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께서 원수 갚으시리니 (시편 54)

 

(12:19, 개역)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12:20, 개역)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12:21, 개역)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10:30, 개역)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 하시고 또 다시 주께서 그의 백성을 심판하리라 말씀하신 것을 우리가 아노니

 

(54:1, 개역) [다윗의 마스길, 영장으로 현악에 맞춘 노래, 십 인이 사울에게 이르러 말하기를 다윗이 우리 곳에 숨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던 때에] 하나님이여 주의 이름으로 나를 구원하시고 주의 힘으로 나를 판단하소서

(54:2, 개역) 하나님이여 내 기도를 들으시며 내 입의 말에 귀를 기울이소서

(54:3, 개역) 외인이 일어나 나를 치며 강포한 자가 내 생명을 수색하며 하나님을 자기 앞에 두지 아니하였음이니이다(셀라)

(54:4, 개역) 하나님은 나의 돕는 자시라 주께서 내 생명을 붙드는 자와 함께 하시나이다

(54:5, 개역) 주께서 내 원수에게 악으로 갚으시리니 주의 성실하심으로 저희를 멸하소서

(54:6, 개역) 내가 낙헌제로 주께 제사하리이다 여호와여 주의 이름에 감사하오리니 주의 이름이 선하심이니이다

(54:7, 개역) 대저 주께서 모든 환난에서 나를 건지시고 내 원수가 보응받는 것을 나로 목도케 하셨나이다

 

(10:28, 개역) 모세의 법을 폐한 자도 두세 증인을 인하여 불쌍히 여김을 받지 못하고 죽었거든

(10:29, 개역) 하물며 하나님 아들을 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의 당연히 받을 형벌이 얼마나 더 중하겠느냐 너희는 생각하라

(10:30, 개역)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 하시고 또 다시 주께서 그의 백성을 심판하리라 말씀하신 것을 우리가 아노니

(10:31, 개역) 살아 계신 하나님의 손에 빠져 들어가는 것이 무서울진저

(10:32, 개역) 전날에 너희가 빛을 받은 후에 고난의 큰 싸움에 참은 것을 생각하라

(10:33, 개역) 혹 비방과 환난으로써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고 혹 이런 형편에 있는 자들로 사귀는 자 되었으니

(10:34, 개역) 너희가 갇힌 자를 동정하고 너희 산업을 빼앗기는 것도 기쁘게 당한 것은 더 낫고 영구한 산업이 있는 줄 앎이라

(10:35, 개역) 그러므로 너희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 이것이 큰 상을 얻느니라

(10:36, 개역)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을 받기 위함이라

(10:37, 개역) 잠시 잠간 후면 오실 이가 오시리니 지체하지 아니하시리라

(10:38, 개역)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저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10:39, 개역) 우리는 뒤로 물러가 침륜에 빠질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



나의 행함의 여부로 인한 원수적인 관계는 사실상 모호합니다.

즉 다시 그 행함으로 그 원수적인 관계를 풀어서 평화적 관계로 만들면 그만 입니다.

이것이 과거의 선물 개념입니다.

 

부족과 부족의 전쟁을 어떻게 해소를 하는고 하니

바로 여자를 통해서 전쟁의 관계인 원수관계를 평화적인 우호의 관계로 바꾸는 겁니다.

네 맞습니다. 정략결혼입니다.

 

레비스트로스는 생산의 시스템이 어떻게 멈추지를 않고 계속 지속이 되는가?

즉 어떻게 없는데서 있는데로 나아가는가?

 

(4:18, 개역)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을 인함이라

 

(벧전 1:3, 개역)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분명히 없는데 말입니다.

그것은 바로 선물 때문이다는 겁니다. 잉여


그런데 성경은 더 깊이 들어갑니다. 

그래서 이제는 거꾸로 이 선물 때문에 전쟁이 종식이 되는 것이 아니라

더 역설적으로 더 전쟁이 발발하게 되었습니다. 더 증대, 더 확장 됩니다.

멈추기는커녕 더 증폭이 된 겁니다.

 

여자 때문에 전쟁을 하는 겁니다.
여자라는 전리품. 증여품. 잉여품 때문에 말입니다.
자식 생산은 여자만이 하거든요.

 

여성성이 소위 신의 영역이 되는 겁니다. 생산이요 창조의 영역인 겁니다.

신들의 전쟁의 전리품이자 동시에 신이 되는 겁니다. 여성성이 말입니다.

어떻게 하면 여자를 더 많이 차지하느냐로 신과 함께 하는

우리가 진짜 신이다 라는 것이 되는 겁니다.

 

라멕의 노래가 여자가 없으면 나오지도 않듯이 말이죠.

 

최근의 나온 책 광고가 자주 눈에 띄여 그 책 제목을 보고 웃었는데

여자는 전쟁을 원치 않는다?

 

검색해 보니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아마 상대적인 남자의 폭력성을 빗대어 한 것 같은데

 

저는 반대로 봅니다.

 

남자들이 전쟁을 할 수 밖에 없는 기능으로 태어난 것은

여자가 전쟁을 요청했기 때문에

머슴아들은 그 보충물 즉 시다바리(보조, 부하, 똘마니, 머슴, )로 작용하는 겁니다.

물론 남자는 토사구팽이지요.

