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파와 오메가 그리고 일곱교회 (1: 8-11)

 


(
1:8, 개역) 주 하나님이 가라사대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

(1:9, 개역) 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거를 인하여 밧모라 하는 섬에 있었더니

(1:10, 개역) 주의 날에 내가 성령에 감동하여 내 뒤에서 나는 나팔 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들으니

(1:11, 개역) 가로되 너 보는 것을 책에 써서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멜비아, 라오디게아 일곱 교회에 보내라 하시기로

 

(21:6, 개역) 또 내게 말씀하시되 이루었도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라 내가 생명수 샘물로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니

(22:13, 개역)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요 시작과 끝이라

 

 

예수님 자신이 자신을 처음과 나중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즉 이 말씀은 무엇과 정면 충돌하게 되는고 하니

 

선악과를 먹고 우리와 같이 되었다 라는 인간과 정면충돌이 되는 겁니다.

 

(2:9, 개역)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2:17, 개역)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

(3:5, 개역)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3:22, 개역)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 손을 들어 생명나무 실과도 따 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즉 예수님은 자신을 처음과 나중으로 표현하심으로써

선악을 아는 인간 곧 하나님과 같이 된 신이 된 인간을 거부하심으로써

이런 인간을 거부한채로

다른 인간으로 인해 영광을 받으시겠다는 겁니다.

 

그렇다고 그 다른 인간이 예수님께 영광을 드릴만한 자격이 되어서가 아니라

예수님 자신의 영광을 부으셔서 영광 받으시는 겁니다.

 

그럼 선악을 아는 인간은 거부하고

다른 인간은 그럼 누구를 말하는 겁니까?

 

그것이 바로 일곱교회 라고 불리는 자들입니다.

 

앞의 글 시편 92편에서

지존자가 찬양을 하는데 무엇을 찬양하는고 하니

 

아침에 주의 인자하심을 찬양하고

밤마다 주의 성실하심을 찬양한다고 합니다.

 

이것이 안식의 주인이 부르는 찬양이라고 했습니다.

안식의 주인이 아침에 행한 인자함을

안식의 주인이 밤마다 행한 성실함을 말이죠.

 

그럼 그 내용이 뭘까요? 인자하심의 내용과 성실하심의 내용 말입니다.

 

(92:3, 개역) 지존자여 십현금과 비파와 수금의 정숙한 소리로 여호와께 감사하며 주의 이름을 찬양하며 아침에 주의 인자하심을 나타내며 밤마다 주의 성실하심을 베풂이 좋으니이다

(92:4, 개역) 여호와여 주의 행사로 나를 기쁘게 하셨으니 주의 손의 행사를 인하여 내가 높이 부르리이다

 

 

바로 마태복음 12장에

 

(12:2, 개역) 바리새인들이 보고 예수께 고하되 보시오 당신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다

(12:3, 개역) 예수께서 가라사대 다윗이 자기와 그 함께 한 자들이 시장할 때에 한 일을 읽지 못하였느냐

(12:4, 개역) 그가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제사장 외에는 자기나 그 함께한 자들이 먹지 못하는 진설병을 먹지 아니하였느냐

(12:5, 개역) 또 안식일에 제사장들이 성전 안에서 안식을 범하여도 죄가 없음을 너희가 율법에서 읽지 못하였느냐

(12:6, 개역)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성전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

(12:7, 개역)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을 너희가 알았더면 무죄한 자를 죄로 정치 아니하였으리라

(12:8, 개역)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하시니라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는 인자 곧 안식일의 주인이 나옵니다.

 

안식일의 주인은 아침에 인자 곧 자비를 원하고

밤마다 성실하심 곧 제사를 원치 않는

이 두 상황 곧 알파와 오메가 처음과 나중 아침과 저녁의 동시적인 사건을 통해서

영광받으시는 일관된 내용을 펼치신다는 겁니다.

 

그 일관된 사건인 약속의 내용이 바로 이것이 바로 창세기 315절의 약속사건입니다.

 

(3:15, 개역)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바로 이 약속에 대해서 처음과 나중이요 알파와 오메가 이신 주님이

일괄되게 밀어붙이시는 주님의 행사입니다.

 

여기에 먼저 뱀이 나오고 그 다음 여자가 나오고 이 둘은 원수 관계이고

그 다음 뱀의 후손이 나오고 그 다음 여자의 후손이 나오고 이 둘은 서로 상하게 하는 관계로써 나옵니다.

