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그 놈 (시편 46)

 

빈 보좌와 땅의 요동 그리고 잠잠할지어다

 


(
2:20, 개역) 오직 여호와는 그 성전에 계시니 온 천하는 그 앞에서 잠잠할지니라

 

(99:1, 개역) 여호와께서 통치하시니 만민이 떨 것이요 여호와께서 그룹 사이에 좌정하시니 땅이 요동할 것이로다

 

(46:1, 개역) [고라 자손의 시, 영장으로 알라못에 맞춘 노래]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

(46:2, 개역) 그러므로 땅이 변하든지 산이 흔들려 바다 가운데 빠지든지

(46:3, 개역) 바닷물이 흉용하고 뛰놀든지 그것이 넘침으로 산이 요동할지라도 우리는 두려워 아니하리로다(셀라)

(46:4, 개역) 한 시내가 있어 나뉘어 흘러 하나님의 성 곧 지극히 높으신 자의 장막의 성소를 기쁘게 하도다

(46:5, 개역) 하나님이 그 성중에 거하시매 그 성이 요동치 아니할 것이라 새벽에 하나님이 도우시리로다

(46:6, 개역) 이방이 훤화하며 왕국이 동하였더니 저가 소리를 발하시매 땅이 녹았도다

(46:7, 개역)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니 야곱의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

(46:8, 개역) 와서 여호와의 행적을 볼지어다 땅을 황무케 하셨도다

(46:9, 개역) 저가 땅끝까지 전쟁을 쉬게 하심이여 활을 꺾고 창을 끊으며 수레를 불사르시는도다

(46:10, 개역) 이르시기를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내가 열방과 세계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하시도다

(46:11, 개역)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리니 야곱의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

 


오늘 시편 46편을 보고 좀 충격을 먹었습니다.

스쳐지나가듯 약간의 두려움과 떨림이 낯설게 소름이 덮쳐 지는 겁니다.

이상하다! 시편 본다고 그렇게 될 거라고 예상하겠냐 말이죠.

 

그냥 한번 살펴 본답시고 마침 옆에 있던 성경책을 읽었는데

범상치 않은 내용이였습니다.

 

딱 떠오르는 의미가 빈보좌와 땅의 진동 이였습니다.

 

예레미야였던가요? 에스겔 이였던가요?

하나님이 보좌에 있으니까 땅이 요동한다고 합니다.

 

(99:1, 개역) 여호와께서 통치하시니 만민이 떨 것이요 여호와께서 그룹 사이에 좌정하시니 땅이 요동할 것이로다

 

시편 이였네요.

 

즉 땅이 흔들린다는 것은 하늘에 하나님께서 보좌에 앉아 좌정 곧 운행하신다 라는 겁니다.

 

우리는 일상 생활에서 땅이 흔들리면 아이고 하나님 아버지

와카십니까? 라고

 

불쑥 튀어나오듯이 나오는 본능적인 말입니다.

 

땅이 흔들리면 뭔가 잘못되었다는 겁니다.

 

마치 실로암 망대가 무너져 몇 사람이 깔려 죽게 되니까
마침 옆에 예수님이 계셔서 묻게 됩니다.

저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를 받아서 그렇게 된 거죠?

난 안 깔려 죽었으니 난 복 받았고 저 사람들은 저주 받았다고

그것을 예수님으로부터 확답을 받고팠는데

 

예수님은 그 다음 니 차례인데 우짜지 ~~~


이런식입니다.

 

발생하지 말아야 할 일들이 벌어졌다는 겁니다.

 

즉 우리 입장에서는 땅이 흔들리면 안된다는 겁니다.

위에서 똑바로 하시는거 맞냐고 따지는 식이다는 겁니다.

 

그런데 정작 하나님께서는 땅이 요동하는 것이

하나님이 보좌에 제대로 앉아 계신다는 겁니다.

반대죠.

 

참 일을 너무 너무 잘 하신다는 뜻입니다.

 

마찬가지로 위기가 찾아오면 하나님 계시는 것 맞냐 라는 것이

제일 먼저 튀어나오게 됩니다.

