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 (24:36-53)

 

 

(24:36, 개역) 이 말을 할 때에 예수께서 친히 그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니

(24:37, 개역) 저희가 놀라고 무서워하여 그 보는 것을 영으로 생각하는지라

(24:38, 개역)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찌하여 두려워하며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이 일어나느냐

(24:39, 개역)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

(24:40, 개역)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발을 보이시나

(24:41, 개역) 저희가 너무 기쁘므로 오히려 믿지 못하고 기이히 여길 때에 이르시되 여기 무슨 먹을 것이 있느냐 하시니

(24:42, 개역) 이에 구운 생선 한 토막을 드리매

(24:43, 개역) 받으사 그 앞에서 잡수시더라

(24:44, 개역) 또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

(24:45, 개역) 이에 저희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24:46, 개역) 또 이르시되 이같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삼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과

(24:47, 개역)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24:48, 개역)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

(24:49, 개역)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울 때까지 이 성에 유하라 하시니라

(24:50, 개역) 예수께서 저희를 데리고 베다니 앞까지 나가사 손을 들어 저희에게 축복하시더니

(24:51, 개역) 축복하실 때에 저희를 떠나 [하늘로 올리우]시니

(24:52, 개역) 저희가 [그에게 경배하고] 큰 기쁨으로 예루살렘에 돌아가

(24:53, 개역) 늘 성전에 있어 하나님을 찬송하니라

 

 

복음이 무엇입니까?

복된 소리 라고 하는데 과연 복음이 복된 소리 맞는 것일까요?

한번 의심을 해 봅시다.

 

과연 복의 소리

영어를 잘 모릅니다만 굿 뉴스 좋은 소식이다는 것인데

 

사실상 하나도 좋은 소식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다시 살아 나셨다 라는 것이 바로 좋은 소식이라는 것인데

이것이 사실상 좋은소식이 될수 조차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우리가 죽여버렸거든요

그래서 졸지에 의미로 남아버린 것은 우리가 예수님을 죽여버렸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분명합니다.

모든 인간은 예수님을 죽인 사실에 거부할수 없는 입장에 놓여져 있습니다.

 

그 증거가 십자가 이고요. 하나님의 저주라고 예수님에게 뒤짚어 씌워서

우리가 받아야 할 저주를 예수님께 뒤짚어 씌운 겁니다.

 

이런 의미에서 이제는 기정 사실이 된 겁니다.

모든 인간은 자신의 구원자를 죽여버렸기 때문에

마땅히 지옥행은 당연한 사실입니다.

 

예수님을 따라다녔던 제자들이라고 해서 예외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세 번 씩이나 부인하고 저주까지 하면서 등 돌렸습니다.

단 한 사람도 같이 한 사람은 없습니다.

모든 제자들이 예수님을 버렸습니다.

 

자 이제 모든 인간은 예수님을 죽여버렸기에

지옥행은 당연하다는 기정사실에서 벗어날수가 없습니다.

 

이 지옥행이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그 죄악을 묻지 않겠다고 선언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굿 뉴스라고 합니다.

 

이게 실감이 납니까?

굿 뉴스??????

 

아니 그것은 그저 말 뿐입니다.

확인할 길도 없습니다.

죄악을 묻지 않겠다고 하는 말!!!!

 

그게 무슨 굿 뉴스이냐 말이죠.

종교꾼들처럼 맹목적으로 받아들이지 말고

그런 마약을 찾는 것이 아니라 한번 생각 좀 해 보자고요

 

과연 그게 무슨 굿 뉴스인가 하는 점입니다.

그런 말은 나도 할 수 있겠다 라고 다들 속으로 외치고 있는 본심이 장난이 아니게 작동합니다.

 

말 뿐인데 왜 그것이 복이라는 것이죠???

 

결국 우리가 오해를 했던 겁니다.

복이란 우리와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오로지 예수님 자신의 입장에서만 복이다는 겁니다.

 

한 마디로 안 죽일께 ~~~~~~~~

 

안 튀길께 ~~~~~~~~~~

 

라고 외치는 감자칩 광고처럼

 

안 죽일께 라는 겁니다.