 

이것이 창세기에서 출발해서 요한계시록에까지 계속 이어져 나오는 약속이 일괄되게 펼쳐지는 내용이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 계획을 인간 쪽에서 어떻게 관여하거나 참여하거나

자기 쪽으로 끌어당겨서 인간 쪽에서 개입할 여지가 아예 없습니다.

 

뱀을 누구로 인간이 설정할수 있을까요?

여자를 누구로 인간이 설정할수 있냐 말이죠.

더 나아가 뱀의 후손을 누구로 설정하고

더 나아가 여자의 후손을 누구로 설정하냐 말이죠.

 

인간은 선악을 아는 실과를 먹어버린 이상 이미 탈락입니다.

 

인간은 배제된 상태에서 벌어지는 약속 사건입니다.

이 약속사건을 역사가 종결될때까지 밀어붙이겠다는 겁니다.

오로지 이 약속의 계획대로만 이행하시겠다는 겁니다.

 

자 이런 가운데 찬양사건은

어제 말했던 것처럼

찬양이란 이 원수 문제를 해결된 상태에서 나온다고 했습니다.

원수가 멸망하지 않고

자기혼자 노래 부르는 것은

약속과 무관한 자기만의 감정 표출일 뿐입니다. 흥겨움일 뿐인거죠.

발라드를 부르던 트로트를 부르던 자기 감정만 나열할 뿐입니다.

찬양이란 어디까지나 약속 성취로 인한 사건입니다. 항상 상대적인 것이다는 겁니다.

 

그럼 안식의 주인은

이 안식일 날에

곧 부활의 날에

평화의 날에

안식날의 처음인 아침에 주의 인자를 펼치시는데 있어서

간 밤에 주의 성실함으로 원수를 이기심으로써 인애와 자비를 베푸시는 겁니다.

그럼 밤에 주의 성실함으로 들통이 난
원수 세력들은

바로 주의 인자하심으로 베푸신 그 자비에 대한 극구의 반대를 표출하도록 되어 있다는 거죠.

? 주의 성실하심으로 원수됨을 들통내었기 때문에

 

그래서 안식일날에 일부러 안식날만 골라서

죽은 자를 고치시는 겁니다. 곧 주의 인자하심의 아침입니다.

여기에 대한 반발성을 나타내는 것이 간밤에 주의 성실하심으로 원수로 들추어진 자들이

이 안식일날 죽은자를 부활시킨 그 행사에 대한 반발하는 겁니다.

서로의 소욕을 못하게 한다 말이죠.

 

이것이 약속의 내용이고

이 약속을 일괄되게 계시록까지 이어가시는 겁니다.

 

그렇다면 알파와 오메가 되신 처음과 나중 되신 예수님은

이 일곱교회에게 바로 이 약속사건을 그대로 적용케 하시는 겁니다.

이것이 섬김입니다, 사랑이다 말이죠.

 

그렇다면 일곱교회는 이 약속 사건을 적용시키는 주님의 알파와 오메가 되심을 밀어붙이는

이 약속사건에 감히 참예케 되는 영광을 누리게 되는 겁니다.

곧 환란입니다. 주의 환란 말입니다. 예수의 환란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 되었다 말이죠,

이 얼마나 큰 영광입니까?

세상은 그것도 자칭 하나님의 백성인 유대인은 예수님을 싫어해서 죽였습니다.
세상은 예수님이 미워서 죽였습니다. 그렇게 됨으로써 약속사건이 구체화 됩니다.
그 예수님에 대한 미움이 일곱교회를 향하도록 되어 있는 겁니다.

 

(1:9, 개역) 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거를 인하여 밧모라 하는 섬에 있었더니

 

이것이 바로 지존자 곧 전능자의 기능입니다.

우리를 자꾸 주의 환란 속에 집어넣는 겁니다.
십자가의 피로 맺어진 관계 속으로 집어넣기 위해서 말이죠.

그러나 마귀는 하나님의 원수를 잡아왔다고 주장하게 되는 겁니다.

 

아까 말한 창 315절의

어떤 관계?

뱀과 여자의 원수관계

뱀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의 서로 상하게 하는 관계

즉 서로 죽고 죽이는 관계 말이죠.

 

이 환란 속에 집어넣는다 말이죠.

 

당연히 일곱교회는 예수님의 환란에 동참된 자로써 죽은자가 되는 겁니다.

