주의 주 되심 때문에 반드시 드러나야할 우연적인 즉 무시할 수밖에 없는 믿음으로써

주님의 살아계심을 드러내는데 작용하는 예언된 말씀 성취인 겁니다.

 

창세전에 네 이름이 생명책이 기록된 것을 기뻐하느냐

아니면

주의 이름으로 사단아 물러가라 외치니 귀신이 물러갑니다 가 더 기쁘냐

 

라는 것을 놓고 볼 때 인간이 개입한 것이 필연적인 것이 되고

인간이 오히려 배제 소외 되는 상황이 바로 우연적으로 보는 겁니다.

 

즉 기쁨 자체가 실감이 되지 않으면 우연이고

기쁨 자체가 실감이 되면 필연적인데

그것이 내가 가입이 되느냐 하는 문제인 겁니다.

내가 개입이 되면 필연화요

개입이 불가했으면 우연인 겁니다.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된 것은 우연이다는 겁니다.

 

구원도 결국 내가 개입이 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이런 논리, 이런 교리는 지금 대부분 장악된 겁니다.

우연으로 취급하면 큰일납니다.

장사가 안됩니다 안돼

 

장사를 위해서라도 반드시 필연화 되어야 하는 겁니다.

목사가 된 것도 우연이요

성도가 된 것도 다 우연입니다.

 

그런데 이 우연성으로 모였다가는 믿음직 스러움이 다 날라가버린다는 겁니다.

그래서 필연화 시키는 겁니다. 그래서 제도도 나오고 교리화 되는 것도 그런 이유입니다.

그래서 이 우연성을 교회 속에서는 내어쫏아내어야만 하는 겁니다.

 

이단시 해야만 하구요

 

그래서 유대인들에게는 이 우연을 걸림돌 거리끼는 불편하기 짝이 없게 되는 겁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처음자리가 알고보면 우연성입니다.

 

그러니 자신들 보다 더 우연적인 존재

창기 세리가 먼저 천국에 간다는 말은

그야말로 자존심 건드리는 것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이 자신들의 필연성을 다 이루고 다들 사라졌을때에

유대인 속에서의 유대인 곧 아리마대 요셉이 기록된 말씀대로

예수님의 시체를 빌라도로부터 달라 하고 세마포를 싸서 시체를 감싸고

자신의 묘에 예수님을 안치한 겁니다.

 

이것은 우연입니다. 즉 불쾌한 거리끼는 행동이다는 겁니다.

공의회 회원으로써 예수님을 죽이기로 작정한 결의에 반대를 표했기에

항상 거슬리는 인물이였다는 겁니다.

 

즉 저들 유대인들의 필연적인 모습에 우발적이였다는 겁니다.

즉 우연 우발이라는 의미는 결국 반대를 위한 반대였다는 것이지요.

그러니 거리끼고 불편 불쾌하고 걸림돌이 되는 인물이였다는 겁니다.

 

자 오늘 본문도 마찬가지

우연성의 믿음 곧 주의 주 되심의 사건으로써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서 나누고자 합니다.

 

안식후 첫날 예수님의 시체에 향품을 바치고자 두 여인이 돌 무덤에 갔는데

무덤에 예수님의 시체가 보이지 않는 겁니다.

 

그런데 두 천사가 나타나서

어찌 산 자를 죽은자 가운데서 다시 찾느냐 여기 계시지 않고 다시 살아나셨다 라는 말을 합니다.

 

예수님께서 평상시 갈릴리에 계실 때 하신 말씀대로

인자는 죄인의 손에 넘겨져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가 삼일만에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라고 합니다.

 

이에 두 여자는 사도들과 많은 무리가 모인 곳에가서 모든 사람에게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셨다 라고 외치게 됩니다.

 

여기에 대비된 사도들과 모든 사람들은 이 허구의 말에 믿음이 가지 않아 믿지를 않게 됩니다.

 

바로 이 부분을 오늘 말씀 드리고자 하는 내용입니다.