 

더 정확하게는 여자의 후손 전쟁이지요

(3:14, 개역) 여호와 하나님이 뱀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렇게 하였으니 네가 모든 육축과 들의 모든 짐승보다 더욱 저주를 받아 배로 다니고 종신토록 흙을 먹을지니라

(3:15, 개역)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4:19, 개역)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

(4:20, 개역) 내가 이제라도 너희와 함께 있어 내 음성을 변하려 함은 너희를 대하여 의심이 있음이라

(4:21, 개역) 내게 말하라 율법 아래 있고자 하는 자들아 율법을 듣지 못하였느냐

(4:22, 개역) 기록된 바 아브라함이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계집종에게서 하나는 자유하는 여자에게서 났다 하였으나

(4:23, 개역) 계집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하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

(4:24, 개역) 이것은 비유니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 하나는 시내 산으로부터 종을 낳은 자니 곧 하가라

(4:25, 개역) 이 하가는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 산으로 지금 있는 예루살렘과 같은 데니 저가 그 자녀들로 더불어 종 노릇 하고

(4:26, 개역)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4:27, 개역) 기록된 바 잉태치 못한 자여 즐거워하라 구로치 못한 자여 소리 질러 외치라 이는 홀로 사는 자의 자녀가 남편 있는 자의 자녀보다 많음이라 하였으니

(4:28, 개역) 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

(4:29, 개역) 그러나 그 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핍박한 것 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

(4:30, 개역) 그러나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계집종과 그 아들을 내어 쫓으라 계집종의 아들이 자유하는 여자의 아들로 더불어 유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였느니라

(4:31, 개역) 그런즉 형제들아 우리는 계집종의 자녀가 아니요 자유하는 여자의 자녀니라


여자만이 되도 않는 전쟁(남자들이 하는 모호한 의문의 전쟁, 답도 없는)이 아닌
진짜 전쟁을 요청했기 때문입니다.

폭격 요청이라는 제목을 글을 적었는데 살펴보시길
즉 전쟁 속의 전혀 다른 전쟁입니다.

전쟁 속의 전쟁
다른 표현으로는 전쟁 바깥의 전쟁
전쟁을 넘어서는 또 다른 전쟁

 

결국 남자들의 사고방식인 행함의 영역을 넘어서는 전쟁 곧 원수관계이기에

나와 전혀 무관한 원수이기에

나의 그 어떤 행함으로도 타협을 이끌어내어서

화평으로 나아갈수 없는 불가능함으로써의 원수지간인 겁니다.

 

괜히 말을 돌렸는데 직설적으로 말해서

행함의 영역이 아니라

믿음의 영역으로서의 원수이다는 겁니다.

 

이제는 또 말이 더 어렵지요?

믿음 문제로써의 원수 개념

 

그래서 한나와 마리아의 기도가 이 원수를 구체화 하는 겁니다.

 

원수를 구체화 하지 않으면

전쟁이 일어나지도 않고

전쟁이 없는데 어떻게 구원의 의미가 나오겠느냐 말이죠?

 

지지난 시간의 감사로 제사드리는 자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고 했잖아요!

시편 50편 말입니다.

 

왜 감사하는 자가 없는데 감사하는 자를 새롭게 만들어 내느냐 하면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시기 위한 것이다는 거죠.

즉 전쟁입니다.

 

전쟁을 통한 구원입니다. 이스라엘이라는 전리품을 빼앗은 겁니다.
심판 속에서의 구원이지
딸랑 구원만 나오지 않습니다.
구원자체가 원인 없는 결과로써 전쟁을 구체화 하는 겁니다.
구원 때문에 전쟁이 구원의 증상으로써 나타나는 겁니다.
감사 때문에 전쟁이 감사의 증상으로써 말입니다.

 

예루살렘을 천국 뻬앗듯이 빼앗는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구원 의미입니다.

 

그런데 일단 현대인에게는 전쟁개념이 없습니다.

여호와의 거룩한 전쟁 개념 말입니다.

육의 싸움 말고 영의 싸움

 

전쟁 개념이 없기 때문에 구원개념도 없고

구원에 대한 감사 개념도 역시 없습니다.

 

그럼 현대인들의 교회에서의 구원 개념은 뭐냐?

보험상품일 뿐입니다.

교회는 천국보험회사일 뿐이고요

내가 보험에 가입하고 그 보험금을 부은대로 타내는 겁니다.
성화론이지요. 인도 종교입니다. 모든 종교가 이런 식입니다.
선을 쌓아야 선한 곳에 간다는 겁니다.
지성이면 감천이다는 식이지요.

 

그 동안 부은 돈을 연금 타듯이 보상금을 노리는 구원개념입니다.

악마들 집단이지요.

 

원수입니다.

이것이 행함의 세계인 지옥의 세계입니다.

 

자 오늘 시편 54편은 주님이 새삼스럽게 새롭게 만든 원수 때문에

졸지에 다윗은 그 원수들에게 둘러 쌓임을 당해야 한다는 겁니다.


그래야 구원을 이끌어낼 것 아니겠습니까?


즉 다윗이 당하는 양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는 고난은

구원의 증상으로써 나타나는 겁니다. 이미 구원이기에 말입니다.
 

그럼 다윗의 원수는 누구입니까?

 

시편에서 제일 어려운 개념이 원수가 누구냐 라는 겁니다.

마치 신약학자들이 씨뿌리는 비유를 해석 못하는 이유와 같습니다.

 

시편에서의 원수는

누가 다윗을 괴롭히고 애워싸고 다윗과 전쟁을 벌리고 있느냐를 보면 됩니다.