그 만큼 육인 우리의 속성을 들추어내시는데 있어서

영은 육과는 정반대로 행하신다는 겁니다.

즉 주님은 일을 너무 참 잘하신다는 증거가 땅의 요동이다는 겁니다.

 

지난 시간 시편 45편에 중요한 의미가 하나 있습니다.

 

6절인데

 

(45:6, 개역) 하나님이여 주의 보좌가 영영하며 주의 나라의 홀은 공평한 홀이니이다

(1:8, 개역) 아들에 관하여는 하나님이여 주의 보좌가 영영하며 주의 나라의 홀은 공평한 홀이니이다

 

주의 보좌와 공평한 홀 즉 지팡이

왕의 홀 왕의 지팡이라는 겁니다.

 

지난 시간에 왕은 국가 그 자체이다고 했습니다.

루이 14세가 말한 짐이 곧 국가이다 라는 의미와는 정반대의 의미로써

 

왕이 아무리 볼품 없고 싫어버린바 된

흠모할 모양도 없고, 아름다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전혀 없는 새카맣게 얼굴이 다 타버린 거지꼴을 해도

단 한명의 개인으로써 왕이 아닌

국가 그 자체로써 왕이라고 했습니다.

그것을 사도와 천재의 차이로써

그리스도와 소크라테스의 차이로써 말입니다.

 

개인의 자질 품성 전혀 무관하다는 겁니다.

 

그런데 보좌가 그냥 보좌가 아닌 빈의자이고

홀 즉 지팡이 막대기가 그냥 막대기가 아닌 아무 의미가 없는 빈지팡이 라는 겁니다.

 

빈자팡이 라는 단어가 말이 안되지만 제가 이렇게 표현한 것이 오히려 신선하게 느껴질 정도입니다.

비어있는 텅빈 막대기

무능한 막대기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은 국가 그 자체이듯이

지팡이는 왕은 이분이시다 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마치 우리가 잘 아는 모세의 지팡이에서

정작 모세는 하는 것이 없습니다.

모든 것은 지팡이 혼자 다 합니다.

모세가 지팡이를 쥐고서 발걸음을 옮기는 것이 아니라

주 여호와의 역사를 펼치는게 아니라

 

지팡이가 모세를 질질질 끌고 다니는 겁니다.

 

현미경 속의 벌레를 우리가 관찰하는게 아니라

벌레가 우리를 관찰한다는 겁니다.

주객이 뒤 바뀐 겁니다.

 

주인공은 지팡이다 라는 겁니다.

마치 사도행전이 이런 식이잖아요

사도들은 모세처럼 질질질 끌려 다니는 자들이고

정작 주체 또는 실체 실상은
성령 곧 예수의 영이

십자가의 영이 모든 일들을 처리해 가는 겁니다.

누구 누구를 만나도록 주선하는 것도 말입니다.

성령 혼자 바쁘게 바쁘게 움직이는 겁니다.

 

이것을 철학에서는 부정성 또는 불가능성 또는 괴물성이다고 하는데

평상시 우리가 무시해도 상관이 없었던

그 닭이

베드로를 대신해서 세 번 울게 됨으로써

베드로는 닭으로부터 구원받는다는 겁니다.

의인으로?

아니지요

죄인으로 말입니다.

그 부정성이 나를 건지더라 말입니다.

그 부정한 며느리 다말이 나 보다 옳도다 라는 겁니다.


그 잉여인 닭이 나 보다 더 옳다는 겁니다.
 

죄인을 부르러 오셨거든요.

그 동안 죄인 아니다 나는 의인이다 라는 것을

닭이 폭로하는 겁니다.

넌 죄인이야 라고 말입니다.

 

이 닭의 부정성이

닭의 괴물성이

닭의 불가능성이
닭의 잉여성이

베드로를 드디어 죄인으로 들통내는 겁니다.

베드로는 이제서야 살게 되는 겁니다.

 

며느리 다말의 부정성이

시아버지 유다를 지옥에서 건져내니까 말입니다.