 

무슨 잘못을 했는데 그 잘못에 시시비비를 따지지 않을께 라는 뜻인데

그래서 복된 소리 굿 뉴스라고 하는데

 

그래서 뭐 ~~

 

아니 나를 안 죽이겠다는데 그것이 복된 소리 복음 굿뉴스라고 하는데

 

그래서 뭐 ~~~

 

 

전혀 와닿지가 않는 겁니다.

 

아니 내가 예수님을 죽인 적도 없고

그는 2천년 전이고

설사 내가 그 때 살아서 예수님을 죽이는 그들 군중 속에서 예수를 죽여라 라고 외쳤다고 해본들

 

이미 죽어버린 자가 다시 산다는 것은 종교세계에서만 떠들어대는 소리이지

산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고

 

그 이전에 누가 살아난 사람이 단 한 사람이라도 있었다면 또 몰라

 

그래서 뭐 ~~~

 

그래서 뭐 가 자꾸 되는 겁니다.

 

 

우리가 앞에서 사도들이 여인들이 예수님이 부활했다 라는 소식을 천사들로부터 들어서

사도들에게 알려줬는데 사도들의 반응은 여인네들을 허상에 빠진 헛된말을 하는 자들이라고 거부했습니다.

 

아니 이왕 나타날 천사들이라면 힘없고 말빨 없는 여인네들에게 나타날게 아니라

바로 사도들에게 나타나버리면 그런 단절성을 우리가 성경말씀을 통해서 격지 않을 것은데

어차피 알려줄것인데 왜 하나마나한 단절성을

 

왜 구지 꼬옥~~~~~~~ 꼭 거쳐서

 

믿지 않더라 라는 단절을 분명히 하고서

 

자신이 살아났다고 알려주시느냐 말이죠.

 

 

엠마오 사건을 보면 좀 이상하지 않나요?

 

어차피 알려주실 것 그냥 알려주시면 되는데

마치 장난꾸러기처럼

못알아먹도록 단절 즉 막아버리고서는

오해를 유발케 해서

그 단절을 기정사실화 한 후에

자신이 누구인지를 밝히 보여주시는 겁니다.

 

그리고서는 사라져 버리는 겁니다.

 

아니 어차피 알려 줄 것인데

왜 이런 과정을 구지 거치시는 것이냐 말이죠.

 

그 과정을 거쳐 본들

인간은 그 어떤 누구 하나 변하는 자는 없다 말이죠

단 한 사람도 안 변하는 겁니다.

 

바로 그것을 분명히 하는 것이 그 과정을 거치시는 겁니다.

즉 예수님은 하나마나한 짖을 골라서

일부러 하나마나한 것에 충성과 열심을 내시는 겁니다.

 

하나마나 한 짓이기에

인간은 반응이 없습니다.

 

그래서 뭐 ~~~

 

만약 조금이라도 의미가 있다면

모든 인간은 달려들어서 그 의미를 극대화 시키고자

자신의 열성을 다 퍼부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부활은

의미가 없습니다.

 

그래서 다들 한결 같이

 

그래서 뭐 ~~~~~

 

그래서 뭐 ~~ 어쨋다고

 

그것이 장가가기 프로젝트에서 실재로 결혼에 골인하는 원인이 되지 않는다

하등 도움이 전혀 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거기까지 뿐이지 결과에 도무지 다달으지 않는다는 겁니다. 개그코너에서 말이죠.

 

즉 결과가 안된다는 결과의 부재는

원인만 있다는 거죠.

 

실재로 결과란

원인의 부재로 발생하는 겁니다.

 

원인 없는 결과가 바로 예수님의 부활이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 부활 곧 복음 기쁜소식 굿뉴스는 원인없는 결과이지

그 어떤 원인이 없어야지

 

원인이 인간에게서 조금이라도 존재한다면 결과는 영원히 부재하는 겁니다.

 

그래서

 

인간은 한결같은 반응은

 

그래서 뭐 ~~~~~~

 

결과가 자신에게 와닿지가 않는 겁니다.