이 죽은 자를 다시 살리는 부활이기에

약속의 성취이기에

아무도 처음과 나중이 아닌 이상

이 부활을 인간 쪽에서 만들어내거나 동참이 불가능한

아무리 종교를 만들어서 부활교리를 만들어 믿을려고 아무리 애써도 할수 없는 그 일을

 

알파와 오메가 되신 주님이 하시는 겁니다.

 

일단 인간 쪽에서는 원수를 만들어 낼수가 없다 말이죠.

그러니 그 어떤 설정도 먹혀들지 않습니다.

 

여자의 후손이신 예수님이 뱀의 후손인 마귀와 그 마귀 자식들로부터

거부 당했다 말이죠.

이 거부성에 일곱교회 또한 예수님의 환란에 동참되는 겁니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는게 아니라 나 예수를 미워한다

왜냐하면 나 예수가 세상이 악하다 라고 증거 했고

 

(7:7, 개역)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지 못하되 나를 미워하나니 이는 내가 세상의 행사를 악하다 증거함이라

 

그 증거 물증을 잡아서 또렷하게 밝혀 내었기 때문이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이 십자가 사건이요, 그 물증이 바로 십자가 이다는 겁니다.

 

이것이 밤에 주의 성실하심으로 악마들 곧 원수들의 정체를 들추어내었다는 겁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죽일 수밖에 없는데

주의 인자하심은 이 죽은 예수님을 다시 살리시는 주의 인애와 자비로 인해

부활을 보여주셨다 말이죠.

힘이나 능이나 행함이나 노력이나 성화됨 때문에 부활한게 아니다 말이죠.

육의 개선으로는 안된다는 겁니다.

오로지 성령으로 인한 거다 말이죠.

 

(4:6, 개역) 그가 내게 일러 가로되 여호와께서 스룹바벨에게 하신 말씀이 이러하니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자기 신부인 일곱 교회를 예수의 환란 속에 집어넣고자

알파와 오메가로 인자하심과 성실하심으로 섬기시는 겁니다.

이렇게 죽은자가 된 일곱교회가 예수님의 환란에 동참함으로 인해

부활의 세계에 들어가는 겁니다.

예수님이 부활의 첫열매가 되셨듯이 일곱교회가 참예 되는 겁니다.

 

인자하심은 죽은자로써 다시 살리심이고

성실하심은 원수와 원수관계로 놓이게 하시는 환란 속에 집어넣으심이다는 겁니다.

 

이것이 안식일의 주인께서

말라 버린 손을 가진 우리들 곧 죽은자를 고치심으로써 인자하심을 드러내시고
(비록 안식일을 어긴자로써 고소 당하시게 되듯이)

 

(12:10, 개역) 한편 손 마른 사람이 있는지라 사람들이 예수를 송사하려 하여 물어 가로되 안식일에 병 고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12:11, 개역)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 중에 어느 사람이 양 한 마리가 있어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졌으면 붙잡아 내지 않겠느냐

(12:12, 개역) 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그러므로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으니라 하시고

(12:13, 개역) 이에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손을 내밀라 하시니 저가 내밀매 다른 손과 같이 회복되어 성하더라

(12:14, 개역) 바리새인들이 나가서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꼬 의논하거늘

(12:15, 개역) 예수께서 아시고 거기를 떠나가시니 사람이 많이 좇는지라 예수께서 저희 병을 다 고치시고

(12:16, 개역) 자기를 나타내지 말라 경계하셨으니

(12:17, 개역) 이는 선지자 이사야로 말씀하신 바

(12:18, 개역) 보라 나의 택한 종 곧 내 마음에 기뻐하는 바 나의 사랑하는 자로다 내가 내 성령을 줄 터이니 그가 심판을 이방에 알게 하리라

(12:19, 개역) 그가 다투지도 아니하며 들레지도 아니하리니 아무도 길에서 그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

(12:20, 개역)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리니

(12:21, 개역) 또한 이방들이 그 이름을 바라리라 함을 이루려 하심이니라

 

죽은 자를 살리니까 부활시키니까

비로소 악한자들이 위기의식에 빠져서 극도의 거부성을 나타내시는데 있어서

주의 성실하심을 나타내는데

 

이것이 바로 성령을 주시는 자에게 나타나는 주의 환란 속에 집어넣으심이다는 겁니다.