즉 허구의 말로 허탄한 말 허무한 말로 취급했다 라는 말은

반대로 허구이지 않고 우연적이지 않고 반드시 필연적으로 목격한 바가 있다는 겁니다.

즉 예수님의 죽음입니다.

 

죽었다 라는 필연성을 봤기에 목격했기에 증거가 자신들의 눈으로 봤기에

이 두 여자의 외침은 그야말로 허구가 되는 겁니다.

 

즉 허구 이다는 것은 상대적인 필연성을 자신들은 목격했다는 거지요.

 

자 이런 의미에서 이것은 반드시 짝꿍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차이로써 설명이 되는 겁니다.

 

그 설명이 뭐냐 ?

 

곧 인간은 뭘 해도 다 엉터리 이다는 가짜다 라는 겁니다.

 

여기서 저는 재미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제자 라고 표현하지 않고 사도 라는 표현을 섰다 라는 겁니다.

 

사도란 주의 주 되심을 위해 동원이 되는 표현입니다.

그러니 사도행전에서 사도들은 이 주의 주 되심을 위해 자주 언급 되는 표현입니다.

그런데 마태복음 마가복음은 딱 한번 표현 되고

요한 복음은 아예 없습니다.

오로지 누가 복음에서는 제자와 사도라는 표현이 썩여서 누가복음에 아주 많이 표현이 되고 있는데요

 

이것이 바로 역설적으로 사도 자체도 주의 주 되심에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다 라는 겁니다.

즉 사도 됨이 주의 주 되심을 증거하는데 동원이 되는 것이 아니라

주의 주 되심이 하등 도움이 되지도 않는 사도들을 동원 시킨다 라는 겁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사도 라고 해서 믿었더라가 아니라

사도 임에도 불구하고 허탄한 말로 여기고 믿지 않았더라 라는 겁니다.

 

즉 사도라는 직분도 인간은 스스로가 감당을 못한다는 겁니다.

곧 은사 조차도 말이죠.

 

그러니 처음부터 끝까지 성령의 숙제일 뿐이다는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은사도 사도라는 직분도 다 우연인 겁니다.

 

이 기능이 필연보다 더 필연적인 우연성으로써 작용이 된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더더욱 인간은 배제 소외되는 셈이다는 거지요.

 

즉 이들 곧 사도들이지요 사도들의 믿음 없음도 결국 예수님의 숙제로써 깨뜨려야 할 문제, 숙제이다는 겁니다.

 

우리가 저들 사도들을 문제시로 삼을 입장이 못 됩니다.

우리에게 수시로 벌어질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즉 우연성이다는 겁니다.

 

그럼에도 놀라운 점은 사도라는 기능이 믿음이 없는 제자들의 모습임에도 불구하고

제자들 존재보다 먼저 기능이 앞서서 주어졌다 라는 겁니다.
제자가 아니라 사도라고 표현한 것도 주의 주 되심과 연관됨이다는 겁니다.
어떻게 주님은 이 문제를 해결하실까요?

 

한번은 이런 표현을 한적이 있습니다.

0.3초 사랑이라고

즉 사랑이란 영원성이 아니라 순간이다는 겁니다.

0.3초의 우발적인 순간이 매 순간으로 영원을 채워 버리니까

 

나는 너의 영원한 0.3초의 순간이다. 라고

 

사랑을 필연화 시키고자

즉 율법이지요 율법을 필연화 시키고자


자신들의 신체에
0.3초화가 아니라 24시간 영원화를 이룬 신체가 유대인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오히려 율법에 가장 반하는 신체가 되어 버리는 겁니다
.

그것도 완벽하게 말입니다.
분명 겉으로는 완벽한데(사실상 헛수고)
속의 알맹이는 인애와 자비 자체가 아예 없어져 버린 겁니다. 껕데기를 거룩하게 하는데 바빠서

오히려 강도 세리 문둥병자들이 율법에 가장 거리가 멀어져버린 자들이

율법의 거룩을 입게 되어버리니까

우연으로 취급되는 겁니다. 즉 순간인 겁니다.