 

분명 예수님이 부활했다 라는 소식이 소문으로 퍼졌습니다.

그런데 그 원인 없는 결과는 전혀 와 닿지가 않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 간극의 갭을 무슨 수로 좁혀야 합니까?

 

좁힐 필요가 없습니다.

 

그래서 삼일 만에 다시 살아나야 한다는 것은

 

예수님이 부활했다 치더라도

의도적으로 삼일 만에 다시 살아났더라도

 

첫째날도 아닌 왜 구지 삼일이냐 하는 것 처러

삼일에 살아나도

일 일, 이 일, 삼 일, 비로소 사흘째날 부활인 것은

 

부활이라는 결과가

그 어떤 원인도 없이 나타난 결과이다는 것입니다.

어렵게 말했는데

 

죽으신 그 첫째날에 부활하지 않고

둘째날도 부활하지 않고

셋째날도 부활하지 않고

 

비로소 사흘째에 부활했느냐 하면

 

부활 자체를 못 믿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이것이 요한복음 죽은 나사로 살리시는 사건에서도 나옵니다.

 

나사로가 죽게 되어서 빨리 와달라는 요청에

이상하게 평소와는 다르게 예수님은 안 가시는 겁니다.

 

왜 안 가시느냐?

 

(11:1, 개역) 어떤 병든 자가 있으니 이는 마리아와 그 형제 마르다의 촌 베다니에 사는 나사로라

(11:2, 개역) 이 마리아는 향유를 주께 붓고 머리털로 주의 발을 씻기던 자요 병든 나사로는 그의 오라비러라

(11:3, 개역) 이에 그 누이들이 예수께 사람을 보내어 가로되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하니

(11:4, 개역) 예수께서 들으시고 가라사대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로 이를 인하여 영광을 얻게 하려 함이라 하시더라

(11:5, 개역) 예수께서 본래 마르다와 그 동생과 나사로를 사랑하시더니

(11:6, 개역) 나사로가 병들었다 함을 들으시고 그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유하시고

(11:7, 개역) 그 후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유대로 다시 가자 하시니

 

죽을 병이 아니다 라는 겁니다.

그래서 이틀을 더 있으시다가 가시는 겁니다.

 

? 사실은 완벽하게 죽은 것이 기정사실화 되었기 때문입니다.

죽을 병이 아니다 해 놓고서는 말이죠.

이 요한복음의 사건이 오늘 본문과 거의 흡사합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오해를 해서

유대로 들아가면 돌삐 맞아 죽게 된다는 겁니다.

 

참 신기하죠

 

지금 죽음이라는 것이 세가지 시선으로 작용합니다.

첫 번째 죽음은 나사로의 죽음입니다.

두 번째 죽음은 유대로 들어가면 돌삐 맞아 죽습니다. 라는 죽음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 죽음은

 

(11:8, 개역) 제자들이 말하되 랍비여 방금도 유대인들이 돌로 치려 하였는데 또 그리로 가시려 하나이까

(11:9, 개역)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낮이 열두 시가 아니냐 사람이 낮에 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보므로 실족하지 아니하고

(11:10, 개역) 밤에 다니면 빛이 그 사람 안에 없는 고로 실족하느니라

(11:11, 개역) 이 말씀을 하신 후에 또 가라사대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

(11:12, 개역) 제자들이 가로되 주여 잠들었으면 낫겠나이다 하더라

(11:13, 개역) 예수는 그의 죽음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나 저희는 잠들어 쉬는 것을 가리켜 말씀하심인 줄 생각하는지라

(11:14, 개역) 이에 예수께서 밝히 이르시되 나사로가 죽었느니라

(11:15, 개역) 내가 거기 있지 아니한 것을 너희를 위하여 기뻐하노니 이는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그에게로 가자 하신대

 

(11:16, 개역) 디두모라 하는 도마가 다른 제자들에게 말하되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 하니라

 

도마가 평상시 유대인들의 하나님나라 묵시운동처럼 독립운동으로써 순교라는 희생을 통해서 이 유대가 회복된다는 그런 유대인들의 사상이 깔려 있는 죽음입니다.