 

(12:17, 개역) 이는 선지자 이사야로 말씀하신 바

(12:18, 개역) 보라 나의 택한 종 곧 내 마음에 기뻐하는 바 나의 사랑하는 자로다 내가 내 성령을 줄 터이니 그가 심판을 이방에 알게 하리라

(12:19, 개역) 그가 다투지도 아니하며 들레지도 아니하리니 아무도 길에서 그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

(12:20, 개역)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리니

(12:21, 개역) 또한 이방들이 그 이름을 바라리라 함을 이루려 하심이니라

 

(42:1, 개역) 내가 붙드는 나의 종, 내 마음에 기뻐하는 나의 택한 사람을 보라 내가 나의 신을 그에게 주었은즉 그가 이방에 공의를 베풀리라

(42:2, 개역) 그는 외치지 아니하며 목소리를 높이지 아니하며 그 소리로 거리에 들리게 아니하며

(42:3, 개역)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진리로 공의를 베풀 것이며

(42:4, 개역) 그는 쇠하지 아니하며 낙담하지 아니하고 세상에 공의를 세우기에 이르리니 섬들이 그 교훈을 앙망하리라

(42:5, 개역) 하늘을 창조하여 펴시고 땅과 그 소산을 베푸시며 땅 위의 백성에게 호흡을 주시며 땅에 행하는 자에게 신을 주시는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42:6, 개역) 나 여호와가 의로 너를 불렀은즉 내가 네 손을 잡아 너를 보호하며 너를 세워 백성의 언약과 이방의 빛이 되게 하리니

(42:7, 개역) 네가 소경의 눈을 밝히며 갇힌 자를 옥에서 이끌어 내며 흑암에 처한 자를 간에서 나오게 하리라

(42:8, 개역) 나는 여호와니 이는 내 이름이라 나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내 찬송을 우상에게 주지 아니하리라

(42:9, 개역) 보라 전에 예언한 일이 이미 이루었느니라 이제 내가 새 일을 고하노라 그 일이 시작되기 전이라도 너희에게 이르노라

 

즉 심심하면 장로들이 대표기도때 하는 기도내용이 바로

상한갈대를 꺽지 아니하시고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않도록 보호 하신다고 기도하는데

 

그것은 거꾸로 본 겁니다.

 

상한갈대는 반드시 꺽여야 하고

꺼져가는 등불은 꺼져야 합니다.

그것이 시편 92편에 나타난 원수라고 했지요?

그 원수가 누구입니까?

소위 하나님의 선민이라는 자들 아닙니까?

안식의 주인을 죽일려고 하는 자들 말입니다.

안식일날 병고친다고 말이죠.

 

이사야는 임마누엘을 통해서 너거 하나님과 내 하나님은 다르다 라고 했습니다.

너희 하나님 곧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가짜고

내 하나님 곧 이사야의 하나님만 진짜다 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그대로 예수님에게 이어져서

유대인의 하나님과 예수님의 하나님이 다르다 라는 충돌사건이 벌어지는 겁니다.

 

시편 92편에서 반드시 등장해야만 하는 원수가 이스라엘 아닙니까?

출 애굽처럼, 출 이스라엘, 출 교회, 출 성전, 출 안식일 지키기를 선언하지 않냐 말이죠.

, 뭐뭐로부터 탈출 만 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입 뭐뭐로 입 들어가야 합니다. 입성해야 합니다.

예수 안입니다.

십자가 안,

그리스도의 몸으로 입성 해야 한다 말이죠.

이것이 바로 일곱교회 속으로 들어가는 겁니다.

 

번제와 제사만 있는 교회 또는 이스라엘로부터 탈출 해서

인애와 자비만 쳐다보는 그리스도의 몸인 일곱교회로 입성하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이 벌리시는 사건이다는 겁니다.

충돌 즉 원수관계를 드러내시는 거죠.

서로가 서로의 소욕대로 못하도록 말이죠.

 

(5:17, 개역)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그렇기 때문에

 

(42:2, 개역) 그는 외치지 아니하며 목소리를 높이지 아니하며 그 소리로 거리에 들리게 아니하며

 

그는 외치지 않고 목소리를 크게 높이지 않고 그 소리로 거리에 들리게 하지 않는다고 했는데

 

제가 어제 어머니께는 반대로 이야기 했습니다.