 

이 불가능성의 경험을

요셉의 간첩몰아가기 뺑뺑이 테스트에서

자신들의 죄악에서 건지신 주님의 십자가의 용서를

그 희생적인 죽음을 내어놓자

비로소 패쓰 통과 하게 되는 겁니다.

 

그 잃어버린 경험을 내어놓을 때 까지는

계속해서 뺑뺑이 돌리는 겁니다.

 

죄를 가지고 오라는 겁니다.

죄를 가지고 와야 씻어주는 은혜를 베풀것이 아니냐 말이죠.

 

그런데 바로 이런 십자가라는 어리석은 지혜가 싫은 겁니다.

 

좀더 고상하고 의인스럽고 똑부러지는 지혜를 펼쳐야지

왜 어리석은 십자가라는 죽음을 말하냐 말이죠.

왜 하필이면 거리끼는 식으로만 일을 하느냐 말이죠.

그 이유는 우리의 어리석음과 그 죄악과 맞물리게 하기 위함인 겁니다.

그리고 마귀만을 상대하시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마귀가 원하는 방식을 모조리 다 비켜가겠다는 겁니다.

쉽게 말해 내 쪽에서 그 어떤 의로움을 못 갖추도록 하겠다는 겁니다.

용서는 전적으로 예수님 담당으로써

마귀 보란 듯이 펼치겠다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악한 세대가 요구하는 표적이 아닌

요나의 표적이다는 겁니다.

 

반드시 3일 이라는 간극을 벌리겠다는 겁니다.
그 거리두기가 나는 무조건 틀렸고

즉 나는 원수일 뿐이고

가짜일 뿐이고

뭘해도 죄 밖에 없고

 

오로지 3일이라는 그 세 번의 간극 즉 나의 부조리 보다 더 더 더 부조리한 그 간극이

나 보다 옳았다 라는 식으로만

이 요나의 표적만 보여줄 게 없다 라는 겁니다.

 

이것을 다른 표현으로 그냥 보좌가 아닌 빈보좌

텅빈지팡이 라는 겁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통해

예수님을 임금 삼고자 따라잡았는데

정작 예수님은 너희들이 쥐어주는 홀, 지팡이, 막대기는 너희 배 부름을 위한 임금이다는 겁니다.

이런 악마성, 이런 악한 세대가 요구하는 기적에

더 더 더 부조리한 요나의 표적만 보여주겠다는 겁니다.

이것이 텅빈 임금의 보좌요

텅빈 지팡이 홀 막대기 라는 겁니다.

 

3가지 부정한 물증을 확보하겠다는 겁니다. 나 로부터 획득하겠다는 겁니다.

반드시 세 번씩이나 닭을 울게 만들어서 구원하시겠다는 겁니다.
나로부터 10번의 원망을 확보하고서

이래도 너가 죄인 아니냐?

뭐 의인이다고?

너는 철천지 원수일 뿐이다 라는 물증

증거물을 확보한 후에

그 원망한 증거인 3가지 물건이 담긴 증거궤인 예수님의 몸을 어깨에 메고

우리는 세상 마귀들 속에 들어가는 겁니다.

주님이 펼치는 거룩한 여호와의 전쟁

즉 신약에서는 십자가의 전쟁을 그렇게 펼치시는 겁니다.

 

바로 이 세 번의 간극이 우리에게는 도통 이해가 안되는 겁니다.

 

그래서 빈 보좌와 텅빈 지팡이입니다.

 

마치 싫어버린 바 된 예수님 모습 그 자체이고

모든 인간들이 거부하는 에수님 나라 그 자체이다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와 상의도 한 적도 없이

이 요나의 표적이 우리에게 펼쳐지는 겁니다.

 

일방적으로 사건을 퍼트리는 겁니다.

 

그 사건이 바로

그 사건의 증상으로써 나타나는 땅의 요동입니다.

 

땅이 요동하면

내 마음이 진동하면

내 마음이 불안해 하면

내 마음이 낙망해 하면

 

주의 보좌가 든든하다는 증거입니다.