 

지금 예수님은 나사로의 죽음을 말하고자 함도 아니요

유대인들에게서 돌삐 맞아 죽는 개죽음을 말하는 것도 아니요

도마처럼 열심당원들의 활동을 보아왔기 때문에 그 당원이 아니어도 그렇게 하고싶은 그런 순교의 죽음도 아니요

 

전혀 인간들이 예상한 적도 없는 죽음을 말씀하시고자

3일 이라는 간극을 벌려서 이제야 늦게 아주 늦게

다들 목빠지게 기다리고 있는데 일부러 아주 늦게 가시는 겁니다.

 

가자마자 눈물과 원망과 비아냥과 한마디로 어두움 그 자체를

숨김없이 드러내고 있는 겁니다.

 

비로소 예수님의 눈물이 이런 거짓된 눈물과의 간극을 벌리기 위해서

흘리시듯이

 

3일 이라는 일부러 의도적인 간극은

숨김없이 드러내라 라는 겁니다.

즉 아무도 예수님의 부활을 원치 않는다는 것

누구하나 원하는 사람이 있었다 손 치더라도

반드시 단절시켜서

숨김없이 드러내는 그 원망을 입고서

부활을 나타냄으로써

 

인간의 그 어떤 믿음도 다 허구임을 드러낸다 라는 것이

 

예수님의 다시 사심이다는 겁니다.

 

사실 부활 사상은 모든 종교의 하이라이트 절정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인간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서 부활해

천국 극락에서 영생불멸한다고

평생을 꿈꾸고 있지만

단 한 놈도 그런 꿈을 가지고서

천국에 들어간 적이 없다는 사실을

지금 드러내고 있는 겁니다.

 

누가복음 24장의 본문을 보시면서

무엇을 느끼십니까?

 

단 한 사람도 부활될 자격 자체가 아예 없다는 것을 실감하지 않습니까?

 

아무도 안 믿는 겁니다.

아니 믿을수가 없습니다.

더 심하게 말하면

믿어서도 안되는 겁니다.

 

괜히 믿어가 진짜 믿음이 나타나니까 완전 들통나 버리는 식이니까요

 

인간의 믿음이 이 간극을 벌릴수가 있느냐 말이죠.

결핍이 생기면 인간은 못 견디고 비로소 그 속에 있는 감추고 억누르고 참고 참았던

눈물과 원망과 비아냥이 다 터져나오는데

 

그것 터져나오기 전까지는 예수님은 부활을 직접 알려주시지 않는다는 겁니다.

 

사도들도 안 믿는 판국인데

우리 일까 보냐 말이죠.

 

안됩니다 안돼

 

그래서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시는 겁니다.

우리가 등 돌렸던 예루살렘입니다.

구원의 문이라고 다들 얼마나 좋아라 했습니까?

그런데 실상은 예수님을 죽이는 살인의 장소였습니다.

그리고 남아 있는 자들도 언제 죽을지 몰라서

다들 시골로 발걸음을 돌릴 수밖에 없는 곳입니다.

 

그런데 되돌아가다니요?

무슨 의미가 있느냐 말이죠.

하등 되돌아갈 이유가 전혀 없는 겁니다.

 

의미가 없으면 인간은 행동할 이유가 없습니다.

즉 아무도 예루살렘으로 돌아갈 마음을 가진자는 있을수 없었다는 겁니다.

 

그런데 왜 의미도 없는데

원인도 없는데

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는 것일까요?

 

인간이 의미를 두던 예루살렘이 비로소 다 사라졌기 때문에

의미 없이

원인 없이

예루살렘에서 다시 출발하는 겁니다.

 

무엇이???

 

기쁜소식 복음이 말이죠.

 

자 그럼 초반에 제가 의문을 제기했던 복음은

결국 나와 상관이 없는 겁니다.