문둥병자를 고치신 후에 아주 아주 큰 소리로

네 몸을 저 대제사장에게 보여줘라 라고 하시고서는

큰소리로 남들에게는 절대로 모르게 쉿 쉿 알았제? 라고 다 듣기도록 크게 말씀 하신다 말이죠.

 

외치지 않고 목소리 크게 높이지 않고 소리로 거리에 들리지 않게 한다고 해 놓고서는

! 다 들리게 하시는가?
! 큰 소동을 일으키시는가?

즉 이 말은
듣기는 들어도 못 깨닫고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는

성령의 소욕을 말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 호산나 호산나 라고 어린아이들이 찬양을 하니까

시끄럽다고 소동이 일어난줄 알겠다고 호통을 치는 자들이 졸지에 발생한다 말이죠.

 

이들이 소리 지르지 않으면 돌들이 소리지른다 말이죠.

 

소리 안지른다메? 쥐도 새도 모르게 일 하신다메?

맞잖아요 소리 질러도 안듣끼니까 소리 안지른 것 맞잖아요.
저들이 못 듣더라 말이죠.

아무리 노래 부르고 피리를 불고 애곡을 애도 춤추거나 슬퍼하거나

안 듣더라 말이죠. 그러니 조용한 것 맞지요.

 

자 이렇게 이방인을 구원하시고자 참고 참고 참아서

상한갈대와 꺼져가는 등불인 자칭 하나님의 선민을 한꺼번에 처리하겠다는 겁니다.

 

알곡과 가라지를 그냥 추수때까지 그대로 둔다는 겁니다.

이방인을 다 채울 때 까지 말입니다.

가라지 뽑겠다고 설치다가 알곡까지 다치게 될테니

가라지 라는 고름이 익을때까지 유예시키는 겁니다.

 

이방인 때문에 잠시 보류하신다는 겁니다.

이것이 새 일이라는 겁니다. 성령의 일 말입니다.

 

상한갈대 꺼져가는 등불은 헌술 이기 때문에

새술에 담을 수 없다는 겁니다.

 

그러니 상한갈대와 꺼져가는 등불은 지옥갈 자들이다는 겁니다.

안식일을 어겼다고 정죄하는 자들

안식일날 병고친다고 정죄하는 자들

 

곧 안식일 지키는 자들이 바로 상한갈대요 꺼져가는 등불이다는 겁니다.

거짓선지자들인 거죠. 삯꾼들.

심판을 벌써 즉결심판해도 상관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방인 곧 안식일을 어겨가시면서 까지 예수님이 고치시고자 하시는

긍휼을 베푸시고자 하시는 자들인 이방인을 그 빈자리에 채우고자

잠시 심판을 늦추신다는 것이지

그들 상한갈대를 꺽지 않겠다는 것이 아니고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않겠다는 것이 아니다는 겁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미 새이스라엘의 완성을 봐버렸습니다.

그렇기에 눈에 보이는 이스라엘은 상한갈대요 꺼져가는 등불이기에

빨리 해체시키고자 심판하실 뿐이지

그들이 새이스라엘이 될리는 없다 말이죠.

단지 이방인 때문에 보류할 뿐이다는 겁니다.

 

결국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눈에 보이는 교회

눈에 보이는 사람 등등에

기대하면 안된다는 겁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새이스라엘은 이미 벌써 완성 되었기 때문에

오히려 빨리 빨리 그런 상한갈대와 꺼져가는 등불인

의문의 것들에 빨리 빨리 실망하고 기대를 가지지 않도록 하시는 것이

성령의 일이다는 겁니다.

그러니 교회 개혁이라는 둥 그딴거 바라지 마세요.

바라면 바랄수록 기대치가 크면 클수록 실망하게 되고

자살하게 된다 말이죠. 김 모모 목사처럼 말입니다.

눈에 보이는 교회 백날 해 본들 의문의 반복일 뿐입니다.

 

인애와 자비는 처음부터 없었습니다.

 

자 그럼 새이스라엘은 이방인일까요?

아니면 이방인을 새이스라엘로 개종시키듯이 한 것일까요?

이방인 자체가 새이스라엘 일까요?

 

이것은 곧 기존의 이스라엘을 새이스라엘로 만들어야 할까요?

아니면 기존의 이스라엘이 이방인이 되어야 한다는 말일까요?

 

과연 기존의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원수인 이방인이 될려고 할까? 말이죠

그런데 다윗은 졸지에 이스라엘로부터 하나님의 원수가 되어버리는 겁니다.