 

그런데 정작 보니 빈보좌입니다.

 

아무런 힘이 없고

무능해 보이는

저 비어 있는 보좌에서

 

땅을 다 흔들어 버리고도 남는

심판과 진노가 일어나는 겁니다.

 

우리는 그것을 볼 때 기뻐해야 합니다.

물론 정반대로 도저히 기뻐함이 안됩니다.

그런데 결과적으로는 기쁨이 넘치는 겁니다.

 

제가 지금 앞 뒤가 맞지 않는

말도 안되는 소리는 하는 거 맞습니다.

그런데 우짭니까

결과적으로는 기쁜데 말입니다.

끝이 기쁘면 다 기쁜 겁니다.

 

성경말씀은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것이 단 하나도 없습니다.

모조리 다 말도 안되는 불가능한 내용 뿐입니다.

즉 부정적이다는 겁니다.

괴물성이다는 겁니다.

 

시편 지난 시간의 최근 앞부분의 내용들이 결국

너는 가만히 서서 하나님의 구원을 바라 보라 라는 겁니다.

주의 얼굴을 바라 보라는 겁니다.

 

그런데 그 사건 속에서는 아무도 바라보는 자도 없고

가만히 서 있을 자도 없습니다.

어떻게 애굽군사들이 자기들을 죽일려고 다가오는데

 

모세는 배부른 소리만 할 뿐입니다.

 

오히려 정반대로 다시는 저 애굽을 못 볼 것이다 라고

아주 아주 기념비 적인 날이 될 것이다 라고

기쁨과 감격에 차 있습니다.

 

그러나 정작 이스라엘은 앞에는 홍해가 가로막고 있고

죽음이죠.

뒤에는 애굽군사들이 죽일려고 다가 올때에

 

여호와 혼자 신이 난 겁니다.

 

? 드디어 구원의 날이다 라고

선물을 베풀어 주고자 신났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죽을 판국입니다.

 

바로 이겁니다.

 

우리가 죽을 판국에 놓여진 그 죽음 속의 탁란이

십자가의 지혜가 펼쳐지는 사건의 순간(우연)입니다.

 

아무리 봐도 거리끼는 부정적인 괴물성입니다.

 

그런데 이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우리가 소인에게는 7천번의 목숨이 남았나이다 라는 소리를 못한다는 겁니다.

 

그저 아둥 바둥 목숨 딸랑 하나로

 

나만 남았나이다 라는 원망만 할 뿐입니다.

 

압니다.

주님이 그거 잘 아십니다.

그래서 나만 남았다는 딸랑 하나 남은 그 육의 세계에서 빠져나오라 라는 겁니다.

없는 자아를 웅켜 잡고 절대로 놓아주지 않겠다는 그 속에서 빠져나오라 라고

허리를 치십니다.

역하게 만드십니다.

 

비로소 이스라엘의 의미가 나타나는 겁니다.

 

이런 영적 이스라엘이

소위 텅빈 아무것도 아닌 무능한 이 이스라엘이

바로 주의 보좌 이다는 겁니다.

 

주님은 그냥 나 가 아닌

7천의 남은자를 주님 자신의 보좌로 삼아 버린 겁니다.

지난 시간에는 이것을 결혼이라는 관계성으로 표현했습니다.

가정부와 신부인 아내의 차이로써 말입니다.

 

가정부는 따지죠 왜 말씀을 단 한번도 어긴 적이 없는데

왜 나를 위해서는 잔치 한 번 안 열어주냐고?

그러나 아내는 더 이상 말이 필요 없을 정도로 잠잠합니다.

가만히 서서 기다립니다.

그저 신랑의 얼굴을 마주 본 것으로써 게임 오바입니다.
물론 불가능하죠 잠잠할 인간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잠잠했다고 짝꿍되신 예수님이
신랑 되신 예수님이 의도적으로 자신의 잠잠함을 뒤짚어 씌워버려서
무시험 합격을 하는 겁니다.