?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나와 상관이 없고

등돌렸고 거부했고

여인들의 말을 믿지도 않고 허상을 본 것이다 귀신을 본 것이다 허깨비를 본 것이다 라고 치부했던

 

다름아닌 내가 이제 예루살렘에서 이제 출발을 할려고 합니다.

무엇을?

기쁜 소식 굿뉴스 복음 복된 소식을 말입니다.

 

이유도 없이 말입니다.

 

이것은 뭔가에 홀려서

 

갑자기 로마서 7장과 8장 사이에 그 어떤 연결고리 하나도 없이

그냥 결과로써 나타났다 라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니 연결이 아닌 단절 그 자체를 그냥 안고서 출발하는 겁니다.

 

바로 이것이 인간이 증거하는 복음과

예수님과 예수의 영인 성령이 직접 증거하는 복음의 차이점입니다.

 

사실 논리란 이제야 현대에서 교육이 되다 보니 보편화 된 의미로써 작용이 되지만

고대에서는 논리가 먹혀 들지 않는 시대입니다.

그런데 현대의 철학자들 중에서도 논리야 말로 사기이다 라는 것을 외치는 사람이 한둘이가 아닐 정도입니다.

논리란 원인에 따른 결과 도출인 겁니다.

그래서 설명이 되고 이해 납득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서 과연 논리로 이해와 납득이 되는 것이 과연 몇 개가 되냐 라고 하면

아주 아주 극히 일부분 뿐이다는 거죠.

 

오히려 비논리가 과학 특히 양자물리학에서도 철학계에서도 더 강하게 작용이 되는 겁니다.

우리는 흔히 종교계 쪽의 말들이 다 비논리이다고 하지만

철학자들은 그렇게 안 봅니다. 종교계가 자꾸 논리로 사람들을 꼬실려고 해서

철학자들이 오히려 비논리가 아닌 논리로 종교계를 다 깨버리는 겁니다.

 

그래서 놀랍게도 과학계도 어떤 분야에도 자꾸 종교화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그 대표성이 바로 자본주의죠. 자본주의가 가장 대표적인 종교화입니다.

 

결국 논리란 엉터리 사기이다 라는 겁니다.

그렇다고 이것을 당장 없애버릴수는 없겠지요.

그냥 이용해 먹으면 됩니다.

아무튼 원인에 따른 결과로써의 논리로써

원인 없는 결과를 설명할 수가 없다 라는 겁니다.

 

원인 없는 결과가 얼마나 많은데 말입니다.

 

한 예로 뇌가 명령을 내려서 팔아 움직여라 해서 움직이는 줄 알았는데

뇌과학에서 그것이 아니라 뇌가 명령을 내리기 전에 이미 0.3초 전에 움직이는 정보가 내려갔더라 라고 밝혀낸 겁니다.

 

이것 때문에 졸지에 오히려 뇌과학쪽에서 예정론과 자유의지 등등의 연구를 펼칠 정도이니

거꾸로 가는 거죠.

신학계 종교계는 눈에 보이는 과학적 증거물로써 사람들을 납득 시킬려고 꼬시는 사기를 칠려고 하는데

정작 과학계는 원인 없는 결과를 보고서는 깜작 놀라서

우리가 아는 것이 과연 무엇인가? 라는 타이틀을 걸고서

종교계에서 낡은 것으로 취급해버리는 것을 이들이 거꾸로 연구를 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어쨌든 눈으로 확인해 버리니까

기존의 틀들이 또 새롭게 판을 짜게 되는 겁니다.

보여줄 때 마다 맨날 달라질테니 말이죠.

 

결국 각자의 죽음이 다 따로 해석되듯이

이런 인간들의 각자 각자가 생각하는 죽음을 가지고서

 

예수님 자신이 말씀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죽음을

원인 없는 결과로써

이들과의 차이 간극을 벌리셔서

설명 납득 이해 시키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세계를 말씀하시는 겁니다.

 

결국 믿음 조차도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믿음이 아니였던 거지요.

