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름 타고 오신 이 (1: 4- 8)

 

 

(1:4, 개역) 요한은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편지하노니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와 그 보좌 앞에 일곱 영과

(1:5, 개역) 또 충성된 증인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시고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기를 원하노라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

(1:6, 개역) 그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그에게 영광과 능력이 세세토록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

(1:7, 개역) 볼지어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인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터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를 인하여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

(1:8, 개역) 주 하나님이 가라사대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

 

(24:30, 개역) 그 때에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겠고 그 때에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하며 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26:64, 개역)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말하였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후에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하시니

 

(13:26, 개역) 그 때에 인자가 구름을 타고 큰 권능과 영광으로 오는 것을 사람들이 보리라

(14:62, 개역)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니라 인자가 권능자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하시니

(21:27, 개역) 그 때에 사람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7:13, 개역) 내가 또 밤 이상 중에 보았는데 인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자에게 나아와 그 앞에 인도되매

 

 

구름이라는 것은 이 세상을 심판하시는 자가 이 세상을 악하다고 역사를 종결시키고자 오시는 분이 타고 오는 일종의 증상물 매개체입니다.

 

즉 심판주가 먼저 보이는 것이 아니라

심판주가 몰고온 구름이 먼저 보임으로써 중간

 

심판주와 심판대상의 중간에 위치한 매개물이다는 거죠.

 

자 그럼 저 구름을 보면 심판주가 왔구나 라는 인식이 들도록 되어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구름타고 오지 않았고, 심지어 짐승 구유에 태어났다 말이죠.
그럼 구름을 타고 온 사람이 없기에 심판주는 없죠. 그리고 심판주가 왔다는 인식이 안들겠죠.

그런 예수님을 오로지 말씀 혼자, 말씀 스스로 밀어 붙입니다.

구름도 안 보이는 판국에

그런데 더 큰 문제는 구름타고 오신 이입니다.

그 분이 구름을 탔다면 심판주 이어야 한다는 거죠.

구름을 탄 사람이 없다니깐요.
그렇게 되면 성경말씀을 문자적으로 보는 유대인으로써 메시아는 아직 온 적이 없었던 겁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건너뛴냥
구름 타고 오신 이를 접하게 됩니다.

맞습니다. 심판 주 맞습니다.

즉 사람들이 이 구름에 탄 분이 누구인가를 알아본다는 겁니다.

어!!! 어디서 많이 봤는데??

 

어!!! 저 구름 타고 오는 사람? 저 사람 우리 손에 죽었던 무능한 예수 아니야? 라는 겁니다.

즉 심판주이어야 하는데 전혀 심판주가 아니였었던 예수 라는 인물이 구름타고 왔으니

이것은 뭐 앞뒤가 안맞는 모순으로 인해서 혼란을 야기시키게 된다는 거죠.

 

즉 구름 타고 오는 자는 분명 예수라는 인물이다 말이죠.

그런데 구름타는 자는 심판주어야 하는데

이 땅에서, 이 역사에서 예수라는 인물은 심판주로 죽은게 아니라

무기력하게 우리 손에서 왕따 당하기만 했던 전혀 심판주 같은 모습이 전혀 없어서

다들 개무시해서 죽임을 당한 인물이였다 는 거죠.

그런데 구름 타고 왔다니

이것은 막장 드라마 저리 가라 할 정도로 대반전이다는 겁니다.

 

여기에다가 엎친데 덮친격으로

그를 찌른 자들도 볼 것이다 라고 합니다.

 

(1:7, 개역) 볼지어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인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터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를 인하여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

(1:8, 개역) 주 하나님이 가라사대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

 

그 어떤 인간도 그를 찌를 정도였다면

전혀 심판주의 모습이 아니였었다는 거죠.

역사를 심판하고 이 세상을 심판하는 심판주로 보였다면

감히 찌를 사람이 어떻게 생길것이며

찌를 사건 자체가 발생할 수가 있었겠느냐 말이죠.

 

바로 이것이 예수님이 보여주실 기적인 이 기적 외에는 보여줄 표적이 없다는 겁니다.

