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피로 사신 교회 (1: 4- 6)

 


(
20:28, 개역)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를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

(20:28, 새번역) 여러분은 자기 자신을 잘 살피고 양 떼를 잘 보살피십시오. 성령이 여러분을 양 떼 가운데에 감독으로 세우셔서,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의 피로 사신 교회를 돌보게 하셨습니다. / 다른 고대 사본들에는 '주님께서'

 

(1:4, 개역) 요한은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편지하노니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와 그 보좌 앞에 일곱 영과

(1:5, 개역) 또 충성된 증인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시고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기를 원하노라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

(1:6, 개역) 그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그에게 영광과 능력이 세세토록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

 

 

교회 곧 성도는 예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겁니다.

얼마면 돼?, 얼마면 되냐구! ~~~~

함부로 피 흘리게 빼앗은 일곱교회다 라는 거죠.

그렇기 때문에 누구보다도 이 성도에 대해서는 예수님이 직접 책임지시겠다는 겁니다.
딴 사람에게 맡긴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점은 그 책임지심이 직접 책임지심에 있어서

예수님의 교회에 대한 주장은 곧 잃어버림에 대한 성실이다는 겁니다.

 

시편에서 계속 찬양자는 본인이 버림받은 것 아니냐

악인은 정작 저렇게 잘 되는데

주님을 따르는 당신 자녀는 왜 이렇게 버림받은 모습이냐 라는 겁니다.

 

그런데 그것이 바로 구별시키는 차별화이다는 겁니다.

곧 피를 바르다 보니 티가 날 수밖에 없다는 거죠.

너무 너무 쉽게 구별이 됩니다.

 

뭐가 구별이 되었다는 건가요?

피를 발랐기 때문에 구별이 된다는 겁니다.
너무 너무 눈에 확 띄는 피 발림 입니다.

 

마치 이것은 얼마전에 올렸던 천사 보다 못하지만 천사도 부러워 하는 신부와 같다는 겁니다.

 

신부 곧 교회는 자기가 이쁜 구석도 없고

머리도 똑똑하지도 않고

수준 낮고

어리석기 짝이 없으며

심지어 섬머슴아 같이 손이 거칠고

가슴이 ~~~ 가슴이 ~~ 절벽이라서 (아가서)

여성적인 매력이라고는 하나도 없는데

그 어떤 조건 하나도 갖춘 것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너무 너무 쉽게 구별이 된다는 겁니다.

그것은 신부 쪽이 아닌

신랑 쪽에서 일방적으로 자기 사랑의 화살을 꼿아버렸기 때문에

그 어떤 남자도 거들또 보도 않는 이 여인을 사랑한다고

밤마다 찾아와서 창문을 두드리는 겁니다.

 

사랑의 세레나데를 부르면서

 

이 사랑에 자기 목숨 걸었다고 말이죠

 

그 큰 태풍이 몰아쳐서 온갖 사태를 다 불러일으켰어도
내 열심이 특심이오니 나만 남았나이다 라고 우겨도
난 예수님을 세번 부인해서 천벌을 받아야 한다는 둥
무화과 나무 잎이 마르고 포도 열매가 없다는 둥
살인을 한 범죄자 죄수로써 평생 영원히 감옥에 살아야 한다는 둥
그 딴거 일체 안 물으시고
이유도 묻지도 따지지도 않으시고

너 나를 사랑하느냐 ~~~~

해질녁 저녁에는 무슨 일이 있기는 있었니 라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냥
그 수 많고 많은 모든 허물을 다 덮듯이
고요하게 산들 바람이 불 듯
주의 성실하신 세미한 음성이 들여온다 말이죠
.

(벧전 4:8, 개역) 『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잠 10:12, 개역) 『미움은 다툼을 일으켜도 사랑은 모든 허물을 가리우느니라』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


한 낮에 태풍이 불어 모든 것을 삼켜버렸다 해도
내 열심이 특심이오니 나만 남았다고 우겨도
세월호니 사드니 이제는 SLBM 잠수함 탄도미사일 이라 해도

너가 나를 사랑하느냐 ~~~~

라고 물으시는 그 예수님의 세미한 음성에
모든 것이 다 묻혀 버린다.

https://www.youtube.com/watch?v=un7tf_iCGPA

저녁에 산들 바람이 불듯이

주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모든 것을 덮어버리니 말이다.