안 믿고 믿는 믿음이라야 한다 보고 믿는 믿음은 엉터리이다 라고 말을 하지만

정작 인간이 말하는 믿음의 영역에서 벗어난 믿음은

인간 쪽에서는 반발이 될 수 밖에 없는 셈입니다.

 

마치 7번 괜히 용서하는 바람에 770의 용서를 못보듯이 말입니다.

아예 용서 한번도 안해버렸다면 770의 용서를 혹시 아주 아주 혹시나 알수 있지나 않냐 말이죠.

 

그러나 그것도 안되는 겁니다.

알았다 눈치챘다 아 이거였구나 해도

원인 있는 결과로써 도출할 뿐이지

770의 용서가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결과로써의 용서

결과로써의 믿음이라면

 

뭔가를 해서 믿었던 믿음은 이 원인 부재의 결과의 믿음을 거부할 수 밖에 없음을

우리는 유대인들의 믿음을 통해서 봤다 라는 겁니다.

이것도 원인이지요 ㅋㅋㅋㅋ

 

그래서 우리는 이유 없이 양쪽다 거칠 수밖에 없는 경험을 결과적으로 할 수 밖에 없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서 왠지 예수님 혼자는 신났지만

인간의 입장에서는 불편한 입장인 겁니다.

 

왜 예루살렘에서 출발을 해야하는지

하등의 이유를 알 길이 없습니다.

 

그 원인도 알아낼 길도 없구요

 

예수님이 부활하셨다 라는 소식도 귀신시나락까먹는 소리로 취급한 마당에

다른 것도 되겠냐 말이죠.

 

하등 없습니다.

 

없음이 분명 합니다.

 

분명하고 분명합니다.

 

단절이요 단절입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에서의 출발은

결과적으로 벌어졌습니다.

 

나에게 묻지도 않고

상의도 한 번도 한 적도 없이

일방적으로 벌려버린 결과적으로 나타나버린 사건입니다.

 

창조란 바로 이런 겁니다.

인간이 개입할 여지가 없다 라는 겁니다.

 

그냥 주님은 자기 멋대로 일방적으로 밀어붙여버립니다.

그러니 엠마오로 돌아가던 자들도

예루살렘에 이미 와 버렸고

 

다들 도망쳐서 예루살렘을 떠났던 자들이

다시는 뒤도 안 돌아볼테다 라고 장담했던 자들이

이제는 예루살렘에서 새롭게 시작하고자 출발할려고 한다는 겁니다.

 

왜 일까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죄사함을 얻기 위함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일 곧 너희가 죽인 예수를 하나님이 다시 살아냈다 라는 증인이 되기 위함입니다.

 

아니 다들 예수님을 부인했던 자들이 이제는 증인이 되는 겁니다.

이 연결고리가 있겠습니까? 없습니다.

그냥 원인 없이 결과로 증인이 된 겁니다.

 

당신 어떻게 예수님을 죽인 당신이 이제는 증인이 되었습니까? 라고 누가 묻는다면

설명할 방법이 없습니다.

 

그냥 그 단절성 그 간극을 그냥 그대로 안고 증거하는 겁니다.

죄수복을 입은채로 죄사함이라는 빨간 특별사면의 도장을 꾹 눌린 증거를 보여주면서 말이죠.

 

당신도 원인 없는 결과로 죄사함 받을 뿐이지

죄사함을 받기 위한 그 어떤 원인은 내 쪽에서 만들어낼수가 없다 라는 겁니다.

 

이런 자들 곧 증인은 가짜 교회 가짜 목사들의 사기에 놀아나지 않겠지요.

마치 그들 공갈협박단들의 십일조 안내면 지옥간다는 둥

목사 건드리면 삼대가 망한다는 둥 그런말 하면 더 건드려야 겠지요.

교회를 어지럽게 하면 저주받는 다는 둥 어지럽힌다고 어지럽혀질 교회 같으면 가짜죠

음부의 권세도 못 이기니까 말입니다.

마치 교회는 개혁해야 한다고 하는데 개혁해야할 교회라면 그거 가짜인 겁니다.

 

하등 손댈 필요가 전혀 없는 것이 교회인 겁니다.