이들이 먼저 천국에 간다고 하니까
이 순간(우연물)이 영원(필연 선택물)하게 되어버리니까

 

영원성 유일성 필연성 동일성을 추구하던 유대인에게 걸림돌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곧 얼룩이 되어버린 거지요.
이것은 사실상 구약의 이스라엘의 처음자리였는데 말이죠
.

 

곧 처음자리 즉 사랑, 곧 우연인데 말입니다.

 

사랑을 그들은 이제 반드시 일체화 필연화 개방화 동질화 시켜야 하기에

억지로 라도 해야만 했던 겁니다.

 

그런데 그런 억지 보다

우연으로 나온 사랑이 더 나은 사랑이다 라는 겁니다.

 

그런 입장에서 죄인에게 피는 더 그 가치성 기능성 우연성(필연 보다 더 필연적인 초과잉성)이 나타나는 겁니다.

 

저는 이것을 이 우연성을 얼마나 제대로 된 우연성이냐 하면

 

(11:14, 개역) 이는 곧 내 골육을 아무쪼록 시기케 하여 저희 중에서 얼마를 구원하려 함이라


(롬 4:1, 개역) 『그런즉 육신으로 우리 조상된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 하리요』

(롬 4:2, 개역)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롬 4:3, 개역)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이 저에게 의로 여기신 바 되었느니라』

(롬 4:4, 개역)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빚으로 여기거니와』

(롬 4:5, 개역)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롬 4:6, 개역)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행복에 대하여 다윗의 말한 바』

(롬 4:7, 개역)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롬 4:8, 개역)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


로마서 4장도 그렇고요
 

이 말씀에서 더더욱 실감하게 됩니다.

 

즉 시기케 함 이라는 표현 말입니다.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시기케 했다 라는 겁니다.

 

즉 저들이 안다 라는 겁니다.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용서 받았다 라는

다윗이 아브라함의 믿음을 언급한 내용을 다시 사도바울이 언급합니다. 로마서 4장에

 

이 말은 다윗이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이상하게 필연화 동질화에 빠져 버렸다는 겁니다.

그런데 다시 처음사랑이라는 우연성을 아브라함의 믿음으로부터 힌트를 삼는 겁니다.

이것을 다시 사도바울이 힌트 삼았고요

 

이런 무식한 저도 이렇게 이 로마서 4장을 표현하는 것은

얼마나 쉬운 우연적인 표현이 아니냐 라는 겁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믿음을 자꾸 필연화 하는 육의 자랑이 이 첫사랑을 잊어버리게 만든다는 겁니다.


첫사랑, 처음 자리 자체가 우연이거든요.

그런데 얼마나 우연적이였으면 무시 무가치 배제 소외 시켜버렸겠습니까

정작 우리가 소외 배제 되어야 하는데
처음자리를 배제 소외 시켜 버린 겁니다.
 

믿음(우연)으로부터 소외(우연) 가 아니라

개입(필연)의 상태가 된다고 여기기 때문에 소외(필연) 시킨 것입니다.

 

자 오늘 본문에서 [제자]라는 표현을 하지 않고

[사도]들도 허탄한 말로 여겨서 믿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제 예수님의 숙제인 겁니다.

아리마대 요셉의 지난시간의 내용을 예수님의 숙제로 표현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목사들 설교 내용을 살펴보니 인간이 했다 행했다 라고 행함을 강조함으로써

아리마대 요셉처럼 교회에 도움을 되는 자가 되라 라는 식으로 세뇌 시키더라 말이죠.

 

제발 교회에 덕 될려고 하지 마세요

그 반대로 교회가 그 사람에게 덕이 되어야 합니다.


복음만을 제대로 전하는 교회라면 자동적으로 됩니다
.


새삼스럽게 덕이 되고자 빛과 소금이 될려고 하지 말라는 겁니다
.


제자 로써가 아닌 사도임에도 불구하고 그 간극을 사도 자체내에서 매울수가 없는 겁니다.