풍랑을 일부러 일으켜서 
다 죽게 되었다고 했을때에
주님은 제자들을 나무래는 관계성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풍랑을 잠잠케 하십니다.
즉 예수님이 주무시니까
일 안하시고 쉬고 있는듯 보여
막 깨우는 겁니다.
못 깨우면 죽게 된다고 본 겁니다.

저 죽습니다 주여
이거 뭔가 잘못 되었어요 주님

그런데 그 풍랑이라는 죽음이 사실은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보여주는 보충물로 작용하는 겁니다.
땅의 요동은 주께서 보좌에 앉아 계심을 보여주는 보충물로 작용하는 것이다는 겁니다.
누구를 볼래? 예수님을 보라 라는 겁니다.


그 얼굴이 그 얼굴의 빛이 나를 구원한다는 겁니다.
내가 익숙하게 만들어 버린 얼굴이 아닌
풍랑을 거쳐서 보게 된 얼굴이
전혀 새로운 얼굴로써 낯설기 짝이 없는
그 얼굴이 그 얼굴 빛이 나를 구원한다는 겁니다.
내가 만들어내는 구원의 조건갖추기가 다 날라가게 되는 거죠.
 

얼굴과 얼굴을 마주 보는 관계는

신랑과 신부의 관계 뿐입니다.

 

가정부는 그 속에 감히 근접 자체가 안됩니다.

가정부 조차도 그것은 싫거든요

가정부의 존재는 오로지 일한 만큼의 보상이나 똑바로 달라는 겁니다.

단지 그것 뿐입니다.

너는 너고 나는 나 일 뿐이다 라는 따로 국밥이다는 겁니다.

 

그러나 신랑과 신부의 관계는 다릅니다.

아무리 신부가 막살아도 그 관계는 전혀 변하지 않는 사랑의 관계만 나타날 뿐이다는 겁니다.

믄 짖을 해도 말입니다.

 

이 사랑의 관계 때문에

땅은 반드시 진동 해야만 하는 겁니다.

 

아 땅이 진동하는 것 보니

주님의 용서가 주님의 십자가의 사랑이

또 펼쳐지는 구나 라고 말입니다.

 

오늘 시편 46편은 바로 이렇게 여인들의 합창 요즘말로 떼창으로 이루어진 여성합창곡입니다.

딱 떠오리는게 바로 미리암의 찬양이 생각 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시대당시의 가장 센 애굽 군사의 총칼에서 도저히 불가능한 구원을 펼쳐서

구원받게 되니 너무 너무 기뻐서 노래를 안 부르고는 못 배기는 겁니다.

 

(15:1, 개역) 이 때에 모세와 이스라엘 자손이 이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니 일렀으되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그는 높고 영화로우심이요 말과 그 탄 자를 바다에 던지셨음이로다

(15:2, 개역) 여호와는 나의 힘이요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시로다 그는 나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그를 찬송할 것이요 내 아비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그를 높이리로다

(15:3, 개역) 여호와는 용사시니 여호와는 그의 이름이시로다

(15:4, 개역) 그가 바로의 병거와 그 군대를 바다에 던지시니 그 택한 장관이 홍해에 잠겼고

(15:5, 개역) 큰 물이 그들을 덮으니 그들이 돌처럼 깊음에 내렸도다

(15:6, 개역) 여호와여 주의 오른손이 권능으로 영광을 나타내시니이다 여호와여 주의 오른 손이 원수를 부수시니이다

(15:7, 개역) 주께서 주의 큰 위엄으로 주를 거스리는 자를 엎으시나이다 주께서 진노를 발하시니 그 진노가 그들을 초개 같이 사르니이다

(15:8, 개역) 주의 콧김에 물이 쌓이되 파도가 언덕 같이 일어서고 큰 물이 바다 가운데 엉기니이다

(15:9, 개역) 대적의 말이 내가 쫓아 미쳐 탈취물을 나누리라 내가 그들로 인하여 내 마음을 채우리라 내가 내 칼을 빼리니 내 손이 그들을 멸하리라 하였으나