 

주님의 피만 발렸고 그것 외에는 다른 주장을 할 필요가 없는 것이 교회이니까요.

 

그래서 예루살렘에서 왜 출발해야만 하느냐

죄사함의 회개가 예루살렘에 임했기 때문입니다.

즉 예수님의 죽음이 예루살렘에서 시작된 겁니다.

 

장소개념을 따지자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죽음으로 시작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인간의 믿음은 예수님의 죽음으로 시작하지 않고

구원 부활 등등으로 더 이상 죄 죄 죄 카지 말라고 하기 때문에

그들은 결국 자신이 예수님을 죽인 그 장소 예루살렘으로부터 출발을 하지 않는 겁니다.

회개가 아니다는 겁니다.

 

각자 각자의 회개인 거죠.

 

예수님의 죄사함의 회개는 예수님의 죽음에서 출발한 겁니다.

인간의 믿음이나 회개 눈물 행함 충성 봉사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다는 겁니다.

 

자 그런 의미에서 회개 조차도 원인 없는 결과이지

내가 하는 회개는 백날 해 봐야 나의 반성 밖에 안되는 겁니다.

 

즉 다시는 반성 따위를 하지 않겠습니다 라는 것이 진정한 회개인 겁니다.

 

반성을 못할때가 있잖아요

시간이 없거나 육체가 피로해서

그때는 그럼 회개 못하겠네요?????

 

자 이런 점에서 제자와 사도(증인)의 차이입니다.

 

제자는 스승이 있고 말씀을 배웁니다.

그러나 말씀을 이룰수 없습니다.

 

같은 사람인데 사도 라고 사도가 된 제자들 곧 증인은

말씀을 이루는데 하등 도움이 된 적도 없는데

그 결과물을 원인 없이 이유 없이 그냥 받아버렸습니다.

그 일에 증인이 되어 그 목격한 바를 증거할 뿐이다는 겁니다.

회개를 해서 회개라는 죄사함, 죄사함이라는 회개가 온게 아니라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엠마온 온천에 아직 이르지도 않았는데

겨우 반정도 밖에 안왔는데 온 몸이 뜨거워지더라 말이죠.

원인 없이

그냥 찾아와 주심 밖에 없습니다.

회개한 적도 없는데 회개라는 죄사함, 죄사함이라는 회개가 저절로 덮쳐지듯이 말입니다.

이것을 결과적으로 안 믿고는 못배기는 상황으로 덮쳐진 자들이 바로 사도 라는 증인이다는 겁니다.

 

제자는 심판대 라는 법적인 법원에 갈 필요가 없지만

 

사도 라는 증인은 무조건 법원에서 목격한 바를 말해야한 하는 겁니다.

무조건 호출인 것입니다.

 

결국 사도들은 매일 매일 법정에서 목격한 바를 증인으로써 외치는 일 뿐입니다.

 

외치는 말은 딱 하나 뿐입니다.

 

나도 너희도 죽였던 예수를 하나님이 다시 살려냈다 라는 겁니다.

 

주의 주 되심을 위해 사도들이 하등의 도움이 된 적이 없이

그저 저 목격담만 항상 어디를 가든 법정이 되는 그 장소에서 외칠 뿐인데

주의 주 되심을 주께서 스스로 펼치시더라 말이죠.

 

그러니 우리는 늘 법정에 놓이는 상황을 늘 맞이할 수 밖에 없는 겁니다.

괜히 솔로몬의 재판 사건이 있는게 아닙니다.

저 촌구석에서 벌어진 사건이 하늘나라 최고의 법정까지 올라가는 이유는

하나님 아버지 자신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함이요

예수님의 우편에 앉아 계심의 짜고치는 고스톱을 누리기 위함입니다.

 

세상 그 어디에도 복음에 관심 두는 자들은 없습니다.

그저 반듯하고 모범이 되는 종교인이 되고픈 자들 밖에 없구나 라는 생각을

교회라는 곳을 다니게 되면서 알게 된 겁니다.