 


 

자 그렇다면 교회의 교회됨은

신부의 신부됨은 

신부 수업을 해서가 아니라

제자 훈련을 해서가 아니라

성화론을 지켜서가 아니라


주님 쪽에서 책임 진다는 점에서

나 보다 나를 더 사랑한다는 겁니다.

즉 원인 없는 결과. 곧 잃어버린 원인에 충실, 성실하시다는 겁니다.
일체 원인도 이유도 묻지도 따지지도 않습니다.
오로지 피로만 덮어버리시는 겁니다.

이 피로 구별을 하신다 말이죠.

 

그 책임성이 바로 저들과의 구별성인데

이 피만 떡 하니 발라놓고서는

무책임하게 나타나지도 않고 숨어버린다는 겁니다.

 

아니 책임 진다메?

아니 사랑한다메???

사랑한다고 해놓고서는

일부러 늦은 시간을 날아서 다 죽고 난 뒤에 온다는 겁니다.

조금만 일찍 왔어도 오빠 나사로가 안 죽었을텐데 말이죠.

다들 비웃습니다.

아이고 사랑한다고 해 놓고서는 무책임하게 다 죽고 난 뒤에 오느냐 라고

 

자 이것이 책임 지시는 모습이다는 겁니다.

예수님 본인이 부활이요 진리요 길이다면

그것을 혼자 꿀꺽 삼키는게 아니라

자기 피를 바른 이 교회와 이 신부와 함께 누린다는 겁니다.

그래서 벌어지는 사건이 바로 피 사건입니다.

 

또 또 또 십자가 사건의 반복이냐 라고 따지겠지만
어쩔수 없습니다 십자가의 반복이다 라고 표현할 수 밖에 없네요

이것이 구별 사건이니까

차이 사건이니까

간극 벌리기 사건이니까 말이죠.

 

그런데 이런 불편한 거리끼는 십자가 사건 보다

 

인간들은 이미 자기들만의 구별시키기가 있다 말이죠.

그래서 만들어낸 것이 성화되기로 차별화를 추구한다 말이죠.

저 세리와 같지 않음을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저 막사는 자와 같지 않음을 감사해서

십의 이조를 드릴수 있겠끔

이레에 두 번 금식할수 있겠끔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토색하기 바쁜 매국노 세리에게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을

이 거룩한 일을 하게 해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라고 말이죠.

 

그러니 이미 구별 시킬수 있는 방법론이 있는데

왜 구지 불편하기 짝이 없는 십자가 사건이 왜 필요하냐 말이죠?

 

그런데 오늘 제목이 피로 사신 교회입니다.

즉 그 이전에 성전이 있었다 말이죠.

구지 십자가 사건 없이 인간들은 성전을 잘 꾸려갈수 있다 말이죠.

그런데 왜 상을 엎어버리시고 강도의 소굴이라고 채찍질로 쫏아내시고

왜 성전을 헐라 3일 만에 다시 세우겠다고 하셨냐 말이죠.

 

같은 성전 아니냐 말이죠.

어차피 3일 만에 세운다메?

다시 세울 것 같으면 말라꼬 허무냐 말이죠.
왜 구지 이전의 성전을 허물어 버리느냐 말이죠.
이 성전은 곧 인간의 몸인 육체죠.

 

왜 이 허물어 버림으로써 3일의 간극이 왜 필요하냐 말이죠.

그것은 교회란 피로 세워져야만 하기 때문이다는 겁니다.

그래서 구별이 쉽게 되는 겁니다.
 

그 피로 세워진 교회는 그럼 무엇만을 자랑할까요?

피만 자랑한다 말이죠.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데 누가 꾀더냐 말이죠.

 

그런데 피 뿐만 아니라

십의 이조

이레에 두 번 금식

토색하지 않음

등등 이런 모호하고 의문의 증서에 씌여진 것들이

또렷하지 않은 것들이 자꾸 스멀 스멀하게 올라와서

교회를 장악하더라 말이죠.
피만 있는 것이 아니다 라고 자꾸 다른 것을 주장하는 교회 말이죠.

 

여기에 대한 책임 조차도 인간들이 하겠다고 나서는 것이

바로 개혁주의 라는 둥

성화주의 라는 둥

복음 주의 라는 둥 것들이 설쳐댄다는 겁니다.

자기들이 직접 책임 지겠노라고 자꾸 나선다 말이죠.