곧 요나의 표적인 십자가 사건입니다.

얼마나 무시했으면 십자가 사건이 발생했냐 말이죠.

바로 그것을 토대로 해서 요나의 표적처럼 삼일 만에 다시 살아나셔서 심판주가 되신 겁니다.

 

그렇다면 심판의 기준은 뭡니까?

역설적이게도 우리가 그를 찌른

그냥 그분이 아니라

구름 타고 오실 분을 찌른 그 사건을 기준으로 심판하신다는 거죠.

 

그러면 심판대에서 묻는 것은 딱 하나입니다.

너가 나를 사랑하느냐입니다.

 

어떻게 이런 말도 안되는 것을 묻고서 그것을 심판의 기준으로 삼느냐 말이죠.

너는 어릴적부터 착하게 살았니?

자살은 했니? 안했니?

못때게 악한 짖만 하고 살았니? 등등의

우리가 상식적으로 아는 그런 것들이

심판의 기준이 되지도 않을뿐더러 그런것들을 일체 묻지도 않는다는 겁니다.

 

그럼 휴 다행이다 나는 누가 봐도 그런 기준에 의하면 지옥갈만한 자인데 라고

나는 사람을 많이 죽인 살인마 였는데 휴 다행이다 지옥갈뻔했네 라고

그런 안심을 시켜주기 위해 그런 기준을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게 아니라

 

더 더 더 나쁜 기준

저런 되도 않는 기준이 아니다고 해서 좋은 기준으로 바뀐게 아니라

더 더 더 나쁜 기준

더욱더 말도 안되는 더 더 더 부정적인 기준으로 묻고 따진다는 겁니다.

그 기준이 바로 너가 죽인 그 예수를 심판주로써 사랑하느냐 라는 겁니다.

 

아니 왜 십자가에 죽였겠습니까?

싫어버린 바 되었기에

꼴보기 싫어서 죽였다 말이죠.

죽도록 미워서 죽였다 말이죠.

 

그렇게 미워 죽인 사람을 사랑하느냐 라고 묻는 것은

기준이 좋게 바뀐 겁니까?

아니면 기준이 더 나쁘게 바뀐 겁니까?

 

사람들이 예수 안 믿다가 이제 믿게 되었으니

기준이 나쁜데서 좋게 기준이 바뀌었다는 식으로 믿고 있다 말이죠.

천만의 말씀

그것은 악한 세대가 요구하는 기적을 믿는 자 들입니다.

 

심판의 기준은 그게 아니라

십자가입니다.

내가 예수님 미워서 너무 너무 싫어서 죽여버린 사건이

심판의 기준이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 미운 예수를 너가 사랑하느냐 라는 것이

심판의 기준인 십자가 이다는 겁니다.

 

이 십자가가 너무 너무 감사한 자에게만

제대로 된 심판의 기준인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 겁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사도바울 아닙니까?

그 사도바울이 다윗이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용서 받았다고

역시나 대표적인 인물인 다윗을 거론하고 있는 이유입니다.

 

심심하면 문자적으로 다윗의 자손 다윗의 자손 입만 열면 다윗의 자손이라고 외칠줄만 알았지

왜 다윗의 자손인지를 전혀 몰랐던 겁니다.

다윗이 자기 손으로 죽인 자였기 때문에

성전 짖겠다고 기여이 짖고야 말아서 죽여버린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히 주를 삼키고만

바로 그 주가

다윗 자신을 심판하실 심판 주임을 알고

그 심판주를 사랑했기 때문에

다윗의 자손을 다윗은 주 라고 한 겁니다.

 

역시나 똑같이 이스라엘은

성전을 헐라 3일만에 다시 세우겠다는 예수가 너무 미워서 죽여버렸습니다.

자기 손으로 죽인 그 예수를

나의 심판주로 사랑합니다 라고 외치는 자에게만 심판주로

곧 구름 타고 오신 이로 보인다는 거죠.

 

그렇지 않은 자에게는 여전히 아직도 유대인처럼 메시아를 기다리는 꼴이다는 겁니다.