 

그런데 눈에 보였던 누구든지 다 알았던 원수였던 사울왕이 살아있을때는

아 다윗의 원수는 사울왕이구나 라고 알것인데

문제는 사울왕이 죽고 난 뒤에도 다윗은 더 더 더 어려움과 애워싸움을 당하는

전쟁이 더 증폭이 되더라 말이죠.

 

누구냐 말이죠.

시편 전체에 나타나는 원수 개념은 사울 왕이라는 한 개인으로만 볼수가 없게 되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 원수 갚는 것을 허용치 않으시는 겁니다.
우리 또한 원수이니까 말입니다.

 

그럼 오늘 본문 사건에 들어가봅시다.

 

먼저 어떤 때에 부른 노래였다고 하는데 어떤 때였는고 하니

 

(삼상 23:19, 개역) 때에 십 사람들이 기브아에 이르러 사울에게 나아와 가로되 다윗이 우리와 함께 광야 남편 하길라 산 수풀 요새에 숨지 아니하였나이까

 

십 인이 라고 했는데 열 명 인줄 알았는데

십 은 부족 이름이고 인은 사람인 즉 백성, 부족 등등입니다.

 

부족 이름은 그 지역 이름을 땃고요

 

(Ziph) 황무지 수풀 지역. 지금의 텔짚(Tell Zif)

 

(54:1, 개역) [다윗의 마스길, 영장으로 현악에 맞춘 노래, 십 인이 사울에게 이르러 말하기를 다윗이 우리 곳에 숨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던 때에] 하나님이여 주의 이름으로 나를 구원하시고 주의 힘으로 나를 판단하소서

 

막상 사무엘상 23장을 보면 참으로 특히한 것이 보입니다.

 

사울왕이 다윗을 죽일수 있도록 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라고 한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다윗은 주의 이름으로 나를 사울왕의 손아귀에서 건져 달라 구원해 달라고 합니다.

 

사울왕이나 다윗이나 둘 다 같은 하나님을 두고 서로 자기 입장에서 하나님을 언급합니다.


두 하나님이 존재해요 두 하나님이 ~~~~

각자의 하나님이 자기 편으로써 도움이 되어 달라는 겁니다. 

그런데 둘 다 틀렸습니다.

하나님은 사울왕도 아니요

다윗의 편도 아닙니다.

 

오히려 두 개인은 하나님이 펼치시는 계획에 이용 당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두 개인이 아닌 두 세계를 말하는 겁니다.
 

먼저 하나님은 그 어떤 인간의 편도 아닌

오로지 하나님은 하나님의 이름 편에 서 계십니다

 

문제는 사울왕은 하나님이라는 존재에 매달리지만
(이것이 역설적이게도 신비 입니다. 즉 하나님을 없다 하는 자들의 특징입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믿는 자들의 특징입니다.)


여기서 특이한 것은 다윗은 하나님의 이름에 간구한다는 점입니다.

(이거 또한 더 신비 입니다. 즉 하나님의 이름은 하나님이 아닙니다. 이름은 그냥 무능 그 자체인데 이 이름에 모든 것을 거는 겁니다. 아무것도 아닌 것에 올인하는 겁니다. 무능인데 말입니다. 아무것도 없는 비존재인데 ...)

지옥가는 자만 신비요 해석불가인게 아니라
천국이 땡기는 자도 해석불가로써의 더 신비요 더 비밀 그 자체인 겁니다. 
참 기묘하죠 ~~ 풀리지 않는 비밀이 많아요. 기묘한 이~야~기~~~~~~

즉 다윗이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에,

하나님이 하나님의 이름에 편들고 있기에 하나님의 이름에 호소를 합니다.

하나님에게 호소하는 사울왕과의 차이점이 졸지에 갭으로써 벌어진 겁니다.

 

마치 이것은 이것과 같습니다.

사울왕은 지난 시간처럼 안식일을 지키는 것에 몰두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모호한 겁니다. 존재가 오히려 더 모호한 겁니다.

 

반면에 다윗은 안식의 주인에게 몰두합니다. 이 차이입니다.

안식의 존재는 비존재 취급받는데도 불구하고 안식의 완성이 또렷합니다.

그런데 안식의 주인과 직접 대면한 자가 누가 있겠습니까?

 

이 차이 때문에


반드시 안식일을 지키는 자는

요즘식으로 하면 주일성수를 지키는 자는

 

안식의 주인을,
모든 날이 주의 날로써 모든 날의 주인이신 예수님을

거부하도록

살인하도록 되어 있다는 겁니다.

안식의 주인인 예수님을 죽이는 판국에
다윗 죽이기는 아무것도 아니지요.
성도 죽이기, 바울 죽이기 등등은 별거 아닌걸로 취급하는 겁니다.

그래서 집요하게 매달리는 겁니다.


안식일을 지키는 자들이 안식의 완성을 싫어하기에

안식의 주인을 거부하는 겁니다.
 

왜냐하면 행함과 믿음의 대립이 되기 때문입니다.

 

맞습니다. 결국 두 사람이라는 개인은

개인의 사고방식을 보여주는게 아니라

 

한 쪽은 지옥의 증상을

다른 한 쪽은 이미 결정난 천국의 증상을 보여주는 겁니다.

집단적이지 개인적인 혼자만의 사고방식이 아닙니다.

 

놀랍게도 이스라엘은 나라 전체가

민족 전체가 사울왕의 사고방식으로 똘똘똘 뭉쳐지도록 되어 있고

사울왕이 죽은 뒤에도 오히려 더 활활활 타오르도록 되어 있습니다.

 

어디까지? 지금까지도 앞으로도 말입니다.