마치 예수님이 유대인으로부터 하나님의 원수로써

십자가 형에 못 박히듯이 말이죠.

그러니 십자가를 통해서만 새이스라엘이 되는데

이 말은 곧 이방인이 되는 겁니다.

고아 과부 나그네

자력으로 될 수 없는데

찬양자가 누구다 기업 무를 자가 누구다

지존자가 누구다

전능자가 누구다 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졸지에 이방인, 곧 나그네로 새롭게 만들어져야만 하는 이방인 인겁니다.

 

이방인 중에 이방인

과부 중에 한 과부에게만

문둥병자 중에 한 문둥병자에게만 나타난 보내심을 받았다 말이죠.

 

 

(4:24, 개역) 또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가 고향에서 환영을 받는 자가 없느니라

(4:25, 개역)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엘리야 시대에 하늘이 세 해 여섯 달을 닫히어 온 땅에 큰 흉년이 들었을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과부가 있었으되

(4:26, 개역) 엘리야가 그 중 한 사람에게도 보내심을 받지 않고 오직 시돈 땅에 있는 사렙다의 한 과부에게 뿐이었으며

(4:27, 개역) 또 선지자 엘리사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문둥이가 있었으되 그 중에 한 사람도 깨끗함을 얻지 못하고 오직 수리아 사람 나아만뿐이니라

(4:28, 개역) 회당에 있는 자들이 이것을 듣고 다 분이 가득하여

(4:29, 개역) 일어나 동네 밖으로 쫓아내어 그 동네가 건설된 산 낭떠러지까지 끌고 가서 밀쳐 내리치고자 하되

(4:30, 개역) 예수께서 저희 가운데로 지나서 가시니라

 

 

안식일날 제사장만 먹을 수 있는 진설병을 다윗에게 줬다고

제사장을 죽여버리는 사울왕 같은 그 상한갈대 그 꺼져가는 등불

반드시 꺽고 반드시 꺼버리시는 심판주이시다는 겁니다.

 

상한갈대를 안 꺾어버리면 모호한 것을 의문의 것을 계속 반복하는 꼴입니다.

의문의 제사를 반복해서 뭐하게요?

분명히 번제와 제사를 싫어하신다 라고 하셨잖아요

이 심판을 기뻐해야 합니다.

무화과 나무가 때가 되지 않았는데 열매를 내라 라고 명해도

내지 못했을 때 말라 죽게 되었는데

이것을 보고 기뻐해야 하는 이유는

드디어 종말 곧 의문의 것을 마치는

알파와 오메가이신 처음과 나중되신 분이

모든 의문의 것을 폐하고자 또렷한 명료한 분이 왔기 때문에

아니 기뻐할 수 없는 겁니다.

무화과 나무와 자신을 동일시 여긴 베드로가 겁을 먹고 자꾸 물은 이유가

또렷함을 아직 모르니까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성령을 받기 전까지는

겁을 먹을 수 밖에 없다 말이죠.

상한갈대와 꺼져가는 등불을 자기와 동일시 여기니까

거꾸로 기도하게 되는데

성령을 받게 되면

오히려 그 심판주가 왔다는 것에서 아니 기쁠수가 없는 겁니다.

상한갈대를 꺽어버리시고

꺼져가는 등불을 꺼버리시니까 말이죠.

자꾸 의문의 것을 살리고 살리고 살려본들 소용없습니다.

어차피 또 의문의 것을 반복할테니 말입니다.

그렇다면 또렷하고 명료한 것이 왔으면

이제 의문의 것은 폐하도록 하신다 말이죠.

 

보라 내가 새 일을 이루려 함이라 라고 하시잖아요,

 

(42:9, 개역) 보라 전에 예언한 일이 이미 이루었느니라 이제 내가 새 일을 고하노라 그 일이 시작되기 전이라도 너희에게 이르노라

 

바로 죽은 자 곧 일곱교회를 다시 살리는 새 일 말입니다.

이방인 말입니다.

십자가로 십자가에 달려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신 일 말입니다.

 

인간이 가진 무기는 딱 하나 뿐입니다.

마귀가 가진 무기 말입니다.

곧 살인입니다.

총을 만들고 기술을 배우고 공부를 하고 모조리 다 이 무기 갖추기 위함입니다.

내가 살기 위해서는 남을 죽여야 하는 것 말입니다.