그 빈자리의 간극은 결국 예수님이 하셔야 할 숙제인 겁니다.
예수님은 바쁘십니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셔야만 하고
다시 사도들에게 자신을 나타내셔야만 하고(즉 그 말은 사도들도 안된다 라는 겁니다.)
그들의 발걸음 하나 하나를 다시 십자가로 되돌려 놓아야 하셔야만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소금 치시러 가야 하고
어두움 밖에 안되는 우리에게 눈을 밝히는 빛을 비추셔야만 하는 겁니다.

오히려 빛과 소금을 팍팍
, 빛의 비추임과 소금 뿌림 당해야 할 입장이다는 겁니다.

즉 성령의 숙제이다는 거죠. 우연이다는 겁니다.

 

베드로가 다시 사셨다 라는 허탄한 말을 듣고 몰래 무덤에 가 보니

세마포만 남아 있는 겁니다.

 

이것이 아무리 인간이 필연화 할려고 해도 도저히 필연화 될 수 없는

 

세마포만 남았다 라는 표현인 겁니다.

 

즉 우연성에 인간이 접근할 수가 없다 라는 겁니다.
(접근 불가 입니다. 접근가능해져 버리면 그만 필연화 시켜버리기 때문입니다.)


그저 남들에게 말할수도 없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세마포만 남았다 라는 표현만이 인간의 필연성 곧 육의 한계를 보여주고 있는 겁니다.

 

(시체가 보이지 않기에) 안 보여주면 이 우연성은 다 날라가 버리고

자신에게 남아 있는 필연성은 그저 세마포만 남았다 라는 겁니다.


세마포만 남았다 라는 것은
1 부활해서 세마포만 남은 건지?

2 또는 딴 사람들이 예수님의 시체를 다른 곳에 옮겼는지?

3 아니면 예수님이 부활했다고 한 여자들이 거짓말 곧 사도들이 말한대로 허탄한 허구를 말하는 것인지? 


자신이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은

이것이 전부이다 라는 겁니다.

수제자 베드로 조차도 그 간극을 자신의 손으로 해결해 낼수 있는 것이 아니다는 단절성, 단절의 단절이다는 겁니다.


물론 사회적인 계급상 정보가 이 부분이 한계라 여기지만

만약에 최고의 계급이라 해 본든

이 부분보다 더 나아갈수 없는 한계인 겁니다.

 

한계에 부딧힌 겁니다.


인간 쪽에서의 정보는 다 차단 당한셈인 겁니다.
그 어떤 소식도 자기쪽에서 만들어낼수 없는 것이 복음이라는 소식입니다.
 

부활의 소식은 결국 성령과 천사들이 직접 개입하지 않는 이상

더 이상 진전이 되지 않는 이유인 겁니다.

그래서 우연에서 우연으로 이어지는 것이지

필연에서 필연으로 이어지지 않습니다.

 

바로 단절의 단절인 겁니다.

분명 단절에서 단절인데
[펼연에서 필연으로] 보다 더 나은 초과잉적 약속성취인 겁니다.

약속성취가 필연을 배경으로 까는게 아니라
단절의 단절, 이중단절을 바닥으로 깔면서 약속성취를 이룬다는 겁니다.

 

인간이 아무리 잘 믿어본들

주님께서 성령을 매일 매일 순간 순간 적으로

0.3초 매 순간 주지 않고 한 순간이라도 멈춰 버리면

고로 끝난 겁니다.

 

그렇기에 빈간극을 인간이 채울수가 없습니다.

그 간극 그대로 지니고 가는 겁니다.

 

사도 라고 할 지라도 말입니다.

 

사도 들도 이랬습니다.


(눅 24:11, 개역) 『사도들은 저희 말이 허탄한듯이 뵈어 믿지 아니하나』
 

자 사도들도 허탄한 말로 여겨 믿지 않았다고 하니가

사도들도 이런 판국에 우리들이랴

라고 해서 우리에게 가능성을 주는 말도 아니요

우리에게 저런 실패에 대한 위로의 말을 주는 것도 아닌 겁니다.