 

다 이루었다 라고 십자가에서 외친 사건을 건너뛰고 여전히 구름타고 오실이로

그것은 심판주가 아니라

구원주로 보겠다는 자기신앙의 고집을 피우는 식이다는 거죠.

믿음이 아니라 신념이다는 겁니다.

묵시의 계시가 아니라 행함의 역사를 주장하는 꼴이다는 겁니다.

예수님이 옳았잖아 가 아니라

거봐 내 믿음이 옳았잖아 라고 말이죠.

여기서 육체가 버티지 못하고 한계에 부딧히는 자는 자살하고 마는 겁니다.

자살하는 이유는 질투심 때문이다는 거죠.

가룟유다도 마찬가지

나 보다 못한 놈이, 나 보다 잘 되었다고 보이는 순간

그 질투심 때문에 자살하는 겁니다.

선진국이나 중진국이

후진국 사람들 보다 덜 행복하고 더 많이 자살하는 이유가 바로 그런 이유입니다.

이것이 행복의 역설인 거죠. 행복이 졸지에 강요된 선택으로써 작용해서 목조르는 자살을 강요케 한다는 거죠. 자살을 강요케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오늘날 교회는 자살을 강요하는 집단들인 겁니다.

서로의 경쟁을 부추겨서 남 잘되는 꼴을 못 보도록 하니까 말이죠.

탕자의 무리들로써의 교회는 거의 없고

맏아들만이 모인 무리들로써 자살 직전의 집단들이다는 겁니다.

탕자가 용서 받는 꼴을 못 봐요

최근에 자살한 사람도 몇 년 전에 자살한 목사도

다들 쓸데 없이 강요된 행복을 추구할려다가

너무 높이 행복을 설정하다 보니

현실은 그 갭이 너무 크기에 못 견디고 자살하는 겁니다.

견딘다고 될 문제가 아니라

 

내 손에 죽은 그 예수님이 너가 나를 사랑하느냐 라고 물어주지 않기 때문에 자살한다 말이죠.

 

자살하고픈 나의 손에 죽을 정도면 어느정도로 비참했어냐 말이죠.

그 예수님이 내 손에 죽을 정도로 가장 밑바닥에서 나를 받드러 바닥을 막고 있으니

얼마나 그 사랑이 놀라우냐 말이죠.

그러면 자살할 자격 조차 못 된다 말이죠.

 

그런데 엉뚱하게 쓸데 없이 행복의 조건을 높여놓아서

거지나사로가 되자 라고 하니

근처도 못가니까

갭이 너무 너무 커져서

그 갭을 맥구어 줄 예수님이 대신 밑바닥에 바닥을 치신 모습이 안보이니까

자기 혼자 뿐이다고 언제는 예수님을 죽일때는 언제고

자기 보다 더 혼자 외롭게 오신 예수님을 왕따 시켜서 개죽음으로 몰아버려 죽였을때는 언제고

지 혼자 뿐이다고 외롭다고 자살한다 말이죠.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데 누가 꾀냐 말이죠.

자기가 자기를 꾀니까 그렇게 자살한다 말이죠.

남을 죽였듯이 자기도 죽는 겁니다.

 

그런 자들에게는 심판주가 곧 구름타고 오실 분이 오든 말든 관심도 없고

그저 자기 자신 밖에 안보이고 자기 자신만을 쳐다보기 때문에

구름을 타든 티코를 타든 안 보이는 겁니다.

전혀 심판주가 누구든 아예 안 보이는 자기 안에 갇혀 버린 자이다는 거죠.

 

그러니 심판주가 곧 내 손에 죽은 인자 곧 예수님이다 라는 충격적인 역설 조차도

전혀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는 겁니다.

 

(17:5, 개역) 말할 때에 홀연히 빛난 구름이 저희를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하는지라

 

(9:7, 개역) 마침 구름이 와서 저희를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하는지라

 

과연 그런 자에게 저의 말을 들으라 라는 구름 속에서 외치는 음성이 들리냐 말이죠,

 

그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그 사랑하는 아들의 말이

 

너가 나를 사랑하느냐 라는 묻는 음성이 들리겠냐 말이죠.