그렇게 계속 이어졌기에

 

예수님이 안식의 주인으로써 자유를 누리는 것을

안식일을 지키는 사울왕의 후예들은 도저히 눈꼴 시러워서 못 보는 겁니다.

탕자를 용서하는 아버지의 사랑을 거부하는 겁니다.
오로지 맏아들은 아버지 말씀을 단 한번도 어긴적이 없다 라는 이 행함만 고수하는 겁니다.

 

그래서 죽이는 겁니다.

이들의 최종 목적은 이것 뿐입니다.

 

안식일 지키는 것을 사수해야지

안식의 주인이 나타나는 꼴을 못 보겠다는 겁니다.
안식의 주인은 안식일을 어기는 다윗을 용서하기 때문에 싫은 겁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교회는 다 사기 집단들인게 맞지요.

 

그러면 다윗은 어떻게 이것을 알았을까요?

물론 모릅니다.

 

주님이 불쌍히 여긴 그 이유 하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이름을 쳐다볼 수밖에 없도록

결과적으로 하나님이 이름이 다윗에게 철썩 달라 붙은 겁니다.


마치 천국을 빼앗는 자인 예수님의 완성이 소급이 되어 천국이 찰싹 달라붙은 것처럼
 

그렇기 때문에 원인을 다윗에게 찾을 수 없습니다.

다윗 따라하지 마시길

 

다윗 개인이 아닌

다윗은 결국 하나님의 이름이 달라 붙은 결과물로써

예수님이 앞으로 이런 모습을 미리 맛배기로 보여주는 샘플이였던 겁니다.

그렇다면 다윗을 볼게 아니라

예수님이라는 실상을 보는 겁니다.
다윗 속에서 예수님의 운명을 보여주시는 겁니다.

 

다윗은 그림자요 실상은 예수님으로써 이런 운명으로써 오시는 겁니다.

 

그렇다면 다윗의 원수가 아닌

예수님의 원수로써의

원수들의 활동들을 보는 것이기에

사울왕 개인을 볼게 아니라 전체 집단의 사고방식을 봐야 하는 겁니다.

 

사울왕 개인으로 절대로 끝나는 문제가 아닌

지금도 교회 안이나 교회 밖에서 벌어지는 문제들로써 반복되도록 있다는 사실입니다.

 

결국 십자가는 이런 일들의 사건들을 그 때 사무엘상때 단 한번의 사건으로 끝나버리고 멈추는게 아니라

더 활성화 되도록 증폭 시키는 겁니다.

십자가 사건에서도 터지게끔 하고

지금 현재에도 벌어지도록 말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자와 하나님의 이름을 믿는 자의 대립인 겁니다.

이스라엘 내부에서 말입니다.

 

이제 전 세계의 터전에서 벌어지도록 되어 있습니다.

지금껏 그래왔고 말이죠.

 

그렇다면 다윗 개인의 원수가 될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원수 문제를 거론하고 나서는 자는

사울 왕 쪽입니다.

 

하나님의 원수로써 다윗을 몰아갑니다.

 

결국 사울왕의 하나님이란

개인이라는 자아의 복수심의 확장에서 언급되는 하나님인 셈입니다.

 

그렇다면 다윗의 하나님의 이름은 반드시 물과 기름처럼 대조를 이루는 거죠.

이방의 신이 아닌

이스라엘 내부에서의 사울왕 패거리의 하나님과 대조를 이루는 겁니다.


이사야서에서 

임마누엘이라는 뜻도 이런 의미가 되는 겁니다.

이사야는 이렇게 외치는 겁니다.

일부러 헷갈리게 말이죠.

 

너의 하나님과 나의 하나님은 다르다 라고 말입니다.

 

졸지에 이스라엘 내부에서 두 하나님이 생기는 겁니다.

 

다수의 하나님과 소수의 하나님

아니 소수 라고도 할 수도 없는 오로지 이사야 자신만의 하나님만 옳고

나머지 하나님은 가짜다 라고

 

인간을 언급하는게 아니라, 이스라엘이 아니라

하나님을 언급하는 겁니다.

너거 하나님은 가짜야 라고 말이죠.

 

왜냐하면 이스라엘이 사울왕처럼 모조리 다 하나님이라는 가면 뒤에 다 숨어버려서

자신들의 행위를 정당화 했기 때문입니다.
그 행위가 바로 안식일 지키기 라는 것들인 거죠.

 

결국 이 정도 까지 갔으면 이스라엘은 이미 벌써 끝난 거죠.


백날 해도 안식의 주인까지 다다를수가 없는 겁니다.
정작 그것이 나와야 하는 것이 안식인데 말입니다.
 

이렇게 인간들이 다 말아먹은 이스라엘의 의미를

예수님 혼자만 이루시는 겁니다.

 

어떻게?

이사야 본인만이 외치는 하나님이 진짜 하나님이고
다른 사람의 하나님은 다 가짜라고 몰아버림으로써

의도적으로 죽임 속에 놓여지게 됩니다.


맞아 죽어도 싸죠

그런데 죽임을 당하는 자가 더 당당합니다.

거봐 거봐 이러니까 너희들의 하나님은 가짜야 라고

이사야 본인 스스로가 미끼로써

알리바이를 형성해 버리는 겁니다.

 

안 말려드는 놈이 없습니다.

 

이러니까 거봐 거봐 그리너까 너희는 가짜 맞잖아 라는 겁니다.

 

마치 예수님의 십자가라는 부조리 즉 외설성과 같지 않습니까?