 

그냥 이유 없는 단절입니다.

 

오히려 우리는 단절의 단절을 늘 누려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사도들도 안 믿었는데

끝까지 사랑하셔서 손을 놓지 않았다는 주님의 열심을 언급한다는 겁니다.


이것보다 더 부조리한것 있으면 나와보라 하세요

즉 사랑 곧 일방적인 용서 편애는
세상 그 어떤 것보다 가장 부조리한 겁니다.
사랑은 부조리 그 자체인 겁니다. 우연이죠.
 

즉 주님 자체가 우연성으로써 활동을 하니

우리는 필연화 하는데 있어서 이 우연성이 늘 낯설 수밖에 없음을 누려야 한다는 겁니다.


철학자들이 의외로 많이들 이렇게 말합니다.

창조란 낯설게 하기이다. 즉 이 말은 우연이요 개입이 될수 없는 단절이기 때문에

창조 자체가 낯설음이다는 겁니다. 예상 밖의 잉여이니까 말입니다.
 

우리 스스로를 보면 이래서 낙심할 수 밖에 없습니다.

필연성을 주장하는 신체임에도 불구하고 이 우연 보다 못해서

무시해 버리는 이 못땐 신체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우연성은 늘 수시로 찾아와서

우리의 필연성 개방성을 깨뜨린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나는 항상 틀렸고 예수님은 항상 무조건 옳을 수밖에 없음을 누리게 하시는 겁니다.

 

그런 입장에서 무조건 이유없이 감사 뿐이다는 겁니다.
조건에 맞아서 감사가 아니라
기쁨 자체는 예상 밖이어야 낯설고 그것이 창세전이라서 더 기쁜 겁니다.

 

저는 오늘 사도들의 믿음 없음에 대해서 책망하는 내용을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사람들을 꼬시고 속여서 교회에 더욱더 충성하자 라는 기존의 성화론자들의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럼 예수님께 충성하자? 그것도 아닙니다.

 

이 우연성이

인간의 믿음을 초월해서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고서는 못배기는 당위

필연보다 더 필연적인 당위를 말하는 겁니다.


필연 보다 먼저 있었던 당위

필연은 존재에 빠져버리지만


당위는 존재 보다 먼저 있었던 겁니다
.

그러니 사랑하자 충성하자가 아니라


사랑하지 않을수 없고

충성하지 않을 수 없다 라는 겁니다.

 

기도하기와 기도되기의 차이

기도하는 자와 기도의 사람 과의 차이이다는 겁니다.

하나는 존재요, 필연이요  다른 하나는 우연이요 당위인 겁니다.

존재 보다 앞선, 먼저 있었던 당위

 

자 그런 입장에서 주의 주 되심이 사도 라는 당위성을 부여한 겁니다.

사도란 은사로써 당위성입니다.

존재성이 아니라 당위입니다.

 

주의 주 되심을 아니 외칠수 없는, 존재 보다 먼저 있었던 기능이 존재보다 앞서 있었다 라는 겁니다.

 

자 주의 주 되심은 이렇게 사도들에게 기능을 부여합니다.

이들은 사나 죽으나 주의 주 되심만을 아니 외치고는 못배기는 사도라는 은사가

우연히 우발적으로 0.3초 매 순간 순간마다 영원히 간섭받게 됩니다.

 

아주 달달달 복이게 된 겁니다.

 

얼마나 부럽지 않습니까?

 

오늘날 주님이 주시지도 않는 목사라는 직분을 가지고서

억지로 교회를 채우는 것과는 족히 비교도 되지 않습니다.

 

진정한 은사는 오로지 주의 주 되심이 부어넣은 은사로써

사도라는 직분은 이유없이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주님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겁니다.

 

즉 용서만을 외치는 겁니다.

교회를 외치지 않습니다.

 

이 교회도 무시하는 용서를

사도라는 직분은 자신들 조차도 용서 받으면서

매 순간 우발적으로

이 단절의 0.3초를 영원히 증거하는 겁니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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