 

무슨 무슨 주의 라는 것 자체가

성경에서는 성립이 안된다 말이죠.

즉 성경은 개혁 대상이 될 수가 없지요.

마찬가지로 피로 사신 교회도 개혁대상이 될 수가 없어요.
교회가 완전해서가 아니라 피가 완전하다 말이죠.
그런데 자꾸 교회를 자꾸 손 대겠데!!!

교회를 개혁시키겠데 글쎄

피로 사신 교회는 개혁대상이 안됩니다.
아무리 교회가 허물이 많아도 그 피가 완전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개혁 대상이 되는 교회라면 처음부터 교회 아니다는 증거죠.

왜 교회 아닌 자를 끝까지 개혁시켜서 회개시켜서 돌이키게 해서 교회 만들겠다고!!!

 

피로 사신 교회라는 말은

교회는 죄 값을 치르고 피로 사신 그 분이, 피 흘린 그 당사자가 이제 책임지시는데

오히려 저런 개혁주의 자들과의 구별의 방법이 바로

살아계신 예수님이 주가 되셔서 직접 이 교회를 책임지시는데 있어서

전혀 책임지지 않는 모습이 바로 책임지심이요 구별화 차별화 간극벌리기 라는 겁니다.

도리어 인간들은 그 빈공간에 안절부절 못해서 뭔가를 자꾸 채워넣을려고 발악을 한다 말이죠.
가만히 있으면 안된다고 자꾸 보채는 겁니다.
이것이 사람이 책임지고자 하는 교회 가짜교회라는 겁니다.

 

자 왜 그런고 하니

책임을지지 않으면 막살게 되는 거죠.

개판 다 되는 겁니다.

 

그럼 자기가 자기 스스로를 단도리 하면서 책임의 자세를 갖추어서

막살고 있는 저들과 구별화 거룩화의 삶을 사는 자들이 생긴다 말이죠.

 

바로 그때 인간 스스로가 스스로를 책임지겠다고 구별화 시켰을 그때

느닷없이 나타나셔서 구별화를 시키시는 겁니다.

실컷 책임 안 지시다가

인간 쪽에서의 구별화가 발생할때에

그 구별 곧 거룩이지요.

그 거룩화에 반대하는 반대를 위한 반대로써의 등장하신다 말이죠
언제? 인간이 거룩화 구별화 하겠다고 나서서 진행 될 때

졸지에 십자가 사건이 발생한다는 겁니다.

 

처음발생한 사건이 바로 가인의 아벨살인사건입니다.

 

인간 쪽에서 제사를 드리겠다는 그 순간에

전혀 다른 제사로써 제사를 반대하는 반대를 위한 반대의 더 나은 제사가 벌어지는데

아벨 자체가 허무하게 제물이 되는 사건입니다.

누가 그럼 이 제물을 바친겁니까?

가인?

아닙니다.

가인은 자기 제사 드린 것 밖에 주장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아벨을 제물로 바친 겁니다.

하나님이 독생자 예수를 제물로 바친 겁니다.

그 피 값으로 산 것이 교회입니다.

 

자 인간의 제사

인간의 성전과

 

그 성전을 헐어서 3일 만에 다시 세운 성전 곧 예수 그리스도의 몸 과의 차이점을 아시겠습니까?

 

위의 성전은 인간들이 얼마든지 조작해 낼수 있습니다.

그런데 뒤의 성전은 그 어떤 인간의 손에서도 나올수 없는

불가능한 교회입니다.

사람의 손으로 지은 교회는 교회가 아니무이다 말이죠.

(행 17:25, 개역)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자이심이라』

(막 14:58, 새번역) 『"우리가 이 사람이 말하는 것을 들었는데 '내가 사람의 손으로 지은 이 성전을 허물고, 손으로 짓지 않은 다른 성전을 사흘만에 세우겠다' 하였습니다."』

(행 7:48, 새번역) 『그런데 지극히 높으신 분께서는 사람의 손으로 지은 건물 안에 거하지 않으십니다. 그것은 예언자가 말하기를』

(행 17:24, 새번역) 『우주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는 하늘과 땅의 주님이시므로, 사람의 손으로 지은 신전에 거하지 않으십니다.』

(행 17:25, 새번역) 『또 하나님께서는, 무슨 부족한 것이라도 있어서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분은 모든 사람에게 생명과 호흡과 모든 것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고후 5:1, 새번역)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사람의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라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압니다.』


 

인간들은 가능한 교회를 지어놓고 교회라고 우깁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자기 피로 세운 교회는 불가능한 교회입니다.