그 노선 대로 하시니까 말이죠.


지금 현대에서도 벌어지는 겁니다. 이 십자가 사건은 말이죠.

그렇다면 오늘 다윗도 일종의 미끼로써

저들을 미쳐버리게 만드는 타깃으로 이용되는 겁니다.

 

어떻게 해서든 안식일을 어긴 자로써 뒤짚어 씌워서

하나님을 높이겠다고 나서는 겁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이름은 다윗을 저런 99마리 양이 아니라

한 마리 잃어버린 양으로 만드는 겁니다.

 

구원은 이렇게 죄인에게만 해당 되는 겁니다.

용서는 이렇게 원수에게만 해당 되는 겁니다.

 

즉 다른말로 하면 상대적인 원수 아닌 자들에게는 용서가 해당되지 않고

오히려 원수 짓을 아니한 것에 대한 정당성만 추구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역사도 종교도 경제 정치도 모조리 그 정당성에 동조하도록 되어 있는 겁니다.


이것이 안식을 지키는 자가 아닌 맏아들이 아닌 이스라엘이 아닌

안식의 주인으로 부터 불쌍히 여김을 받는 탕자 곧 이방인이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하나님을 영화 롭게 하는 여호와의 구원을 보는 자들인 겁니다.
 
반대로

절대로 죄인이 아닌 의인으로써 저 세리와 같지 않음을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저 안식일을 어기고 제사장만 먹는 진설병을 먹어서 율법을 더럽힌 자와 같지 않음을 감사하는

 

의인으로써의 정당성으로써 죄인을 처단하는 정죄하는 위치에서 하나님도 이스라엘도

시간 공간 종교 경제 정치 모조리 다 다윗 죽이기 라는 옳은 행위에 집착하도록

미쳐버리도록 만들어 버리는 겁니다.


맏아들은 탕자를 미워 죽는 겁니다.
가인이 아벨을 미워 죽듯이
왜? 하나님에 대한 복수심으로 아벨을 죽이는 겁니다.

이 허무한 아무것도 아닌 것에 아벨은 충성한 겁니다.

허무하게 죽음으로써 말이죠.
 

몇 년전에 이렇게 갑자기 미쳐버린 놈을 본 적이 있는데
아니 누가 정신병을 집어 넣은듯이 멀쩡하던 놈들이 돌아버리는 사건을 목격한 적이 있습니다.

그의 남은 인생이 이런 짓에 올인하는 모습을 보고

오히려 제가 주님이 두렵기 짝이 없었습니다.

 

성경 속에서나 있을 법한 사건이 내 눈 앞에서 펼쳐지니까

몸이 약한 저야 뭐! 나자빠져서 백번 만번 죽어 없어져야 마땅할 정도로

참으로 무섭기 짝이 없는 주님의 이름이다 말이죠.

 

저들의 살기가 넘쳐 흘러 흘러 넘치듯이 나 하나 쯤은 아무것도 아닌데 말이죠.

벌써 잡혀 죽어도 할 말 없는 겁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피하게 하시는 것 보고

더 놀랍고 더 두려웠습니다.

도대체 왜?

 

와이 미

 

왜 하필이면 접니까 케보이

 

오히려 피해 도망쳐서 나온 구차한 내 목숨이 부끄러울 뿐이더라 말이죠.

 

케보이 살려줄 이유가 전혀 없는 원수요 마귀인데

왜 나 같은 마귀를 왜?????

 

아무리 봐도 다윗의 원수는 없습니다.

다윗에게 하나님이 달라 붙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이 철거머리처럼 달라 붙어 버렸기에

다윗의 원수는 없고

예수님의 원수 뿐이였던 겁니다.

하나님 이름의 원수 이지 개인의 원수가 아닙니다.

 

믿음의 원수입니다.

 

그러나 사울왕에게는 원수가 있습니다.

사울왕에게 하나님이 달라 붙어 버렸기 때문에

하나님의 원수로써 다윗을 지구 끝까지 쫏아가 찾아내는 겁니다.


하나님의 원수로써 다윗이 적반하장으로 몰아가 버리는 겁니다.
그렇게 할 수 있도록 하나님까지 도와 주고 있으니 말이죠.
 

실제로 다윗은 도망치다가 볼일 다 봅니다.

개인의 도망일까요?

이것은 사울왕 같은 이스라엘 속에서의 또 다른 이스라엘의 운명과 같습니다.

다윗왕의 운명처럼 말입니다.


곧 예수님의 운명처럼 예수님은 늘 도망치듯이 자리를 피하시는 겁니다.
 

이것이 이스라엘 속에서 분절이 됩니다.

 

마치 하나님 본인이 본인 스스로가 분절을 일으키듯이 말이죠.

 

이스라엘 속에서 또 다른 이스라엘은 쫏김을 당하듯이 도망다니고

그것을 쫏고자 끝까지 따라 잡는 이스라엘이 있는 겁니다.


두 이스라엘이 있는 겁니다.
이스라엘을 죽일려고 쫏아다니는 이스라엘과
그런 이스라엘로 부터 도망치듯이 쫏겨남을 당하는 이스라엘
이렇게 분절이 벌어지는 겁니다.
 

말이 되나요?

우찌 이것이 이해가 됩니까?

 

다윗은 이스라엘 구석 구석으로 도망을 치다가 이방나라에 까지 넘어갑니다.

이러면 다윗을 쫏던 사울왕은 이스라엘 내에서는 죽일 듯이 찾아내다가

이방으로 넘어가면 좋아라 합니다.