(15:10, 개역) 주께서 주의 바람을 일으키시매 바다가 그들을 덮으니 그들이 흉용한 물에 납 같이 잠겼나이다

(15:11, 개역) 여호와여 신 중에 주와 같은 자 누구니이까 주와 같이 거룩함에 영광스러우며 찬송할만한 위엄이 있으며 기이한 일을 행하는 자 누구니이까

(15:12, 개역) 주께서 오른손을 드신즉 땅이 그들을 삼켰나이다

(15:13, 개역) 주께서 그 구속하신 백성을 은혜로 인도하시되 주의 힘으로 그들을 주의 성결한 처소에 들어가게 하시나이다

(15:14, 개역) 열방이 듣고 떨며 블레셋 거민이 두려움에 잡히며

(15:15, 개역) 에돔 방백이 놀라고 모압 영웅이 떨림에 잡히며 가나안 거민이 다 낙담하나이다

(15:16, 개역) 놀람과 두려움이 그들에게 미치매 주의 팔이 큼을 인하여 그들이 돌 같이 고요하였사오되 여호와여 주의 백성이 통과하기까지 곧 주의 사신 백성이 통과하기까지였나이다

(15:17, 개역) 주께서 백성을 인도하사 그들을 주의 기업의 산에 심으시리이다 여호와여 이는 주의 처소를 삼으시려고 예비하신 것이라 주여 이것이 주의 손으로 세우신 성소로소이다

(15:18, 개역) 여호와의 다스리심이 영원무궁하시도다 하였더라

(15:19, 개역) 바로의 말과 병거와 마병이 함께 바다에 들어가매 여호와께서 바닷물로 그들 위에 돌이켜 흐르게 하셨으나 이스라엘 자손은 바다 가운데서 육지로 행한지라

(15:20, 개역) 아론의 누이 선지자 미리암이 손에 소고를 잡으매 모든 여인도 그를 따라 나오며 소고를 잡고 춤추니

(15:21, 개역) 미리암이 그들에게 화답하여 가로되 너희는 여호와를 찬송하라 그는 높고 영화로우심이요 말과 그 탄 자를 바다에 던지셨음이로다 하였더라

 

여기에 미리암에 다시 모든 여인들과 함께 화답가를 부릅니다.

 

그 정도로 신나는 구원의 노래였던 겁니다.

 

또 생각되어지는 것이

요나의 노래입니다.

 

얼마나 신이 났으면 노래가 나옵니까?

저절로 말입니다.

몸이 악기처럼 연주를 안하고는 못배겨서 나오는 겁니다.

 

(2:1, 개역)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그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여

(2:2, 개역) 가로되 내가 받는 고난을 인하여 여호와께 불러 이뢰었삽더니 주께서 내게 대답하셨고 내가 스올의 뱃속에서 부르짖었삽더니 주께서 나의 음성을 들으셨나이다

(2:3, 개역) 주께서 나를 깊음 속 바다 가운데 던지셨으므로 큰 물이 나를 둘렀고 주의 파도와 큰 물결이 다 내 위에 넘쳤나이다

(2:4, 개역) 내가 말하기를 내가 주의 목전에서 쫓겨났을지라도 다시 주의 성전을 바라보겠다 하였나이다

(2:5, 개역) 물이 나를 둘렀으되 영혼까지 하였사오며 깊음이 나를 에웠고 바다 풀이 내 머리를 쌌나이다

(2:6, 개역) 내가 산의 뿌리까지 내려갔사오며 땅이 그 빗장으로 나를 오래도록 막았사오나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내 생명을 구덩이에서 건지셨나이다

(2:7, 개역) 내 영혼이 내 속에서 피곤할 때에 내가 여호와를 생각하였삽더니 내 기도가 주께 이르렀사오며 주의 성전에 미쳤나이다

(2:8, 개역) 무릇 거짓되고 헛된 것을 숭상하는 자는 자기에게 베푸신 은혜를 버렸사오나

(2:9, 개역) 나는 감사하는 목소리로 주께 제사를 드리며 나의 서원을 주께 갚겠나이다 구원은 여호와께로서 말미암나이다 하니라

 

얼마나 감격 스러우면 말입니다.