그 불가능에다가 더더욱 불가능하게

마귀를 잡는 미끼로 활용하신다는 점입니다.
이 일곱교회가 말이죠.

 

나의 사랑하는 신부 교회야 왜 내가 피를 흘리지 않으면 안되는줄 아니?

모르지

네 몰라요

그럼 내가 마귀를 잡는 미끼로써 너를 미끼로 활용하마 라고

마귀를 끌어당김으로써

왜 저 앞의 성전(인간모임)과 뒤의 성전(그리스도의 몸)과의 차이를 알게 하신다는 겁니다.

 

자 그렇게 되면 뒤의 성전은

앞의 성전이 도저히 할수 없는 것을 하는데

놀랍게도 피 자랑만 하는데 있어서

늘 죄수복을 입게 된다는 점입니다.

그럼 이 죄수복을 입었다는 것에서 자칭 의인들이 가만히 있지를 못하죠.
당연히 정죄하는 사건이 발생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다가

그 죄수복에 발린 피를 모욕하게 되는 것이거든요.

그 죄수복 벗으면 피 발린 붉은 도장이 없다 말이죠.

이것이 뒤에 세워진 3일만에 세워진 성전의 특징이고


죄인을 욕하는게 아닙니다.

너희를 미워하는게 아니다 말이죠.

나를 미워함이다 말이죠,

피를 미워한다 말이죠.

왜냐하면 세상을 악하다고 하셨기 때문에

너희를 미워하는게 아니라 나를 미워한다 말이죠.

예수님이 행사하신 피 바른 사건을 미워하는 겁니다.
 

반대로 앞의 성전은 절대로 죄수복을 그대로 놔두지 않고

반드시 벗어서 더더욱 하얀 옷으로 깨끗하게 하고자

자기가 자기 스스로를 거룩하게 만들고자 한다는 점이

그렇기 때문에 절대로 막살수가 없다는 것이 저들과의 차이점이 되는 겁니다.

주님이 벌리시는 간극은 전혀 다른 구별법이지요.

 

이 경계가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실제로 목숨을 걸 정도로 또렷하고 선명한 경계선이 됩니다.

이것에 양쪽다 목숨을 걸 정도가 되는 겁니다.

 

왜냐하면 육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은 서로 원수지간처럼

물과 기름이기 때문입니다.

 

저들은 막사는 자들을 육의 소욕자들이라고 토색하는 자들이라고 하지만

정작 이들 헐었다가 다시 3일 만에 세워진 피로 산 교회는

자기가 토색하지 않는 삶을 사는게 아니라

자기가 십의 이조를 드릴 필요가 없고

자기가 이레에 두 번 금식 할 필요가 없는

성령에게 모두 책임을 전가시키는 그야말로 무책임한 자이다 라는 것을

성령이 증거한다는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로 사셨다 말이죠.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죄 용서 받았다 말이죠. 피로 말이죠.(롬 4장)

그렇기에 성령이 구별케 하시지

자신은 애초부터 구별 자체를 할 능력이 아예 없다는 거죠.

 

그러니 저들이 보기에는 그야말로 성도가 아닌것이고

성도로써의 책임감 자체도 없는 겁니다.

 

그야말로 탕자죠 탕자! 막사는 놈

 

그러니 맏아들은 아버지 말씀을 단 한번도 어긴적이 없는 자로써

구별 자체에 대해 아예 깜깜한 탕자 보다

구별의 의미에 자신을 부합시키고자 평생을 노력하는 맏아들이,

맏아들 스스로가 탕자가 싫어서 선택할 수밖에 없는 삶이다는 겁니다.

 

매국노 되기, 때려죽어도 싫거든요.

그래서 선택한 삶이 말씀에 부합된 삶이어야 한다는 겁니다.

 

말씀이 선택한게 아니라

자기가 말씀을 선택한 이유가

저 때려죽일 매국노 친일파가 싫어서였다는 거죠.

 

그러니 교회 다니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런 사고방식 속에 있는거지

정작 허물어져야 한다는 겁니다.
허물어져야할 성전을 계속 유지하더라 말이죠.

그런 교회를 세워본들 3일이라는 간극이 없는 교회인 가짜교회가 되는 겁니다.