 

저봐 저봐 하나님이 저를 버렸고

저 다윗 또한 하나님과 이스라엘을 버렸다 라는 겁니다.
이렇게 알리바이가 형성 되니까 금상첨화 죠.

그런데 우찌 이스라엘의 왕이 되겠느냐 말이죠

 

예수님을 죽이면 우찌 이스라엘의 왕이 될 수 있겠냐 라고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죽이는데 혈안이 되었던 겁니다.


죽어버리고서는
이미 죽었는데 죽은 자가 어떻게 왕이 되냐 말이죠
그런데 놀랍게도 이름이 왕이 되더라 말이죠.

이것도 모르고 

무슨 수를 써서 라도 예수님이 왕이 되는

그 말도 안되는 짓을 막는데 총력을 기울여서

이방까지 끌어들이는 겁니다.

 

다윗은 이 양쪽 나라를 오가면서

미끼로써 두 나라의 꽁꽁꽁 감추어져 있는 속내를 들추어내는데 이용되는

하나님의 이름의 도구가 되는 거죠.

 

그러나 다윗 개인으로써는 그저 쫏겨나고 도망치는 신세로써

이런 하나님의 이름이 벌리시는 전쟁에

그 기묘와 모사에 혹독하게 당할 뿐이지

내막을 파악할수 있는 배부른 입장이 못되는 겁니다.

행함 자체가 안되는 겁니다.

정신없이 쫏겨나고 도망칠 뿐입니다.

 

그런데 사울왕은 아무리 봐도 하나님이 자기 편처럼 보이도록

하나님이 조치를 그렇게 하니까

더 신이 나서 더 사냥감을 쫏는 짐승처럼

모든 이스라엘을 개 처럼 개 풀 듯이 풀어서

 

다윗 하나 죽이기에

원수 만들기에

마귀 만들기에 (바알 세불 걸린 마귀 중의 대 마왕)

죄인 만들기에

 

온 이스라엘이 들썩 들썩 거리게 합니다.

 

때려죽어도 이 얼룩을 제거 하겠다고 말이죠,

이스라엘이 흠이 없어야 하는데

거룩해야 하는데

이 놈의 다윗 하나가 얼룩으로써 자리잡고 있으니

반드시 제거하기 위해

미친 듯이 입에 개거품을 물고 짖어대는 늑대로 돌변하도록

이스라엘 전체가 다윗 죽이기에 매진합니다.

 

유대인 전체가 예수님 죽이기에 매진하고

오늘날 교회들이 성도 죽이기에 매진하는 겁니다.

 

십자가 사건이 그때 단 한번의 사건으로 끝난 줄 알았는데

이건 뭐 여러 곳에서 동시다발의 사건으로 만드시는 겁니다.

즉 무시간 무장소로써의 사건이 되니

무시로, 수시로 벌어지는 겁니다. 시간을 뛰어 넘어서 장소를 뛰어 넘어서 말입니다.

 

지금 이 시편 54편의 노래 또한 무슨 의미입니까?

반복이다는 것 아닙니까?

그때 그 사건으로 끝난 것을 노래하는게 아닙니다.

이것을 시뮬라크르 라고 하는데 즉 사건이라고 하는데

그때 벌어진 사건을

그것도 스쳐 지나간 우연이 되어버린 그 사건을

다시 언급하면서 노래 부른다는 말은

역설적이게도 영원히 하겠다는 겁니다.

 

이 사건을 무한반복 하겠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것은 어디까지나 십자가 사건와 연관이 된 겁니다.

 

결국 십자가 사건은 지금껏 반복 되어 왔듯이

앞으로도 반복이 된다는 겁니다.

 

사울왕이 대세를 이루고

다윗은 쫏겨나는 신세로써의 마귀 취급받는 겁니다.

 

이 대세를 이룬 것을 본 이스라엘이

사울 왕이 죽어 없어져서

이 대세를 따르겠습니까?

 

맨날 쫏겨다니는 다윗을 따르겠습니까?

 

사도바울이 예수님을 막고자 예수쟁이를 죽일려고 앞장설때는

이 사울왕과 같은 대세를 따랐습니다.

 

그런데 예수의 영이 철썩 달라붙어 버림으로써

이제 사도바울은 하나님이 아니라 즉 유대교가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을 믿는 예수님의 종이 되니까

 

가는 곳 마다 쫏겨나고 매맞고 도망치는 탈출의 탈출의 연속을 격는 겁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오히려 저들 보다 더 넉넉한

십자가의 용서를 외치고 있는 겁니다.

 

가는 곳 마다 이단 취급 당하고 죽임을 당하는 위협 속에서도 말입니다.

 

다윗에게 이 이름이 철썩 달라 붙은 겁니다.

그러니 개인이 아닌

 

이스라엘의 속성의 내막을 벗기는데 이용이 됩니다.

 

하나님의 원수로써 취급받는 다윗이 (사울 왕의 대세 때문에)

하나님의 이름의 원수들의 내막을 들추어내는 데 이용이 되는 겁니다.

(사울 왕의 사고방식이 이스라엘에게 퍼져서 끝까지 하나님의 이름을 거부하도록 만드시는 겁니다.)

 

외설에 더더더 외설적인

십자가라는 용서의 부조리를 펼치시는 겁니다.

 

절대로 절대로 다윗을 용서하는 꼴을 못 보는 겁니다.