교회 다닌 적 없이 예수님을 만났는데

괜히 교회 다녀가 엉뚱한 예수만 수없이 많이 듣게 된 겁니다.

 

바로 저런 모습이 나의 모습이고

이런 나의 모습을 죄사함으로써 회개가 덮치도록 하시는 사건들이

바로 매일 매일 터지는 십자가사건으로서의 용서였음을 말이죠.

 

인간은 결국 안 됩니다. 껍데기에만 신경쓰지

알맹이 에는 접근 자체도 불가능한 단절에 놓여진 겁니다.

결국 뭘해도 껍데기만 추구할 뿐이다는 겁니다.

그냥 차라리 신앙포기 하세요 어차피 해도 안됩니다.

알맹이는 주님이 주시는 원인 없는 결과일 뿐이기에

이유없이 감사할 뿐입니다.

껍데기는 감사 조건에 맞아야만 감사가 나올 뿐이고요.

우리는 그저 껍데기 추구에서 벗어날 길이 없습니다.

 

(23:23, 개역)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우리는 부활 조차도 회칠한 무덤처럼 껍데기로 갖추고 있습니다.

더 중한 죄사함의 회개라는 십자가의 죽음의 의미는 사라진채로 말입니다.

이것은 제가 진짜로 실감합니다.

수 많은 목사들을 만나봤지만

결국 장사꾼들입니다.

 

심지어 저에게도 십자가의 죽음은 주님이 시작했는데

나에게로 끌어당길려는데 정신팔려 있었지

주님의 하심에는 관심이 안가지더라 말이죠.

 

그래서 다행히도 더 이상 기대할 인간이 없다 라는 놀라운 사실에 기뻐하게 됩니다.

결국 주님의 숙제에 달렸기에

그것이 얼마나 기쁜지

 

오늘 본문에서도 인간은 다 뚝뚝 끊어진 모습 뿐이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예루살렘에 모여서 새롭게 출발을 합니다.

누가 도대체 모은 것입니까?

 

주님이 일일이 찾아가셔서 만져보라 함께 먹고 함께 대화하고

일일이 주섬 주섬 한 놈 한 놈을 직접 어미 사자처럼 입에 물고서

감히 어딜가려고?

다시 예수님이 죽음이 있는 예루살렘에 모아서 출발케 하시는 겁니다.

 

이제 내 믿음을 증거할 하등의 이유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믿음이 옳았다는 겁니다.

아무도 믿지 않는 부활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장소

나의 엉터리 가짜믿음을 뚜껑여는 그 장소

원수인 모습을 그대로 적나라하게 다 들통나는 그 장소 예루살렘에서

출발하시는 겁니다.

 

복음의 시작은 이런 나의 가짜 됨을 맞물려가면서

원인 없이 용서 받았다는 그 결과를 증인으로써 시작하는 겁니다.

 

회개도 안했는데 용서받았다라는 그 증거인 회개(십자가의 죽음)를 누리면서 말입니다.

 

내 회개 내 믿음 내 행함을 설명할 하등의 이유 없이 말이죠.

결국 결과적으로 회개 믿음 약속하신 성령 거룩 찬송 충성 증인 등등이였지

 

원인 있음으로써의 회개 믿음 거룩 구원 찬송 등등이 아니였던 겁니다.

 

원인 없는 결과였던 겁니다.

 

이런 뻔뻔스러운 자들이 단번에 피 흘리신 십자가라는 증거의 증인으로서

엠마오가 아닌

예루살렘에서 출발하는 겁니다. 이유도 없이 그냥 그 결과로 덮쳐져서 말입니다.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데 누가 꾀더냐 ~~~~~~~~~~

 

그 어떤 이름도 죽음 속에서 출발하지 못합니다.

아니 인간은 죽음 자체도 모릅니다.

제대로 죽으신 분이

십자가의 죽음으로써 새롭게 시작하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회개의 시작 곧 예루살렘입니다.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그 이름으로 시작하는

그 어떤 다른 이름으로는 시작할 수 없는

복음의 시작입니다.

 

(3:1, 개역)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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