 

허물어서 왜 3일만에 다시 세워진

피로 사신 교회가 따로 있어야 하는지를 모른다 말이죠.

 

자 그렇기 때문에

오늘 요한계시록 1장에 나오는 일곱교회는

피로 사신 교회이기에

교회 자체를 위한 교회가 아닌

교회는 오로지 피를 나타내기 위해서

이 보석을 나타내기 위해

깨어지는 교회로써

이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교회로써

음부의 권세와 대조를 이루는 상대적인 의미의 교회로 사도요한이 일곱교회를 언급하고 있다는 겁니다.

 

결국 음부의 권세 와 일곱교회의 대립은

곧 사망의 권세와 피의 대립인 셈입니다.


불가능한 말을 사도요한이 언급하고 있는 겁니다.
감히 비교할 수 없는 대상인 음부의 권세와 미약하기 짝이 없는 교회를 대조해요
얼마나 건방지냐 말이죠. 겁도 없이 말이지 비교할 것과 비교해야지
아예 쨉도 안되는 것을 비교하고 있으니
골리앗과 어린아이를 비교해서 대조 대립시키는 겁니다.
 

그런데 인간의 아이디어는 이미 유대인이 그랬듯이

음부의 권세를 이기는 성전으로써 자신들은 저 세리 매국노와 같지 않는 삶을 형성했고 추구하는 겁니다.
힘에 힘으로 갖추었다고 본 겁니다.
권력에 권력으로
골리앗에 총과 칼로 무장했다고 말이죠.
사망의 권세에 대립할 만한 것이 바로 힘으로 말이죠. 오늘날 교회들이 돈에 미치고 자기행함 곧 말씀지키기에 미친 이유와 같습니다.
사망의 권세를 이기는 유대인의 삶으로써 사마리아인과 접촉 자체를 하지 않는 저 죽은 지옥백성과의 단절로써 삥둘러가는 모습으로써 거룩을 추구했다고 하고 있죠.

 

바로 이게 음부의 권세에 빠진자요, 사망의 권세에 빠진 자이다는 겁니다.

거꾸로 해석한 겁니다.

그게 가능하면 음부의 권세가 아닌 거죠.
사망의 권세가 아닌 거죠.
불가능한데 가능성으로 갖추었으니 본인들이 음부인지 사망인지를 모르는 겁니다.

주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산 자의 하나님이다 말이죠.

 

그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사도바울입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써

누가 나를 이 사망의 몸에서 건져내랴

 

사망의 권세를 이기기는커녕

거꾸로 사로잡혀 왔다는 것을

예수님을 만나고 비로소 알게 된 겁니다.

거꾸로 봤다는 거죠.

 

사마리아인이 사망의 흑암백성인줄 알았는데

유대인인 바울 그것도 바리새인 중에 바리새인

깔끔이 중에 깔끔이 였던
사도바울 본인이 오히려 사마리아인 보다

더 더러운 흑암의 백성이였다는 것을

예수님을 만나고 비로소 알았다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구별인 거죠. 거룩입니다.

 

예수님이 바울을 찾아내지 못했다면

구별은 없는 겁니다.

 

바울 자기 스스로 구별된 거룩한 삶 백날 지켜보세요

그러면 그럴수록 더 더럽다 말이죠.

 

그래서 이제 그것을 허물과 3일만에 다시 세워진

피로 산 바울이 되니까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

깔끔이 중에 깔끔이였던 사도바울이

 

죄인 중의 괴수

더러운 놈 중의 최고 더러운 놈으로 거듭났다 말이죠.

 

이것을 당당하게 외칠수 있는 것은 바로 이 피 때문이다 라고 외치는 겁니다.

더러운 것을 자랑하는게 아니라

십자가를 자랑하는 거다 말이죠.

그렇다고 은혜를 더할려고 죄를 더하는 그런 노림수는 십자가에서는 안 통한다 라는 겁니다.

그것은 은혜가 아니라

은혜를 지키고 있는 또다시 도루묵 의문의 증서요, 흐릿함이요, 미흡한 거죠.

 

내가 아닌

나 보다 나를 더 사랑한 예수님 쪽에서 또렷하고 명료한 자기 목숨 내어줌에서 오는

피로 사신 교회이다는 겁니다.

 

그럼 교회의 관심사는 오로지 피 밖에 없다 말이죠.