 

(삼상 18:7, 개역) 여인들이 뛰놀며 창화하여 가로되 사울의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한지라

(삼상 21:11, 개역) 아기스의 신하들이 아기스에게 고하되 이는 그 땅의 왕 다윗이 아니니이까 무리가 춤추며 이 사람의 일을 창화하여 가로되 사울의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한지라

(삼상 29:5, 개역) 그들이 춤추며 창화하여 가로되 사울의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하던 이 다윗이 아니니이까

 

저는 이 표현이 참으로 이상하게 느껴졌습니다.

하나님은 능력이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이름은 철저하게 무능합니다.

 

그런데 원수를 사울왕은 천천을 죽였는데

다윗은 원수를 만만 죽였다는 겁니다.

 

이 천천이요 만만이요 라는 표현이 갑자기 억수로 부조리한 표현임을 보게 되었습니다.


사람의 목숨을 빼앗아 죽이는 것이 뭐 그리 자랑이라고 살인을 했다고 노래까지 부릅니다.
그런데 이것은 원수를 말하는 겁니다.
 

사울왕에게는 아무리 따져 봐도 적군인 원수가 백날 세어 보아도

천천 밖에 없기에 다 죽여도 천천 뿐인 겁니다.
아무리 죽여 본들 천천이 전부인 셈이다는 거죠.

 

그러나 다윗은 원수가 아무리 세어 보아도 만만이 넘는 겁니다.

 

자 이렇게 되면 평생을 걸쳐서 죽여도 넘쳐나는 원수이지만

반대로 사울왕은 이미 다 죽여버렸기에


원수를 새삼스럽게 만들어야 하는 피곤이 곤고함이 생기는 겁니다.


어떻게 해서든 원수를 새로 만들어야 저 만만의 다윗을 이길수가 있는데 말이죠.

옆에서 노래를 불러요 노래를

노이로제 걸릴 판국입니다. 더 강박증에 빠지도록 부추기는 노래 입니다.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7배인데 라멕을 위하여는 77배 이다는 것과 같습니다.


(창 4:23, 개역) 『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창상을 인하여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을 인하여 소년을 죽였도다』

(창 4:24, 개역)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 배이리로다 하였더라』

 

그래서 이들은 안식의 주인 보다 안식일 지키기에 미쳐 있는 겁니다.

행함입니다.

왜? 믿음이 서지를 못하도록 하기 위해 77배 88배 99배에 더 집착하도록 되어 있는 겁니다.

 

그러나 다윗은 어디를 가도 원수들만 깔려 있습니다.

이스라엘에 가도 원수들이요

이방 나라에 가도 원수들이요


이스라엘 여자들이 저 노래를 부르고
이방 여자들이 저 노래를 부르고 있을 정도이니 말이죠.
 

원수 아닌 놈들이 없을 정도로 다 원수들입니다.

다윗 개인의 원수가 아닌 하나님의 이름의 원수들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울은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라는 노래를

 

누가 의식을 하는고 하니

 

사울왕과 하나님의 이름의 원수들만이 의식을 하는 겁니다.

미치는 겁니다.

 

다윗은 도망치기 바빠서 그런 호사를 누릴 틈이 없습니다.

가는 곳마다 도망치고 미친척도 해야 하고 바쁩니다.

 

그런데 가는 곳 마다 누가 이런 노래를 부르고

다시 끄집어 내어서 언급을 하고

괜히 언급을 해서 의식을 해서 또 미쳐버리는 겁니다.

 

아무리 상처를 다윗에게 남겨도

오히려 다윗을 때리는 그 상처가 도리어 자신에게 몇배로 더 트라우마로 남는 겁니다.

자기가 때렸고 맞은 놈은 다윗인데

상처는 때린 놈이 그 트라우마에 더 시달리더라 말이죠.


몽둥이를 들고 개패듯이 때리겠다는 놈들이 더 하더라 말이죠.

뇌과학자 김대식 교수가 트라우마에 대한 글을 쓴 것을 보니까

트라우마가 왜 문제인고 하니 영원히 지워지지 않고

평생 반복이 된다는 점입니다. 마치 뇌의 비밀처럼 적었더라 말이죠.

 

자 그렇게 되니 때린 놈은 그 트라우마를 지우기 위해서 더 때려야 하는 겁니다.

 

이게 행함의 세계인 지옥이 끌어당기는 지옥의 증상으로써의 지옥사람입니다.

 

괜히 제가 삐딱선을 타서 안식일을 지키지 말자 한게 아닙니다.

안식일을 지키게 되면

이게 트라우마가 됩니다.
지옥 갑니다.
제발 지옥 가지 말라는 취지에서 말하는 겁니다.
물론 다들 농담으로 듣는 줄 알고 있습니다만 말이죠.

 

안식일을 못 지키는 사람을 보면 미치는 겁니다.

저 더러운 놈들

저 버러지 같은 놈들 이라고

상종도 안할려고

무슨 결백증 환자처럼 맨날 맨날 수시로 손씻기 하는 자들처럼 말입니다.
정죄하는 위치에 서게 되는 겁니다.
그래야 안식일 지킨 것이 돋보이게 되니까 어쩔수 없는 겁니다.
미쳐요 미쳐

오늘날 이런 정신병자를 양성하는 곳이 교회이거든요.

불교 천주교 다 이런 행함의 세계에 속하는 지옥사람들의 특징입니다.


제발 종교라는 마약을 먹지 말라고 해도 그 소리가 더 듣기 싫어서 마약을 더 쳐먹습니다.

자기는 옳게 바르게 살고 있다고 여기는 겁니다.