 

유대인이 곧 인간의 대표성인 유대인이 못 들을 정도면

구름 타고 오실 이를 고대하고 고대하면서 기다리는 유일한 민족 유대인이 못 볼 정도면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는

 

참으로 제대로 된 십자가의 사건이 아니냐 말이죠.

참 지혜로써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하셨다 말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이 이룰게 없습니다.

행복도 사실은 없습니다.

행복을 이미 예수님이 다 이루었습니다.

다윗은 아무것도 한 것이 없는 자가 죄 용서 받은 것에 대한 행복을 외쳤습니다. (4)

다윗 자기 자신이 행복을 달성한게 아니다 말이죠.

한 순간의 실수로 완전 밑바닥을 쳐야 마땅한데

그 밑바닥을 대신 누가 먼저 와서 밑바닥을 쳐버리는 바람에

이유 없이 행복 안하고는 못배기는 삶을 사는 겁니다.

뭘 해도 행복 뿐입니다.

 

자 자살하고자 하는 사람은 하루 하루가 지옥입니다.

뭘 해도 지옥 뿐입니다.

 

그런데 아무것도 한게 없는데도 뭘 해도 행복인 자는

이 다 이루셨다는 십자가의 사건이 너무 너무 감사 아니하고는 못배기듯이

 

자살하고자 하는 자는 쓸데 없이 강요된 선택에 사로잡혀서

그 욕심에 다다르지 못한다고 자기가 자기를 괴롭히면서 미워하는

그래서 남까지 확대시켜서 미워하는

그러다가 예수님까지 죽이게 된 겁니다.

가룟유다가 쓸데 없이 유대나라의 독립을 쓸데 없이 높이 잡아버리는 바람에 말이죠.

쓸데 없이 독립운동을 하는 바람에 말이죠.

 

요즘 성화론자들과 개혁주의자들 또는 사회운동본부, 사제들의 정의사회 구현운동 등등

이런 놈들은 이 세상사람들에게 자살을 강요하는 놈들로써 자리잡았다는 겁니다.

노무현 자살 보세요 그들은 항상 남 핑계 되잖아요

그런데 자세히 알고보면 노무현이를 추종하는 그들이 노무현이를 자살로 만든거다 말이죠.

그것을 전가시켜서 마침 나쁜놈이 있길래 그놈들에게 다 뒤짚어 씌워 전가시켜서

원한과 한풀이로 유훈정치를 이어나가고 있다는 겁니다.

그래놓고 노무현 정신을 이어가자? 그 의문의 모호한 것을 또 반복? 지겹지도 않냐 말이죠.

또렷한 것 단 하나도 없는데!!!

북도 유훈정치 남 쪽의 두 갈래 박사모와 노사모 또한 유훈정치

 

산 자의 정치가 아니라 죽은 자의 정치인 거죠.

 

다윗의 자손의 정치(살아계신 주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라

다윗이라는 조상 정치인 유훈정치를 하고 있다 말이죠.

그래서 또 허무시는 겁니다. 원수갚기는 하나님께 있다 말이죠.

 

성전을 헐라 그리고 다시 3일 만에 지을께

 

이것이 드디어 모호하고 흐릿함의 의문의 마침이 되는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가 되는데

 

이것을 다시 의문을 세워 인간의 손으로 짖는 교회를 쳐다보게 되니

다시 의문으로 돌아가게 되니

결국 자살하고 마는 겁니다.

 

자살은 아니지만 이미 자살과 같은 모습이(남을 죽이는 살인의지가) 바로

얼마전에 잠깐 스포트라이트 (Spotlight, 2015) 라는 영화를 언급했는데

카톨릭 사제들의 소년아동성추행이다 말이죠.

카톨릭 제도 자체가 만들어낸 증상이니까 말이죠.

그럼 사제들을 결혼 시키면 완화 되겠네?

천만의 말씀! 카톨릭 제도의 증상이다니깐요.

결혼 안해서가 아니라

여자아이를 성추행하는게 아니라

남자아이를 성추행하는 거다 말이죠.

 

그럼 개신교는 그런짓 안한다고 자랑할수 있겠냐 말이죠?