 

어딜 감히 성경 지식 자랑하고

십의 이조 드린 것 내세우고

충성 봉사 했다는 것을 내세우냐 말이죠.

 

오히려 교회는 최전방에 마구 마구 뿌려집니다.

뿌려진다는 표현이 참으로 폭력적이지요.

마귀들이 우글대는 늑대소굴에 막들여보내진바 되는 겁니다.

 

늑대가 양의 우리에 쳐들어 가는게 아니라

양이 늑대 우리를 쳐들어 가는 겁니다.

천국을 빼앗듯이

종말을 빼앗듯이 말이죠.

 

바로 그 사건이 바로 애굽에 탁란했다가

순풍 순풍 낳고서 갑자기 우르르 빠져나와서

애굽을 소멸시키는 겁니다.

늑대우리가 말이 아닙니다.

초전박살이 나서

화가나서 뒤 따라 오다가

한 대 맞을걸 또 맞은데 또 맞고 또 맞고

맞은데 또 맞고

그래도 정신을 못차리는 겁니다.

 

그렇게 성전을 헐어버리는 겁니다.

애굽성전을 말이죠.

이제 더 심하게 나아갑니다.

애굽박살로 끝나는게 아닙니다.

가나안을 빼앗아야 합니다.

 

여기서 이스라엘 곧 교회가 한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구지 행한 것이 있다고 딱 하나 있다고 기여이 찾는다면 원망한 것 밖에 없습니다.

 

너희는 가만히 서서 여호와의 구원을 바라보라 이것이

책임 지시겠다는 겁니다.

출애굽은 주님의 일이지 인간의 일이 아닙니다.

주님 본인이 직접 벌린 일이다 말이죠.

그러니 가나안 정복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이 천국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을 빼앗는데는

애굽때와는 정반대입니다.

애굽은 헐어버리고 3일 만에 광야에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서

피로 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기에

3일 이라는 십자가의 빈 공터에 올인하는 겁니다.

 

이 잃어버린 원인에 올인하는 겁니다.

 

그래서 10가지 재앙을 가나안 땅에 퍼붓는 것이 아니라

정반대로 캐슬 성 하나 하나를 차지하는데 있어서

빼앗는데 있어서

방어하는 자는 사드 미사일에다가 최신식 장비

총과 칼 로 방어하고

 

반대로 빼앗는 자는 총과 칼 일체 없고

나는 죄인입니다 나는 광야에서 하나님을 원망한 죄인 중의 괴수입니다.

내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죄인입니다 라고

뺑뺑이 도는 아주 이상한 짓을 한다 말이죠.

성을 빼앗는자

종말을 빼앗는자

천국을 빼앗는 자가 말입니다.

 

그러니 맏아들이 이 천국을 빼앗을 리가 있나요? 없죠.

나는 십의 이조 드리고 이레에 두 번 금식하고

내 열심히 특심이오니 나만 남았나이다 등등은

천국을 종말을 약속의 땅을 못 빼앗는 겁니다.

 

오히려 나는 죄인입니다 라고 외치는 탕자만이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천국을 종말을 빼앗는 겁니다.

 

말도 안되죠!!

말 되는 것은 성경에 없습니다.

말 안되는 것만 성경에 있습니다.

불가능 뿐입니다.

 

그렇다면 요한 계시록에 나타난 일곱교회의 특징은 뭡니까?

가능성으로써의 교회 입니까?

아니면 불가능성으로써의 교회 입니까?

 

교회란 불가능성만을 누리는 겁니다.

가능성을 누린다면 이미 교회가 아닙니다.

 

그래서 피로 사신 교회입니다.

피로 빼앗았다 라는 겁니다.

교회를 말이죠.

어떻게?

전 주인 마귀로부터

전 남편인 율법으로부터 빼앗은 내 사랑 나의 신부이다는 겁니다.

 

마침 몽학선생 곧 율법에 대해서 어머니와 대화를 나누었는데

몽학선생은 일종의 안내양 이다 말이죠.

아버지가 잠시 다 성장하기 전까지 어른이 되기 전까지

가정교사에게 전 교육을 맡긴다 말이죠.

 

그럼 몽학선생인 율법은 아버지의 지혜로 인도하기 위한 안내양 길안내 표시이다 말이죠.

너 말고 저분 보라고 화살표를 아버지에게 향한다 말이죠.