 

이 불가능성을 노래 부른 겁니다.

불가능한 구원 송입니다.

 

그런데 미리암도 그랬고

요나도 그랬지만

몇초 못 가서

다시 한 입에서 찬송과 저주가 나오는 식이 됩니다.

 

즉 불가능성 이였다는 증거죠.

 

결국 가만히 서서

라는 말은 사실은 우리에게 해당이 안됩니다.

가만히 서서 여호와의 구원을 바라볼자는 없다는 겁니다.

 

구원 자체가 우리를 이렇게 이랬다 저랬다 로 만들어 버립니다.
히스테리, 희숙대리 처럼 이랬다 저랬다 처럼 말입니다.
그런식으로

계속해서 죄인으로 말입니다.
허물 덩어리로 만들어 버립니다.

이것 조차도 구원이 펼치시는 사랑의 관계입니다.

가만히 서서를 우리가 계속 지켜버리면 우리는 그저 가정부일 뿐입니다.

그런데 구원 받았다고 노래를 불렀어도

동시에 또 다시 저주가 나오는 이 옲지 못한 나의 입술을 보고서

뭘 해도 난 안되는 구나 라는 나의 가짜성

나의 부정성

나의 불가능성을

내가 나 스스로 목격하는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나 하나 만의 나만 남았나이다를 쳐다볼게 아니라

우리는 뻔뻔스럽게 7천번의 목숨이 아직까지 남았다고 우리의 관계

나 너 우리의 관계인 그 사랑의 관계를 뻔뻔스럽게 쳐다보게 되는 겁니다.

 

이것이 얼굴과 얼굴을 마주보는 관계이다는 겁니다.

 

왜 땅이 요동하는데도 잠잠하라고 하십니까?

아무도 잠잠할 자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 마나 한 소리를 하시는 겁니까?

 

이런 얼룩 투성이인 얼룩 그 자체

허물 그 자체

죄악 그 자체인 우리를 보좌 삼으신 겁니다.

뭘 해도 텅텅 비어있는 우리인데 말입니다.

 

마치 시편 45편의 왕의 찬가, 곧 구원자에 대한 찬미에

다시 화답하듯이 여성합창으로써

 

나의 피난처시오

나의 산성이시라 라고 노래 합니다.

 

내 주는 강한 성이요 방해와 병기 되시니 ~~~~~~~~~~

 

이것은 신랑이 먼저 신부를 위해 노래 불렀기에

그에 대한 화답가처럼 느껴지듯이

 

신랑 또한 자신의 보좌로 삼으셨다 라는 겁니다.

신부로 말입니다.

 

(3:16, 개역) 나 여호와가 시온에서 부르짖고 예루살렘에서 목소리를 발하리니 하늘과 땅이 진동되리로다 그러나 나는 내 백성의 피난처, 이스라엘 자손의 산성이 되리로다

 

(66:1, 개역)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등상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지을꼬 나의 안식할 처소가 어디랴

 

(3:17, 개역) 그 때에 예루살렘이 여호와의 보좌라 일컬음이 되며 열방이 그리로 모이리니 곧 여호와의 이름으로 인하여 예루살렘에 모이고 다시는 그들의 악한 마음의 강팍한 대로 행치 아니할 것이며

 

(7:49, 개역) 주께서 가라사대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등상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짓겠으며 나의 안식할 처소가 어디뇨

(3:26, 개역) 사람이 여호와의 구원을 바라고 잠잠히 기다림이 좋도다

(3:28, 개역) 혼자 앉아서 잠잠할 것은 주께서 그것을 메우셨음이라

 

 

뭘해도 원수요 뭘해도 죄인이요

뭘 해도 허물 투성이 밖에 없는데도 말입니다.

 

그래서 이 노무 죽일놈의 사랑 때문에

 

땅은 요동하는 겁니다.

 

사랑의 부정성

사랑의 불가능성

사랑의 괴물성 때문에 말입니다.

 

언제나 나는 빈털털이 일뿐~~~~~~

 

사랑 그 놈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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