제도 자체가 아직까지 천주교처럼 안되어서 그렇지

물론 개별적이라 잘 될리도 없겠지만 역시나 만만치 않게 따라하는 것이

여자 신도 성추행이다는 거죠. 이것은 곧 개신교는 돈 에 미쳐있다는 겁니다.

하나님과 재물을 동시에 섬기는 그 증상으로써 벌어진다는 거죠.

개신교쪽 사람들은 아내가 목사를 조금이라도 긍정하는 소리를 한다면

언제든지 발생할수 있다고 여겨야 합니다.

이것은 전체 흐름이기 때문에 목사나 사제들에게 아무리 자제를 요청해도 소용없습니다.

 

얼마전에 김어준 계열 쪽의 애들이 만든 영화 퀴오바디스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라는 영화에서

타켓이 큰 교회의 돈에 빠진 교회를 공격하던데

제가 보기엔 그 큰 교회가 부러워서 작은 교회들의 반란을 다루었다 뿐이지

똑같은 도찐개찐 이다 말이죠.

 

그냥 손 때면 되는데

행복할 껀데

손 때지 않고 저들을 회개 시키겠데? ㅋㅋㅋㅋㅋ

그러다 안 되면 자살하고

 

왜 이미 자살한 저들을 공격하면서 같이 따라 자살할려고 하는지

그 영화 만든 놈이 얼마나 나쁜놈인가를

자살을 강요하는 영화를 만들고서

자기는 저런 나쁜놈의 악을 지적할 줄 아는 양심있는 자라고 우기는 겁니다.

거기에다가 주여 어디로 가시냐고 주님까지 끌어들이니까 말이죠.

악한 세대가 만들어낸 영화이지

기독교 영화 아닙니다. 마귀 영화지.

 

어떻게 그런 자들에게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 라는 말씀이 귀에 들어오겠으며

 

구름 타고 오신 이가 보이겠냐 말이죠.

구름 타고 오신 이가 외치시는 볼지어다 라고 하는 음성을 듣겠냐 말이죠.

 

다 이루었다를 볼려고 하지 않고 들을려고 하지 않고

오로지 자기가 눈뜬 한국 교회의 타락상에 개혁을 부르짖는 자신의 울부짖음을 보라고

그것만 관심 가지니

외부의 음성이 들리겠냐 말이죠.

 

찌른 자도 보게 된다고 했는데

 

저들은 과연 보겠냐 말이죠.

 

우리는 예수님을 찌른 자로써 보는 겁니다.

 

다 이루었는데

뭘 해보겠다고

교회를 개혁하겠다는 둥

정의사회를 실천해보겠다는 둥

못살겠다고 몸부림이라도 쳐 봐야 할 것 아니냐 라는 둥

 

저들은 꿈쩍 하지 않는데

쓸데없이 자살하는 겁니다.

 

아니 목숨이 자기것이냐 말이죠.

자기 멋대로 목숨을 마음대로 해 버리게?

 

심판주가 안 보이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이 구름타고 오실 이를 아무리 기다려도

이미 오셨다 가신 그리고 다시 구름 타고 오신 이를 아직까지도 미워 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원수를 갚아 달라고

마귀에게 하나님의 원수에게 속아서 하나님의 원수를 갚아달라고

시위를 하고 있다 말이죠.

 

그들에게 과연 요한계시록 말씀 볼지어다 라는 보라

제발 봐라 라는 말씀이 들어오겠냐 말이죠.

 

봐라 다 이루셨다

그 분이 다시 구름 타고 오신다 봐라

찌른 이도 볼것이고

땅 속에 있는 무덤 속에 있던 자들도 본다

 

누가 저를 죽였는지 봐라?

전두환 핑계대지 마라

박근헤 핑계대지 마라

박정희 핑계대지 마라

누가 찔렀는지 제대로 봐라!! 너여 너 라고

 

구름 타고 오신 이가 심판주어어야 하는데 내가 찌른 그 분이 심판주로써 오시니까 보라는 겁니다.

 

보통 임금이 행차하면 그 옆에서 죽은 듯이 엎드려 얼굴을 보면 안된다 말이죠.