 

그런데 요단강 건너는 부분에서 어머니께서 또 물으셨다 말이죠.

왜 모세가 실패해서 일부러 못들어가도록 하셨냐 말이죠.

그래놓고 모세 대신에 여호수아를 세워서 백성을 인도하는데

너희들은 안된다고 자꾸 이야기 하느냐 말이죠.

 

그래서 제가 몽학선생을 하나의 큰 트럭으로 아니 쓰레기 수거 청소차

아침 새벽에 수거해 가는 그런 차로 생각하면

모세는 반드시 실패해야 한다고

모세 뿐만 아니라 여호수아도 실패

다윗? 더더욱 실패

베드로 세 번 부인 반드시 해야 하는 실패

 

그래서 그 실패 할 때 마다 몽학선생 차 트럭에 쓰레기 담듯이 다 담아서

한데 다 모은다 말이죠.

그렇게 실패한 놈들 다 실어서 예수님께로 향해가는데

영화 베트맨 다크나이트 처럼 갑자기 조커가 곧 마귀가 나타나

이 트럭을 탈취해서

자기가 예수님께 이 놈들 잡았습니다 라고 자랑할려고 하더라 말이죠

예수님이 멀리서 보시고 미리 하얀 새옷 그리스도의 옷을 마련해 두신다 말이죠.

 

그렇게 미끼를 덮썩 물고 모세도 잡았고 다윗도 잡았고

어이쿠 베드로도 실려있네? 아이구 좋아라

그렇게 잡았다고 룰루랄라 예수님 앞에 예수님을 배신한 놈 다 잡아왔습니다 라고

자랑할때에

 

그래 수고했다 얼마나 보고싶은지 모른다

마귀는 지 보고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나중에 보니

잡혀온다고 수고했제? 욕봤다.

그래 그래 아이구 꼬랑내나는 옷 벗고

자 이 피옷 입어라 내가 다 빨아놨다

다시는 그 어떤 더러운 것 일체 묻지 않는

새 옷 이다

 

이 모습을 보니

마귀가 돌아버린다 말이죠.

실컷 자기가 공로를 다 세웠는데

이 수고가 남좋으라는 결과 밖에 안되니 말이죠.

 

자 이렇게 예수님은 바로 이 빈터에

이 피로 사신 교회(원인 없는 결과)에 충실하셨던 거다 말이죠.

 

자 그럼 피로 사신 교회는 피만을 자랑하기 위해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라고 뺑뺑이 돌면서

마지막 날에 이 피가 나의 죄를 씻었습니다 라고

뿌뿌뿌 ~~~~ 뿌뿌뿌뿌 ~~~

 

바로 이런 어리석은 십자가의 지혜로 가나안 땅을 빼앗는다 말이죠.

 

이것을 요한계시록에서 총정리학습하듯이

구약의 출애굽사건과 신약의 십자가사건을

벼락치기 공부하듯이 다시 반복하는 겁니다.

 

그러니 베드로를 반드시 자기를 세 번 부인케 만든 것은

마귀를 잡기 위한 빌미 미끼가 되는 거죠.

 

동시에 베드로는 허물어지는 성전처럼 허물어져야만 하고 다시 죽었다가 3일만에 세워지는 성전으로써 전적으로 예수님이 책임 지는

자기가 자기를 도저히 책임질수가 없는

그런 교회 그런 신부로써 세워짐을 받는 겁니다.

그래야 피로 산 베드로가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베드로는 제발 피로 사지 말라고 합니다.

그럴 때 욕 디지게 먹죠

사단아 물러가라 너는 사람의 일을 생각하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않는다고 말입니다.

잃어버린 원인에서 나오는 베드로이어야 하는데

거기에 충실하신 예수님인데

베드로는 잃어버린 원인으로써의 이스라엘이 되기 싫다는 겁니다.

처음자리 처음사랑(잃어버린 원인)에 충실한 예수님의 일이 싫다는 겁니다.

십자가를 자랑하기 싫다는 겁니다.

그래서 반드시 십자가를 자랑하는 자로 새로 만들고자

베드로 허물어 버리고 다시 죽였다가 3일만에 살리셔서

다시 세워진 교회로써의 베드로는 이제 십자가의 용서만을 자랑하는 교회가 되는 겁니다.

 

이것이 그대로 일곱교회에 나타나는 겁니다.