그러니까 안식일을 어기는 그 더러운 꼴을 못 보는 거죠.

이 트라우마가 평생을 반복하면서 그 짓만 계속 합니다.

 

자 이렇게 되니 예수님처럼 더러운 인간이 없거든요.

안식일날 일부러 어깁니다.

그것도 코 앞에서 보란 듯이

아예 대 놓고 어깁니다.

 

딱 걸린 거죠.

선악과를 따먹은 인간들의 선악의 티가 팍팍나도록 만드시는 겁니다.

선악을 먹고 선악을 아는 하나님과 같이 된 그 티를 팍팍 내도록 말입니다.

 

이것보다 더한 트라우마가 어디있겠습니까?

 

평생 반복인데

 

이것이 다윗이라는 미끼를 통해 주님의 원수를 들추어내는 방식입니다.

 

안식일을 어기는 다윗을 도저히 가만히 둘수가 없는 겁니다.

그래서 죽입니다.

그런데 그 다윗죽이기가 사실상 자기 목조르기라는 트라우마가 되는 겁니다.

 

다윗을 죽일려고 하면 할수록

아무리 다윗을 안 볼려고 피하고

내가 너무 심하게 몰입이 되어 있으니 이제 그만 하자 라고

자신을 심리 치료를 하든 약을 먹든 아무리 진정 시킬려고 해도

 

눈 앞에서 내 돈 백데나리온 띠 먹고 도망간놈을 하필이면 눈 앞에

코 앞에 지나가도록 했기에

안 죽이고는 못 배기는 겁니다.

 

일만달란트의 용서 보다 더 크게 더 심각하게 작용을 하니

미쳐 버리는 겁니다.

 

용서 받는자 없는 용서의 비유입니다.

 

천천이요 만만이요 는

 

결국 맞은 적이 없이, 때린 것 뿐인데 더 트라우마가 되는 겁니다.

용서의 비유의 의미처럼

이렇게 주께서 원수를 갚는 겁니다.

 

선으로 갚는 겁니다.

 

다윗은 그저 아무런 의미도 없는

무능하고 무가치한 주의 이름에만 매달립니다.

 

절대로 응답도 없는 그 주의 이름에 말입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라는 외침에

 

아무런 응답이 없는

 

이 주의 이름에 말입니다.

 

이것이 악으로 갚지 않는

선으로 갚는 주님의 원수 갚음입니다.

 

즉 주님께 맡긴다는 것은

 

원수들 스스로가 스스로 목을 조이도록

저거들 멋대로 내버리 두심 그 자체이다는 겁니다.

 

어차피 결과는 지옥이요

지옥의 결과로써 그들은 스스로 목을 조르는 짖인

다윗 죽이기 예수 죽이기를 펼친다는 겁니다.

 

이것 자체가 원수 갚는 모습인 겁니다.

 

에이 이게 무슨 원수 갚는 거고

 

이미 저들은 주의 이름의 원수 갚음의 결과물로써 그런 짖을 할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괜히 가룟유다가 자살한게 아닙니다.

 

예수님이 가룟유다에게 원수 갚던가요?

아니지요

 

지 마음대로 내버려 두니까

지가 지 스스로 못을 매는 겁니다.

 

행함의 세계 곧 지옥사람의 특징입니다.

 

결국 십자가의 용서를 못 본다는 자체가

이미 주님의 원수 갚음에 속하기에

 

우리는 악을 악으로 갚을 이유가 전혀 없는 겁니다.

다윗 또한 원수로써

우리 또한 하나님의 이름의 원수로써

 

용서 감히 건방지게 용서 받을 자격도 없이 용서 받은 일만달란트의 빚진자로써

 

악을 악으로 갚을 자격 자체가 없는 겁니다.

 

용서의 비유 보세요

용서 받은 자가 없어도 용서는 더더욱 빛나는 겁니다.

 

그 정도로 악이 설 자리가 이미 없는 것이 십자가의 용서 세계입니다.

 

그렇기에 도리어 복을 빌어 주라고 합니다.

 

(20:22, 개역) 너는 악을 갚겠다 말하지 말고 여호와를 기다리라 그가 너를 구원하시리라

(12:17, 개역) 아무에게도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살전 5:15, 개역) 삼가 누가 누구에게든지 악으로 악을 갚지 말게 하고 오직 피차 대하든지 모든 사람을 대하든지 항상 선을 좇으라

(벧전 3:9, 개역)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이는 복을 유업으로 받게 하려 하심이라

 

이러면 더 약올리게 되는 것 아닐까요?

그게 아니라 우리 또한 저랬기 때문이다는 겁니다.

 

선이란 착함이 아니라

나 같은 놈도

도저히 용서 받을 가치도 없는 이런 악한 나도 용서하는

놀라운 십자가의 사랑이기에

너도 이 십자가의 용서를 바라라 라는 겁니다.

 

이 선하신 십자가의 용서 라는 모호함이 없는

이제 행함이 아닌

믿음인 십자가를 증거하는 것이 선함으로써

저들에게 십자가의 용서를 증거하라 라는 겁니다.

 

자 이렇게 되면 악은 더더욱 미쳐 버리는 겁니다.

그러나 주님이 긍휼히 여기시는 자는 그 악의 세계

행함의 세계

사울 왕의 세계

안식일 지키기 라는 세계에서

 

구원받는 겁니다.

 

이 십자가의 사건을 반복하기 위해서

시편 54편은 오늘도 내일도 우리에게 매일 매일 울려 퍼지는 겁니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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