심판주이시니까 말이죠.

하나님의 얼굴을 보면 타 죽는다 말이죠.

그런데 어쩔수 없이 본의 아니게 보게 되었는데

봤는데도 안 타죽고 살아남아서 밤새 안녕했는가? 해서

그래 밤 사이에 하나님의 얼굴을 보고도 안 타죽었네 라는 의미에서 샬롬인데

 

보라 말이죠. 그 심판주가 누구인지?

내 손에 힘없이 죽었던 전혀 심판주 같지도 않았던 그 분이

내가 미워서 내가 싫어해서 죽인 그 예수님이 심판주이다 라는 것을 보라 말이죠.

이 역설을 이 갭을 못 보면
(이 간극이 제대로 된 빈공간이다 말이죠.

엉뚱한 갭은 자기의 모순에 실망해서 자살로 이끌게 되지만

난 예수님을 미워 죽였는데 정작 예수님은 나를 용서하시는 피 흘리심으로 다 이루었다고 하시니

이 진짜 제대로 앞 뒤 안맞는 모순의 역설점인 이 갭이야 말로

제대로 봐야할 간극이다 말이죠. 아니면 엉뚱한 간극에 말려들어 미끄러지게 되지만

진정한 간극인 요나의 표적을 봐야 누가 나의 심판주인지를 그 심판주가 우편에 서서 이 세상을 심판 하시는지 그 기준이 바로 십자가임을 말이죠.

 

(1:7, 새번역) 『㉣"보아라, 그가 구름을 타고 오신다. 눈이 있는 사람은 다 그를 볼 것이요, 그를 찌른 사람들도 볼 것이다. 땅 위의 모든 족속이 그분 때문에 가슴을 칠 것이다." 꼭 그렇게 될 것입니다. 아멘. / 7:13 12:10

 

(7:13, 개역) 내가 또 밤 이상 중에 보았는데 인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자에게 나아와 그 앞에 인도되매

(7:13, 새번역) 내가 밤에 이러한 환상을 보고 있을 때에 인자 같은 이가 오는데,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계신 분에게로 나아가, 그 앞에 섰다.

 

(12:10, 개역) 내가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 거민에게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 주리니 그들이 그 찌른바 그를 바라보고 그를 위하여 애통하기를 독자를 위하여 애통하듯 하며 그를 위하여 통곡하기를 장자를 위하여 통곡하듯 하리로다

(12:10, 새번역) 그러나 내가, 다윗 집안과 예루살렘에 사는 사람들에게 '은혜를 구하는 영''용서를 비는 영'을 부어 주겠다. 그러면 그들은, 나 곧 그들이 찔러 죽인 그를 바라보고서, 외아들을 잃고 슬피 울듯이 슬피 울며, 맏아들을 잃고 슬퍼하듯이 슬퍼할 것이다.


)

 

쓸데 없는 원한과 한풀이 억울함 한맺힘으로 자살하듯이

자기를 자기 스스로 자해하듯이 괴롭힌다 말이죠.

 

그런데 예수님이

내 손에 죽었던 예수님이

심판주로써 그딴거 묻더냐 말이죠.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다 라고 외친 분이 그딴거 물으시더냐 말이죠.

 

오로지 묻는 것은 단 하나

 

너가 나를 사랑하느냐 라고 물으시는 겁니다.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데 누가 꾀더냐 라는 말씀인 거죠.

 

이 십자가가 밝히 빛나는데도 불구하고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 라고 외치는 음성이 들려오는데도 불구하고

 

쓸데없이 되도않는 기준들을 높여서 사람들을 자살로 인도하는

이 마귀의 술책인 십자가를 못보게 하는

아직도 여전히 의문의 반복, 모호한 것의 반복, 흐릿함의 반복에 사로잡혀서

결국 이루고팠는데 못 이루어서 자살하고야 마는

 

이런 어리석은 인간들에게 십자가의 지혜를 외치시는 겁니다.

 

볼지어다 구름 타고 오신 이가 다 이루었다 라고 말이죠.
찌른 자도 볼것이다 말이죠.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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