그러니 베드로처럼 실패하는 교회이지

십의 이조 드렸다는 둥

이레에 두 번 금식했다는 둥의 교회는

일곱교회에 없습니다.

오로지 책망 뿐입니다.

이것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예수님이 직접 책임지시는 일곱교회의 모습입니다.

그러니 허물이 없는게 아니라 오히려 상상도 못할 정도로

이게 무슨 교회로 라고 할 정도로

허물 투성입니다.

죄인 중의 괴수 라니깐요.

 

깔끔이 중에 깔끔이가 아니라

세균맨 중의 세균맨이다는 겁니다.

일곱교회가 말이죠.

 

이런 일곱교회가

무슨 수로 가나안 땅을 빼앗겠습니까?

아무도 못 믿고

본인들도 안믿습니다.

불가능하다는 것을 우리도 저들도 다 압니다.

 

그런데 이 일곱교회가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종말을 빼앗는 자로써

주님이 넉넉하게 사용하신다는 점

이것이 주님께서 일곱교회를 직접책임지시는

피로 사신 교회이다는 겁니다.

 

바울이 이제 로마로 죽으러 갑니다.

죽기 전에 성도들에게 당부 합니다.

바울 자신이 죽음에 굴복하러 가는 아니라

이미 사망의 권세를 넉넉히 이기신 주님의 피를 누리러 간다고

이것이 피로 사신 교회라고

그러니 너희들도 이 피를 헛되게 보면 안된다고

이 피를 못보게 하는 자들이 이전의 성전을 주장할 것이다고

조심하라고 말이죠.

 

즉 먼저 주인이 자기 물건 새간을 빼앗겼는데 가만히 있겠냐 말이죠.

다시 빼앗을려고 별짓을 하단다 말이죠.

 

이것은 조심함으로써 지켜내는 문제가 아니라

피가 피 스스로 자기 영광을 나타내기 위해서

반드시 들어오게 되는 보충물로써

피의 승리를 보여주는 것이기에

피의 자작극이 벌어지는 그 현장 속에 놓여진

피로 사신 교회이다는 겁니다.

주인 싸움의 터가 되는 거죠.

그 현장에 늘 놓여진다는 겁니다.

 

물론 실패 할수도 있고, 그 순간 만큼은 넘어갈수도 있지만

그러나 그것과 무관하게 피로 사신 교회를 책임지시는 그 피가

늘 이런 사건들을 나타낸다는 겁니다.

이것이 방어전이 아닌

천국을 빼앗듯이 빼앗는

피의 적극적인 자기 영광 나타내심이다는 겁니다.

 

그러니 마귀는 저절로 이 피의 자작극에 말려드는 보충물이다는 겁니다.

괜히 말려들어서 이미 피가 승리한 그 승리만을 돋보이도록만 할 뿐이다 말이죠.

물론 피로 사신 교회가 아닌 자를 속아내는 역할도 하구요.

 

그러니 사건이 안나타날리가 없다는 거죠.

 

이 피가 벌리는 자작극을 볼수 있다는 이 즐거움

아 이렇게 예수님께서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책임 지시는구나 라고 증거하는 겁니다.

너무 빨리 애굽을 빠져나온다고 정신없이 봤는데

 

이제는 슬로우 비디오로


참 예뻐요 ~~~ 내 맘 가져간 사람 ~~~~
참 예뻐요 ~~~ 내 맘 빼앗은 사람 ~~~~

 

가을밤 잠 못드는 사랑 준 사람

짧게 웃고 길게 우는 사랑 준 사람

 

꼭 한번만 내게 말을 걸어 준다면 ~~~~

꼭 한번만 웃는 얼굴 보여 준다면 ~~~~

꼭 한번만 내민 손을 잡아준다면 ~~~

밤 하늘을 날 수도 있을 텐데 ~~~

 

들리나요 내 맘 외치는 소리

보이나요 내 두눈에 흐르는 눈물

느끼나요 타버릴 것 같은 내 심장

밤 하늘을 함께 날고 싶은 사람

 

참예뻐요 이런 내 맘 아나요

참예뻐요 나와는 다른 사람

여름밤 잠 못드는 사랑 준 사람

짧게 웃고 길게 우는 사랑 준 사람

나와 닮은 사람

라고 룰루랄라

 

아름답다 예수여 나의 귀한 친구 라고 노래부르며 즐기면서

 

이 신나는 피의 승리를 누리는 겁니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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