 

그런데 그 살인이 살인을 아무리 해도 소용이 없는 무기가 바로

주님 쪽에서의 부활입니다. 다시 살리심입니다.

살인이 무용지물이 된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번제와 제사가 무용지물이 된 겁니다. 원치 않으심입니다.

안식일 지키기를 원치 않는다 말이죠.

 

인애와 자비만이 이 살인이라는 무기를 무용지물로 만드는 겁니다.

곧 십자가의 용서 말입니다.

이것만 원하시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 십자가 사건이 예수님으로 인해 끝나버리는게 아니라

일곱교회에 늘 매일 매일 터트리시는 겁니다.

 

오히려 더 크게 확대 되는 거지요.

 

(10:17, 개역) 이스라엘의 빛은 불이요 그 거룩한 자는 불꽃이라 하루 사이에 그의 형극과 질려가 소멸되며

 

이것이 인애와 자비인 사랑입니다.

사랑은 죽음 보다 강하기 때문에

죽음이라는 것을 시기 하고 질투하기 때문에

부정의 부정이기 때문에

 

살인이 안 벌어지는게 아니라

매일 매일 살인사건이 벌어지도록 하시는 것이 십자가 사건이다는 겁니다.

 

그래야 살인도 폐하고

죽음도 폐하시는

부활이라는 성령의 일을

곧 새 일을 보게 하신다 말이죠.

 

찌른 자도 볼 것이다 말이죠.

 

우리는 건방지게 찌른 자에 속했는데

감히 감히 찌른 자도 보게 되는

죽음을 폐하시는 현장

죽음도 폐하시는 그 현장을 체험하도록 부활로 초대되는 겁니다.

부활 곧 어떤 죽었다가 다시 환생하는 현상이 아니라

인물

내가 곧 부활이다 라고 선언한 그 인물과의 만남이지

내가 다시 살아나는 나의 몸을 죽음을 통과케 해서 다시 수명연장하는 불로장생의 의미가 아니다는 겁니다.

거기에는 새 몸 개념이 없잖아요.

그리스도의 몸이 없잖아요.

머리 되신 신랑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내된 신부인 교회를 위해 자기 목숨을 버리시면서 까지 건지셨듯이

그런 섬김의 의미가 없는 것은 역시나 의문의 반복일 뿐입니다.

폐할 것이다 말이죠.

또렷한 것만 세우는 것이 새 일이다 말이죠.

 

부활교리를 믿는 나의 몸 환생을 믿는 그런 부활이 아니다 말이죠.

 

그렇기 때문에

신부된 일곱교회는 이 신랑되신 예수님이 자기 목숨을 버리시면서까지

끝까지 섬기셨듯이

머리되신 예수님에게만 복종하는 겁니다.

복종이라고 하니까 기분 나쁜 종다루듯한 노예의 의미로 들리시나요?

그럴수 없지요. 사랑하라는 뜻입니다.

? 내 죄를 대신해서 자기 목숨을 내어준 분은 이 분 뿐이니까 말이죠.

 

안식일 지키는 자 속에서는 우리가 사랑할 자는 없습니다.

사랑하지 마세요 의문의 반복입니다.

오로지 사랑할 자는 내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분만이 사랑할 분입니다.

그의 말만 들으시면 됩니다.

 

바로 이런 관계 때문에

사랑의 관계

피로 맺어진 관계 때문에

마귀들이 가만히 있겠냐 말이죠.

하나님의 원수로 몰아서 원수 갚겠다고 설쳐대는데 있어서

우리 신부된 일곱교회는 예수님의 환란 속에 들어가게 되는 겁니다.

기뻐하세요 흐릿하고 모호한 것들에서 벗어나게 해 주니까 말이죠.

 

예수님이 머리되신 예수님이

신랑되신 예수님이 집어넣으신 겁니다.

사랑으로 말입니다.

이렇게 하신 주님께 복종하라고 말입니다.
의문의 번제와 제사의 반복 세계에서 탈출하여
명료하고 또렷한 밝히 보이는 십자가의 용서의 세계로 집어넣으시는 주님의 사랑에 복종하라 라는 겁니다,

 

이것이 일관성 있게 주님께서 약속대로만 진행하시는 또렷하고 명료한

주의 행사입니다.

 

아침에 주의 인자하심을 나타내시며

밤마다 주의 성실하심을 베푸시는

이 주의 행사를 찬양하시면서 주의 환란을 기쁘게 누리시면 됩니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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